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애차(無碍茶)의 현대적 행다법* A Modern Approach to the Muae Tea 김정신**.전재분***
1) <목 차> Ⅰ. 서 론 Ⅱ. 본 론 2.1 무애사상과 무애차 2.2 농차의 기원 2.3 무애차의 행다 Ⅲ. 결론 및 제언 참고문헌
Abstract 국문 요약 : 무애사상(無碍思想)은 권력에 편입해 권모술수를 일삼는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통 받는 민생의 짐을 덜어주고자 고뇌하다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로부터 기원한다. 남을 원망하는 마음을 달래고, 고단하고 시련에 찬 삶을 스스로 위로하도록 배려했던 무애행(無碍行) 이기도 하였다. 이는 여러 사람이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는 무애차(無碍茶)로도 발전시켰는데, 마시는 순서나 격식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사발 하나로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누어 마시면서 서로의 불신을 없애 마음이 하나가 되고 서로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삼국시대 떡차를 맷돌에 갈아서 거친 가루차를 돌솥에 넣어 끓여 찻잔이나 차완에 나누어 따라 마시는 팽다법으로 시작하여, 고려시대 광종(949~975) 재위 시절 차를 직접 다연에 갈아 탕수를 부어 진하게 갠 후 헌다를 했다는 기록에 따라 말차와 말차의 농도를 진하게 하여 마신 농차의 기록이 있다. 이는 임진란 이후 쇠퇴하여 현대에 들어서서 “농차”라는 이름으로 일본으로부터 재 유입되고 있다.
일본문화로 이해되고 있는 농차 또한 역사적 기원을 보면 원효대사의 무애사상을 흠모했던 일본 승려들에 의해 실행되고 발전된 것으로서 역수입되고 있는 우리네 차문화에 대해 아쉬움을 금치 못한다. 이에 원효대사의 무애사상을 근간으로 한 의미를 재해석하고, 무애차와 결합된 농차를 현대적으로 접목 하여 시도함으로써 한국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이어나가야 하겠다. 이에 현재 일본 농차는 원효의 무애사상에서 비롯된 무애차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살펴보고, 차를 큰 찻그릇에 우려서 모두 함께 나누어 마시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 만인평등의 사상을 나타내는 무애차 행 다례를 정립하고자 하였으며 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농차의 발전과정을 거슬러 살펴본 결과 일본 농차의 뿌리는 원효의 무애차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원효의 무애사상을 받아들였던 일본승려들에 의해 세이다이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의 마음을 감싸주고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의 짐을 덜어주고자 고뇌하며 얻어낸 원효의 무애사상은 깨달음과 나눔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되어있다. 참다운 깨달음은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나며, 이를 위해 원효는 무애무, 무애가, 무애차 를 만들었다.
3. 무애행으로서 무애차의 주요 초점은 여러 사람이 다함께 하나의 큰 찻사발을 돌려가며 차를 나누어 마시며 즐기는데 있다. 즉 누구나 차를 마시고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평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무애차 행다 모형 개발을 위하여 큰 찻사발 하나를 두고 모두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합하는 과정을 포함시켰다. 일본 농차의 기원을 살펴보고 무애차를 현대에 맞도록 실행할 수 있도록 무애차 행다의 모형을 개발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그동안 단절되었던 다양한 우리 차문화의 뿌리를 찾아내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의 내면세계 즉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근래 우리 차문화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토대로 그동안 외형적인데 치우쳤던 차예절 교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외국차의 범람과 이로 인한 문화적 종속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넷째, 최근 세계적으로 인류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녹색성장추진전략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차문화에 대한 제도적 교육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차 전문분야별 표준교육과정개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키워드: 원효, 무애사상, 무애행, 무애차.
Ⅰ. 서 론
예(禮)의 정신이 들어있지 않는 차(茶)는 음료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마시는 자체뿐만 아니라 그 행위와, 행위를 이끄는 사상까지도 소중한 정신문화이기 때문에 차문화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문화는 역사적인 발현과 함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형되기도 하며, 사회 구성원의 공감을 형성하여 공유되고 흡수된다. 따라서 조상의 역사를 알고, 이해하며, 발전시키려는 노력은 결국 나의 뿌리를 찾고 나아가 새로운 문화 창조를 위한 근 간이 될 수 있다.
