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실 관련 고전 모음 - 열 셋 / 면암집

2014. 11. 23. 04:26향 이야기

 

 

 

 

면암집(勉菴集) 면암선생문집 부록 제3권 갑진년(1904, 광무 8) 선생 72세 최익현(崔益鉉) 197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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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보(年譜)
갑진년(1904, 광무 8) 선생 72세

 


6월 상이 밀유(密諭)를 내려서 돈소(敦召 왕이 신하를 간곡한 말로 부르는 일)하였다.
유서(諭書)의 대략에,
“매우 심하게 어려운 근심이 있으니 경의 노숙한 덕을 사모한다. 짐(朕)이 자리를 비워 두고 경을 맞이해서 함께 위기를 구제하고 싶어 특별히 최영년(崔永年)을 보내 짐의 간절한 뜻을 알리니, 경이 비록 노쇠하지만 빨리 와서 짐의 애타게 바라는 마음에 부응(副應)하면 종사(宗社)와 강토(疆土)에 매우 다행이겠다.”
하므로 선생이 회계(回啓)하기를,
“‘임금 사랑하기를 아비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하기를 집 일 걱정하듯 하라.[愛君如父 愛國如家]’는 여덟 글자는 곧 신의 스승 고(故) 참판 이항로(李恒老)가 진신 사대부(搢紳士大夫)의 반열에 있는 자에게 정성스럽게 가르치던 것이었습니다. 신이 완악하고 어리석어서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어야 하는 날을 당했건만, 억지로 참고 구차하게 살아남아 부끄러운 낯으로 사람 축에 들지 못하였는데, 이번에 비상한 총명(寵命)이 궁벽한 초가에 미치니 오장이 떨려서 더욱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나라에 급한 일이 있으면 의당 달려가야 마땅한데 어찌 소명을 기다리겠습니까. 그러나 신의 천한 나이가 망팔(望八 71세를 일컫는 말)에서 하나를 더했고 병세가 자주 심해서 길을 떠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오늘날 정사는 지금의 풍속을 변하지 않으면 비록 공자ㆍ맹자가 앞에 있고, 관자(管子)ㆍ제갈량(諸葛亮)이 뒤에 있더라도 결코 손쓸 곳이 없습니다. 폐하께서는 한두 사람의 능숙한 인물을 친근과 소원을 가리지 말고 선발하여 호령을 크게 발해서 우레같이 엄하고 바람같이 빠른 형세를 가지시면 어찌 천의(天意)와 인심을 변동시킬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7월 초하루는 정축 9일(을유)에 궁내부 특진관에 제수되었다.
○ 12일(무자)에 다시 의정부 찬정(議政府贊政)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해서 사직하였다.
이때에 상이 선생을 반드시 불러오려고 특별히 각별한 예로 지방관을 보내어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갖추 알았다. 나라를 걱정하는 간절한 생각이 어렵고 근심스러운 때에 갑절로 더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래서 특히 이 자리를 맡기노니, 쇠병(衰病)을 참고 곧 올라오라.”
하였다.

