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5)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3)

2014. 11. 17. 17:34우리 이웃의 역사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5)

글로벌/사기 2014/09/29 08:35

 

공자를 통해 보는 춘추 시대 이야기
   (5) 천하 제일 오지라퍼의 인생무상  


문리스 (남산 강학원)

 

9. 천하 오지라퍼로서의 패도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3)


   튼튼한 재력과 국력으로 무장된 나라와 천하 제일의 재상(관중)을 품은 제환공은 가히 춘추시대의 패주로 손색이 없었다. 제환공은 재임 기간중 모두 아홉 번이나 천하의 제후들과 회맹했다. 한 마디로 제후들을 불러 천하 공공의 질서를 확인하는 서약 같은 것을 나누는 국제연맹회의 같은 것을 주재한 것인데, 이러한 모임을 주선할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 부여하고 스스로 주나라 왕을 대신하여 세상 일을 걱정했던 것. 

 

 



천하 제일의 오지라퍼, 제환공

 


   요컨대 패주가 된다는 건 일종의 천하 제일의 오지라퍼가 된다는 일이기도 하다. 노나라 장공의 아내였던 제나라 여인 애강은 제환공의 여동생이었다. 애강은 노나라 장공 시절부터 공공연히 장공의 동생인 경보와 사사로이 정을 통하는 사이였는데, 급기야 장공 사후 민공을 시해한 경보를 임금 자리에 앉히려고 경보와 함께 음모를 꾸몄다. 이웃한 노나라의 권력 싸움이 막장으로 치닫고 그 핵심에 자신의 여동생이 끼어 있는 것을 알게 된 제환공은 애강을 제나라로 불러들여 죽임으로서 노나라의 국정에 간섭(!)했다.
   한편 위(衛)나라가 오랑캐의 침입을 받자 제환공은 제후들의 군사를 모아 연합군을 이끌고 위나라를 구원했다. 한 번은 부인 채희와 뱃놀이를 나갔는데, 물에 익숙한 채희가 배 위에서 장난을 심하게 쳤다. 환공은 물이 두려워 그만두라고 했지만 채희는 멈추지 않았고, 이 일로 화가 난 제환공은 채희를 친정인 채나라로 되돌려보냈다. 그런데 채희의 오빠였던 당시 채나라 제후도 이 일로 화가 나서 채후를 다른 곳에 다시 결혼시켜 보냈다. 제환공은 이 소문을 듣고 군대를 일으켜 채나라를 정벌했다.

 

 




 


   제나라의 채나라 정벌은 북방의 강국 제나라와 남방의 강국 초나라가 충돌한 사건이었다는 점에서 결코 작은 사건이 아니었다. 제환공은 채나라를 정벌하고 이어 초나라를 정벌했던 것.
   왜 갑자기 초나라였을까. 보기에 따라 이 사건은 채나라를 치기 위해 초나라에 죄(!)를 묻는 형식을 취한 것이기도 하고, 초나라를 칠 명분을 채나라에게서 얻은 것이기도 하다. 춘추시대는 아직 왕(주나라)의 권위 아래 질서를 수직적으로 나누어 가진 제후들의 연합적 봉건 시스템이었다. 그렇기에 정벌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는 오직 왕(주나라)에게서만 나올 수 있었다. 제환공은 천하의 실질적인 대장이었지만 여전히 공(公)이었을 뿐, 아직 왕이 아니었다. 아니 감히 왕이 아니었다. 전국시대만 해도 조금만 야심을 품으면 곧 스스로 왕을 참칭(僭稱)했던 것에 비해, 춘추 시대까지 왕이라는 호칭은 아직 가까이 하기엔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천하의 제환공이라도 사사로운 감정으로 군사를 일으킨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여 초나라를 정벌하는 명분을 내세워 채나라를 흔들었던 것. 초나라에게는 어떤 정벌의 명분을 걸었는가. 당연히 왕에 대한 공공 질서의 확립이다.
   제나라 군대가 초나라 땅에 이르자 초나라 성왕이 군대를 이끌고 나와 맞서며 물었다.