차(茶)를 통해 우리 조상은 예(禮)와 효(孝), 정성의 소통방법, 그리고 삼감(愼) 및 절제(節制)를 가르쳤다. 오랜 역사와 함께 한 우리의 차문화는 높은 평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국난과 어려운 경제상황 속에서 부분적으로 역사가 왜곡되거나 그 정신이 잊히기도 하였다. 이렇듯 차를 통해 정신적 가치를 가르쳤던 우리의 차문화는 몇 차례 혹독한 시련기를 거치면서 단절되었다. 근래에 우리 차문화가 다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아직은 우리 고유의 정서나 문화를 온전히 담아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떠밀려 다니고 있는 실정이며 과거 우리 조상들이 차에 담아내려했던 우리 고유의 정신적 가치와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효대사의 무애사상(無碍思想)을 바탕으로 한 무애무(無碍舞), 무애가(無碍歌), 무애차(無碍茶)이다. 한 그릇에 담긴 밥을 함께 먹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여러 사람이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게 된 무애차(無碍茶)는 서로의 불신을 없애고 마음이 하나 되어 서로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이러한 원효대사의 무애사상은 이를 흠모했던 일본 승려들에 의해 받아들여졌으며 이후 대표적인 일본차문화로 실행되고 발전된 일본 농차의 역사적 뿌리가 된 것이다. 이에 일본 농차와 무애차과의 관계를 재정립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우고 소중한 정신문화인 차문화를 되살리며, 원효대사의 만인평등의 의식을 기초로 한 현대에 적합한 무애차 행다법을 개발 제시함으로서 한국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이어가고자 하는 것이 이 연구의 목적이다.
Ⅱ. 본 론
2.1. 무애사상과 무애차 무애(無碍)란 공평하며 사사로움이 없는 마음으로, 아무런 거리낌도 없는 자유로운 삶을 이야기한다. 역사적으로는 권력에 편입해 권모술수를 일삼는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고, 고통 받는 민생의 짐을 덜어주고자 고뇌하다가 깨달음을 얻은 원효의 무애사상(無碍思想)을 의미하기도 한다.
원효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라는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을 살면서 어리석은 인간들에게 인간의 진정한 해탈과 자유의 모습이 어떠한가를 무수한 저서를 통해(100여부 240여권 중 20부 22권만이현존한다) 이론적으로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참다운 인간 삶의 모습을 온몸으로 보여주었다. 그 것이 바로 그의 일심(一心)과 화쟁(和諍)과 무애로 표현되는 일관된 삶의 모습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는 마음의 세계로서의 일심과 마음의 통일방법으로서의 화쟁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으로서의 무애를 통해 시대와 민족, 종교의 울타리를 뛰어 넘는 보편성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고영섭, 1997). 그는 왕실중심의 귀족화된 불교를 민중불교로 바꾸어 놓음으로써 누구라도 불교를 믿고 부처님을 따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의 사생활에도 잘 나타 나고 있다. 그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쉽게 전하기 위해 광대들의 큰박을 본 딴 무애박을 만들어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무애가를 지어 전쟁의 고통 속에서 증오와 저주로 가득 찬 민중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원망과 저주의 말 대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노래 부르게 하였으며, 아무런 걸림이 없다는 뜻의 무애무를 추며 다녔다. 즉 경전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자기마음을 정화하는 시간을 갖도록 무애행을 실천하였다. 대중과 함께한 원효의 이러한 삶은 당대 사상적 과제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풀어낸 한 지침이었으며, 이는 원효가 사상과 행동의 자유인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원효가 보여준 무애는 해탈한 자의 소박한 모습이었으며, 소유와 집착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인의 모습이었다. 어떠한 명예나 계율이나 지식이나 권위로부터도 자유로운 모습이었다. 그는 무애행을 통해 일심과 화쟁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모습은 한 없이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무애를 통해 모든 욕망을 버리고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고영섭, 1997). 