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2. 16:02ㆍ별 이야기
Astronomy와 天文
영어로는 astronomy라 불리는 천문학. Astronomy는 원래 astronome라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astro는 ‘천체’를 뜻하고, nome라는 말은 ‘배열하다, 배치하다, 정하다’ 라는 의미입니다. 즉 ‘별의 위치를 결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astrology라는 말이 있는데 이 말은 astro라는 말에 ‘학문, 연구’를 뜻하는 logia라는 말이 붙은 astrologia라는 말에서 유래가 됩니다. 하지만, astrology는 우리말로 번역하면 점성술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astronome는 ‘arrange of the stars’란 의미이며, astrologia는 ‘study of the stars’라는 의미가 됩니다. 얼핏 보기에는 지금 쓰이는 의미로는 정 반대가 된 듯 싶은 단어들입니다. 이것은 천문학이 처음 생성되면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요하게 생각되어온 관점이 현재에 와서는 뒤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양권에서는 역시 차차 설명하겠지만, 천체의 움직임을 연구하는 것을 天文이라고 불렀습니다. 근대의 천문학을 생각해보면 ‘星學’ 정도로 불려야 하는 것을 왜 굳이 天文이라고 쓴 것일까요? 그 역시 천문학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중시되어가는 개념이 틀려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현재 천문학이라고 배우는 것들은 그 옛날부터 축적된 지식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긴 하지만, 옛날의 천문학과는 다른 것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천문학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혹자는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학문’이라고도 합니다. 맞는 말일런지도 모릅니다. 천문학이 생겨난 기원을 따져나간다면, 인류가 문명을 차츰 형성해 나가기 시작하는 시기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한마디로 인류가 발전을 해 오면서 그동안 축적되어었던 모든 지식들을 바탕으로 형성되어있는 학문이기에 한마디로 천문학이란 어떠어떠한 것이다 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불가능한 것일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앞으로의 글에서는 천문학이 대체적으로 어떻게 형성되고, 어떻게 발전해왔는가를 살펴보면서, 여러분들 스스로 천문학이 대략 어떤 것이다 라고 파악을 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천문학과 점성학의 시작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면서 인류는 수렵문화에서 농경문화로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농경이 발전하면서, 인류는 파종과 수확의 시기, 또 기후의 변화 등을 보다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 시간을 보다 정확하게 측정할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그런 움직임은 활발해지고, 시간을 측정하는 단위로 하늘의 천체들을 이용하게 됩니다. 천체를 관측하기위한 방법이 발달하면서 천문학은 차츰 발전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런 태양과 밤하늘의 천체들이 언제 어떤 위치에 가 있는지에 따라서, 기후라든지 강의 범람등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고대인들은 차츰 하늘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땅에도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천체들의 움직임과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연관지으려는 사상도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차츰 점성학이라고 불리우는, 예측을 위한 학문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이때의 천문학과 점성학은 서로 분리되어있지 않은, 하나의 학문으로 인식되었던 시기입니다. 이렇게 시간을 측정하고, 예측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서 천문학과 점성학적인 사상들이 발전을 하게 되지만, 그 이유를 미처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들은 신화의 영역으로 떠넘기게 됩니다. 그래서 문명이 시작되던 시기의 천문학이라고 한다면, 천문과 점성과 신화가 어우러진 상당히 독특한 개념의 학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고대의 천문학
1.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천문학
바빌로니아-아시리아 문명으로 대표되는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세계 4대 문명중 가장 먼저 발달한 곳입니다. 이들은 밤하늘의 별들이 나타나는 주기가 일정한 것을 알고, 밤하늘의 별들을 마치 지도처럼 이용하기 위해 밤하늘의 별들을 가까이 있는 것들을 엮어서 그림으로 나타내려 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날 사용하는 별자리의 기원입니다. 이렇게 무리지어진 별자리를 이용함으로써 바빌로니아인들은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변하지 않음을 알고, 밤하늘이 하늘의 북극성을 기준으로 일주운동을 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 이런 별자리들을 배경으로 밤하늘에서 위치가 변하는 밝은 5개의 별들 -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 - 이 있음을 알고 이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자주 출현하는 지역이 태양이 지나가는 길과 일치함을 알고 그 근처에 있는 별자리들을 엮어서 계절별로 4개로 나누어 황도 4궁을 만들게 됩니다. 이것이 후세로 가며 이집트와 그리스를 거치면서 황도 12궁으로 나누어지게 된 것입니다. 또 이들 5개의 행성과 태양과 달을 엮어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7요제(七曜制)의 기초를 만듭니다. 그리고 이들은 일식과 월식을 불길한 징조로 보았기 때문에, 일월식에 대한 정확한 예측을 하고자 합니다. 유물에서 나타나는 최초의 월식기록은 이 메소포타미아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됩니다. 이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은 유프라테스-티그리스 강 사이에 있었기에 이민족의 침입과 왕조의 교체가 자주 일어났기 때문에, 폐쇄적인 이집트 문명과는 다르게 그 문화를 주변국에 많이 전파하게 됩니다.
2. 이집트의 천문학
나일강 유역으로 발달한 이집트문명은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함께 고대 오리엔트문명을 이루고 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지역이 개방적인 문화였다면 이집트에서는 폐쇄적이고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기 때문에, 역법의 사용도 초기의 메소포타미아의 태음력에서 독자적인 역법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나일강 유역의 관개농업은 해마다 일어나는 나일강의 범람에 의해 좌우가 되었는데, 메소포타미아의 태음력으로는 1년이 354일이며, 3년마다 윤달을 한번씩 넣어야 했기 때문에, 나일강의 범람이 어떤 때에는 11달만에 일어나게 되고, 또 어떤 때에는 14달만에 일어나는 불일치성을 보여주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더욱더 자세한 역법이 필요하게 됩니다. 후에 천체관측중에 하늘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Sirius, 큰개자리의 알파별) - 이집트인들은 이 별을 소티스(Sothis)라 불렀습니다 - 가 태양과 거의 동시에 뜨는 현상의 주기가 나일강의 범람과 주기가 거의 일치함을 알고, 이를 바탕으로 1달을 30일로 하며 12개월을 기준으로 하는 항성력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집트인의 역법으로는 1년은 365일인데, 30일로 12개월을 지낸 후 연말 마지막에 5일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1년을 완성하게 됩니다. (이는 이집트의 창세신화와도 연관되는 내용입니다. 관심이 있으신분은 이집트신화도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그 밖에도, 기제의 피라미드에서 보이는 천문학적 배열 - 대회랑의 입구가 당시의 북극성 방향과 일치한다든지, 피라미드의 변이 정확히 동서남북을 향한다는 사실 - 등으로 미루어 보았을때, 나름대로의 천문학적인 발달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지만, 자세한 사항들은 많이 전해져 내려오진 않고 있습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천문학은 후에 그리스의 천문학에 많은 영향을 끼치며 발달하게 되며, 오리엔트문명이 그리스문명과 만나면서 헬레니즘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천문학도 많은 발전을 하게 됩니다.
