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지배2 (나당전쟁과 신라의 지배)

2014. 10. 14. 00:29들꽃다회






       

백제의 멸망과 신라의 지배2 (나당전쟁과 신라의 지배)  영원한 백제 

2012/06/05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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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의 백제지역 지배 2 

                                                                              출 처: 百濟文化史大系硏究叢書 제6권 '백제의 멸망과 부흥운동' 중 발췌

2. 신라의 대당전쟁과 백제인 부대창설
672년 대당전쟁이 과열되는 과정에서 신라는 백제인을 군사력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백금서당이 그것이다.(신라의 중앙군단 구서당 내의 백제인으로 부대는 백금서당과 청금서당이다.) 백금서당은 신라 최초의 
비신라인으로 구성된 부대의 시원이 되었다. 구서당 즉 백금서당 창설취지에 대한 검토가 구서당의 창설취지를 알아내는데 단초를 열 수도 있다. 

구서당에 대한 기존의 견해를 정리해보자. 구서당에 대하여 쓰에마쓰(末松)는 “신라인의 異民族에 대한 관용태도에서 나온 동맹 연합정책”이라고 했고,(末松保和, 1954,` 新羅幢亭考a,『 新羅史の諸問題』, 東洋文庫/ 井上秀雄, 1974,` 新羅兵制考a,『 新羅史基礎硏究』, 東出版) 동시에 피정복민 지도층을 신라의 신분제도에 편입시킨 정책도 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았다.(末松保和, 1954,` 新羅六部考a,『 新羅史の諸問題』/ 村上四男, 1978,` 新羅外位と投降者への授位a,『 朝鮮古代史硏究 ) 그의 이러한 지적은 우리 학계의 정설이 된 느낌이 강하다.
 
김철준(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은 구서당을 통일후 이민족을 포섭하기 위한 포용 정책으로 보았으며,(金哲俊, 1978,` 統一新羅支配體制의 再整備a,『 한국사』) 변태섭(전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도 구서당이 민족융합이라는 커다란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했다.(邊太燮, 1995, 『韓國史要論』, 삼영사) 나아가 노중국은 고구려인이 구서당의 3개 부대를 차지하고 있는데 비해 백제인은 2개 부대 밖에 없다고 지적하고, 이것을 백제인에 대한 차별정책의 유력한 증거 중의 하나로 보았다.(盧重國, 1988,` 統一期新羅의 百濟故地支配a,『 韓國古代史硏究)
 
☞ 구서당(九誓幢)은 신라인 3개 부대(紫衿誓幢·綠衿誓幢·長槍幢)에 백제인 부대가 1개(白衿誓幢), 고구려인 1개(黃衿誓幢)와 말갈인 1개(黑衿誓幢), 보덕성민(報德城民-고구려인) 2개(碧衿誓幢·赤衿誓幢), 百濟殘民 1개(靑衿誓幢) 등이 순차적으로 증설되면서 완성된다. 신라의 최대 중앙군단 구서당은 9개 부대 중 6개가 백제인·고구려인·말갈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구서당을 이민족에 대한 관용정책으로 본 쓰에마쓰(末松)의 견해는 만성적인 전쟁을 경험한 신라인을 너무나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특히 노중국의 견해는 쓰에마쓰의 이민족 포용설이 구서당 완성의 취지가 이민족에게 무관직 수여를 위한 작업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오해의 소지를 남겼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다.
 
군부대란 절실한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필자의 기본 안목이다. 『삼국사기』권7 문무왕 12년(672) 8월 조를 보면 평양에 군영을 짓고 인근의 한시성과 마읍성을 함락시킨 당의 장군 고간이 남하하여 황해도 석문지역에서 신라의 주력을 격파했다. 신라는 초기의 승리의 기세를 타고 당군을 추격하다가 역습을 받고 대아찬 효선과 사찬 의문, 산세와 아찬 능선, 두선 일길찬 안나함, 양신 등이 전사하는 등 전멸하다시피 했다. 신라는 이 한번의 패배로 너무나 짧은 순간에 대규모의 병력을 잃었다. 672년 황해도 석문에서의 패배는 신라의 앞날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것이었다.

백제인 부대 백금서당은 나당전쟁이 한창이던 672년에 창설되었다. 『삼국사기』권7 문무왕 11년 조에 있는「답설인귀서」에 신라는 백제·고구려 양국을 평정하는 9년 동안 많은 인력이 소모되었음을 고백하고 있다. 하지만「답설인귀서」는 당조정에 신라의 입장을 변명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기사를 그대로 믿기 힘든 점도 있다. 그래도 진흥왕대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부터 지속해온 장기전으로 신라는 인적자원의 고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은 확실하다. 진평왕 25년(603) 이후부터 본격적인 麗濟의 양면공격을 받으면서 인적자원의 정선도가 하강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고, 통일전쟁은 그것을 심화시켰다.
 
나당전쟁기에 대규모 전사자를 낳은 672년의 패배는 그 위험수위를 넘기게 했던 것이다. 그 해에 백제인들을 신라의 정규군 백금서당으로 편성한 것은 신라의 심한 인력 고갈이라는 절박한 상황을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싶다. 신라는 비신라계인을 그 군사력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급박한 시기와 마주쳤던 것이다. 통일 후 신문왕대 완성된 신라중앙군단 구서당에 비신라계인들이 2/3를 차지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백금서당의 장군 이하 각 군관들의 조직구성에 대해서는『삼국사기』무관 조에 명기되어 있어 그 구체적인 조직 형태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백금서당에 대한 모든 기록이다. 따라서 문제 해결을 위해 먼저 백금서당에 관한 기록을 단순 나열식 일지라도 최대한 검토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 검토 상황은 백금서당을 구성한 백제인들의 출신에 관한 것이다. 청금서당의 구성원을 보면 백제잔민이라하여 백금서당의 구성원인 백제인과 차이가 보이며, 여기서 통일당시 신라가 인식했던 백제내부의 사람들의 차이를 간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권40 직관지 무관조를 보면 “백제인으로 부대를 삼았다(百濟人爲幢).”라고 하여 백금서당은 백제인으로 구성되었음을 명기하고 있다. 그런데 청금서당은 백제잔민을 조직하여 만들어낸 幢으로 기록 되어있다.
『삼국사기』는 분명 백제인과 백제잔민을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쓰에마쓰(末松)는 백제잔민을 660년 백제 사비성 함락 후 저항하다가 항복한 집단들이거나 문무왕 10년(670) 7월에 신라가 백제지역의 63성을 함락하고 내지(內地-신라)로 강제 이주시킨 백제인 집단(百濟殘衆)들로 보고 있다. 쓰에마쓰는 나아가 百濟殘賊이나 百濟殘衆이 바로 청금서당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쓰에마쓰가 청금서당의 구성원을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은 그 殘이란 字句를 근거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잔민이나 잔중이란 자구에만 주목하지 말고 다른 모든 가능성을 열고 생각해 보자. 신문왕 8년(687)에 창설된 청금서당의 구성원인 백제잔민은 과연 어떤 집단인가. 이 시기는 나당전쟁이 휴전상태로 들어 간지 11년이 경과한 시점이었다. 백제지역은 안정되어 있었으며, 구서당도 이미 8개 부대가 완성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청금서당이 조직되면 중앙군 구서당이 완성되는 시점이었다.

