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서연구|다시 읽은 이목의 「다부」

2014. 12. 1. 22:40들꽃다회

 

 

 

 

 

    다서연구|다시 읽은 이목의 「다부」| 喫茶去 (차 마시고 가게)

일행우현 | 조회 66 |추천 0 | 2004.10.04. 12:14

 

다서연구|다시 읽은 이목의 「다부」

다심일여(茶心一如)의 사상

최영성(철학박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1천 3백 12자에 달하는 대서사시(大敍事詩)로 ‘다심일여(茶心一如)’의
사상을 전개하고 있는 「다부」는 한재 이목이 20대에 지은 작품이다.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다부」에 보이는 높은 수준의 경지와
한재의 학문적·정치적 역정(歷程)을 고려할 때, 정조사(正朝使)였던 장인
김수손(金首孫)의 수행원으로 중국 명나라에 들어갔다가 귀국한
1494년(24세) 3월 이후에 지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사행(使行)길에 그는 명나라에서 많은 다서(茶書)를 접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병서(幷序)에서 ‘험기산(驗其産)’이라 한 것을 보면, 명나라에 갔을
당시 차의 명산지 가운데 일부를 직접 답사했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다부」는 문체상으로 보면 문학작품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내용상으로 보면, 단순한 문학작품이 아니고
사상적, 철학적 깊이를 지니고 있다. 또한 크게
머리말과 몸말, 맺음말로 짜여져 논문의 구성과
비슷한 면을 보이고 있다.

    ‘범인지어물(凡人之於物)’로 시작되는 병서에서는
「다부」를 짓게 된 동기와 배경을 간결하면서도
명료하게 적고 있는데 이 대목은 ‘머리말’에 해당된다.


이어 ‘기사왈(其辭曰)’로 시작되는 몸말에서는
① 차의 종류와 이름, ② 차의 명산지, ③ 차의 생육환경
④ 다산(茶山)의 정경(情景), ⑤ 차달이기,
⑥ 일곱 주발의 차노래, ⑦ 차의 다섯 가지 공(五功),
⑧ 차의 여섯 가지 덕(六德)을 싣고 있다.
이는 차에 대한 종합적 고찰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희이가왈(喜而歌曰)’로 시작되는 106자의 차노래가 있는데,
이 차노래는 기실 「다부」의 맺음말로 가장 중요한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다부」는 머리말과 맺음말을
합쳐 모두 열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는 셈이다.
퍽 짜임새 있고 알찬 내용을 갖추었다고 보겠다.
한재는 ‘병서’에서 「다부」의 저술 동기와 배경을
짧으면서도 함축성 있게 서술하였다.
그는 이 글에서 “내가 차에 대해서는 아주 모르지 않았는데,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읽은 뒤부터
차츰 차의 성품을 터특하여 마음 속으로 몹시
진중하게 여겼다”고 술회하면서, 차의 공이 가장
높은데도 이를 칭송하는 이가 없음은 현인(賢人)을
버려두는 것과 같다고 하여, 유가(儒家)의 상덕(尙德)·
존현사상(尊賢思想)과 ‘야무유일(野無遺逸)’의
이상을 넌지시 일깨우고 있다.

   사실, 중국의 경우 진(晉)나라 때 두육(杜育)의
「천부(賦)」가 나온 이래 당나라 때 고황(顧況)의 「다부」,
송나라 때 휘종(徽宗)의 「대관다론(大觀茶論)」과
오숙(吳淑)의 「다부」 등이 있었지만,
당시까지 우리나라에는 단 한편도 없었다.
이로써 볼 때 「다부」의 선구적인 위치는 저절로 드러난다고 하겠다.

    한재는 자신의 차생활을 돌아보면서
처음에는 ‘월호막지지(越乎莫之知)’했다고 하였다.
즉 ‘모르는 상태로 부터 벗어났다’는 말이니 아예
모르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아마도 겸사일 것이다.
이어서 이른바 ‘초득기성(稍得其性), 심심진지(心甚珍之)’라고
한 여덟 글자는 「다부」의 내용을 파악함에 있어
사상적 핵심이 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다부」가 단순히 차를 예찬한 글이 아니고,
한재의 개결(介潔)하고 정행검덕(精行儉德)한
삶과 투철한 인생관, 그리고 학문세계가 반영된,
그야말로 철학적 성격이 짙은 글로 평가받을 수 있는 기반인 셈이다.
송유(宋儒)들이 곧잘 쓰는 말로 ‘팔자타개처(八字打開處)’라 할 수 있다.