그는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았으며, 오히려“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圓融)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바다와 같이 평등하여 차별상이 없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 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았고, 스스로도 철저한 자유인이 될 수 있었으며, 그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일승과 일심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밖에도 원효는 여래장사상 등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서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한 그릇에 담긴 밥을 함께 먹는 것과 같은 삶을 실천하고, 여러 사람이 함께 차를 나누어 마시는 무애차(無碍茶)로도 발전시켰다. 이는 마 시는 순서나 격식이 꼭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며 사발 하나로 여러 사람이 함께 나눠 마시면서 서로의 불신을 없애 마음이 하나가 되고 서로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일본의 농차는 무애행위의 무애사상과 말차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독특한 다법이다. 7세기 신라의 승려 원효대사가 염불과 함께 한 그릇의 물이나 차를 돌려 마셨던 행위 즉, 무애차에서 비롯되었다. 일본 화엄학의 집대성자이며 일본차의 시조인 명혜상인(明慧上人)은 화엄공부를 하던 중 신라의 승려였던 원효를 알게 되면서 그를 성인으로 받들게 되었으며, 전쟁으로 타락한 일본 불교를 중흥시키기 위해 그가 저술한 6권의 ..화엄연기회권(華嚴緣起繪券).. 중 두 권에 원효의 생애 와 사상을 적고 그려서 남겼다. 명혜상인은 타락한 일본 스님들 보다는 청정한 신라스님들을 모델로 하여 일본불교를 중흥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명혜상인의 원효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제자 예존상인(叡尊上人)을 통해 보다 실천적으로 일본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0년 정변으로 세이다이사(西大寺)가 파괴되었을 때 명혜상인에게 무애사상을 배운 예존상인은 이 곳을 재건하면서 불우한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운동을 펼쳤다. 그는 남을 배려하는 정신을 가르 치기 위하여 죽을 끓이고 큰 그릇에 퍼 담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게 하였는데 이때부터 한 그 릇에 담긴 죽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먹는 풍습이 생겨났다.
그 후 1239년 세이다이사에서 법회가 끝난 뒤 하치만궁(八幡宮)에서 제사를 지내며 차를 올렸다. 제사에 올랐던 차는 약으로 썼는데, 이때부터 절 주위에 사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서 그 차를 나누어 마시는 전통이 생겨났다. 큰 그릇에 담긴 차를 한 모금씩 돌려 마시는 이 의식은 예존상인이 실천했던 죽을 나누어 먹는 행사에서 기원한 것이다. 예존상인이 스승에게 배운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 후 세이다이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한 그릇에 담긴 차를 나누어 마시면서 평등과 건 강과 평화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 이러한 세이다이사(西大寺)의 차 돌려 마시기는 원효가 경주의 거지들과 함께 살면서 실천했던 무애차에서 비롯된 것이다(정동주, 2003). 이렇게 한 그릇의 물이나 차를 돌려가며 마시는 원효의 무애차와 무애사상은 우리나라에서는 그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지만 일본에 전래되어 일본 ‘농차’의 기원이 되었다.
일본 정토종을 창시한 법연상인(法然上人)도 원효의 ..유심안락도(唯心安樂圖)..에 영향을 받았 다. ..유심안락도..는 원효가 정토사상 즉 극락왕생 의 길을 자세하게 밝힌 책으로 현존하는 국내 문헌에서는 그 이름을 찾아볼 수 없고 ..고산사성교목록(高山寺聖敎目錄)..이나 ..부상장외현존목록(扶桑藏外現存目錄)..과 같은 일본문헌에만 기록되어 있으며 가장 오래된 필사본은 일본 내영원여래장에 간직되어 있다. 법연상인은 난세에 지친 무사들과 살아갈 의욕을 상실한 서민들을 위하여 원효의 무애사상을 펼쳐보였다. 즉 ‘나무아미타불’이란 여섯 글자만 열심히 암송하면 죽어 극락정토에서 왕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단 순하면서도 커다란 위안을 주는 원효의 ‘염불’을 내세운 정토종은 일본 사회를 크게 변화시켰다. 원효의 무애행이 시련에 찬 서민들을 위로해주고, 서로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 송두리째 일본으로 옮겨가 일본화 된 조선의 도자기문화와 다도의 원류가 된 조선의 불교문화, 소박하고 자연미가 살아있는 조선 서민의 주거문화는 한 세기에 걸친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다양한 체험에 의해서 조금씩 묻어 들어가 점진적으로 ‘초암차’로 완성되었고, 오늘날 ‘다도’라는 일본문화의 정수로 자리 잡았다.