구서당 군단의 인적 구성을 보면 특히 흑금서당의 구성원인 말갈인은 삼국인 보다 문화적 차이가 컸다. 그들이 고구려인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지만 신라인 입장에서 보면 문화적으로 가장 이질적 집단임은 틀림없다. 고구려인들의 경우 3개의 부대를 구성했는데 황금서당은 고구려인,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은 고구려 유민집단인 보덕성민이다. 앞서 황금서당은 684년에 전북 익산에서 동포 보덕성민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이는 반란진압 과정에서 전사한 김영윤이 황금서당의 步騎幢主인 사실에서 확인된다.(삼국사기 권47 김영윤전) 진압의 대상이 누구든 명령에 복종하는 황금서당은 紀綱이 서 있는 군조직인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로써 황금서당과 보덕성민의 원한의 골은 뿌리 깊이 각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문왕 7년(687) 보덕성민을 구성원으로 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의 조직은 결과적으로 고구려인들 사이의 반목을 이용한 담합방지 구조가 되었을 것이다.

백제계로 구성된 백금서당과 청금서당의 경우 뚜렷한 기록이 없어 양 부대 사이의 반목이나 확실한 차별성은 알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백제 자체가 이중적 종족구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을 지적하고 싶다. 주지하다시피 백제는 북방으로부터 이동해온 부여족의 일파가 마한의 북단에 건설한 일종의 정복 국가적 성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외래 정복 집단과 토착집단간의 괴리가 심각했다. 이는 백제인과 마한인 사이에 언어와 무덤 양식이 뚜렷이 구분된다는 점에서도 알 수 있다. 사실 사비성 함락 이후 백제부흥운동에서 충정도지역의 백제인들에 비해서 그 남부 전라도지방은 저항이 약했다. 청금서당의 구성원을 백제인과 이질적인 문화를 공유한 신라에 저항도가 높지 않았던 전라도 지역주민으로 볼 수도 있다. 신라 심장부에 위치한 타 지역인 군대란 위험한 존재이며, 백제내의 문화적 차이를 감안한 배치구조란 백금서당과 청금서당이 담합을 방지 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추측에 불과하고 백제잔민을 전남 지역의 사람으로 볼 수 있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기존의 지적대로 백제잔적이나 백제잔중은 660년 9월 소정방이 백제왕 및 왕족과 신하들, 그리고 백제 백성들 1만 2천을 당으로 압송한 후 백제 땅에 남아 있던 백제인들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삼국사기』권5 태종 8년(661) 2월에 “백제잔적이 사비성을 공격해 왔다(百濟殘賊來攻沙城).”라고 하였고, 같은책 권6 문무왕 2년 8월에 “백제잔적이 내사지성에 모여 나쁜 짓을 하므로(百濟殘賊屯聚內斯只城作惡)”라고 했다. 또한 같은책 권6 문무왕 10년(670) 7월에“왕이 백제잔중이 반복할 것을 의심했다(王疑百濟殘衆反覆).”라고 하고 있다.
백제잔적이나 백제잔중이라고 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의미를 지닌 용례를 보면,『 삼국사기』권5 태종 7년(660) 9월 23일에 “백제여적이 사비로 들어갔다(百濟餘賊入沙).”라고 하여 이 기사는 동서 권5 태종 8년 2월과 대칭되며, 바로 이 시기의 사실을 전하고 있는『삼국사기』권7 문무왕 11년의 「답설인귀서」를 보면 “적신 복신이 서강에서 일어나 여신을 취합하고 모아(賊臣福信起於西江取集餘燼)”라고 하고 있다.
위의 사실을 취합해 보면 百濟殘賊이나 百濟殘衆은 660~670년 사이에 백제 땅에서 신라에 저항했던 사람들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백금서당의 백제인이란 백제 땅에 남아있지 않은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백금서당이 창설되는 672년의 상황을 보자. 동년 상반기에는 당의 대거 남침이 예견된 시점이었고, 그해 8월에 황해도에서 장창당을 비롯한 신라중앙군이 전멸하다시피 했다. 이보다 앞서『삼국사기』권6 문무왕 10년(670) 7월조의 기사를 보면 백제인을 신라로 이주시키는 기사가 보인다.
 
가을 7월에 왕이 백제잔중의 무리들이 배반할 것을 의심하여 대아찬 유돈을 웅진도독부에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으나 도독부는 이를 듣지 아니하므로 사마미의 군사를 보내어 우리를 정탐하게 하였다. 왕이 저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음모가 있음을 알고 사마미의 군사를 억류하여 보내지 않고 군사를 내어 백제를 쳤다. 품일·문충·중신·의관·천관 등이 63城을 쳐서 빼앗고, 그곳 사람들을 내지(內地-신라)로 옮겼다.
660년 이후 처음에는 백제부흥군의 발호와 일본의 군사적 개입으로 나중에는 당의 웅진도독부의 간섭 때문에 신라는 백제인들을 함부로 강제로 移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670년 이전의 당의 영향력은 지대해서 신라는 백제지역의 주민을 신라로 사민시키기 어려웠다. 그러나 670년 4월에 청해에 투입된 설인귀의 군대가 그해 7월에 토번군에 의해 전멸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당이 한반도에 거의 신경을 돌릴수 없게 되었고, 신라는 당의 비호 아래에 있는 백제지역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을 자유로이 감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63개 성의 백제잔중을 신라로 이거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로 가능했다.

필자는 670년 신라내지로 강제 이주시킨 충청도지역 63성의 백제잔중들이 672년 백금서당 창설 시 그 병력의 구성원이 되었다고 보고 싶다. 신라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백제지역에서 병력을 보충하는 것보다 이미 신라내부에 이주된 백제인들로 병력을 구성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기 때문이다.
 
구서당의 군관조직을 검토하면 백금서당의 경우 흑의장창말보당주(黑衣長槍末步幢主)의 결여를 예외로 한다면 구서당 여타의 부대와 거의 동일한 군관수를 가지고 있다. 이노우에는 구서당 군관조직표에 백금서당의 흑의장창말보당주가 결여된 것을 기록상 탈락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삼국사기』권40 직관지 무관 조에 흑의장창말보당주의 총 인원은 백금서당의 그것을 뺀 숫자이다. 따라서 이것을 기록상 탈락으로 보기 어려우며, 여기서 문제의 문제해결의 관건은 흑의장창말보당주의 성격파악에 있다.
흑의장창말보당주의 명칭을 자세히 보면 장창을 주무기로 사용한 것이 분명하고, ‘末步’라는 명칭은 그것이 보병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흑의장창말보당도 기병을 의도적으로 빼고 보병을 강화시킨 장창보병부대였다. 장창보병부대는 기병이 절대적으로 열세인 측에서 보유한 보병조직이다. 이는 중국의 한·당·송, 서양의 로마에서 확인되며, 또한 잉글랜드·스코틀랜드·플랑드르·스위스 보병에서도 볼 수 있다. 신라의 경우 황해도, 경기도 평야지대에 대규모로 출현한 당·말갈기병을 막아내기 위하여 장창보병을 조직했던 것이다.