 

 

   “어떤 이유로 내 땅에 쳐들어 온 것인가? 제나라는 북쪽, 초나라는 남쪽. 우리는 서로 말과 소가 서로에게 상관하지 않는 상대가 아닌가?”
   제나라 환공을 대신하여 관중이 대답했다.
   “옛날 소공(召公)께서 우리 제나라의 선대임금인 태공(강태공)에게 명하여 말씀하시기를 ‘다섯 등급의 제후와 아홉 주의 제후들에 대해서는 너희 제나라가 징벌하여 주나라를 보좌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선대왕에게 주신 강역(疆域)은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황하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목릉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무체까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초나라의 공물이 들어오지 않아 왕께서 제사를 갖출 수 없게 되었기에 이 일을 꾸짖으러 온 것입니다. 아울러 예전에 주나라 소왕(昭王)께서 남쪽을 정벌하러 가셨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이 일도 꾸짖기 위해 온 것입니다.”


   천하의 주인 행세를 하는 제환공은 아직 공(公)이지만, 초나라 성왕은 이미 왕(王)을 참칭하고 있었다. 그만큼 남쪽의 초나라는 장강(양자강) 이북의 중원땅과는 오랫동안 단절 아닌 단절의 땅이었던 것. 주나라와 다른 자신들의 질서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땅이기도 했다. 제나라와 초나라, 아니 북방과 남방을 아우르는 춘추전국 전체의 패권에 관해서는 아직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 어쨌든 이 대목에서 포인트는 제나라가 초나라에 취한 명분이 왕(주나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 있다. 
   이밖에도 제환공은 40년이 넘는 재위 기간 동안 수많은 일들에 끊임없이 참견하였다. 평생 천하의 왕노릇하고 싶은 원초적 욕망을 숨긴 채 자신의 욕망을 천하의 공도(公道)로서 펼쳐야 했기에, 패왕은 늘 바쁘고 분주하다. 패왕은 역사상 최초의 오지라퍼들이었다.

 


10. 권력무상·인생무상 - 제환공의 빛과 그림자(4)


   천하 제일의 권력자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살벌한 권력 싸움을 딛고 제나라 최고의 권력자가 되었으며, 나아가 제나라뿐 아니라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권력자가 되었지만, 세월은 흘러 제환공도 나이가 들었다. 권력도 인생도 무상하다는 것은 권력과 인생의 정점을 맛본 제환공 같은 인물의 경우 더욱 도드라질 수밖에 없다. 
   제환공에게는 정식 부인이 세 명 있었고, 부인 예우를 받는 여인이 여섯 명 있었다. 세 명의 부인은 각각 왕희(王姬), 서희(徐姬), 채희(蔡姬)이다. 이들과의 관계에서 제환공은 아들을 보지 못했다. 여섯 명의 희첩(姬妾)은 다섯 명의 위희(衛姬:위나라 여인)와 한 명의 송나라 화씨(華氏)의 딸이었다. 제환공은 이들에게서 모두 아들을 보았다. 첫째 위희는 아들 무궤를 낳았고, 둘째 위희는 아들 원을 낳았고, 셋째 위희(정희라고 한다)는 아들 소를 낳았고, 넷째 위희(갈영이라고 한다)는 아들 반을 낳았고, 다섯째 위희(밀희라고 한다)는 아들상인을 낳았다. 여섯째 송나라 화씨여인에게서는 아들 옹을 낳았다. 사마천은 제환공이 여색을 밝혔다, 고 썼다.
   제환공 재위 41년. 관중이 병들었다. 제환공은 관중을 찾아가 문병하고 관중에게 관중의 후임으로 누구를 의지해야 할지 의논했다. 하지만 관중은 이렇게 대답한다. “임금보다 신하를 더 잘 아는 분은 없습니다.” 다급해진 제환공이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보인다. 역아는 어떤가, 개방은 어떤가, 수도는 어떤가? 관중은 세 사람 모두에게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관중이 사망한 후 제환공은 결국 이 세사람을 중용했다.

 

 


관중이 병들어 죽자, 제환공은 무너지기 시작한다.

 