초암차를 창시하고 완성한 일본다도의 스승은 모든 것은 모든 것과 연관되어 있다는 불교철학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실천되는 증거이며, 무소유정신의 생활화인 발우공양이 지닌 지극한 생명 사상을 받아들여 당시 일본의 문제였던 서원차의 폐단을 타파하고자 하였다. 당시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의 형편을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무사와 귀족들이 궁궐처럼 크고 호화롭게 지은 차실에 수백 명의 손님을 초대하며, 금은보화와 비단으로 치장하고 값비싼 차완을 가져와 경쟁하듯 뽐내는 그릇된 차문화의 폐단을 바로잡아야 할 필요성을 인식한 것은 일본의 차인들이었다. 그러나 그 필요성을 충족시킨 조건 대부분은 일본에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으며, 조선과의 오랜 교류를 통해 마련될 수 있었다.
초암차를 완성하고 다도를 확립시킨 센노 리큐(千利休)의 다도이념은 다도란 원래 부처를 섬기는 승려의 업을 세속인이 모방한 것이므로 주인이나 손님이 다 같이 정성을 다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하며, 부처의 은혜가 만인에게 평등하게 베풀어지듯이 어떤 차별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었다(정동주, 2003). 오다 노부나가는 초암차 완성자인 센노 리큐로부터 농차를 배우고 그 정신을 실천함으로써 일본의 모순을 극복하면서 통일의 단초를 열었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통일이 달성되어 오늘날 일본이 태어나는 초석을 만들었다. 즉 긴 세월을 거치면서 원효의 무애사상은 <그림 1>과 같이 센노 리큐에 의해 재발견.재해석되어 농차로 실행되었다. 정적의 차에 독약을 넣어 독살하는 일이 빈번했던 시대에 큰 그릇 안에 차를 담아 정권자인 오다 노부나가가 먼저 마신 다음 돌려가면서 함께 차를 마시는 행위는 차회에 참석한 관료들 을 편안하게 하고 모든 차인이 평등하다고 느끼게 하는 다법으로 신뢰와 존경을 얻도록 하는 역사적 사건을 마련하였던 것이다. 이렇듯 농차는 신라인의 삶과 원효의 무애사상을 근간으로, 이도차완이라는 조선시대의 그릇에다가 인간의 평등을 향한 이상, 생명존중 사상을 담아 완성되어 일본 “농차”의 기원이 되었다.
2.2 농차(濃茶)의 기원
말차란 차를 미세한 분말로 만들어 차완에 넣고 탕수를 부어 차선으로 저어서 희석하여 마시는 것인데, 고려의 점다법이나 조선의 점다법이 전통적인 말차에 속한다. 떡차를 맷돌에 갈아서 만든 말차(抹茶), 잎차를 갈아서 만든 말차(末茶), 끓여 놓은 차, 포말상태의 차, 물차의 의미를 지닌 말차(沫茶) 등의 다양한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가루차라고 하며 거품을 내어 마시는 일본식 말차도 이에 속한다.
우리나라 말차는 삼국시대 떡차를 맷돌에 갈아서 거친 가루차를 돌솥에 넣어 끓여 찻잔이나 차완에 나누어 따라 마시는 팽다법이 시초가 되는데, 그 사례는 원효대사의 원효방 일화와 쌍계사 진감국사 비문에 드러나 있다. ..속동문선(續東文選).. 66권에 있는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에서 이규보가 원효방(元曉房)에 들른 감회를 읊은 시에 “원효께 차를 드리려 했으나 물이 없어 난감하였다 (欲試茶進曉公)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이미 차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신라 때 최치원이 쓴 .진감국사대공탑비.에 보면 차를 뜻하는 “명(茗) 이라는 글자가 나오며, “중국차(漢茗)를 가루로 내지 않고 그대로 돌솥에 달였다”는 것으로 보아 세속에서는 가루차를 많이 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점다법이 행해졌는데, 대각국사가 송나라 황실에서 용봉단차를 하사받아 끓여 마시는 것으로 시작하여 무인정치에서 밀려난 문인들에 의해 차와 시를 접목시킨 차문화가 발전되었다고 하였다(석용운, 2002a). ..고려사절요.. 권2에 나온 성종 원년(982) 6월에 최승로가 올린 상소에는 시무28조가 있는데 그 중 2조에 보면 “듣건데 성상께서 공덕재를 설치하여 혹은 친히 차를 맷돌에 갈기도 하고, 혹은 보리도 친히 간다 하오니, 신은 성체의 근로하심을 깊이 애석하게 여깁니다. 이런 폐단이 광종(949~975)때부터 시작되었으니”하였다. 성종은 이를 가납하여 그 이후로는 공덕재에 올리는 차를 신하들이 만들어 올리도록 하였으며, 차를 직접 맷돌에 갈아 탕수를 부어 진하게 갠 후 헌다를 했다고도 문헌에 전하는데 차는 여민(黎民)들뿐 아니라 사대가에서도 감히 쉽게 접할 수 없었을 정도로 귀히 여겨졌던 것으로 나라에 공물로 바치거나 국가 간에 오갔던 패물에 담겼던 귀한 물건(貴物)이었다. 그런 귀물을 탕수에 엷게 우린 것도 아니고 진하게 개어 헌다했다는 것은 그 정성이 극진하고도 지극함을 의미하였다. 조선시대 들어서 관인들이나 고려 유신들이 은둔하며 차를 마셨으나 임진란 이후 쇠퇴하여 현대에는 오히려 일본으로부터 재 유입 된 잎차, 말차 및 행다법을 모방하고 있다.