흑의장창말보당주의 수는 大幢과 한산정이 각각 30명과 28명으로 가장 많고 구서당 중 녹금서당이 24명에 이르며, 나머지 六停, 구서당 9개 부대에도 20명 이상이 있다. 그렇다면 동시기(672)에 창설된 백금서당에 대기병 장창보병 흑의장창말보당이 없는 것은 이해되지 않는다. 이는 백금서당이 대기병 방어능력이 없었던 것을 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라는 왜 백금서당에 대기병 방어조직을 결여시키고 있는 것인가? 필자는 백금서당이 백제인을 그 구성원으로 했다는 데 주목하고 싶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진흥왕이 한강유역을 점령하면서부터 백제는 신라를 끊임없이 공격해 왔으며, 선덕여왕대 대야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켜 신라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도 거의 10년간 저항한 것을 보더라도 백제인의 신라에 대한 적개심은 대단했던 것이다. 신라로서는 백제인을 무장시켜 실전에 투입한다는 것은 모험이다. 백금서당의 장군이나 군관들이 대부분 신라인이었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백금서당의 구성원들에게 흑의장창말보당의 결여는 불안을 느끼게 했을 것이다.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은 적 기병의 급습에 대한 방어를 신라군에 의존했을 수도 있다. 신라군에 대한 구조적인 의존은 백제인들의 이탈을 방지하는 작용을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신문왕대 만들어진 황금서당·흑금서당·청금서당·벽금서당·청금서당에는 왜 흑의장창말보당이 결여되어 있지 않은가? 유독 백금서당만 그것이 결여되어 있단 말인가? 필자는 나당전쟁 기간에 비신라인으로 구성된 신라 정규군은 백금서당뿐이었으며, 그 자체가 시험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3. 백제지역의 반란진압(고구려 유민)과 행정조직 확립
당이 한반도에서 물러난 후 신라는 구백제지역에 여러 군부대를 배치하였다. 전주지역(완산주)에 배치된 신라군의 규모가 가장 크다. 웅주와 무주에는 각각 10정과 만보당이 배치되어 있었다. 여기에 비해 완산주에는 육
정군단에 소속된 군조직의 하나인 완산정, 기병부대 오주서의 하나인 완산주서가 배치되어 있었다. 물론 10정의 하나인 거사물정도 완산주에 속한 임실에 주둔했다. 신라는 군사상의 중심을 웅주와 무주의 중간인 전주에
두고 양지역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 같다.

구백제지역은 신라의 군사적 점령지역이였지만 북쪽국경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은 병력이 배치되어있었다. 한산주나 우수주, 그리고 하서주에 는 보병중심의 사단인 육정의 한산정·우수정·하서정과 기병부대인 오주
서의 한산주서·우수주서·하서주서가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계당 2개부대, 이궁의 2개부대, 삼변수의 3개부대, 신삼천당 등도 모두 이 지역에 배치되어 있었다. 북방지역에 대한 군사적 중요성은 이후에도 변하지 않았으
며, 그 기본골격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당군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높았기 때문이다.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하여 당 고종이 총 공세를 가하면서 나당전쟁은 무기한 휴전상태로 돌입했다. 그 해 이근행의 말갈사단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청해의 對토번전선에 투입되었던 것이다. 676년 당시 약자인 신라인들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당의 再侵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만일 당과 토번이 평화관계를 유지한다면 그 예봉은 또 다시 신라로 돌려질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나당전쟁 후 당의 재침은 결코 없었다. 하지만, 전쟁이 다시 재발되지 않았다고 해서 평화기가 도래했다고 보는 것은 부당하다.
 
당 고종은 나당전쟁 이후에도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678년 9월에 당 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 했다. 하지만 토번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했다.(資治通鑑 卷202 高宗儀鳳 2년 9월 조를 보면 “上將發兵討新羅”라 하여 당 고종이 신라를 치려하자 侍中張文瓘이 “諫曰今吐蕃爲寇方發兵西討”라 하여 지금 토번 문제가 시급하다고 만류하고 있다) 당은 여전히 토번에 발목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 이듬해인 679년에 나당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였던 四天王寺가 신라의 왕경에 세워졌다. 이는 당의 재침에 대한 우려가 신라사회에 팽배해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신라인들은 676년 휴전 이후에도 서역의 전황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당군의 재침에 대한 두려움은 戰後 신라의 급진적인 군비 증강과 일본에 대한 저자세 외교로 나타났다. 신문왕대 신라는 전후 최대의 군비확장을 단행했다. 『三國史記』권40 職官志下武官조에서 확인할 수 있는 통일 후 신라 군부대의 창설은 대부분 신문왕대(681~691) 이루어졌다. 신문왕 3년(683)에 고구려인으로 황금서당, 말갈인으로 흑금서당을 창설했고, 이듬해인 동왕 6년에 報德城民(고구려인)으로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을 창설하였다. 이어 동왕 7년에는 백제 殘民으로 청금서당을 창설했고, 황금무당을 설치했으며, 동왕 9년에는 지금의 서울·춘천·강릉 지역에 三邊守를 두어 북변의 방어를 강화했고, 皆知戟幢을 설치하여 對騎兵방어체제를 보강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685년 백제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자들은 백제인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이었다. 나당전쟁기간에 신라의 전폭적인 원조 아래 고구려유민들의 대당항전이 전개되었고, 그들 가운데 일부가 현재의
전북 김제인 금마저에 자리를 잡았다. 보덕국이라 이름이 지어졌다. 그들의 지도자는 안승이었다. 안승은 고구려 멸망후 서해의 사야도(史耶島)에 피신해 있던 중 고구려 부흥운동을 일으킨 검모잠 등에 의해 한성(현재 황해도 재령 부근)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0년(670) 6월조)
그들이 신라에 들어온 것은 670년이었다. 그 해 4월 고구려 주둔 사령관이었던 설인귀가 토번과의 전쟁을 위해 서역으로 병력을 돌린 틈을 타서 고구려에서 검모잠 등이 당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그것은 당의 장군 고간이 이끌고 온 거란과 말갈병에 반격을 받았다. 상황이 어려워지자 고구려부흥군 자체에 내분이 일어났다. 안승이 검모잠을 죽였던 것이다. 그리고 안승은 신라에 투항했다.(자치통감 권201 당기 17 함형 원년 4월조) 안승은 신라에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소형 다식 등을 보내 다음과 같이 슬피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올바른 도리이니 오직 대국에게 이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받들어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願作藩屛).” 왕은 그들을 나라 서쪽 金馬渚에 살게 하였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10년(670) 6월조].

