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선암 유희좌마애불 & 칠불암

2014. 12. 19. 06:19들꽃다회

 

 

경주 남산 문화재 (44)

 

 

庭光散人글돋先生 2014.06.08 13:58

 

 

 

<戱座로 동쪽을 바라보며

 雲滴위로 걸어갈 듯한 자세>


남산 칠불암 윗쪽 암릉쪽으로 오르면, 홀로 동쪽 일출을 바라보면서 유희좌로 앉아

오른손엔 보상화를 들고 안면엔 근심 걱정이란 단어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유유한 몸짓으로

구름을 타고 앉은 마애보살반가상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듯 오른쪽 다리를 풀어

내리고 앉은 자세이다. 신선암이라 불러지는 까닭이 그 자세에 있다.


반가사유상이 지닌 아름다움의 특색은 사색하는 부처님이다.지긋이 눈을 감고 계시는 모습이 사색하듯 준엄한 기운이 감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 반가사유상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작품은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다. 석조반가사유상으로서는 서산 마애삼존불,경주 서악리 출토 반가석상, 봉화군 물야출토 반가석상 등이있다.

일본 경도시의 광륭사 목조미륵보살반가상도 신라장인의 작품이란 것도 통념으로 알려지고 있다.

 

바른다리를 왼쪽 무릎 위에 걸치고 바른손으로 가볍게 턱을 괴고 고요히 걸터앉아 명상하는 자세의 불상 양식을 참고하여 신선암 반가상을 보면 정갑게 느껴질 것이다.

상상의 꽃 보상화를 가슴에 살포시 안고 모든 부처의 법을 깨달았다는 의미의 모습 속에서 신라장인의 불심을 엿볼 수 있는 조각품이다.

 

遊戱座로 동쪽을 바라보며 雲滴위로 걸어갈 듯한 자세로 깎아지를 듯한 절벽 건너편 동쪽 산릉으로 시선을 향하고 있다. 운무가 산골짜기에 걸리는 날에는 하얀 신선이 되어 구름사이로 걸어다닐 태세이다 . 사진작가들은 남산에서 제일 먼저 태양을 받는 마애보살반가상이라 일출 때 붉게 물든 모습을 촬영하기위해 새벽녁에 산릉을 오르는 경우가 많다.   


 

 

 

 

 

 

 

 

 

 

 

 

 

 

 

 

 

 

 

 

 

보상화를 오른손에 들고 있다. 보관으로 보아 보살상이다.

 

 

 

 

 

 

 

 

오른발을 운문아래로 내리고 앉은 여유있는 자세-유희좌이다.

 구름속 신선이 되어 다니는 보살

 

 

 

 

 

 

 

 

 

 

遊戱座로 동쪽을 바라보며 雲滴위로 걸어갈 듯한 자세로   

 

남산 칠불암 윗쪽 암릉쪽으로 오르면, 홀로 동쪽 일출을 바라보면서 유희좌로 앉아

오른손엔 보상화를 들고 안면엔 근심 걱정이란 단어는 조금도 느낄 수 없는 유유한 몸짓으로

구름을 타고 앉은 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마치 신선놀음이라도 하듯 오른쪽 다리를 풀어

내리고 앉은 자세이다. 신선암이라 불러지는 까닭이 그 자세에 있다.


 

 

 

 

 

 

 

 

 

 

 

 

 

 

 

 

 

 

 

 

 

 

 

 

 

 

 

 

 

 

 

 

 

 

 

 

 

 

 

 

 

 

 

 

 

 

 

 

 

 

 

 

 

 

 

 

 

 

 

 

 

 

 

 

 

 

 

 

 

 

 

 

 

2010년 10월경 신선암 마애좌상불 앞에선 글돋선생

 

 

 

 

 

 

 

 

 

 

칠불암 위쪽 신선암 유희좌로 앉아 있는 마애불상의 정체

 

   안개비 내리던 날, 칠불암 위쪽 신선암 마애불상을 찾아 떠났다. 일부러 안개비 내리던 여름날이다. 남산 63계곡, 남북8킬로,동서 약 4킬로의 길이로 길게 벋어 누어있다. 완만한 동남산과 골이 깊고 가파른 서 남산 계곡은 안개구름으로 자욱하다. 금방이라도 구름 속으로 신선이라도 내려올 엄숙한 모습들이다. 칠불암은 동남쪽 산정 가까이 있다.

칠불암이란 7부처가 부조형태로 한곳에 존재하는 경주 불상에서 독특한 형식이다.

 

  삼불 앞에서 장방형 돌에 사면불을 조각해 놓았다.

 

   7불일까. 보통 3불 앞을 가로 막고 인위적으로 사면불을 새겨 놓았던 것은 의도적인 설계로 보인다. 원래 한덩이 큰 바위를 가운데 부분을 때어내어 두 암괴를 만들고 앞의 암괴를 장방형 사면불로 다듬고 사면에 부조를 새겼다.

 

   7개 불상, 그 정체가 무엇일까. 항시 칠불암을 오르면서 그 의문에 대해서 답을 구해 보았지만 오리무중이다.

화랑도 연구하는 교수 는 신라는 산악신앙 내지는 산신숭배가 현저한 나라라고 하였다. 산신숭배사상은 종교적이고 주술적인 성격을 갖는 것으로 마을이나 국가의 수호신이 대개 산악을 본거지로 삼고 있다는데 생겨난 것이었다.

 

    안개비가 산계곡 허리를 감싼 산길을 올라 칠불암 불상 아래에 도착하여 섰다.

안개 알갱이가 이미 칠불까지 휘어감고 흩어진다. 흐릿한 회색빛 암자는 안개 속에 갇혔다. 7이란 숫자가 무엇일까. 칠성사상, 즉 북두칠성 사상이 아닐까 생각하니 안개가 걷힐 때 일곱부처가 밤하늘 별처럼 반짝거리며 암벽에서 빛난다.

 

   정신은 화랑도(花郞道)라고도 하는데, 삼덕(겸손. 검소, 절제)과 삼교(유교,불교, 선교)를 신조라 한다.

또한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貴山),추항(箒項) 두 화랑에게 주었다는 세속오계가 화랑의 정신적 기저를 이루었음이 단박 스쳐온다.

   7불암을 뒤로하고 약 50미터 산위로 오른다. 큰 바위가 나온다. 그 바위에 잔도(棧道)가 나온다. 좁은 길을 내어 놓았다.

한 사람 정도 지날 수 있는 길이다. 길 아래는 낭떠러지이다. 아래엔 칠성암 뜰이 안개가 사라지니 보인다.

벼랑을 손으로 잡고 바위 잔도를 따라 가다 언덕 오른쪽 굽어지는 곳에 펼쳐지는 마애불상을 만난다.

유희좌를 하고 보상화를 오른손에 들고 여유롭게 칠불암 오르던 계곡에 걸린 하얀 안개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언제라도 그 안개구름 속으로 걸어 갈 듯 이미 오른쪽 다리를 내리고 있는 자세이다.

이런 장면을 보려고 이곳까지 안개비를 맞고 새벽처럼 올라온 것에 정말 행복감을 느꼈다.

