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지배1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중심으로)

2014. 10. 14. 00:26들꽃다회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지배1 (백제부흥군의 내분을 중심으로)  영원한 백제 

2012/06/05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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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백제지역 지배 1 


                                                       출 처: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 제6권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중 발췌



   논지 전개의 초점은 백제지역에 존재했던 사람들을 신라가 어떻게 자기역량으로 만들었고, 그 땅을 어떠한 방법으로 이용했는지에 맞추어졌다. 필자는 다음과 같은 국면과 사건을 통해 이 글을 구성하였다. 첫번째는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무너진 후 3년간에 걸친 백제인들의 저항과 그 자체의 내분, 두 번째는 신라가 백제인들의 저항을 누르면서 어떻게 대당전쟁에 그들을 병력으로 동원했는지의 문제, 세 번째 신라의 백제지역에 정착한 고구려인들의 반란진압, (네 번째 신라의 진골귀족들이 백제지역을 어떻게 분할하여 차지했고 이것이 장보고의 청해진설치와 어떠한 관련이 있는지) 살펴볼 예정이다.
 
 
1. 백제부흥군의 내분과 웅진도독부
                                                                                      (☞ 백제 부흥군의 내분에 대한 상세한 비교-분석 제시)

   백제를 멸망시킨 뒤 당의 장군 유인원과 신라의 장군 김인태가 각기 군대를 통솔하여 사비성을 지켰고, 왕문도가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 하지만 나당여합군의 점령지역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백제부흥군은 사비성을 포위하고 당과 신라의 주둔군을 괴롭혔다. 백제부흥군은 전국적으로 거병하여 나당연합군에 대항했으며, 백제의 200여 성들이 여기에 호응했다. 나당연합군은 백제의 수도권 이외에 다른 지역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있
었다.
 
   백제인들의 저항은 일본의 전폭적인 원조에 힘입은 바 크다. 661년 8월 일본은 前軍의 장군 부연(大化下阿曇比邏夫連)과 後軍의 장군 부신(大化阿倍引田比邏夫臣) 등을 필두로 하는 수송선단을 파견하고, 동년 9월에 扶餘豊에게 5천의 軍兵을 주어 백제부흥군을 원조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풍이 백제에 들어가자 福信은 찾아가 배알하고 국정을 남김없이 이양하였다고 한다.(일본서기 권27 天智天皇 卽位前紀 齊明天皇七年(661) 8월·9월조) 바야흐로 왕자 부여풍은 백제부흥군을 조직화시키는 구심점이 되었다.

    일본의 원조는 상당했다. 662년 1월에 백제좌평 복신에게 화살 10만개, 실 500斤, 솜 1,000斤, 포 1,000단, 무두질한 가죽(韋) 1,000장, 종자벼3,000곡을 보냈다.(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원년(662) 정월조)  이듬해 일본은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 2만 7천을 신라에 파견한다.(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2년 3월조)『일본서기』권27 천지천황 2년(663) 3월조를 보면 “前軍의 장군 上毛野君稚子·間人連大蓋, 中軍의 장군 臣勢神前臣譯語·三輪君根麻呂, 後軍의 장군 阿倍引田臣比邏夫·大宅臣鎌柄을 보내어 2만 7천명을 이끌고 신라를 치게 했다.”라고 한다. 일본함대가 백제에 들어오자 당은 증원병력을 한반도에 재차 투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본의 함대가 백제에 도착하기 직전에 부흥군 수뇌부의 내분이 있었다. 백제부흥을 주도하던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죽였다. 나아가 복신은 백제의 왕자 부여풍을 암살하려고 했다. 하지만 부여풍이 선제를 가해 복신을 살해했다. 내분은 백제부흥군의 힘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복신과 부여풍의 갈등이 결국 백제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 백제부흥군은 복신을 중심으로 결집된 집단이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도 복신에 호응하여 군을 일으켰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진현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도침도 복신과 합류했다.65) 여러 부흥군이 복신에게 호응하면서그는 부흥군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다음의 기록을 보자.