안승과 그의 무리는 신라왕의 책봉을 받고 금마저에 정착하게 되었다. ‘願作藩屛’(원작번병)이란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안승 휘하의 고구려인들 가운데 젊은이들은 대당전쟁에 동원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백제인들을 신라군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투입하는 상황에서 투항해온 고구려인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680) 3월에 금은으로 만든 그릇과 여러 가지 채색비단 100단을 보덕왕 안승에게 내려주고 왕의 여동생<잡찬 김의관의 딸이라고도 하였다>으로 아내를 삼게 했다[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7 문무왕 20년(680) 3월조].

10년 후인 680년에 문무왕은 안승에게 결혼을 주선해 주었다. 문무왕은 보덕국왕에게 결혼비용을 지불해 주기까지 했다. 김제지역에 고구려인들의 집단 배치는 백제인들의 반란억제에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들은 백제인들에게 더욱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였을 것이다. 고구려인들은 만만치 않은 무력집단이었다.

(683 신문왕 3)겨울 10월에 보덕왕 안승을 불러 소판으로 삼고 김씨의 성을 주어 왕경에 머물게 하고 훌륭한 집과 좋은 토지를 주었다. 彗星이 五車의 자리에 나타났다. (신문왕) 4년(684) 겨울 10월에 저녁부터 새벽까지 유성이 어지럽게 나타났다. 11월에 안승의 族子장군 大文이 금마저(현 김제)에 있으면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였다. 남은 무리들은 대문이 목베여 죽는 것을 보고서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차지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왕이 군사들에게 명하여 이를 토벌하였는데, 맞서 싸우던 당주 핍실이 전사하였다. 그 성을 함락하여 그 곳 사람들을 나라의 남쪽의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金馬郡으로 삼았다(대문을 혹은 悉伏이라고도 하였다) (삼국사기 권8 신라본기 8 신문왕 3년과 4년(683~8))

보덕국의 고구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고위 군관이 전사하는 등 신라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던 것 같다. 위의 683년 겨울 10월에서 이듬해인 684년 11월까지 13개월까지의 기록을 나열해 보면 어느 정도 인과관계가 성립된다. 먼저 신라가 보덕국의 왕인 안승을 진골귀족이 받을 수 있는 소판의 관등과 저택과 토지를 주고 왕경으로 옮겨 살게 하였다. 10년 전인 670년에 신라의 귀족녀와 결혼하여 슬하에 자녀들도 두고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신라정부가 안승을 왕경으로 이거하여 보덕국에 있는 고구려인들과 분리시킨 것이 반란의 원인이 되었을 수 도 있다. 안승이 보덕국 현지인들과 분리된 이상 그의 族子 대문이 자연스럽게 고구려인들 사이에 부각되는 존재가 되었을 수도 있다.

대문은 보덕국에 있는 현지 신라인 관리들의 손에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그것도 고구려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이 행해졌다. 그들에 그가 참수되는 것을 현장에서 보던 고구려인들의 감정이 폭발했다. 반란의 진압에 참여한 신라의 군부대 중 문헌기록상 포착되는 것은 2개이다.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전사한 핍실은 신라 6정군단 가운데 하나인 귀당의 고위장교(弟監)였다.
 
이 장수에게 명하여 이를 치도록 하였는데 핍실을 貴幢의 제감으로 삼았다.… 적진에 맞서자 (핍실이) 홀로 앞에 나가 용감히 싸워 수십 명을 목베고 죽었다. 대왕이 이를 듣고 탄식하였다. (삼국사기』권47 취도전)

고구려인들은 신라군에 거세게 저항하였다. 진압 차 출동한 신라의 귀당이 고전할 정도였다. 신라의 귀당은 상주나 구미 부근에 본거지를 둔 사단이었다. 귀당은 소백산맥을 넘어왔다. 읍을 점령하고 농성중인 보덕성민들
을 쳤다. 소백산맥을 넘은 부대는 또 있다. 신라의 중앙군단 구서당의 하나인 황금서당이 그것이다.

(김)영륜(令胤)은 대대로 고관을 지낸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였으므로 명예와 절개를 자부하였다. 신문대왕 때에 고구려의 남은 무리들 悉伏이 보덕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토벌을 명할 때에 영륜을 黃衿誓幢步騎監으로 삼았다. 장차 떠나려 할 때 말하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 나의 종족과 친구들이 나쁜 소리를 듣지 않게 하겠다.” 하였다. 실복이 岑城남쪽 7리에 나와 진을 치고 있는 것을 보고는 어떤 사람이 말하였다. “지금 이 흉악한 무리는 비유컨대 제비가 천막 위에 집을 지은 것이고 솥 안에서 놀고 있는 물고기와 같으니 만번이라도 죽겠다는 각오로 나와서 싸우나 하루살이의 목숨과 같다. 막다른 곳에 다다른 도둑을 급박하게 쫓지 말라. 하듯이, 마땅히 좀 물러서서 피로가 극에 달함을 기다려 치면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사로잡을 수 있다.”… ( 『삼국사기』권47 김영윤전).

신라에 대항하여 보덕성민들의 반란을 이끈 것은 ‘실복’이란 자였다. 대문의 죽음에 분노한 그들이 신라에 대항했지만 그것은 희망이 없는 무리한 시도였다.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는 만큼 고구려인들의 저항은 비장했다. 신
라 황금서당의 고위 장교(보기당주)로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의 손자였던 김영윤이 전사했다. 황금서당은 고구려인들을 조직하여 창설한 부대이다. 황금서당은 그들의 동포 고구려인들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했다. 고구려인이 고구려인을 학살했던 것이다. 황금서당은 진압의 대상이 누구든 명령에 복종했다. 황금서당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자료가 있다.
 
『자치통감』권202 당기 18 함형 4년 윤5월조를 보자. 燕山道總管ㆍ右領軍大將軍 李謹行이 고구려인들을 대파했는데 호로하(임진강) 서쪽에서였다. 사로잡은 자들이 수천이었고, 나머지는 신라로 도망했다. 이근행의 처 유씨가 伐奴城에 있을 시 고구려인들이 靺鞨인들을 이끌고 와서 공격했는데, 이근행의 처 유씨가 갑옷을 입고 군을 통솔하여 그것을 지속적으로 막아 내니 고구려인과 말갈인들이 물러났다. 당고종이 그 공을 가상히 여기고 유씨를 연국부인으로 봉했다.

673년 고구려인들이 임진강유역에서 당군에게 패했다. 고구려인들과 말갈인들 가운에 수천은 당에 포로로 잡혔고, 나머지는 신라로 도주했다. 683년 신라는 이들 가운데 고구려인은 황금서당으로 말갈인은 흑금서당을 창설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들은 안승집단과 무언가 다른 계열의 집단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670년 고구려 부흥군에 내분이 있었다. 그해 안승은 그 자신을 옹립한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투항했다. 안승이 고구려 부흥군의 지도자인 검모잠을 피살한 사건은 고구려인들 사이에 분파를 조성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황금서당이 안승 휘하 고구려인들의 반란진압에 동원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일 수도 있다.

