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실 관련 고전 모음 - 열 다섯 / 김시양 찬 부계기문(번역본)

2014. 11. 23. 05:04향 이야기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기문(涪溪記聞) 김시양(金時讓) 19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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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계기문(涪溪記聞)

 


부계(涪溪)는 즉 종성(鐘城)의 다른 이름으로, 공이 광해 임자년(1612)에 귀양살이하였음.
김시양(金時讓) 찬

북쪽 지방은 바로 풍패(豊沛)의 땅인데, 요황(要荒) 밖에 있어서 풍속이 오랑캐와 다름없이 포악하였다.
선조(宣祖) 초년에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 관찰사로 있으면서 함흥(咸興)에 문회서원(文會書院)을 짓고 문교(文敎)로 교도(敎導)를 하였다. 주현(州縣)의 백성들 중에 시서(詩書)를 외우고 글을 잘 짓는 사람이 있으면 친히 그와 주객(主客)의 예(禮)를 차리니 사람들이 다 다투어 권면되므로, 글을 숭상하는 풍습이 성하여 신적(臣籍)에 이름이 적히고 조정에 등용된 자가 서로 뒤를 이었다.
임진년 난리에 난을 평정하고 질서를 회복시킴이 모두 유생(儒生)이라고 불리는 자들에게서 시작되었으니, 이공(李公)과 같은 이야말로 참다운 관찰사라고 하겠다.
이청련(李靑蓮)은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그의 집에서 사사로이 찾아오는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고, 비록 그 명망이 백집사(百執事)가 되기에 알맞은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혹 사사로이 부탁하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끊어버리니, 인재를 아끼는 이들은 그런 처사를 대부분 병통으로 여겼다.
대부분 병통으로 여긴 것은 진실로 옳지만, 오직 돈이면 좋다고 하여 문 앞이 시장을 이루게 하는 자들과 비교한다면 그 차이는 현격한 것이다.
명종(明宗)이 어렸을 때에 정권이 동조(東朝)에 있었다. 권세를 잡은 간신들이 왕명을 절취(窃取)하였으니, 을사년의 옥사는 명종이 아는 바가 아니었다.
순회세자(順懷世子)가 훙(薨)하니, 명종은 매우 심하게 애통해 하다가 조금 뒤에 탄식하기를,
“내가 어찌 통곡할 것인가. 을사년에 충성하고 어진 선비들이 죄없이 줄을 지어 죽는데도 내가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금지시키지 못하였느니, 내 집에 어찌 대대로 군왕(君王)이 있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천년의 먼 후세에 이르기까지 신하와 백성들을 울게 할 만하구나.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은 을사사화 때 종성에서 귀양살이한 것이 19년 동안이나 되었다. 곤궁하게 살아가면서도 만 권이나 되는 서적을 독파(讀破)하고 《속몽구(續蒙求)》를 저술하여 선비들에게 혜택을 주니, 그에게 찾아가서 배우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다. 북쪽 사람들이 지금까지 유정언(柳正言)이라고 하면서 칭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정언으로 와서 귀양살이했기 때문이리라.
그의 부인 또한 문장에 능하였는데, 홀로 만리길을 걸어서 미암을 종성에까지 따랐다. 그 부인은 마천령(蘑天嶺)을 지날 때에 시를 짓기를,
걷고 걸어서 드디어 마천령에 닿으니 / 行行遂至磨天嶺
끝없는 동해 바다 거울처럼 판판하구나 / 東海無涯鏡面平
만리길을 부인이 무슨 일로 왔던가 / 萬里婦人何事到
삼종(三從)의 의는 무겁고 일신은 가벼워서라네 / 三從義重一身輕
라고 하였으니, 성정(性情)의 바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다.
미암은 바둑을 잘 두었다. 참판 유경심(柳景深) 또한 바둑을 잘 둔다고 자부하였다. 미암이 종성에서 귀양살이할 때, 유경심은 원수(元帥)로서 행영(行營)에 주둔하고 있었다. 매번 빈객을 물리치고 사잇길로 달려와서 승부 내기를 하였으며, 간간이 글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한 달에 3~4회씩 오기만 하면 이틀밤을 묵었는데, 북쪽 사람들은 지금까지 훌륭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소재(蘇齋) 노수신(蘆守愼)이 진도(珍島)에 귀양살이할 때에 수령이 당시 재상들의 눈치를 살펴서 여러 모로 곤욕을 보여,
“죄인이 어찌 쌀밥을 먹을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면서, 산군(山郡)에서 기장쌀을 사다가 공급하였다. 어느 달 밝은 밤에 소재가 아이종을 시켜서 피리를 불게 하였더니, 수령이 말하기를,
“죄인이 어찌 즐길 수 있단 말인가?”
라고 하고는, 그 종을 옥에 가두었다. 선조 때에 소재가 크게 등용되니, 그 사람은 드디어 때를 만나지 못하고 한평생을 마쳤다.
나는 귀양살이한 지가 이미 오래인데, 시사(時事)는 날로 더욱 심해져서 수령이 된 자는 모두 나를 모욕하는 것으로 능사를 삼고 있다. 식량의 공급이 항상 끊어지니 기장쌀인들 어떻게 얻을 수 있겠는가. 또한 세태가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승지 강서(姜緖)는 의정(議政) 사상(士尙)의 아들이다. 거짓 미친 체하고 술을 마시며 지내니, 사람들이 그를 매취(每醉)라고 불렀다. 그는 두 다리를 뻗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곤 하였다. 하루는 길가에 쓰러져 있으니, 어린 아이들이 희롱하기를,
“영공(令公)께서는 길에 눕지 마십시오. 옥관자(玉貫子)가 깨질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니, 강서는 말하기를,
“금관자(金貫子)로 바꾸면 되지.”
라고 하였다. 그때는 바야흐로 태평한 때였다. 오리(梧里) 이원익(李元翼)이 하급 관료로 침체되어 있으니, 남들은 그를 뛰어난 인물로 생각지 않았다. 강서는 그를 볼 때마다 번번이 말하기를,
“국가에 큰 변란이 있으면 이 사람이 반드시 눈물 흘리며 담당할 것이다.”
하였다. 사람들은 다 웃더니, 임진년에 이르러 드디어 그 말이 맞았다.
승지 조인복(趙仁復)과 전한 김홍민(金弘敏)은 한때 함께 중한 명망이 있었다. 김 합천 창일(金陜川昌一 합천은 고을 이름으로 고을 원님을 나타내는 것)이 강서에게 묻기를,
“조인복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니, 강서는 두 다리를 앞으로 뻗고 앉아서 대답하기를,
“나의 종이오.”
하였다.
“김홍민은 어떤 사람이오?”
하니, 꿇어 앉아서 말하기를,
“나의 스승이오.”
라고 하였다. 말년에 이르러 조인복이 그 본성을 잃고 일처리가 잘못되게 된 뒤에야 비로소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하였다.
상사(上舍) 유극신(柳克新)의 자(字)는 여건(汝健)인데, 젊을 때에 뜻이 크고 기개가 있어서 작은 일에 구애받지 않았다. 진사 백진민(白振民)은 참의 유양(惟讓)의 아들인데, 유극신에게 희롱하여 말하기를,
“그대와 유색신(柳色新)과는 몇 촌간인가?”
하니, 유극신이 그 말을 받아 곧 대답하기를,
“유색신은 가계(家系)가 위성이고 나는 가계가 문성(文城)이니, 자연 아무런 관계도 없네. 그런데 모르겠네만 백유가(白遊街)와 너의 아버지와는 몇 촌간인가?”
라고 하니, 백진민은 대답하지 못하였다. 듣는 사람들이 배꼽을 잡고 몹시 웃었다. 여기서 백유가라는 것은 거리의 이름이다. 그런데 유(遊)와 유(惟), 양(讓)과 양(羊), 가(街)와 개[狗]는 속음이 서로 같기 때문이다.
저작(著作) 김성립(金誠立)의 아내는 허균(許筠)의 누나인데, 문장을 잘 지었다. 일찍 죽으니 허균이 그의 유고(遺稿)를 수집하여 제목을 《난설헌집(蘭雪軒集)》이라고 하고, 중국 사람에게 발문(跋文)을 받기까지 하여 그 전함을 빛나게 하였다.
어떤 사람은 ‘거기에는 남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 많다.’고 하였으나 나는 본래부터 그 말을 믿지 않았는데, 내가 종성으로 귀양오게 되어 《명시고취(明詩鼓吹)》를 구해 보니, 허씨의 시집 속에 있는,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 눈에 떨치니 봄구름 따사롭고 / 瑤琴振雪春雲暖
패옥이 바람에 울리는데 밤 달이 차가워라 / 環珮鳴風夜月寒
라고 한 율시(律詩) 여덟 구절이 《고취(鼓吹)》에 실려 있는데, 바로 영락(永樂 명 성조(明成祖)의 연호) 연간의 시인 오세충(吳世忠)의 작품이다.
나는 이에 비로소 어떤 사람이 한 말을 믿게 되었다. 아, 중국 사람의 작품을 절취하여 중국 사람의 눈을 속이고자 하였으니, 이것은 남의 물건을 훔쳐다가 도로 그 사람에게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성이 이씨인 무인(武人)이 종성 판관(鍾城判官)으로 있다가 체직된 뒤에 병영(兵營)에 억류되어 있었다. 그의 누나가 서울에 있었는데, 하루는 몸종이 판관이 왔다고 알렸다. 그의 누나가 매우 기뻐하여 즉시 인도해 들어오게 하니, 의복이 평일과 같았다. 문에 들어와서는 말하기를,
“내가 먼저 가묘(家廟)에 배알해야 되겠습니다.”
고 하고, 바로 사당 앞에 이르러 꿇어앉더니 사라져 버렸다. 온 집안이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뒤에 들으니, 바로 그가 죽은 날이었다고 한다. 그의 누나는 바로 나의 벗 이직부(李直夫)의 종조고모(從祖姑母)로서 직부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직부의 이름은 경여(敬輿)이다.
김애헌(金艾軒)의 휘(諱)는 시헌(時獻)으로, 나의 종형(從兄)이다. 역학(易學)에 조예가 있어서 안목(眼目)이 한 세상에 높았다. 비록 역학을 안다는 이름이 있는 자일지라도 인정하는 일이 없었다.
신묘년에 병부랑(兵部郞)으로 대궐에 쇄직(鏁直)한 일이 있는데, 낭관 유극량(劉克良) 또한 위장(衛將)으로서 입직(入直)하고 있었다. 하룻밤에는 술자리를 벌이고 생대추를 먹으면서 서로 잔을 권하였다. 이어 이야기가 만물이 생식(生殖)하는 이치에 미치니, 유극량이 음양(陰陽)이 변화하는 오묘한 이치를 말하되 천지에 형체가 없는 물건에까지 도달하여 그 말이 무궁하였다. 애헌이 매우 놀라 탄복하였다. 취하여 그 이야기를 다 할 수 없었으므로 새벽에 일어나 가서 물으니, 유극량이 놀라면서 말하기를,
“어찌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취중의 미친 말을 깨고나니 기억할 수 없습니다. 나는 무인인데, 어찌 역경(易經)의 이치를 알겠습니까?”
라고 하고는 끝내 말하려고 하지 않았다. 임진란에 유극량은 임진(臨津)에서 전사하였는데, 애헌은 말년에 매양 그의 오묘한 뜻이 전해지지 못한 것을 애석하게 여겨 탄식해 마지않았다.
유공 극량(劉公克良)의 선조는 우리 마을 정아무개의 잃어버린 계집종이라고 한다. 유극량이 과거에 급제한 뒤에 정씨(鄭氏)를 찾아가니 정씨가 알지 못하고 방으로 맞아들이니, 유극량은 엎드린 채 감히 좌석에 오르지 않고 하인의 예를 행하였다. 정씨는 괴이하게 여겨 물어본 뒤에 비로소 그의 어짊을 알고 그를 위하여 그 사실을 세상에 숨겼다. 유극량은 비록 지위가 높아졌으나 여전히 옛 주인으로서 정씨를 섬겨 동네 어귀에 들어오면 반드시 걸어서 갔다. 사람들은 두 사람을 다 어질게 여겼다. 이것으로 하여 유극량의 이름은 더욱 드러났으며, 벼슬은 병사(兵使)에 이르고, 마침내 나라를 위해서 죽으니, 충성스럽다고 할 만하다.
을사사화 때에 이기(李芑)ㆍ윤원형(尹元衡) 등은 스스로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다고 하여 《무정보감(武定寶鑑)》을 편찬하고, 인쇄하여 중외(中外)에 반포하였다.
그때 사문(斯文) 유감(柳堪)은 이부 낭중(吏部郞中)으로 있었는데, 아전이 《무정보감》을 인쇄할 것을 청하니, 유감은 말하기를,
“어찌 반드시 사람마다 인쇄해야 하겠느냐?”
고 하였는데. 드디어 죄를 받고 경흥(慶興)에 귀양살이를 17년 동안이나 하였다.
선조 초에 석방되어 돌아와서 돌아와서 장령이 되었다. 대사헌 박공 응남(朴公應南)과 관청에서 만나니, 박응남이 말하기를,
“공은 북쪽에 귀양가 있은 지 여러 해이므로 마땅히 수령의 치적(治績)의 득실(得失)을 알 것이니, 누가 가장 극진하였소?”
아니, 유감이 말하기를,
“이언충(李彦忠)이 어사로 있을 때에 그 임무를 잘 살폈습니다.”
라고 하였다. 언충은 권간(權奸)의 앞잡이로 가장 공론(公論)에 죄를 얻은 자였다. 박응남은 조정에서 주장하기를,
“유아무개가 오랫 동안 곤궁한 환경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본심을 상실하였습니다. 온정으로 돌봐준 은혜를 생각하여 감히 바르지 못한 사람을 칭찬하니, 등용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박응남이 그때 바야흐로 조정의 논의를 주도하고 있었으므로 유감의 벼슬이 드디어 떨치지 못하였다.
참찬 백인걸(白仁傑)은 늦게 과거에 급제하여 정언(正言)으로서 창평 현령(昌平縣令)이 되었다. 늙은 어머니를 위하여 날마다 잔치를 베풀어서 드디어 백성을 잘 다스리지 못했다는 나무람을 듣게 되자, 감사 최보한(崔輔漢)이 파면시켰다. 그런데 최보한이 일찍이 백인걸에게 탄핵을 당했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보복이라고 말하였다.
인종(仁宗)총에 최보한은 국상(國喪) 때에 기생을 끼고 놀았다고 하여 죄를 받고 파면되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대사령(大赦令)을 내리니, 최보한이 다시 채용되었다. 대간이 그를 탄핵하려고 하니, 백인걸이 그때 헌납으로 있었는데, 그것은 옳지 않다고 하며 말하기를,
“최보한이 기생을 끼고 놀았다는 것은 소문에서 나온 말이니, 그것이 진실인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군자는 너무 심한 처사를 하지 않는 것이니, 어찌 다시 사람을 태평 시대에 금고(禁錮)시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여, 최보한이 드디어 탄핵을 면하였다.
최보한은 백인걸이 묵은 원한을 마음껏 갚을 것을 매우 두려워하였는데, 백인걸이 태연하게 마음에 두지 않으니, 최보한은 매우 고맙게 여겼다.
밀계(密啓)로 사화(士禍)가 일어났을 때에 대간 중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많이 죽었다. 백인걸이 맨 먼저 법망에 걸렸으나, 죽음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은 최보한의 힘이었다.
참찬 백인걸은 허자(許磁)와 이웃 관계여서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허자가 별다른 맛좋은 음식을 얻으면 반드시 백인걸에게 나눠주곤 하였는데, 백인걸의 가난을 알았기 때문이다.
밀계가 처음으로 조정에 내려오니, 인심이 어수선 하였다. 대사헌 민제인(閔齊仁)과 대사간 김광준(金光準)이 원형(元衡)의 사주를 받고 종적이 비밀스러워 아침 저녁도 보전할 수 없었다.
허자가 백인걸을 초청하여 저녁밥을 함께 먹으면서 묻기를,
“내일 대간들이 밀계에 대해 논의하게 될 것인데, 그대에게는 늙은 어머니가 계시니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백인걸이 말하기를,
“이미 몸을 임금께 바쳤으니, 어찌 사사로운 일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허자가 여러 가지 말로 권유도 하고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백인걸이 끝내 듣지 않으니, 허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일 그대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고 하였다. 백인걸이 작별하고 나가니, 허자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일은 그대는 군자가 되고, 나는 소인이 되는 날이 되겠네.”
라고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소인이 소인되는 것을 소인 또한 스스로 아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국사(國史)는 대부분이 다 그때에 득세(得勢)한 자가 편찬한 것이어서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것이 많다. 그러니 그 말이 반드시 다 공정하지는 않으며, 야사(野史)는 금령(禁令)이 있고, 풍속 또한 입언(立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록 선현의 사업이 두드러지게 사람들의 이목에 드러나는 것이 있어도 겨우 수십 년을 지나서 사람들의 이목이 미치지 못하게 되면 찾아볼 길이 없어진다.
정일두(鄭一蠹)는 백세의 유종(儒宗)으로서 상서롭지 못한 시대를 만나 멀리 귀양가서 죽으니, 후인들은 그가 죽은 곳을 알지 못하다. 어떤 이는 종성(鍾城)이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온성(穩城)이라고도 하니, 매우 한탄스럽다.
《해동야언(海東野言)》에 ‘이징옥(李澄玉)이 배반하니 종성 판관 정종(鄭悰)이 그를 죽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종성의 《선생안(先生案)》을 상고하니, ‘정종’이란 사람은 없다. 그리고 부사 정종(鄭種)이 부사로 온 것이 징옥이 배반하였다가 죽은 시기와 서로 맞는다. 아마 《야언》의 기록은 전해 들은 것에서 나온 것이고 처음부터 의거할만한 전고(典故)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부사를 잘못 판관이라고 하고, 정종(鄭種)을 정종(鄭悰)으로 잘못 전하였던 것이리라.
경원 부사(慶源府使) 송희미(宋希美)의 죽음을 《해동야언》에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에 의거하여 송흠(宋欽)이라 쓰고 있고, 《서북정록(西北征錄)》에서는 송희미로 쓰고 있다. 경원부의 《선생안》을 살펴보니, 희미라고 하였다. 흠(欽)과 희미(希美)는 속음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에 잘못 전한 것이다. 성명도 제대로 전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그 밖의 일이겠는가. 뒤에 내가 이도장(李道長)을 사위로 삼았는데, 그의 양모(養母) 정씨(鄭氏)는 바로 정종(鄭鍾)의 후예였다. 징옥을 베어 죽인 공으로 녹훈(錄勳)되었고, 자손은 대대로 충의위(忠義衛)가 된다고 하였다
북경을 가는 사신이 강을 건널 때면 으레 어사(御史)가 금지 물품을 가진 것이 없는가를 수색하는 일이 있다. 그러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명종 때에 사문 김덕곤(金德鵾)은 강직한 사람이었다. 평사(評事)로서 어사 일을 겸임하였는데, 홀로 어사의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 역관이 궁내의 물건이라고 칭탁하고 금지 물품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 조금도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빛이 없었다. 김덕곤이 강개하여 말하기를,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수색은 무엇 때문에 한단 말인가?”