농차(濃茶)는 말 그대로 가루차를 진하게 마시는 차이다. “농(濃)”자의 사전적 뜻을 살펴보면 ‘단순히 색이 짙다’, ‘맛이 짙다’의 의미와 더불어 ‘(정이) 도탑다’, ‘이슬이 많다’, ‘우거지다’, ‘무성 하다’, ‘태도나 행동의 정도가 깊다’ 등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런 뜻을 담은 농차(濃茶)는 단순히 차의 양을 많이 하여 진하게 마시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성과 공경의 지극함과 끈끈한 정과 함께한다는 신의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일본 다도에서는 가루로 만든 차를 마시는 방법을 농차라 부른다. 찻가루를 더운물에 타면 짙은 녹색이 되는 것을 두고 부르는 이름이기도 하고, 차를 마시는 특별한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농차는 앞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신라의 원효대사가 즐겼던 무애차에서 비롯된 것이다(정동주, 2003).
2.3. 무애차의 행다(行茶)
차를 우리고 마실 때에는 예절이 필요하다. 원효의 무애차를 현대에 되살린다면서 무슨 절차와 형식이 필요한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으나 권위나 위엄으로 치장하고 인위적으로 지어낸 것이 아닌, 차가 지닌 자연과 인간의 내면세계가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예절, 즉 지키고 구속될수록 자유를 얻게 되는 예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진정한 차예절이란 수행자가 계율의 불편함, 까다로움, 두려움을 잊고 그것을 방편으로 부처의 길로 들어서는 것과 같이 엄격한 차예절을 따름으로써 스스로 형식으로 들어가 형식을 잊어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동주(2003)는 차예절은 불변의 차 정신을 변화하는 흐름에 맞춰 새롭게 발견해내는 지혜라 하면서, 부귀비천의 차별 없이 누구든 한 사람의 온전한 인격을 지닌 인간으로 대우하는 마음으로 모든 사람에게 차를 베푸는 것, 이해관계나 물질적 소유의 크기로 사람을 나누지 않고 알뜰하게 섬기는 것, 그리고 남보다 앞서려고 하지 않는 마음 즉 겸손이라는 세 가지 덕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 즉 억지나 과장이 아닌 저절로 나는 마음을 따르는 것이 차예절 이듯 좋은 차는 누구하고도 편안하게 마실 수 있어서 자유롭고 기쁜 마음이 생겨나는 것이다.
행다란 차를 마실 때 행하는 차 다루는 법, 이에 수반되는 예절, 그리고 그 분위기 까지를 포함하는 것으로, 차의 품성에 맞추어 차 고유의 맛을 내는데 정성을 들이며, 나와 남을 구별하지 않고 분수에 맞는 넉넉함이 있으며, 물과 불, 차와 차도구, 손님과 주인이 어우러져 동선이 간결하고, 가장됨이 없는 것이다.
