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부흥운동과 일본의 지원

2014. 11. 25. 01:18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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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부흥운동과 일본의 지원 삼국과 남북조

2009/07/27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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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는 일본의 기원인가>, 김현구 지음, 출판 - 창작과  비평사(2002년 12월 24일 초판 2쇄)

 

 

1. 일본의 백제 지원 준비

 

  한편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자였던 복신은 일본에 머물던 왕자 풍장의 귀국과 지원군을 요청하기 위해서 일본에 사신을 보낸다. 그 첫 사자인 좌평 귀지가 일본에 도착한 것이 백제의 왕이 항복한 지 세 달 뒤인 660년 10월이다. 일본의 사이메이천황(齊明天皇)은 복신의 요청을 받고 지금의 후꾸오카에 몸소 가서 직접 구원군을 준비시킨다. 12월 24일에는 오오사카에 가서 무기를 준비시키기도 하였다. <일본서기>에는 "천황이 나니와궁에 행차했다. 천황이 바야흐로 복신이 요청하는 뜻에 따라서 쯔꾸시에 행차하여 장차 구원군을 보내려고 했다"라고 되어 있어서 백제 구원군이 복신이 요청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사이메이 천황이 구원 요청을 받은 지 두 달박에 안되는 사이에 출병을 결정하고 오오사까까지 가서 무기를 준비하는 등 신속하게 행동한 것은 이례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예순을 넘긴 사이메이 천황이 직접 북큐우슈우에까지 가서 구원군을 지휘하려고 했다는 사실은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다.

  사이메이 천황이 661년 1월 6일 오오사까항을 출발하여 중간에 여러 곳을 들러서 모병을 하면서 쯔꾸시에 도착한 것은 3월 25일이다. 그런데 쯔꾸시에서 백제 구원을 준비하다가 7월 24일 급사한다.

  사이메이 천황이 급사한 뒤 황태자인 나까노오오에황자(당시 중대형 황자, 뒤에 천지천황)는 10월 7일 시신을 해로로 당시의 서울인 아스까로 옮긴 다음 11월에 상을 치른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다시 출병을 준비한다.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출병준비는 계속되어 그 해 8월에는 이미 출병계획을 발표하고, 9월에는 5천의 호위병을 붙여서 일단 왕자 풍장을 먼저 귀국시킨다.

  전격적인 출병준비라든지, 예순이 넘은 여제가 북큐우슈우에까지 직접 가서 준비를 했다든지, 상중임에도 불구하고 준비를 계속했다든지 하는 것은 어느 것 하나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이런 무리한 지원 때문에 텐지천황 정권은 결국 백촌강 싸움에서 패배하고 '진신의 난(672)'이라는 초유의 내전으로 무너진다. 이에 대해 사이메이 천황을 비롯해서 당시 정권의 핵심세력이 백제 출신들이기 때문에 조국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무리하게 출병했다는 설까지도 나오게 되었다. 이른바 조국부흥 전쟁설이다.(126~128쪽)

 

 

2. 일본의 백제 지원 이유

 

  그러나 당은 고구려.백제의 순서를 바꾸어서 먼저 백제부터 멸망시켰다. 그렇다면 다음 순서가 고구려이고 고구려를 멸망시키면 그 다음에는 일본이 목표라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그런데 백제부훙운동군이 구원을 요청하였다. 일본으로서는 당이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까지 멸망시킨 다음 여세를 몰아 일본에 쳐들어오는 것을 앉아서 기다리든지, 아니면 한반도에 가서 백제.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신라와 대결하는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일본은 당의 침입을 앉아서 기디라다 혼자서 싸우기보다는 한반도에 와서 백제.고구려와 연합전선을 펼치는 길을 선택했다. 일본이 왜 전쟁터를 한반도로 설정했는가는 1894년 청일전쟁의 장소로 한반도를 설정한 것이나, 제2차 세계대전 때 수천킬로미터나 떨어진 진주만을 선제공격하여 전쟁터를 미국 쪽에 설정한 사실을 살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한반도로 와서 백제.고구려와 손을 잡고 당.신라와 싸우기로 한 이상, 일본은 백제가 완전히 무너지기 전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정권의 운명을 걸고 백촌강 싸움에 출병하게 된 것이다.(132~133쪽)

 

 

3. 백제 부흥군의 내분과 좌절

 

  풍장과 5천명의 호위병이 도착한 뒤 백제부흥운동군의 전세가 잠시 호전된다. 그런데 일본 구원군의 본대가 도착하면 백제 부흥운동군의 주도권은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던 복신으로부터 풍장과 일본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따라서 본대의 파견을 잠시 보류할 것을 요청했다. 보류되었던 구원군의 본대가 다시 출발한 것이 663년 3월이었다. 그 규모가 <일본서기>에는 400여척의 배에 2만 7천명이었다고 되어있다.