하고, 모두 모아서 불태워 버렸다. 역관이 와서 호소하니, 궁중에서 모두 분하게 여겨 이를 갈았다. 사문 홍인경(洪仁慶)이 듣고 탄복하여 그를 천관랑(天官郞 이조의 낭관(郞官))으로 추천하니, 상이 몹시 성내어 이르기를,
“이처럼 미친 자를 누가 추천하는가?”
라고 하고, 홍인경을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김덕곤 또한 일찍 죽어서 벼슬이 현달하지 못하였다.
영평군(鈴平君) 윤사분(尹士昐)은 정희대비(貞熹大妃 세조비(世祖妃))의 아우이다. 성종 때에 북경에 표문(表文)을 받들고 사신으로 가는데, 참판 권경우(權景祐)가 서장관이 되었다. 사분이 대비의 세력을 믿고 재물을 탐한다는 비방을 들었다. 돌아와 의주에 도착하였을 때에 권공(權公)이 그 재물을 다 가져다가 상께 아뢰었다. 성종이 즉시 사분을 형리(刑吏)에게 내리고, 경우를 발탁하여 종관(從官)을 삼으니, 동조(東朝 정희대비)에서도 감히 그의 목숨을 구해주기를 요구하지 못하였다. 사분은 근심하다가 죽었다.
경우는 이때부터 날로 총애를 입었다. 윤씨(尹氏 연산(燕山)의 생모)가 폐위되어 사제(私第)에 거처하니, 경우가 상소하기를,
“아들이 세자로 있는데 어머니가 여염집에 섞여 살 수는 없습니다.”
라고 하였더니, 성종이 크게 성내어 그가 후일의 은혜를 바란다고 하여 국문하기를 명하였다. 경우가 사리를 들어서 항변(抗辯)하여 조금도 굴복하거나 동요함이 없으니, 상은 위엄을 거두었다.
연산이 폐후(廢后)를 복위시킬 적에 재상들의 논의를 수합하라고 명하였다. 포악한 위세로 살육을 자행하니, 사람들은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였는데, 삼괴당(三魁堂) 신종호(申從濩)만이 항론(抗論)하기를,
“폐비는 선대에 득죄하여 선왕의 유교(遺敎)가 영갑(令甲 법령)에 드러나 있으니, 구익부인(鉤弋夫人)이나 견후(甄后)와는 같이 논할 수 없습니다.”
하고, 경전을 많이 인용하여 증명하되 논의가 매우 정당하니, 비록 연산의 포악으로도 죄를 줄 수가 없었다.
목사 정인인(鄭麟仁)이 연산 때 전한(典翰)으로 있을 적에 단오(端午)의 문첩시(門帖詩)를,
궁인이 승호(蠅虎) 잡기 한가히 일삼으니 / 宮人閑事捕蠅虎
옥 위에 한 점의 티끌인들 어찌 생길소냐 / 玉上那生一點瑕
라고 지었더니, 연산이 성내어 말하기를,
“인인은 내가 참소를 믿는다고 풍자한 것인가?”
하였다. 이에 허백(虛白) 홍귀달(洪貴達)이 아뢰기를,
“남의 신하된 자가 경계하는 말을 올리는 것은 옛날부터 이와 같았으니, 감히 풍자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라고 하자, 연산은 거짓 놀라는 체하면서 말하기를,
“그렇다면 참으로 나를 사랑하는 자이다.”
라고 하고, 당상관에 승진시키도록 명하였다.
후일에 문신 시사(文臣試射)에서 정인인이 일등의 성적을 얻으니, 연산은 말하기를,
“문무(文武)의 재주를 겸하였다.”
하고, 특별히 제주 목사(濟州牧使)를 제수하였다. 얼마 안 되어 발이 희고 이마가 흰 말을 요구하여 얻지 못하였더니, 드디어 명을 거역한다 하고 베어 죽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신하를 예우하여 일찍이 무죄한 자를 경솔히 죽이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연산의 광포함으로도 함부로 주륙(誅戮)을 행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참으로 제왕가(帝王家)의 법이라고 할 만하다.
성이 유씨(柳氏)인 관리가 있었다. 그가 종남산(終南山) 아래에 집에 샀는데, 홀연 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하루는 일찍 일어나니 벽에 종이 조각이 걸려 있었다. 가져다 보니 다음과 같은 시가 있었다.
밤이 다하도록 천리길을 가니 / 終夜行千里
아득히 옛 땅은 비었네 / 蒼茫古地空
슬피 부르짖어도 일월은 없고 / 悲呼無日月
머리를 돌리니 피는 붉게 흘렀네 / 回首血流紅
그때부터 소란을 부림이 더욱 심하고, 자주 벽에 쓰기를,
“집 주인이 나가지 않으면 장차 큰 화가 있을 것이다.”
고 하였으므로 어쩔 수 없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이사하였다. 그러자 귀신이 드디어 크게 날뛰어서 그 집에 들어와 사는 자는 번번히 죽곤 하여 드디어 폐가(廢家)가 되었다.
그런데 유씨는 이사한 뒤로 왕실과 잇달아 혼인하여 금관자ㆍ옥관자가 집에 가득하여 부귀의 성대함이 근고에 아직 그만한 집안이 없었으니, 아마 복록이 후한 집에는 귀신 또한 보호해 돕기 때문인가. 이는 필시 까닭이 있으리라. 유씨는 바로 광해의 폐비의 아버지 자신(自新)이었다.
황효건(黃孝健)이란 사람은 나의 벗 이사언(李思彦)의 사촌 매부인데, 소시적에 글을 잘 지었다.
하루는 그가 간 곳을 알 수가 없어서 집안 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았으나 찾지 못하였다. 뜰에 고송(古松)이 있었는데 높이가 수십 척이었다. 해가 비추니 소나무 그림자가 땅에 깔렸는데 사람의 그림자가 있는 것 같았다. 쳐다보니 가지 위에 묶여 있었다. 집안 사람들이 매우 놀라 사다리를 놓고 끌어내리니, 좌우를 보며 말없이 붓을 찾아서 쓰기를,
하루살이 같은 신세가 하늘 □에 손이 되었으니 / 蜉蝣身世客天□
가시나무 숲속이 나의 고향이라네 / 荊棘叢中是我鄕
밝은 달빛 산에 가득하고 사람은 적적한데 / 明月滿山人寂寂
머리 돌리니 흐르는 눈물 견딜 수 없어라 / 不堪回首淚淋浪
라고 하였다. 두어 달 뒤에 다시 없어져 3일 동안을 찾지 못하였다. 그때 그의 아버지가 남읍(南邑)의 수령으로 있었는데, 빈집이 성 남쪽에 있었다. 시험삼아 가서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한 책방(冊房)이 매우 견고하게 잠가져 있는데, 창틈으로 연기가 나오고 있었다. 괴이하게 여겨 문종이를 뚫고 엿보니, 그 속에 앉아서 조그만 등불 심지를 가지고 서적을 태우고 있었다. 매우 놀라서 문을 여니 누워서 말을 하지 못하더니, 하룻밤을 지나 죽었다고 한다.
사언이 소시적에 그 일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나에게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사언의 이름은 이급(李伋)이다.
선조 때에 권공 덕여(權公德輿)가 중국에 사신으로 갈 때 사문 이승양(李承楊)이 서장관이 되었다. 늙어서 위풍이 없었으므로 역관들이 그를 업신여기고 금지 물품을 많이 사서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마중 나온 의주 사람들이 수송을 곤란히 여겨 많이 서장관의 실수라고 드러내놓고 말하여 그로 하여금 듣게 하였다. 이승양은 성내어 압록강 가에 닿았을 때에 일행의 물건을 모두 가져다가 불을 지르려고 하였다. 권공(權公)이 말하기를,
“이미 싣고 왔으니 너무 심하게 하지 마시오.”
라고 하였으나, 이승양이 듣지 않으니, 사람들은 다 그의 처사가 지나치다고 하였다. 그때 이오리(李梧里 이원익(李元翼)의 호)가 질정관(質正官)으로 동행하였으므로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지금은 서장관이 서적을 칭탁하고 스스로 상인 노릇을 하여 비록 비방하는 물의는 듣지만, 어찌 감히 이와 같은 처사야 하겠는가. 이는 이른바 허물을 보면 어짊을 안다는 것이다.
세조 때에 정승 김국광(金國光)은 장흥동(長興洞)에 집을 지었는데, 집이 크고 사치스럽다는 탄핵을 받고 다시는 정부(政府)에 들어가지 못하였다. 그 집이 뒤에 심일송(沈一松 심희수(沈熹壽)의 호)의 집이 되었다. 내가 여러 번 일송을 뵈었는데, 그 집의 제작을 보니 매우 낮고 좁았다. 오늘날 권세 있는 사람의 집은 그 몇 배나 되는지 알 수도 없는데 사치스럽다고 말하지 않으니, 세상이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김안로(金安老)가 정권을 잡았을 때에 한강 가에 별장을 지었는데, 당시에 그의 사치함을 대단히 말하였다. 안로의 조를 논하는 자는 반드시 이 정자를 즐겨 말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정승상(鄭丞相)은 그 곁에 정자를 지으니 제작의 사치함과 정원의 아름다움이 김안로의 정자보다 백배나 더하였는데도, 사람들은 나무라지 않으니, 아마 하류에는 모든 나쁜 것이 다 돌아가기 때문인가. 아니면 사치하고 검소한 것이 세도(世道)의 더럽고 융성함에 따르는 것이어서 사람이 어길 수 없기 때문인가. 반드시 분변하는 자가 있으리라. 정씨는 즉 유길(惟吉)이다.
이암(頣庵) 송인(宋寅)은 중종 때의 부마(駙馬)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예서(隸書)를 잘 써서 사류의 인정을 받았다.
일찍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하자 남들이 이상히 여겨 물으니, 송인은 말하기를,
“이 일은 매우 괴이하다. 매양 밤이 깊어서 인적이 고요하면 행랑채 사이에서 무슨 물건이 지나가는 것 같았다. 집안 사람들이 몰래 엿보니 큰 뱀이 있어서 머리는 노루 머리 같고 길이는 두 길이 넘었는데, 사람 소리를 들으면 문득 달아나서 남쪽 계단에 이르러 사라지곤 하였다. 거기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돈 구멍만한 작은 구멍이 있는데, 미끄럽고 평이하여 길을 이루고 있었다. 파보니 깊이가 끝이 없어서 끝까지 파볼 수 없었다. 드디어 큰 돌을 쌓아놓았는데 두어 밤 뒤에는 그 괴물이 다시 나왔다. 날이 밝은 뒤에 그 구멍을 보면 전과 같고 큰 돌들은 다 전에 있던 자리에 돌아가 있어서 파낸 일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일이 매우 헤아릴 수 없으므로 드디어 집을 팔았다.”
하였다 한다. 판서 서성(徐渻)이 직접 이암에게서 듣고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기재(企齋) 신광한(申光漢)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늙은 여자종의 손에서 길러졌다. 나이 18세가 되어서도 여전히 글을 알지 못하였다. 이웃 아이와 냇물에서 장난하다가 이웃 아이가 공(公)을 발로 차서 물 속에 엎어지게 하였다. 공이 성내어 꾸짓기를,
“너는 종인데, 어찌 감히 공자(公子)를 업신여기느냐?”
라고 하니,
“그대처럼 글을 모르는 자도 공자란 말인가? 아마 무장공자(無膓公子 게[蟹]의 별명)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공은 크게 부끄럽게 여겨 마음을 고쳐 먹고 글을 읽었는데, 문장이 물 솟아나듯 하였다. 다음해에 만리구(萬里鷗)라는 부(賦)를 지어 예위(禮圍)에서 장원하고, 얼마 안 가서 대과(大科)에 급제하였으며, 문형(文衡 대제학(大提學)의 별칭)을 맡은 것이 20년이나 되었다.
기재는 비록 문장에는 능했으나 실무(實務)의 재주는 없었다. 일찍이 형조 판서로 있을 때에 소송(訴訟)이 가득 차 있었으나 판결을 내리지 못하여 죄수가 옥에 가득하니 옥이 좁아서 수용할 수가 없었다. 공이 옥사(獄舍)를 더 짓기를 청하니, 중종이 이르기를,
“판서를 바꾸는 것만 못하다. 어찌 옥사를 증축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허자(許磁)로 대신시켰는데 허자가 당장에 다 처리하여 버리니, 옥이 드디어 비게 되었다고 한다.
충주(忠州) 사람 김개(金漑)는 부유하기로 온 나라 안에 이름이 드날렸다. 자주 음관(蔭官)에 추천되니, 중종이 비답하기를,
“김개가 비록 부자이기는 하나 어찌 자주자주 첫머리에 의망(擬望)되는가?”
하였다. 전관(銓官)이 매우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이름을 올리지 못하였다. 오랜 뒤에 김개에게 특별히 별좌(別坐)를 제수하였으니, 중종의 누르고 치켜 올림이 이와 같았다.
지금은 재물이 없는 자는 비록 재주가 자기(子奇)같은 사람이라도 벼슬할 수 없다. 그러나 상하가 태연하여 그것이 잘못임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러움을 이길 수 있겠는가.
진 장원 우(陣壯元宇)는 상상(上庠 상사(上舍)와 같음)에 있으면서 시정(時政)의 득실을 말하여 안로(安老)의 뜻을 거스렸더니, 국정(國政)을 비방한다고 하여 사형으로 논죄하였다. 이공 제윤(李公悌胤)은 바로 진우와 동년(同年) 벗이었다. 진우가 사형에 처해지게 되자, 태학에서 말하기를,
“오늘 진 장원이 죽는다. 우리 동년 중에 누가 나와 함께 가서 그를 전별하겠는가?”
하였으나, 다 호응하지 않았다. 이제윤은 홀로 한 병의 술을 갖고 가서 저자에서 진우를 대접하고 통곡하고 작별하였다. 유서애(柳西厓)가 그를 위하여 전(傳)을 지어서 아름답게 여겼다.
정언 채무일(蔡無逸)은 소시적에 기절(氣節)로 자부하였다.
안로는 즉 그의 고모부였다. 공이 여러 번 그의 과실을 말하니, 안로는 그것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공이 소과(小科)에 합격하고 경서(經書)를 공부하여 명성이 있게 되니, 안로는 그가 대과에 급제하면 자기에게 방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몰래 공의 종형인 무택(無擇)에게 가서 공을 시험해 보게 하였다. 공은 깨닫지 못하고 묻는 대로 그 자리에서 외어 막히는 데가 없었다. 안로는 매우 미워하여 대간들을 사주(使嗾)하여 그를 진우(陣宇)의 일당으로 몰아서 벼슬길을 막아버렸다. 안로가 패망한 뒤에 비로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일찍 죽어서 크게 쓰이지 못하였으니, 사람들이 다 애석하게 여겼다.
기축년의 화에 대사간 이발(李潑)이 고문으로 죽으니, 친구 중에 감히 조문하는 자가 없었다. 부윤 허상(許鏛)만이 그 상(喪)을 주관하여 처리하면서 화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 일 또한 말세에서 쉽지 않은 일이다.
부마 권규(權跬)는 양촌(陽村 권근(權近)의 호)의 아들이다. 태종(太宗)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으니, 권담(權聃)과 권총(權聰)이다. 권담은 나이 10여 세에 돈녕 직장(敦寧直長)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관아에 출사(出仕)하였는데, 지붕에 올라가 새새끼를 찾다가 도정(都正)이 갑자기 오니 미처 영접하지 못하였다. 도정이 성내어 불러다 뜰에 세워 놓고 힐책하였다. 권담이 즉시 들어가 호소하니, 태종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의 벼슬이 낮기 때문이다.”
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정관(政官)을 불러 권담을 동지(同知)에 임명하였다. 영이 내렸을 때 관야에서는 아직 사무를 마치지 못하였다 도정이 매우 놀라 나가서 영접하였다.
권총은 어릴 때에 태종이 사랑하여 항상 무릎 위에 앉혔다. 시신(侍臣) 중에 수염이 긴 사람이 있었는데, 권담과 권총이 칼을 빼서 잘라버렸다. 여러 신하들이 그들을 죄주기를 청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조정의 예는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권총의 죄는 베어 죽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르니 그를 살려주는 것이 좋은지 공들의 의견을 따르겠다.”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례하니, 숭례문(崇禮門) 밖에 유폐(幽閉)시키도록 명하였다. 한 해 남짓하여 태종은 병이 위독하다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들어가 문병하니, 태종이 이르기를,
“나의 병이 이미 심하여 의약(醫藥)으로 치료할 수 없다. 공들과 서로 보는 것이 몇 날이나 될는지.”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다 우니, 태종은 길게 한숨을 쉬며 이르기를,
“나는 손자 권총이 병중에 몹시 보고 싶으나 조정이 두려워 감히 보지 못한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니, 여러 신하들이 머리를 조아리며 석방하기를 청하였다. 태종이 한 세상을 마음대로 다룸이 대개 이와 같았다.
이양(李樑)은 인순왕비(仁順王妃)의 외숙이었다. 명종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리는 원형(元衡)을 미워하여 이양을 발탁해서 그이 권세를 나누고자 하였다. 이양이 그 세력을 믿고 전조(銓曹)에 들어가고자 하니, 이조 낭관 홍천민(洪天民)이 들어주지 않았다. 당상관 중에 이양을 돕는 자가 있어서 번번이 이르기를,
“낭관 홍천민이 홀로 관리 임명의 붓을 잡는 것이 수고롭지 않은가?”
라고 하여 은연중 이양을 전조에 끌어들여 줄 것을 권하였으나, 홍천민은 번번이 다른 사람을 추천하곤 하였다. 모든 전도의 추천을 받은 자를 상이 번번이 승진시키거나 배척하거나 하였으니, 대체로 상의 뜻은 이양에게 있었던 것이다.
판서 박호원(朴好元)이 새로 전적(典籍)에 오르고 홍천민이 박응(朴膺)을 추천하니, 상은 관서 지방이 흉년이 들어서 반드시 훌륭한 수령이 필요하다고 칭탁하고, 박응을 용강 현령(龍岡縣令)에 임명하였다. 홍천민이 또한 이양을 추천하려고 하지 않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를 중서(中書)에 들이고자 하니, 판서 박대립(朴大立)이 사인(舍人)으로서 매우 힘써 막았다. 상이 드디어 차례를 뛰어넘어 이양을 응교(應敎)에 임명하였다.
고사(故事)에는 직제학만을 승지에 의망할 수 있고 종부시(宗簿寺)의 정(正)은 종사(宗師)의 자격으로, 보덕(輔德)은 춘방(春坊)의 장(長)이란 자격으로 아울러 승지에 의망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이양을 속히 중용(重用)하고자 하여 옥당의 동벽(東壁)과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의 아장(亞長)을 모두 승지에 의망하라고 명하였다. 드디어 이양을 발탁하여 승지로 삼았다. 따라서 그것이 전례가 되어 지금까지도 따라서 시행하고 있다. 그러나 종부시정과 보덕을 승지로 의망하는 것은 드디어 폐지되었다.
이양은 이조 판서가 된 뒤에 권리를 마음대로 부리며 스스로 방자하였다. 그의 아들 정빈(廷賓)을 장원 급제로 뽑으니, 장석(張奭)의 비방이 있었다. 위협하여 정을 전랑(銓郞)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허엽(許曄)등이 허락하지 않으니, 이양은 대간을 사주하여 하루아침에 이문형(李文馨)ㆍ박대립ㆍ박소립(朴素立)ㆍ허엽ㆍ윤두수(尹斗壽) 등 8인을 내쫒고, 정빈이 드디어 전조에 들어가니, 조야(朝野)가 미워하여 흘겨보았다.