8월 초하루는 정미 정산 향교[校宮]에서 향음례(鄕飮禮)를 행하였다.
선생이, 정산은 본디 사계 선생(沙溪先生 김장생(金長生))이 인애(仁愛)의 덕을 남긴 고을이건만 몇 백 년을 지나도록 제향[爼豆]하는 예가 아직 없음을 한스럽게 여겼다. 일찍이 본 고을의 사림(士林)과 단향(壇享)을 행하기로 의논했으나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문인 권응규(權膺圭) 등에게 명해 향음례를 행하여서, 사림의 기풍을 고동(鼓動)시킬 계획을 하였다.
○ 13일(기미)에 소명을 받들어, 서강(西江)에 이르러 두 번째 상소해서 사직하니, 임금이 의정부 낭관(郞官)을 보내어 윤허하지 않는 비답을 내렸다.
이때에 선생은 이질로 기운이 엄엄(奄奄)했으나 소명이 잇달아 내리니, 감히 집에만 있을 수 없었고 또 국가가 위급한 때를 당했으므로 의리에 차마 무심하게 볼 수 없어 드디어 병을 참고 수레에 올라 길을 떠났다. 대개 서울에 가까이 있으면서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할 계획이었다. 두 번째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뭇 소인이 나라를 망치고 정사를 어지럽히는 형상을 겸해 말하고, 또 병든 자는 입에 쓴 약을 싫어하지 말아야 원기가 회복된다는 것으로서 비유하여 간절하게 말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살펴서 정성스러움을 갖추 알았다. 병으로써 비유한 것은 매우 적절하다. 반드시 좋은 의원을 만나야 한다. 시일이 바쁜데 만약 머뭇거리고 있으면 평소에 기대하던 바이겠는가? 다시 사직하지 말고 곧 들어와서 명에 응하라.”
하였다.
○ 21일(정묘)에 세 번째 사직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때에 선생이 수일 동안 서강(西江)에 머물러 있었는데, 이질이 더욱 심했으나 왕인(王人 사신)이 와서 성유(聖諭)를 전하자 그래도 일어나 앉아서 의관을 바르게 하고 엎드려서 들었다. 문인 이재윤(李載允)ㆍ윤긍주(尹兢周)가 와서 문후한 다음 최영조(崔永祚)에게,
“선생의 병세가 조석(朝夕)에 달린 것 같으니 모시고 미음(渼陰 이재윤의 집)에 돌아가서 며칠 동안 약을 복용하고 시골에 돌아가서 조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드디어 그날로 출발하여 미음에 도착한 뒤 두어 밤을 지내고, 바로 포천 옛집으로 향했다. 상소의 대략에,
“온갖 괴변(怪變)이 아울러 나와서 나라 운명이 실처럼 위태한 이때를 당해, 폐하께서 밤낮으로 걱정하느라 일상생활이 편치 않으심이 그지 있겠습니까. 신하된 분의(分義)와 도리로는 만약 질병이 위독하기에 이르지 않으면 명을 받들고 뜰에 나아가서 한번 천안(天顔)을 우러러보고 겸해서 성상의 계책을 여쭈어 봄이 진실로 마땅합니다. 하오나 병세가 이와 같아서 관직을 없애 달라는 청을 마치지 못하고 드디어 깊은 산으로 돌아오니, 가을 소리가 골짜기를 찢어 내듯이 슬픈 탄식을 더할 뿐입니다.
인생의 큰 은혜는 오직 임금과 어버이뿐인데, 지금 신은 어버이가 없으니, 마음을 모두 바쳐야 할 곳은 폐하뿐입니다. 폐하의 형세가 저처럼 위급하며 외롭고 날마다 요사스러운 도깨비들의 협박에 곤란당하는 것을 눈으로 보면서도 신이 한번 힘을 쓰거나 꾀를 내어서 구원하고 보호하는 방도를 행하지 못하니 사람의 도리가 없고 신하의 분의가 결핍되었습니다. 죄를 지고 한을 품어 죽어도 눈을 감기 어려운데, 이 직명(職名)마저 체직되지 않아서, 그대로 땅에 들어간다면 옳지 못합니다. 억지로 정신을 수습해서 다시 성청(聖聽)을 더럽히오니 폐하께서는 불쌍히 여겨 살피시어 바삐 깎아 고쳐서 신에게 안심하고 죽어 가게 하시기를 엎드려 청하옵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시대의 근심이 한창 심하니 모름지기 서둘러 학술(學術)로 구제해야 한다. 사직한 것은 반드시 허가하지 않을 것이다. 의외의 병은 약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나을 것이니, 병세가 조금 좋아지기를 기다려서 곧 올라오기를 도모하라는 것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9월 초하루는 병자 7일(임오)에 상이 특별한 유지(諭旨)를 내려서 돈소(敦召)하였다.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짐이 경에게 찬양(贊襄)하는 직임을 맡긴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세도(世道)는 날로 저하하고 나라 운수에 어려움이 많으니, 노성한 덕과 충성된 신하가 좌우에서 바로잡아 도와주지 않으면 어떻게 만회(挽回)해서 유지할 수 있겠는가. 경의 깨끗한 명망과 곧은 절조를 짐이 향모(嚮慕)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전후로 돈면(敦勉)한 것이 간절할 뿐만이 아니었는데, 경은 한결같이 병만 말하고 있다. 대개 어려서 배운 것은 장성해서 시행하려는 것인데, 어떠한 일을 행하려고 시국의 어려움을 무심하게 보고서도 동쪽 산골에서 굳게 지조를 지켜 산중의 숨은 고상한 선비가 되려 하는가. 이것은 결코 중용(中庸)을 행하는 도리가 아니다.
들으니, 경이 지금 서울 근교에 있으며, 묵은 병도 벌써 나았다 하니, 곧 수레를 재촉하여 조정에 와서 짐의 바라는 마음에 부응하여 밤낮으로 근심하는 일을 풀어 주기 바란다는 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 23일(무술)에 네 번째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다.
상소의 대략에,
“신의 병세가 점점 위독한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앓고 있던 병과 새로 생긴 병이 번갈아 발작하며 함께 침공하니, 음식을 전폐하여 기운이 실낱처럼 겨우 이어 갑니다. 사람이 일을 하려면 뜻과 기운을 믿을 뿐인데 기운이 이미 다하였으니 뜻이 어찌 홀로 존재하겠습니까. 이리하여 신이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또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신의 병보다 더 큰 것이 있으니, 바로 머리를 깎는 일입니다. 차라리 머리를 보존하다가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지 않겠으며 차라리 중화(中華)를 위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와 짐승이 되어서 살지는 않겠습니다. 이것은 신이 평소에 고집한 뜻으로서 병신년에 올린 소장에 이미 아뢴 바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머리를 깎고 백성들도 깎았으니, 이런 때에 신을 불러서 어디에 쓰려고 하십니까?
신은 불행하게 오늘까지 살아와서 선왕(先王)의 신민(臣民)이 귀신과 짐승 모양으로 되는 것을 차마 보아야 하니, 마음이 부서지고 쓸개가 찢어지는 듯합니다. 곧 죽어 없어지지 못함이 한스러운데 어찌 옷을 벗고 다리를 걷어 올리고서 그들의 유에 뛰어들어 물결에 휩싸이겠습니까? 이것이 신이 나아갈 수 없는 의리가 신의 병보다 크다는 것입니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마음속에 쌓아 놓은 경술(經術)과 확고하게 지켜온 지조를 기다림은 이번 유서(諭書)뿐이 아니다. 그리고 옳은 말을 하였고 또 이때를 당하여 어려운 걱정이 점점 심해지니, 기대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다. 번거롭게 사양하지 말고 곧 올라오라는 것으로 지방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11월 초하루는 을해 25일(을해)에 소명에 나아가는 길을 떠나 소곡리(小谷里)에 도착하였다.
○ 26일(경자)에 상이 비서감 낭관(秘書監郞官)을 보내어 돈유(敦諭)를 전하였다.
조서는 다음과 같다.
“듣건대 경이 방금 와서 성문 밖에 머무르고 있다 하니 애타게 생각하던 나머지 소란한 소문이 잇달아 일어나고 어려운 근심이 점점 심하여 급박한 형세가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듯하니, 다시는 머뭇거리지 말라. 경이 추운 길에 시달려 조금 휴식하기를 기다리나 자리를 비워 두고 기다리는 마음 촌각이 급하니, 곧 들어오라.”
하였다.