3. 고대 인도의 천문학
독립적인 인더스문명의 천문학은 잘 알려져 있진 않습니다. 그러나 인더스 문명이 쇠퇴한 후에 성립된 인도의 베다시대에는 역법인 태음태양력과 인도지역의 독특한 우기(雨氣)가 시작되는 것으로 한 해의 시작으로 잡고, 달이 별들 사이를 돌면서 움직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볼때, 인더스 문명에서도 독자적인 천문학이 있음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황하문명에서 발전한 28수(宿)의 개념이 이 베다시대에 확립이 되었는데, 이들은 이를 낙사트라(naksatra)라 부르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체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베다시대를 이은 베간다시대에서는 유가(yuga)라 불리는 5년주기의 독특한 역법이 등장하면서, 독립적인 천문학으로 발전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때는 힌두문화등에 의해 제사라는 상징적 행위의 체계가 확립되면서, 농경이나 생산활동 등의 필요에 의한 역법이라기보다는, 제사의 집행을 위한 천문학이 발달한 것이 특징입니다. 이후에 4세기경에 그리스의 수리천문학이 인도에 도입되면서, 5세기쯤에 발전한 힌두천문학에서는 행성의 위치를 계산하는데에 인도에서 발전한 삼각함수의 개념이 쓰이기 시작하며, 독특한 체계의 천문학으로 발전해가기 시작합니다. 인도 지역의 천문학은 외래의 영향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여, 동남아시아지역의 천문학에 중국의 천문학과 함께 많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또한 중국-한국-일본으로 이어지는 극동지역의 천문학에 오리엔트문명의 천문학적 사상을 전해주는 가교의 역할도 잠시 하게 됩니다.
4. 고대 중국의 천문학
황하문명에서 발전한 중국의 천문학은 동양권에서 발달한 천문학의 기틀이 됩니다. 이들은 달이 하늘을 돌면서 그 위치를 계속 변해간다는 것을알고 하늘을 28개의 구역으로 나누어 달이 머무는 곳이라 하여 28수(宿-원래는 ‘숙’자이지만 별자리로 쓸 때는 수라 읽습니다)를 바탕으로하는 태음력을 만듭니다. 또한 오리엔트문명에서 생각된 것처럼 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가 땅에서의 어떤 징조라고 생각했기에, 밤하늘을 관측하면서 그 변화를 읽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대 중국 천문학자들은 새로운 별의 출현이나 일식, 월식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서 미래의 일들에 대해 예언하곤 했습니다. 때문에 술에 취해 일식을 예언하지 못한 두 명의 천문학자가 사형에 처해진 일도 있었습니다. 또한 5개의 행성에 대한 움직임 역시 파악하고 있었으며, B.C 2449년경에는 5개의 행성이 일렬로 늘어서는 현상에 대한 기록도 나타나 있습니다. 그 후 인도를 거쳐 메소포타미아의 황도궁의 개념도 전래되었지만, 황도보다는 달의 움직임에 의한 천문학적 배치를 더 중시 여겼던 것이 동양천문학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후 시대가 흘러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천관서(天官書)편에서는 동양천문학의 체계인 3원 28수의 설명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5. 고대 초기 천문학의 흐름
문명이 처음 생겨나고 필요에 의해 발달하던 초기문명의 천문학은 각각 나름대로의 독자적인 영역을 가지고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천문학은 그리스-로마 시대로 이어지는 지중해문명으로 이어진 후에 헤브라이즘이 유럽전반을 지배할 때 아랍으로 전해졌다가 다시 서구문명으로 이어지는 천문학을 흐름으로 하는 것이 가장 큰 흐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더스 문명에 의해 생겨난 인도의 천문학은 동남아시아쪽으로 중국의 천문학과 같이 전파되어 독자적인 천문학적 체계를 구축하게 됩니다. 황하문명에서 시작된 중국의 천문학은 서구의 천문학과는 또다른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극동아시아쪽으로 연계가 되는 흐름이 세 번째의 흐름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근대천문학의 근간이 되는 내용이 메소포타미아-이집트-그리스-로마-아랍-과학혁명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내용이기 때문에, 인도와 중국의 동양권의 천문학은 사실 현재에 와서는 더욱 발전하지 못하고, 고천문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의 내용에는 서구의 천문학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천문학
1. 초기 그리스 시대 - 자연철학의 발달과 초기 우주론
고대인들은 역법의 필요성에 의해서 천체를 관측하고 또한 그 사실들을 기록하며 이용을 했지만, 천체들의 이동의 원리라든지,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의 구조에 대해서는 신화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의 문명이 전승된 지중해의 문명에서도, 역시 초기에는 신화와 결부되어서 세상을 설명하려 합니다. (그리스 - 로마신화)
기원전 6세기경, 밀레토스(Miletos)학파의 탈레스(Thales)는 최초로 이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본질을 따져보기 시작합니다. 탈레스는 우주의 원질(arche)은 물이며, 이것이 변화하여 세상을 구성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는 ‘우주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라는 최초의 철학적인 사고방식으로 우주를 다루는 관점이 신화에서 철학의 영역으로 넘어감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탈레스 이후로 발생한 철학은 이렇게 세상에 대한 근본적인 실재에 대한 탐구가 그 주 내용이였으며, 이를 탐구하는 사람들을 ‘자연철학자’라고 부르게 됩니다. 자연철학이라는 말인 Physica라는 라틴어는 나중에 물리학을 뜻하는 ‘Physics’의 어원이 되는 말입니다. 즉, 자연철학이 발전함으로써 ‘역법을 위한 천문학’에서 ‘진리 자체를 위한’ 학문으로 천문학은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때 당시는 우주뿐만 아니라 만물의 생성과정을 탐구하는 사물의 자연연구(Physeos Historia)로 발전을 하면서 모든 제반과학영역에 걸친 탐구를 시도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 초기의 자연철학자들은 천문학뿐만 아니라 모든 과학영역에 대해서 업적을 남기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보자면 최초의 ‘과학자’들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때 당시의 초기 우주론에 대한 주장들을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탈레스(Thales): 우주의 근원은 물.
아낙시메네스(Anaximenes): 우주의 근원은 공기.
아낙시만데로스(Anaximanderos): 탈레스의 제자. 우주의 근원은 무한자(無限子, apeiron)
피타고라스(Pythagoras): 우주의 근원은 수(數).
헤라클레이토스(Herakleitos): 우주에는 영원한 것이 없으며, 끊임없이 변화한다.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만물의 근원은 4원소(地, 水, 火, 風)이며, 만물은 이들이 적절히 결합하여 생겨난 것.
아낙사고라스(Anaxagoras): 만물은 수많은 씨(spermata)들로 구성.
레우키푸스(Leukipos),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만물은 원자(atoma)로 구성.