(9월에)…복신 등이 드디어 같은 나라 사람들을 비둘기처럼 모아 함께 왕성을 보위하니 나라사람들이 높여서 이르기를 “좌평 복신, 좌평 여자진”이라 하였다. 오직 복신만이 신무한 권세를 발휘하여 이미 망한 나라를 일으켰다(일본서기 권26 제명천황 6년(661) 9월조).

   복신은 백제부흥군의 움직임을 하나의 전략적 차원에서 묶어낼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는 나아가 부흥군 내부의 세력가인 도침을 죽여 그 휘하의 병력마저 장악하였다. 하지만 복신은 부여풍에 의해 제거되었다. 백제부흥군의 내분의 원인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보자.

   부흥군 지도부 안의 세 거두 도침·복신·부여풍 가운데 분열의 싹은 도침의 기세 등등한 태도에서 일단 찾을 수 있다는 견해가 있다. 이도학(한국전통문화학교의 문화유적학과 교수)은 663년 3월에 도침이 당나라 장군 유인궤에게 보낸 서한이나 유인궤가 보낸 사신에 대한 교만한 태도는 부흥군의 강성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동시에 도침의 개인적인 무력기반이 만만치 않았음을 보여준다고 한다. 또한 그는 여러 문헌에서 도침이 복신보다 앞서 기록되었음은 그의 세력이 복신을 능가하였던 증좌로 볼 수 있으며, 도침의 방자한 태도가 일단 복신을 자극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그는 보다 직접적인 원인을 복신이 김흠순의 신라 군대를 고부에서 격파한 데서 찾았다. 복신이 고부지역을 점령하면서 백제남방의 많은 성들이 일시에 모두 반란을 일으켜 복신에게 속하였을 정도로 그의 세력은 현저히 확대되었고, 기세가 오른 복신은 부흥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했을 것이며, 이러한 맥락에서 도침의 피살을 상정했다. 복신은 도침을 살해한 후 그 예하의 병력까지 흡수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흥군의 실질적인 최고 강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도학은 복신의 도침 피살을 백제부흥군의 주도권에 대한 다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았다. 이는 노중국(계명대 사학과 교수)에 의해 다시 재현되었다. 도침의 독단적인 행동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켜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촉발되었고, 그 결과 복신은 동지인 도침을 살해했다는 것이다. 기록에 복신과 도침의 기재순서를 보면 모두 도침이 먼저 기록되어 있어 도침의 위세가 복신보다 컸고, 도침의 독단적인 행동은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을 심화시켰다고 한다. 도침이 웅진강구 전투에서 패배하고 복신이 두량윤성(고부)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양자의 입장이 역전되었다. 하지만 도침은 여전히 부흥백제국의 최고 사령관으로 행세하였다고 한다. 도침은 당나라 장군 유인원이 보낸 사신을 외관에 두고 상대도 하지 않았고, 또 유인원이 보낸 편지에 대한 답서도 보내지 않는 행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노중국은 복신의 피살 시기를 661년 9월 이후에서 662년 7월 이전의 어느 시기로 보았다.

   이도학은 복신이 도침을 살해하는 동시에 그 예하의 병력까지 흡수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흥군의 실질적인 최고 강자가 되었지만, 663년에 접어들어 신라군의 공세로 부흥군의 세력은 현저히 약화되어 갔다고 한다. 그 해 2월에 신라군은 서부경남 방면으로부터 대규모 공세를 시도하여 거창에서 지리산의 중턱을 지나 남원을 함락시키고, 전남 승주·영광·함평, 전북의 고창, 충남의 은진 등을 차지하여, 부흥군은 동남부지역에서 신라의 총공격을 받아 포위되는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부여풍의 복신 피살을 신라의 공격으로 부흥운동이 퇴축되는 국면에서 피성 천도의 실패가 겹치면서 내홍의 싹이 틔워졌다고 보았다. 상황이 호전이 아니라 쇠락 국면에서 분열이 폭발하게 마련이라고 한다.