   한재는 차의 종류와 이름을 말하면서,
차잎을 기준으로 명(茗)·천(荈)·한(한艸+寒)·파(菠)
네 가지를 들고, 선장(仙掌)·뇌명(雷鳴)으로부터
녹영(綠英)·생황(生黃)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유명한 차 서른 두 가지의 이름을 소개하였다.

 

 


 


   또 ‘혹산혹편(或散或片)’이라 하여 만드는 방법에 따라
잎차와 덩이차로 구분되며, ‘혹양혹음(或陽或陰)’이라
하여 차가 생육하는 장소에 따라 양지와 음지가 있음을 밝혔다.

   한재가 소개한 32개의 차이름은 중국에서 편찬되어
당시 식자들이 애용하였으리라고 짐작되는
백과전서류(百科全書類) 책에 거의 실려 있는 것들이다.
다만, 한재가 잘못 인용한 것인지, 아니면 여러 문헌을
대조, 검토한 끝에 잘못된 것을 바로잡은 것인지는
단언할 수 없으나, 글자의 출입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한재가 산제(山提)·청구(淸口)·쌍계(雙溪)라고
한 것이 다른 책에는 각각 산정(山挺)·청구(靑口)·
쌍승(雙勝)이라고 되어 있는 것이 그런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차의 종류
가운데 한(艸+寒)과 천(荈)을 들고 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석용운(釋龍雲) 스님 등 많은 사람들이
「다부」를 역주하면서 한결같이 ‘꽈리’와 ‘시금치’라고 하였다.
너무 무책임한 해석이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 두 가지는 지금까지의 어떤 문헌에도
보이지 않는 독특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야말로 한재 자신의 삶과 철학을 담아
명명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찍이 육우는 『다경』 「일지원(一之源)」에서,
찻잎을 가리키는 글자의 구성을 보면 초두(艸頭)변,
나무목(木)변을 쓰거나 초두변과
나무목변을 아울러 쓰는 경우가 있다고 하였다.
이 ‘한’과 ‘파’에 초두 변을 붙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艸’변을 뺀 ‘한(寒)’과 ‘파(波)’는 의미는 무엇일까?
역시 한재의 고결한 삶에 비추어 보지 않을 수 없으니,
이는 모진 한파(寒波) 속에서도 능설(凌雪)의 기개로 자라는 차,
또는 ‘백물(百物)에 앞서서 이른 봄을 독차지’하는
차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부」의 말미에서
“내가 세상에 태어남이여! 풍파가 모질구나”(我生世兮, 風波惡)라고
한 것과 연결시켜 볼 때 더욱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이 ‘한’과 ‘파’는 서른 두 가지 차이름 가운데
특히 ‘선춘(先春)’과 ‘조춘(早春)’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한재(寒齋)’라는 호 또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재는 차의 명산지를 말하면서
역시 중국의 명산지만 소개하였다.
이들 지명은 여러 서적을 통해
대부분 확인할 수 있지만 아직까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곳도 없지 않다.
「다부」 연구자들이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명산지를 소개하지 않은 것은 자못 유감이다.
그 이유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당시까지만 하더라도
‘차’하면 곧바로 중국이 연상될 정도였고,
또 우리나라에서는 보편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고국의 산지까지 돌아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한편, 차의 생육환경을 논하는 대목에서는,
차가 매우 험준한 산지에서 구름과 안개 속에
싸여 생장한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여기서 우리는 차의 생육환경을
자신의 험란한 인생역정과 고고(孤高)한 절개로
연결시키려 한 한재의 내면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차가 자라는 산지의 험준함을 묘사한 부분은
장형(張衡)남도부(南都賦)」에서 옮겨 싣다시피 하였다.
남의 글을 인용한 흔적이 두드러지지 않는
다른 대목과 비교할 때 이채롭기까지 하다.
사실 한재는 무엇보다도 부(賦)로써 이름을 날렸고,
그의 ‘부’ 작품은 중국의 저명한 작가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 가운데 장형의 영향은 상당히 컸던 것 같다. 특히
그의 「사현부(思玄賦)」는 한재의 ‘부’ 작품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다부」의 경우에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 표현이 적당할 정도이다.