마침내 비(妃)의 아우 심의겸(沈義謙)으로 인하여 축출되어 강계에 귀양갔다가 병들어 죽었다.
홍공 담(洪公曇)이 병조 판서에 임명되니, 대사헌 조사수(趙士秀)가 대간에게 말하기를.
“홍담은 나의 마음으로 사귀는 벗입니다. 그러나 홍담의 재주는 이서(吏書)에는 우수하지만 병정(兵政)을 주관하는 데는 합당하지 않습니다. 어찌 논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계달하여 바꾸게 하였다. 그리고는 곧장 가서 홍담을 보고 말하기를,
“이 일이 그대의 뜻에 어떤가?”
하니, 홍담은 말하기를,
“내가 병조 판서에 임명된 것은 결코 감당할 수 없는 것이어서 남모르는 근심이 많았으나, 그대가 국론(國論)을 잡고 있으므로, 믿고서 근심이 없었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조사수의 사정을 둠이 없음을 탄복하고, 홍담의 자신을 아는 것을 장하게 여겼다. 조종조의 공경(公卿)들이 이와 같았으니, 어찌 잘 다스려지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성안공(成安公) 상진(尙震)은 검열(檢閱)에서 파직되어 돌아가는 길에 금천(衿川)의 언덕 위에서 말에게 먹이를 먹였다. 어떤 노인이 두 마리 소를 먹이고 있으므로 공이 물었다.
“두 마리 중에 어떤 소가 더 좋은가?”
노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세 번 물어도 끝내 대답이 없으므로, 공은 매우 괴이하게 여겼다.
공이 말에 올랐을 때에 노인이 수십 보를 뒤따라와서 비밀히 공에게 대답하기를,
“아까 묻는 것을 즉시 대답해 올리지 못한 것은 두 소가 노역(勞役)에 종사한 지가 여러 해가 되어 차마 하나를 지적하여 말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실은 작은 소가 더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말에서 내려 감사하면서 말하였다.
“노인께서는 숨은 군자(君子)이십니다. 나에게 처세법(處世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드디어 가슴에 새겨 잊지 않았다. 처음 벼슬에 나간 때부터 벼슬에서 물러날 때까지 남에게 거스른 일이 없었다고 한다. 영상 상진의 시호가 성안이다.
을사사화 때에 밀계가 내려지니, 양사(兩司)가 중학(中學)에서 회의하였다.
임구령(林九齡)은 임백령(林百齡)의 아우였는데, 윤돈인(尹敦仁)과 함께 누각 아래에 잠복하고 있었다.
장령 정희등(鄭希登), 사간 박광우(朴光祐), 정언 김난상(金鸞詳), 지평 김저(金䃴), 집의 송희규(宋希奎), 정언 유희춘(柳希春), 장령 이언침(李彦忱), 헌납 백인걸(白仁傑) 등이 크게 그 잘못을 말하고 있었다.
구령이 즉시 궁궐에 나아가 고변하니, 옥사가 드디어 일어났다. 옥사가 일어나서 구령은 위사공신(衛社功臣)으로 녹훈(錄勳)되었다. 선조가 그 녹훈을 삭제하였다.
교리 윤결(尹潔)은 능성위(綾城尉) 구사안(具思顔)과 총죽(葱竹)의 교우(交友)였다.
안명세(安名世)를 죽게 한 데는 구사안이 유력하였다. 그것을 윤결은 마음으로 원통하게 여겼다. 하루는 구사안과 함께 남산 잠두(蠶頭)에서 술을 마시다가 묻기를,
“명세는 무슨 죄로 죽었는가?”
하고, 이어 시를 짓기를,
삼월 장안에 온갖 풀 향기롭고 / 三月長安百草香
한강의 흐르는 물은 넘실대는구나 / 漢江流水正洋洋
성대의 무궁한 뜻을 알고자 하거든 / 欲知聖代無窮意
왕손의 춤추는 소매 긴 것을 보라 / 看取王孫舞柚長
라고 하였다. 사안이 대궐에 들어가 아뢰니,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매우 성내어 윤결을 기시(棄市)하라고 명하였다.
윤결이 죄수로 끌려가는데 길에서 사안을 만났다. 윤결이 부르짖기를,
“구군(具君) 이것이 정말 무슨 일인가?”
하니, 사안은 말에 채찍을 쳐서 급히 피해가려다가 말이 놀라는 바람에 떨어져 즉사하였다. 사안은 무함하면서 스스로 용한 꾀라고 하였을 것이니, 어찌 윤결보다도 먼저 죽을 것을 알았겠는가? 《시경(詩經)》에 말하기를,
“사람은 두렵지 않더라도 하늘은 두렵지 않느냐?”
라고 하였는데, 진실로 그러하구나.
판서 이시언(李時彦)은 일찍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삼화 현령(三和縣令)으로 있을 때에 생선국을 먹으면서 품관(品官)에게 한 그릇을 나누어 주었더니, 품관은 상을 찌푸리고 먹지 않았다. 그 까닭을 물었더니 난처해 하는 빛이 있었다. 굳이 물었더니 드디어 울면서 말하기를, ‘저의 아버지가 병든 지 여러 해 만에 살빛이 바뀌어 사람 같지 않았습니다. 항상 바닷물에 목욕하기를 원하였으나 자녀들이 안된다고 하였더니, 울면서 간청하기를, 만약 바다에 목욕을 한다면 나의 병은 반드시 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할 수 없이 바다로 이끌고 가니, 아버지는 옷을 벗으면서 기뻐하는 빛이 있었습니다. 물에 들어가 헤엄치더니 조금 뒤에 물고기로 변하여 어릿어릿 하다가 마침내 유유히 가버렸으므로 자녀들은 통곡하여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감히 물고기를 먹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사문 홍순각(洪純慤) 또한 나에게 말하기를,
“일찍이 진주 교수(晋州敎授)로 있을 때에, 진주성에서도 이와 같은 이변(異變)이 있었다.”
한다. 이것은 무슨 이치일까. 사물에 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은 혹 알고 있으리라.
남이(南怡)라는 이는 의산위(宜山尉) 남휘(南輝)의 아들로 태종의 외손이었다. 근력이 남보다 뛰어났다. 세조 때에 공이 있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병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예종(睿宗)은 그를 매우 꺼렸다. 어떤 사람이 그가 공주(公主)와 증(烝)하였다고 고하여 하옥시키고, 이어 모반으로 다스려 죽였다. 바야흐로 남이가 국문을 받게 될 때에 강순(康純)이 영상으로 참여하였다. 남이가 강순이 역모에 가담하였다고 말하니, 강순은 말하기를,
“신은 본래 편호(編戶)로서 성상을 만나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사온데, 또 무엇을 얻고자 하여 남이의 음모에 가담하였겠습니까?”
라고 하니, 예종은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남이가 다시 말하기를,
“전하께서 그의 간사한 말을 믿고 사면하신다면 어떻게 죄인을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하자, 예종은 국문하라고 명하였다. 강순은 나이가 이미 80으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자복하여 남이와 같이 참형을 받게 되었다. 그는 부르짖기를,
“남이야! 네가 나에게 무슨 원한이 있어서 나를 무함하느냐?”
하니, 남이가
“원통한 것은 나도 너와 같다. 네가 영상으로 나의 원통함을 알고도 한 마디 원해 주는 말이 없으니, 너도 원통하게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하매, 강순은 묵묵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고변한 자와 추관(推官)은 다 녹훈되어 자손들이 그 이익을 누리고 있다. 그러나 남이가 죽임을 받은 일은 지금까지도 그 진위(眞僞)를 분변할 수 없다.
익평공(翼平公) 권남(權㩜)에게 딸이 있어서 사위를 고르는데 남이가 구혼(求婚)하였다. 익평이 점장이에게 점을 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반드시 죄를 입고 죽을 것이니 좋지 않습니다.”
라고 하였다. 익평은 자기 딸의 수명(壽命)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말하기를,
“이 분은 수명이 지극히 짧고 또 아들도 없을 것입니다. 마땅히 그 복은 함께 누릴 것이고, 그 화(禍)는 보지 않을 것이니, 사위를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
라고 하자, 익평은 그 말대로 하였다. 남이는 나이 17세에 무과(武科)에 장원하여 지극히 임금의 총애를 입었으며, 28세에 병조 판서로 죽임을 당하였다. 그 딸은 이미 죽은 지 몇 해나 되었다.
서울 안에 홍계관리(洪繼寬里)가 있으니, 즉 국초(國初)의 맹인(盲人) 점장이 홍계관이 살던 마을이다. 계관이 점 잘 치는 것으로 이름이 났으므로 그대로 마을의 이름을 삼은 것이라고 한다.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은 호서(湖西) 사람으로 젊을 때에 뜻은 컸으나 때를 만나지 못하였다. 향해(鄕解 향시 鄕試)에 합격하여 서울에 들어왔다가 계관의 명성을 듣고 찾아갔다. 계관이 그의 운명을 꽤 오랫 동안 점치더니, 꿇어앉아 공경히 말하기를,
“공은 남의 신하로서 더할 수 없이 귀하게 될 운명입니다.”
하고, 이어 말하기를,
“어느 해 어느 때에 공께서는 반드시 형조 판서가 될 것입니다. 그때 저의 아들이 반드시 죄를 받고 옥에 갇혀 마땅히 죽게 될 것입니다. 부디 공께서는 나를 생각하여 살려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어 그의 아들을 불러서 말하기를,
“네기 어느 때에 옥에 갇혀 심문을 받게 되거든 아무개의 아들이라고 말만 하여라.”
고 하였다. 공은 깜짝 놀라 감히 승낙하지 못하였다.
그 뒤 10년이 못되어서 공은 세조를 추대한 공으로 차례를 뛰어넘어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
하루는 큰 옥사를 국문하는데, 한 죄수가 부르짖기를,
“죄수는 맹인 점장이 홍계관의 아들입니다.”
라고 하였다. 공은 드디어 깨닫고 놓아주었다고 한다.
김안로(金安老)는 정권을 마음대로 행하니 온 조정이 근심하였다. 참판 윤안인(尹安仁)은 곧 문정왕비(文定王妃)의 종부(從父)로, 비밀히 안로를 제거할 것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밀히 왕비에게 아뢰기를,
“안로가 왕비께 불리한 일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라고 하니, 왕비가 매우 두려워하여 상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우니,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대답하기를,
“오래도록 좌우에서 모시다가 지금 폐위당할 것이므로 슬퍼합니다.”
하였다. 상이 매우 놀라서 그 까닭을 물으니, 안로의 음모를 아뢰었다.
상이 매우 성내어 즉시 안로를 베어 죽이고자 하였으나 그의 권세가 중한 것을 두려워하여 밀지(密旨)를 안인에게 주어서 일을 도모하게 하였다.
안인이 새벽에 대사헌 양연(梁淵)의 집에 가니, 빈객이 좌석에 가득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고 물러나왔다. 아침에 또 가고 저녁에 또 가니, 양연이 비로소 의아하게 생각하고 빈객들이 흩어지기를 기다려서 침실(寢室)로 인도해 들였다. 안인이 밀지를 보이니, 양연이 즉시 동료들을 거느리고 논핵하였다. 상이 선전관에게 명하여 군사를 풀어서 그의 집을 포위하고 체포하여 배소(配所)로 압송(押送)하게 하였다. 갈원(葛院)에 이르렀을 때에 사사(賜死)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안로를 총애하여 그의 집에 사소한 예식(禮式)만 있어도 반드시 선온(宣醞)하였는데, 이날은 안로의 아들 김지(金禔)를 장가보내려고 하여 빈객이 집에 가득하였다. 날이 저물었는데도 내온(內醞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술)이 내려오지 않으매, 안로가 마음으로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갑자기 금부도사가 닥치니, 빈객들은 창황히 담을 넘어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안로가 포박되면서 김지에게 가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오늘을 당하여 남이 누가 우리와 혼인하겠느냐?”
라고 하였다.
안로가 젊었을 때에 중국의 점장이에게 운명을 점치게 하니, 점장이가 써서 주기를,
“더할 수 없는 부귀를 누리겠으나 갈(葛)에서 죽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 뜻을 알 수 없었는데, 갈원에 이르러 마침내 징험하게 되었다.
명(名)이란 것은 실(實)의 손[賓]이다. 그런데 사람들의 마음은 거의 다 손을 귀하게 여기고 실을 천하게 여긴다. 이제 사람이 한 개의 옛 그릇을 얻으면 반드시 굳이 어느 시대의 물건이라고 이름을 붙인 뒤에야 남들이 다 그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리하여 비록 기와처럼 천한 물건이라도 아름다운 구슬과 동등하게 여긴다. 이제 모래와 돌도 다 혼돈(混沌)의 태초(太初)에 형체가 이루어진 것인데 그것은 귀하게 여기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사람이 그림을 취하는 것은 그것이 실물과 유사하기 때문이다. 이제 여기에 괴이하게 생긴 소나무와 이상한 대나무나, 기이한 꽃, 오묘한 풀로 세상에 드문 것도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아서 비록 부러지거나 썩어도 애석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물건들을 잘 그린 것이 있으면 반드시 열 겹으로 싸서 지극한 보물로 여기고, 혹 훼상하는 일이 있으면 애석해하기를 큰 구슬에 비할 정도가 아니다. 어찌 그 진짜를 사랑하기를 도리어 유사한 것보다도 못하는가. 천하의 일에 이와 비슷한 것이 매우 많으니, 나는 그것을 말하고자 하지 않는다.
《동파지림(東坡志林)》에 이르기를,
“지금 세상에는 진옥(眞玉)이 지극히 적어 비록 황금일지라도 등급이 진옥에 가까울 수는 없다. 오직 모래로 갈아서 만든 것이라야 세상에서 진옥이라고 한다. 그러나 오히려 아직 진옥일 수는 없다. 다만 옥돌의 정순(精純)한 것만이 진옥이며, 모름지기 정주(定州)의 자석(磁石)의 가시가 상처를 낼 수 없는 것이라야 바로 진옥이라고 한다.”
하였다. 후대의 노옥공(老玉工)에게 물어도 그것이 정말 그런지를 알지 못하니, 옥을 알 수 없음이 이와 같다. 지금 정옥(頂玉)한 자는 무려 천으로 셀 만큼 많은데, 모두들 말하기를,
“나의 옥은 따뜻하고 윤택하니 바로 진옥이다.”
라고 한다. 아, 그것이 진정 좋은 옥일까. 아니면 진정 옥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당(唐) 나라 누사덕(婁師德)의 아우 후덕(厚德)이 말하기를,
“남이 자기 얼굴에 침을 뱉으면 닦을 뿐이다.”
고 하니, 사덕이 근심스러운 빛을 지으면서 말하였다.
“이것이 나를 근심스럽게 하는 것이다. 남이 너의 얼굴에 침을 뱉는 것은 너에게 성낸 것이다. 그런데 네가 그것을 닦으면 그 사람의 뜻을 거스려서 그 성냄을 더하게 할 것이다. 닦지 않고 저절로 마르게 하면서 받아야 한다.”
그의 말을 보니 여름에 들에서 일하는 것보다도 더 힘들어 보이는 것이 진만년(陳萬年)이 아첨을 가르치는 것보다도 심하다. 군자의 처세하는 길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일까. 남이 얼굴에 침을 뱉으면 반드시 닦는 것이 사람의 상정(常情)이다. 그런데 침을 뱉어도 저절로 마르게 한다는 것이 과연 도리이겠는가. 이와 같이 하기를 말지 않는다면 반드시 아첨하여 남의 치질(痔疾)을 핥아주고 남의 종기를 빨아주는 데 이르고야 말것이다. 이는 사덕이 무씨(武氏)의 조정에서 부귀를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적인걸(狄仁傑)이 무후(武后)의 주조(周朝)에 힘써 벼슬하여 심기(心機)를 다한 것은 부귀를 위한 계책에 불과한데도 군자들이 그를 버리지 않는 것은 중종(中宗)을 태자(太子)로 복위시키기를 청한 일과 장간지(張柬之)를 천거한 한 가지 일 때문이다.
중종의 복위는 두 장(張)씨의 자신을 도모하는 계책에 근본한 것으로서 길욱(吉頊)의 한 마디 말에서 결정된 것이고, 처음부터 인걸의 간언(諫言)에 기인한 것은 아니다. 또 이때에 장간지의 나이는 이미 80이었다. 인걸이 어찌 무후의 죽음이 반드시 간지의 앞에 있어서 취일지공(取日之功)을 기필할 수 있음을 미리 알았겠는가. 아, 이것이 노씨(盧氏)가 벼슬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다.
일찍이 《조남명집(曹南冥集)》을 보니, 문인(門人) 진극경(陳克敬)의 기(記)가 있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허봉(許篈)이 서장관으로 중국에 가니, 중국 사람이 말하기를, ‘소미성(少微星)이 광채가 없으니 동방에 마땅히 은자(隱者)의 죽음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허봉이 돌아오니, 선생이 이미 죽었다.”
라고 하였다. 말의 근거 없음이 끝내 이에 이르렀는가. 남명의 죽음은 임신년(1571, 선조 5)에 있었다. 허공(許公)은 이해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그가 북경에 간 것은 갑술년으로서 남명의 죽은 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이다. 극경이라는 자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지만, 이처럼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어 책을 간행하기까지 하였으니, 이 사람은 필시 감히 이상한 이야기 만드는 것을 기탄없이 하는 자일 것이다. 우리 나라처럼 작은 나라의 일절(一節)의 선비로서도 성상(星象)을 움직일 수 있다면 하늘은 고단하겠다.
박원종(朴元宗)ㆍ성희안(成希顔)ㆍ유순정(柳順汀) 등이 정난(靖難) 뒤에 서로 이어 정사를 보좌하니, 세상에서는 3대신(大臣)이라고 일컫는다.
중종은 그들을 상례(常例)와 달리 예우하였다. 그들이 조정에서 물러갈 적에는 일어났다가 문을 나간 뒤에야 자리에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나 3대신은 그 일을 알지 못하였다. 희안이 늙고 병들어서 하루는 궁중에서 물러나오는데, 의젓하게 걸어서 매우 태연스러운 모습으로 중문(中門)에 이르니, 문검(門檢)이 말하기를,
“상공(相公)께서는 상이 서 계신 것을 알지 못하십니까? 어찌 그리도 걷는 것이 더디십니까?”
라고 하였다. 희안은 얼굴에 땀을 가득히 흘리면서 말하기를,
“늙은 사람이 죽을 바를 알지 못하겠소.”
라고 하였다.
옛날 곽씨(藿氏)의 화(禍)는 참승(驂乘)에서 싹텄던 것이다. 남의 신하로서 임금이 두려워할 만큼 권위(權威)를 가지고도 처음부터 끝까지 몸을 보전한 자는 아직까지 없었다. 그런데 이 3대신은 다 천명대로 살다가 죽었으니, 우리 중종은 지극한 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연산(燕山)이 들에서 사냥하는데, 그때 중종은 진산대군(晋山大君)으로서 호종(扈從)하였다. 사냥이 끝나자 연산은 준마(駿馬)를 타고 중종에게 말하기를,
“나는 흥인문(興仁門)으로 들어가고 너는 숭례문(崇禮門)으로 들어가는데, 뒤에 온 자는 마땅히 군법에 따라 처리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중종이 매우 두려워하니, 영산군(寧山君)이 비밀히 중종에게 아뢰기를,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나의 말이 승마(乘馬)보다 매우 날랩니다. 그러나 내가 아니면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고, 즉시 미복(微服) 차림으로 말고삐를 잡고 좇으니 그 달리는 것이 나는 듯하였다. 궐문(闕門)에 이르고 난 조금 뒤에 연산이 뒤따라 도착하였으므로 중종은 마침내 화를 면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영산군과 말은 다 중종을 위해서 때를 맞추어 나왔다’고 하였다. 영산군은 바로 중종의 서형(庶兄)이다. 세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이옹(李顒)의 옥사에 연루되어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해를 입었다.