 

   마애불 앞에 앉아 나도 유희좌세로 동녘 앞 산과 칠불암계곡과 천동골(천불을 모셔놓았다는 바위에 천개의 구멍을 새겨 놓았다)

 

 

 

 

에 걸린 안개비 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자인 정광법사는 신선이 된 느낌이다. 화랑들은 유오(遊娛)의 대상지로 삼은 것이 산이었거니와 그들이 산을 찾아 순행했던 것은 화랑 김유신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산중의 동굴에서 영매자인 샤먼을 통해 초인간적인 영역을 몸에 익히거나 혹은 샤먼을 통해 산신의 의사를 전해 듣기 위해서였다.

즉 샤먼을 통해 인격 전환과 자기 변혁을 꾀한 것으로서 이 점, 화랑으로서의 인격 형성이 무격(巫覡)적인 데 주목하지 않은 수 없다.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화랑들에 의해 금강산 순례가 행해진 이유가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운조(運祚)도 오로지 금강산신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희랍의 올림포스에 있어서와 같이 신탁과 예언에 이은 금강산에 걸린 안개비 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이에 미륵불이니 미륵암이니 하듯 미륵의 이름을 붙인 것이 많은 것도 불교 전래 후 이러한 민간신앙 위에 불교적인 산악 관으로써 미륵 정토 관념이 습합된 때문이다." 하였다.

 

     최남선의 불함문화론 구절이 내 머리를 쳤고, 난 그때 칠불암의 부처들의 정체가 내 머릿속을 확연히 드러났다.

 “화랑세기” 기록에 남산에 화랑 우두머리(풍월주) 7명은 나라가 국난 있을 시 만나서 의논했던 그 절이 바로 칠불암이란 것을 깨달았다. 칠명의 화랑의 우두머리 중에 김유신과 이화공이 있었다. 이화공은 선도와 불교를 습합시킨 분이며, 그는 이미 불법을 깨우친 승려와 같았다. 12풍월주 보리공에게 계를 받은 14대풍월주 호림공(虎林:탈의지지장으로 불릴 정도로 불교에 귀의함)은 자장과 명랑법사의 부친이다. 보리공은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이미 화랑의 풍류도와 불교를 습합시킨 인물이다

그도 탈의지장보살이라 불리울 정도로 불법을 깊이 받아드린 이였다.

 

    공은 누구인가. 그 유명한 원광법사와 풍월주 보리공의 아버지였다. 이화공은 진흥왕의 모친인 지소부인의 딸 숙명공주의 남편이며, 숙명공주가 진흥왕 몰래 이화공에 반해 밀회를 하여 나은 아들이 원광법사와 보리공이다.  호림공은 보리공의 조카이며 불교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호림공의 아들고 조카가 그 유명한 자장율사와 명랑법사(조카)이다. 모두 진골 출신들이다.

    호림공의 누이가 진흥왕의 아내 마야부인이기도 하다.  이화공은 화랑의 풍류도와 불교를 화랑에 습합시킨 인물 중에 첫번째 풍월주이다. 그는 부처를 숭상함이 깊어져 유신공에게 풍월주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었다.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염장공(廉長),유신공(庾信),보종공(寶宗),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 亏知巖(우지암)에서 회유(會遊)했다.(삼국사기. 1.<기이> 상, 진덕왕조에 나옴,화랑세기 14세 호림공 /이종옥 화랑세기 231페이지) 참고:亏(우)는 于 자의 本音이며 于와 같다. 삼국유사 원본을 해독한 이병도 譯 '삼국유사' 책엔 亏 자를 汚(삼수변 없는 오)로 오역하여 '오지암'이라 번역하여, 화랑세기를 번역한 이종욱교수도 주석에 '오지암'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바로 잡는다. '우지암'이다.

 

    통사업도 7인의 공 등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옛 화백회의와 같이 신라가 국난이 있을 시 7인의 회의를 주도하는 7명의 우두머리였다.

최남선이 말했듯 국가의 운조도 남산산신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민간신앙 위에 불교적인 산악관으로 남산 신선불이 되었다.

 

   정광산인은 七星友라는 기록과 칠불암. 북두칠성사상, 불교와 신선도의 습합, 이런 단어들 속에서 칠불암과 신선암의 정체성을 깨달았다. 삼국유사, 화랑세기에 나온 기록이 겹쳐진다. 우지암 자리가 바로 지금의 칠불암이란 사실을 말이다.

    칠불암의 장방형 사면불과 뒷편 3면불은 북두칠성 형태로 다가왔다.

    庭光(散人)사는 칠불암이 정면에서 보이는 아래 뜰에서 장면을 응시하였다. 칠불암의 암(巖), 큰 바위이다. 지금은 칠불암하면 암(庵), 암자를 연상하는 이들이 많다. 사면불 뒷 암벽에 새겨진 입상불이 내게 말하고 있다. 영험한 암(巖) 모양이 산이었다.

 

    삼국유사 기이1편 선덕여왕편에 신라왕경에는 신령스런 땅이 네곳이 있다. 첫째는 靑松山, 둘째 남쪽 우지산(亏(于의 본음)知山, 3째가 서쪽 피전(皮田) , 4째가 북쪽 금강산(지금의 소금강산) 나온 구절을 뇌리 속으로 입상불은 전해주고 있었다.

 七星友(알천공, 호림공, 영장공, 유신공, 임종공, 술종공,보종공)들은 나라 큰일이 있으면 하지와 추분 사이엔 南山 亏知巖(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였다. 남산의 큰 바위, 즉 우지암에 모여서 큰 일을 결정했던 것이다.

  于뜻에는 '넓은 모양(廣,大貌)' '말할(曰也)'‘행하다’ 뜻이 들어있다. 우지암은 큰 바위로서 뜻(知)을 의논하는 영험한 바위란 뜻이다.

 

    그렇다. 신령스런 산에 모여 영험한 기운을 풍월주들이 받아 국사를 의논하였던 것이다. 명랑법사의 靈이 정광에게 나타나 말해주고 있었다. 명랑은 중국을 거쳐 티벳의 밀교를 가지고 왔었다. 호국불교 방편의 밀교였던 것이다. 하늘 별자리를 보는 이십팔수(二十八宿) 그림이 칠불암에 펼쳐진다.

 

 

<이십팔수(28宿(별자리) 4宮(이궁,진궁,태궁,감궁) 4神(청룡,백호,주작,현무) 안에 7聖이 운행한다.

명랑은 밀교를 중국신장에서 가지고 오면서 천문설을 가져옴)

 

    중국,인도,페르시아 등에서 해와 달과 여러 혹성의 위치를 밝히기 위해서 황도(黃道)에 따라서 천구(天球)를 28수로 구분한 것이 마치 영화 스크린에 나타난 것처럼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늘을 4宮, 4神 (청용,백호,주작,현무)로 나누지고 각 宮마다 일곱 성수(星座)가 나타난다.

    이 하지부터 추분까지의 우지산(南山)에는 붉은 주작이 날고 이궁(離宮)에 정(井),귀(鬼), 유(柳), 성(星), 장(張), 익(翼), 진(軫)의 별이 빤짝거리며, 칠성(일곱별)이 스크린에 펼쳐지며, 이화공,알천공, 호림공, 영장공, 유신공,임종공,술종공,보종공 화랑의 우두머리 장군의 모습으로 나와서 마침내 스크린 속으로 나와서 바위속으로 들어가 부처가 되어 정광의 앞에서 나타났다. 