  「사현부」와 「다부」는 무엇보다도 글의 기조(基調)에
있어서 궤를 같이 한다. 장형은 「사현부」에서
난세에 태어난 자신의 불우한 처지를 한탄하면서,
심적으로나마 그를 위로하려는 생각에서
현허(玄虛)의 세계에 몰입, 유력(遊歷)하다가
종국에는 다시 성현의 가르침으로 돌아와
안심입명(安心立命)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다부」에서 노장(老莊)의 현허지도(玄虛之道)를 말하고
신선의 세계에 노닐면서도, 마침내 유가(儒家)의 가르침으로
돌아와 심학(心學)을 강조하고,
다심일여(茶心一如)’의 철학을 펼치고 있는 것과 같은 논조이다.
한재의 글에는 내면적으로 『장자』의 영향이 상당하다.
그러나 그는 「허실생백부(虛室生白賦)」에서,
자신이 『장자』의 말을 이끌어 유가의 심설(心說)에
비유한 것은 우언(寓言)하려는 의도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있다.


   유가에서 반드시 장자를 배척하는 것은
그 말이 괴이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혹 괴이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성현께서도 반드시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하물며 나 같은 사람임에랴?” (……) 비록
그러하나 장자는 우리 유가의 무리가 아니다.
단지 그 설을 취하여 말을 부쳤으니, 어찌
『대학』에서 이른바 ‘미워하면서도
그 좋은 점을 아는’[惡而知其善] 것이겠는가.

  「다부」가 「사현부」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음은
단적으로 두 글의 기조만 보더라도 분명하다.
여기서 참고로 「사현부」의 말미에 있는
‘계왈(戒曰)’ 이하의 글을 인용, 「다부」의
‘희이가왈(喜而歌曰)’ 이하의 맺음말과 대비(對比)해 보기로 한다.
천지는 유구(悠久)한데 세월은 멈추지 않는다.
나는 황하(黃河)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며 근심에 잠겨 있었다.

 

 


 


그래서 멀리 우주여행을 떠나 마음을 즐겨보려고
제멋대로 위아래를 오르내리면서 천지 사방을 들여다보았다.
하늘로 날아올라 쏘다니면서 세속을 떠나
신(神)처럼 가볍게 춤추면서 하고 싶은 대로 떠돌아 다녔다.
그러나 하늘에 오르는 길은 없었고, 선인이 되었던 사람은 적었다.
『시경』 「백주(柏舟)」편에서도 하늘로 날아갈 수 없음을 한탄하였고
적송자(赤松子)나 왕자교(王子喬)도 너무 높은 곳에 있어 손닿지 않는다.

정신을 하나로 모아 원유(遠遊)하게 하면 마음이 겉돌고만다.
뜻을 제자리로 끌어당겨 되돌아와서 깊은 가르침에 따르도록 하자.
내가 바라는 것만 얻을 수 있다면 무엇을 생각하랴?

 

     - 다음 카페 <윤지환철학연구소 > 일행우현 님의 글 중에서 ....

 

 

 

 

 

 



다시 읽는 이목의 [茶賦]

‘내 마음의 차’로까지 승화시킨 다부



최영성 철학박사 국립 한국전통문화학교 교수

   한재 이목의 [다부]는 초의선사의 [동다송(東茶頌)]보다 3백 년 정도 앞서 나왔고, 분량 면으로도 약 2배 가량 된다.
{한국문집총색인}(陳甲坤 편)을 보면, 한재 이전까지 차와 관련된 글로 [다부]와 같이 짜임새 있고 분량있는 것은 단 한 편도 없다. 초의선사 이전까지 한재의 [다부]가 사실상 유일무이할 것이다. [다부]는 내용의 독창성에 있어서도 중국 진(晉)나라 두육(杜育)의 [천부(茶賦)]라든지 당(唐)나라 고황(顧況)의 [다부], 송(宋)나라 오숙(吳淑)의 [다부]와 비교할 때 단연 그 오른편에 선다고 할 수 있다. 육우(陸羽)의 {다경(茶經)}과 노동(盧仝)의 ‘칠완다가(七椀茶歌)’ 등 중국의 여러 문헌을 빠짐없이 섭렵, 참고한 듯하지만 표현상으로는 완벽에 가깝다고 할 정도로 환골탈태(換骨奪胎)한 기법을 보이고 있다.
이 점은 [초사(楚辭)]에서 [귤송(橘頌)] 한 대목을 이끌어 첫머리를 장식하는 등 여러 참고문헌에서 많은 문구들을 직접, 간접으로 인용한 [동다송]과는 구별된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한재는 점필재 김종직의 문인이다. 김종직의 문하에서는 도학·문장·청담(淸談)·음률(音律) 등 여러 방면으로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이 배출되었다.
김종직의 학문이 ‘사장학(詞章學)’에 머물렀다면 이러한 성황은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김종직은 도학과 문장이 분기(分岐)하기 이전의 인물이다. 김종직 다음 세대에 가서 도학과 문장이 갈라지게 되었음을 생각할 때, 실로 그는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한유(韓愈)와 같은 위치에 있었다’고 하겠다.


