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문공(晉文公) 이야기(1)

2014. 11. 17. 17:43우리 이웃의 역사

 

 

 

 

 

       진문공(晉文公) 이야기(1)

글로벌/사기 2014/10/13 07:00

진문공(晉文公) 이야기(1)


문리스 (남산 강학원)

 

1. 아버지와 아들 - 모두가 아는 공공연한 비밀 관계


    진(晉)나라 문공은 춘추 시대 두 번째 패주(覇主)이다. 이름은 중이(重耳). 헌공(獻公)의 두 번째 아들이었다. 헌공에게는 자식이 많았다. 큰아들은 이름이 신생(申生)이고, 어머니가 제환공의 딸(齊姜)이었다. 하지만 제강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헌공의 셋째아들은 이름이 이오(夷吾)이다. 중이와 이오의 어머니는 모두 적나라 고씨인데, 자매였다. 이외에도 헌공은 여섯 명의 아들이 더 있었는데, 여기에 다시 또 여융(驪戎)을 정복하고 여희(驪姬)를 얻어 해제(奚齊)를 낳았고, 다시 여희의 동생에게서 도자(悼子)를 얻었다.
   해제를 얻고 난 이후, 아니 정확히는 여희를 얻은 이후 진헌공은 태자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태자로 삼고자했지만 대부들과 참모들의 눈치를 보느라 섣불리 밀어부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태자 신생은 물론 공자 중이와 이오는 아버지 헌공의 뜨뜻미지근한 태도가 장차 어떤 일을 불러올 것인지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었다.
   아버지와 아들. 도대체 이 두 존재간의 관계의 정체는 무엇일까.  

 


   오늘날과 같은 가족 이미지에서는 잘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사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대체로 화목하기가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진실에도 가까울 것이다. 굳이 군집 생활을 하는 동물 집단의 대장 동물과 그 자식들의 관계를 떠올려보지 않아도, 가까이서 흔히 보게 되는 인류의 역사가 증언하는 바도 크게 다르지 않다. 얼핏보면 인륜(人倫)이란 이름으로 이렇게 저렇게 컨트롤이 되는 것도 같지만, 오늘날에도 부자간의 권력 싸움을 구경(!)하는 일이 꼭 희귀하고 어려운 일인 것은 아니다. 형제끼리의 전쟁은 말할 것도 없이 더욱 치열하다.
   우선 진헌공은 여희와 해제를 데리고 도읍인 강(降)땅에 머물면서, 태자 신생에게는 반란(?)의 고장 곡옥땅을, 중이에게는 진(秦)나라 옆 포읍땅을, 그리고 이오에게는 정(鄭)나라 옆 굴읍땅으로 나아가 각각 살게했다. 또한 진헌공은 진(晉)나라에 상군과 하군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군 부대를 창설하면서 헌종 자신은 상군(上軍)을 거느리고, 나머지 하군(下軍)은 태자 신생으로 하여금 운용하게 하였다. 얼핏보면 태자 신생을 우대해 각각 군대를 나누어 가진 것 같지만, 사실은 태자 신생을 자신의 신하로 거느리겠다는 속셈이었다. 군대에 명을 내리는 일은 군주의 몫이어서 이렇듯 태자를 주군의 명령을 받기만 하는 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태자의 위엄을 세우지 않겠다는 뜻이기도 했던 것이다. 진헌공의 내심은 대부 사위(士蔿)와 신료(辛廖)와 이극(李克)과… 등등 모두가 알고, 마침내 태자 신생과 핵심 공자 중이와 이오도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2. 태자 신생, 자결로써 진나라 중건의 초석이 되다 


   결국 태자 신생은 자결을 선택(!)함으로써 한 많은 생을 마감한다. 사실 신생은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군사를 일으켜 죽기살기로 아버지와 권력 싸움을 해볼 수도 있었고, 최소한 달아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신생은 조용한 죽음으로서의 자결을 선택했다.
   진헌공 19년. 아직 짱짱한 현역이던 그 시절, 진헌공은 이웃한 괵나라를 정벌했다. 그리고는 돌아와 애첩 여희에게 말하길, 태자 대신 여희의 아들 해제를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여희는 속으로 크게 감격했지만, 겉으로는 깐느 영화제 여우주연상급 연기를 펼쳐 보였다.

 

“아니될 말씀이십니다. 지금 태자의 지위에 관해서는 천하의 제후들이 이미 모두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태자는 이미 여러 차례 군대를 거느렸을 뿐 아니라 백성들 또한 상당히 그를 의지하고 있는 걸요. 어찌 천한 저따위 때문에 적자인 태자를 폐위시키고 서자인 해제를 태자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까? 임금께서 그렇게 하신다면 차라리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겠습니다. 흙.ㅠ”

 

   절치부심 때를 기다리던 여희는 그로부터 2년 후 마침내 발톱을 드러낸다. 진헌공 21년의 어느날, 진헌공은 꿈에 첫 번째 부인이던 제나라 여인 제강의 꿈을 꾸었다. 이미 오래 전에 사별한 부인일 뿐 아니라, 태자 신생과의 관계에서 이리저리 꼼수를 염두에 두고 있던 터라 마치 자신의 그러한 태도를 꾸짖는 듯해서 진헌공은 영 마음이 찜찜했다. 진헌공은 우연히 이 말을 여희에게 흘렸는데, 여희는 이를 계기로 음모를 꾸몄던 것이다. 