반란이 진압되고, 보덕성민들은 남쪽으로 강제분산 이주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젊은이들은 구서당의 2개 부대를 구성하는 병력으로 다시 신라의 수도 경주에 나타났다. 신라 조정은 반란의 경력이 있는 이들을 조직하여 자신의 심장부에 배치한 셈이 된다. 동포 고구려인(보덕성민)을 도륙한 황금서당은 신라국가에 의해 조직된 군대이며, 벽금서당과 적금서당으로 조직된 보덕성민 또한 그러하다. 신라에 반란을 일으킨 보덕성민들은 이제 그 중앙군이 되어 신라국가에 도전하는 모든 세력을 분쇄하는 군조직이 되었던 것이다. 신라는 반란세력의 힘을 역전시켜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낼 수도 있는 역량이 있었다.

그 후 신라는 구 백제 지역에 2개의 군부대를 이동배치 또는 창설했다. 신문왕 5년(685)에 경남 합천 주둔 下州停을 完山州停으로 개칭해서 백제지역인 전주로 전진 배치했으며, 기병부대인 완산주서를 동일지역에 창설
했다. 오주서는 보병부대인 완산주정을 보완하기 위한 것이다. 같은 해에 구백제 지역에 행정구역의 왕비와 소경설치가 이어진다.
 
5년(685) 봄에 완산주를 다시 설치하고 龍元을 총관으로 삼았다. 거열주에 청주를 설치하여 비로소 九州가 갖추어 졌는데, … 3월에 西原小京을 설치하고 아찬 원태를 仕臣으로 삼았으며, 南原小京을 설치고 여러 주와 군의 백성들을 그곳에 나누어 살게 하였다.…6년(686)…2월에 石山縣·馬山縣·孤山縣·沙平縣4현을 설치하였고, 泗沘州를 군으로 삼았으며, 熊川郡을 州로 삼았다. 發羅州를 군으로 삼고 武珍郡을 주로 삼았다 …『( 삼국사기』권8 신라본기 8 신문왕 5년과 6년조).

685년 봄 전주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신라행정의 지배가 확실해졌고, 그해 3월 청주에 서원소경과 남원에 남원소경이 설치되면서 신라 지방민들이 이곳에 이주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비(부여)에 있었던 주를 웅주(공주)로 옮기고, 사비는 군이 되었으며, 영현으로 보이는 석산·마산·고산·사평에 현이 설치되었다. 구 백제지역의 수도권 행정이 정비되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보덕국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의 구백제지역에 대한 식민과 행정조직 설치와 개편이 본격화 되었다.
 
 
 
 
4. 진골귀족의 백제지역 지배와 청해진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문무왕은 백제의 도서지역에 위치한 목장들을 신하들에게 나누어 준다. 전쟁의 결실에 대한 재분배였다.

領馬凡 一百七十四所, 屬所內二十二 官十 賜庾信太大角干六 仁問太角干五 伊五人各二
蘇判四人各二 波珍六人大阿十二人各一 以下七十四所隨宜賜之 (三國史記 卷6 新羅本紀6 文武王 9年)
 
목장의 재분배 내용을 보면 所內에 22개소, 官에 10개소, 김유신과 김인문을 비롯한 대아찬 이상의 진골귀족들에게 68곳이 부여되었고, 나머지 74개소는 ‘隨宜賜之’되었다. 그렇다면 74개소의 목장은 어떤 사람들에게 분배되었을까. 669년의 馬阹 再分配기사에서 분배의 기준이 관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대아찬 이상에게 68곳이 부여되었다. 나머지 74개소는 아찬 이하의 관등 소유자에게 분배되었을 공산이 크다. 그들의 신분은 6두품
이하의 귀족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삼국사기』권33 잡지2 屋舍에 마구간의 크기에 대한 규정을 보면 6두품 이하의 귀족들이 목장을 소유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六頭品은 馬5마리, 五頭品은 馬3마리, 四頭品에서 百姓까지는 馬2마리 이상을 넣을 수 있는 마구간을 지을 수 없다고 하는 기록이 그것이다. 여기서 眞骨귀족에 대한 제한규정은 없다. 이는 하대의 기록이지만 진골귀족 만의 독점적 목장 소유와 관련하여 귀중한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 나머지 74개의 목장도 아찬 이하의 진골귀족들에게 분배되었다는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진골귀족만이 목장사여의 대상이 되었을까? 목장을 유지하고 관리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의 여부가 그 사여 대상
을 결정했던 것은 아닐까. 필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가장 많은 목장이분배된 內省의 경우 供奉乘師나 本彼苩蓿典, 漢祗苩蓿典 등 말을 관리하는 조직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10개의 목장을 분배 받은 官의 경우도 그 관리부서 乘府가 있었다.

중앙에 고위관등을 가진 귀족관료들은 자신의 독자적인 수취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中代末의 상황을 전하는『신당서』권202의 기사를 보면 宰相家는 祿이 끊이지 않고 奴童이 3천 명이며, 甲兵·소·말·돼지의 숫자도 이에 맞먹는다. 바다 가운데 있는 산에서 목축하고 필요할 때 활로 쏘아 잡는다. 여기서 말하는 宰相家는 眞骨이상 중앙의 대귀족을 가리키는 것이며, 이 자료에서 목장과 이것을 관리하고 유지하는 인간조직, 그리고 여기서 재생산되는 가축들을 한눈에 볼 수 있다. 특히 奴童 3천은 진골귀족의 가정에 예속된 노동력임에 틀림이 없다. 진골귀족이 목장을 소유하고 있는 한 奴童가운데는 말을 훈련시킬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인간들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사』권82 병지 3을 보면 고려의 목장조직은 牧監—奴子의 구조로 되어있는데, ‘奴子’1명은 4필의 말을 생산·관리하고, 훈련시키는 책임이 있었다고 한다. 고려의 목감제는 당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다. 『구당서』권44 직관 3을 보면 牧監이 상중하 3개로 나뉘어 지고 있고, 상목감은 5천필, 중목감은 3천필 이상, 하목감은 1천필 이상의 말을 책임지고 있었다. 4필 단위로 奴子1인을 배정한 것을 고려한다면 諸목감은 1250명에서 250명에 이르는 奴子를 거느리고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신라의 경우 목장이 진골귀족에게만 사여된 것은 그들만이 그것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는 규모의 인간조직(奴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일신라시대의 진골귀족은 풍부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수요를 위한 공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그들은 각각 가정기관을 갖추고 많은 사람을 거기에 예속시켰다고 한다. 어떤 특정 진골귀족은 왕실의 內廷에 견줄 수 있는 기구를 보유하기도 했다. 그 가정기관에는 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유능한 工匠이 소속되어 있었고 관영 혹은 공적 工房에 결코 뒤지지 않은역량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권3 황룡사종 조를 보면 황룡사의 범종을 里上宅의 下典이 주조했음을 전해준다. 이찬 孝貞의 工匠이 국가적 대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물론 공방에 한정된 것이 아닐 것이다.