   한재는 천부적으로 문장 대수(大手)로서의 자질을 가진 데다가 스승의 영향을 받아 발군(拔群)의 실력을 보였다. 그러나 사화(詞華)만을 일삼았던 학자는 결코 아니었다.
그 역시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추구하였다. 그는 특히 ‘부(賦)’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였으며 상당히 높은 경지에 올랐던 것 같다. ‘부’는 그의 위치를 한껏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와 관련하여 동문인 권오복(權五福)의 평이 눈길을 끈다.

   부는 (한재의) ‘삼도부’에서 끝장나니 뭇 사람에게 전하고
재주와 명성은 ‘좌사 보다 앞섰다’는 데 합치되네.
賦罷三都萬口傳 才名端合左思先

   과평(過評)인 듯한 감이 있지만, 어찌되었든지 한재의 ‘부’가 어떠한 위치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 위에서 말한 좌사(?∼306 전후)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사부(辭賦)로 크게 명성을 날렸던 인물이다. 중국 문학사에서는 육기(陸機)·반악(潘岳) 등과 함께 태강문학(太康文學)을 대표했던 것으로 기술되고 있다. 태강 연간(280∼289)의 문학은 조의(造意)보다 조사(造詞)에 치중했으며, 전반적으로 ‘가볍고 화려한’ 것이 특색이었다.
   권오복이 한재의 부를 ‘좌사보다 앞섰다’고 한 것은 그의 부가 기려(綺麗)하거나 부박(浮薄)한 데 흐르지 않고, 조사(措辭)와 사상적 깊이를 함께 갖추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은 한재의 자술(自述)로도 짐작할 수 있다.

   옛날에 양웅(揚雄)과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부를 잘 지었다.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는 비록 두 사람을 뒤따르지는 못하지만, 역시 당나라 때 글 잘하는 사람이다. 그들이 지은 글은 화려하기만 하고 바르지 못하다(靡而不正). 나 이목은 해외(海外)의 고루한 사람이니 어찌 감히 양웅·사마상여와 같은 여러 군자들에 비유하겠는가 마는, ‘말이 순하고 뜻이 간절함’(言順而義切)이라든지 ‘사특함을 피하고 덕을 사모함’(避邪而慕德) 같은 것이라면 또한 양보하지 않겠다. ([弘文館賦])
   반고(班固)의 [양도부(兩都賦)], 장형(張衡)의 [양경부(兩京賦)], 좌사(左思)의 [삼도부(三都賦)] 등은 기국(氣局)이 툭 트여 넓게 펼쳐졌으며 체세(體勢)가 웅장하고 뛰어나서, 한·위(漢魏) 이래로 지금에 이르기까지 드물게 본다. 천하의 걸작이라고 할 만하다. 그러나 저 후세 사람들이 ‘허망한 속임’이라고 하는 평을 면치 못하였다. 아아! 이 서너 사람은 세상에 다시없는 재주를 가지고 문장을 꾸미는 버릇에 이끌려서, 황류(黃榴)와 백아(白鴉)의 부질없는 속임이 있었으니, 도읍에 대한 글을 짓는 것은 역시 어렵다고 할 것이다. ([三都賦幷序])