 

   정광법사는 창졸지간에 일어난 일들을 마치 꿈을 꾸고 있는 착각에 빠졌다. 쓰나미와 같은 환희가 밀려와 우지산(남산) 우지암(칠불암)이 불국토처럼 환해지며 꽃비가 내린다. 보상화와 연봉이 하늘에서 솜사탕처럼 두둥실 내리고 있다.

원광과 보리공의 유언으로 명랑법사는 선덕여왕과 유지를 받들어, 그들을 남산 구국의 산신불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그 우두머리 이화공을 남산 신선불로 조성해 놓았다.

 

     사 국난이 있을 시, 7불로 남산을 지키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남산 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화공은 동쪽 햇살이 떠 오를 때 동해 기운을 받아 호국신으로 남았다. 불교와 민간신앙을 살펴보자. 환웅은 (태백산산신), 단군(구월산) 수로(구지봉), 해모수(웅심산) 신라6촌장(표암봉, 형산) 탈해왕은 토함산신, 경주 선도산(사소성모:박혁거세 모친) 경순왕도 현재 兄山(경주와 포항입구 산)의 산신으로 남아 있다. 관세음보살로 호국의 신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살펴보자. 치술령에는 치술공주성모(화랑세기에 의하면 실성왕의 딸 치술공주)로 나오는박제상의 처로 기술되어 있다.

 

   지리산의 ‘위숙성모’, 가야산은 ‘정견묘주’ 영취산(울산문수산)’의 변재천녀(辨財天女), 운제산(포항에 있음, 오어사가 있음)의 ‘운제성모’ 불교와 선도, 불교적인 산악관에 의한 호국신들로 남아 있는 예이다. 정광산인은 신선좌세로 함께 마애불속으로 달려 들어갔다. 안개 구름 속으로 신선들과 함께 노는 장면이 파노라마 처럼 동남산에 펼쳐지고 있었다.(정광법사 글돋선생 학설)

 (2014.5.12월) (2014.6.7 칠불암 우지암의 정체 삽입)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정체성을 찾아서...글돋선생의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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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풍경 (174)

청산 2014.04.13 19:43

 

 

 

    높이 1.9m. 보물 제199호. 절벽의 바위 면을 얕게 파고, 고부조(高浮彫 : 모양이나 형상을 나타낸 살이 매우 두껍게 드러나게 한 부조)로 새긴 마애불로서 머리에는 높은 삼면보관(三面寶冠)을 썼으며, 그 위로 발계(髮髻)가 솟아 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정제되어 균형을 이루고 있으나, 두 볼이 처져 비만한 모습은 근엄한 표정과 함께 남성적인 기풍이 역연하다. 머리카락은 어깨 위에까지 늘어져 둥글게 뭉쳐있다.

 

    신체는 어깨가 넓고 무릎 폭이 넓어 안정된 모습을 보여 주는데, 천의(天衣)는 약간 비만한 몸의 굴곡을 뚜렷이 드러내면서 무릎 밑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두 손은 가슴 앞에 들어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쥐고 왼손은 엄지와 장지를 맞대었으며, 오른발은 대좌 아래로 내려 연꽃 족좌(足座)를 밟고 왼다리를 무릎 위로 올려 유희좌(遊戱坐)에 가까운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모습의 보살상은 시대가 지나면 보타락가산(普陀洛迦山)에 상주하는 관음보살로 표현되는 것이 원칙이다.

 

   대좌는 옷자락이 대좌를 덮고 있는 상현좌(裳懸座)로서 옷주름은 고식의 기하학적인 의문(衣文)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늘어져 있다. 발밑에는 동적인 화려한 구름을 새겨 상 전체에 생기를 불어넣으면서 이 보살상이 천상(天上)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광배는 바위 면을 주형(舟形)으로 얕게 파내어 거신광(擧身光)으로 삼고, 그 내부는 세 줄의 선으로 두광과 신광을 구분하였다. 광배의 윗면은 일단의 턱이 지면서 가로로 길게 팬 자국이 있어 본래는 목조 전실이 세워졌던 것으로 보인다.

신체의 양감(量感)이 강조된 조각 기법과 섬세한 세부 표현, 장식성의 경향이 엿보이는 점 등에서 이 마애보살상은 전성기 통일신라 조각 양식에서 조금 벗어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상. 높이 1.9m. 보물 제199호. 절벽의 바위면을 얕게 파고, 고부조로 새긴 마애불이다. 머리에는 높은 삼면보관을 쓰고, 반가좌한 관음보살 자세로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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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님의 글 중에서 발췌....

 

 

 

 

 

 계곡집(谿谷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谿谷先生集
판심제  谿谷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1643年刊
권책  原集 34권, 漫筆 2권 합 18책
행자  10행 19자
규격  21.9×15.4(㎝)
어미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5762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92
 저자
성명  장유(張維)
생년  1587년(선조 20)
몰년  1638년(인조 16)
 持國
 谿谷, 默所
본관  德水
봉호  新豐府院君
시호  文忠
특기사항  尹根壽, 金長生의 門人. 李廷龜, 申欽, 李植과 함께 조선 중기 文章 四大家로 불림
 가계도
 張逸
 縣監
 張雲翼
 判書
 密陽朴氏
 判尹 朴崇元의 女
 張綸
 義禁府 經歷
 張維
 