한편 진골귀족들은 구백제지역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개선사 석등기를 보면 전남 담양에 진골귀족의 田莊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建立石燈.
龍紀 三年 辛亥 十月 日 僧入雲 京租
一百碩 烏乎比所里 公書 俊休 二人
常買 其分 石保坪 大業 渚沓 四結 五畦
東令行土 北同土南池宅土 西川奧沓 十結 八畦東令行土西北同土南池宅土
890년에 건립된 이 석등은 개선사의 토지 문서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맨 아래 줄을 보면 “동쪽은 영행의 땅 북쪽도 영행의 땅 남쪽은 池宅의 땅”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지택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삼국유사』에는 신라 전성시대 왕경인 경주에 존재했던 35개의 金入宅명칭을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에 지택의 명칭이 보인다. 금입택은 진골귀족들 각 가문의 호화저택으로 그 소유자는 진골귀족 가문 가운데서도 극히 유력한 계층이 아니었을까 한다. 왕경에 있는 지택이 전남 담양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비문에도 금입택의 宅號가 보인다. 敎下望水·里南等宅 共出金一百六十分 租二千斛 助充裝飾功德 寺隷宣敎省 비문에 의하면, 헌안왕은 즉위 후 武州일대에서 禪風을 크게 진작시키고 있던 보조선사 體澄(804~880)에게 윤지를 내려 가지산사에 이거 할 것을 청하고, 이어 동왕 4년(860)에는 장사현 부수 김수종으로 하여금 동 선사의 소거 사찰인 보림사에 비로자나불 1구를 만들게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위의 기록에서 보듯이 금입택의 가운데 하나인 望水宅과 里南宅宅主에게 하교하여 금 169분과 租2千斛을 보림사에 기진하게 했다.

여기서 필자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조 2천곡이다. 최치원찬 숭복사비문에 “신라 말기 二百結酬稻穀合二千苫”라 한 것을 기준 삼아 계산한다면, 沓一結의 소출은 稻약 10石(苫)이 되며, 이는 150斗가 된다. 따라서 양
금입택이 보림사에 기부한 조곡 2천곡은 일곡 10두로 계산하면 2만두에 달하며, 이는 답 1,333결의 소출량에 해당하는 것이다. 문제는 망수택과 이남택이 기부한 조곡 2천곡이라는 막대한 양의 곡물운반이다. 왕경 경주에 있는 망수택과 이남택의 창고에서 조곡 2천곡을 전남장흥으로 운반한 것으로 보아야 할까? 필자는 아니라고 본다. 헌안왕이 보림사에 희사를 하는데 있어 망수택과 이남택을 지목한 것은 兩宅의 田莊이 전남 장흥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찰에서 멀리 떨어진 토지는 수취물의 운반비용이 많이 든다.
 
보림사 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던 長沙縣부수 金遂宗은 長沙宅이 친정인 景明王妃의 조부 金水宗과 동일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장사택의 택호는 그가 부수로 재직한 바 있는 무주 장사현(고창 무장)에서 연유한 것이라 한다. 근친왕족으로 생각되는 김수종이 국가로부터 식읍 내지 녹읍을 받았을 것이 틀림이 없고, 그 곳은 김수종이 지방관으로 재직하여 연고지가 된 장사현 지방일 가능성이 크다. 김수종이 보림사 경내에 있는 비로자나불 조성(858)과 삼층석탑 건립(870)에 막대한 사재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장흥과 해로로 연결되는 그 자신의 전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해안에 무열계 가문의 전장도 확인된다. 金昕이 충남 보령에 있는 자신의 사찰(성주사)을 낭혜에게 희사할 때, 그 부근의 토지도 함께 희사했다. 무열계 김종기의 손자인 김흔은 충남 보령지역에 원찰과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聖住寺朗慧和尙碑文에 (낭혜화상이) 북으로 떠나 종신토록 몸 부릴 장소를 선정하려 하였더니 때마침 왕자 (金)昕이벼슬을 하직하고 산중재상처럼 되던 때이다. 마침 만나게 되어 뜻에 들었다. (朗慧)師에게 (김흔이) 이르기를 “師와 나는 모두 조상이 龍樹(태종무열왕의 父)인데 師는 內外族親으로 용수의 令孫이니 따라갈 수가 없도다. 그런데다가 바다 밖으로 瀟湘姜의 고사도 놀아 밟았으니 친구의 인연 또한 옅지 않을 것이다. 寺刹 하나가 熊川의 坤隅(西南間의 南浦)에 있는데, 이는 나의 조상 臨海公이 예맥(고구려)을 정벌한 공으로 封을 받았던 곳인데 중간에 화재를 당하여 금전이 반쯤 재가 되었으니 자비심이 어진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능히 없어졌던 것을 일으켜 존속시킬 수 있겠는가?” 대사가 대답하기를 “인연이 있으면 가서 있겠노라.”하였다.

여기서 무열계 김인문 가문의 대규모 토지가 충남 보령에 존재했 던 것을 알 수 있다. 김흔은 민애왕대 伊湌相國까지 오른 거물급 정치인이었다. 그러나 839년 민애왕이 실각하고 신무왕 정권이 들어서면서 산중에 은거하게 되었다. 웅주 보령에 있던 그의 사찰이 화재를 당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인문의 토지는 그 일부가 김흔에게 상속된 것으로 보이며, 이것을 사찰과 함께 낭혜에게 희사했던 것이다. 김흔의 사촌 김양(金陽=魏昕)이 성주사에 희사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김양이 성주사 개창에 중요한 후원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그의 토지가 충남 보령 부근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도 김인문의 자손으로 그 지역의 토지를 상속받았을 공산이 크다.

왕경 소재 대사찰의 莊園도 남해안에 있었다. 847년 당에서 고국 일본으로 귀국하던 승려 圓仁은 신라의 서남해안을 거쳐갔다. 그의 일기『입당구법순례행기』847년 9월 8일 조를 보면 오전 9시경이 되어 우리는 ?島(여수 남쪽 30킬로 지점에 있는 安島)에 머물러 잠시 쉬었다. 이곳은 신라의 남쪽지방으로 內家(왕실)의 馬를 기르는 산이다. 가까운 동쪽에 黃龍寺의 莊園이 있다.

황룡사의 장원이 여수 동쪽에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물론 내성의 목장도 여기에 있다.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면서 획득된 구 백제지역은 신라지배층의 재산이 집중된 곳이다. 신라 하대에 가서 해적의 창궐은 서남해안지역에 산재한 진골귀족·왕실·대사찰의 재산운용에 차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일본후기(日本後紀 卷21 太上天皇嵯峨 2年條)를 보면 신라가 곡물운송을 하는데 있어 연안항로를 이용했다는 것이 확인된다.

大宰付에서 보고하기를, 신라 사람 金巴兄·金乘弟·金小巴등 3인이 아뢰기를 “작년 우리 縣의 곡물을 운송하기 위해 차출되었는데 바다에서 盜賊을 만나 같이 가던 무리들은 모두 물에 빠져 죽었습니다.” 810년(헌덕왕 2) 현의 곡식을 해상을 통해 운반하던 신라인들이 해적을 만나 피해를 입었다. 그 가운데 세 사람이 일본에 표착했던 것이다. 이는 단편적인 기록에 불과하지만, 당시 해적이 서남해안의 해운을 마비시키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는 증거이다.