   나아가 이도학은 풍왕이라고 할지라도 복신에 의해 옹립된 형편이었으며, 재지적 기반이 없으므로 다만 뒷전에 머물러 제사를 주관할 뿐 명목적 통수권자로 상징적인 역할만 했다고 한다. 도침이 복신에게 피살되었던 것을 알고 있던 풍왕은 상당한 피해의식과 위기감을 지녔을 것이며, 더구나 부흥운동의 공헌도와 대중적인 인기 등을 토대로 首班에 대한 의지를 굳혀 나가고 있던 복신은 의자왕의 사촌이었다. 의자왕의 아들이지만 적자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은 풍왕은 여러모로 보아 약자였으며, 이로 인한 갈등이 결국 양자간의 운명과 부흥운동이 실패로 돌아가게 된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것이다.

   복신은 663년 6월 부여풍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기록을 보면 양자는 이전에 서로를 죽이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20년) 복신의 처지가 곤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그해 3월에 일본의 원군 2만 7천이 한반도로 향했다. 향후 일본열도 내에서 정치·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부여풍의 권세가 강화될 것이 확실해졌다. 앞서 복신은 일본천황으로부터 작록을 받은 바 있다.

(661) 9월에 황태자가 장진궁에 가서 백제 왕자 풍장(부여풍)에게 직관을 주고 또 다신장수의 누이를 처로 삼게하였다. 이에 대산하 협정런빈랑과 소산하 진조전래진을 보내 군사 5천여기를 거느리고 본국으로 호위해 보내게 하였다. 이에 풍장이 입국할 때 복신이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조정을 받들어 모두 풍장에게 맡겼다. (일본서기 권27 천지천황 칭제전기 9월)

661년 9월 복신은 병력 5천의 호위를 받는 일본 장군 앞에서 부여풍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조정의 전권을 바치는 신하의 의례를 행한 바 있다. 일본천황이 임명한 백제왕에게 복신은 충성을 맹세한 것이나 다름 아니다. 부여풍의 백제왕 즉위를 상세히 보여주는『일본서기』권27 천지천황 원년 5월조의 기록을 보자.

(662) 5월에 대장군 대금중 아담비라부련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풍장 등을 백제국으로 호송한 후 칙서를 선포하여 풍장이 왕위를 잇게 하였다. 또 금책을 복신에게 주고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작록을 포상으로 주었다. 그때 풍장과 복신이 이마가 땅에 닿도록 절하며 칙서를 받자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다.
 
   부여풍을 호위하는 일본의 함대가 170척의 규모에 달했다. 일본은 부여풍을 호송한 후 천황의 칙서를 선포했다. 복신도 천황으로부터 작록을 받았다. 그 때 복신과 부여풍은 이마가 닿도록 천황을 향해 절을 했다. 이를 본 백제사람들이 모욕감이 들었는지는 몰라도 눈물을 흘렸다. 663년 6월에 일본의 장군 上毛野君稚子등이 신라의 沙龜岐奴江에 있는 2성을 함락시켰다. 일본을 출발한 함대가 주류성에 가까워지면서 복신의 심기는 더욱 불편해졌을 수도 있다. 사실 일본군도 당군과 다를 것이 없었다. 그들이 승리한다면 점령군으로 돌변할 것이고, 부여풍이 괴뢰왕이 된다. 본래 국제정치란 도와주는 것이 없지 않는가. 복신은 자리에 누었고, 부여풍이 찾아왔다.
 
   복신의 피살은 부여풍이 요청한 일본의 대규모 원군이 도착하는 시점에서 일어났다. 『삼국사기』권28 의자왕조를 보자.
 
복신은 병을 핑계로 하여 굴속 방에 누어 (부여)풍이 문병 오는 것을 기다려 잡아 죽이려고 하였다. 풍이 이것을 알고 친하고 믿을만한 자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엄습하여 죽이고 사신을 고구려와 왜국에 보내 군사를 청하여 당나라 군사를 막았다.