 安東金氏
 右相 金尙容의 女
 張善澂
 判書
 尹宗之의 女
 
 李承孝의 女
 
 女
 仁宣王后
 孝宗
 
 張紳
 江華 留守
 女
 
 黃裳
 

기사전거 : 神道碑銘(宋時烈 撰, 宋子大全 卷156), 張雲翼神道碑銘(金尙憲 撰, 淸陰集 卷24) 등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선조 20 1587 정해 萬曆 15 1 12월 25일, 宣川府 官舍에서 태어나다.
선조 32 1599 기해 萬曆 27 13 부친상을 당하다.
선조 34 1601 신축 萬曆 29 15 尹根壽에게 나아가 漢史를 배우고, 金長生에게 나아가 禮를 배우다.
선조 39 1606 병오 萬曆 34 20 進士에 급제하다.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21 「陰符經解」를 짓기 시작하여 다음 해 완성하다.
광해군 1 1609 기유 萬曆 37 23 別試文科에 乙科로 합격하다. 承文院에 들어가다.
광해군 2 1610 경술 萬曆 38 24 12월, 侍講院 兼說書가 되다.
광해군 3 1611 신해 萬曆 39 25 2월, 주서가 되 다. ○ 6월, 검열이 되다.
광해군 4 1612 임자 萬曆 40 26 4월, 대교로 재직 중 金直哉의 誣獄에 연루, 賊黨 黃裳의 妻男이라는 이유로 파직되다. 이후 모친을 봉양하며 安山 고향집에서 은둔, 讀書에 전념하다.
광해군 10 1618 무오 萬曆 46 32 詞賦, 韻語 등의 저술을 모아 「默所稿」로 自編하고 自序하다.
인조 1 1623 계해 天啓 3 37 3월, 仁祖 反正에 가담하다. ○ 대교, 봉교, 전적, 예조 좌랑을 거쳐 이조 좌랑이 되다. ○ 10월, 賜暇讀書하다. ○ 윤10월, 이조 정랑이 되다. 곧 奮忠贊 謨立紀靖社功臣 2等에 책훈되다.
인조 2 1624 갑자 天啓 4 38 1월, 全羅南道 暗行御史로서 復命, 大同新法의 利害, 民役ㆍ海防 등의 문제를 아뢰다. ○ 李适의 亂이 일어나자 병조 참지로서 扈駕하여 公州로 가다. 도중 대사간에 제수되다. ○ 扈駕의 공으로 新豐君에 봉해지다. ○ 8월, 대사헌이 되었으나 병으로 辭免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39 5월, 대사성이 되다. ○ 6월, 陪從 때 儀節을 잘못한 일로 인피, 체직되다. ○ 9월, 新豐君으로서 應旨 上疏하다. ○ 10월, 金尙容이 人材로 薦擧하다. 곧 이조 참판이 되다.
인조 4 1626 병인 天啓 6 40 1월, 仁獻王后의 喪에 上이 杖朞를 입어야 함을 주장, 不杖朞를 청하는 鄭經世를 설득하다. ○ 2월, 대사간이 되다. ○ 8월, 부제학이 되다. ○ 11월, 대사헌이 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41 胡亂이 일어나자 扈駕하여 江都로 들어가다. 還都하여 9월에 이조 판서가 되다. ○ 10월, 좌부빈객을 사직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다. ○ 12월, 遠接使가 되었으나 使臣이 나오지 않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42 6월, 양관대제학을 겸하다. ○ 가을, 被虜人 逃還者의 刷送을 반대하다가 時議와 어그러져 우참찬이 되다. ○ 應旨 上箚하여 立志를 강조하다.
인조 7 1629 기사 崇禎 2 43 7월, 羅萬甲의 流配를 반대하다가 羅州 牧使로 나가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44 7월, 羅州 牧使로서 상소, 漕運船의 패몰 등을 상달하다. ○ 8월, 형조 판서로 불러들이다. ○ 12월, 대사헌이 되다. 元宗 追崇을 반대하여 引避하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45 1월, 追崇의 일로 〈典禮問答〉 8조를 지어 올리고, 대사헌을 사직하다. ○ 4월, 대제학이 되다. ○ 가을, 좌참찬으로서 呈告하고 廣州 冷井으로 가서 목욕하다. 병이 심해지다. ○ 10월, 동지성균관사를 사직하며 상소하다. ○ 이해 딸이 鳳林大君과 嘉禮를 치르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46 7월, 대사헌이 되다. ○ 8월, 이조 판서가 되다. ○ 10월, 仁穆王后의 誌文과 哀冊文을 지어 올리다. ○ 12월, 이조 판서를 사직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47 2월, 대제학이 되었으나 上箚하여 사직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49 5월, 예조 판서가 되었으나 질병으로 사직하다. ○ 6월, 저술을 自編하여 「谿谷草稿」26권으로 정리하고 自敍를 짓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50 5월, 공조 판서가 되다. ○ 12월, 비국 당상이 되다. ○ 胡亂이 일어나자 南漢山城으로 扈駕하다. 崔鳴吉과 함께 講和論을 주장하다.
인조 15 1637 정축 崇禎 10 51 1월, 예조 판서로서 還都한 뒤, 모친이 江都에서 사망하여 이미 葬禮와 返哭을 마쳤음을 듣고 安山으로 달려가다. ○ 7월, 起復하여 右議政에 제수하였으나 18차례 상소를 올려 사직하다. ○ 12월, 모친의 移葬에 애쓰다가 병이 심해지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52 2월, 三田渡碑文을 지었는데 지나치게 굴욕적이라 하여 李景奭의 것을 고쳐서 쓰다. ○ 3월, 포로로 잡혀갔던 며느리의 離婚 허락을 禮曹에 청하다. ○ 3월 17일, 병으로 卒하다. ○ 6월, 安山 月谷里에 장사 지내다.
인조 21 1643 계미 崇禎 16 - 아들 張善澂이 문집을 간행하다. (李植의 序)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 李景奭이 諡狀을 짓다. ○ 5월, ‘文忠’으로 시호를 내리고, 領議政으로 증직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 宋時烈이 神道碑銘을 짓다.