2. 그리스 후기 - 인본주의 사상과 수리천문학의 발달
B.C 5세기경이 되면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발달하였다가 쇠락해가는 과정에서, 철학의 중심적인 과제도 ‘사물에 대한 탐구’에서 인간의 질서와 조화를 위해 ‘윤리와 정치’에 대한 철학이 대두되게 됩니다. 이때 당시의 대 철학자로는 소크라테스가 있습니다만, 그의 철학관을 소개하는 것은 이 글의 내용과는 약간 떨어지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은 초기의 철학자들 중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주1)의 사상에 영향을 받고, 피타고라스의 종교적 요소와 수학사상,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윤리와 지적론을 이어받아서 이데아를 바탕으로 하는 이원론적인 과학사상을 창시합니다. 플라톤의 우주체계에 대한 사상은 초기 자연철학자들처럼 관찰에 의한 결과를 도출한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윤리관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 우리가 있는 세상은 이데아가 불완전하게 복제된 세상이라는 개념 - 그의 사상은 수학적, 관념적,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많이 담겨있으며 윤리성이 강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가 만년에 낸 티마이오스(Timaios)에는 우주가 도덕적으로 계획되어서 형성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티마이오스의 창세론을 간략하게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태초에 창조주 데미우르고스(demiurgos)가 있어 우주를 만들었다. 데미우르고스는 원질을 가지고 4원소를 만들었다. 직각이등변삼각형 4개가 모이면 정4각형이 된다. 정사각형 6개로 둘러싸인 것이 정6면체이다. 이 정6면체로 된 것이 흙이다. 따라서 흙은 직각이등변삼각형 24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두각이 각각 60도와 30도인 직각삼각형 6개는 정삼각형을 만든다. 정삼각형 4개로 둘러싸인 정사면체로 된 것이 불이다. 공기는 정팔면체(정삼각형 8개), 물은 정20면체(정삼각형20개)로되어 있다. 직각삼각형의 수로 따지면 불, 공기, 물은 각각 24, 48, 120개로 구성된 셈이다. 여기서 중대한 결과가 나온다. 흙은 유독 직각이등변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어쩔 수 없으나, 불, 공기, 물은 구성성분이 같은 직각삼각형이다. 더구나 그 수를 보면 공기는 불 2개, 물은 공기2개와 불 1개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흙 하나만은 공정불변이지만, 나머지 세 원소는 상호가변적인 것이다.”
이처럼 플라톤의 사상은 다분히 관념적이긴 하지만, 우주의 구조자체를 초기에는 근원원소로만 생각한데에서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우주가 구성되어있다는 사고를 제공했다는데에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이런 기하학적인 사상은 후기 그리스시대의 천문학을 지배하는 사상이 되어, 초기의 관측천문학에서 기하학적인 방법으로 우주의 움직임을 기술하려는 수리천문학으로 발전하게 되며, 이 수리천문학은 인도를 거쳐서 동양권에도 전파되게 됩니다. 이 당시에는 전대로부터 내려오는 행성과 태양, 달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전부 파악이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기하학적으로 가장 안정되고 조화로운 모양인 원운동과 등속도 운동으로 행성들의 움직임을 파악하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플라톤은 행성의 움직임을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원운동의 조합으로 생각을 했지만, 그의 제자였던 에우독소스(Eudoxos)는 플라톤의 구조론에서는 행성의 움직임에 오차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가장 바깥쪽에 항성이 달린 천구, 그 안쪽에 달과 태양에 각각 3개씩의 천구와 5대 행성에 4개씩의 천구가 어우러진 27개의 동심구각(同心救殼)을 가정하고, 이들이 다른 축을 가지며 회전함으로써 행성이 복잡한 움직임을 보이는 것이라고 설명하게 됩니다.
그 후, 역시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는 에우독소스의 동심천구이론을 채택하여 에우독소스의 이론에서 모순점을 보완한 56개의 천구로 구성된 수정천구이론을 만들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초기의 지구중심설의 문제는, 행성의 크기와 밝기가 변한다는 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며, 계절의 변화가 일정치 않다는 점, 또 행성이 역행할 때 생겨나는 움직임의 궤적이 그리는 고리의 모양과 개수가 이론에서 나와야하는 수치와 틀리다는 점이 문제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기원전 280년경의 아리스타르쿠스(Aristarchus)는 최초로 지구의 공전을 주장하는 이론을 내놓게 됩니다. 하지만, 이 최초의 지동설에서도 여전히 행성움직임에 대한 완벽한 설명은 불가능했으며(주2), 그 당시에는 항성까지의 거리를 알 수 없었기에, 항성까지의 거리를 상당히 가깝게 있는 것으로 인식하여, 지동설에서 나타나야하는 연주시차가 발견되지 않는 점 등 때문에 완벽하게 무시를 당하게 됩니다.
후기 그리스시대의 천문학은 이렇게 우주를 사유적인 철학의 문제에서 기하학적인 수리천문학으로 발전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지만, 그 본질이 진리의 추구라기보다는 관념론적으로 우주를 해석하려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존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1) 엘레아 학파의 철학자. 존재만을 인정하고 비존재는 과격하게 부정하는 사상을 주장했다. 훗날 존재를 물질로 본 유물론적 해석과 비물질로 본 관념론적 해석이 갈리게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제자인 제논(Zenon)은 스승을 옹호하기 위해서 유명한 ‘아킬레스와 거북이’의 역설을 내놓게 된다.
(주2) 이는 행성의 운동을 원운동과 등속운동으로만 규정짓고 설명하려했기에, 어쩔 수 없이 발생하는 오차이다. 실제의 행성운동은 타원운동과 비등속운동이기 때문이다. 이 오류는 과학혁명 때 케플러에 의해 수정되게 된다.
3. 헬레니즘 - 실용주의의 발달과 천동설의 확립
B.C 3세기경 펠로폰네소스 전쟁이후로 마케도니아 문명이 발달하면서, 그리스문화와 오리엔트문화가 융합되어 발전한 헬레니즘 문화가 발달하게 됩니다. 헬레니즘 문화의 특징은 관념론적인 사고를 탈피하여, 실천과 응용에 그 중심점을 두고 있는 점이 특징이며, 그래서 학문들도 현실에 적용이 되는 실용적인 학문이 발달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이 시기에는 그리스시대부터 내려오던 수학적 업적이 유클리드(Euclid)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정리가 되고, 평면기하학과 입체기하학이 정립되게 됩니다. 헬레니즘의 천문학은 이렇게 수학이 발전하고 기하학이 하나의 정립된 체계로 자리잡게 되면서, 그 이전의 천동설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발전된 기하학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움직임을 보여주며, 우주의 구조를 보다 완벽하게 설명하려 했습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연주시차의 미발견 때문에, 기본 사상은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보는 사상이 이들의 우주론이 됩니다.
아폴로니우스(Apollonios)는 주전원(epicycle)과 이심원(eccentric circle)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행성의 밝기 변화와 역행운동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주전원이란 궤도상의 점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돌고 있다는 개념이며 행성이 주전원 궤도를 돌게 되면 그림에서처럼 역행운동의 현상이 설명이 됩니다. 이심원은 회전의 중심과 지구의 중심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정하는 것입니다(이것은 타원운동과는 다른 개념입니다). 대원이 이심점을 돌면서 행성은 지구에서 가까워지고 멀어지게 되며 그렇기 때문에 행성의 밝기의 변화가 생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전원과 이심원이라는 개념으로 이전에서 설명하지 못하던 하늘의 움직임을 설명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천동설은 확고하게 굳어가기 시작합니다.
