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4)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1)

2014. 11. 17. 17:30우리 이웃의 역사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
   (4) 권력이란 무엇인가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


문리스 (남산 강학원)

 

7. 춘추 제1대 패주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1)


   노장공은 관중을 알아보지 못했고(노나라의 입장에서라면 관중을 잡아둘 수 없다면 차라리 죽여 없애는 편이 나았을 것이), 대부 시백과 장군 조말의 충정을 십분 활용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두고두고 노나라의 부담이 되어 끝내 나라가 기울어지게 되는 삼환(三宦) 세력을 남겼다.(지인(知人), 즉 사람을 알아보는 문제는 배움(學)과 더불어 「논어」를 관통하는 핵심 질문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한때 자신을 죽이려했던 정적 관중을 기어이 살려내 자기 사람으로 만들면서까지 강력한 권력 의지를 내보였던 제나라 환공의 운명은 어떠했을까. 보통 말하길, 제나라 환공으로부터 춘추시대의 패도(覇道)정치를 이야기한다. 제환공은 이른바 춘추시대 1대 패주(覇主)다. 

 

 

 


   제환공의 형이었던 제양공(襄公)이 노나라 환공(桓公)의 부인이자 자신의 여동생이던 문강(文姜)과 사사로이 정을 통하다 노나라 환공에게 들켜 끝내 노환공을 살해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앞에서 말한 바 있다. 어찌됐건 이 사건은 제나라의 무력(武力)함과 노나라의 무력(無力)함으로 인해 유야무야 돼버렸지만, 양공 사후 제나라는 형제들에 의한 권력 투쟁이 본격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둘째 왕자인 규(糾)를 미는 관중․소홀 등과 그 다음 동생인 왕자 소백(小白)을 미는 포숙 등의 정쟁에서 마침내 소백이 승리함으로써 제나라는 가까스로 정국이 안정될 수 있었다. 바로 이 왕자 소백이 제환공이었던 것.
    제환공과의 권력 싸움에서 패배한 공자 규는 관중․소홀 등과 함께 노나라로 숨었다. 이에 제환공은 노나라에 편지를 보내 말한다.

 

“공자 규는 내 형제라 차마 내가 잡아 죽일 수 없으니 노나라 군주께서 알아서 처리해주시기를 부탁한다. 하지만 소홀과 관중은 나를 죽이려 한 원수이니 내가 직접 그들을 산 채로 잡아 젓갈로 담그려 하니 생포하여 인도해주시기 바란다. 그렇지 않으면 제나라는 곧 노나라를 포위하지 않을 수 없다.”

(<제세가>)

 

   노나라는 공자 규를 잡아 죽였고, 소홀은 이 소식을 듣고 자살했다. 하지만 관중은 감옥에 갇혀 제나라로 호송되기를 원했다. 이때 관중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사실 관중을 젓갈로 담가 복수하겠다는 제환공의 분노(!)는 관중을 산 채로 얻기 위한 공갈 액션이었다. 자신이 직접 죽일테니 절대 산 채로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이 이 편지의 핵심이다. 여러차례 말했지만 제환공의 이러한 의도를 노나라 대부 시백은 정확하게 꿰뚫어보았다. 하지만 우유부단한 장공이 끝내 관중을 산 채 돌려보냈던 것이다. 한편 일찍이 공자는 관중이 아니었다면 중국은 진작에 오랑캐의 땅이 되었을 것이라며 관중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사마천은 열전 70편의 두 번째 편에서 관중을 다루고 있다. 백이라는 상징적 인물을 제외한다면 사실상 춘추시대 첫 번째 인물로 다루고 있는 셈이다.