기사전거 : 神道碑銘(宋時烈 撰), 諡狀(李景奭 撰, 白軒集 卷36), 朝鮮王朝實錄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졸하기 하루 전에야 絶筆할 정도로 많은 저술을 하였고, 또 스스로 정리해 놓는 일에도 힘을 기울였다. 32세 되는 1618년 8월에는 詞賦, 韻語, 古文 등의 저술을 모아 4권으로 정리해서 「默所稿甲」이라 이름 붙이고 앞으로의 저술은 乙, 丙의 순으로 정리해 나갈 것이라는 自序를 적었다. 또 1621년과 1622년 사이에는 자신이 지은 1천여 편의 古詩와 律詩를 5백여 편으로 정리한 뒤 보관해 두었다. 그 뒤 1635년 6월에 와서 다시 자신의 저술을 26권으로 분류, 편차하여 「谿谷草稿」라는 定稿本으로 만들고 自敍를 지었다. 어렸을 때 지은 것은 대부분 불태워 버리고 中年에 雜稿와 詩文 약간 권을 직접 뽑아둔 「默所稿甲」과 정리해 둔 詩 5백여 편에, 文衡으로 일하면서 지은 많은 詩文 가운데 文은 1633년 이전의 것을 취하고 詩는 1634년 이전의 것을 취한 뒤 합쳐서 분류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것은 續稿로 이름 붙여 분류, 편차해 놓았다. 또 1635년 1월에는 「谿谷漫筆」2권으로 漫錄을 편차해 놓았다.
저자의 사후 아들 張善澂이 「谿谷草稿」를 수습, 추가로 보충하고 「谿谷漫筆」까지 붙여 完秩을 만들고, 朴瀰, 李明漢, 金尙憲, 李植의 序文을 받아 光山(光州)에서 牧使 李恪의 도움으로 板刻, 1643년 간행하였다.《초간본》 原集의 끝에 실린 刊記에는 校正, 粧䌙, 印出 등을 맡았던 11명의 僧名이 기록되어 있다. 또 「鏤板考」에 본집의 冊板이 光州牧에 소장되어 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간행 후 계속 光州에 보관되어 있었던 듯하다.
한편 저자의 문집 草稿 自敍에 실린 目錄과 현재 남아 있는 초간본의 목록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괄호는 自敍 目錄의 編數) 冊文(3편), 檄(1), 呈文(2), 七言排律(7), 五言(10), 雜體(44)는 동일하고, 續稿만 추가된 것은 箴銘贊(13)에 3편, 說(9)에 1편, 序(42)에 11편, 記(15)에 4편, 祭文(38)에 4편, 行狀(5)에 2편, 疏箚(50)에 28편, 帖(45)에 2편, 五言古詩(143)에 19수, 七言古詩(41)에 6수이다. 또 아들 張善澂이 간행하면서 더 보충한 것으로 보이는 것은 詞賦(16)에 1편, 奏咨(30)에 1편, 碑誌(26)에 4편이 보충되고 續稿로 15편이 들어갔다. 表箋(23)은 22편으로 줄고 대신 狀 1편이, 敎書(10)는 9편으로 줄고 대신 批答 1편이 들어갔다. 그러나 啓辭(17)는 10편으로 줄고, 雜著(40)는 35편으로 줄고 續稿 7편이 들어갔다. 또 五言律詩(421)는 395수, 五言排律(44)은 34수, 七言律詩(432)는 347수, 五言絶句(50)는 27수, 七言絶句(292)는 240수로 줄었는데, 각각 續稿로 50여 수에서 10여 수까지 추가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대부분의 작품이 보전되었고 啓辭와 雜著, 律詩와 絶句 등의 詩만이 일부 逸失되었는데, 李植의 序에 언급된 대로 自編한 다음 해인 1636년에 丙子胡亂이 일어나 가족들이 江都로 피난하는 와중에서 불타거나 잃어버린 것으로 보인다. 또 1635년 이후 1638년 졸할 때까지도 계속 많은 저술을 하여 續稿로 남겼음을 알 수 있다.
이후의 重刊 기록은 보이지 않으며, 초간본은 현재 규장각(奎5762), 연세대 중앙도서관,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晚松D1-A16A),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260) 등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643년 목판으로 간행된 초간본으로,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草稿自敍(張維 撰), 漫筆自敍(張維 撰), 序(李植), 刊記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집은 原集 34권과 漫筆 2권 합 18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맨 앞에 朴瀰의 敍, 李明漢, 金尙憲, 李植의 序, 저자의 自敍가 실려 있고, 目錄은 없다.
권1은 詞賦 17편으로, 16편의 草稿에 저자의 나이 15세 때 지어 이름을 날린 〈鳥嶺賦〉 1편을 追錄하였다. 〈愬旱文〉, 〈譴魃文〉, 〈秋霖賦〉 등 자연의 재해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읊은 작품이 다수 실려 있고, 〈雪賦〉 등 課作 수편이 있다. 특히 〈續天問〉은 屈原 「楚辭」의 〈天問〉을 본따 지은 글로, 自然의 造化를 주관하는 자가 누구인가 하는 질문에서 天理에 따른 삶을 어떻게 회복하는가 하는 물음까지 40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집에서 詞賦가 제일 앞에 실린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중시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니, 저자 스스로 高麗의 李奎報에 비견하였다.
권2는 表ㆍ箋ㆍ狀 23편, 敎書ㆍ批答 10편, 冊文 3편, 箴ㆍ銘ㆍ贊 16수 등을 모아 놓았다. 저자가 오랫동안 副提學, 大提學 등의 文任에 있던 관계로 謝恩表와 方物表, 賀箋과 謝箋이 다수 실려 있으며, 羅州 牧使로 지은 3편의 賀箋이 정리되어 실렸다. 敎書에는 仁祖 反正 후 赦免令을 내린 교서, 인조 5년 李仁居의 亂과 6년 柳孝立의 亂을 평정하고 赦免令과 功臣號를 내린 교서, 인조 10년 元宗 追崇 후 내린 교서 등이 있다. 또 〈元宗大王追尊玉冊文〉과 〈仁穆王后哀冊文〉도 실려 있다. 저자 자신은 元宗 追崇을 반대하는 입장이었으나 大提學이라는 직임에 있던 관계로 冊文과 敎書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箴ㆍ銘ㆍ贊은 13편의 草稿에 〈忠正堂銘〉, 〈三畫贊〉, 〈支離子自贊〉 등 말년에 지은 3편의 續稿가 첨가되어 있다. 또한 堂號를 ‘默所’라 하고 지은 銘과 箴이 모두 실려 있다.
권3은 雜著로, 35편의 草稿에 7편의 續稿가 첨가되었다. 그중 〈典禮私議〉, 〈讀鄭愚伏議禮箚〉, 〈答沙溪先生〉, 〈爲人後爲祖後辯〉은 仁獻王后 喪事의 服制와 元宗 追崇 문제를 논한 글들이다. 저자는 不杖朞를 주장하는 鄭經世의 의견에 반대하여 杖朞의 타당성을 말하고, 仁祖가 定遠君을 伯父나 叔父로 불러야 한다는 金長生의 의견에 반대하여 顯考라 하는 것이 타당함을 논하였다. 그러나 皇 字를 붙이거나 尊號를 올리거나 宗廟에 배향하는 것에는 분명한 반대의 입장을 취하였다. 策問으로 修身安民制敵 등을 논한 8편의 글이 실려 있다. 〈設孟莊論辯〉은 孟子와 莊周가 동시대의 인물이면서도 서로 만난 적이 없던 것을 이상히 여겨 허구적인 문장을 만들어 본 것으로, 異說을 억누르고 吾道를 일으켜 세우려는 뜻을 담은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가설적인 문장으로 만든 것이 〈覆醬瓿解〉로, 揚雄이 「太玄經」을 지은 뒤 간장단지 덮개용 책이라는 劉歆의 비판을 받았던 史實을 따다가 揚雄의 입장에서 변명한 글이다. 이 외에 課題로 지은 〈詩能窮人辯〉, 〈貫高論〉, 〈氷壺先生傳〉 등 졸하기 하루 전날 지은 〈擬演連珠〉가 실려 있다. 그리고 다수의 跋文과 上樑文이 있다.
권4는 說 10편이다. 그중 〈筆說〉은 족제비털로 만든 붓에 개털을 섞어 만든 商術을 개탄하면서 당시 士大夫의 병통을 비유하여 논한 글이다. 〈人心道心說〉은 程子, 朱子, 羅整菴 모두 人心과 道心을 논한 중심은 精一執中에 있었음을 말하고, 이들의 주장을 별개로 보아 각기 주장의 근거로 삼는 세태를 비판하였다. 〈海鷗不下說〉은 「列子」의 구절을 논한 글로, 갈매기와 같이 욕심에 동요되지 않는 삶을 희구하였다. 〈福田說〉은 세속의 禍福이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浮屠氏의 교설을 논한 글이다. 〈靑白眼說〉은 阮籍이 靑眼과 白眼을 구사하여 자기 몸을 보전한 지혜를 높이 산 글이다. 〈化堂說〉은 續稿로, 申敏一에게 지어준 것이다.
권5~7은 序이다. 53편 가운데 11편이 續稿이다. 〈送巡察鄭公按湖西序〉 등의 送序, 〈白沙先生集序〉, 〈松江遺稿後序〉 등의 文集 序, 鄭紫元에게 써준 〈揚馬賦抄序〉, 李曙에게 써준 〈馬經諺解序〉 등 타인 작품의 序가 있고, 〈默所稿甲自序〉, 〈漫筆自敍〉, 〈谿谷草稿自敍〉, 〈陰符經解序〉 등의 自敍가 있다. 또한 〈詩史序〉, 〈重刊杜詩諺解序〉를 통해서는 저자가 杜甫의 시를 고금의 최고로 평가함을 알 수 있다.
권8은 記로, 19편 중 4편이 續稿이다. 課題로 지은 〈蜃樓記〉, 鄭弘溟에게 지어준 〈畸庵記〉, 金堉에게 지어준 〈晦靜堂記〉, 閔聖徽에게 써준 〈用拙堂記〉 등과 光海君 말년 은둔 생활 중 자신의 이야기를 적은 〈海莊精舍記〉가 있고, 〈典牲署大廳重建記〉 등의 續稿가 실렸다.
권9는 祭文 42편으로 4편이 續稿이다. 祈雨祭文, 祈晴祭文, 祈禱文을 비롯, 尹根壽, 李恒福, 鄭曄 등에 대한 祭文과 李珥의 賜祭文 등이 실렸고, 李廷龜 등의 祭文은 續稿이다.
권10~14는 墓誌, 墓碣, 碑銘 등 묘도문자 45편으로 15편이 續稿이다. 李命俊, 宋邦祚 등의 묘지명, 仁穆王后 陵誌, 仁烈王后 長陵誌, 鄭弘翼, 梁應洛 등의 묘갈명, 成渾, 金千鎰, 金長生 등의 신도비명이 실려 있다.
권15~16은 行狀 7편으로 2편이 續稿이다. 李恒福, 李睟光, 李山甫, 李廷龜 등의 것이다.
권17~19는 疏箚 50편, 권20은 疏箚 續稿 28편이다. 求言應旨疏箚, 辭職疏箚가 대부분이고, 〈進典禮問答箚〉는 元宗 追崇과 관련된 차자로, 8조의 〈典禮問答〉이 붙어 있다. 권21은 啓辭 10편이다. 〈湖南暗行御史復命書啓〉, 〈請寢追崇奏請啓辭〉 등이 실렸다.
권22~24는 奏本 5편, 咨文 26편, 檄 1편, 呈文 2편, 帖 47편이다. 이 중 帖 2편이 續稿이다. 1623년 反正 후 올린 〈請完封典奏本〉, 1629년 明 나라 袁崇煥의 무함을 변명한 〈辨誣奏本〉 등이 있고, 1627년~1632년 사이 대제학 재직 중 지은 都督 毛文龍과 黃龍, 軍門 袁崇煥 등에게 보낸 咨文, 呈文, 帖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25~34는 詩이다. 오언고시, 칠언고시, 오언율시, 오언배율, 칠언율시, 칠언배율, 오언절구, 칠언절구, 六言, 雜體의 시체별로 분류된 1480여 수 가운데 190여 수가 續稿이다. 朴瀰는 序文에서, 저자는 光海君 4년 은둔 생활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오언율시만을 간간이 짓다가 그 이후 唐 나라 詩文에 빠져들었다고 하였다. 또 저자 스스로도 이 시기부터 杜甫, 李白 및 唐音을 읽고 唐宋 諸家의 작품은 물론 明 나라의 大家들에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하였다. 또한 “내 시를 보면 韻은 제대로 안 되어도 致는 있는데, 韻은 천부적인 것이고 致는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다.”고 自評하였다.
내용을 보면, 鄭弘溟, 金尙憲, 李明漢, 李安訥과 나눈 시가 매우 많다. 〈安山別業屋後…〉 등 安山에서 은둔할 때 지은 시, 〈癸亥歲余奉使湖南…〉 등 1623년 湖南 暗行御史의 명을 받고 다녀오면서 지은 시 등이 실려 있다. 또 送詩, 挽詩가 많은 것도 특징이라 하겠다. 연작시로 〈田家秋興〉, 〈詠史五首…〉 등이 詩體別로 실려 있다. 雜體에는 〈早春書懷回文〉 등 回文體의 시, 〈昔楚王使群臣…〉 24장 등이 독특하다.
그 뒤로 「谿谷漫筆」 2권이 실려 있는데, 208가지의 단편을 모은 것이다.
권1에서는 「春秋」, 「孟子」, 「中庸」은 물론 「老子」,「莊子」 등의 來歷이나 語句 문제, 天地와 바다에 관한 견해, 東海에 潮汐이 없다는 데 관한 의견, 王陽明과 陸象山에 관한 평가, 우리나라의 學風, 啓運宮(仁獻王后)의 喪事 服制 문제와 관련된 禮說, 講和論 등 胡亂을 겪는 과정의 설명, 南靈草에 관한 설, 詛呪에 관한 설, 柳夢寅의 「於于野談」에 대한 평가, 자신의 學習 來歷 등이 실려 있다.
권2에도 官司 명칭의 由來, 孔子의 稱號, 근거 없거나 위조한 글의 分辨, 壽貴를 누린 중국의 신하, 司馬相如의 평가, 「史記」의 오류, 栗谷의 삭발 여부, 別號의 유래, 詩家의 剽竊, 중국의 시험과 인재 선발, 勅使 黃孫茂의 장단점, 文詞의 自評, 南袞 의 文名, 主文硯 故事 등이 있다. 이 漫筆을 통하여 저자의 학문하는 태도나 경향, 時事에 관한 입장, 인물 평가, 우주관 등을 이해할 수 있다.