   전한 때 ‘부’ 잘 짓기로 유명하여 ‘양·마(揚馬)’로 일컬어졌던 양웅과 사마상여에 대해, 겉껍데기는 누렇고 속은 빨간 석류와 겉은 하얗지만 속이 검은 갈가마귀에 비유하여 평가를 내리고 있다. 여기서 ‘부’에 대한 한재의 입장뿐만 아니라, 그의 학문적 성격의 일단마저 엿볼 수 있다. 한재의 부를 평가할 때 동원될 만한 글귀로는 앞서 나온 ‘어순이의절(語順而義切)’에다 ‘다화이불부(多華而不浮)’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한재문집}에는 9편의 부가 전하고 있다. 이 중에서 [홍문관부(弘文館賦)]와 [삼도부(三都賦)]는 과거 시험의 답안으로 제출된 것이기는 하나 실로 일품(逸品)이요, [다부(茶賦)]와 [허실생백부(虛室生白賦)]는 한재 부작품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여융부(女戎賦)]는 진(晉)나라 헌공(獻公) 때의 고사를 이끌어 총희(寵姬)에 대해 경계할 것을 읊은 것으로 강한 역사의식을 담았다.
   [입춘부(立春賦)]는 ‘건도불식(乾道不息) 사시행의(四時行矣)’라는 말이 시사하듯이 천리유행(天理流行)의 실(實)을 상징법·은유법을 통해 노래하였다. [영주사부(永州蛇賦)]는 유종원(柳宗元)의 [포사자설(捕蛇者說)]을 풀어서 지은 것으로서 애민(愛民)·휼민(恤民) 사상을 밑바탕에 깔았다.
이처럼 한재는 문장을 중시하면서도 그에 매몰되지 않았다. 그저 장구(章句)나 조탁(彫琢)하는 문장가는 아니었고, 반면에 문장의 효용성을 무시했던 학자도 아니었다.


   한재는 김종직 문하에서 문장을 연마하면서 한 때 노장(老莊)의 현허지도(玄虛之道)에도 심취했던 것 같다. 흔히 학자들이 젊었을 때, 또는 문장하는 이들이 노장사상에 심취하는 경향이 많은데, 사람의 흉회(胸懷)를 툭 트이게 하는 거대한 정신세계와 탈불기(超脫不羈)의 초월적 경지는 젊은 학자라든지 문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족하다.
이러한 경향은 한재에게도 보이고 있는데, 그가 노장사상을 좋아하였던 것은 문장, 특히 ‘부’에 뛰어났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부’의 주요한 문학적 기능의 하나는 풍자이다. 현실에서의 시비를 드러내 놓고 말하기 어려우므로 사부(辭賦)를 통해 은근하게 우회적으로 흉중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흥(興)’의 수법으로서, 주로 지배 계층의 사회적 사명감을 표현하는 방법으로 사용되었다.

 

 


   한재의 부는 직설적인 표현도 없지 않지만, 우의적(寓意的) 수법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 많다. 이것은 {장자}로부터 받은 영향이 적지 않다고 본다. {장자}에 [우언(寓言)]편이 있는 것을 생각하면 장자의 영향이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한재는 노장적 개념이나 용어를 빌어서 유학사상을 설명하기도 하고, 때로는 선경(仙境 : 이상경)을 그리워하기도 하였다. ‘(玄)’ 또는 ‘현묘(玄妙)’라는 단어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는 것도 예사롭지는 않다. 전한(前漢) 때 장형(張衡 : 78∼139)이 지은 [사현부(思玄賦)]를 떠올리게 한다. {문선(文選)}에 실린, ‘부’의 표본이 되는 작품들이 대부분 현풍(玄風)을 띠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본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본령은 어디까지나 유학사상에 입각하고 있었으며, 결코 노장의 한계인 ‘광탕현막(曠蕩玄邈)’에 빠지지 않았다. 유학사상을 근본으로 하면서, 노장 가운데 유학사상과 합치되는 부분을 중심으로 하여 선별 수용하였음은 더 말할 나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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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재의 차생활은 먼저 그의 호(號)만 보더라도 짐작할 수 있다. 육우는 [다경]에서 “차의 효능을 보면 성질이 매우 차갑다. 음료로 마심에 있어 정행(精行)과 검덕(儉德)을 지닌 사람이 가장 알맞다”(茶之爲用, 味至寒. 爲飮, 最宜精行儉德之人)고 하였다.
‘한재(寒齋)’라는 호는 아마도 여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또 당시 공다(貢茶)로 인해 민폐(民弊)가 적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사람 탓으로 돌리고, 또 차를 몹시 좋아하는 고질이 있어서 민폐에 대해서는 미처 언급할 겨를이 없었노라고 술회한 것을 보면, 차에 대한 한재의 사랑은 대단했던 것 같다.
   이와 함께 한재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유교식 제사를 지내면서 제사 순서 가운데 ‘철갱진수(撤羹進水)’를 ‘철갱봉다(撤羹奉茶)’ 바꾸어 행해 왔다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보면, 한재의 집안 역시 ‘차’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차와의 인연이 이러하였던 만큼 한재가 [다부]를 지었음은 우연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재의 [다부]는 그의 문학작품 중에서도 진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학사상과 노장사상이 혼융무애(混融無碍) 잘 어우러져 있으면서도 끝내 유학사상에 입각하여 끝을 맺고 있으며, 불교사상과 관련된 대목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특징이다.
   [다부]에서는 차의 성질과 공덕에 대해 칭송하고 있는데, 차의 성질은 유가의 선비기질과 통하는 바 적지 않다. {다경}에서 옮겨심기가 무척 어려운 것이 차나무라고 한 것은, 유자(儒者)의 입장에서 선비의 지조와 절개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다부] 병서에서 “{다경}을 읽고 차의 성질을 차츰 터특하면서 마음속으로 몹시 진중하게 여겼다”고 하여, 차의 ‘맛’이라든지 차생활을 통한 ‘즐거움’과 ‘멋’보다도 차의 성질에 주목한 것은 한재의 실천적 절의 사상과 직결된다고 할 것이다.

