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晉)나라 : 말[言]과 우주

2014. 11. 17. 17:46우리 이웃의 역사

 

 

 

 

 

      

진(晉)나라 : 말[言]과 우주


문리스 (남산 강학원)


3. 말과 우주 : 꿈과 희언(戱言)으로 세워진 나라


   진(晉)나라의 시조 우(虞)는 주나라 무왕의 아들이고 성왕의 동생이다. 우의 어머니는 제나라 태공 강상의 딸이었는데, 어느날 무왕은 꿈에서 아들을 내려주겠다는 하늘의 명을 받았다. 하늘은 무왕에게 아들의 이름을 우(虞)라 하고, 당(唐) 땅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실제로 무왕이 아들을 얻었을 때 아이의 손바닥에는 우(虞)라는 무늬가 있었다. 무왕은 기이하게 여겨 아이의 이름을 우라고 불렀다.
   무왕이 죽었을 때 성왕은 불과 아홉살의 어린 아이였다. 비록 천하의 주인이라고는 해도 어린 성왕에게는 산전수전 다 겪은 백전노장의 쟁쟁한 아버지 형제들이 너무 많았다. 겨우 일으켜 세운 주나라의 정통은 불과 삼대만에 큰 위기를 맞았던 셈. 이때 어린 조카 성왕을 대신해 천하의 질서를 흐트러짐 없이 단속했던 인물이 바로 주공(周公)이다. 주공은 아버지(문왕)와 형(무왕)의 대업을 지킨 동아시아 역사의 산증인이지만, 또한 진(晉)나라의 건국에도 숨은 조력자였다. 물론 주공 본인은 알지 못했겠지만.

 

 

조카 성왕을 대신해 천하의 질서를 단속했던 '주공'


   어린 성왕이 왕위에 오르자 주나라의 정세는 크게 흔들렸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 형제들인 숙부님들의 반란이 있었을 뿐 아니라, 아직 은나라에서 주나라로의 정치 변동이 안정적이지 않아 지역 반란도 종종 일어났다. 이 모든 핵심에 주공의 강력한 리더십이 빛나고 있는데, 언젠가 당(唐) 땅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주공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난을 진압하고 당나라를 멸망시켰다. 마침 동생인 우와 함께 놀이중이던 성왕은 이 소식을 듣고는 곧 오동나무 잎으로 규(珪)를 만들어 동생인 우에게 장난으로 제후 책봉을 내려주었다. 성왕의 말을 들은 사관(史官)은 곧장 성왕에게 날짜를 택하도록 재촉했다.
당황한 성왕은 이렇게 말했다.

 

“난 그저 동생 우와 장난한 것 뿐이다.”

그러자 사관은 이렇게 응대하며 말했다.

 

“천자에게는 희언(戱言)이 없습니다. 천자의 말이 한 번 떨어지면 사관이 그것을 기록하고, 예의로써 그것을 완성하며, 음악으로 그것을 노래할 뿐입니다.”

 

   이에 어쩔 수 없이 성왕은 동생인 우를 당 땅에 제후로 봉했다. 말 혹은 이름짓는 일의 중요함을 상기시키는 이 일화는 훗날 고구려 온달의 전기에서도 되풀이 될 정도로, 동아시아에서는 중요한 테마가 된다.

 

 

   평강왕은 딸이 울기를 좋아하여, 왕이 장난삼아 이렇게 말했다.
“네가 늘 울어대서 내 귀를 시끄럽게 하니 자라면 반드시 사대부의 아내가 되지못하리라. 마땅히 바보 온달에게 시집가리라.”
공주가 울 때면 왕이 매번 그렇게 말하더니, 딸의 나이 16세가 되자 상부(上部) 고씨에게 시집보내고자 하였다. 이에 공주가 왕에게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너는 반드시 바보 온달의 아내가 될 것이다’라고 하시더니, 이제 무슨 까닭으로 전의 말씀을 바꾸십니까? 필부(匹夫)도 오히려 식언(食言)하지 않으려 하는 법인데, 하물며 지존(至尊)이시겠습니까? ‘임금에게 희언(戱言)은 없다’고 했습니다. 이제 대왕의 명령은 잘못이므로 저는 감히 받들어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삼국사기> 열전 ‘온달’