12월 초하루는 을사 2일(병오)에 수옥헌(漱玉軒)에 입대(入對)하여 5조목의 수차(袖箚)를 올렸다.
상이 앞에 나오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경이 곧 올라올 것이라 생각했는데, 이제야 비로소 들어오는가?”
하니,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8월에 시골을 떠났으나 중도에서 병으로 두어 달이나 누웠다가 근간에 조금 소생해서 겨우 들어왔습니다.”
하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사적(仕籍)에 오른 지 50년이 되었는데, 분수에 맞지 않는 직위가 외람되게 정경(正卿)의 반열에 올랐으나 아직도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였습니다. 옛사람도 천폐(天陛)에 처음 올라서 천안을 우러러뵙기를 청한 자가 있었으니, 신도 머리를 들어 뵙기를 원합니다.”
하니, 상이,
“우러러보라.”
하였다. 선생이 아뢰기를,
“신이 계유년과 병자년에 함부로 미치광이 같은 말을 아뢰어서 귀양 가기에 이르렀으나, 폐하께서 다시 살려 주신 은택을 특히 입어 살아서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신의 모발 하나라도 성상께서 주신 것이 아님이 없습니다. 그후에 국가의 변고가 겹쳐 일어나서 폐하께서 천고에 없던 액운을 여러 번 만났는데도 신이 기력(氣力)을 내어 조그마한 보답도 하지 못했으니, 신의 불충함은 실로 국민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지금 신의 천한 나이가 벌써 7순을 넘었고 온갖 병이 침범하여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폐하께서는 신이 쓸데없는 사람임을 모르시고 여러 번 소명을 내리시어 예우(禮遇)가 융숭하고 간절하셨으니 폐하께서 신에게 무엇을 취하려고 이런 비상한 은택을 내리시는 것입니까. 신은 본디 학문이 없고 또 시골에서 자라나 보고 들은 것은 신의 할아비와 아비의 남긴 훈계일 뿐이니 어찌 성심(聖心)을 계도(啓導)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은 이미 무술년 상소에 밝혔으나, 채납(採納)되지 않았습니다. 신의 이번 걸음에 말하는 것인들 어찌 채납되기를 감히 기대하겠으며 또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기를 어찌 감히 바라겠습니까. 오늘날 나라의 위태한 형세가 조석으로 급박한데 폐하께서 받아들이려는 뜻이 있으실 것 같으면 신이 숨김없이 다 말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은 본디 강직한 까닭으로 남들과 화합하지 못함을 짐도 벌써 아는 바이다. 또 연전에 올린 소사(疏辭)는 귀에 거슬리는 것이 비록 많았으나 짐의 마음에는 그것이 옳은 줄을 알면서도 시세 형편에 구애되어 변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지금 어려운 걱정이 심한 이 마당에, 경의 바로잡아 구제하는 방책을 기다리는 까닭으로 이에 특히 불렀다. 경의 훌륭한 계획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신은 언사가 비루하고 졸속하므로 삼가 차자 하나를 만들어 을람(乙覽 임금이 글을 보는 것)에 대비했습니다.”
하고, 이어 꿇어앉아 소매 속의 차자를 바치며,
“만약 채용(採用)하게 된다면, 실로 종사의 다행입니다.”
하였다. 비서감 승(秘書監丞) 이명상(李明翔)이 차자 읽기를 마치자 선생은 아뢰기를,
“폐하께서 오늘날의 사세가 장차 흥한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어지러운 때라 보십니까?”
하니, 상이,
“과연 어지러운 때이다.”
하니, 선생이,
“폐하께서 어지러운 때인 줄을 아실 것 같으면, 어지럽게 되는 연유를 아십니까? 다만 오늘날 민회(民會)로 말한다면 강한 이웃 나라를 끼고 감히 흉포함을 부리니, 그 죄는 진실로 죽어도 용서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민심은 바로 천심(天心)입니다. 민심이 이와 같이 풀어져 흩어졌으니, 천심도 따라서 알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폐하께서 하늘을 섬기는 정성이 혹 극진하지 못해서입니까, 아니면 일을 맡은 신하가 성덕(聖德)을 받들어 행하지 못해서입니까?”
하니, 상이,
“짐은 정성을 다해서 하늘을 섬겼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천도가 이처럼 응하지 않으니, 이것은 짐이 밝지 못하고 신하들을 감독해서 잘 거느리지 못한 때문이다.”
하였다. 선생이,
“오늘날 인심이 풀어져 흩어짐은 모두 을미년 변고 이후에 복수하려는 뜻이 없고, 복수하려는 정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복수하려는 뜻과 복수하려는 정사가 있었더라면 민심이 저절로 확고하여 오늘날의 어지러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신이 근일에 내리신 조칙(詔勅)을 여러 번 보았는데 애통한 뜻이 말 밖에 넘쳐 나와 널리 퍼졌으나, 실로 혜택이 아래까지 미침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이것은 폐하께서 한갓 겉치레[文具]만 일삼고 성실한 마음으로 성실한 정사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들으니, 폐하께서 태묘(太廟)에 전알(展謁)하는 예를 거행하지 않은 지가 오래되었다 합니다. 청하건대 바삐 대가(大駕)를 움직여서 태묘를 전알한 다음 망묘루(望廟樓)에 거둥하여 회민(會民)을 불러서 묘문(廟門) 밖에 각각 엎드리도록 하고 애통조(哀痛詔)를 내려 허물을 끌어 자신을 책망하기를, 성탕(成湯)의 ‘만백성에게 있는 죄는 그 탓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萬方有罪 在予一人]’라고 한 뜻과 같이 하소서. 그런 다음에 그 우두머리되는 두어 사람을 불러들여서 친히 타이르고, 그들의 말 중에 채용할 만한 것은 택해서 실시하고 각자 흩어져 돌아가도록 한다면 이들도 화육(化育)된 물(物)인데 어찌 끝내 거역하는 이치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혜전(孝惠殿 효정왕후(孝定王后)의 혼전(魂殿))의 연사(練祀) 전에 태묘를 전알함은 예제(禮制)에 거리낌이 있다.”
하였다. 선생이,
“그와 같으시면 폐하께서는 태묘를 전알할 날이 끝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무엇을 말하는가?”
하였다. 선생이,
“들으니, 폐하께서는 거리끼는 일이 많다고 해서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짐이 어찌 거리끼는 일이 있겠는가? 하물며 조종(祖宗)의 혼령을 모신 곳인데 어찌 거리낄 이치가 있겠는가?”
하였다. 선생이,