또한,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주장이 되어왔고, 그것을 이 시대의 에라토스테네스(Erathosthenes)는 단지 막대기 하나만을 가지고 1%이하라는 오차율로 지구의 구체의 크기를 구하게 됩니다(둘레 3만 9천 6백 90km, 현재 측정값보다 430km정도 작은값) . 하지만 그 값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너무나 큰 값이였기에 인정이 되지 않았고 그 후 포시도니우스(Posidonius)가 측정한 값(둘레 2만 8천 8백km)가 인정이 되게 됩니다.
히파르쿠스(Hipparchus)는 밤하늘의 별들의 위치를 정확하게 기입하기 위해서, 별들을 밝기 순으로 구별을 하고, 그 위치를 좌표를 이용을 해서 결정짓는 성표를 제작하게 됩니다. 히파르쿠스의 별의 밝기의 분류법(등급(magnitude)의 사용)은 후에 ‘포그슨의 방정식’이라고 불리는 정량화된 공식이 등장함으로써 오늘날에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또한 히파르쿠스는 옛날부터 내려오는 북극성의 위치가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는 것을 알고 세차운동을 알아내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태양의 운행표를 만들고, 각 계절이 변화하는 이유가 아폴로니우스가 제안한 이심원을 따라서 태양이 돌고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설명을 합니다. 이로써 후기 그리스 시대에 제안된 행성운동에서 생겨나는 계절간의 문제와 행성의 운동, 그리고 행성의 밝기 변화에 대한 문제점은 해결이 됩니다.
헬레니즘의 마지막 천문학자로 불리는 프톨레마이오스(Ptolemy)는 이런 내용들을 집대성하여 알마게스트(Almagest, ‘가장 위대한 책’이라는 의미)라는 저술을 남깁니다. 이 책에서 그는 그때까지 전해내려오는 천문학적인 지식을 모두 정리 기술하고 있으며, 거기에 더욱 발전시킨 자신의 이론을 첨가하여, 완벽한 지구 중심이론을 내세우게 됩니다. 이 사상은 그리스시대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완벽하게 설명해주게 되어, 당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지지하던 일반 시민들의 환영을 받게 됩니다. 이후 로마를 거쳐, 그리스도교가 국교로 성립되면서 지구를 중심으로 하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구조가 정식으로 채택이 되면서 그 후 약 1400년 동안 우주구조의 표준모델로써 사용되게 됩니다.
대체적으로 헬레니즘 시대에는 실용적인 학문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면 후기 그리스시대의 수리천문학이 발전한 듯한 인상이 들 듯 합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천문학적인 우주구조가 확립되어가는 과정은 밤하늘에서의 행성의 움직임을 정확히 예측하여, 그것을 점성적인 면에서 사용하기 위해서 였다고 봐도 무관할 듯 합니다. 즉 하늘의 구조를 더욱 이해함으로써 밤하늘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미리 예측하기 위해서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운동을 그때까지 관측된 사항과 맞추어나가는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즉 후기 그리스시대의 관념론적인 천문학이 아닌, 실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 우주의 구조를 확립해나갔다고 볼 수 있습니다.
5. 로마시대 - 유럽과학의 암흑기의 시작
이탈리아에서 발전하여 세계 최대의 제국이 되었던 로마제국의 역사를 일일이 서술하는 것은 아마 끝이 없을런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로마가 헬레니즘 문명을 정복한 후로부터 그리스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많은 과학 분야를 그리스에서 고스란히 전승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시대의 과학은 그다지 발전하지 않았는데, 이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노동력이 풍부한 로마제국에서는 기술의 원리보다는 기술을 사용하는 방법에 더욱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새로운 이론이나 사상이 발전하지 못해서 수학과 과학이 전반적으로 정체되는 현상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로마가 동로마와 서로마제국으로 분열된 후에는 도시문화가 쇠퇴하면서 정치적, 사회적 불안이 커지면서 과학을 연구하기보다는 신비적인 종교에 귀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됩니다. 이에 따라 과학역시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띄게 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며, 이스라엘에서 발달한 헤브라이즘 사상이 헬레니즘과 접촉하면서 생겨난 그리스도 신학이 생겨나게 되면서, 이후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채택이 되면서 이런 신비적이고 종교적인 색채를 가진 사상에 대한 이단박해가 생기게 되어, 많은 지식인들이 페르시아와 시리아지방으로 이주를 하게 됩니다.
이런 현상으로 인해서 많은 과학분야들의 연구 전통이 단절되면서 차츰 잊혀지게되고, 유럽의 중세시대는 과학의 암흑기가 계속 되는 것입니다.
중세의 천문학
1. 아랍과학의 부흥 - 아시아 지역의 과학의 흡수 발전
흔히 중세는 과학의 암흑기라고 합니다. 그러나, 유럽지역이 헤브라이즘에 의해 과학이 정체되어있는 동안에, 다른 지역들에서는 나름대로의 과학사상이 발전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로마의 박해를 피해 페르시아와 시리아지방으로 이주한 지식인들은 회교문명권에 그리스의 과학을 전파하게 되어, 아랍지역에서 과학이 부흥하게 됩니다. 회교문명권의 아바스왕조가 들어서면서 이런 지식인들이 남긴 서적들을 아랍어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많은 지식들을 흡수하는데, 이 시기에는 또한 인도와 아시아지역에서 유래된 지식들도 같이 흡수되게 됩니다.
아바스왕조 7대왕인 알-마문(Al-Mamun)은 아랍어로 번역된 인도 천문학과 그리스 천문학을 바탕으로 바그다드에 천문대를 설치하여 천문학을 발달시켰으며, 알-바타니(Al-Battani, 858∼929)는 천체관측을 위한 기구를 마련하여 달의 궤도를 계산하고 세차를 계산하였는데, 41년간 천체관측 후 천체의 운동을 예측할 수 있는 천문계산표를 작성하였습니다. 이븐 유니스(Ibn Yunis, ?∼ 1009)는 과거 2백년의 관측결과를 바탕으로 <하킴천문표>를 작성하게 됩니다. 또한, 이렇게 번역되는 천문학적 내용들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표들이 제작되면서 많은 별 목록들이 등장을 하게 되고, 이때의 영향으로 지금도 많은 별이름들 중에는 아랍어가 섞인 것도 많이 있습니다.
아랍의 과학은 천문학 뿐만아니라 수학, 광학, 연금술, 의학 등등 많은 분야에 걸쳐서 발전을 했지만, 그리스 시대에서처럼 이성에 의한 새로운 문제제기가 없었다는 점에서 발전의 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즉 번역사업으로 인한 지식의 수용은 했었지만, 이슬람교의 관점에 의해 새로운 문제제기는 억제되었고, 보수파들에 의해 조금씩 탄압을 받기 시작하면서 아랍의 과학은 쇠퇴해가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랍과학은 고대 중국과 인도의 동양권에서 발달한 과학과 헬레니즘의 과학을 같이 흡수하여 더욱 수준을 높인 다음, 다시 유럽으로 넘겨주었다는데 의의가 있습니다. (이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도로부터 도입된 0의 개념입니다. 0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산술이 쉬워졌기 때문이지요.)