 

 

   이렇게 집을 나가게 된 평강왕의 공주가 어떻게 되었는가는 익히 잘 아는 바와 같다. 생각해 보면, 『논어』에서  공자가 특히 말 잘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군자는 말에 신중하고 또 말에 책임을 지는 인물이라는 오래된 문화사적 경험이 축적되어 있다는 것. 어쨌든 이런 과정을 거쳐 형성된 진나라였다. 어째 출발이 조금 장난스러운가. 그럴 수밖에. 장난으로 말했다가 세워진 나라이니. 한 나라가 자신이 진 말 빚을 갚고 새로운 문풍의 국가로 우뚝 서기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과 인연이 필요한지를, 춘추시대 이래 동아시아 중원의 적통임을 자처하는 진(晉)나라만큼 잘 보여주는 곳도 드물다.

 

 

 

온달과 평강공주

 


   어쨌든 이렇게 진(晉)나라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런데 진나라의 역사는 과연 순탄치 못했다. 특히 한 번 꼬인 말들이 엉켜 계속 사단이 생겼다. 진나라 목후 때의 일이다. 목후 7년, 목후는 태자를 얻었는데 이름을 구(仇)라고 지었다. 한편 목후 10년, 목후는 둘째 아들을 얻었는데 이름을 성사(成師)라고 했다.
이에 대해 진나라 사람 사복(師服)이 이렇게 말했다.

 

   "이상하다. 군왕의 아들 이름을 이렇게 붙이다니. 태자를 구라 하는데 구(仇)란 원수라는 뜻이 아닌가. 작은 아들을 성사라 하는데 성사(成師)란 어떤 것을 이루게 한다는 뜻이 아닌가. 이름이란 스스로 명명하는 것이고, 사물이란 스스로 정하는 것이다. 지금 적자와 서자의 이름이 거꾸로 되었으니 이후 진나라에 혼란이 없을 수 있겠는가?”

 


4. 곡옥(曲沃)


   태자 구는 아버지 목후가 죽었을 때 삼촌인 상숙(殤叔)에게 밀려 나라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태자 구는 세력을 모아 마침내 권토중래했다. 상숙을 물리치고 진(晉)나라 군주 문후가 되었던 것. 이 무렵 주나라에서는 유왕이 오랑캐 견융에게 시해당하면서 도읍을 동쪽으로 옮겼다. 황하 서쪽의 진(秦)나라는 이 때 주나라의 천도에 공을 세우면서 비로소 제후의 자격을 획득했다. 이 무렵은 향후 중원의 패권을 놓고 맞부딪치게 될 두 개의 진나라(晉vs秦)가 춘추라는 역사 무대에 이름을 내미는 순간이기도 하다.
   문후 즉 태자 구는 35년간 집정했다. 문후의 사망 이후 군주의 자리에 오른 소후(昭候)는 문후의 맏아들 백이었다. 소후는 집권 원년 아버지 형제인 삼촌 성사를 곡옥에 봉했는데, 당시 곡옥땅은 진(晉)나라 수도인 익성(翼城)보다 컸다. 성사는 곡옥땅에 봉해지면서 환숙(桓叔)이라고 불렸다. 환숙은 등극 당시 이미 58세로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남에게 베풀기를 좋아했다. 진(晉)나라의 민심이 점점 환숙을 따라 곡옥으로 기울자 세상에서는 진나라의 근심이 곡옥 땅에서 일어날 것임을 걱정하는 목소리가 생겨났다. 가지가 근본보다 크고 민심을 얻었으니 어찌 난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라는 것.