본 연구에서 말하는 무애차의 행다법은 큰 찻사발에 가루차를 넣고 정성을 다하여 함께 저어가면서 차의 깊은 빛깔을 감상하고 차의 향을 음향하며 찻사발을 돌려가며 차의 맛을 음미하고 연이어 몇 차례 차를 나누어 마실 때 마다 다양한 색과 향, 맛 그리고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오랜 시간 같은 스승을 모시고 가르침을 받은 동사동문(同師同門)이나 뜻을 함께 하는 지우(志友)들이 함께 둘러 앉아 그 가르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고 앞으로의 결의를 다지며 차를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
2.3.1 준비물(5인 기준) 큰 찻사발, 찻잔(나눔잔용, 꽃찻잔용) 5개씩, 차호, 다과그릇 2개, 농이(濃飴)그릇 2개, 표자, 표자받침, 탕병(온수용, 냉수용), 차선, 차선대, 떡살, 차시, 송화시, 꿀시, 꽃집게, 시(匙)받침, 송화합, 꿀합, 대추말이합, 가루차, 송화, 꿀, 꽃(매화), 다건, 다과류, 얼음.
2.3.2 차도구 및 재료의 배열 차도구 및 재료의 배열은 아래 <그림 2>와 같다.
2.3.3 차 우리는 방법
2.3.3.1 예(禮) ① 예(禮)를 한다. 오순완의 의미는 먼저 다섯이라는 숫자를 뜻하는 한자 오(五)가 하늘과 땅이 양과 음을 만들어 오행(五行: 金, 木, 水, 火, 土)이 상생한다는 의미에서 찾을 수 있으며, 둘째는 자연의 방향인 오른쪽으로 차선을 휘저으면서 다섯 사람이 각각 저을 때마다 나타나는 농차의 변화를 느끼고 즐긴다는 데에서 찾을 수 있다.
2.3.3.2 일순완(一巡碗) 일순완은 무겁고 경건한 분위기로서 일순완에 서 천지인(天地人)을 찍는 것은 자연과 인간이 합일하며 깨달음을 향하는 우리의 차문화정신의 바탕을 찾는다는 의미가 있다.
① 가루차 15g(1인 3g)을 큰 찻사발 가운데에 넣는다. ② 탕수 100㏄를 큰 찻사발의 벽을 타고 흐르도록 천천히 따른다. ③ 차선으로 천, 지, 인을 생각하면서 세 번의 격식을 갖춘다. ④ 덩이차가 풀리면 5명이 5분씩 시계방향으로 25분정도 돌리며 휘젓는다.
.첫 번째: 잔거품이 많으며 가벼운 느낌 .두 번째: 잔거품이 잦아들고 부드러운 느낌 .세 번째: 윤기가 나기 시작하며 걸쭉해지는 느낌. .네 번째: 진한 윤기와 향이 오르고 좀 더 묵직한 느낌. .다섯 번째: 차와 탕수가 완전히 융화되어 거울처럼 윤택해져서 부드럽고 매끄러운 농차가 된다.
⑤ 마지막 젓는 사람은 크고 작게 원을 그려가며 완성된 농차를 정리한다. ⑥ 차를 마신다. .어른부터 큰 찻사발을 정성껏 받쳐 들고 한모금씩 돌아가며 마시면 5장의 차 꽃잎이 완성된다(함께 감상하며 무애차를 마음에 새긴다). ⑦ 큰 찻사발에 남아 있는 농차는 꽃잎이 다치지 않도록 농이그릇에 덜어 다과 소스로 활용한다.
2.3.3.3 이순완(二巡.) 이순완은 일순완에서 농차의 진한 맛, 농후한 맛, 끈끈한 맛을 느낀 후 송화와 꿀을 첨가하여 달콤하고 아름답고 부드러운 차의 또 다른 맛과 멋을 느끼며 함께 즐기는 과정이다. ① 큰 찻사발에 꿀 3 티스푼을 넣고 250㏄의 온수를 차 꽃이 흩어지지 않도록 중앙에 천천히 따른다. ② 차선으로 꿀과 온수가 잘 섞이도록 오른쪽으로 휘젓는다. ③ 송화가루 3g을 넣고 표자로 잘 저어 준 후 나눔 잔에 두 번에 걸쳐 따른다. ④ 대추말이를 노란 송화가 떠 있는 잔 위에 띄운다. ⑤ 푸른차 위에 노란 송화. 빨간 대추말이 꽃을 감상하며 마신다. 꿀의 단맛이 농차의 맛을 더해 준다. ⑥ 다과에 농이(濃飴)를 찍어 먹는다.