아랍과학은 770년경쯤에 대두되서 대략 A.D 800년~1200년 사이에 발전하게 되고, 다시 유럽으로 번역된 서적들이 전해지면서 1200~1600년까지 아랍의 지식이 유럽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2. 중세 유럽의 작은 진전들
그렇다면, 중세 유럽에서는 아무런 발전없이 기원 직후의 그리스 과학이 그대로 내려갔는가? 라고 묻는다면, ‘대체적으로 그렇다’라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화가 발전하면서 작은 진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점성술은 천문학으로부터 분리가 되게 됩니다. 그 당시에 종교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던 점성학은 반은 이단으로 규정지어져서(주3), 많은 박해를 받으며 유럽쪽에서는 많이 사라지게 됩니다. 점성 역시 아랍으로 넘어갔다가 12세기 후반에 다시 유럽으로 전해지게 되지요.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에서 나오는 천계는 에테르(aither)라는 물질로 차있다는 생각도, 진공의 개념이 도입이 되면서, 진공우주론이 등장하게 됩니다. 또한 행성들의 등속도 운동에 대해서 등가속도 운동의 가능성도 제기가 되며, 복수 우주론도 등장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가지 이론들은 신학을 바탕으로 우주를 좀 더 조화롭게 설명하기위해서, 기하학과 수학으로 현상의 문제점만을 해결하고, 그 원리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근본적인 변혁은 없었고, 작은 세부사항들만 조금씩 바뀌어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주3) 4세기경 예수 그리스도의 호로스코프(Horoscope, 출생천궁도)를 그려 예수의 삶을 점성적으로 해석해보려는 사건이 있은 후에 더욱 심해졌었다. 결국 AD 570년경 세빌레의 교주 이시도루스(Isidorus)에 의해 점성학과 천문학은 분리되게 된다.
과학혁명의 시기
1. 르네상스 - 변화의 시작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르네상스라고 불리는 문화적인 변화의 시기를 르네상스라고 합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한다는 것은 또 이 글의 내용과 약간 동떨어지게 되므로 간략히 줄여볼까 합니다.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서유럽의 각국으로 퍼져나간 르네상스 현상은 나라마다 각기 성격을 달리하며 전개되었던 복잡한 문화현상이고, 또한 근대 문화와 연계되는 관계도 다양합니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기본 본질은 고전고대의 문화, 즉 헬레니즘의 문화를 의식적으로 부흥시킴으로써 그 당시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헤브라이즘 사상에 반하여 새로운 문화를 창출한다는 공통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의 마지막에 나타난 르네상스에서는 비록 과학의 중요한 발견이나 창조는 없었기에, 근대과학의 뿌리를 르네상스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사변적인 철학이 주 학풍을 잡고 있던 시절에, 종래의 학자적 사고의 전통과 수공업에 종사하는 직인(職人)의 전통이 결합하는 계기가 되어 실험과 실용의 정신을 낳았다는 데에 과학적인 중요성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르네상스의 정신이 바탕이 되어 16세기후반에 들어서면서, 과학혁명이 시작되게 됩니다.
2. 과학혁명의 시작 - 지동설의 발표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된 대항해시대에 접어들면서, 항해를 하면서 천동설에 근거한 모델로는 점차 천체의 위치가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현상이 발생하면서, 불편함이 따른다는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로마시대에서 전해온 율리우스력이 실제 절기보다 느려지게 되는 현상도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두 가지의 문제점이 중세 천문학에서 큰 문제로 대두되게 되어서, 많은 천문학자들이 천동설을 계속 보완, 수정하게 되면서 천동설상에서의 천체의 움직임은 아주 복잡한 모습을 띄게 됩니다.
폴란드의 성직자였던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1473~1543)는 이런 복잡한 움직임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찾다가, 고대 그리스시대의 아리스타르쿠스의 이론을 개량하여,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태양중심설, 즉 지동설에 대한 내용을 그의 저서 ‘De revolutionibus orbium coelestium(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를 통해 1543년에 발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론을 발표하기를 꺼렸는데, 자신이 성직자라는 입장과 당시의 분위기 속에서 자신의 이론이 이단이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임종직전까지 책의 출판을 보류했었고, 책의 견본쇄는 그가 임종을 하던 1543년 5월 24일에 그에게 전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였던 오지안더는 책의 서문에 ‘이 지동설은 하나의 가설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서문을 붙였는데, 교리에 위배되어 박해를 받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이런 우여곡절 속에서 발표된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 자신이 예측한 것처럼 당시 교회의 반발과 박해를 받게됩니다. 일례로, 이후에 코페르니쿠스의 이론을 사람들에게 강연하고 다닌 이탈리아의 천문학자 G.브루노의 경우는 교회로부터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고, 유명한 G.갈릴레이의 경우도 교회의 종교재판에 회부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는 1616년의 갈릴레이의 종교재판이후로 교황청에 의해 1835년까지 200년이 넘게 금서목록에 오르게 됩니다.
또한, 코페르니쿠스 자신도 자신이 관측한 결과에 의해서 지동설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천동설에서 나타나는 천체운항의 복잡성을 간결화 시키는 것만을 목적으로 했을뿐이기에, 원궤도와 등속도 운동으로만 설명을 하려 했기 때문에, 약간씩 관측결과와 어긋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주전원의 개념을 다시 도입을 하게 됩니다. 토마스 쿤이 코페르니쿠스를 일컬어서 ‘최후의 프톨레마이오스 학파의 천문학자이며, 동시에 최초의 근대천문학자’라고 이야기하는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하지만,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점점 복잡해져만 가는 천동설에 비해 훨씬 간결한 모델이였기 때문에, 당 시대에는 인정을 받지는 못했지만, 다음 세대의 사람들에 의해 점점 보완이 되어갑니다. 그리고 지동설에서의 움직이는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서 역학과 과학이 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기 때문에, 과학혁명의 시발점은 지동설이 제안된 1543년으로 보는 것이 보통입니다.
3. 천동설 패러다임의 붕괴 - 티코에서 뉴턴까지
코페르니쿠스가 사망하고, 3년후 덴마크에서는 관측의 천재라고 불리는 티코 브라헤(Tycho Brahe, 1546~1601)가 태어납니다. 티코는 망원경이 개발되기 직전의 사람으로, 그가 관측한 값은 오늘날 정밀기기로 관측한 값과 크게 오차가 나지 않을 정도로 정밀한 관측을 했습니다. 그리고 1572년 우리 은하 내에서는 2번째의 초신성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은 항성계는 변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우주관에 대립되는 최초의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티코는 이 초신성의 광도 변화를 연구함으로써 유명해졌으며, 1575년 덴마크의 황제인 프레데리크 2세는 티코에게 호벤섬을 하사하게 됩니다. 여기에 ‘우라노엔보리’라는 천문대를 세운 티코는 항성과 행성의 위치를 관측하는데 주력하게 됩니다. 1577년에는 대혜성이 지구에 접근을 했는데, 티코는 이 혜성을 면밀히 관측하여, 이 혜성이 화성궤도보다 먼 곳에 있다는 것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는 혜성이 지구 대기 안쪽에서 생긴다는 그때까지의 사상에 반하는 것으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수정천구론이 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티코는 지구가 공전하면서 생기는 연주시차를 관측할 수 없었기에(주4),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인정하지 않습니다만, 또한 천동설 역시 위의 사건들로 인해서 믿을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의 새 우주관을 만들게 됩니다. 티코의 이론에 의하면, 태양은 지구 주위를 돌고 나머지 행성들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형태가 됩니다. 하지만, 그 역시 프톨레마이오스의 우주관인 등속운동과 원운동이라는 고정관념을 탈피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이론 역시 많은 사람에게 인정을 받지는 못하게 됩니다.