 

 

 

 

여우주연상급 연기를 펼친 진헌공의 애첩, 여희

 


   당시 태자 신생은 도읍인 강땅에 들어와 있었는데, 여희는 진헌공이 사냥을 나간 사이 재빨리 태자 신생에게 달려가 이렇게 말했다.

 

“임금께서 꿈에 태자의 어머니인 제강 부인을 보았습니다. 태자께서는 얼른 곡옥땅으로 가시어 제강 부인의 제사를 모시고, 그 음식을 아버님께 올리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버님께서 옛정에 마음이 많이 흔들릴 것입니다.”

 

   태자는 여희가 시키는 대로 곡옥땅으로 가서 어머님의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제사에 올렸던 고기를 아버지에게 바쳤다. 진헌공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사냥에서 돌아왔는데, 그 사이 여희는 태자가 보낸 제사 음식에 독을 섞었다. 그리고는 진헌공이 사냥에서 돌아와 식사를 하려 했을 때, 고기를 먹으려는 진헌공을 말리며 이렇게 말했다.

 

“고기는 먼 곳에서 온 것이니 마땅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희가 고기를 던져 개에게 주었는데, 개가 그것을 먹고는 곧바로 경련을 일으키며 죽었다. 여희가 다시 어린 환관에게 고기를 먹이자, 환관 또한 똑같이 죽었다.
   막 사냥터에서 돌아온 터라 온몸이 몹시 피곤했던 진헌공은 이 예상치 못한 사건에 순간적으로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여희가 갑자기 털썩 주저앉으며 크게 흐느끼며 다시 한 번 빛나는 연기력을 작렬시킨다.
 

“태자는 어찌 이렇게 잔인하단 말입니까. 이렇게 자기 아버지까지 죽여 그 자리를 대신하려고 하니, 설령 자리에 오르고 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더욱이 군왕께서 나이 들어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건만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죽이려 들다니요. 사실 태자가 이렇게 일을 꾸미는 것은 오로지 천첩과 해제 때문입니다. 군왕께 원하건대 차라리 저희 모자로 하여금 다른 나라로 떠나 평생 숨어 살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태자 신생은 이 소식을 듣고 일단 신성(新城)으로 몸을 숨겼다. 태자를 모시던 사람 하나가 왜 군왕에게 이 모든 일이 여희가 꾸민 일이라고 직접 사실을 해명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군왕께서는 이제 늙으셨습니다. 여희가 아니면 잠도 편안히 주무시지 못하고 식사도 달게 드시지 못한다오. 만약에 내가 여희와 사실을 다투게 되면, 군왕이 여희를 노여워하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리 할 수 없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태자 신생에게, 그렇다면 외국으로 일단 망명했다가 훗날을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물었다. 그러자 신생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라 안에서조차 이렇데 더렵혀진 이름을 가지고 나라 바깥으로 도망을 쳐 본들, 그 누가 나를 받아주겠소? 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이오.”

 

 

   진헌공 21년. 12월 무신일. 태자 신생은 신성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권력 관계 앞에 선 아버지와 아들이 적대적일 뿐 아니라 패륜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은 일일이 사례를 들 수 없을 만큼 비일비재한 게 현실이다. 그런데 진헌공과 태자 신생의 대립(?)은 싱겁게 끝이 나버렸다. 진헌공의 태자 신생은 보통의 태자들이 걸었던 길들과는 확연히 다른 행로를 보여주었다. 심지어 그 자신의 결정적 책임이 있는 일도 아닌 곳에서 순순히 자신의 목숨을 내려놓았던 것. 태자 신생이 나약하고 유약한 인물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어쩌면 태자 신생은 직감적으로 자신에게서 끊어야 할 어떤 역사적 임무를 간파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적 책무라니,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와의 대립에서 싱겁게 자결을 선택한 태자 신생(왼쪽)

 


   진나라의 역사에서 태자 신생의 자결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어쩌면 여기에서 우리는 춘추시대 두번째 패주인 진문공의 출현을 읽어야 할 지도 모른다. 물론 진문공 중이의 본격적인 등극은 이로부터 험난한 19년의 세월이 지난 이후이다. 결과적이고 사후적인 이야기일 뿐이겠지만, 어째서 역사는 진나라에게 태자 신생의 자결을, 그리고 공자 중이의 19년 유력을 요구했던 것일까. 진문공 중이의 등장은 좁게는 진나라를 중흥시킨 군왕의 등장인 동시에, 넓게는 진(晉)나라가 중국 역사상 중원의 핵심이 되는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부합케 한 사건이다. 전국 시대를 통일하는 진(秦)나라가 황하 서쪽에서 아직 변방 야만스러움의 때를 벗지 못하고 있었을 때, 그리고 산동 반도를 거점으로 하는 전통의 강국 제(齊)나라가 지리적 치우침과 제환공 사후의 권력 투쟁에서 이전의 영광을 잃어 갔을 때, 황하 동쪽이자 제나라 서쪽 지역에 있던, 지리적 중원의 땅이자 정치적·경제적 문명의 중심 땅인 진(晉)나라가 부상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晉)나라가 이처럼 명실상부한 춘추 시대 핵심 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름의 혹독한 통과 의례를 거치지 않으면 안 되었음을 잊으면 안 된다. 춘추 시대의 두 번째 패주인 진문공을 만나기에 앞서 잠시 진나라의 기원을 살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