由來朝貢於百殘而倭以辛卯年來渡高禮海廣開土太王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2014. 11. 16. 12:45우리 역사 바로알기

 

 

 

 

 

      

由來朝貢於百殘而倭以辛卯年來渡高禮海廣開土太王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조선국 대한제국 역사

2014/11/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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由來朝貢於百殘而倭以辛卯年來渡高禮廣開土太王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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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의 입비(立碑) 목적은 '是(廣開土太王陵)立碑 銘記勳積 以示後世 어시(광개토태왕릉)입비 명기훈적 이시후세' 로서 광개토태왕릉(廣開土太王陵)에 비석을 세워 고례(高禮:Gorea B.C. ? - A.D. 683년) 광개토태왕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하여 이를 후세에 전하는 것이다. 따라서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훈적(勳積)을 명기(銘記)한 문장의 주어는 당연히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며 굳이 능비문(陵碑文)의 매 문장마다 명기(銘記)할 필요가 없다. 고례(高禮:Gorea)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백잔(百殘)의 비칭(卑稱))에서 고례(高禮:Gorea)의 백제에 대한 적대적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백제와 신라는 고례(高禮:Gorea)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4세기 고례(高禮:Gorea),백제,신라 3한국(三韓國)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할 수 있고 고례(高禮:Gorea)의 향후 백제에 대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의 국력이 강성해져 고례(高禮:Gorea)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았고 고례(高禮:Gorea)는 옛 날 조공(朝貢)해오다가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는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해 응징하려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의 고례(高禮:Gorea) 국왕 즉위 후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에 고례해(高禮海:Sea of Gorea)를 건너오자 백제와 왜(:일본)에 대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던 고례(高禮:Gorea)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고례해(高禮海:Sea of Gorea)를 건너온 왜(:일본)를 격파(고례(高禮:Gorea)를 배반한 백제 응징이 목적)하여 응징하고 백제,신라를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광개토태왕릉비(廣開土太王陵碑) 능비문(陵碑文)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百殘新羅 舊是(고례(高禮:Gorea B.C. ? - A.D. 683년))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高禮:Gorea)/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백잔신라 구시(고례(高禮:Gorea))속민(중반불공). / 유래조공(어백잔)이왜이신묘년내도해 / (광개토태왕) 파백잔여왜신라이위신민' 이다. '百殘新羅舊是(高禮)屬民 (中叛不貢). / 由來朝貢(於百殘)而 倭以辛卯年來渡(高禮:Gorea)/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의 신묘년(辛卯年) 기사는 일본군국주의가 일본에 유리하게 악의적으로 잘못 띄어읽고 해석한 능비문(陵碑文)의 문장을 올바로 띄어읽고 해석하여야 하며 일본에 불리한 '(廣開土太王) 破百殘與倭新羅以爲臣民' '與倭 新' 은 일본군국주의가 고의로 지운 것이다.백잔(百殘:고례(高禮:Gorea)가 배반한 백제(百濟)를 적대시하여 낮춰 부르는 비칭(卑稱))과 신라는 (고례(高禮:Gorea))에 속하는 옛 백성이었으나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다. 백잔(百殘)이 고례(高禮:Gorea)의 백제 인식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배반하여 조공(朝貢)하지 않았고 왜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받았으며 고례(高禮:Gorea)가 백제 응징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는 것은 능비문(陵碑文)에 명기(銘記)하지 않았으나 문맥의 흐름을 보면 알 수 있다. 중반불공(中叛不貢)4세기 고례, 백제, 신라 3한국(三韓國)의 역학관계의 변화를 확인시켜주고 고례(高禮:Gorea)의 향후 대 백제 강경정책을 예상할 수 있다. 백제(百濟)는 국력이 강성해져 고례(高禮:Gorea)에 조공하지 않고 강성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왜(:일본)를 제후국으로 삼아 조공을 받았고 고례(高禮:Gorea)는 배반한 백제를 괘씸죄를 적용하여 응징하려 하였다. 백잔(百殘:백제)의 제후국 왜(:일본)가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신묘년(辛卯年:391)에 고례해(高禮海:Sea of Gorea)를 건너오자 배반한 백제와 왜(:일본)를 응징하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던 고례(高禮:Gorea) (광개토태왕(廣開土太王))이 기다렸다는 듯이 친히 군대를 이끌고 백잔(百殘:백제)과 백제(百濟)에 조공(朝貢)하러 고례해(高禮海:Sea of Gorea)를 건너온 왜(:일본)를 격파(고례(高禮:Gorea)를 배반한 백제(百濟) 응징이 목적)하였고 백제,신라를 다시 신민으로 삼았다.