 

 

 

가지가 근본보다 크면 난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문후(태자 구)의 아들 소후가 곡옥땅에 환숙(성사)을 앉히면서 익성과 곡옥, 즉 문후의 세력과 환숙의 세력간 권력싸움은 본격화되었다. 먼저 소후 7년에 진나라 대신 반보는 자신의 주군 소후를 죽이고, 환숙을 군주로 맞이하고자 했다. 하지만 환숙이 익성으로 들어가려고 하자 진나라 사람들이 군대를 일으켜 환숙을 막았다. 익성은 다시 소후의 아들 평을 군주로 세웠다. 이 사람을 효후(孝候)라 한다. 한편 환숙이 죽자 환숙의 아들 선이 곡옥땅을 대신했는데, 이 사람은 장백(莊伯)이었다. 장백은 군주 효후를 시해했는데, 이로 인해 진나라 사람들이 장백을 공격했기에 이번에도 끝내 익성땅에 입성하는 데는 실패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효후의 아들 극을 군주로 맞아들였고, 이 사람은 악후(鄂候)였다. 악후가 죽자 장백은 곧 군사를 일으켜 익성 재입성을 노렸으나 주나라 평왕이 군대를 보내 막는 바람에 다시 곡옥땅으로 돌아와야 했다. 진나라 사람들은 악후의 아들 광을 군주로 내세웠다. 애후(哀候).
   장백은 애후 집정 중에 죽었고, 곡옥땅은 다시 장백의 아들 칭(稱)이 자리를 대신했다. 이 사람이 무공(武公)이다.
   무공은 야심이 컸을 뿐 아니라, 오래 기다릴 줄 알았다. 우선 무공은 형정(陘廷) 사람들과 함께 연합하여 진나라를 정벌했다. 이 과정 중에 애후가 포로로 사로잡혔다. 하지만 무공은 섣불리 진나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거듭한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진나라 사람들은 애후의 아들 소자(小子)를 군주로 추대했다. 이 사람이 소자후(小子候)다. 소자후 원년 무공은 애후를 죽였다. 이 무렵 차츰 국력은 곡옥땅이 진나라 도읍 익성을 능가했다. 마침내 무공은 소자후를 유인해 살해하는 데까지 성공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무공은 진나라로 들어갈 수 없었다. 주나라 환왕이 괵중(虢仲)으로 하여금 곡옥땅의 무공을 정벌하게 하자 무공은 또 한번 참았다. 무공은 애후의 동생 민(緡)으로 진나라 제후를 세웠다.

 

 


   곡옥땅의 야심가들은 대체 어떻게 뜻을 이룰 수 있었을까.
애후의 동생 민은 진나라 군주로 28년간 자리를 지켰다. 그가 자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그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 운이 좋았다고 밖에 볼 수가 없다.
   민의 집정 28년째 되는 어느날, 곡옥의 무공은 드디어 민을 정벌하고 익성을 멸망시켰다. 애후 2년 아버지 장백을 대신해 곡옥땅의 주인이 된 시기로부터 무려 햇수로 40여년 만이었다. 무공은 민이 가지고 있던 각종 보화와 기물을 모두 주나라 희왕에게 바쳤다. 그러자 희왕은 비로소 곡옥의 무공을 진나라 주군으로 정식 임명하고, 제후로 인정했다.
   진(晉)무공은 진나라 목후의 증손이자, 곡옥 환숙의 손자이며, 곡옥 장백의 아들이었다. 할아버지 환숙으로 부터 계산하면 무려 67년만에 진나라를 대신해 제후가 되었던 셈이다. 처음 천자의 희언으로 장난삼아(!) 시작된 나라답게, 진나라는 중원땅의 제대로 된 국가로 대접받기까지 이렇듯 큰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진나라의 말 빚은 모두 끝난 게 아니다. 이 글의 앞에서 태자 신생을 죽게 했던 진나라 헌공의 일을 기억하는가. 진나라 헌공이 바로 무공의 태자 궤제였다. 거칠게 말하면 아버지와의 권력 싸움에서 밀려 스스로 자결해야 했던 비운의 태자 신생이 바로 진헌공의 아들이다. 태자 신생의 거점이 또한 바로 곡옥 땅이었다. 그러니 진나라의 곡옥땅은 지금의 진나라를 있게 만든 영광과 원망의 땅인 셈이다. 


   그런데 바로 이 권력싸움에서 두 명의 다른 아들들은 큰형님 신생과 달리 살아남았다. 그리고 이들은 또한 그 안에서도 각자 다른 길을 선택한다. 둘째 아들 중이와 셋째 아들 이오. 춘추 시대 두 번째 패자로 칭송되는 중이에 이르러야 진나라의 긴 국가만들기 여정은 일단락된다. 그러니 아직도 가야할 수십년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