판윤 기대항(奇大恒)이 부제학으로 있을 적에 청양군(靑陽君)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이양(李墚)을 탄핵하자고 비밀히 약속하였다. 그때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는 나이 25세로 정자(正字)로서 입직하여 차자(箚子) 쓰는 일을 담당하였다. 산해가 매우 두려워하여 손이 떨려서 글자를 쓰지 못하니, 대항이 웃으며 말하기를,
“정자는 나이가 어려서 겁을 내는군.”
하였다.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은 교리로 있었는데, 즉 이양의 일당인 맹영(孟英)의 아들이었다. 드디어 말하기를,
“이것은 공론이니 내가 사사로움으로 피할 수 없다.”
하고, 붓을 휘둘러 쓰면서 조금도 난처해 하는 빛이 없었다. 이양은 이미 귀양갔고, 맹영은 다만 벼슬에서 추방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다 경명이 차자를 쓴 효과라고 한다. 그러나 여론이 다 그를 나쁘게 평가하여 제봉 또한 20년 동안 폐고(廢錮)되었다.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항상 그의 재능을 소중히 여기더니 그가 중국 사신을 영접하게 되었을 때에 불러서 종사관(從事官)을 삼으매, 드디어 다시 서용(敍用)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현관(顯官)의 길에는 통하지 못하였다. 이양의 아들 정빈(廷賓)이 과거에 급제하니, 이양의 집에 출입하는 자들이 다 바삐 뛰어다녔다. 그때 떠도는 말에, 제봉이 정빈을 위하여 신발을 벗겨주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래서 맑은 논의가 그것을 병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임진년의 난에 제봉은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의 자격으로 의병을 일으켜 적과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그의 아들 종후(從厚)와 함께 전사하게 되자, 조정에서 그의 충성을 표창하여 차례를 뛰어넘어 이조 판서를 추증(追贈)하고 그 자손을 녹용(綠用)하니, 이에 사론(士論)이 일제히 그의 옛 허물을 들추어 내지 않았다. 그의 문도(門徒)들이 서원(書院)을 세우고 사액(賜額)을 청하기까지 하니, 이의를 제기하는 자들은 매우 불쾌하게 여겼다.
아계 이산해는 4세에 능히 글을 읽고, 5~6세에 능히 시를 짓고 병풍과 족자(簇子)에 글씨를 쓰니, 이름이 서울 안에 떨쳤다. 2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처음으로 벼슬길에 올라 청환(淸宦)과 현직(顯職)을 역임하였는데, 매우 청렴하고 근신하여 당시의 명성을 얻었다. 재상 자리에 오른 뒤에는 벼슬을 잃을까 근심하는 마음이 생겼다. 공량(公諒)이라는 자가 있었으니 김빈(金嬪)의 아우이다. 김빈은 임금의 총애를 받음이 후궁 중에 으뜸이었다. 산해는 공량을 종처럼 섬겨 자기의 지위를 굳혔다. 어두운 밤에 찾아다니며 애걸하되 종기를 빨고 치질을 핥는 일도 사양하지 않았으므로 도리어 청의(淸議)에 죄를 얻었다.
임진왜란에 이산해는 영상으로 서쪽으로 거둥할 계책을 건의하였는데, 대가(大駕)가 이미 서쪽으로 파천한 다음 공론(公論)에 따라 그를 평해(平海)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임금의 총애는 줄어들지 않았다. 을미년에 정승 정탁(鄭琢)이 그를 석방하여 돌아오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이는 임금의 뜻을 영합(迎合)한 것이리라. 이산해는 다시 조정에 들어오기를 바랐는데, 그 때 유서애(柳西厓)가 국정을 맡고 있으면서 그것을 저지하니, 이산해가 원망하는 마음이 골수에 사무쳤다. 그의 무리와 함께 제거하기를 꾀하여 무술년에 드디어 서애를 축출하고 자신이 그 대신 정승이 되었다. 조정을 어지럽히니, 상이 깨닫고 문밖으로 내치라고 명하여 10년 동안 부르지 않았다.
《동파평사(東坡評史)》에 말하기를,
“《사기(史記)》에 사마양저(司馬穰苴)는 경공(景公) 때 사람이라고 하였다. 그의 사적이 매우 위대한데, 《좌씨전(左氏傳)》에는 실려있지 않으므로 나는 일찍이 의아하게 여겼다.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사마양저는 장수가 아니라 정치를 한 사람이다. 민왕(閔王)이 그를 죽였으니, 경공 때와는 거리가 멀다. 태사공(太史公)이 《전국책》의 글을 취하여 《사기》를 지었으니, 마땅히 《전국책》으로 진실을 삼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동파의 전문(傳聞)은 진실로 작은 나라 사람의 좁은 견문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극(李克)이 오기(吳起)를 위 문후(魏文侯)에게 추천하면서 말하기를,
“용병(用兵)하는 것은 비록 사마양저라도 이보다 못할 것이오.”
라고 하였다. 전화(田和)가 제후가 된 것은 문후의 청에 인한 것이고, 민왕은 곧 전화의 4대손이니, 문후의 때와는 거리가 거의 백년이 되는데, 이극이 어떻게 후세에 양저가 있을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하였겠는가,
나의 의견으로는, 장가(莊賈)를 벤 양저는 바로 경공 때 사람이다. 그리고 민왕 때에도 정치를 한 양저가 있었던 것이다. 당시에 두 사람의 성명이 동일하였을 뿐이다. 옛사람의 일을 논평하는 사람은 취사(取捨)할 수 있을 것이다.
서달성(徐達城 달성은 거정(居正)의 봉호)의 《필원잡기(筆苑雜記)》에 차례로 중국 사신의 우열를 열거하였다. 그런데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詢)이 어질다고 아울러 칭찬하고, 말하기를,
“조행(操行)은 예겸이 사마순만 못하며, 장영(張寧)의 언행(言行)은 자못 억지로 꾸며서 하는 데가 있었다.”
라고 하였다.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는 장영은 지극히 칭찬하고, 애박(艾璞)은 여지없이 배척하였다. 심지어는, ‘겉으로 선행(善行)을 꾸미고 신물(贐物)을 물리치곤 하여 좋은 명예를 얻으려고 하였으며, 머물지 않고 급히 돌아가는 것을 성종이 친히 만류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다 통분하게 여겼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우리 나라 사람들이 교만 불손한 자를 수죄(數罪)할 때에는 반드시 ‘애박’이라고 한다.’라고까지 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紀)》와 《오학제편(吾學諸篇)》을 보니, 예겸은 한때의 중한 명망을 지니고 있었으며 벼슬이 종백(宗伯)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다 그가 정승이 되지 못한 것을 불만스럽게 여겼다. 그리고 사마순은 보잘 것 없는 존재로서 명성이 없었으며, 장영은 직간(直諫)으로 천순(天順) 연간에 이름이 나서 당시 사람들이 위정공(魏鄭公 위징 魏徵)에게 비유하였으나, 마침내 바른말로 용납되지 않았으니, 어찌 조행이 사마순에게 미치지 못하고 언행을 억지로 꾸미는 일이 있었겠는가. 애박도 명신으로서 강어(强禦)를 두려워하지 않다가 마침내 환관(宦官)의 곤욕을 받아 죽었다.
그러니 《필원잡기》나 《용재총화》에서 칭찬한 자는 다 침체된 채 아무런 명성도 없는 자들이다. 사람을 아는 일이 쉽지 않음이 오래되었다. 사신이 우리 나라에 머무는 기간은 가고 오는 것까지 수십 일에 불과하여 그 얻어 듣고 보는 것 또한 언어(言語)나 문자(文字)에 지나지 않는데, 그의 평생을 단정하려고 하였으니, 이 또한 잘못됨이 이미 많다고 하겠다.
명나라 태조(太祖)가 천하를 평정하고 나서 진이(陳理)와 명승(明昇)을 우리 나라에 보내어, ‘백성으로 삼지도 말고 군병(軍兵)으로 삼지도 말라.’ 하므로, 우리나라는 황제의 분부를 감히 어기지 못하였다.
진이에게는 아들이 없고 다만 외손(外孫)만이 있을 뿐이다. 명승의 후손이 소를 올려 과거에 응시하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명광계(明光啓)가 문과에 급제하여 이름이 드러났다. 명씨(明氏)는 지금까지도 가계가 뚜렷하여 끊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진실로 태조의 훌륭한 덕(德)이다.
그런데 《황면통기》에는, ‘진이와 명승 등이 바닷길을 경유하여 고려를 향해 표표(飄飄)히 바다로 들어갔다.’고 기재하고 있다. 니는 의심되는 말로 즉 바다에 둥둥 떠서 갔다는 뜻일 것이다. 중국 사람은 반드시 두 사람이 우리 나라에서 잘 살다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글을 다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으니 탄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달성령(達城令) 김지(金禔)가 채응규(蔡應圭)를 유유(柳游)라고 하여 그 아우 유연(柳淵)을 죽이니, 하늘이 지극히 원통함을 살피시어 다행히 밝게 죄를 씻게 되었으며, 김지는 자기 죄를 승복하였다.
오성(鰲城 이항복의 봉호) 이항복(李恒福)이 그를 위하여 《유연전(柳淵傳)》을 지어서 세상에 돌아다닌다. 대체로 유연이 죽은 것은 가정(嘉靖) 갑자년이고 김지가 죽임을 당한 것은 만력(萬歷) 기묘년이다. 정미년에 이르러 《유연전》이 처음으로 찬술(撰述)되었으니, 전후(前後) 44년 동안의 일이다.
무신년에 내가 허경보(許警甫)를 방문하였더니, 김지의 아들 언관(彦寬)이라는 자가 소매에 책 두 권을 넣어 가지고 나에게 보였다. 그 하나는 바로 오성이 찬술한 《유연전》의 후서(後敍)이고, 다른 하나는 그 집에 간직하고 있는 옥사(獄辭)로, 오성이 그것을 취하여 후서를 지은 것이다.
언관이 자기 아버지의 죄악이 《유연전》에 실려 있으므로 몰래 오성에게 빌어서 그가 원통하다고 하게 한 것이다.
오성이 그의 보복을 두려워하여 다시 후서를 지었다고 한다.
김지가 죽임을 당한 지 이미 30년이 되었으나 사람들은 다 통쾌하게 여겨 여러 사람의 입에서 하나같이 말하고 있으니, 오성의 사정에 좇은 부정한 글이 김지의 죄악을 가릴 수 없었다.
그 옥사하는 것을 보니, 복계(覆啓)한 말이 자세히 기재되었는데, 대신(大臣)은 김귀영(金貴榮)ㆍ이산해(李山海)이며, 대간(臺諫)은 박홍구(朴弘耈)ㆍ조인득(趙仁得)으로 되어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복계는 기묘년 봄에 있었는데, 김공(金公)은 신사년에 정승이 되었으니 그때는 이조 판서였고, 이상(李相)은 통정대부로서 지신사(知申事 도승지 都承旨)로 있다가 무자년에 이르러서야 정승이 되었다. 박상(朴相)은 임오년에 처음으로 과거에 급제하였고, 조공(趙公)은 그해 겨울에 과거에 급제하여 계미년에 처음으로 한림(翰林)에 뽑혀 들어갔으니, 그때는 모두 선비였다. 어떻게 복계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으며, 김귀영이나 이산해 또한 어찌 대신의 반열에 있을 수 있는가?”
라고 하였더니, 언관은 얼굴빛이 변하여 도망가 버렸다. 그 뒤에 그 옥사를 본 자가 있는데 다 개정하였더라고 한다. 이는 언관이 임진년의 병화(兵禍) 뒤에 국가의 문서가 다 타 버린 틈을 타서 감히 근거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어 남을 속인 것이리라. 그런데 네 공(公)이 옛날 재상으로 혹은 죽고 혹은 늙은 것을 보고, 그때의 벼슬이 아직 낮거나 아직 선비였음을 헤아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오성은 눈이 없는 분이 아닌데도 그에게 속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속인 바가 된 것인가. 아니면 팔린 바가 된 것인가.
《맹자》에,
라고 하였는데, 오성의 두어 줄의 후서가 어찌 언관(彦寬)으로 하여금 달성령의 죄악을 고치게 할 수 있겠는가. 들으니 사문 임무숙(任茂叔 무숙은 임숙영(任叔英)의 자)이 글을 지어 전후서(傳後叙)를 공격해 깨뜨렸다고 하는데, 공격이 이 일에도 언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임진년 난에 우리 나라는 다만 세 번 크게 승리한 일이 있을 뿐이니, 진주(晋州)의 방어와 노량(露梁)의 해전(海戰)과 행주(幸州)의 승리이다.
갑오년 강화(講和) 때에 왜인이 말하기를,
“진주성 싸움에서 죽은 장관이 3백, 군병이 3만이니, 반드시 그에 대한 보상이 있는 뒤에야 강화를 의논할 수 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공갈치는 데에서 나온 것이니 반드시 다 그렇다고 할 수는 없으나, 또한 어찌 아무런 근거없이 한 말이겠는가.
박희현(朴希賢)이 《속고사촬요(續攷事撮要》를 찬술할 적에 연안(延安)의 사소한 공은 쓰지 않는 것이 없으면서 진주의 일에 대해서는 쓰기를,
“평수길(平秀吉)이 지난해의 패전을 성내어 합심해 도모하여 그 분노를 씻고자 하였다. 그런 까닭에 모든 도(道)의 왜병이 돌아갈 때에 일제히 모여 공격해서 함락시켰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전일의 공은 진실로 우뚝히 뛰어난 것인데, 일찍이 한 글자도 언급하지 않은 것은 무슨 까닭인가. 희현은 본래 꾸짖을 만한 사람도 못되지만 계획을 주관하는 여러 재상들 또한 멍청히 개정함이 없었음은 무슨 까닭인가. 이러하고도 《촬요》라고 일컬을 수 있으며, 후세에서 일을 상고하게 할 수 있겠는가.
상락군(上洛君) 김공 시민(金公時敏)은 나의 종형이다. 젊을 때에 호방(豪放)하여 학문을 하지 않았다. 얼굴과 몸이 크고 건장하였으며 과장하고 허탄(虛誕)한 말을 잘 하여 비록 한 집안 사람이라도 능히 알아보지 못하였다. 무과에 급제하여 군기시(軍器寺)에 뽑혀 들어가니, 정승 이헌국(李憲國)이 제조로 있으면서 유독 그를 그릇으로 여겼다. 여러 번 외직(外職)에 보임되었으나 번번이 군기시에 머물러두기를 청하곤 하였다.
신묘년에 진주 통판(晋州通判)이 되었는데, 진주는 영남의 큰 고을로서 본래부터 호족(豪族)이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으로 이름이 났다. 공은 늦추거나 조임을 알맞게 하고 덕을 베풀고 위엄을 행하니, 아전은 단속되고 백성은 사모하여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넘쳤다.
임진년에 왜란이 일어났을 때 목사가 마침 죽으니, 공은 목사의 일을 대행하였다. 무기를 수리하고 성지(城池)를 수선하여 죽음을 바칠 계책을 하였다. 그때 군(郡)들은 마구 무너지고 대가(大駕)는 서쪽으로 파천하였으며, 적병이 횡행하는데도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되, 진주성만은 우뚝히 뛰어나 호남ㆍ영남의 성곽이 되었다. 조정에서 듣고 공을 발탁하여 목사로 삼았다. 공은 군사들과 고락을 같이하면서 함께 죽고 살기를 맹세하였다. 드디어 금산(金山)의 적을 깨뜨리고, 진해(鎭海)의 적장(賊將) 평소태(平少泰) 등을 사로잡아 행재(行在)에 송치하였다. 선조가 가상히 여겨 차례를 뛰어넘어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이해 겨울에 적이 군대를 모조리 이끌고 와서 포위하고는 높은 사다리를 놓거나 땅굴을 파는등, 온갖 공격의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공이 이에 대응하기를 귀신같이 하니, 적이 문득 꺾이어 퇴각하였다. 안에는 정예병도 없고 밖에는 구원병도 없었건만, 공은 오직 충의(忠義)로써 군사를 격려하니 모두 죽기를 즐겨하면서 성가퀴로 올라갔다.
14일 밤낮을 지나는 동안 적을 무수히 살상하니, 적이 크게 패전하여 달아났다. 공이 유탄에 맞아 상처가 덧나서 미처 논상(論賞)도 하기 전에 죽으니 성안 남녀들의 울음 소리가 소울음 소리 같았다. 호남ㆍ영남의 인사들이 다 서로 조상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는 어떻게 할꼬?”
하였다. 괴산(槐山)의 선영(先塋)에 장사하는데 길이 호남을 경유하게 되었다. 선비들과 백성들이 다투어 상여를 붙들고 울며 말하였다.
“우리 공(公)이여! 우리 공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죽은 지 오래였을 것이오.”
진주가 재차 포위되었을 때에는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호남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호서 절도사 황진(黃璡) 등의 군사 6만명이 수비하니, 성세(聲勢)가 전에 비하여 10배나 되어 사람들이 모두들 지킬 수 있다고 하였으나 늙은 기녀(妓女) 한 사람만이 근심하니, 천일이 불러 물었다. 대답하기를,
“전일에는 군사의 수가 비록 적었으나 장수와 군졸이 서로 사랑하였으며, 호령이 한 곳에서 나왔기 때문에 이겼습니다. 지금은 군사에 통솔함이 없을 뿐더러 장수는 군사를 알지 못하고 군사들은 장수와 익숙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제가 근심합니다.”
라고 하였다. 천일은 그것을 요망한 말이라고 하여 베어 죽였다. 며칠 뒤에 성이 함락되니 적이 전일의 패전을 분하게 여겨 드디어 그 성을 헐어 버리고 갔다.
임진란 때, 이아계(李鵝溪)가 영상으로서 서쪽으로 피난할 계획을 주창하였다. 공론(公論)이 그를 공격하니, 대가가 송도(松都)에 이르러 그를 귀양보내라고 명하였다. 판서 황신(黃愼)이 군민(軍民)을 효유(曉諭)하는 교서를 찬술하였는데, 거기에 말하기를,
라고 하였으니, 아계를 가리킨 말이다.
아계는 아첨으로 총애를 굳히고 자기 당(黨)을 심어 공사(公事)를 위배하여 그 화(禍)가 지금에 이르러 더욱 심하니, 그 죄는 진실로 용서하기 어렵다. 그러나 서쪽으로 피난하는 일을 가지고 아울러 죄안으로 삼는데 이르러서는 그가 어찌 마음으로 승복하려 하겠는가. 태평 세월이 오랫 동안 계속되어 사람들이 전쟁을 알지 못하였으므로 적의 칼날이 오기도 전에 소리만 듣고서도 쓰러져 무너지니, 텅 비고 허물어진 도성과 시정(市井)의 싸움을 가르치지 않은 자제들로 수길의 날카로운 칼날을 당해낼 수 있단 말인가. 맹자가,
“죽음을 바쳐 싸우고 떠나지 말라.”