“신이 들으니, 일본 사령부에 고시(告示)한 바가 있는데, 모든 경내(境內) 경찰을 모두 저들이 담당한다 합니다. 그러면 우리나라의 경청(警廳)과 법부(法部)는 모두 소용없게 되었습니다. 아, 오백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가 하루아침에 일본에게 망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 업신여긴 다음에 남이 업신여기게 되는데, 어찌 오로지 저들에게만 탓을 돌리겠습니까. 을미년 대변(大變) 이래로 우리 군신 상하가 모두 복수해야 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고 분발해서 힘썼을 것 같으면 오늘날 나라 형세가 거의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지금 온 나라 신민(臣民)이 모두 포로가 되어 참혹하게 짓밟힘을 당하건만 구해 내지 못하니 아, 천운입니까, 시변입니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다만 죽고 싶은 소원이 있을 뿐입니다.”
하고, 목 놓아 통곡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금은 나라가 망할 판입니다. 비록 좋은 방책(方策)이 있더라도 장차 어디에 시행하겠습니까? 그러나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한번 번연히 깨달아서 적합한 약을 조금 시험한 다음, 다시 천명을 기다리는 것만 하겠습니까? 신의 수차(袖箚) 다섯 조목은 모두 오늘날의 급무입니다. 외부(外部) 사람에게 관계있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게 도움을 요구할 것도 아니요, 모두 폐하께서 옮겨서 시행하는 사이에 있으니, 바라건대 바삐 처분을 내리소서.”
하였다. 상이 차자를 모두 보고 이어 하교(下敎)하기를,
“철종(哲宗)과 헌종(憲宗)께 추존(追尊)하는 의식을 거행하지 않은 것은 옛날 예(禮)에 의거한 것이다. 주공(周公)이 문왕(文王)ㆍ왕계(王季)ㆍ태왕(太王)을 왕호(王號)로 추존하면서 방존(傍尊)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그리고 주공이 선공(先公)에게 천자의 예로써 제사한 까닭으로 태묘에는 모두 천자의 예를 썼다. 문묘(文廟)의 축문(祝文)에 경제(敬祭)라고 일컬은 것은 또한 《대명집례(大明輯禮)》에 기재되었고, 묘주(廟主)에 대명(大明)에서 내린 시호를 쓰지 않음도 참작한 것이 있다. 경효전(景孝殿 명성황후 민씨의 혼전(魂殿))과 홍릉(洪陵 명성황후의 능)에 전(奠) 올리는 것은, 《춘추》의 대의(大義)에 임금의 원수를 갚지 못했으면 장사하였다고 쓰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인산(因山)했으나 장사하지 않은 것과 같기 때문에 장사하기 전 예(禮)에 의해서 오히려 전을 올린다. 순명비(純明妃 순종(純宗)의 비(妃) 민씨(閔氏))에 대한 복제(服制)는 단의빈(端懿嬪 경종(景宗)의 비 심씨(沈氏))의 상사에 소현세자(昭顯世子) 때의 예(禮)를 본떠서 시행하였다. 대명 전례(典禮)를 상고하면 의문태자(懿文太子)와 장경태자(莊敬太子)의 예제에 이미 시행한 전례가 있으므로 이에 의거해서 거행했으니, 기재된 책이 여기에 있다.”
하였다. 선생이,
“폐하께서 어찌 의거한 데가 없이 시행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변경할 수 없는 법이 아니며, 신이 아뢴 것은 경례(經禮)입니다. 채납하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이,
“이것은 갑작스레 단행할 것이 아니니, 천천히 상량(商量)함이 마땅하다.”
하였다. 이때에 상이 항상 해가 돋은 다음에 잠자리에 들고 오후가 되어야 잠자리에서 일어나 온갖 법도가 해이해졌기 때문에, 선생이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잠자리에 들며, 분발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뜻으로, 되풀이해서 아뢰고는 물러 나왔다. 상이 음식을 하사하고 또 액례(掖隷)를 시켜 부축해서 뜰을 내려가게 하였다.
○ 이때 왜적이 우리나라 동학(東學)의 남은 무리를 유인해서 머리를 깎게 하고 창귀(倀鬼)로 삼아서,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라고 하였다. 곳곳마다 모여서 임금을 비방하고 재상(宰相)을 능욕해서 기세가 날로 성해지니, 중외가 두려워했다. 선생이 차자를 올려 그들이 윗사람을 범(犯)하는 부도(不道)한 죄를 처음 말했으니 차자에,
“저들이 민회(民會)라고 말하는 것은 여러 불평하는 무리를 모아서, 사단(事端)을 얽고 화근을 빚어온 지가 벌써 하루 이틀이 아닙니다. 밖으로 강한 이웃 나라의 세력을 믿고, 안으로는 조정의 끄나풀을 빙자해서 군부의 엄명을 무시하고 정부의 대관도 무시합니다. 죄수를 함부로 탈취하고 입에 나오는대로 비방하며, 심지어는 대궐 문간에 모여서 곡(哭)하는 변괴까지 있었습니다. 아, 기강이 끊어지고 명문이 없으졌으니, 나라가 어찌 나라꼴이 되며 사람이 어찌 사람답겠습니까.
이 백성들도 모두 선왕(先王)께서 어루만지며 기른 적자(赤子)이며, 예의(禮義)로 다스리던 백성입니다. 당초부터 화(禍)를 즐기고 난(亂)을 좋아하는 성품을 가졌던 것은 아니며 또한 임금을 높이고 윗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성품이 변하고 마음이 바뀌어서 이렇게 극도에 이르렀습니까. 아, 여기에 어찌 한심해서 통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뭇 백성의 죄이니 진실로 말할 것도 없지마는, 폐하께서 어떻게 수성(修省)하고, 정부가 어떻게 변동했는지는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신은 진실로 폐하께서 급한 일을 당해도 정돈할 여가를 갖는 훌륭한 덕과 넓은 도량이 있는 줄은 알지마는, 오늘날 믿는 바가 과연 어디에 있는지를 신이 실로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늘을 믿고자 하신다면, 민심이 곧 천심(天心)인데, 민심이 벌써 이와 같으니 천심도 알 만합니다. 정부를 믿고자 하신다면 지금의 정부는 바로 저들이 원수처럼 여기는 바입니다.
대개 저 난민(亂民)의 무리는 패류라면 패류이고 역적이라면 역적이니, 그 죄상을 논한다면 죽이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그러나 정부에서 스스로 한 짓이 이렇게 되도록 초래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폐하께서 생각하기 바랍니다. 근일 정부에 있는 자들은 과연 모두 어떤 사람들입니까. 비록 몸과 마음을 모두 바쳐서 나랏일에 애쓰다가 죽은 다음에야 그만둔 제갈량(諸葛亮) 같은 이는 없더라도 마음을 나라에 두어 임금과 기쁨과 슬픔을 함께하려는 자가 있습니까. 비록 면전에서 잘못을 책망하며 조정에서 다투어 허물을 보완하고 유실된 것을 줍던 급암(汲黯) 같은 자는 없더라도 능히 교묘한 말과 아첨하는 낯빛으로 임금의 뜻을 앞질러 영합하지 않는 자는 있습니까. 비록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의 성명도 모른다는 왕소(王素 송 인종 때의 간관)의 말과 같은 자는 없더라도 능히 단아한 절조를 다소 지켜서 몸을 삼가고 염치를 아는 자는 있습니까. 이와 같지 않다고 말한다면, 반드시 권세를 좋아하고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이며, 반드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해쳐서 이(利)를 도모하며 재물을 모으는 무리며, 반드시 예의를 버리고 염치도 버려서 얻지 못하면 걱정하고 얻고 나면 또 잃을까 걱정하는 무리이며, 반드시 임금을 팔고 나라를 팔아서 도적의 창귀가 된 무리입니다. 