   동굴 그곳은 부여풍의 입장에서 복신의 진영 중심이었다. 그럼에도 부여풍은 자신의 사람들을 이끌고 가서 복신을 엄습했고, 그를 포박할 수 있었다.『 일본서기』권27 천지천황 원년 5월조를 보면 “백제의 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의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은가 의심하여 손바닥에 구멍을 뚫고 가죽끈으로 복신을 결박했다.”라고 하고 있다. 그것이 가능한 것은 백제부흥군 내부의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부흥군이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수세에 놓이면서 복신에 대한 충성심도 엷어져 갔고, 부여풍을 옹립한 일본군이 오면서 복신의 진영에서 배신자가 속출한 느낌이 강하다. 복신이 피살된 663년 6월 일본군이 한반도에 도착하여 신라의 성을 공격한 시점에 주도권이 일본의 손에 넘어갔다.
 
(663) 가을 8월 壬午朔甲午(13일)에 신라는 백제왕(부여풍)이 스스로 良將을 참하였다는 것을 알고 즉시 백제에 침입하여 먼저 州柔를 함락시키려고 하였다. 백제왕은 적의 계략을 察知하고 장군들에게, “大日本國의 구원군 장군 盧原君臣이 1만여의 군사를 이끌고 오라. 원컨대 장군들은 미리 계략을 세워 두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白村까지 가서 그곳에서 구원군을 영접할 것이다.”고 말했다[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663) 8월 조].

   부여풍은 백제부흥을 일본의 군사력에 의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복신의 죽음은 일본의 입장에서도 “양장의 죽음”이라 표현되고 있다. 복신의 제거는 백제부흥군의 총체적인 부도로 이어질 것이라는 것은 신라도 당도 잘 알고 있었다. 나당연합군이 부흥군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려했다.

(663년 8월) 戊戌(17일)에 적(신라)의 장군은 주유에 이르러 王城을 포위하였다. 1만 당군의 軍將은 軍船170척을 이끌고 백촌강에 戰列을 구축하였다.[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663)8월조]

   주류성을 포위했고, 1만 당군의 수군 전함 170척이 백촌강에 전열을 구축하였다. 일본함대는 이를 막아 차단하려고 했다.

(663년 8월) 戊申(27일)에 일본의 군선 중 먼저 도착한 것과 大唐의 군선이 會戰하였다. 일본은 패퇴하고 대당은 전열을 고수하였다.[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663) 8월조]

   백촌강에서 일본의 선발함대와 당 함대 사이의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함대는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당 함대를 유인하여 그 대열을 흩어놓아 각개격파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일본의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일본군과 당군의 회전이 벌어졌고 일본군이 패했다. 당 함대는 패퇴하는 일본함대를 추격하지 않았고 그 대열을 그대로 유지했다. 다음날 일본 함대의 본대가 도착하면서 당과 일본 사이의 대해전이 벌어졌다. 일본함대가 대패했다.

(663년 8월) 己酉(28일)에 일본의 장군들과 백제의 왕은 기상을 잘 관측하지 않고, “우리 편이 앞을 다투어 공격하여 가면 상대는 스스로 퇴각할 것이다.”하고 협의하고 일본의 중군 병졸을 이끌고 船隊를 잘 정비하지도 않은 채 진격하여, 이미 진을 굳게 한 대당의 군에 공세를 가하였다. 그랬더니 대당은 좌우에서 배를 내어 이를 사격하고 포위 공격하였다. 잠시 사이에 일본군은 패하고 많은 자가 물에 빠져 익사하고 뱃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이를 갈며 성을 내어 부르짖고 수십 인을 죽였으나 드디어 전사하고 말았다. 이때 백제의 왕 璋은 몇 명과 함께 배에 올라 고려로 도주하였다.[日本書紀 권27 천지천황 2년(663) 8월조].