   제환공이 병이 났을 때 여섯 첩의 공자들은 서로 파당을 만들어 권력 싸움을 시작했다. 관중이 살아있을 때 관중은 정희의 아들 소를 태자로 낙점하고 송나라 양공에게 보내어 맡겼다. 하지만 관중이 사망하자 나머지 다섯 명의 공자들이 모두 태자가 되려고 하였기 때문에 제환공의 말년은 순탄할 수가 없었다. 역아는 첫째 위희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위희의 아들 무궤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이에 역아는 환관 수도를 통해 제환공에게 많은 예물을 바치며 환공의 환심을 샀다. 제환공은 결국 역아의 꼬임에 넘어가 무궤를 태자로 세울 것을 허락했다. 원칙은 한 번 무너지면 꼬일 수밖에 없다.
   제환공은 재위 43년째가 되는 해 겨울 10월에 세상을 떠났다. 역아는 곧바로 환관 수도와 함께 궁을 장악하고 대부들을 죽이고 무궤를 임금으로 세웠다. 태자였던 정희의 아들 소는 다시 송나라로 도망쳤다. 언제라도 내전이 일어날 수 있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제나라 정국을 감돌았다. 다섯 왕자들은 모두 서로 기회를 노리며 상대의 허점을 찾고 있었다. 이러는 사이, 한때 천하를 쥐락펴락했던 춘추 시대의 영웅 제환공의 시신은 입관조차 못한 채 무려 67일간이나 방치된 상태로 썩어갔다. 환공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던 침실 바깥으로 벌레들이 기어나올 정도였다.
   제환공의 시신은 무궤가 군주의 자리를 차지하고 나서야 겨우 입관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아직 장례까지는 더 치러야 할 대가가 남아있었다. 자리에 오른 무궤의 권력이 불과 석 달이었기 때문이다. 송나라로 몸을 피했던 태자 소가 송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되돌아왔던 것. 송나라 양공은 이전에 자신에게 태자를 맡긴 제환공과 관중에 대한 의리를 지켜 군대를 이끌고 제나라를 정벌해주었다. 이 과정에서 두려움을 느낀 제나라 사람들이 무궤를 죽여 자리를 비웠다. 무궤를 이어 자리에 오른 태자 소가 곧 제나라 효공이다. 제환공의 시신은 효공이 자리에 오르고 나서도 한참이 지난 8월에야 겨우 안장되었다.
   제나라 효공은 송나라의 결정적인 도움으로 임금이 되었지만, 이로부터 불과 6년 후엔 송나라가 제나라의 회맹에 참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나라를 정벌했다. 송나라 양공은 이 사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난다. 권력이라는 게 이렇게 허무한 것이다.
   제나라의 권력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10년간 재위한 효공이 세상을 떠나자 효공의 동생이자 제환공의 네 번째 첩 갈영의 아들 반이 효공의 아들을 죽이고 군주의 자리에 올랐다. 이 사람이 제나라 소공(昭公)이다. 소공은 19년을 재위했는데, 소공이 죽자 다시 제환공의 다섯 번째 첩인 밀희의 아들 상인이 소공의 아들 사를 죽이고 자리를 빼앗았다. 이 사람이 제나라 의공이다. 4년을 재위했지만 의공은 제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얻지 못했다. 제나라 사람들은 의공이 죽자 의공의 아들을 폐위시키고, 다시 제환공의 두 번째 첩인 위희의 아들 원을 군주로 맞아들였다. 이 사람이 제나라 혜공이다. 그러니까 제환공으로부터 제혜공까지 모두 일곱 대에 이르는 삼심 수년간의 세월 동안 제나라의 역사는 환공의 여섯 아들을 돌고 돌고 또 돌았던 것.

 

 




춘추 시대 첫번째 패주 제환공, 그에게도 시간은 흐른다.



 


   춘추 시대 첫 번째 패주이자 역대 최고의 정치가로 평가받는 관중과 함께 중국 역사의 한 장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제환공의 일생은 이렇게 끝이 난다. 아무리 화려한 꽃도 열흘을 넘길 수 없다고 했던가. 제환공의 드라마를 보다보면, 그리고 그의 사후 벌어진 수십년에 걸친 막장 권력 드라마를 보다 보면, 새삼 권력이란 무엇인지 그리고 인생이란 무엇인지 묻게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아울러 역사란 생각보다 아주 짧고 또 가깝게 우리 바로 옆에서 언제든 되돌아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춘추 시대의 패주들은 이후 진나라 문공, 초나라 장왕, 오나라 합려, 월왕 구천 등으로 계보를 이어간다. 이들의 역사 한 편 한 편이 모두 강렬한 사건들을 내장한 드라마들이지만, 이들을 관통하는 원칙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아마도 그것은 권력자의 보편적 속성이라기보다 권력 자체의 속성이 그러하기 때문이 아닐지. 그런데! 어째서 역사는 이렇게 뻔한 결과를 알면서도 패도의 시대로 빠져들어갔던 것일까. 패도의 시대에 왕도를 부르짖은 맹자의 별스러움이 한편으론 지당하면서도 한편으론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째서 인류는 2,400여년간 수없이 반복되는 이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았던 것일까. 혹시 우리는 거꾸로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역사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이러한 역사로부터 기어이 아무 것도 배우지 않으려고 애쓰게 만든 그것이 무엇인가, 라고. 해결되는 것 없이 물음만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