이와 같은 무리가 요로를 차지해서 수십여 년을 들락날락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나라가 병들지 않겠으며, 어찌 백성이 고달프지 않겠으며 어찌 인심이 흩어지지 않겠으며, 화란(禍亂)이 겹쳐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은 고종(殷高宗)이 융제(肜祭)하는 날에 꿩이 우는 재이(災異)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라를 잘 다스려서 편안하게 하는 공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며, 주 선왕(周宣王)이 공화(共和)의 난(亂)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주 나라를 중흥시키는 아름다움을 이루지 못했을 것입니다. 구천(句踐)이 회계(會稽)에서 치욕(恥辱)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오(吳) 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이며, 연 소왕(燕昭王)이 자쾌(子噲)의 변란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제(齊) 나라를 보복하는 공을 이룩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대개 어지러움이 많음은 나라를 중흥하게 되는 까닭이 되며 어지러움이 지극하면 다스림을 생각하게 되는 까닭입니다. 폐하께서는 진실로 오늘날의 사세가 어떻게 할 수 없음을 아실 것입니다. 그러나 변동하는 기틀은 오히려 폐하의 한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지금 신하 가운데에 가장 무거운 죄를 지어 백성들이 이를 갈고 마음을 썩이는 자는 누가 그중에 가장 심하며, 정령(政令)으로서 시대의 큰 폐단이 되어 백성들이 머리를 앓고 이마를 찌푸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 그중 심한 것인지 요량하십니까. 신은 진실로 우매하고 고루해서 하나하나 들어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벼슬에 있으면서 욕심 많고 비루하여 사정(私情)에 따라 공사(公事)를 없애며 무뢰배(無賴輩)와 결탁해서 뇌물로 협잡하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 관찰사(觀察使)나 수령으로 재물을 탐내고 백성을 약탈하여 민생(民生)을 짓밟는 자는 죽여야 하고, 오로지 재물을 모아 거두기만 일삼으며 아랫사람의 것을 덜어 내어 윗사람에게 보태어서 백성들의 원망을 윗사람에게 돌리는 자는 죽여야 합니다. 사술(邪術)과 좌도(左道)를 믿고 군상(君上)을 의혹하게 한 자는 죽여야 하고, 적국과 외인(外人)을 믿고 임금을 협박한 자는 죽여야 합니다. 계권(契券)을 만들거나 조약을 만들어서 국권과 토지를 남에게 넘겨준 자는 죽여야 하고, 강상(綱常)을 없애고 인륜을 무너뜨리며 말마다 반드시 성인을 헐뜯는 자는 죽여야 하고, 옛 도를 아주 싫어하고 외국 풍속을 즐겨 사모하며 신기함을 좋아하고 기교를 숭상하는 자 또한 죽여야 합니다.”
하였다.
또 어진 인재를 택해서 정부를 맡기고, 세금을 많이 거두는 일을 금지해서 백성을 보전할 것이며 학교를 세워서 인재를 양성하고, 신의를 닦아서 이웃 나라와 교섭하며, 나라의 예법을 바로잡아서 말세의 폐단을 구제하는 모두 다섯 가지를 말하였다.
그런데 나라 예법에 잘못되었다는 것은 바로 종묘(宗廟) 위패에 명 나라에서 내린 시호를 삭제한 것, 4대(代)를 추존할 때에 진종(眞宗)ㆍ헌종ㆍ철종을 빠뜨려서 거행하지 않은 것, 경효전(景孝殿)ㆍ홍릉(洪陵)에 전(奠) 올리는 것을 철폐하지 않는 것, 순명비(純明妃)의 상(喪)에 신민(臣民)의 복제(服制)를 기년(朞年)으로 한 것, 문묘(文廟) 축식(祝式)에 어휘(御諱)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끝으로 또 ‘정심(正心)’이라는 2글자로 쇠퇴한 나라를 흥기시키고 어지러운 세상을 다스리는 요법(要法)으로 삼으라고 상소한 것이 전후 누만(累萬) 마디였다.
○ 포덕문(布德門) 밖 향축과(香祝課)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선생이 한 차례 천폐(天陛)를 하직했으나 의리상 경솔하게 돌아갈 수 없으므로 드디어 향실(香室) 옆방에 물러나 엎드려서, 올린 말 중에 한 가지라도 채납되기를 기다렸으나 상은 끝내 유음(兪音)을 내리지 않았다. 그때에 진신장보(搢紳章甫)로서 날마다 뵙는 자가 매우 많았고, 도하 백성들도 선생의 말이 실시되기를 목을 늘이고 기다리지 않은 자가 없었다.
○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지금 국사에 고질로 된 폐단을 짧은 시간에 바로잡아 구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생은 모름지기 조칙(詔勅)을 받들어 공무를 보면서 오랜 세월을 두고 점차로 성상의 마음을 돌리도록 깨우치기를 기약해야 한다. 또 이미 도성에 들어왔으니 영수각(靈壽閣)에 숙배(肅拜)하고 기로사(耆老社)에 참여해도 의리에 불가할 것이 없다.”
하니, 선생이 이르기를,
“이것은 이른바 ‘한 자[尺]를 굽혀서 한 길[尋]을 편다.’는 의론이다. 또 지금 위급한 날을 당했는데 어느 겨를에 기로사에 들어가서 일신의 영예(榮譽)를 삼겠는가?”
하였다.
○ 8일(임자)에 상소해서 진정(陳情)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생각건대 폐하께서 금년 6월 이후부터 특별한 예로 초야에 묻혀 있는 신을 부르신 것이 어찌 얼굴만 한 번 보고 그만두려던 것이겠습니까. 아마도 한 가지 어리석은 의견이나마 국가에 도움되리라고 생각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이 궐문 밖에 대명(待命)한 지 벌써 6일입니다. 만일 신의 말이 좋다면 채납하여 날이 저물도록 기다리지 않아야 되고 만약 좋지 않다면 지척(指斥)하여 죄를 주는 것도 아끼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좋아도 채납하지 않고 좋지 못해도 지척하지 않으니, 이것은 폐하께서 바로 신을 희롱하신 것입니다. 신이 보잘것없으나 또한 수치스러움은 아는데 폐하께서 어찌해서 신하를 가볍게 봄이 이에 이르렀습니까.
또 신이 말한 여러 조목이 성상의 마음에 흡족하기는 부족하겠지만 당장의 긴급한 일에 적으나마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시행하는 데에도 큰 어려움은 없을 것입니다. 설령 시행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할지라도 폐하의 마음속에 ‘사(私)’ 자 하나만 없앤다면 막힘없이 시행되어서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폐하의 마음속에 둔 사 자가, 폐하가 계시는 위치나 다스리는 나라와 비교해 보면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가볍습니까? 또 신은 알지 못하오나 오늘날이 어떤 시기입니까? 외국 사람이 침해하고 업신여김은 오히려 괜찮은 편입니다만, 나라 안의 경찰권(警察權)을 저들이 담당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위로는 조정이 없어졌고 아래로는 인민이 없어졌습니다. 이와 같이 되었지만 폐하께서 그래도 분발해서 척념(惕念)하지 않으며 조정에서도 오히려 묵은 생각을 씻고 새롭게 진작하지 않으니, 오백년 종사와 삼천리 강토와 민생(民生)을 어느 지경으로 이끌려고 하십니까? 신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통곡하면서 죽고 싶다가 드디어 미친병이 크게 일어나서 그칠 줄을 모릅니다.