 

“내가 가난하게 살 때 포숙과 장사를 한 적이 있었다. 이익을 나눌 때마다 내가 더 많은 몫을 차지하곤 했지만, 포숙은 나를 욕심쟁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내가 가난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찍이 포숙을 대신해 어떤 일을 도모하다가 그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지만, 포숙은 나를 어리석다고 말하지 않았다. 일에는 유리할 때와 불리할 때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또 내가 일찍이 세번이나 벼슬길에 나갔다가 세 번 다 군주에게 내쫓겼지만, 포숙은 나를 부족한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일찍이 세 번 싸움에 나갔다가 세 번 다 달아났지만 포숙은 나를 겁쟁이라 말하지 않았다. 내가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공자 규가 군주 자리를 놓고 벌일 싸움에서 졌을 때 나와 같이 규를 도왔던 소홀이 자결했어도 나는 붙잡혀 굴욕스런 목숨을 이어갔지만, 포숙은 나를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내가 작은 일에는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천하에 이름을 날리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함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낳아준 이는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이다.“

(<관안열전>)

 

   <관안열전>에 보이는 관중의 모습을 보다보면, 실제로 노나라에서 죽음을 앞에 둔 관중은 은근히 제환공의 오른팔인 자신의 절친 포숙을 믿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떻게든 제나라로 산 채 갈 수 있다면 제나라에서는 포숙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는 계산. 본래 제환공은 권력을 잡은 직후 관중을 죽여 없애려고 했다. 하지만 어찌됐건 관중은 끝내 살았고 춘추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긴다.(사마천은 백이를 통해 천도(天道)를 물으며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싶었던 마음만큼이나, 관중을 통해서는 제대로 된 ‘때’를 만나기 위해서라면 상당한 굴욕의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심지어 관중 자신을 돌보고 살펴준 포숙보다도 높은 지위 및 부와 명성을 누렸다. 대체 관중의 역할이 무엇이었길래.

 

 

 


8. 춘추 제1대 패주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2)


   춘추 시대를 배경으로 말할 때, 관중(管仲)이라는 이름은 한 두마디로 요약할 수 없는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 이름이다. 사마천은 관중편에서 관중을 이야기하면서 그가 정치를 하면 재앙이 되는 일도 복이 되었고, 실패할 일도 성공이 되었다고 썼다. 또한 나라 안의 물가를 정확히 따져 민심을 안정시켰다. 하지만 여기 제환공과의 관계에서 관중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 묻는다면, 그것은 한 마디로 어떤 일관된 포즈의 부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요컨대 관중은 제환공에게 하나의 스타일(style)을 제공했다.
   패도(覇道) 정치는 흔히 힘을 앞세운 정치 이념인 것처럼 알려져 있다. 주(周)나라의 종법(宗法)질서에 의해 엄격히 내재화되어있던 수직적 위계가 흔들리게 되면서, 힘(武力)을 앞세운 제후국이 스스로 천하의 대장 노릇을 하겠다고 욕망하는 정치 이념이 패도라는 것이다. 물론 패도를 이렇게 말하는 것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결정적인 하나의 전제가 필요하다. 그것은 권력, 특히 정치권력은 단지 막강한 무력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등 뒤로 날카로운 칼을 숨기고 있더라도 겉으로는 절대 칼로 상대를 위협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면 안 된다. 예컨대 포숙이 제환공에게 관중을 천거하면서 했던 말. ‘제나라를 다스리려면 포숙 자신으로도 충분하겠지만, 장차 패왕이 되고자 한다면 관중이 아니면 불가능합니다.’

 

 

 


   과연 포숙의 통찰대로였다. 관중은 제환공을 단지 힘센 패주로 만든 게 아니다. 관중은 제환공을 역사상 첫 번째로 스타일 있는 군주로 만들었다. 어떤 스타일인가. 신의(信)과 명분(名)이라는 스타일이다.
   제환공 5년의 일이다. 제나라는 노나라를 공격해서 노나라의 성을 빼앗았다. 제환공은 노나라 장공과 가읍(柯邑)땅에서 회맹하려고 했는데, 노장공이 맹세를 하려고 할 때 갑자기 노나라 장수인 조말(曹沫)이 비수를 들고 단상에 뛰어올라 제환공의 목을 겨누며 노나라로부터 빼앗은 땅을 되돌려줄 것을 요구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아무런 방비도 할 수 없었던 제환공은 조말에게 땅을 돌려주기로 약속했다. 조말은 제환공이 약속하자마자 칼을 내던지고 신하의 예를 갖추었는데, 제환공은 화가 나서 땅도 돌려주지 않고 조말도 죽이려고 했다. 그러자 관중이 나서며 제환공을 말렸다.