필자 : 金炅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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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箴) 명(銘) 찬(贊) 16수
삼화찬(三畫贊) 이하 속고(續稿)임

 


삼천 명의 제자가 행단(杏壇)에 입시(立侍)한 가운데 안회(顔回)는 오현금(五絃琴)을 타고 증점(曾點)은 거문고를 뜯는 광경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안(几案)에 기대어 앉아 마른 나무와 싸늘한 재처럼 하고 있는 모습
비로자나(毗盧遮那)가 천광대(天光臺)에 걸터앉아 있는 가운데 일천불(佛)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

병중(病中)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어쩌다 이 세 가지 광경을 떠올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곤 한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의 손을 빌려 세 폭 병풍으로 만들고 싶은데, 다만 오늘날 세상에서 용면(龍眠)과 같은 절묘한 솜씨를 만나기가 어려워 그림을 쉽게 만들 수가 없기에 우선 먼저 세 개의 찬을 짓는 바이다.

봄바람 불고 해맑은 날씨 / 條風淑景
살구꽃 뜰에 가득한데 / 杏花滿庭
제자는 줄 퉁기고 / 弟子拊絃
선생은 가만히 듣고 있나니 / 先生默聽
화기애애한 분위기 / 一團和氣
간격없이 녹아 흐르는 / 冲融無間
그 정경을 묘사할 수는 있어도 / 其形可描
속뜻만은 어떻게 기릴 수가 없고녀 / 意不容讚
이상은 행단금슬(杏壇琴瑟)에 대한 것임.

전엔 궤안에 기댄 모습 팔팔한 용과 범 같더니 / 昔之隱几者生龍活虎
지금은 싸늘한 재, 마른 나무 같소그려 / 今之隱几者死灰槁木
팔팔한 용과 범일 때도 발동된 적 한 번 없고 / 生龍活虎未嘗動
사회 고목 같은 때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라오 / 死灰槁木未嘗寂
그대여 귀뿌리를 떼어 내 버려 보소 / 請君割却耳根
그러면 하늘 피리 소리를 들을지니 / 然後天籟可聞
이상은 남곽은궤(南郭隱几)에 대한 것임.

저 자리 앉은 이 / 彼當座者
부처라 할지 악마라 할지 / 是佛是魔
둘러싸고 있는 저들 / 彼圍遶者
일이라 할지 다라 할지 / 是一是多
악마든 부처든 본래가 공하거니 / 魔佛本空
일이든 다이든 무슨 상관 있으리요 / 一多何知
비로자나 / 毗盧遮那
그 진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 眞身在玆
이상은 비로거대(毗盧踞臺)에 관한 것임.