신이 이미 여러 차례 소명(召命)을 받고 왔으니, 말씀을 드렸는데 시행되지 못하면 또한 죄를 받고 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머리를 숙이고 두려워하면서 한번 입대(入對)한 것을 영화롭게 여기며 물러나겠습니까? 청하건대 폐하께서는 벼락 같은 위엄을 바삐 내리시어 신의 미치고 망녕된 죄를 다스려서 신하된 자의 경계가 되게 하소서.”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서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말한 바가 모두 절실하니, 깨우쳐 살펴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 없다. 그러나 오늘날 국세(國勢)가 진작되지 못하는 것은 오래된 고질병과 같으니, 달[月]을 기약해야 치료할 수 있으며, 환약 한 개로 하루에 소생을 바랄 수 없다. 방금 말하고 즉시 그 효과를 구하는 것은 아마도 시기에 알맞는 조치를 익히 생각지 못한 것이 아닌가? 이 어려운 걱정을 생각하여 협찬(協贊)하기를 힘써서 나랏일을 함께 이룩하라.’고 의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 24일(무진)에 두 번째 상소해서 떠날 수 없는 의리를 아뢰고, 겸해서 일본 화폐(貨幣)를 차관(借款)하여 외국에 의지하는 잘못을 말하였다.
그때에 선생이 오래도록 궐문 밖에 엎드려 있으니, 임금이 민망하게 여겼다. 시신(侍臣) 및 액례(掖隷)를 잇달아 보내어, 집에 물러가서 기다리도록 하유했으나 선생은 성의를 더욱 더하고 물러가지 않기를 고집하였다. 이는 대개 맹자가 ‘왕이 고치기를 나는 날마다 바란다.[王庶幾改之 予日望之]’라는 뜻이었다. 이에 이르러 또 상소했으니, 그 대략에,
“오늘날 국가의 형편을 보건대, 신이 폐하를 버리고 장차 어디를 가겠습니까. 폐하의 좌우(左右)를 말한다면 아첨하는 간사한 무리가 앞에서 아양을 떨며, 몰래 기만하는 마음을 갖고 온갖 방법으로 임금과 나라를 팔아넘기는 일을 합니다. 폐하의 조정으로 말한다면 소인이 안으로 간사한 사람과 결탁하고, 밖으로는 억센 적국(敵國)을 끼고서 권세와 녹(祿)을 도둑질할 계책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체면을 아는 자는 또한 모두 몸을 아끼고 일을 피하고 있으면서 뒤로 물러나며 우리 임금은 되지 않는다는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폐하의 백성으로 말한다면, 화(禍)를 좋아하고 난(亂)을 생각하는 무리가 떠들썩하게 길에 횡행(橫行)하면서 감히 망측한 말을 떠벌리고 도적을 인도하는 창귀(倀鬼)가 되기를 꺼리지 않고 있습니다. 폐하의 이웃 나라로 말한다면 여우같이 아첨하는 모습으로 원숭이처럼 간사하여 동맹(同盟)을 깨뜨리고 조약(條約)을 저버려서 오로지 모두 삼키려는 술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정법(政法)의 권한을 잡아서 우리의 손발을 옭아매고, 우리의 입과 혀를 재갈 먹이고 있는데, 또 어떤 화변을 꾸며낼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아, 임금이 이처럼 외롭고 나라가 이처럼 위태로우니, 신이 비록 머리를 부수고 목을 잘라서 폐하의 은택에 만에 하나라도 보답하지는 못할지언정 어찌 차마 폐하를 버리고 가겠습니까. 그리고 폐하께서 이미 이때에 신을 불렀으니, 어떻게 다시 이런 때에 신을 보내겠습니까.
대개 예로부터 나라를 잃는 데에는, 권세를 잡은 신하가 참람하게 정권을 훔쳐서 잃는 것이 있었고 적국(敵國)과 전쟁을 벌여서 이기지 못해서 잃는 것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어와 문자로써 계권(契券)을 만들고 조약을 맺어서 온 나라를 들어다가 도적에게 주어서 한 명의 군사도 교전(交戰)하지 않았고 한 개의 화살도 쏘지 않고서 나라를 잃었다는 것은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또,
“근일에 화폐(貨幣) 교정(矯正)하는 일을 말한다면, 교정하는 것이 진실로 옳지마는 교정을 장차 어떻게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먼저 외국에서 차관(借款)하려면 반드시 전당(典當)하는 물건이 있을 것이며, 전당하는 물건은 반드시 토지로 할 것입니다. 토지는 폐하께서 선왕으로부터 강토와 인민을 잘 보존하라고 부탁을 받은 것인데, 하루아침에 남에게 주고자 하십니까. 또 차관을 해다가 장차 어디에 사용하려는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수량에 상관없이 차관하는 날이 바로 나라가 망하는 때입니다. 요즈음 이 조약을 이미 맺었다고 들었으니, 신은 이에 대하여 더욱 애통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아직 차관하지 않았다면 그 계권을 곧 돌려주기를 신은 원합니다. 재물을 절약하고 비용을 검소하게 줄이면서 차츰 국력이 조금 펴지기를 기다린 다음에 의논해도 좋을 것입니다. 저들이 만약 조약을 깨뜨린 것으로써 우리를 책망한다면 비록 두어 달 이자를 부질없이 줄지라도 제 살을 베어서 배를 채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진실로 이 화패(禍敗)의 연유를 찾는다면 모두 ‘의부(依附)’라는 2자가 병이 된 것입니다. 신은 원하건대, 성상께서 딴 나라에 의부하는 근성을 끊고 뜻을 확립하여, 흔들리지도 굽히지도 말고서 차라리 자주(自主)하다가 망할지언정 의부해서 살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무릇 여러 신하 중에 외국에 의부하는 자는 모두 저자[市]에서 죽여 온 나라에 호령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내수(內修)하는 방법을 부지런히 힘쓰고 자강(自强)하는 계책을 빨리 도모해서, 한결같이 신이 전일에 올린 차자에 말한 바와 같이 하소서.
성상께서 마음과 생각이 오직 백성을 편하게 하고 나라를 보전하는 데에 있으면 저들이 비록 의리가 없으나 또한 천하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해서 감히 우리를 삼키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신이 밤낮으로 땅에 엎드려서 성상께 바라는 바입니다.”
하였다.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고 오직 시행하기가 어려운데 또한 시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아뢴 바도 깊이 생각하고 있는 중인데, 오직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겠다. 그러나 경이 노쇠하여 억지로 할 수 없으니, 곧 집에 돌아가서 조리하라.’고 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傳諭)하라.”