2.3.3.4 삼순완(三巡碗) 삼순완은 계절에 따라 여름에는 냉수를 사용함으로써 시원한 마음분위기를, 겨울에는 온수를 사용함으로써 따뜻한 마음분위기를 만들어 계절에 맞는 멋과 맛을 함께 느끼며 즐기는 과정이다. ① 큰 찻사발 중앙에 얼음냉수 250㏄를 천천히 따른다. ② 차선으로 꽃잎모양의 농차를 멋스럽게 녹여 냉수와 섞이도록 저어준다. ③ 나눔 잔에 나누어 따른다. ④ 시원하고 깔끔한 차의 여운을 느끼며 차를 마신다.
2.3.3.5 사순완(四巡碗) 사순완은 꽃의 향기와 함께 하면서 겉으로 나는 향기뿐만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내면의 향기와 소리, 빛 까지도 느끼며 함께하는 과정이다. ① 큰 찻사발 중앙에 온수 150㏄를 천천히 따른다. ② 차선으로 차 꽃잎이 조금만 섞이도록 휘저은 후 꽃 찻잔(흑유)에 나눠 따른다. ③ 꽃(매화 혹은 계절 꽃)을 찻잔에 띄운다. ④ 꽃 향을 만끽하며 차를 마신다.
2.3.3.6 오순완(五巡碗) 오순완은 자연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자연이 되는 것 즉 사치하지도 누추하지도 않게 정갈하고 담박한 차인의 찻자리로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① 계절에 맞는 냉.온수를 큰 찻사발에 250㏄ 따른다. ② 차선으로 꽃잎농차를 서서히 지워가며 저어 준다. ③ 맑고 개운한 끝 맛을 즐긴다.
2.3.3.7 예 ① 예로써 마무리 한다.
Ⅳ. 결론 및 제언
차문화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의 생활 속에 깊숙이 자리하여 왔으며, 우리 조상들은 차 마시는 행위를 통해 친목을 도모하고 내면의 자기성찰의 생활을 체득했다는 것은 이미 많은 문헌에서 입증되어 왔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의 차문화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그 역사가 왜곡되거나 사라져 한중일 삼국중 차문화의 훼손이 가장 심한 것이 현실이다. 최근 우리 차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전통차문화의 뿌리를 찾고자 하는 노력들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차문화는 없다는 말을 들을 만큼 우리의 차문화는 아직 혼돈가운데 있다고 하겠다.
현재 한국 차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일본의 차문화이다. 일본의 차문화는 우리나라에서 유입되었다고는 하나 차문화를 잘 보존하고 사상적 체계를 확립하여 다도라는 명칭으로 일본문화의 대표적 콘텐츠가 되고 있으며 근래에는 이러한 일본 다도가 우리나라에 역수입되어 한국 차문화에 영향을 끼쳐, 현재 소개되고 있는 한국의 차문화는 진정한 한국의 차문화가 아니라 일본 다도의 변형일 뿐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이에 현재 일본 농차는 원효의 무애사상에서 비롯된 무애차에 그 근원을 두고 있음을 살펴보고, 차를 큰 찻 그릇에 우려서 모두 함께 나누어마시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 만인평등의 사상을 나타내는 무애차 행다례를 정립하고자 하였으며그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일본 농차의 발전과정을 거슬러 살펴본 결과 일본 농차의 뿌리는 원효의 무애차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6세기 일본에서는 무사들이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호화로운 차회를 열고 경쟁자들을 초대하였는 데 이 차회가 정적을 제거하는 방법으로 악용되기 시작하였다. 이에 오다 노부나가는 불신으로 가득 찬 무사들의 차회를 혁신할 묘안을 찾던 중 그의 다도 스승인 초암차법을 완성한 센노 리큐로부터 세이다이사의 차 돌려 마시는 풍습에 대해 알게 되어 농차를 실행하게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전쟁으로 인해 분열되고 거칠어진 무사들과 지친 서민들의 마음을 화해시키기 위해 센노 리큐를 다도 선생으로 하여 정치 관료모임에서 찻사발을 돌려가며 나누어 마시는 농차를 실행하였다. 이는 원효의 무애사상을 흠모하여 원효의 사상을 받아들여 ..화엄연기회권.. 6권을 저술하였던 명혜상인의 제자 예존상인이 불우한 이웃을 구제하기위해 한 그릇에 죽을 담아 여러 사람에게 나누어먹게 했던 풍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풍습은 1239년에 하치만 궁에서 제사로 올렸던 차를 절주위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마시게 하였던 풍습으로 이어졌으며 세이다이사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자리 잡아 현대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2) 신라의 삼국통일 전쟁으로 피폐해진 대중들의 마음을 감싸주고 귀족불교의 폐해를 극복하여 고통 받는 중생들의 짐을 덜어주고자 고뇌하며 얻어낸 원효의 무애사상은 깨달음과 나눔이라는 두 개의 축으로 구성 되어있다. 