 

[주D-001]행단(杏壇) :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유지(遺址)로서 택반(澤畔) 가운데 높은 곳이다. 《莊子 漁夫》
[주D-002]남곽자기(南郭子綦)가 …… 모습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주D-003]비로자나(毗盧遮那) : 불(佛)의 진신(眞身)에 대한 존칭인데, 일반적으로 법신불(法身佛)을 말한다.
[주D-004]용면(龍眠) :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을 말한다. 그가 그린 산장도(山莊圖)는 세상의 보물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고개지(顧愷之)와 장승요(張僧繇)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宋史 卷444》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谿谷先生集卷之二 번역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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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贊] 四首
三畫贊以下續稿 a_092_045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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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千弟子。立侍杏壇。回琴點瑟。
南郭子綦。隱几而坐。槁木死灰。
毗盧遮那。踞天光臺。千佛圍遶。
病裏閑居。偶思此三件景象。不覺神融。欲倩畫筆㨨作三障子。顧今世難得龍眠妙手。畫未易成。姑先作三贊。
092_045d條風淑景。杏花滿庭。弟子拊絃。先生默聽。一團和氣。沖融無間。其形可㨨。意不容讚。右杏壇琴瑟 昔之隱几者。生龍活虎。今之隱几者。死灰槁木。生龍活虎未嘗動。死灰槁木未嘗寂。請君割却耳根。然後天籟可聞。右南郭隱几 彼當座者。是佛是魔。彼圍遶者。是一是多。魔佛本空。一多何知。毗盧遮那。眞身在茲。右毗盧踞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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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箴) 명(銘) 찬(贊) 16수
현금명(玄琴銘)

 


나무 속 파내 텅 비게 하고 / 刳木以窾之
줄을 팽팽히 매어 놓고 / 縆絲以絃之
끌어다 퉁기면 / 援而鼓之
청랑(淸郞)한 거문고 소리 / 有聲泠然
이 맑은 소리 나무에서 나는 걸까 / 是泠然者生於木耶
줄에서 나는 걸까 / 生於絲耶
사람에게서 나는 걸까 / 抑生於人耶
모두 알 수가 없는 일 / 皆不可知
그대는 백아의 솜씨가 없고 / 子無伯牙指
나는 종자기(鍾子期)처럼 감상을 못하나니 / 我非鍾期耳
검은 학 하늘로 올라가고 / 玄鶴上天
물고기 물속으로 숨어 버리네 / 游魚入水
그저 흥취에 맡길 따름 / 寄趣而已
이루어지든 무너지든 둘 다 상관없나니 / 成虧兩空
이런 이치 아는 이는 / 知此理者
오직 제물옹뿐이리라 / 惟齊物翁


 

[주D-001]백아 : 중국 춘추 시대 거문고의 명인이다. 그가 연주할 때마다 친구인 종자기가 거문고의 연주 배경을 모두 알아맞추었다고 한다. 《列子 湯問》
[주D-002]검은 …… 올라가고 : 연주 솜씨가 대단치 않다는 말이다. 학은 1천 년이 지나면 푸르게 되고 2천 년이 지나면 검게 된다고 하는데, 거문고의 명인 사광(師曠)이 한 번 연주하자 검은 학들이 무리지어 모여들었다고 한다.
[주D-003]물고기 …… 버리네 : 《순자(荀子)》 권학(勸學)에 “호파(瓠巴)가 거문고를 타자 물고기가 물에서 나와 소리를 들었다.”고 하였다.
[주D-004]이루어지든 무너지든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시비(是非)가 드러나면서 도가 무너지고[虧] 도가 무너지면서 애착이 이루어진다.[成] 그러나 과연 성과 휴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성과 휴가 있기 때문에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탔고, 성과 휴가 없기 때문에 소문이 거문고를 타지 않는 것이다.” 하였다.
[주D-005]제물옹 : 제물론(齊物論)의 저자인 장자(莊子)를 말한다.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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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箴) 명(銘) 찬(贊) 16수
묵소잠(默所箴) 병서

 


내가 일단 묵소명(默所銘)을 짓고 나서 다시 그 대의(大意)를 나타내고자 잠을 지었다.

그대 입을 다물어라 / 噤而喙
멍청한 바보처럼 / 泯如昏如
속이 시끄러운 사람 / 衷之閙
싸움질하고 치달리지 / 閧如犇如
이것이 병통이라 / 是謂病
침묵 해치는 적이로세 / 瘖默之賊
그대 정신 수습하여 / 斂而靈
공허한 경지에 놔두게나 / 光藏沖漠
깊고 깊은 연못 속 외물(外物)에 동요 안 되나니 / 九淵沈沈外不蕩
그대의 삶 텅 비우면 만물을 포용하리 / 虛而生明涵萬象
때때로 꺼내 써도 고갈되지 않으리니 / 而時出之無窮已
아 이것이 바로 침묵하는 이유로세 / 嗟吾之默其在是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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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事蹟]
[三國史本傳] a_001_13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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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國史本傳。崔致遠字孤雲。一字海雲。新羅沙梁部人也。公美風儀。少精敏好學。至年十二。將隨海舶。入唐求學。其父謂曰。十年不第。卽非吾兒也。行矣勉之。公至唐。尋師力學。以唐僖宗乾符元年甲午。禮部侍郞裵瓚下一擧及第。時年十八。調授宣州漂水縣尉。考績爲承務郞,侍御史,內供奉。賜紫金魚袋。時黃巢叛。高騈爲諸道行營兵馬都統以討之。辟公爲從事巡官。委以書記之任。其表狀書啓徵兵告檄。皆出其手。其檄黃巢。有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抑亦地中001_137b之鬼已議陰誅之語。巢不覺下牀。由是名振天下。及年二十八。僖宗知公有歸寧之志。使將詔書來聘本國。憲康王留公爲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公自以西學多所得。及來欲展所蘊。而衰季多疑忌。出爲太山郡 今泰仁 太守。唐昭宗景福二年。卽眞聖王之七年。公時爲富城郡 今瑞山 太守。祇召爲賀正使。將入唐。以比歲饑荒。盜賊交午。道梗不果行。其後亦嘗奉使如唐。眞聖王八年。公進時務十餘條。王嘉納之。以爲阿飡。公自西仕大唐。及至東歸故國。皆遭亂屯邅蹇連。動輒得咎。自傷不遇。無復仕進意。001_137c逍遙自放。山林之下。江海之濱。營臺榭植松竹。枕藉書史。嘯詠風月。若慶州南山,剛州氷山,陜川淸涼寺,智異山雙溪寺,合浦月影臺。皆公遊焉之所。最後帶家隱伽倻山。棲遲偃仰以終老焉。始西遊時。與江東詩人羅隱相知。隱負自高。不輕許可人。人示以公所製歌詩五軸。隱乃歎賞。又與同年顧雲友。善將歸。顧雲以詩送別。我聞海上三金鰲。金鰲頭戴山高高。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傍邊一點鷄林碧。鰲山孕秀生奇特。十二乘船渡海來。文章感動中華國。十八橫行戰詞苑。一箭射破001_137d金門策。蓋心有所服云。新唐書藝文志。載崔致遠四六集一卷,桂苑筆耕二十卷。註云。崔致遠。高麗人。賓貢及第。其名顯上國如此。又有文集三十卷行於世。高麗顯宗時。從祀文廟。諡文昌侯。

 

 

 

 