라고 한 말은 이런 경우를 말한 것은 아니다. 정강(靖康 송흠종(宋欽宗)의 연호)의 난(亂 금(金) 나라가 변경(汴京)을 함락하던 난리)에 충사도(种師道)가 성을 버리고 나가 피하기를 청하니, 여러 사람들의 논의가 그를 늙은 겁쟁이라고 몰아세웠다. 그리하여 마침내 청성(靑城)의 굴욕(屈辱)을 당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지난 일로 거울삼을 만한 것이다. 나의 의견으로는, 아계가 서쪽으로 피난가기를 계획한 것은 종묘 사직에 공을 세움이 매우 크다. 아울러 비난하여 공격해서는 안 된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은 동지(同知) 황윤길(黃允吉) 등을 따라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비굴함이 없는 꿋꿋한 태도로 조금도 두려워하거나 겁내는 일이 없었다. 회답의 글을 받는 일이나 여러 가지 논의에 모두 힘껏 다투어 바로잡으니, 동행한 사람은 목을 움츠리고 적인(敵人)은 경탄하였다. 그 또한 목숨을 바쳐 힘쓴 군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방에 사신으로 가서 임금의 명을 욕되게 하지 않았다는 말로 일컫는 것에 이르러서는 나는 부끄러워해야 할 바가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저 전대(專對)라는 것은 어찌 요행(僥倖)이나 절목(節目)의 일을 가리킨 것이겠는가.
학봉이 돌아오니, 상이 적인의 실정을 물었다. 윤길 등은 다 적이 침입할 조짐이 있다고 말하니, 학봉은 그렇지 않다고 항변하여 여러 천 마디 말로 깊이 윤길 등을 공격하고, 스스로 적의 실정을 자세히 살폈다고 말하였다. 다음해에 적이 전 국력을 기울여 가지고 침략하여 종묘 사직을 지키지 못하고 민생(民生)이 주륙 되는 데에 이르렀으니, 병화(兵禍)의 참혹함이 옛날부터 임진년과 같은 적은 없었다. 그가 요령을 얻지 못함이 이와 같다. 이것을 전대(專對)라고 함이 옳겠는가. 만약 한 고조(漢高祖) 때를 만났다면 전사십배(前使十輩)의 죽임을 면치 못하였을 것이다.
정승 정탁(鄭琢)은 영남 사람이다. 초야에서 떨치고 일어나 과거에 급제하였다. 교서 정자(校書正字)에 임명되어 향실(香室)에 숙직하는데, 문정왕비가 왕명(王命)이라 칭탁하고, 부처에게 불공드리고자 하여 향실에서 향을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이 향은 교사(郊社)에 바치는 물건입니다.”
하고, 거절하고 듣지 않으니, 문정왕비는 매우 성내어 형리(刑吏)에게 넘기라고 명하였다. 여론이 그를 높이 평가하여 명성이 성대하였다. 현관(顯官)과 청환(淸宦)을 다 역임하고, 마침내 정승의 지위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화하고 공손하여 비록 노복(奴僕)이나, 견마(犬馬)일지라고 나쁜 말로 꾸짖은 적이 없었다. 그의 후덕함이 높은 지위에 이르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나 공손함이 지나치다는 나무람이 있었다.
서시백(徐施伯)이 말하였다.
“일찍이 보니, 이홍로(李弘老)가 명천(明川)으로 귀양갔을 때, 따라가는 하인과 관청에서 주는 식량이 다 관리와 같았으며, 장인을 불러 모아 그릇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그때 홍여순(洪汝諄)이 회령(會寧)으로 귀양갔으므로 홍로가 보러 가는데, 연로(沿路)에 각 고을의 관원들이 경계(境界)에 나와서 기다리는 것이 마치 공적인 행차를 영송(迎送)하는 것과 같았다.”
이런 일은 바로 홍로의 패려(悖戾)한 일로서 비록 군자가 말한 바는 아니지만, 또한 선대의 기상이 후덕함을 볼 수 있다.
지금은 귀양살이하는 사람은 다 두려워서 벌벌 떨며 날을 보내고 있다. 옷이 겨우 갖추어지고 먹는 것이 겨우 배부르게 되더라도 수령된 자들이 다 헐뜯고 질책하여 손발도 움직일 수 없게 한다. 비록 홍로처럼 어리석은 사람이 있을지라고 감히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렇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있는 것을 선유(先儒)들은 현망회삭(弦望晦朔)과 기수영허(氣數盈虛)의 논(論)을 두어 그 설이 무궁하다.
그런데 우리 나라 동해에는 밀물과 썰물이 없음을 중국에서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선유들 중애 이것을 논한 이는 없다.
문경현(聞慶縣) 토□(兎□) 잔산(殘山) 가에 구멍이 있는데, 밀물ㆍ썰물의 현상이 바다와 차이가 없다. 혹시 해안(海眼)인가.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사물에 널리 아는 자라야 능히 분변할 수 있을 것이다.
겨울의 얼음이 여름에 녹는 것은 천지의 떳떳한 법칙이다. 그늘진 산의 참혹하게 얼어터진 땅의 쌓인 얼음이 녹지 않는 경우는 있으나, 여름이 되어서야 비로소 얼음이 언다는 것은 아직 듣지 못하였다.
문소현(聞韶懸)의 산에 구멍이 있는데, 이름을 빙혈(氷穴)이라고 한다. 앞에는 냇물이 있다. 겨울이 되면 구멍에 얼음이 없다가 입하(立夏) 뒤에는 얼음이 얼기 시작한다. 날씨가 건조하고 뜨거우면 얼음은 더욱 성해지고 냇물 또한 얼음이 언다. 생선이나 고기를 구멍 안에 들여 놓으면 잠깐 사이에 얼어버린다. 하지 뒤가 되면 얼음은 녹고 냇물은 맑은 물이 잔잔하게 흘러 내린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여름에는 얼음이 얼지 않는다는 설도 거의 정확한 논은 아니다.문소는 의성(義城)의 딴 이름이다.
초목의 본성은 베면 다시 나는 것이지만, 오직 소나무와 잣나무는 한번 베면 다시는 싹이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계림(鷄林 경주)에 한 산이 있는데, 소나무도 잣나무도 다 베면 새싹이 나는 것이 보통 나무들과 다름이 없다. 어떤 이는 말하기를, 옛날 충신의 혼이 의탁한 것이라고 한다.
사암(思庵) 유숙(柳淑)의 벽란도시(碧瀾渡詩)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오랫 동안 강호의 언약을 저버리고 / 久負江湖約
홍진 속에서 이십 년을 살았구나 / 紅塵二十年
백구가 비웃고자 하는 듯 / 白鷗如欲笑
가끔 누대 앞으로 가까이 오네 / 故故近樓前
사암이 뒤에 적(賊) 신돈(辛旽)에게 해(害)를 입었다. 오래도록 성대한 명성 속에 살고 있는 환란이 이와 같다.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벽란도(碧瀾渡)를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번안체(翻案體)를 지었다.
홍진의 길을 모른 채 / 未識紅塵路
강호에 사십 년을 살았네 / 江湖四十年
사암은 적의 손에서 마치었는데 / 思庵終賊手
나는 백구의 앞에 있다네 / 余在白鷗前
이는 사암이 화(禍) 입은 것을 상심하여 방랑하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다행하게 여긴 것이리라. 그러나 무오년의 옥사 때에 추강은 죽은 뒤의 몸에 부관참시(剖棺斬屍)의 화가 있었으며, 주륙(誅戮)이 처자에까지 미쳐서 사암보다도 더 참혹하였다.
이것으로 천지가 비태(否泰)하면 환란이 옴은 출처(出處 출세(出世)와 은둔(隱遁))의 다름이 없음을 알겠다. 병을 피하여 곡식을 먹지 않으면서 몸을 보호하는 자는 또한 그 한때의 일일 뿐이다.
명종이 승하하자 후사가 없었다.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이 영상으로 있었고, 좌상 심통원(沈通源)은 인순왕비(仁順王妃)의 숙부였는데, 약방 제조(藥房提調)로 궁궐 안에 있었다. 이의가 있을까 두려워하여 비밀히 그 문을 잠근 뒤 계책을 정하고 선조를 맞으니, 요행으로 호위(扈衛)의 공을 세우려고 달려온 자들이 많아서 길이 막힐 지경이었다. 사문 이지강(李志剛)이 늦게 와서 부르짖기를,
“소인도 왔습니다.”
라고 하니, 주서 황대수(黃大受)가 말하기를,
“국가를 세울 때에 소인은 쓰지 않으니 우선 물러가오.”
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대부분 통쾌하게 여겼다. 그때 공로를 기록한 글을 던져 넣는 자가 있자, 준경이 말하기를,
“선왕(先王)의 치명(治命)을 따랐는데, 신하들이 무슨 공이 있단 말인가?”
하고, 그 글을 불 속에 던져버렸다.
을축년(1565, 명종 20)에 명종이 편찮았는데, 세자를 정하지 못해서 중외(中外)가 갈팡질팡하였다.
정승 민기(閔箕)가 그때 재상 자리에 있었다. 비밀히 영상 이준경에게 말하기를,
“성상의 병환이 위중하신데 공은 영상으로서 어찌 사직(社稷)에 대한 근심이 없습니까?”
하였다. 이공(李公)은 크게 깨닫고 들어가 후사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상의 말이 이미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인순왕비가 말하기를,
“순회세자(順懷世子)가 죽은 뒤에 성상께서 덕흥군(德興君)의 셋째 아들을 보고 감탄하여 이르기를, ‘진인(眞人)이 이미 나왔으니 나의 아들이 마땅히 죽어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준경이 말하기를,
“성상의 뜻이 여기에 있습니다.”
라고 하고, 드디어 장수에게 명령하여 선조를 잠저(潛邸)에서 호위하게 하였는데, 명종은 그것을 알지 못하였다.
상의 병환이 조금 나아서 경연을 열었다. 민공(閔公)이 자청하여 특진관(特進官)이 되어서 입시하였다. 이공이 상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뢰었다.
“옥후(玉候)가 편찮으시니, 온 나라 안이 두려워하면서 모두 세자가 정해지지 않은 것을 근심하므로 신이 대신으로 있으면서 종묘 사직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상은 얼굴빛이 즐겨하지 않으며 말하였다.
“나의 병이 어찌 죽기까지야 하겠는가. 그런데 대신이 미리 이 일을 꾀하였단 말이오?”
민공이 소매 속에서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정국본권(定國本卷)을 꺼내어 올리고 아뢰기를,
“대신이 나라 일을 꾀하는데 어찌 몸을 돌아보는 계책을 하겠습니까? 고금의 난망(亂亡)은 항상 후사가 정해지지 않은 데서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 이 책을 보시면 성상께서도 자연 아실 것입니다.”
하였다.
명종이 자세히 살펴보더니, 얼굴빛이 비로소 평안해져서 말하였다.
“영상이 몸을 바쳐 나라 일에 죽고자 하였으니, 사직(社稷)의 신하라고 할 수 있소.”
이어 경연에서 《대학연의》를 강의(講義)하라고 명하고, 민공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였다. 《연의(衍義)》를 진강(進講)하는 일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선조가 등극(登極)한 뒤에 민공이 첫째로 정승 자리에 올랐다.
이동고(李東皐)가 고명(顧命)을 받으려 할 적에 주서 윤탁연(尹卓然)을 주렴 앞으로 불러들여서 쓰게 하였더니, 탁연은 제삼(第三)의 삼(三) 자를 삼(參)으로 썼으며, 잠저에 나아가 맞이할 때에는 선조가 바야흐로 덕흥군의 상(喪)을 당하여 동생들과 여막(盧幕)에 함께 있었는데, 탁연은 모두 나와서 차례로 서게 한 다음 선조를 맞아 돌아오니, 사람들은 그의 임기응변에 탄복하였다.
이동고가 고명을 받고 빈청(賓廳)에 나와서 병조를 하여금 군대를 정돈하게 하고, 예조로 하여금 맞이하는 의식을 정비하게 하였다. 정승 이양원(李陽元)이 그때 도승지로 있으면서 삼사(三司)의 장관(長官)을 불러서 참여하게 하기를 청하니, 동고가 성난 기색으로 말하기를,
“내가 영상으로서 유교(遺敎)를 받들어 거행하는데 그대가 삼사를 불러서 장차 무엇을 하려고 하는가?”
하였다. 이공이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선조가 즉위한 뒤에 이공을 죄주고자 하는 이가 있었다. 동고는 막으면서 말하기를,
“이공은 다만 큰 일을 삼가고자 하였을 뿐이니, 어찌 다른 뜻이 있었겠는가?”
하니, 논의가 드디어 정지되었다. 이공은 마침내 스스로 불안하여 안동 부사(安東府使)가 되기를 청하였다. 선조가 혐의하지 않고 마침내 크게 등용하였다. 옛날 송영종(宋英宗)이 채양(蔡襄)을 죄주지 않은 것을 오히려 위대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선조는 죄를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크게 등용하고 의심하지 않았으니, 덕이 천고에 으뜸으로 제왕(帝王)의 큰 법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이공이 만약 성명(聖明)의 세상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일족(一族)이 전멸되는 주륙(誅戮)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순회세자가 죽은 뒤에 명종이 하원(河原)ㆍ하릉(河陵)ㆍ선조와 풍산(豊山) 등 여러 왕손(王孫)을 궁중에서 가르쳤다. 하루는 글씨를 써서 올리라고 명하였다. 여러 군(君)들 중에 어떤 이는 짧은 시를 쓰고, 어떤 이는 연구(聯句)를 썼는데, 선조는 나이가 가장 어렸다. 홀로 ‘충효본무이치(忠孝本無二致)’라는 여섯 글자를 써서 올리니, 명종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하루는 또 익선관(翼善冠)을 쓰게 하면서,
“너희들이 머리의 크기를 알아보려고 한다.”
하였다. 여러 군들이 차례로 써 보았다. 선조는 두 손으로 관을 받들어 도로 어전(御前)에 두면서 머리를 조아려 말하기를,
“이것이 어찌 보통 사람이 쓸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명종이 더욱 기이하게 여겨 드디어 왕위를 전수할 뜻을 정하였다고 한다.
세조가 온양 온천에 거둥하여 술을 금지하는 영을 엄중하게 내렸다. 그리고 몰래 내시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관찰사 김진지(金震知)가 인산(仁山 봉호) 홍윤성(洪允成)에게 가서 술을 마셨다. 즉시 진지를 참형에 처하여 두루 돌려 보였다. 조종조의 영을 시행하여 금지시키는 일이 이와 같았다.
이떤 한 사람이 노비ㆍ전지ㆍ집을 절에 시주하고 자손의 복을 빌었다. 그런데 자손이 빈궁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었다. 절의 중과 소송을 일으켰으나 여러 번 패소(敗訴)하였다. 성종 때에 격쟁(擊錚)하여 직접 호소하였다. 상이 친필(親筆)로 판결문을 써 주기를,
“부처에게 전지를 바친 것은 복을 구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부처가 영검이 없어서 자소이 빈천하니, 전지는 본 주인에게 돌려주고 복은 부처에게 돌려주라.”
고 하였으니, 위대하다. 임금의 말씀이여!
한 마디 말로 소송을 결말짓게 하는 것은 송사를 없게 하는 뜻을 겸한 것이다.
절도사 이기빈(李箕賓)이 강계(江界) 수령으로 있을 때, 하루밤에는 잠을 깨니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달빛은 뜰에 가득하였다. 심신(心神)이 서늘해지면서 저절로 두려운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찬바람이 일더니 한 여자가 엷은 화장을 하고 섬돌에 올라와 꿇어앉았다. 이기빈이 말하기를,
“너는 어떤 사람이냐?”
하니, 여자가 얼굴빛을 고치고 대답하기를,
“저는 이 산장(山長) 천금천(千金天)의 아내입니다. 저의 남편이 제가 죽었다고 하여 저의 전지와 집을 후처(後妻)의 아들에게 다 주었습니다. 원컨대, 수령께서는 밝혀 주십시오.”
하므로, 이기빈은,
“그렇게 하겠다.”
라고 하니, 홀연히 가버렸다.
이기빈이 새벽에 관아(官衙)를 열고 묻기를,
“금천이란 자가 있느냐?”
하니, 고을의 아전이 늙은 사람이 있다고 고하였다. 이기빈이 불러서 물으니, 대답하기를,
“그러한 일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외괴진(外恠鎭)에 또 금천이란 자가 있었다. 이기빈이 빠른 군졸(軍卒)에게 명령하여 잡아오게 하니 이튿날 도착하였다. 귀신의 말대로 물으니, 금천이 놀라 땀이 얼굴에 가득히 흐르면서 말하기를,
“저의 아내는 이명하(李明夏)가 부사로 있을 때에 옥에 갇혔다가 감옥에 불이 나서 타 죽은 지 이미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죽은 아내의 전지와 집이 마침 후처의 집 가까운 곳에 있었으며, 후처의 전지와 집 또한 죽은 아내의 자식이 사는 곳에 가까이 있었으므로 양쪽을 편리하게 하고자 하여 바꾸려고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기빈은 그 자리에서 증서를 만들어 전처의 아들에게 주고 바꾸지 못하게 하였다고 한다.
임자년 여름에 내가 시제(試題)의 일로 옥에 갇혀 있었는데, 이기빈 또한 감금되어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내가 북쪽에 귀양갔을 때 김용(金鎔)이란 사람이 온성 판관(穩城判官)으로 있었는데 강계 사람이다. 그는 그 일을 더욱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은 강직하여 과감히 바른 말을 하였다.
판서 송기수(宋麒壽)가 특진관으로 경연에 나아가니, 그의 아들 응개(應漑)도 옥당으로서 입시하고, 응형(應泂)도 주서로 같이 입시하였다. 강의를 마치고 말이 을사년의 일에 언급되니, 송공이 울면서 자기의 억울한 정상을 진술하는데, 슬픈 말이 좌우 사람들을 움직였다. 학봉 또한 정언으로서 자리에 있었는데, 나아가 말하기를,
“기수는 을사년간에 권세 있는 간신들에게 붙어서 위훈(僞勳)에 녹훈(錄勳)되기까지 하여 그 부귀를 누린 것이 20여 년이었습니다. 지금 성명께서 위에 계시고 공론이 크게 행해지는데, 슬픈 말과 괴로운 말로써 자기의 원통함을 진술하여 공론의 이름을 훔치고자 하니, 참으로 소인의 정상(情狀)입니다.”
라고 하였다. 기수는 황공하여 물러갔고, 3부자가 일시에 병을 칭탁하고 물러가니, 듣는 일들은 목을 움츠렸다. 그러나 공은 말이 태연하였다.
노소재(盧蘇齋)는 소시적에 중한 명망이 있었다.
을사년의 화에 이조 정랑으로 진도(珍島)에서 19년 동안 귀양살이할 때에 인정(人定)이 되어야 자고, 닭이 울면 일어나 관대(冠帶)를 하고 단정히 앉아서 온종일 모습이 근엄하였다. 한결같이 《소학(小學)》의 교훈으로 자신을 다스리니, 명성이 더욱 높아져 안석(安石)ㆍ동산(東山)과 같은 명망이 있었다.