  당군은 사비성과 웅진성에서 고립무원의 상태에 있었다. 육로의 복신과 백촌강을 거슬러 올라간 일본군이 협공했다면 당군을 몰아내고 사비성과 웅진성을 되찾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러나 일본군이 들어가면 풍장과 일본군에게 주도권이 넘어갈 것을 두려워한 복신은 좀처럼 일본군의 사비성 진군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군으로서는 먼저 복신을 제거해야만 하였다. 결국 풍장이 제거해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해 6월 풍장이 복신을 제거한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일본이 복신이 제거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당의 좌위위 장군 손인사가 7천명의 구원군을 거느리고 한발 먼저 도착하여 웅진성에 있던 유인원을 구원한다. 그리고 신라는 풍장이 복신을 제거하자 본격적으로 주루성 공략에 나선다. 신라의 문무왕이 손인사에 호응하여 일본군이 도착하기 전에 주류성의 공략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유인궤는 별도로 의자와의 아들 부여융과 더불어 수군을 통솔하고 웅진강에서 백촌강으로 나아가 육군과 합류하여 주류성으로 향했다.

  당의 원병이 도착하기 전에 사비성과 웅진성을 선제공격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 일본군은 우선 신라와 당의 협공을 받고 있던 주류성 구원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유인궤는 병선 170여 척을 거느리고 백촌강 입구에서 포진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27일 과 28일에 왜의 수군은 백촌강 하구에서 당군과 네 번 싸워서 네 번 모두 졌다. <구당서>에는 "왜선 400여척을 불태웠다. 그 연기가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핏빛으로 물들었다"고 되어 있다. 백제부흥운동군의 기병부대는 왜의 수군을 연안에서 원호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라 문무왕은 육상에서 당의 수군을 원호하고 있었다.

  풍장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주류성은 9월 7일 당에게 항복한다. 이때 백제인들이 "주류가 항복하였다. 일이 어찌할 수 없다. 백제의 이름은 오늘로 끊겼다."<일본서기> 한탄했다.(135~137쪽)

 

 

4. 일본의 백제지원은 조국부흥전쟁인가

 

  조국부흥전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증거로 자주 내세우는 기사가 <일본서기> 663년 기록이다. 663년 기록에는 일본의 구원군이 백촌강 싸움에서 패배하고 백제부흥운동 최후의 거점이었던 주류성까지 함락되자 백제의 지배층이 일본군을 따러서 도일하려는 장면이 나온다. 그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나라 사람들이 서로 일러 말하기를 "주류가 함락되었다.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제레성에 가서 일본의 군장(軍長) 등과 만나서 상의할 바를 상의하자."

 

  조국 부흥 전쟁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위 기록 중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는 구절이 당시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온 사람들이 백제 출신었음을 알려주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백제출신이었기 때문에 일본으로 떠나면서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어찌 갈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의 그 구절은 누가 보아도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본에서 온 사람들이 한 말이 아니고 일본으로 출발하기 위해 준비를 하던 백제 사람들이 한 말이다. 주체가 "나라 사람들"이라고 표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서 끊어졌다. 조상의 묘소가 있는 곳에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라는 말에 뒤이어서 나오는 "다만 제례성에 가서 일본의 군장 등과 만나서 상의할 바를 상의하자"라는 구절로도 명백해진다. 이 정도를 이해하지 못할 사람은 없다. 그러나 무리하게 일본이 핵심 세력이 백제 출신이라는 주장을 하려다 보니까 이런 해석을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런 무리한 주장이 일본 학계가 우리 학계를 깔보는 원인이기도 하다. (129~130쪽)

 

 

[출처] 백제 부흥운동과 일본의 지원|작성자 gustk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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