티코의 임종 후, 그가 남긴 관측자료는 그의 마지막 조수였던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0)에게 넘겨지게 됩니다. 티코가 사망하기 몇해 전인 1596년에, 독일 신부인 파브리치우스(Favricius)가 고래자리에서 장주기 변광성인 미라(Mira)를 발견하게 되고, 또한 케플러 자신도 뱀주인자리에서 초신성을 관측하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사건들은 천동설에 대한 의문을 더욱 가중시켰고, 케플러가 행성궤도에 집착하게 된 것도 이런 일들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주5). 결국 1609년, 티코가 남긴 화성궤도에 대한 관측자료를 바탕으로 유명한 케플러의 제1법칙인 ‘타원궤도의 법칙’과 제2법칙인 ‘면적속도 일정의 법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로써 프톨레마이오스 우주론에서 나타나는 등속운동과 원운동이 깨어지게 됩니다. 케플러 자신도 ‘등속운동과 원운동’이라는 고정관념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자기가 도출해 낸 결과를 믿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스승인 티코의 관측능력을 굳게 믿었기 때문에 결국은 발표를 했다고 하는군요. 이로써 지동설은 수학적인 근거를 얻게 됩니다.
케플러는 그후 10년이 지난 1619년에 ‘우주의 조화’라는 책에서 위에서 이야기한 두 법칙과 마지막 케플러의 3법칙인 ‘조화의 법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3법칙은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은 행성의 궤도 장반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내용으로, 이 법칙은 나중에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만유인력이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케플러 자신은 행성을 움직이게 하는 힘으로, 태양에서 나오는 신비한 힘인 아니마 모트릭스(Anima Motrix)와 자기력으로 설명을 하게 됩니다.
케플러가 행성궤도에 대한 법칙을 발표함으로써 지동설에 수학적인 근거를 확립하고 있을때,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는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가 처음으로 망원경을 이용한 천체관측을 하기 시작합니다. 사실 망원경은 16세기 말에 네델란드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지만, 대부분 항해용으로 이용하는 지상망원경으로 사용되었던 것에 비해 갈릴레이는 스스로 개량을 하여 처음으로 천체를 관측하고 기록을 남기기 시작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망원경을 이용하여, 천동설에서는 설명할 수 없는 여러 현상들을 발견하고, 지동설에 대한 믿음을 굳히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로마교황청에 의해 반발을 사게 되고, 결국 2번에 걸친 종교재판 후에 지동설에 대한 언급은 하지못하도록 판결을 받게 됩니다. 그가 남긴 저술중에서 ‘천문대화’라고 줄여서 이야기하는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와의 2대 세계체계에 관한 대화’라는 책(1632년 발간)에서는 그의 지동설적 사상이 나타나 있습니다. 또한 갈릴레이는 천문학 뿐만 아니라, 물리학적인 운동의 관계, 즉 역학에 대해서도 열심히 탐구를 했는데, 그것은 지동설을 확신하는 입장에서 행성의 운동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는 노력이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서 비록 제제를 당했지만, 그는 이전까지의 이론적인 과학에 반해서 실험과학을 중요시 여기고 그것을 실행하였다는데 의의를 둘 수 있습니다. 이런 생각은 후에 영국의 베이컨과 프랑스의 데카르트로 이어져서, 자연계의 현상은 기계처럼 움직이며, 그 원리는 인간의 이성으로 알아낼 수 있다는 기계철학의 원류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천동설은 어느 한순간에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천동설을 모순점이 없게 만들더라도 다시 모순이 생겨남에 비해서, 지동설은 위에서처럼 차츰 보완이 되면서, 더욱 간결하게 천체의 운동을 설명할 수 있게 됨으로써, 차츰 채택이 되어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천체의 운동을 처음으로 완벽하게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이 아이작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입니다. 그는 1687년에 발간한 프린키피아(Principia)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 위헤 운동의 3법칙에 대해 설명을 하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유도해 내게 됩니다. 이로써 천체의 운행에 대한 예측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발표에서 뉴턴의 만유인력법칙 발표까지의 기간동안에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패러다임이 차츰 교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주4) 연주시차는 1838년 프리드리히 빌헬름 베셀에 의해 발견된다. 이때 관측된 별은 백조자리 61번별로 그 값은 0.31″였다. 맨눈으로는 절대로 관측할 수 없는 작은 값이기에 티코는 연주시차를 발견할 수 없었다.
(주5) 케플러는 브라헤를 알기이전인 1595년에 우주의 신비라는 책을 통해 천동설에서 이야기하는 수정천구론과 비슷한 정다면체 우주론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하지만 1609년에 발표한 그의 이론은 천동설을 완전히 부정하는 내용이 된다.
근대천문학과 현대천문학
1. 태양계의 범위 확장 - 새로운 행성들의 발견
패러다임의 교체기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문제는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장비로는 다른 천체들의 변화가 아주 극명하지 않으면 - 예를 들어, 초신성같은 경우 - 변화의 정도를 관측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측할 수 있는 범위인 행성의 움직임에 대한 논의가 가장 대두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17세기 말부터 발달하기 시작한 광학기기들과 여러 가지 장비들이 발전하기 시작하면서 많은 발견이 이뤄지게 되고, 또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물리학이 발전하면서 천문학에 응용됨으로써 천문학이 다루는 범위는 조금씩 넓어지게 됩니다. 그 중에서 18세기부터 19세기동안에는 새로운 행성들이 발견되면서 태양계의 범위도 조금씩 넓어지게 됩니다.
1781년 영국의 천문학자인 허셜(William Herschel, 1738~1822)은 자신이 만든 자작망원경으로 하늘을 관측하던 중에 성도에 기입되지 않은 새로운 천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자신은 이것을 혜성으로 생각했지만, 영국 왕립협회에서 그 천체의 궤도를 계산해본 결과 새로운 행성임을 밝혀내게 됩니다. 허셜의 새 행성인 천왕성의 발견은 태양계의 범위에 대한 확장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허셜 이전에 1766년 독일의 수학자 티티우스(Johann E. Titius, 1729~1796)는 하나의 수열을 제안하는데 이것을 1772년에 베를린천문대 대장이였던 보데(Johann E. Bode, 1747~1826)가 공표합니다. 이 수열의 식은 그 당시에 알려진 행성들을 지구까지의 거리를 1로 했을 경우에 나머지 행성들의 위치가 수열로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험식입니다.
d=0.4 +(0.3×2n)(n=-∞, 0, 1, 2, 3...) 으로 나타나는 티티우스-보데의 법칙에서, 허셜이 발견한 천왕성은 n=6일때 거의 들어맞게 됩니다(천왕성까지의 거리 19.11AU, 티티우스 수열에서 19.6).