 

“안됩니다. 위협을 받아서는 허락하고 위협이 사라졌다고 약속을 저버리면서 그를 죽인다면 이것은 단지 작은 즐거움(이익)을 더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천하의 제후들에게는 신의를 저버린 사람이 되고 아울러 천하의 지지를 잃게 될 것입니다.”

(<제세가>)

 

   제환공은 관중의 말을 따랐다. 비록 조말이 칼을 들고 위협해서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한 약속이기는 했지만 한 번 내뱉은 약속은 지킨다는 것. 이로 인해 제나라는 세번의 싸움을 통해 얻은 땅을 모두 노나라에 다시 내주어야 했지만, 다른 한편 이것은 천하의 다른 제후들에게 제환공이 보내는 일종의 신호였던 셈이다. 과연 제후들은 이 소식을 듣고 제나라를 믿고 의지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제환공 7년에 이르러 제환공은 처음으로 춘추 시대의 패주(覇主)로 제후들을 회맹(會盟)시켰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북쪽 오랑캐인 산융(山戎)이 연(燕)나를 공격하자 연나라가 제나라에 도움을 청했다. 오랑캐와 오랑캐 아님의 구분은 분명하다. 주(周)나라의 질서에 포함되는가 아닌가의 여부인 것. 요컨대 주나라로부터 봉지(封地)를 받은 제후의 나라이거나 기타 주나라의 질서를 따르는 나라들과 그 밖의 외부 정치 세력들이 나뉘어 있는 셈이다. 어쨌든 제환공은 즉시 연나라를 구원해 대신 산융을 물리친다. 이 과정에서 제나라는 멀리 고죽(孤竹)국까지 갔다가 돌아오게 되었고, 연나라 장공(莊公)은 고마움을 전하려 직접 제환공을 배웅했다.
   그런데 두 군주가 환담하는 사이 어느새 연나라 장공은 제나라 국경 안까지 들어서게 되었다. 비록 제환공이 당시의 실질적 대장이긴 했지만, 시대는 엄연히 아직 주나라의 시대였다. 그런데 주나라의 예법에 따르면 천자가 아닌 제후국끼리는 서로 전송할 때 국경을 넘을 수 없었다. 연나라 입장에서는 의도치 않게 무례를 범한 셈이었다. 

 

 

 


   제환공은 재빨리 그 자리를 경계로 도랑을 파서 장공이 넘어온 곳까지의 땅을 연나라의 땅으로 내주었다. 그리고는 연나라 장공에게 앞으로 더욱 힘써 연나라 시조인 소공(召公)의 어진 정치를 다시 펼칠 것을 강조하고, 예전처럼 다시 주나라에 공물을 바칠 것도 명했다. 연나라 입장에서는 복도 이런 복이 없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제나라가 구해준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군주가 범한 실수까지 되려 선물로 돌려주었을 뿐 아니라, 끊어진 중원의 질서와 다시금 관계가 복원되는 외교적 성과까지 얻게 된 셈이다.
   이에 비하면 제나라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남의 나라 전쟁에 군사를 일으키느라 국력을 소모했고, 자신들의 땅을 외국에 넘겨줬을 뿐이다. 하지만 이 모든 손해(!)는 다른 제후국들의 복종으로 되돌아왔다. 진정 어느 쪽이 이익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당연히 제나라의 이익이 크다. 그러니 관중의 역할은 단지 제나라를 위해 힘센 패왕의 나라를 만들어주었다는 데 있지 않다. 패주는 단지 힘이 센 군주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진정한 권력은 자신의 힘을 직접 사용하는 것 이상으로 끊임없이 힘들이 자신을 통해 흘러 넘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것. 춘추 시대 돌연히 등장한 뉴스타일의 군주 제환공이 보여준 남다른 정치 감각에는 늘 관중이 그 뒤에 있었다는 것.   (to be continued…)

 

 

moving-vision.tistory.com/473   Moving Vision Quest   자료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