   3한국시대(三韓國時代:신라(新羅 Silla)·고례(高禮 Gorea)·백제(百濟 Baekje))의 고례(高禮:Gorea)가 유럽,서아시아 국가들에 알려진 것은 8세기 고례(高禮:고려 제왕운기,조선 세종실록)의 유민(遺民) 출신 당국(唐國)의 장군(將軍)인 고선지(高仙芝:Goseonji)의 중앙아시아(Central Asia) 원정(遠征) 활약 때문이며 국호(國號) 영문(英文) 표기(表記) Korea의 어원은 고례(高禮 Gorea:B.C. ? - 683)이다. 고례(高禮:Gorea) 유민 출신 당국(唐國)의 장군인 고선지(高仙芝:Goseonji)는 747년,750년 2차례 중앙아시아(Central Asia) 원정에서 동로마(Dongroma),아라비아(Alabia) 등 72개 국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사라센(Salasen) 제국의 동진(東進)을 저지하는 전공(戰功)을 올렸다. 서역(西域:Seoyeok) 각 국과 사라센제국 연합군과의 탈라스전투(Tallas戰鬪 Battle of Tallas)에서는 패퇴(敗退)하였으나 파미르고원까지 당국(唐國)의 영토(領土)를 확장(擴張)하였다.중앙아시아 원정(遠征)에서 활약한 고선지(高仙芝:Goseonji) 장군(將軍)에 의해 유럽,아랍국가에서 고례(高禮:Gorea)가 Corea,Coree 꼬레로 불리기 시작하였으므로 국호(國號) 영문(英文) 표기(表記) Korea의 어원은 고례(高禮 Gorea:B.C.? - 683)이다.

 

 

 

 

   프랑스인 르비뤽의 동방여행기에서 중국의 동쪽에 고례(高禮:Gorea)를 지칭하는 꼬레가 있다고 하였다. 1287년(고려 충렬왕 13) 이승휴(李承休)가 편찬한 제왕운기(帝王韻紀:Jewangwoonki)에 단군시대,고례(高禮:Gorea)를 기술하였고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世宗實錄:Sejongsillok)에도 고례(高禮:Gorea)를 기술하고 있다. 1930-5년 일본군국주의(日本軍國主義 Japanese militarism) 총독부가 중세 고려(高麗Goryeo 918-1393)의 아라비아(Alabia)와의 국제무역(벽란도(碧瀾渡))을 통해 우리나라가 유럽에 알려지게 되었다고 왜곡(歪曲)하였으므로 3한국시대(三韓國時代) 고례(高禮:Gorea)의 유민(遺民)인 고선지(高仙芝:Goseonji)의 중앙아시아 원정(遠征) 활약에 의해 고례(高禮:Gorea)가 유럽에 알려져 Corea(꼬레)로 불려지고 조선시대 후기,대한제국시대에 미국,영국,덕국(독일)에 의해 Korea(코레)로 불려지기 시작한 사실과 국호 영문 표기 Korea(고례)의 어원 고례(高禮 Gorea:B.C. ? - 683),대한시대(Daehan era:1897- )를 교육홍보하고 국호(國號) 영문(英文) 표기(表記) Korea(고례)를 Gorea(고례)로 변경(變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