   근년에 이기윤 씨는 {소설 한국의 차문화}(1998)라는 책을 통해 한재와 [다부]에 대해 논한 바 있다. 결론적으로는 폄하하는 내용이다. ‘소설’이라는 전제가 있는 만큼 간과할 수도 있겠으나, 이 책의 내용이 사계(斯界)에 미칠 악영향을 생각할 때 시비를 가리지 않을 수 없다.

    이씨는 절의를 지키기다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사생취의(捨生取義)한 한재를 두고 “강하면 부러진다는 속담은 한재를 두고 한 말과 같다”고 하였다. 과연 후학의 입장에서 이런 속담 류의 말로써 선유(先儒)의 거룩한 생애를 뭉뚱그릴 수 있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지식인이 언행(言行)에 신중을 기해야 함을 절감하게 된다. 이씨는 또 [다부]에 대해서도 “한재의 글에는 낯선 것이 많다. 문체 또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노숙한 흠이 있다. 그의 상식은 독서에 바탕한 것이요 [다부]는 글재주의 발휘일 뿐이다.
얼마간 차생활을 했겠지만 노래로 표현된 그의 다론(茶論)은 크게 깊이를 갖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101면∼102면)고 하였다. 자기의 공부가 일천(日淺)한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선대 학자가 고심을 거듭하여 애써 지은 득의작(得意作)에 대해 ‘글재주의 발휘일 뿐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차라리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된다.

    한재가 남긴 글들을 보면 그는 학문적으로 무척 조숙한 사람이다. 실로 천재라 이를 만하다. 일찍 익은 열매의 꼭지가 빨리 떨어지듯 천재는 대개 요절하는 경우가 많다.
천재는 짧은 생애 동안에 숙명적으로 자기 천분(天分)의 절정에 빨리 도달하기 때문에, 오래 산다고 해서 더 나올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재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문체에 노숙한 흠이 있다고 하면서, 이것을 경륜이 뒷받침되지 않은 문자치레요 글재주에 불과한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 이씨의 처사는 현대인의 성급함을 그대로 드러낸 것 같아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 마디로 한재의 ‘부’ 작품에 대한 몰이해에다 [다부]가 갖는 가치와 역사적 위치에 대한 폄하가 도를 넘어섰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묻는다. 차에 대해 문외한인 처지에서 과연 오공육덕(五功六德)을 논하고, 더욱이 ‘내 마음의 차’로까지 승화시키는 것이 가능할까. 또 글재주가 있다 해서 [다부]처럼 사상성과 짜임새를 갖춘 글을 지을 수 있을까. [다부] 병서에서 ‘考其名, 驗其産, 上下其品’이라 한 대목을 음미하라. 여기서 ‘험(驗)’자는 실지 시험해 보았다는 뜻이다.
[다부]가 그저 책상물림의 머릿속에서 소설 엮듯 나온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할 것이다.