보데의 법칙이 새로운 행성에도 적용이 되자, n=3인 곳, 즉 2.8AU지점에 그때까지 밝혀지지 않은 행성이 있을 것이라 생각되어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각 나라에서 조직적으로 시작되게 됩니다. 하지만 1801년 1월 1일, 이런 시도와는 관계없이 나폴리 천문대에서 독자적으로 항성목록을 제작 중이던 피아치(Giuseppi Piazzi, 1746~1826)는 어두운 별을 발견하고, 그것을 기록해둡니다. 2일후인 1월 3일, 기록해둔 별이 위치를 바꾸었다는 것을 발견한 피아치는 혜성으로 생각하고 두달간 관측을 계속하면서, 이 별이 2.77AU지점에서 움직이는 행성임을 알아내게 됩니다. 피아치에 의해 새로운 행성이 발견되었지만, 그 후에도 비슷한 거리의 위치에서 속속 새로운 행성들이 발견되는 것이 알려지고, 이 행성들이 기존의 행성보다 너무 작기 때문에 행성이라기보다는 Asteroid(별과 같은 것이라는 의미)나 Minor Planet(소행성)으로 불리게 됩니다.
소행성들과 천왕성은 보데의 법칙에 들어맞지만, 그 후에 발견된 해왕성과 명왕성은 보데의 법칙과는 상당히 동떨어져 있습니다. 천왕성이 발견된 후에, 천왕성의 궤도를 계산해보던 학자들은 천왕성이 예측된 위치와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오차를 보이고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주6). 이것은 천왕성이 외부로부터 중력적인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르베리에(Le Verrier, 1811~1877)와 영국의 애덤스(J. C. Adams, 1819~1892)는 각자 독자적으로 천왕성에 영향을 주는 행성의 위치를 계산합니다. 1846년 9월 23일, 르베리에의 계산결과를 토대로 베를린천문대의 갈레(J. G. Galle, 1812~1910)는 예측위치에서 1°의 오차범위로 새로운 행성인 해왕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 계산결과를 두고 당시에는 ‘천체역학의 승리’라는 표현까지 사용하게 됩니다만, 해왕성 역시 천왕성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예측위치에서의 오차가 있다는 것이 밝혀지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시 해왕성에 중력적인 영향을 주는 행성을 찾는 시도가 시작되는데, 위에서 이야기한 ‘천체역학의 승리’라는 말이 무색하게 거의 100년간 새로운 행성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1930년, 미국의 퍼시블 로웰(Percival Lowell, 1855~1916)의 계산결과를 토대로 클라이드 톰보(Clyde W. Tombough, 1906~1997)가 쌍둥이자리에서 새로운 행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새롭게 발견한 명왕성은 달보다도 작은 천체임이 밝혀졌으며, 해왕성에 중력적인 영향을 주기에는 무리라는 것이 알려지게 됩니다. 실제로 톰보는 명왕성이 너무 작다는 것을 알고 나서, 사망하기 직전까지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는 시도를 계속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해왕성이 받는 섭동은 아직까지도 명확하게 풀리지 않는 형편이며, 새로운 행성을 찾으려는 시도로 카이퍼벨트(Kuiper belt)(주7)의 존재가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명왕성 바깥쪽에 있는 미지의 천체를 찾는 노력은 계속되고 있기도 하지만, 해왕성의 궤도오차는 중력섭동이 아니라 단순한 관측오차 내지는 궤도공명현상이라는 주장도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이렇게 새로운 행성들이 밝혀지면서, 태양계의 범위가 확장되고, 또한 태양계의 구조가 알려지게 되면서, 그 기원에 대한 연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될 수 있었습니다. 태양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서는 줄이도록 하지요.
(주6) 섭동(Perturbation)현상. 다른 천체들의 중력영향으로 행성의 궤도가 동요를 일으키는 현상.
(주7) 1951년에 미국 천문학자 카이퍼(Kuiper)가 주장한 소천체의 원반형분포대를 일컫는 말. 1992년 명왕성 바깥쪽에서 소행성이 발견되고 비슷한 소천체가 200여개정도가 발견되면서 카이퍼벨트의 존재가 입증되었다.
2. 태양계를 넘어서 - 우주론의 확립까지
태양계의 구성원 중에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혜성입니다. 물론 지금은 혜성을 태양계의 일원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뉴튼 직후의 근대천문학에서는 혜성은 가끔씩 돌발적으로 생기는 천문현상으로 인식되었으므로, 혜성이 생겨나는 원인이나 궤도의 추적은 상당히 중요한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705년, 영국의 헬리(Edmund Halley, 1656~1742)는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을 이용하여 그때까지 알려져온 24개의 혜성의 궤도를 계산해본 결과 1531년, 1607년, 1682년에 출현한 세 혜성이 같은 궤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혜성이 나타난 간격이 거의 같음을 알고 1758년경에 이 혜성이 되돌아 올 것을 예측합니다. 이것이 많은 사람에게 유명한 헬리혜성입니다. 그는 혜성이 되돌아오는 것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지만, 그의 예측이 맞았기 때문에(1758년 12월 25일), 이 혜성에 그의 이름을 붙여서 기리고 있습니다. 1818년에는 독일의 천문학자인 엥케(Johann Franz Encke, 1791~1865)가 3.3년의 주기를 가지는 혜성을 발견하고 혜성의 주기성에도 단주기와 장주기 혜성이 있다는 것을 밝혀내게 됩니다. 이처럼 혜성의 주기성이 발견되자 많은 천문학자들이 혜성연구에 많은 관심을 쏟게 됩니다.
엥케보다는 이전시대의 사람이지만 프랑스의 천문학자인 메시에(Charles Messier, 1730~1817)는 1759년 헬리혜성의 회귀를 관측하고 혜성연구에 전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혜성을 관측중에 망원경 상에서 혜성과 유사하게 보이는 성운과 성단들이 혜성관측을 하는데 오인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혜성으로 오인될만한 천체들의 목록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이 목록은 1781년에 103개를 수록하고 그의 사후에 추가되어 110개의 천체의 대상들을 담고 있습니다. 이 목록이 메시에 목록(Messier Catalogue)이며, 오늘날에도 아마추어들이 관측하기에 좋은 성운과 성단, 은하들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에목록의 기록에는 뚜렷한 산개성단이 아닌 이상 대부분 성운으로 기록이 되고 있는데, 그 당시에는 이런 성운과 성단들에 대한 정체가 파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로스 경(Sir Rosse, 정식작위는 로스 백작 3세)으로 더 많이 알려진 영국의 천문학자 윌리엄 파슨스(William Parsons)는 1842년당시 세계 최대인 반사망원경을 만들어서, 많은 성운과 성단들을 관측을 합니다. 그중 많은 성운들이 ‘나선’의 형태로 감겨있다는 것을 알고 이들을 따로 ‘나선성운(Spiral Nebula)’이라고 부르게 됩니다.