   일본함대를 이끌고 온 장군들과 부여풍이 기상을 잘 관측하지 않고 당함대에 정면공격을 했다고 한다. 위의 기록은 일본 함대가 대패한 결과를 놓고 그 원인을 들추어낸 것이라 여겨진다. 사건이 종료된 이후의 결과가 기록으로 남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지만 어떻든 그것을 염두에 둘 필요는 있다. 일본군이 공격할 당시 기상조건은 그렇게 불리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바뀌었을 수도 있다. 한편 당이 그 함대 전열 가운데 허를 두고 일본함대를 유인했을 수도 있다. 다만 일본 함대가 당함대를 향해 정면 돌격할 당시의 시점이 바다에서 강의 방향으로 바닷물이 밀려드는 시점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정면으로 밀려오는 밀물 때문에 강쪽의 당 함대가 대열을 굳게 한다고 해도 흩어질 수 있다. 하지만 일본함대는 당군에게 포위당했고, 뱃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같은 내용을 전하고 있는『삼국사기』를 보자.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지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것을 쳐 이기면 (백제의) 여러 성들은 스스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仁師와 仁願및 신라왕 김법민(문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갔다. (당의 장군) 仁軌및 별장 杜爽과 부여륭은 수군과 군량선을 이끌고 熊津江에서 白江으로 가서 육군과 함께 회합하여 주류성에 갔다. 도중에 백강의 어귀에서 왜인을 만나 네 번 싸워 모두 이기고 그 배(일본의 함대) 400척을 불태우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을 붉게 하고 바다의 물도 빨개졌다.(삼국사기 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4번에 걸친 해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의 함대에 불이 붙어 하늘과 바다가 붉게 물들었다. 앞서『일본서기』에서는 백제왕 부여풍과 일본의 장군들이 기상을 고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해전 당시 일본함대는 역풍을 맞았을 가
능성이 높다. 일본의 함대를 전멸시킨 당군은 주류성 부근에 상륙하여 신라군과 함께 주류성을 포위했다. 주류성은 얼마가지 않아 함락되었고, 백제부흥군은 거의 대부분 항복했다.

   내분을 감지한 신라가 663년 8월에 백제인들의 본거지인 주류성을 공격하는 상황에서 일본에서 파병된 원군은 부여풍에게 마지막 희망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의도대로 되지 않았다. 그해 8월 17일 신라군이 주류성을 포위한 가운데 175척의 전함에 승선한 당군 1만이 백촌강에 전열을 갖추고 대기하고 있었다. 10일 후 당군의 함대는 막 도착한 일본함대의 선발대와 회전을 벌려 격퇴했다. 당함대의 전열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다음 날 다시 양군의 함대가 격돌했다. 대열이 정비되지 않은 채 급하게 진격한 일본함대는 당군에게 포위되어 좌우에서 화살세례를 받았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일본함대는 뱃머리를 돌릴 수도 없었다. 많은 전사자가 나왔다. 여기에 기상이 불리하게 작용하여 400척의 일본 함대는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거의 동시에 백제부흥군의 중심 거점 주류성이 신라군에게 함락되었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망명했다.

   주류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백제인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임존성에서 遲受信휘하의 백제부흥군이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당은 임존성을 공격하는데 투항해온 백제인 흑치상지와 사타상여 등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 흑지상지는 임존성에서 백제부흥군을 지휘하여 당에 저항하다가 투항한 자이다. 그러니 임존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당군은 그들을 선봉에 세웠다. 663년 11월 임존성은 공격을 견디지 못하고 함락되었다.(구당서 권84 유인궤전)
 