참다운 깨달음은 사회적 실천으로 드러난다. 원효에게 있어 나누지 못하는 깨달음이란 진정한 수행이 길이 아니었다. 그는 참된 수행자란 적나라한 인간의 모습을 통해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삶을 사는 것이라 여기고 그들이 기뻐할 때 더불어 기뻐해주고, 그들이 슬퍼할 때 아픔을 나누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이라고 여기고 이를 위해 무애무, 무애가, 무애차를 만들었다.
3) 무애행으로서 무애차의 주요 초점은 여러사람이 다함께 하나의 큰 찻사발을 돌려가며 차를 나누어 마시며 즐기는데 있다. 즉 누구나 차를 마시고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평 등의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현대사회에 적용할 수 있는 무애차 행다 모형 개발을 위하여 큰 찻사발 하나를 두고 모두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합하는 과정을 포함시켰다. 그러나 개인과 위생을 강조하는 현대 생활에 맞도록 농도가 옅어지는 이순완 부터는 나눔 잔을 활용하도록 하였다. 여러 차례의 차 나눔을 통하여 귀한 차의 아름다운 색과 향과 맛을 처음부터 끝까지 같이 느끼는 시간을 갖도록 하여 참여한 사람들 모두가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하였다. 일순완의 진한 차로부터 마지막의 맑고 개운한 맛의 차까지 서로 나누며 정신적 행복감을 느끼도록 하여 또 다른 질 높은 삶을 누리는 경험에 모두가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일본 농차의 기원을 살펴보고 무애차를 현대에 맞도록 실행할 수 있도록 무애차 행다의 모형을 개발한 결과 다음과 같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첫째, 그동안 단절되었던 다양한 우리 차문화의 뿌리를 찾아내고 이를 학문적으로 체계화시켜야 할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의 내면세계 즉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를 되살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근래 우리 차문화에 대한 냉철한 분석을 토대로 그동안 외형적인데 치우쳤던 차예절 교육이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셋째, 외국차의 범람과 이로 인한 문화적 종속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넷째, 최근 세계적으로 인류의 문화를 바꿀 수 있는 녹색성장추진전략의 하나로 대두되고 있는 차문 화에 대한 제도적 교육이 확대되어야 할 것이다. 다섯째, 차 전문분야별 표준교육과정개발에 대한 연구가 있어야 할 것이다. 즉 차나무의 재배와 제다, 품질관리, 차의 성분과 효능, 그에 따른 새로 운 상품의 개발과 홍보 등의 차의 산업적 분야와 차 예절, 차 음식, 찻그릇 선택과 감상 등의 차의 문화적 분야 등으로 나누어 보다 전문화된 표준교육과정 개발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여섯째, 본 연구에서는 무애행으로서의 무애차의 특성을 살리기 위하여 여러 사람이 하나의 큰 찻사발을 돌려가며 차를 나누어 마시며 즐길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이 개인위생을 중시하는 현대적 정서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농차를 처음부터 나눔 잔에 따르되 하나의 큰 찻사발에 성심을 다해 모두 함께 맛있는 농차를 만들어 가는 과정과 나눔 잔에 따르면서 큰 찻사발 안에 정성껏 차 꽃모양을 만드는 과정을 통해 모두가 서로 마음을 나누고 합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누구나 차를 마시고 즐거움을 추구할 수 있으며 그 안에서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무애차 본래의 평등과 나눔의 의미를 새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무애차의 현대적 행다법.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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