성운이나 성단이 하나의 계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은 독일의 철학자로 유명한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처음으로 제안을 합니다. 그는 우주 내의 다른 성단, 성운들이 우리은하처럼 하나의 우주일 것이라 생각하고 ‘섬우주’란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칸트의 제안은 논리적인 절차를 거친 것은 아니였지만,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이야기였기에, 많은 천문학자들이 섬우주의 증거를 찾으려 했지만, 다른 천체까지의 거리는 당시에는 태양계 내의 행성들에만 간신히 적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맞는 이야기인지 아닌지는 판별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태양계 외의 천체들에 대한 직접적인 거리를 재는 방법은 1838년에 베셀(Wilhelm Bessel, 1784~1846)이 연주시차를 발견하면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하지만, 연주시차로도 잴 수 있는 거리는 최대 500pc(파섹, 1pc는 3.26광년)이내의 천체에 대해서만 가능하고 그 너머의 천체들은 여전히 어느 정도나 떨어져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어버립니다. 500pc이라면 상당히 먼 거리인듯 하지만, 우리은하의 크기에 비하면 상당히 작은 값입니다. (현재 우리은하의 지름은 대략 7만광년~10만광년정도의 크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즉 연주시차로는 우리은하의 구조를 파악하기 위한 거리측정 척도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부족한 것입니다. 후에 우리 은하내에서의 태양의 움직임을 이용한 영년시차법이라는 것도 등장을 하지만 역시 우리은하의 전체적인 구조를 판별하기에는 어렵습니다.
이런 측정상의 문제는 1912년이 되어서 미국의 천문학자인 리비트(Henrientta S. Leavitt, 1868~1921)가 소마젤란 은하의 32개의 케페이드(Cepheid)(주8)들을 관측하면서, 이들이 주기가 긴 별일수록 밝은 별이라는 것을 알아내면서 해결되는 기미가 보입니다. 소마젤란 은하속에 있는 케페이드들은 같은 거리에 있으므로 이들의 밝기차이는 바로 절대등급의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개의 케페이드의 절대등급을 알게되면, 나머지는 절대등급의 차이에 의해서 판별이 되므로, 변광주기를 이용해서 별까지의 거리를 구하는 것이 가능해지게 됩니다. 하지만, 절대등급을 알기위해서는 별까지의 거리를 알아야하니, 연주시차로 잴 수 있는 케페이드가 있다면 필요한 ‘한 개의 케페이드의 절대등급’을 알아낼 수 있겠지만, 애석하게도 그 별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한 개의’ 케페이드까지의 거리를 구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그 방법은 너무 복잡하므로 이 글에서는 생략할까 합니다. 지금도 케페이드까지의 거리를 정확하게 재는 시도가 계속되는 것은, 이 방법이 우리 우주를 잴 수 있는 기준척도이기 때문입니다.
여하튼, 리비트의 케페이드법이 알려지고나서 섀플리(Harlow Shapley, 1885~1972)는 1914년 구상성단속의 케페이드들을 연구하여 주기-광도 관계곡선을 완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관측한 93개의 구상성단의 거리를 3차원적으로 재구성해본 결과,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닌 궁수자리의 어느 한점을 기준으로 구형으로 분포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구상성단의 분포를 이용해서 섀플리는 우리 은하의 모습을 상당히 정확하게 알아내게 됩니다만, 은하면 중심의 성간물질의 차폐현상으로 생기는 빛의 흡수를 생각하지 않았기에 지금의 측정값보다 3배정도 큰 은하의 모습을 그리게 됩니다.
그 후에 바데(Walter Baade, 1893~1960)는 은하 중심쪽을 향해서 성간흡수가 생기지 않는 작은 ‘창문’을 발견하게 되는데, 이곳에는 RR Lyrae(거문고자리 RR별)형 변광성들이 몰려 있었고, 이를 이용해서 오르트(Jan H. Oort, 1900~1992)는 은하의 거의 정확한 모습을 구성해냅니다. 지금은 전파천문학의 발달로 전파를 이용해서 은하의 모습을 거의 완벽하게 재구성하고 있습니다.
1924년 에드윈 허블(Edwin Hubble, 1889~1953)은 윌슨산의 100인치 망원경으로 그때까지 ‘나선성운’으로 알려진 천체들이 별들이 모여있는 하나의 계이며, 그 속에서 케페이드들을 발견하고 거리를 측정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우리 은하의 외부에 있는 천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혀내게 됩니다. 거의 200여년전의 칸트의 섬우주론이 입증이 되는 것이지요. 또한 허블은 1912년에 로웰천문대의 슬라이퍼(Slipher)가 발견한 적색편이(Red Shift)(주9)현상에 관심을 두고, 동료인 휴메이슨과 같이 많은 외부은하들을 측정하기 시작합니다. 허블 자신은 은하속에서 케페이드를 발견하여 거리를 재고, 휴메이슨은 적색편이의 정도를 조사합니다. 1936년, 이들은 “더 멀리 있는 은하일 수록 더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라는 허블의 법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이 허블의 법칙은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즉, 이것은 시간이 지난다면 우주의 크기가 더 커진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반대로 시간을 거슬러서 생각한다면 오래전의 우주는 지금보다 작았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의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라는 의문이 떠오르게 되고, 이것이 현대 천문학의 가장 큰 화두인 ‘우주론(Cosmology)’인 것입니다.
우주론은 1948년 조지 가모프(George Gamow, 1904~1968)에 의해서 ‘대폭발설(Big Bang Theory)’이 제안이 됩니다. 처음 제안된 빅뱅이론은 모순점이 몇가지 존재했기에 후에 이것을 수정한 ‘인플레이션 이론’과 ‘혼돈 인플레이션 이론’등으로 발전하고, 최근에 와서는 대통일장 이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되는 ‘초끈이론’이나 ‘막(Membrane) 이론등에서 주장된 빅스플랫(Bigsplat)우주론도 등장했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들을 설명하는 것은 지금까지 써왔던 글만큼의 내용보다 더 많은 내용이 될 것 같아서 생략할까 합니다.
즉 현대천문학은 지금까지 발전해온 많은 천문학적인 이론으로 ‘우주란 어떻게 구성되었는가’에 대해서 파악을 해 나가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파악을 하는데 있어서 인류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과학이 전부 들어간다고 해도 아마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주8) 케페우스자리 델타별과 같은 형태로 변광하는 변광성들을 분류하는 말. 변광주기가 다른형태의 맥동변광성들보다 상당히 규칙적인 것이 특징이다.
(주9) 점광원의 이동에 따라 생기는 빛 파장의 도플러효과. 멀어지는 빛은 스펙트럼상에서 적색으로 편향되고, 가까워지는 빛은 청색으로 편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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