하였다.
○ 25일(기사)에 비지(批旨)를 봉해서 도로 바쳤다.
소장을 봉상(封上)한 이튿날에 비지가 비로소 내렸다. 선생은 비지를 받고는,
“노신(老臣)이 전후로 아뢴 말은, 그만둘 수 있는 말을 한 것이 아닌데 위에서 비답한 바는 들으심이 아득할 뿐이 아니다. 다만 승순(承順)하는 것이 공순이라 한다면 비록 훌륭한 계획과 좋은 방책이 있을지라도 장차 어디에 쓰겠는가.”
하고, 드디어 옛사람이 조서를 봉하여 바치는 전례에 의거하여 비지를 도로 바쳤다.
○ 28일(임신)에 세 번째 상소를 하고 대죄(待罪)하였다.
소의 대략은,
“신이 그저께 올린 소장에, 떠날 수 없는 의리를 말하고, 말미에 차관하면 나라가 반드시 망하고 외국에 의존하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아뢰었습니다. 말은 비록 미친 듯 망녕스러웠으나 이치는 실상 분명하고 곧으니 폐하께서 느껴 깨달으시고 조정도 깨우쳐 살피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내리신 비지를 받으니, 겉치레를 하는 예사 투식(套式)에 불과하니, 상소의 뜻을 전혀 살피지 않으신 듯하여, 신은 당혹해서 탄식했습니다. 생각건대 출납(出納)하는 관원과 정부의 신하가 임금 섬기는 의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진실로 복역(覆逆)하여 왕언(王言)이 한결같이 성실한 데에서 나와서, 충성된 말을 싫어하여, 스스로 옳게 여기고 남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 기색은 신하에게 보이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에 눈여겨보면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고 신에게 괴상한 거조(擧措)를 해서 비지를 받지 않도록 했고, 또 능히 죄를 성토해서 나라 기강을 조금이나마 부호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조정의 어지러운 한 단서와 오늘날 화패가 이른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인해 왕명을 따르지 않은 죄를 받아서 신하된 자의 경계가 되기를 청합니다.”
하였더니, 상이 비답하기를,
“‘소장을 보고 경의 정성을 잘 알았다. 경의 아뢴 말은 지극한 충성과 사랑이 아님이 없으니, 짐이 어찌 깊이 생각해서 행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상량(商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있다. 화폐 교정하는 일은 정부에서 타당하게 조처할 것이니, 경은 그렇게 알고 사제(私第)에 물러가 기다리라.’고 정부 낭관을 보내어 전유하라.”
하였다.
○ 홍문관 학사 남정철(南廷哲)이 상소하여 선생의 말을 채용(採用)하기를 청하였다.
상소의 대략에
“폐하께서 찬정 신 최익현에게 공경을 지극히 하고 예를 다해서 연석(筵席)에서 인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성대한 세대(世代)에 있던 일인데 지금 있었으니, 신민이 기뻐하며 몸을 솟구쳐 움직이며 다스림을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최익현을 불러온 것은 아마도 벼슬길로 나오게 하여 그의 말을 쓰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가 이미 나와서 말을 했습니다만 여러 날 귀를 기울여도 채용하였다는 말을 듣지 못했으니, 천하 후세에 최익현은 직간(直諫)하는 정성이 있었으나 폐하는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이는 실상이 없었다고 말할 것이니, 신은 애석하게 여깁니다. 비록 태평무사한 때라도 허례(虛禮)로 어진 이를 얽어매고 겉치레로 말을 구함은 오히려 불가한데, 하물며 위태하고 망하려는 오늘날같이 두려운 때이겠습니까.
공자께서 이르기를 ‘좋아하기만 하고 이유를 찾지 않으며, 이유를 찾았으나 고치지 않으면 나도 어떻게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학자가 학문을 하는데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제왕(帝王)이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겠습니까. 폐하께서는 어찌하여 최익현이 아뢴 차자와 소장을 정부에 내려 한결같이 공의에 부쳐 의논한 다음 아뢰게 하고, 폐하께서 직접 결재하여 시행할 만한 것은 시행하고, 시행할 수 없는 것은 그만두어 전환(轉圜)하는 거조가 일월처럼 밝고 받아들이는 도량이 하해(河海)처럼 깊고 넓음을 보게 하지 않습니까? 위태함을 전환하여 편안하게 하고, 비색(否塞)함을 없애어 태평하게 하는 기틀이 실상 여기에 있는데, 폐하께서는 무엇을 꺼려서 하지 않습니까. 비록 그가 말한 여러 조목 중에 혹 한두 가지가 성심(聖心)에 맞지 않고 시의(時宜)에 적중하지 않아서, 일이 어려운 문제에 관계되고 예가 신중한 데에 관계되어 갑자기 의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의 뜻은 일찍이 충성되지 않음이 없고 말은 곧지 않음이 없으니, 또한 용납해서 폐하의 넓고 넓은 도량을 보이시면 성덕(聖德)에 더욱 빛이 되지 않겠습니까.
최익현이 연로하고 위독한 사람으로서 궐문 밖에 엎드려 추운 데서 자고 찬 음식을 먹은 지가 벌써 여러 날인데도 스스로 죽기를 작정하고 물러가지 않는다 하니, 이 또한 옛사람의 시간(尸諫)하던 뜻입니다. 만일 그 말은 미처 채용하지 않았는데 최익현을 문득 먼저 죽게 한다면 성조(聖朝)에 누(累)됨이 어떠하겠습니까.
신이 최익현과 40년 전에 많은 사람이 모인 좌석에서 한 번 면대(面對)한 적은 있었으나 일찍이 평소의 교분과 방문하는 즐거움은 없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말하는 바는 털끝만큼도 감히 최익현을 위한 것이 아니며, 단연코 폐하를 위한 것이며, 천하 국가를 위한 것입니다.
청하건대 황상(皇上)께서는 세 번 깊이 생각하시고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곧은 말을 받아들이고 결단하여 시행하시면 실로 종사 만대의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에 조병호(趙秉鎬)ㆍ김학진(金鶴鎭)도 또한 상소해서 아뢰었으나 회보(回報)가 없었다.
○ 선생께서 한 달 가까이 춥게 거처하고 찬 음식을 먹으면서 낮에는 수응(酬應)이 매우 번거롭고, 밤이면 근심으로 잠을 못 이루어서 《구경연의(九經衍義)》 및 《주역(周易)》 등 글을 열람하였다. 자질(子姪) 및 문인 중에 안필호(安弼濩)ㆍ최봉소(崔鳳韶)ㆍ채상덕(蔡相悳)ㆍ최전구(崔銓九)ㆍ윤항식(尹恒植)ㆍ이승회(李承會) 등이 시종 옆에서 모셨고, 족손(族孫) 최만식(崔萬植), 종인(宗人) 최효석(崔孝碩)과 영남 사람 이승원(李承遠)이 좌우에서 수고하였다. 이때에 와서 한 해가 거의 다 가고 또 폭풍이 눈비를 몰고 와서 기상이 매우 비참(悲慘)하였다. 선생도 온갖 감회(感懷)가 엇갈림을 스스로 금치 못하여 그믐날 밤에 다음과 같은 절구(絶句) 한 수를 지었다.