선조가 즉위하여 어질고 뛰어난 인물을 거두어 부르니, 공이 도형(徒刑)중에 기용되어 7년 만에 정승이 되었는데, 공론이 한결같이 지지하였다. 그러나 재상에 임명된 뒤에 한 가지 일도 건의한 것이 없고, 밝은 시대에 세속과 함께 하는 일이 있으니, 사림이 크게 실망하였다.
소재가 이조 판서로 있을 때에 김학봉이 정언으로서 같이 경연에 입시하였다. 학봉이 나아가 아뢰기를,
“노수신(盧守愼)은 벼슬을 팔아서 돈피를 받았으니, 옳지 못한 일 중에 큰 잘못입니다.”
라고 하였다.
소재가 먼저 사죄하니, 정승 박순(朴淳)이 아뢰기를,
“수신은 청렴과 근신함으로 자신을 지키는 사람이니, 단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수신이 어머니를 섬김이 지극히 효성스러워서 어머니의 말이 있으면 감히 어기지 못합니다. 어질지 못한 아우 극신(克愼)이 있는데 그의 어머니가 매우 사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필시 극신이 한 일일 것입니다.”
고 하였다.
상은 의심이 풀리는 모습으로 이르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오. 노 판서가 어찌 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겠는가?”
라고 하였다. 학봉은 또 아뢰기를,
“수신이 어머니를 섬기는 데는 마땅히 기쁜 얼굴빛으로 해야 하지만. 어찌 나라의 벼슬을 가지고 사친(私親)을 즐겁게 할 수 있습니까?”
하였다. 소재는 절하고 사죄하였다. 그의 과감하게 말함은 이와 같았다.
선조가 초년에 정신을 가다듬어 다스리는 도리를 찾아 하루에 세 번 진접(進接)하고 또 밤에는 야대(夜對)가 있었다. 그러므로 조강(朝講)이 끝나도 강관(講官)은 감히 물러가지 못하고 그대로 전내(殿內)에 있어서 경서의 뜻을 증론(證論)하다가 주연(晝筵)에 입대(入對)하고, 주연이 끝나면 또한 이같이 하였다. 석강(夕講)을 마친 뒤에야 비로소 물러갈 수 있었다.
하루는 유신(儒臣)들을 불러다가 술잔치를 열고 각각 양껏 마시게 하였다.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이 잘 마셨는데, 내시가 촛불 아래에서, ‘잔을 다 비우지 않고는 감히 물러가지 못하오.’ 하니, 강신 또한 취하여 빈잔을 뒤집어 보이니 상은 웃었다. 응교 이길(李洁)이 몹시 취하여 굳이 사양하다가 상이 강권하니, 술잔을 자리에 엎어버렸다. 상이 큰 잔으로 벌주(罰酒)를 주게 하니 또 엎어버렸다. 어떤 이가 꾸짖기를 청하니, 상은 이르기를,
“남에서 광약(狂藥)인 술을 먹이고 예법으로 꾸짖을 수 있는가?”
라고 하고, 밤이 깊어서 헤어졌다. 새벽에 상은 내시를 보내어 병술을 가지고 가서 해장술을 마시게 하였다. 다 취하여 일어나지 못하는데 주서 정기원(鄭期遠)만 본래 주량이 바다 같아서 취하지 않았다. 내시에게 강권하여 취해 쓰러지게 만들었다. 날이 늦어서야 비로소 복명하니, 상이 괴이하게 여겨 물었다. 사실대로 대답하였더니, 기원에게 차례를 뛰어넘어 6품직에 임명하라고 명하였다.
첨중추(僉中樞) 김효원(金孝元)은 젊어서 명성이 있었다. 윤원형(尹元衡)의 사위 안모(安某)와 교류하였다. 일찍이 안모를 윤원형의 집으로 찾아가니, 마침 청양(靑陽 청양부원군) 심의겸(沈義謙)도 있었다. 심의겸은 마음으로 그를 더럽게 여겼다.
김효원이 과거에 장원 급제하여 명론(名論)이 매우 중하였다. 이조 낭관을 뽑는 논의를 하는데, 여러 사람들은 다 김효원을 촉망(囑望)하였다. 심의겸은 참의로서 김효원의 전과(前過)를 끌어다가 저지하였다.
그 뒤에 김효원이 마침내 이조로 들어갔다. 청양의 아우 충겸(忠謙)을 뽐음이 마땅하다고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김효원은 허락하지 않고 말하기를,
“이조가 어찌 외척(外戚)의 집안 물건이기에 심씨의 가문에 반드시 있어야 한단 말인가?”
라고 하였다. 이는 청양은 인순왕비(仁順王妃)의 오빠이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조정이 드디어 당(黨)으로 나뉘어져 심의겸을 편드는 자를 서인(西人), 김효원을 편드는 자를 동인(東人)이라고 하였다. 서로 배척하고 끌어들여 조정이 조용하지 않으니, 유식한 사람은 다 근심하였다.
율곡 이이는 양쪽을 다 내쫓아버리자는 논을 힘써 주장하였다. 심의겸은 개성 유수(開城留守)가 되고, 김효원은 부령 부사(富寧府使)가 되니, 율곡이 소를 올려,
“서로 거리가 같지 않으니, 사람들이 마음을 심복시키기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래서 김효원을 삼척(三陟)으로 옮기고, 심의겸을 완산윤(完山尹 전주 부윤)으로 내보냈다
율곡이 처음에는 양쪽 사이를 조화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루지 못하고 마침내는 그 자신이 서인의 영수(領袖)가 됨을 면치 못하였다.
무인년에 김학봉이 삼윤(三尹 윤두수ㆍ윤근수ㆍ윤현)을 탄핵하였다. 그리하여 원한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계미년에 율곡이 국정을 담당하여 박근원(朴謹元)ㆍ허봉(許篈)ㆍ송응개(宋應漑)를 변방으로 귀양보내자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정철(鄭澈)이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다스리면서 논의가 다른 사람인 이발(李潑)ㆍ백유양(白惟讓) 등을 사형시키거나 혹은 귀양보냈으며, 최영경(崔永慶)ㆍ정개청(鄭介淸) 같은 이는 초야의 선비였는데도 화를 면치 못하는 데에 이르렀다. 붕당(朋黨)의 화가 갈수록 더욱 깊어져서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다.
해원(海原 해원부원군) 윤두수(尹斗壽)ㆍ해평(海平 해평부원군) 윤근수(尹根壽)와 그 형의 아들 윤현(尹睍)이 교대로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자못 재물을 좋아하고 권력을 부린다는 비난이 있었다.
김학봉이 지평이 되어서 윤씨의 외종 사촌 동생 이수(李銖)가 진도 군수(珍島郡守)로 있으면서 배에 수백 석의 쌀을 실어다가 삼윤(三尹)에게 주기 위하여 경강(京江)에 정박시키려 한다는 말을 듣고, 비밀히 아전을 보내 종적을 탐지하여 잡았다. 드디어 삼윤의 죄를 논하고, 이수와 그의 아우 이치(李淄)를 옥에 가두고 심문하니, 이수가 항변(杭辯)하기를,
“공세(貢稅)를 방납(防納)할 쌀이지 윤씨에게 보내려는 것이 아닙니다.”
고 하였다. 죄를 승복하지 않아서 옥사가 성립되지 않았으나. 삼윤은 그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그때는 당론이 한창 성하여 서로 잘못을 찾곤 하여서 논의를 달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학봉의 처사가 공론이 아니라고 하면서 당(黨) 사이의 원한이 더욱 깊어졌다.
율곡 이이는 선조의 지우(知遇)를 입어 선조가 그의 말이면 듣고 그의 계책이면 시행하였다. 이호(尼胡)의 변란 때 병조 판서가 되어서 시정(市井)의 자제들이 수자리살러 가는 것은 실지로 쓸모가 없다고 하여 말을 바치게 하고 부역을 면제시키고 그 말을 전사(戰士)들에게 주었는데, 그 일을 먼저 실행하고 뒤에 계문(啓聞)하였으며, 곡식을 바치는 자를 모집하여 그 사람에게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는 등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일이 많았다.
이의(異議)가 시끄럽게 일어나서 국정을 마음대로 결단한다고 하여 삼사가 함께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참판 박근원(朴謹元), 대사간 송응개(宋應漑), 전한 허봉(許篈)이 그 논의를 가장 힘써 주장하였는데, 태학생(太學生)으로서 율곡을 편드는 자가 상소하여 호소하였다. 상의 뜻이 한창 율곡에게 기울어져 있을 때이므로 매우 성내어, 박근원은 강계(江界)로, 송응개는 회령(會寧)으로, 허봉은 갑산(甲山)으로 귀양보내게 하니, 동서(東西)의 화가 더욱 치열해졌다.
계미년, 이호의 변란 때, 서얼로서 변방에 곡식을 바치는 자를 모집하여 그에게 벼슬길에 나오는 것을 허락하였다.
김공량(金公諒)은 귀인(貴人)이 오빠였다. 그가 면포(綿布)를 가지고 변방의 곡식을 사들이니, 감사 이양원(李陽元)이 아뢰기를,
“곡식 바치는 것을 모집하는 계책은 오로지 곡식을 변방으로 옮기려고 하는 것인데, 지금 공량이 변방의 곡식을 사들이니 곡식을 바치도록 하는 본의와는 서로 어긋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삭탈(削奪)하라고 명하였다. 그때 귀인이 한창 상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었으나 간하지 못하였다. 선조의 처음 정치의 맑고 밝음이 이와 같았다.
지금은 감사된 자 중에 스스로 곡식을 사들여서 남는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자가 많다. 그래서 군량이 날로 축나니, 또한 세태의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선조 때 총애를 받는 후궁이 점점 많아지니, 박대립(朴大立)ㆍ홍섬(洪暹) 등이 시험관으로 있으면서, ‘왕소가 왕덕용이 바친 여인을 받지 말 것을 청하였다.’ 〔王素請勿受王德用所進女口〕라는 고사로 표(表)의 제목을 하였다. 그 뒤에 홍섬 등이 경연에 입시하니, 상이 조용히 이르기를,
“전일의 시제는 누가 냈는지 모르겠으나, 남의 신하된 사람의 도리로 마땅히 간할 것이면 간할 일이지, 어찌 이와 같이 형적(形跡)을 남겨두게 하오? 나는 불만이 있소.”
라고 하였다. 대립이 대답하기를,
“시제는 신이 낸 것입니다. 남의 신하된 자가 임금께 간언을 올리는 방법은 그 길이 하나일 수는 없습니다. 정간(正諫)도 있고, 풍간(諷諫)도 있고, 휼간(譎諫)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도 임금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라고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진실로 옳소. 그러나 마땅히 정면으로 간하는 것이 좋겠소.”
라고 하였다. 위대하도다. 임금의 말씀이여! 이것이 선조 초년의 성세(盛世)를 이루게 한 까닭일 것이다.
현령 이공린(李公隣)은 감사 윤인(尹仁)의 아들인데, 참판 박팽년(朴彭年)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혼인하던 날 밤에 꿈을 꾸니, 늙은이 8인이 앞에 와서 절하고 말하기를,
“저희들이 죽게 되었는데, 공께서 만약 솥에 삶아지게 된 저희들의 목숨을 살려준다면 후하게 은혜를 갚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공린이 놀라서 물으니, 요리하는 사람이 자라 여덟 마리로 국을 끓이려 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즉시 강물에 놓아 주라고 명하였다. 자라 한 마리가 달아나는 것을 어린 하인이 삽을 가지고 잡다가 잘못하여 그 목을 끊어서 죽게 하였다. 그날 밤에 또 꿈을 꾸니, 일곱 늙은이가 와서 감사하였다.
뒤에 이공린은 아들 여덟 명을 낳았는데, 이름을 이귀(李龜)ㆍ이오(李鼇)ㆍ이별(李鼈)ㆍ이타(李鼉)ㆍ이경(李鯁)ㆍ이곤(李鯤)ㆍ이원(李黿)으로 하였으니, 그 상서를 표시한 것이다. 모두 재주있다는 명망이 있어서 사람들이 순씨팔룡(荀氏八龍)에 비유하였다. 이원의 자는 낭옹(浪翁)이니, 행의(行義)와 문장이 가장 세상에서 추앙을 받았다. 점필재(佔畢齋)의 문인으로서 갑자년 화에 죽으니, 그 꿈의 징험이 더욱 현저하였다. 지금까지도 이씨는 자라를 먹지 않는다. 내가 이씨에게 장가들었는데, 아내는 낭옹의 현손(玄孫)이므로 그 일을 매우 자세히 들었다.
기묘년의 옥사가 모두들 남곤(南袞)ㆍ심정(沈貞)이 한 일이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그것이 김전(金銓)에게서 이루어진 것은 모른다. 무오년의 화가 모두들 이극돈(李克墩)ㆍ유자광(柳子光)에게서 나온 것은 알지만, 그것이 윤필상(尹弼商)의 주장이라는 것은 모른다. 무슨 까닭인가. 우리 나라 사람은 비록 널리 알고 통달하고 관통한 사가(史家)라고 하는 자들도 우리 나라 역사에 대해서는 한번도 읽지 않는다. 그러므로 겨우 수십 년이 지나 귀로 들을 수 없고 눈으로 볼 수 없게 되면 어질고 어리석고 간사하고 바른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 나라 상말에, 우리 나라 사람이 나쁜 일 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상심할 것이 무엇 있는가. 아무리 나쁜 일을 한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누가 읽겠는가?”
라고 한다. 아, 이것은 비록 희롱하는 말이긴 하나 참으로 격언이다. 필상이 사소한 원한으로 이목(李穆)을 죽이고자 하여 드디어 무오년의 옥사를 일으키니, 당시의 사류들이 다 주륙 되었다. 노사신에게 조순(趙舜)을 죽이라고 원하기까지 하였으니, 그 마음의 음흉함이 막야(鏌鎁 큰 보검(寶劍)의 이름)보다도 더하다. 연산이 포악한 것은 대체로 윤필상이 유도한 것이다. 비록 탁발(擢髮)의 죽임을 받고자 할지라고 그 죄를 속죄받기에는 부족할 것이다. 다만 폐비(廢妃)를 헌의(獻議)한 대신(大臣)으로 연산에게 죽임을 당하여서 억울하게 죽었으므로 병인년 정국(靖國) 때에 첫째로 신원(伸寃)의 은전을 입었다. 지금까지도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따금 그를 참다운 재상이라고 하니, 어찌 통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기묘년의 화는 김전이 없었다면 비록 남곤ㆍ심정의 간악함으로도 조정에 의탁하여 이룰 수 없었을 것이며, 무오년의 화는 필상이 없었다면 비록 극돈의 흉악함으로도 대신에 가탁하여 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태종(太宗)이 손흥종(孫興宗)을 간신에게 빌붙은 죄로 극형에 처하고자 한 것은 성인(聖人)의 생각으로 지당하다.
착한 일을 하는 집안에는 남는 경사가 있고, 나쁜 일을 하는 집안에는 남는 재앙이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일정한 정론은 아닌가 보다. 우리 나라의 일을 가지고 보더라고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우리 나라 사림(士林)의 화가 무오ㆍ기묘ㆍ을사의 세 당고의 화〔黨錮之禍)보다 더 참혹한 것은 없다. 그때 원통함을 품은 현자(賢者)의 후손들은 아주 침체되어 들리는 것이 없고, 권흉(權凶)으로서 남을 단련(鍛鍊)하던 자는 이미 당시의 부귀를 누렸고, 그 자손들은 거의가 대대로 벼슬이 끊어지지 않는다. 선한 자에게 복을 주고 나쁜 자에게 화를 준다는 이치는 희미하다. 그러니 대대로 악한 일을 하면서 징계하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다.
당 현종(唐玄宗)이 혹리(酷吏) 내준신(來俊臣) 등의 자손을 금고(禁錮)하라고 한 것을 《강목(綱目)》에서 특필하여 허여한 것은 악을 막는 뜻이 엄중하다.
윤해평(尹海平)이 명종 초년에 《육신전(六臣傳)》을 인쇄하여 반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매우 성내어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이율곡이 선조 때에 또 이 일을 청하니, 상이 성내어 이르기를,
“집에 《육신전》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반역으로 논죄하겠다.”
라고 하였다. 이에 좌우 신하들이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런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이 아뢰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어려운 일이 있다면 신등을 신숙주(申叔舟)가 되게 하고자 하십니까? 성삼문이 되게 하고자 하십니까?”
하니, 상의 노여움이 풀렸다고 한다. 옛사람 중에 한 마디 말로 임금의 마음을 돌려 놓는 자가 있다 하더니, 그것에 가깝구나.
율곡은 10여 세에 문장이 이미 성숙하여 높은 명망이 있었다. 아버지가 첩에게 빠져서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중이 되어 정처없이 떠도니, 법명을 의암(義菴)이라고 하였다. 중들이 그를 존경하여 생불(生佛)이라고 하면서 죽도자(竹兜子 대나무로 만든 가마)로 어깨에 메고 다녔다.
나이 20세가 되어서 머리를 기르고 과거에 응시하여 갑자년의 진사시(進士試)와 대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좋은 벼슬을 역임하고 선조의 지우(知遇)를 받아 벼슬이 찬성에 이르렀다. 당시 유림의 영수가 되었으니,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깎아내려 돌아보지 않았다.
처음에 생원으로서 성균관에 나아가 공자를 뵈려고 하니 통례(通禮) 민복(閔福)이 장의(掌議)로서 그를 중이라고 흠을 잡고 허락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어지니 같이 급제한 사람들은 다 얼굴빛이 변하였으나, 공은 신색(神色)이 태연하여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유서애는 소시적부터 문장과 학행(學行)이 당시의 추앙을 받았다. 비록 오랫 동안 삼공(三公)의 지위에 있었으나 청빈(淸貧)하기가 한미(寒微)한 선비와 같았다. 정치하는 것이 공평하고 밝으니, 사람들이 감히 사사로움으로 벼슬을 구하지 못하였다.
임진년의 큰 난리 뒤에 공은 영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여 쉴사이 없이 부지런히 경영하면서 마음을 태우고 정성을 다하였다.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될 만한 일이면 남의 말은 돌아보지 않았다. 도감(都監)을 창립(創立)하고, 군적(軍籍)을 통융(通融)하게 하였으며, 공안(貢案)을 개정하여 지금까지도 혜택을 입게 하였다. 악한 것을 제거하고 착한 것을 권장하여 차츰 형적을 두게 되더니, 마침내 이것으로 간인(奸人)의 참소를 입고 조정을 떠나 안동(安東)의 옛집으로 돌아가서 10년 동안 벼슬하지 않고 지내다가 죽으니, 조야가 애석하게 여겼다. 그러나 성품이 겸손하고 언어가 온화하고 공손하여 남의 앞에서 얼굴빛이 변하면서 놀라는 일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골경(骨鯁)한 풍도가 적었으므로 구비된 군자가 되기를 기대하는 자는 한이 없지 않았다.
선조가 일찍이 궁내에서 황백납(黃白蠟) 3백 근을 요구하니 외부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들기를,
“궁중에서 은부처를 주조한다.”
라고 하였다. 율곡이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동료들을 거느리고 연일 간쟁하면서 무엇에 쓸 것인가를 물으니, 상이 성내어 비답하기를,
“임금이 쓸 것을 위협하여 물으니, 이런 일도 차마 한다면 무엇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라고 하였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승지로서 비답을 봉하여 돌리니, 전교하기를,
“이것은 승정원에서 막을 일이 아니다.”