사실『삼국사기』권10 헌덕왕 조의 기사를 보면 재앙으로 점철되어 있다. 헌덕왕(809~826) 때는 지속적으로 발생한 가뭄과 홍수, 기근, 草賊의 확산, 그리고 김헌창의 반란 등이 일어났다. 서남해안에서의 해적의 창궐은 이와 같은 상황과 때를 같이하고 있었다. 서남해안에 전장과 목장을 가지고 있던 왕실·진골귀족·寺刹도 그것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그들 사이에 해적을 근절할 수 있다면, 어떠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828년 당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진골귀족들은 828년 4월 청해진 설치를 공식 승인했다. 청해진 설치 후 서남해안에 출몰하고 있던 해적은 완벽하게 퇴치되었다. 중국 측 기록에 “太和연간(827~835)으로부터는 해상에서 신라인들을 잡아가는 자가 없게 되었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삼국사기』권10 흥덕왕 본기에는 동왕 3년(828) 4월에 장보고가 중국에서 돌아와 흥덕왕을 알현하고 사졸 1만으로써 청해진을 설치했다고 한다. 여기서 사졸 1만은 당시 조정의 형편으로 볼 때, 장보고가 신라조정으로부터 양해를 받아 변민 1만을 규합했던 병력으로 생각된다. 이는 문성왕 13년(851) 청해진을 폐지할 때, 그곳의 주민을 벽골군(김제)으로 집단이주 시킨(三國史記 卷11 新羅本紀11 文聖王13年 2月條)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장보고가 완도 현지인들을 자신의 휘하로 조직한 것에는 이유가 있다. 다도해의 지형과 해류의 방향·풍향 등에도 정통해야 하며, 중국·일본으로 가는 항로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청해진 설치 이전에 서남해안의 군소 해상세력들이 해적행위와 불법적인 노예무역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면, 그들을 철저히 단속하고 해상에 질서를 부여한 장보고는 당으로부터 사치품 수입을 독점하여 진골귀족들에게 판매했다. 그 상업적 巨利는 장보고의 병력을 부양하는 재원으로 전환되어서 남해안에 질서를 유지시켰다. 그러나 839년 신무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재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과적으로 청해진은 반정부세력의 유용한 은신처를 제공해주고 무력적 기반이 되었다. 
 
 
5. 종합적 분석
백제는 신라에 병합되었다. 하지만 660년 이후 처음부터 백제지역의 운명이 다른 국가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일본의 후원아래 백제부흥운동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랐고, 침략자인 신라와 당은 백제의 수도만 장악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신라와 당이 백제지역을 지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초반에는 그러했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국가들을 멸망시키고 병합한 당은 노련했다. 660년 당이 백제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백제왕과 유력귀족들의 압송이었다. 백제국가 시스템 운영자들을 백제와 완전히 유리시키려는 심산이었다. 『삼국사기』권5 태종무열왕 7년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소정방은 백제왕과 왕족·신료 93명과 백성 1만 2천 명을 데리고 사비에서 배를 타고 당으로 돌아갔다.” 구체적으로 의자왕 왕비 은고, 태자융, 소왕 효, 왕자 연, 왕자 태, 그리고 대좌평 사택천복, 국변성, 손등 등이 망라된다. 당은 이러한 조치가 백제저항군 내분의 원인이 되리라는 것을 예측하고 있었다.

당은 점령지의 왕족과 귀족들을 압송함으로써 그 사회체제를 무너뜨렸다. 백제부흥운동의 지도부에 부여풍·
복신이나 흑치상지 등 백제의 왕족이나 귀족이 존재했다 하더라도 중앙 핵심부의 부재는 내분을 부를 수밖에 없다. 복신과 도침의 내분은 피를 불렀다. 도침이 살해되면서 그 휘하의 핵심 참모들도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663년 일본함대가 백제지역으로 접근하는 가운데 복신도 부여풍에게 살해되었다. 이는 확실히 백제부흥군의 전력에 치명적이었다. 흑치상지도 복신이 피살되는 상황에서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는 당에 붙어있던 부여융의 간곡하고 집요한 투항권고에 마음이 흔들렸고, 마침내 당에 투항했다.
흑치상지는 ‘누구를 위한 전쟁인가.’라고 되물었을 것이다. 백제부흥군이 내분으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에서 이 전쟁은 백제부흥이 아니라 당과 일본을 위한 전쟁이 될 것이 뻔하다. 흑치상지는 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가 당을 택한 것은 당이 그를 회유했기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일본보다 당의 힘이 강력해서가 아닐까. 그의 예상대로 663년 백강전투에서 일본함대가 궤멸되었고, 일본은 백제에서 완전히 미련을 버릴 수 밖에 없었다.
 
이제 당에 의존하여 신라로부터 백제지역을 지키는 과제가 남았다. 당은 상징적으로 과거의 백제를 회복시켜주었고, 부여융이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 당의 장군 유인궤는 전쟁으로 파괴된 사회시설을 복구했고, 촌락을 정리하고 관청의 장도 임명했다. 백제인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있었고, 백제제역은 자치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당의 구백제지역에 대한 통치는 665년 이후에 원활하지 못했다. 고구려가 내분에 들어간 상황에서 당은 당시 고구려와의 전쟁에 전력을 투구해야 했다. 당의 점령군도 백제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그 후 백제지역에 대한 신라의 압력이 강해진다. 665년 이후 신라는 백제를 점진적으로 잠식하여 들어갔다. 그것은 주로 백제의 핵심부가 아니라 주변부였다. 고구려가 버티고 있는 상태에서 당은 백제를 잠식하는 신라를 말로만 질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은 신라에 강한 조치를 취했다. 신라의 장군 흠순이 당에 도착했을 때 국제상황은 급변하고 있었다. 670년 토번의 군대가 타림분지의 실크로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고구려에 주둔해 있던 설인귀의 군대가 서역으로 이동한 것도 이 때문이다.
 
당군이 고구려에서 철수하자 신라의 원조를 받은 고구려 부흥군이 봉기했고 나당전쟁이 발발했다. 이제 당과 적대국이 된 신라는 백제의 인력과 자원을 차지하여 대당전쟁에 동원해야 했다. 672년 8월 고간의 당군에게 신라군이 거의 전멸했다. 신라는 이 한번의 패배로 너무나 짧은 순간에 대규모의 병력을 잃었다. 그해 신라는 백제인으로 구성된 백금서당을 창설했다. 신라의 인력고갈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603년부터 려제의 양면공격이 본격화되면서 신라의 인적자원은 하강곡선을 그릴 수밖에 없었고, 통일전쟁은 그것을 더욱 심화시켰다. 672년 그 위험수위를 넘겼다. 신라는 비신라계인을 그 군사력으로 이용하지 않으면 안 될 급박한 상황에 마주쳤다.