세모의 삼한에 / 歲暮三韓國
우리 임금 성명하네 / 吾王自聖明
고신이 치우친 사랑 받아 / 孤臣偏被眷
죄가 많은데도 지금껏 살아 있네 / 積罪至今生


 

[주D-001]연사(練祀) : 아버지는 살아 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죽으면 한 돌 만에 지낼 소상(小祥)을 11개월 만에 지내는 제사.
[주D-002]급암(汲黯) : 한 무제(漢武帝) 때 사람으로 임금의 면전에서 잘못을 지적하고 조정에서 시비를 논쟁(論爭)했는데, 무제가 꺼려해서 “심하다, 급암의 어리석음이여.”라고까지 하였다. 《漢書 卷50 汲黯傳》
[주D-003]은 고종(殷高宗)이 …… 재이(災異) : 은 고종이 친묘(親廟) 제사에는 제물(祭物)을 풍성하게 하고 원조(遠祖)의 제사에는 약소하게 해서 예를 아주 잘못했으므로 융제(肜祭)하는 날 꿩이 우는 재이가 있었다. 은 고종이 조기(祖己)의 간언(諫言)을 받아들여 정사를 닦고 덕을 행하여 은 나라를 중흥시켰다. 《書經 高宗肜日》 《史記 卷3 殷本紀》
[주D-004]공화(共和)의 난(亂) : 주 여왕(周厲王)이 무도한 정치를 하다가 난리를 만나 체(彘)로 출분(出奔)했을 때, 공백화(共伯和)가 제후의 권유로 14년간 천자의 일을 섭행(攝行)한 일을 말한다. 공화(共和)는 공경들이 서로 화합하여 함께 정사를 보는 것을 말하는데, 《사기(史記)》에는 “주공(周公)ㆍ소공(召公)이 협의하여 정사를 행하였다.”고 되었으나 사실이 맞지 않는다는 설이 있다. 주 선왕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여 주 나라를 중흥시켰다. 《史記 卷4 周本紀 注》 《竹書紀年》
[주D-005]구천(句踐)이 …… 치욕(恥辱) : 춘추 시대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왕(吳王) 부차(夫差)와 회계산(會稽山)에서 교전하다가 패하여 항복하였다. 그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하여 와신상담(臥薪嘗膽)하기 20여 년, 마침내 오를 멸망시켜서 수치를 씻었다. 《史記 卷41 越王句踐世家》
[주D-006]자쾌(子噲)의 변란 : 자쾌는 연 역왕(易王)의 아들. 자지(子之)를 신임해서 나라를 맡기고 자신이 신하 노릇을 했다. 그리하여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제(齊)의 침략을 받아 쾌가 죽었다. 태자(太子) 평(平) 즉 소왕(昭王)이 즉위한 뒤에 현자를 부르고 백성을 어루만지는 등 선정을 베풀어 부국강병을 이룬 다음, 제(齊)를 공격하여 도망간 자지(子之)를 잡고 제 나라 땅을 거의 차지하여 선왕의 수치를 복수하였다. 《史記 卷34 燕昭公世家》
[주D-007]한 자[尺]를 …… 편다 :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에 있는 말로, 맹자의 거취에 대해 논한 것인데, 맹자가 자신을 굽혀 한 번 제후(諸侯)의 왕을 만나 보면 왕도(王道)나 패도(覇道)를 행할 수 있으니, 굽히는 바는 작고 펴는 바는 큼을 비유한 말이다.
[주D-008]옛사람의 …… 뜻 : 위(衛)의 대부 사어(史魚)가 영공(靈公)에게 어진 이를 등용하고 착하지 않은 자를 물리치기를 청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죽을 무렵에 그 아들에게 장사하지 못하도록 명해서 임금에게 간한 고사. 《韓詩外傳》


 

ⓒ 한국고전번역원 ┃ 김도련 (역) ┃ 19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