   이도학은 흑치상지의 투항 문제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당시의 상황에서 파생된 것이므로 그리 간단하게 이야기 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한다. 그에 의하면 흑치상지는 복신이 내분으로 피살되는 상황에 직면하자 위기의식을 느꼈으리라고 충분히 짐작되며, 부여융의 간곡하고 집요한 투항권고에 마음이 흔들렸으리라고 판단된다. 자체 내분과 일본 원군의 패퇴는 백제부흥군의 지도자들이 당군에 투항하여 그들의 동포들을 공격하는데 앞장서게 하는 상황에 이르게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든다. 당에 저항했던 백제 상층 가운데 일부가 협조적인 자세로 돌아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외부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백제인들은 적국 가운데 하나인 당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단지 당이 신라보다 공간적인 거리가 멀기 때문이었다. 당의 편에 서서라도 자국을 지키겠다는 백제인들이 생겨난 것은 백제의 영토와 그 인력을 차지하려고 했던 신라에게 악재가 되었다. 백제인들은 당의 통치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仁師 등이 군대의 위세를 떨치며 돌아가니 (당고종이) 인궤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거느리고 머물러 지키게 하였다. 전쟁의 결과로 즐비하던 가옥은 황폐하고 썩지 않은 시체는 풀 더미와 같았다. 인궤가 비로소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청의 장을 임명하고, 도로를 개통하고 다리를 놓고 堤堰을 보수하고 저수지를 복구하고, 농사와 누에치기를 권장하고, 가난한 자를 진휼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고, 당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正朔과 廟諱를 반포하니 백성이 모두 기뻐하고 각지 제자리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나라 고종이부여융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옛 원한을 풀고 유민을 불러오게 하였다
『( 삼국사기』권28 백제본기 6 의자왕 조).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어 왔다. 당은 상징적으로 과거의 백제를 회복시켜주었다. 당의 장군 유인궤는 전쟁으로 파괴된 도로와 저수지 등 사회시설을 복구하였을 뿐만 아니라 촌락을 정리하고 청의 장도 임명했다. 당의 관리가 그곳을 실질적으로 통치하였다고 볼 수 없다. 백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이는 이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당의 구백제지역에 대한 통치는 665년 이후에는 원활하지 못했다. 집정자 연개소문이 죽고 고구려가 내분에 들어간 상황에서 당은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구해야 했다. 유인궤 등도 백제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구당서』권199 백제전을 보면 “유인원과 유인궤가 돌아가자 부여융이 신라를 두려워하여 당의 수도로 돌아갔다(仁願·仁軌等旣還, 隆懼新羅, 尋歸京師).”라고 한다. 고구려를 멸망시킬 절호의 기회를 맞이한 당군이 백제지역에 대규모로 주둔할 수 없다. 상대적으로 그 곳에 대한 신라의 영향력이 강해진다.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당은 백제를 잠식하는 신라를 크게 질책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신라에 강한 조치를 취한 것 같다. 『 삼국사기』권7 문무왕 11년조를 보자. (咸亨元年~670) 7월에 이르러 당나라 조정에 사신으로 갔던 김흠순 등이 땅의 경계를 그린 것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지도를 펴서 살펴보니 백제의 옛 땅을 모두 다 돌려주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은 백제의 땅을 신라에 양도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신라의 입장에서 그것은 소위 계약위반 같은 것이었다. 과거 당태종은 백제 땅을 신라에게 양도해준다고 약속한 바 있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1년 7월조/ “ 내가(당태종) 두 나라(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백제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
 
670년 7월에 흠순은 신라에 돌아왔지만 함께 入唐한 良圖는 당의 감옥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문무왕) 10년 봄 정월에 (당)고종이 흠순에게 귀국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여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이는 문무)왕이 마음대로 백제의 토지와 백성을 빼앗아 차지하였으므로 황제가 책망하고 노하여 거듭 사신을 억류시켰던 것이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0년)

665년 이후 신라는 백제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여 들어갔다. 그것은 주로 백제의 핵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663년 신라는 지금의 서부경남의 방면에서 대규모 공세를 시도했다. 그해 2월 경남 거창의 거열성과 전북 남원의 거물성, 그리고 전남 승주의 사평성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동시기에 전남 영광·함평·고창 지역으로 비정되는 사반주 4개 현이 신라에 흡수되었다.

   하지만 흠순이 당에 도착해 있을 때 국제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669년 9월 토번의 군대가 북상하여 당의 서부지역을 위협했다.(자치통감 권 201 당기 17 총장 2년(669) 9월조) 그 이듬해 4월 토번은 타림분지를 완전히 장악했다.(자치통감 권201 당기 17 함형 원년(670) 4월조) 고구려에 주둔해 있던 설인귀가 장안으로 소환된 것도 이 때문이다. 당군이 고구려에서 철수하자 신라의 원조를 받은 고구려부흥군이 봉기했다.(자치통감 권201 당기 17 함형 원년(670) 4월조) 나당전쟁이 발발했다. 이제 당과 적대국이 된 신라는 백제의 인력과 자원을 차지하여 대당전쟁에 동원해야 했다.


 - 네이버 블로그 <백제문화제사랑 / 영원한 백제> 백제사랑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