685년 백제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반란자들은 백제인이 아니라 고구려인들이었다. 나당전쟁기에 신라의 원조를 받은 고구려유민들의 대당항전이 전개되었고, 그 일부가 현재의 전북 김제인 금마저에 자리를 잡았다. 보덕국이라 이름이 지어졌다. 앞서 고구려 부흥군에도 내분이 있었다. 고구려 멸망 후 서해의 史耶島에 피신해 있던 안승이 그를 고구려의 왕으로 추대했던 부흥군의 지도자 검모잠을 죽였던 것이다. 안승은 신라에 투항했다. 안승 휘하의 고구려 젊은이들도 신라의 대당전쟁에 동원되었다. 백제인들을 신라군으로 조직하여 전쟁에 투입하는 상황에서 투항해온 고구려인들도 마찬가지였다.
 
한편 김제지역에 고구려인들의 집단 배치는 백제인들의 반란억제에 기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고구려인들은 만만치 않은 무력집단이었다. 683년 신라정부는 안승을 왕경으로 이거하여 보덕국에 있는 현지 고구려인들과 분리시켰다. 안승은 진골에게만 수여되는 소판의 관등과 저택·토지를 지급받았다. 안승이 왕경으로 가자 자연스럽게 보덕국에서 그의 族子 대문이 부각되었다. 684년 11월 대문은 반역을 도모한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었고, 사형이 언도되었다. 고구려인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처형이 행해졌다. 참수되는 것을 보던 고구려인들이 들고 일어났다. 그 와중에 신라의 관인들과 그들을 호위하던 군인들이 살해되었다.
 
고구려인들의 거센 저항도 희망이 없는 무리한 시도였다. 『삼국사기』의 표현 그대로 “그들은 천막위에 둥지를 튼 제비들이고, 솥 안에 있는 물고기와 같았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에 몰려있는 만큼 고구려인들의 저항은 비장했다. 상주부근에 주둔지를 둔 귀당이 소백산맥을 넘어 보덕성을 점령하고 농성중인 고구려인들을 쳤다. 왕경에 본거지를 둔 황금서당도 여기에 동참했다. 이 반란을 진압하려고 온 신라의 고위 군관들이 전사할 만큼 싸움은 치열했다. 신라 6정군단 가운데 하나인 귀당의 고위장교(弟監)였던 핍실과 신라 9서당의 하나인 황금서당의 고위 장교(보기당주)이자 왕의 사위였던 김영윤이 전사했다.

반란이 진압된 후 신라는 구 백제 지역에 2개의 군부대를 이동배치 또는 창설했다. 신문왕 5년(685)에 경남 주둔 下州停을 完山州停으로 개칭해서 전주로 전진 배치했으며, 기병부대인 완산주서를 동일지역에 창설했다. 동시에 행정조직과 소경설치가 이어졌다. 685년 봄 전주에 완산주가 설치되어 신라행정의 지배가 확실해졌고, 그해 3월 청주에 서원소경과 남원에 남원소경이 설치되면서 신라인들이 이곳에 이주하였다. 사비(부여)에 있었던 주를 웅주(공주)로 옮기고, 사비는 군이 되었으며, 영현으로 보이는 석산·마산·고산·사평에 현이 설치되었다. 구 백제지역의 수도권 행정이 정비되었던 것이다. 신라의 구백제지역에 대한 군부대 배치, 식민, 그리고 행정조직 설치가 본격화 되었다.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문무왕은 백제의 도서지역에 위치한 174개의 목장들을 진골귀족들에게 나누어 준다. 전쟁의 결실에 대한 재분배였다. 진골귀족에게만 사여된 것은 그들만이 목장을 관리하고 유지할 수 있
는 규모의 인간조직(奴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진골귀족들은 풍부한 경제적 기반 위에서 자신의 수요를 위한 공방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며, 각각 가정기관을 갖추고 많은 사람을 거기 에 예속시켰다. 또한 어떤 특정 진골귀족은 왕실의 내정에 견줄 수 있는 기구를 보유하기도 했다. 그 가정기관에는 국가적 사업에 참여할 정도로 유능한 工匠이 소속되어 있었고, 관영 工房에 결코 뒤지지 않은 역량을 갖추고 있었다.

한편 진골귀족들은 구백제지역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전남 담양에 지택(진골귀족의 금입택)의 田莊이 존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택은 왕경에 위치한 35개의 金入宅의 하나였다. 860년 헌안왕은 望水宅
과 里南宅宅主에게 하교하여 금 169분과 租2千斛을 보림사에 기진하게 했다. 한 때 長沙縣부수로 長沙宅의 택주였던 金遂宗은 보림사 불사에 심혈을 기울였다. 그는 보림사 경내에 있는 비로자나불 조성(858)과 삼층석탑 건립(870)에 막대한 사재를 던졌다. 김수종은 장흥과 해로로 연결되는 고창무장에 자신의 전장을 가지고 있었다.

김인문 가문의 대규모 토지가 충남 보령에 존재했다. 김인문의 후손인 金昕이 충남 보령에 있는 자신의 사찰(성주사)을 낭혜에게 희사할 때 그 부근의 토지도 함께 희사했다. 김흔의 사촌인 김양(金陽=魏昕)도 성주사 개창에 중요한 후원자가 되었던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 왕경 소재 대사찰의 莊園도 남해안에 있었다. 황룡사의 장원이 여수 동쪽에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물론 왕실의 목장도 여기에 있었다. 그야말로 신라가 백제를 정복하면서 획득된 구 백제지역은 신라지배층의 재산이 집중된 곳이다.

810년(헌덕왕 2) 곡식을 해상을 통해 운반하던 신라인들이 해적을 만나피해를 입었던 기록이 확인된다. 당시 해적이 서남해안의 해운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해적의 창궐은 서남해안지역에 산재한 진골귀족·왕실·대사찰의 재산운용에 차질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진골귀족의 농장이나 목장에서 나오는 생산물의 일부는 바다를 통해 왕경 경주에 운반되었기 때문이다. 진골귀족들 사이에 해적을 근절할 수 있다면, 어떠한 수단도 동원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828년 당에서 귀국한 장보고가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장보고의 청해진 설치를 인가해야 서남해안에서 그들의 수익이 왕경으로 운반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진골귀족들은 828년 4월, 청해진 설치를 공식 승인했다.

청해진 설치 후 서남해안에 출몰하고 있던 해적은 완벽하게 퇴치되었다. 이는 진골귀족들의 수익에도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해상의 안전은 진골귀족들이 그들의 전장에서 나오는 수익의 운반을 보장했다. 흥덕왕대
장보고가 수입한 외래사치품이 신라 귀족사회를 휩쓸었던 것은 이러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흥덕왕 정부가 장보고의 청해진을 유지하는데 재정적 지원을 해주지 않은 이상 장보고의 사치품 수입을 묵인했을 가능성이 높다. 장보고는 부양해야 할 상당한 병력이 있었다. 그것만이 장보고가 흥덕왕에게 약속했던 서남해안의 해적단속을 지속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서남해안에 있는 진골귀족의 전장과 목장에서 생산되는 수익의 상당량이 사치품 구입대금으로 사용되면서 청해진에 지속적으로 유입되었다. 839년 신무왕이 장보고의 힘을 빌려 재기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결과적으로 청해진은 반정부세력의 유용한 은신처를 제공해주는 무력적 기반이 되었다.


       - 네이버 블로그 <백제문화제사랑 / 영원한 백제> 백제사랑 님의 글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