라고 하였다. 율곡이 사직하고 물러가기를 청하면서 심지어는,
“전하께서 경전을 잘못 인용하여 간신(諫臣)의 말을 꺾으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평소에 글읽는 공이 다만 간언을 물리치는 자료가 되었을 뿐입니다.”
라고까지 하였다. 상은 매우 성내어 물러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승정원이 또 아뢰기를,
“간하는 신하로 하여금 견책(譴責)을 받고 돌아가게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사람은 각각 자기 마음이 있으니, 억제할 수 없다. 푸른 소나무로 벗을 삼고 사슴과 함께 지내면 어찌 높은 절조가 아니겠느냐?”
라고 하였다. 이는 상이 밤에 글읽기를 좋아하였는데, 상의원(尙衣院)에서 올리는 초는 연기가 많았다. 백납(白蠟)은 연기가 없으므로 궁중에서 특별히 초를 만들려고 한 것인데, 외부 사람들이 잘못 전한 까닭에 상의 노여움을 격발시킨 것이라 한다.
율곡이 해주(海州)로 물러갔다가 오래지 않아서 부제학으로 소환되었다. 드디어 지우(知遇)를 얻어 1년 동안에 차례를 뛰어넘어 찬성에 임명되었다. 그의 말이면 듣고, 그의 계책이면 실행하였다. 바야흐로 정승을 삼으려고 하였는데 미처 임명하기도 전에 죽었다.
적신(賊臣) 정여립(鄭汝立)은 전주(全州) 사람이다. 두루 보고 잘 기억하여 경전을 관통하였다. 논의는 높고 격렬하여 탁려풍발(踔厲風發)하였다. 율곡이 당시에 추앙받는 것을 보고 몸을 바쳐 섬겨 제자의 예를 행하였다. ‘공자는 이미 익은 감이고, 율곡은 아직 익지 않은 감’ 이라는 주장을 하기까지 하였다.
율곡은 그의 재주를 기특하게 여겨 널리 칭찬하여 드디어 높은 벼슬에 오르고 명성이 매우 높았다.
율곡이 죽은 뒤에 여립은 당시의 논의가 점점 변하는 것을 보고는, 드디어 그를 배반하고 이발(李潑) 형제에게 아첨해 붙었다. 하루는 상이 묻기를,
“이이는 어떠한 사람인가?”
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기도 전에 여립은 여지없이 극구 그의 단점을 말하니, 상은 매우 미워하여 이르기를,
“여립은 지금의 형서(邢恕)이다.”
라고 하였다. 여립은 성난 눈으로 물러가 벼슬을 버리고 전주로 돌아갔다.
여러 번 불렀으나 나오지 않고 고향에서 무단(武斷)하면서 몰래 반역을 꾀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자살하였다.
참의 이발은 부제학 중호(仲虎)의 아들이다. 장원급제로 뽑혔으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웠다. 부모가 평소에 병이 많아 옷의 띠를 푼 적이 없었으며, 약을 달이는 일을 항상 종들에게 맡기지 않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그런데 사람의 선악을 비평하기를 좋아하였다. 오랫 동안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인재를 천거하고 물리치는 일을 자기의 임무로 삼았다. 그래서 그를 원망하는 사람이 많았다. 역적 여립과 교류하여 기축년의 옥사에 연루되었다. 고문을 받아 온몸에 온전한 곳이 없고 숨이 거의 끊어지게 되었다가도, 다시 국문할 때면 반드시 두 손을 마주 잡고 꿇어앉는 것을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마침내 고문 받다 죽으니 사람들이 다 원통하게 여겼다.
송강 정철은 젊어서 청렴하고 정직한 것으로 이름이 났다. 율곡이 매우 그를 소중히 여겼으며, 총마어사(驄馬御史)라는 이름이 있었다.
동서분당(東西分黨)이 있은 뒤에, 이발에게 배척되어 오랫 동안 한산한 직책에 있었다.
기축년 옥사가 일어나니, 정철은 우의정으로서 옥사를 다스렸는데, 매우 단련(鍛鍊)한다는 나무람이 있었다. 논의가 자기 비위에 불쾌한 자는 서로 잇따라 죄를 입으니, 사람들이 다 그를 탓하였다.
뒤에 함부로 추국(推鞫)한 죄로 강계에 귀양갔다가 임진년에 석방되어 돌아와서 죽으니, 대간이 그의 죄를 추론(追論)하여 관직을 삭탈하였다.
징사(徵士)최영경(崔永慶)은 호를 수우(守愚), 또는 삼봉(三峰)이라고 하였다. 효행이 있어 석곽(石槨)을 만들어 부모를 장사하였다. 유일(儒逸)로 불러서 지평에 임명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율곡ㆍ 우계(牛溪) 성혼(成渾)과 교분이 매우 깊더니, 뒤에 논의로 인하여 틈이 생겼다.
기축년 옥사에 역당(逆黨) 중에 길삼봉(吉三峰)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도망하여 체포되지 않았다. 강해(姜海)ㆍ양천경(梁千璟) 한 책에는 홍천경(洪千璟)을 양천경(梁千頃)이라고 하였는데, 양천경이 옳다. 등이 당시 재상의 지시를 받아 상소하여 영경이라고 하였다.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나 승복하지 않고 얼굴빛이나 말이나 뜻과 기운이 평상시와 같으니, 옥리(獄吏)들이 다 탄복하고 그를 공경해 섬겼다.
징사는 본래부터 역적 정여립을 알지 못하였다. 징사가 상명(喪明)하였을 때에 정여립이 조문하는 글을 보냈으나 징사는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이때에 정여립과 서로 아는가를 물으므로 징사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정직하지 않게 여기니, 정송강이 위관(委官)으로 있으면서 국문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사에게 고문을 가할 수는 없다.”
하고, 석방하였다. 대간 구성(具宬) 등이 굳이 다시 국문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옥중에서 병들어 죽었다.
징사가 처음에 옥에서 나왔을 때에 성우계가 그의 아들 문준(文濬)을 보내 쌀을 주며 문준이 말하기를,
“어찌 남에게 미움을 받아서 이런 화를 만났습니까?”
라고 하니, 징사가 말하기를,
“다만 너의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아서일 뿐이다.”
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다시 추국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한다. 송강이 죄를 받음에 미쳐서 상은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를 지내주고 대사헌을 추증하였다.
기축년 옥사를 다스릴 적에 정송강은 영수가 되고, 백유함(白惟咸)ㆍ이춘영(李春英) 등은 그의 보좌가 되어 당론이 다른 자들을 쳐서 거의 다 없애버렸다. 김빙(金憑)이란 자는 전주 사람인데, 여립과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틈이 생긴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본래부터 풍현증(風胘症)이 있어서 날씨가 춥고 바람을 맞으면 문득 눈물이 흘렀다. 정여립을 육시할 때에 김빙도 백관(百官)의 반열 속에 있었는데, 마침 날씨가 차가와서 눈물이 흘렀다. 그는 일찍이 백유함과 틈이 있었다. 유함은 김빙이 슬피 운다고 하며 얽어서 죽였다. 이때부터 조야(朝野)가 두려워하여 바로 보지 못하였다.
신묘년에 임금의 마음이 크게 깨달아서 유함을 변방으로 귀양보냈다가 임진년에 대사면령으로 석방하였다. 무술년에 주사 정응태(丁應泰)가 중국 조정에 본국을 무함하니, 유함은 그 당시 접반사였기 때문에 하옥되었다.
첨지 백유함은 참찬 인걸(仁傑)의 아들인데, 종형 유양(惟讓)과 논의가 서로 같지 않았다.
기축년 옥사에 유양이 아들 3형제와 함께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주륙(誅戮)을 당하였는데, 유함이 요직에 있으면서 의기양양해 하면서 한 마디도 그를 구원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경인년에 어사(御史)로 북방을 순찰하였다. 그때 정승 정언신(鄭彦信)은 갑산(甲山)에서 귀양살이하고, 박사(博士) 한연(韓戭)은 경흥(慶興)에서 귀양살이하였는데, 수관(守官)이 정공에게 선물을 준 편지를 백유함이 구득(購得)하고, 또 아버지를 뵈러 온 한연의 아들을 잡아가지고 계문(啓聞)하여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의 성명(聖明)함에 힘입어 석방될 수 있었다. 뒤에 유함이 여러 해 동안 옥에 갇히고 두 번이나 변방으로 귀양을 가니, 사람들은 천도(天道)가 아는 것이 있다고 하였다.
정승 정언신이 갑산에 귀양갔을 때, 부사 신상절(申尙節)이 매우 후하게 대접하였다. 백유함은 염탐하여 그의 사사 편지를 찾아내서 계문(啓聞)한 다음에 정언신도 무함하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것은 정철의 의사라고 말하였다.
정철이 강계로 귀양갔을 적에 부사 조경(趙璟)이 또한 후하게 대접하니, 대간이 조경을 논죄하여 형리(刑吏)에게 넘겼는데, 사람들은 유함의 소행에 대한 보복이라고 하였다. 동서분당의 화가 이에 이르러 또한 혹독하였다.
판서 윤국형(尹國馨)이 승지가 되어 경연에 나아가려고 하는데, 칠원군(漆原君) 윤탁연(尹卓然) 또한 특진관으로서 같이 빈청(賓廳)에 있었다.
그때 왕자(王子)가 점차로 횡포해지니, 칠원군이 바야흐로 형조 판서이므로 왕자가 뇌물을 받고 형옥(刑獄)을 뒤흔드는 일을 극언(極言)하였다. 국형이 입대(入對)하여 그것을 말하니, 상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물었다. 칠원군에게서 들었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칠원군을 돌아다 보면서 물으니, 칠원군은 상의 얼굴빛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보고, 상의 뜻을 거스를까 두려워하여 대답하기를,
“신은 본래 알지 못합니다.”
라고 하였다. 상은 성내어 국형을 상주 목사(尙州牧使)로 내쫓았다.
청천(廳天) 심수경(沈守慶)이 물러가 칠원군에게 말하기를,
“공이 왕자의 일을 극언하는 것을 나도 들었는데, 공은 어찌 잊었습니까?”
하니, 칠원군은 얼굴이 붉어져서 대답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칠원군이 이랬다 저랬다하는 것은 진실로 말할 가치도 없지만, 청천은 상에게 아뢰지 못하고 물러나온 뒤에 말을 하였으니, 그 또한 임금을 속이지 말라는 의리를 잃은 것이다.
판서 윤극형이 을미년에 대사헌이 되어 아뢰기를,
“임진년 난리에 종묘 사직이 거의 망하게 되었으며, 적이 남쪽 지방에 웅거해 있어서 국세가 위급하니, 청컨대, 존호(尊號)를 버리시어 인심을 위무(慰撫)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상이 그 의견에 따르려고 하는데, 대신들이 불가하다고 하였다. 공은 조정에 있기가 불안하여서 사직하였다. 뒤에 어떤 일에 관련되어 파면되었는데, 10년 동안 서용되지 못하였다.
선조 말년에 왕자는 더욱 횡포해져서 하원부인(河原夫人)을 자기 집에 가두었다. 하원은 즉 선조의 누나이다. 대간이 그 일을 논핵하니, 이선복(李善復)이 그때 정언으로 있었는데, 병을 핑계대고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상의 뜻을 엿보아 도리어 대간이 경솔하게 왕자를 논핵한 죄를 탄핵하였다. 상은 그것을 옳다고 하여 대사간 송순(宋諄)을 벼슬에서 내쫓아 집에 돌아가게 하니, 사간 김대래(金大來)가 매우 두려워하여 스스로 임석령(任碩齡)에게 속았다고 진술하였다.
상은 곧장 석령을 내쫓으라고 하였다.
이 일로 연유하여 선복은 총애를 얻어 두어 해도 못되어서 차례를 뛰어넘어 승지에 임명되니, 사람들은 다 욕을 하였다. 대래는 뒤에 직제학이 되었는데, 유영경의 심복이라고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을해년에 인순왕비(仁順王妃)가 승하하니, 상은 양암(諒闇) 중이어서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지 않았다.
참판 김우옹(金宇顒)은 그때 전적으로 있었는데, 상소하여 3년상을 거행하기를 청하고, 또 유신(儒臣)을 소대(召待)하여 민심이 도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가 의려(倚廬)에 있으니, 다만 내시들이 곁에 있을 뿐이다. 유신들은 나의 평소의 마음을 아는 벗이니, 드나들면서 마음을 서로 통하는 것이 진실로 좋겠다.”
라고 하였다. 선조가 유신을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선조 때에 옥당에서 차자를 올려 시폐(時弊)를 논한 적이 있다. 밤이 깊어서 입계(入啓)하였으므로 비답을 미처 내리지 못하고, 이튿날 아침 정원에 하교하기를,
“어제 마침 심기가 불편하여 옥당에서 바른 의논을 하는데도 미처 비답하지 못하였으니 매우 미안하다. 정원은 나를 위하여 옥당에 사과하라.”
하였다. 사람들은 다 감격하여 기뻐하였다.
임진란을 겪은 뒤로 국가에 일이 많아서 대신들이 자주 바뀌어서 원임대신(原任大臣)이 10여 인이나 되었다. 갑진년(1604, 선조 37)의 녹훈(錄勳)으로 조정에 사권(賜卷)된 자는 거의 반이나 되었다.
연릉군(延陵君) 이호민(李好閔)이 일찍이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의 호)에게 찾아가니, 한음은 농담하기를,
“공은 어디 갔다가 벼슬이 정승에 이르지 못하였소?”
하였다. 연릉군은 말하기를,
“공은 어디 갔다가 공신이 되지 못하였소?”
하였다. 이는 한음이 공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해 듣는 사람들은 웃었다.
이연릉(李陵君)이 일찍이 흰 머리를 뽑으니, 한음이 말하기를,
“공은 벼슬이 종 1품에 이르렀는데, 다시 무엇을 바래서 흰 머리를 뽑소?”
하였다. 연릉은 말하기를,
“다른 뜻이 있는 것이 아니오. 한(漢) 나라의 법이 지극히 관대하였으나 살인한 자는 죽인다 하였소. 백발은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므로 제거하지 않을 수 없소.”
하니, 한음은 크게 웃었다.
큰 전란을 겪은 뒤로 백관들이 다 담벽에 의지하고 감히 집을 수리하지 못하더니, 임인년에 정승 윤승훈(尹承勳)이 비로소 집을 지으매 자못 크고 사치스럽다는 비난이 있었다. 그때에 돌이 옮겨지는 이변이 많았다. 이오성(李鰲城 이름은 항복(恒福))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남들이, 윤공이 사려가 많다고 하더니, 그렇지 못하군. 어찌 돌이 옮겨지는 이변이 있는 것을 모르고 주춧돌을 그렇게 크게 하는가?”
라고 하였는데, 그 당시 사람들은 서로 전하였다.
수년도 못 가서 토목 공사가 크게 일어나니, 유식자들 중에는 목요(木妖)를 탄식하는 이가 있었다. 오성의 집이 윤승훈의 집에 비하여 더욱 사치하였으니, 진실로 말을 실천하기란 어려운 것이다.
이오성은 소시적부터 재상이 될 만한 인재라는 명망을 받았으며 회해(詼諧)로 유명하였다.
경자년에 호남 체찰사로 있을 때에, 상이 역적이 있는가를 시험해 살피라고 하였다. 이공은 재빨리 징계를 올리기를,
“역적은 새ㆍ짐승이나 물고기ㆍ자라처럼 곳곳에서 생산되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에 시험해 살피기가 어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다 전송하며 기담(奇談)이라고 하였다. 오늘에 이르러서는 고변하는 자가 서로 이어서 전후 5~6년 동안에 아직도 옥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새ㆍ짐승ㆍ물고기ㆍ자라보다도 많다. 또한 세태가 변한 것을 볼 수 있다.
임진년에 상이 서쪽으로 피난할 때, 사관 아무개들이 사초(史草)를 불태우고 달아났는데, 서애(西厓)는 국정을 담당하면서 그 사람을 조정에 세우지 않았다.
무술년에 조정의 논의가 크게 변하여 그 사람을 서장관에 의망하니, 전교하기를,
“이 자는 바로 역사책을 불태우고 임금을 버린 채 도망갔던 사람이다. 중국에 사신으로 가는 중도에 다시 도망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니, 다시 의망하라.”
하였다. 지극하도다. 왕의 말씀이여! 위엄을 부리지 않아도 임금의 위엄은 부월(鈇鉞) 같다고 말할 수 있다.
안시성주(安市城主)는 조그마한 외로운 성으로 천자의 군대를 막아냈으니, 세상에 드문 책략가일 뿐만 아니라, 성에 올라가 절하고 하직하는데 말이 조용하여 예의의 바름을 얻었으니, 진실로 도(道)를 아는 군자이다. 아깝게도 역사에서 그의 이름을 잃었는데, 명나라 때에 이르러 《당서연의(唐書衍義)》에 그의 이름을 드러내어 양만춘(梁萬春)이라고 하였다. 어떤 책에서 찾아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안시성의 공적이 책에서 찬란히 빛나고 있다. 진실로 그의 이름이 잃어지지 않고 전하였더라면 《통감강목(通鑑綱目)》과 《동국사기(東國史記)》에 응당 모두 유실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찌 수백 년을 기다려서야 비로소 《연의(衍義)》에 나오겠는가. 거의 믿을 수 없다.
이시애(李施愛)가 반역할 때에 치밀하게 자기 편을 배치하고 기일을 정하여 거사하니, 함흥 이북 사람들이 하룻밤 사이에 장수와 관리들을 다 죽이고 호응하였다. 그가 가령 새로 일어난 날카로운 사기를 인하여 길게 몰아 재를 넘어왔다면 누가 방어할 수 있었겠는가.
시애가 이성(利城)에 이르러 현감의 아내를 차지하고는 미혹되어 환락에 빠져 남쪽으로 전진할 마음이 없게 되자,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해이해져서 드디어 멸망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D-001]풍패(豊沛) : 항우(項羽)와 싸워서 제위(帝位)에 오른 한 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이 패현(沛縣) 풍읍(豊邑) 사람이었으므로, 뒤에 제왕의 고향을 풍패라 일컬었다.
[주D-002]요황(要荒) : 요복(要服)과 황복(荒服)의 준말이니, 즉 국도(國都)에서 멀리 떨어진 곳.
[주D-003]백집사(百執事) : 온갖 벼슬아치라는 말. 《서경》〈반경(盤庚)〉 하에 “백집사의 사람은 거의 다 헤아릴지어다[百執事之人尙皆隱哉].”라는 말이 있는데, ‘은(隱)’은 ‘탁(度)’의 뜻임.
[주D-004]동조(東朝) : 한 나라 때의 태후(太后)가 항상 거처한 장락궁(長樂宮)이 미앙궁(未央宮) 동쪽에 있었으므로, 전하여 태후 즉 대비(大妃)를 동조라 칭한다. 여기에서는 문정왕후(文定王后)를 말함.
[주D-005]을사년의 옥사 : 명종 원년(1545)에 일어난 옥사. 명종의 외숙 윤원형(尹元衡)은 인종의 외숙 윤임(尹任)을 미워하였다. 그는 인종이 승하하고 어린 명종이 즉위하여 그 어머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하게 됨을 기회로 윤임의 일당과 유관(柳灌)ㆍ유인숙(柳仁叔) 등을 죽이고, 많은 명사들을 죽이거나 멀리 귀양보냈다. 이를 을사사화(乙巳士禍)라고 한다.