 

 

 

[스크랩] [茶詩] 한재(寒齋) 이목(李穆) 다부(茶賦) 『茶 일곱 잔의 의미』| …-아름다운글

길상심 | 조회 19 |추천 0 | 2008.03.17. 21:20

 
      다음카페:가장행복한공부 한재(寒齋) 이목(李穆)다부(茶賦) 『茶 일곱 잔의 의미』 俄自笑而自酌 亂雙眸之明滅 (아자소이자작 난쌍모지명멸) 때 맞춰 웃음 띄고 혼자 따라 마시니 흐렸던 눈이 맑아지네. 於以能輕身者 非上品耶 能掃痾者 非中品耶 (어이능경신자 비상품야 능소아자 비중품야) 여기에 몸을 가볍게 할 수 있으니 어찌 상품이 아니며 병을 없애 주니 중품이 아니며 能慰悶者 非次品耶 (능위민자 비차품야) 마음이 번잡한 것을 달래주니 次品이 아니겠는가! 乃把一瓢 露雙脚陋 白石之煮擬 金丹之熟 (내파일표 노쌍각누 백석지자의 금단지숙) 茶 한 잔을 마시니 메말랐던 창자가 물로 깨끗이 씻어낸 듯하고 啜盡一椀 枯腸沃雪 啜盡二椀 爽魂欲仙 (철진일완 고장옥설 철진이완 상혼욕선) 두 잔을 마시니 전신이 상쾌하여 신선이 된 듯하고 其三椀也 病骨頭風痊 (기삼완야 병골두풍전) 세잔을 마시면 병골에서 깨어나 두통이 없어지네. 其四椀也 雄豪發 憂忿空 (기사완야 웅호발 우분공) 네잔 째는 웅장 호방함이 일어나 근심과 분노가 없어지니 其五椀也 色魔驚遁 餐尸盲聾 (기오완야 색마경둔 찬시맹롱) 그 다섯째 잔을 마시니 색마도 도망가고 찬시 같던 식욕도 사라지네. 其六椀也 方寸日月 萬類籧篨 (기육완야 방촌일월 만류거저) 여섯째 잔을 마시니 해와 달이 내 마음 속에 있고 모든 사물은 버석거리는 거적데기에 불과하네. 何七椀之未半 鬱淸風之生襟 (하칠완지미반 울청풍지생금) 어이하여 일곱째 잔은 반도 안 마셔 울금향 같은 맑은 차향이 옷깃에 이네. 「다부(茶賦)」는 한재(寒齋) 이목(李穆, 1471~1498)선생이 지은 우리나라 최초의 다서(茶書)이다. 저술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약 1495년경으로 추정(推定)된다. 차에 대한 내용을 찬술하였으니 다서이지만, 평기식 문장이 아닌 시가(詩歌)로 되어있다. 이목 선생은 14세에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 선생의 제자가 되었고 24세(1494. 3)에는 정조사로 명나라에 가는 장인어른 김수손(金首孫)을 따라 다녀왔다. 이듬해에 다부를 찬술한 것으로 보인다. 28세에는 무오사화(戊午士禍, 燕山君 4年, 1498)에 휘말려 사형을 당하게 된다. 다부의 내용은 대서사시가(大敍事詩歌)로 무려 1,312字나 된다. 이것은 한재집(寒齋集) 상권(上卷) ‘부(賦)’8편 중 ‘다부(茶賦)’라는 제목으로 실려있다. 물론 한재집은 2권 1책으로 되어 있는데, 후손들이 간행한 것이다. 육우 「다경(茶經)」, 마단림(馬端臨) 「문헌통고(文獻通考)」(1319), 모문석(毛文錫) 「다보(茶譜)」(935년경), 장형(張衡, 78~139) 「사현부(思玄賦)」 등을 참고하여 찬술하였고 아쉽게도 내용은 모두 中國을 背景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시가의 구성을 살펴보면 ① 序歌(稟性․爲賦動機) ② 茶種歌(36種) ③ 生長歌(生長地 28個所) ④ 採茶歌(茶葉模樣, 採茶) ⑤ 煮茶歌(湯辨․啜茶․品茶) ⑥ 七效歌(七椀茶歌) ⑦ 五功歌 ⑧ 六德歌 ⑨ 茶頌歌 ⑩ 結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조/ 남계 박종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