[주D-006]삼종(三從) : 여자가 지켜야 할 도리로, 즉 출가 전에는 아버지를 따르고, 시집가면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것.
[주D-007]옥관자(玉貫子) : 옥으로 만든 관자(貫子)로 종1품의 벼슬아치는 새김을 놓지 않고, 당상 정3품 이상의 벼슬아치는 새김을 놓았다. 관자는 망건(網巾)의 끈을 꿰는 작은 고리이다.
[주D-008]상사(上舍) : 생원과 진사의 별칭으로, 옛날 태학에서 생원과 진사는 상사(上舍), 즉 위채에 거처하였기 때문임.
[주D-009]유색신(柳色新) : 당(唐) 나라 왕유(王維)가 읊은 “위성에 아침 비가 가벼운 티끌 적시니, 객사에 푸르고 푸른 버들빛이 새롭네[渭城朝雨浥輕塵 客舍靑靑柳色新],”라는 시에 ‘유색신(柳色新)’이 유극신과 비슷하므로 농담한 것이다.
[주D-010]쇄직(鎖直) : 며칠이고 외출하지 않고 숙직하는 것.
[주D-011]밀계(密啓) : 비밀히 아뢴 글로, 여기서는 윤원형 일파가 윤임 일당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뢴 것.
[주D-012]입언(立言) : 썩지 않을 중요한 언론이나 학술을 수립하는 것.
[주D-013]선생안(先生案) : 각 관아(官衙)의 전임 관원의 성명ㆍ관명ㆍ생년간지(生年干支)ㆍ본적 등을 적은 책.
[주D-014]구익부인(鉤弋夫人) : 한 무제(漢武帝)의 후궁인데, 첩여(婕妤 궁중의 여관(女官)을 이름)가 되어 구익궁(鉤弋宮)에 있었으므로 구익부인이라 한다. 무제가, 그가 낳은 구익자(鉤弋子)를 태자로 세우려 하면서 아들은 어리고 어미는 젊으므로 그가 행여 음란할까 염려하여 사사(賜死)하였다. 구익자가 즉위하니 곧 소제(昭帝)이고, 소제는 그를 황태후(皇太后)로 추존하였다. 《한서 외척전(漢書外戚傳)》
[주D-015]견후(甄后) : 삼국(三國) 시대 위 문제(魏文帝)의 부인으로, 뒤에 후(后)가 됨. 명제(明帝)와 동향공주(東鄕公主)를 낳았다. 뒤에 곽후(郭后)에게 총애를 빼앗기고 원망하다가 사사되었다.
[주D-016]승호(蠅虎) : 거미의 한 가지. 파리 잡는 거미로 그 피를 빨아먹음.
[주D-017]질정관(質正官) : 사신과 동행하여 문자(文字)의 음운(音韻)이나 사물의 의심된 것을 중국에 질문하여 알아오게 하는 임시직.
[주D-018]허물을 …… 안다 : 《논어(論語)》〈이인편(里仁篇)〉에 나오는 말로 〈주자집주〉에 의하면, 군자는 항상 후덕한 데서 과실을 범하고 소인은 항상 야박한 데서 과실을 범하니, 이것을 살피면 사람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을 안다는 것이다.
[주D-019]부마(駙馬) : 부마도위(駙馬都尉)의 준말로, 공주(公主) 또는 옹주(翁主)에게 장가든 사람.
[주D-020]예위(禮圍) : 생원ㆍ진사의 복시(覆試). 예조에서 시취(試取)하였기 때문에 예위라고 함.
[주D-021]자기(子奇) :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현인(賢人)으로 재주가 매우 있었음.
[주D-022]동년(同年) : 동시에 과거에서 같이 급제한 사람.
[주D-023]기축년의 화 : 선조 22년(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 이 사건을 계기로 동인(東人)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고, 서인(西人) 정철(鄭澈)이 옥사를 맡아 반대당의 많은 명사들이 원통하게 사형 또는 멀리 귀양가곤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발(李潑)ㆍ이길(李洁)ㆍ백유양(白惟讓)ㆍ유몽정(柳夢井)ㆍ최영경(崔永慶) 등이 죽고, 정언신(鄭彦信)ㆍ정언지(鄭彦智)ㆍ정개청(鄭介淸) 등은 유배되었으며, 노수신(盧守愼)은 파직(罷職)되었다.
[주D-024]동벽(東壁) : 회좌(會座) 때에 좌석의 동쪽에 앉는 관직으로, 의정부의 좌참찬과 홍문관의 응교ㆍ부응교, 통례원(通禮院)의 인의(引儀).
[주D-025]총죽(葱竹)의 교우(交友) : 어릴 때 파로 피리를 불고, 대나무 말을 타고 서로 희롱하며 놀던 옛 친구.
[주D-026]기시(棄市) : 죄인을 사람들이 많은 시장에서 처형함.
[주D-027]증(烝) 하였다 : 손윗사람과 간음함.
[주D-028]편호(編戶) : 호적에 편입된 보통 백성으로, 평민(平民)임.
[주D-029]선온(宣醞) : 임금이 신하에게 술을 하사함.
[주D-030]태초(太初) : 천지가 개벽하던 맨 처음.
[주D-031]정옥(頂玉) : 관원이 모자에 꾸미개로 붙이는 옥.
[주D-032]진만년(陳萬年) : 한 선제(漢宣帝) 때 사람. 웃사람의 비위를 잘 맞췄으며, 특히 외척(外戚) 허사(許史)에게 뇌물을 많이 바쳤으므로, 고을 아전에서 발탁되어 벼슬이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이르렀음.
[주D-033]주조(周朝) : 주(周) 나라의 조정. 여기에서는 당 나라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황제의 위를 찬탈하고 나라 이름을 주라고 일컬을 때의 조정을 말함.
[주D-034]두 장(張)씨 : 장역지(張易之)와 그의 아우 장창종(張昌宗). 그들은 무후에게 총애를 받았으나 뒤에 장간지에게 피살됨.
[주D-035]길욱(吉頊) : 성질이 음독(陰毒)하고 일에 대하여 과감하게 말하였으며, 무후 때에 봉각난대 평장사(鳳閣鸞臺平章事)까지 지냈다. 처음 중종(中宗)이 황태자가 되지 못할 때에 장역지와 장창종이 자신들의 안전책(安全策)을 그에게 비밀히 묻자, “공의 형제는 총애를 받음이 이미 깊으니, 천하에 큰 공을 세우지 못하면 보전하지 못할 것이오. 지금 천하 백성들이 모두 이가(李家 당 나라는 이연(李淵)이 세움)를 사모하오. 명공(明公)께서 만약 여릉(盧陵 중종(中宗)) 및 상왕(相王 예종(睿宗))을 세우자고 청하여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면 복록을 길이 누길 것이오.” 하니, 역지 등은 그 말을 옳게 여겨 주청(奏請)하였다. 《구당서(舊唐書)》〈혹리(酷吏)〉 상(上).
[주D-036]취일지공(取日之功) : 제왕을 추대한 공(功)으로 봉일지공(捧日之功)과 같음.
[주D-037]소미성(少微星) : 별 이름. 태미성(太微星) 서쪽에 있는 네 개의 별로 사대부(士大夫)ㆍ처사(處士)를 상징하는 별.
[주D-038]참승(驂乘) : 임금 곁에서 모시고 수레를 탐. 옛날 수레 타는 법은 어자(御者)가 수레의 가운데에 타고, 임금이 왼쪽에, 오른쪽에는 호위하는 사람이 타서 수레가 기울지 않게 하였다. 그 오른편에 타는 것을 참승이라고 하는데, 임금이 친애하는 측근의 신하를 태운다.
[주D-039]사액(賜額) : 사(祠)ㆍ원(院) 등의 명호(名號)를 하사함. 여기에서는 서원(書院)의 명호(名號)를 임금이 정하고 현판을 내려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주D-040]신물(贐物) : 멀리 여행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는 물품.
[주D-041]강어(强禦) : 강력하게 선(善)을 물리치는 것으로 악에 강하여 선을 거부함.
[주D-042]진이(陳理)와 명승(明昇) : 진이는 진우량(陳友諒)의 아들인데, 진우량은 원 나라 말년에 채석기(采石磯)에서 황제라 일컫고 나라 이름을 한(漢)이라고 하였다. 진우량이 명 태조와 싸워 유시(流矢)에 맞아 죽고, 진이가 뒤를 이었다.
[주D-043]복계(覆啓) : 임금께 복명한다는 말. 그러나 여기에서는 계복(啓覆)의 뜻으로 쓰고 있다. 계복은 임금께 상주(上奏)하여 죽일 죄인을 다시 더 심리하는 것.
[주D-044]이름하여 …… 고치지 못한다 : 유여(幽厲)는 포학한 임금의 시호로 어리석은 임금의 시호는 유이고, 악독한 임금의 시호는 여이다. 여기에서는 이 말을 인용하여 한번 붙여진 악명(惡名)은 고칠 수 없다는 것을 말하였다.
[주D-045]간신이 …… 걸어야 하겠다 : 양국충은 당 나라 양귀비(楊貴妃)의 6촌 오빠로, 현종(玄宗) 때 벼슬이 재상에 이르렀다. 그런데 음란하고 방종하며 불법하였다. 안녹산(安祿山)이 배반하니, 현종에게 촉으로 피난할 것을 진언하였다고 한다. 촉으로 가는 도중 마외파(馬嵬坡)에서 금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주D-046]전대(專對) : 사신이 외국에 가서 의외의 질문에도 자유자재로 대처함.
[주D-047]전사십배(前使十輩)의 죽임 : 한 나라 고조 7년에 흉노(匈奴)를 치고자 하여 사자(使者) 10인을 흉노에 보내었다. 흉노가 건장한 무사와 살찐 우마(牛馬)는 다 숨기고 노약(老弱)하고 수척한 마소만을 보였다. 10인의 사자가 돌아와서 다, “흉노는 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다시 유경(劉敬)을 흉노에 사자로 보냈다. 돌아와 복명하기를, “흉노가 좋은 것을 보이지 않고 나쁜 것만을 내보이니 반드시 복병(伏兵)이 있을 것입니다. 흉노를 쳐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그러나 고조가 듣지 않고 군대를 거느리고 정벌의 길에 올랐다. 평성(平城)에 이르러 과연 적의 기병(奇兵)에게 포위되어 겨우 살아 돌아왔다. 고조는 드디어 먼저 사자로 보냈던 10인을 모두 베어 죽였다.
[주D-048]교사(郊社) : 교(郊)는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고, 사(社)는 사직(社稷)에 제사하는 것.
[주D-049]해안(海眼) : ① 땅 속을 숨어 흐르는 샘. ② 밀물이 되면 나오고 썰물이 되면 없어진다는 샘.
[주D-050]무오년의 옥사 : 연산군 4년(1498)에 유자광(柳子光) 등이 사림파인 김일손(金馹孫)의 사초(史草) 속에 삽입된 김종직(金宗直)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세조(世祖)가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한 것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게 참소하여 김종직을 부관참시하고, 김일손ㆍ권오복(權五福)ㆍ권경유(權景裕)ㆍ이목(李穆)ㆍ허반(許盤) 등을 죽이고, 많은 사림파의 명사들을 유배시키거나 또는 벼슬에서 내쫓은 일. 사초가 원인이 되었다고 하여 사화(士禍)라고도 한다. 이 사화는 사림파의 중심 인물인 김종직을 중심으로 성종 때부터 많은 인사가 중앙에 등용되어 삼사(三司)를 장악하고, 훈구파들의 구악(舊惡)을 파헤치며 시정을 과감하게 개혁하는 데에 불만을 가진 훈구파들의 감정과 정권욕에서 빚어진 사건으로, 4대사화(四大士禍) 중 첫 번째 사화이다.
[주D-051]치명(治命) : 죽을 무렵에 맑은 정신으로 한 유언(遺言).
[주D-052]고명(顧命) : 제왕(帝王)의 유언(遺言)이나 유조(遺詔).
[주D-053]빈청(賓廳) : 대신이나 비국(備局)의 당상들이 모여서 회의하던 곳.
[주D-054]익선관(翼善冠) : 임금이 평상복 차림으로 정무(政務)를 볼 때에 쓰는 관.
[주D-055]격쟁(擊錚) : 원통한 사정이 있는 사람이 임금에게 하소연하고자 할 때에, 거둥하는 길가에서 꽹과리를 쳐서 하문(下問)을 기다리는 일.
[주D-056]안석(安石)ㆍ동산(東山) : 안석(安石)은 진(晉) 나라의 사안(謝安)이고 동산(東山)은 명 나라의 곽문주(郭文周)를 가리키는데, 모두 명망이 높았다.
[주D-057]방납(防納) : 공세(貢稅)의 대납(代納). 처음에는 백성에게 부과된 공물(貢物)이 납입 의무자에게 현품이 없는 경우에 상인(商人)이 대신 사서 바치고 납입 의무자에게서 돈을 받았는데, 뒤에는 상인이 공물을 대납함으로써 막대한 이익을 얻게 되므로, 관(官)과 결탁하여 백성이 바칠 수 있는 공물도 바치지 못하게 막고 대납하였으며, 심지어 세곡까지도 대납하여 백성에게 폐해를 끼치게 되었다. 이미 그것은 대납이 아니고 백성의 직접 납입을 방지하는 방납인 것이다. 드디어 대납은 방납이란 용어로 통용하게 되었다.
[주D-058]풍간(諷諫)도 있고 …… 있습니다 : 풍간은 나무라는 뜻을 붙여 비유로 깨우치는 것이고, 휼간은 직언(直言)하지 않고 멀리 말을 돌려서 간하는 것.
[주D-059]순씨팔룡(荀氏八龍) : 후한(後漢) 순숙(荀淑)의 여덟 아들인 순검(荀儉)ㆍ순곤(荀鯤)ㆍ순정(荀靖)ㆍ순도(荀燾)ㆍ순왕(荀汪)ㆍ순상(荀爽)ㆍ순숙(荀肅)ㆍ순전(荀專)이니, 순전은 순부(荀敷)라고도 한다. 당시 사람들이 팔룡(八龍)이라고 일컬었다.
[주D-060]기묘년의 옥사 : 중종 14년(1519)에 남곤ㆍ심정 등이 조광조 등 많은 명사들을 죽이거나 쫓아낸 사건으로 즉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말한다. 중종이 즉위하면서 선비들을 등용하니 연산군 때에 무오ㆍ갑자사화로 몰락되었던 사람들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 조광조였다. 그리고 현량과(賢良科)를 통하여 많은 젊은 유학자들이 요직에 등용되었다. 조광조를 중심으로 한 그들은 옛날 삼대(三代) 때의 도덕 정치의 구현을 목표로 하고 성리학(性理學)을 크게 숭상하며, 사장(詞章)을 경시하였다. 임금의 신임을 얻어 과감하게 정치 개혁을 시도하는 한편 훈구파(勳舊派)들의 비행을 탄핵하고, 중종의 반정 공신인 정국공신(靖國功臣)중 4분의 3에 해당하는 자를 공신의 자격이 없다고 하여 훈호(勳號)를 삭탈하게 하니, 훈구파의 심정ㆍ남곤 등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제거를 음모하였다. 드디어 홍경주(洪景舟)의 딸인 희빈(熙嬪)을 시켜서 중종에게 조광조 등이 장차 임금이 되려고 한다고 말하게 하고, 대궐 안의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 ‘주초위왕(走肖爲王)’이란 글자를 써서 벌레가 갉아먹게 한 뒤에 그것을 왕에게 보이는 등,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무함하여 드디어 조광조 이하 많은 현신(賢臣)과 명사들을 죽이고 귀양보내고, 파면시켜 내쫓곤 하였다.
[주D-061]탁발(擢髮) : 머리털을 뽑아서 세어도 부족할 만큼 많은 죄책(罪責).
[주D-062]단련(鍛鍊) : 혹독한 관리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죄안을 구성하여 사람을 죄에 빠뜨리는 것을 말함.
[주D-063]골경(骨鯁) : 골경지신(骨鯁之臣)의 준말로, 강직하여 임금의 과실을 힘껏 간하는 충신.
[주D-064]탁려풍발(踔厲風發) : 기세(氣勢)가 강성하여 당해낼 수 없는 것의 형용.
[주D-065]형서(邢恕) : 송(宋) 나라 사람으로 정호(程顥)를 스승으로 섬기더니 배반하고, 사마광(司馬光)의 문객(門客)이 되더니 사마광을 무함하고, 장돈(章惇)에게 붙더니 곧 장돈을 배신하였다.
[주D-066]무단(武斷) : 시골에서 지위와 세력 있는 사람이 남을 억지로 내리 누르는 짓을 하는 것.
[주D-067]총마어사(驄馬御史) : 후한(後漢) 때 환전(桓典)이 시어사(侍御使)가 되어서 항상 총마(驄馬)를 타고 다녔으므로 그렇게 불렀다. 환전은 엄정(嚴正)하였기 때문에 간인(奸人)은 항상 총마어사를 피하라고 하면서 두려워하였다고 한다.
[주D-068]징사(徵士) : 학문과 덕행이 있어서 조정의 초빙을 받은 선비.
[주D-069]상명(喪明) : 아들 상(喪)을 당함. 공자의 문인 자하(子夏)가 아들의 상을 당하여 너무 슬피 울어서 소경이 되었다는 고사에서 연유함.
[주D-070]존호(尊號) : 왕과 왕후의 덕을 칭송(稱頌)하는 칭호.
[주D-071]양암(諒闇) : 임금이 상중(喪中)에 있음.
[주D-072]의려(倚廬) : 부모의 상중에 거처하는 여막(盧幕).
[주D-073]목요(木妖) : 당(唐) 나라 내신(內臣) 융수(戎帥)의 별명. 정자나 집을 세우는 것이 너무나 심하였기 때문에 나무의 요정(妖精)이라고 불리웠다.
[주D-074]회해(詼諧) : 익살스럽고 재미있는 농담, 즉 해학(諧謔).
[주D-075]안시성주(安市城主) : 고구려의 강성을 미워하고, 또 수 양제(隋煬帝)의 큰 원정(遠征)이 있은 이래 번번이 패전하고 돌아간 숙원(宿怨)을 씻고자 하여, 고구려 보장왕 4년(645)에 당 태종(唐太宗)은 10만 4천여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를 쳐 개모성(盖牟城)과 비사성(卑沙城)을 점령하고, 요동성(遼東城)ㆍ백암성(白巖城)을 차례로 빼앗은 다음 승세를 몰아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안시성의 방비는 견고하여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몇 달 동안 성을 공격하다가, 결국 안시성의 수비는 더욱 견고하고 고구려의 사기는 더욱 높았다. 드디어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와서 날씨는 춥고 식량은 떨어진 당군(唐軍)은 물러가게 되었다. 당군이 물러가던 날, 안시성주는 성 위에 나서서 당군에게 미안하다는 인사를 하였다. 당 태종은 적이기는 하나 훌륭하다고 하여 비단 1백 필을 선물로 주고 자기의 경솔한 원정을 후회하였다고 한다. 안시성주의 이름을 양만춘(梁萬春) 또는 양만춘(楊萬春)이라고 하나 야사에만 있을 뿐 정사에는 그의 기록이 없음.


 

ⓒ 한국고전번역원 ┃ 남만성 (역) ┃ 197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