 孤雲先生文集卷之二 번역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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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染和尙碑銘 竝序奉敎撰下同 a_001_167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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帝唐揃亂以武功。乾符戊戌。滅黃巢。 易元以文德之年。暢月。仲冬曰暢月 月缺之七日。日蘸咸池時。咸池星在紫微內垣天潢傍。卽未時。 海東兩朝國師禪和尙。盥浴已。趺坐示滅。新羅眞聖主二年十一月十七日。 國中人如喪左右目。矧門下諸弟子乎。嗚呼。應東身者八十九春。新羅哀莊王六年十二月二十八日生 服西戒者六十五夏。去世三日。倚繩座。儼然面如生。門人詢乂等號奉遺體。假肂 音異。殯坎。 禪室中。上 眞聖主。文考女。康王妹。 聞之001_167b震悼。使駛 驛使。 吊以書賻以穀。所以資淨供而贍玄福。越二年。攻石。封層塚。聲聞玉京。菩薩戒弟子。武州都督蘇判 新羅五品爵中第五秩 鎰,執事侍郞寬柔,浿江都護咸雄,全州別駕英雄。皆王孫也。維城輔君德。險道賴師恩。何必出家然後入室。遂與門人昭玄大德釋通玄,四天王寺 慶州狼山南麓 上座釋愼符議曰。師云亡。君爲慟。柰何吾儕忍灰心木舌。缺緣飾在三之義乎。君師父三 乃黑白相應。請贈諡曁銘塔。敎曰可。旋命王孫夏官二卿 說文。天官今吏部。地官今戶部。春官今禮部。夏官今兵部。秋官今刑部。冬官今工部。 禹珪。召桂苑 翰林苑 行人 周禮。大小行人。卽今舍人。 侍御史崔致遠。至蓬001_167c萊宮。因得竝 音傍。倚也。 琪樹。上瑤墀。跽竢命珠箔外。女君故也 上曰。故聖住大師。眞一佛出世。唐太宗撥亂。行仁德。人謂之一佛出世。 昔文考康王咸師事。福國家爲日久。余始克纘承。願繼 二字缺 先志。而天不憖遺。益用悼厥心。余以有大行者。授大名。故追諡曰大朗慧。塔曰白月葆光。乃 汝也 嘗西宦。絲染錦歸。顧文考選國子。先生嘗爲國子監學士 命學之。康王視國士。禮待之。若 汝也 宜銘國師以報之。報先王待汝之德也 謝曰。主臣。主擊臣伏。惶恐之意。 殿下恕粟饒浮秕。秕。粟不成實者。先生自謙。 念桂飽餘香。古詩。桂死有餘香。指大師。 俾報德以文。固多天幸。第大師於有爲澆世。演無爲秘宗。小臣以有限麽才。001_167d紀無限景行。弱轅載重。短綆汲深。莊子。褚小者不可懷大。綆短者不可汲深。 其或石有異言。春秋。石言于晉師曠。以作事。怨讟動于小民。進諫。我恐此碑或有異言。 龜無善顧。說文。孔愉買龜而放。龜乃三顧。今此石龜亦肯顧我乎。言不當作文。 決叵使山輝川媚。陸賦。石蘊玉而山輝。水懷珠而川媚。 反贏得林慚澗媿。北山移文。林慚無盡。澗媿不歇。註云。是乃周彥편001之媿也。 請筆路斯避。上曰。好讓也。盖吾國風。善則善已。然苟不能是。惡用黃金榜爲。古制。龍榜飾以金。虎榜飾以銀。先生以文登第。故曰金榜。 爾勉之。縱欲辭避。不可得也。 遽出書一編大如椽者。俾中涓 文官名。漢萬石君爲中涓。受書謁。 授受。乃門人弟子所獻狀也。復惟之。西學也。彼此俱爲之。而 入中國受學。則彼此同。 爲師者何人。爲役者何人。豈心學者高。口001_168a學者勞耶。故古之君子愼所學。抑心學者立德。口學者立言。則 任安書。太上立德。其次立功。其次立言。 彼德也或憑言而可稱。是言也或倚德而不朽。可稱則心能遠示乎來者。不朽則口亦無慚乎昔人。爲可爲於可爲之時。復焉敢膠讓乎篆刻。始繹 音亦。究也。 如椽狀。則見大師西遊東返之歲年。稟戒悟禪之因緣。公卿守宰之歸仰。像殿影堂之開創。故翰林郞金立之所撰聖住寺碑。叙之詳矣。爲佛爲孫之德化。爲君爲師之聲價。鎭俗降魔之威力。鵬顯 莊子。北溟魚。化鳥南徙。言大師入中國。 鶴歸 華表。丁令威鶴。比大師歸東土。 之動息。贈太傅獻康大王親製深妙寺 在今尙州 碑。錄001_168b之備矣。顧腐儒之今作也。叙佛浩漫之閒忙。不忘自家儒字。 止宜標大師就般涅槃之期。般。返也。言返始。涅。離也。槃。結也。言離煩惱結也。 及與吾君崇窣覩波之號 高顯塔號也 而已。口將手議。役將自適其適。這有上足苾蒭。來趣虀臼。蔡邕題曹娥碑曰。黃絹幼婦。外孫虀臼。乃絶妙好辭。而楊修見知。曹操行三十里方知。 語及斯意則曰。立之碑立之久矣。尙闕數十年遺美。太傅王神筆所記。盖顯示殊遇云爾。吾子口嚼古賢書。面飮今君命。耳飫國師行。目醉門生狀。宜廣記而備言之。殆貽厥可畏。後生俾原始要終。脫 音太。若也。 西笑者 關東俚語。人聞長安樂。則西向而笑。今指中原人曰西笑者也。 或袖之。脫西人笑則幸甚。吾敢求益。子無憚煩。狂001_168c奴餘態。漢光武譏嚴子陵曰。狂奴故態竟不回。 率爾應曰。僕編苫者。師買菜乎。編苫者。常以編索。比於前欲其短也。買菜者。常求其小益也。 遂絆猿心。強搖兔翰。不得已也 憶得西漢書留侯傳。尻 尾也 云。良所與上從容言天下事甚衆。非天下所以存亡。故不著。則大師時順間事蹟。莊子。適來也時。適去也順。 犖犖者星繁。非所以警後學。亦不書。自許窺一班於班史然。以管窺豹。只見一班。 於是乎管述曰。光盛且實而有暉八紘 四方四維 之質者。莫均乎曉日。氣和且融而有孚萬物之功者。莫溥乎春風。惟俊風與旭日。俱東方自出也。則天鍾 聚也 斯二餘慶。岳降于一靈性。詩云。惟岳降神。 俾挺生君子國。特立梵王家001_168d者。大師其人也。法諱無染。於圓覺祖師 唐代宗追諡達麽云圓覺 爲十世孫。俗姓金氏。以武烈大王爲八代祖。大父周川。品眞骨。位韓粲。高曾出入皆將相。戶知之。父範淸族降眞骨一等。曰得難。新羅爵有五品。一曰聖骨。二曰眞骨。三曰得難。四曰王族。五曰金骨。 晩節追蹤趙文業。趙文王好劒。故劒士來門者三千人。今範淸晩而喜劒。見憲章公謀反被誅。遂落髮入道。 母華氏魂交。莊子。寤也其神開。寐也其魂交。 覩脩臂天垂授 蓮花 花。因有娠。幾踰時。三月 申夢胡道人自稱法藏。彌陀佛。因地時號也。 授十護。十戒。 充胎敎。如太妊懷文王時事。 過期 十三月也 而誕大師。阿孩時。行坐必合掌趺對。至與羣兒戲。畫墁聚沙。必模樣像塔。而不忍一日離膝下。九歲。始001_169a鼓篋。禮記。入學鼓篋。 目所覽。口必誦。人稱曰海東神童。跨一星終。左傳。十二年一終。謂一星終也。○太師十二歲出家。卽宣德王五年。 有隘九流 儒流,道流,陰陽流,法流,名流,墨流,縱橫流,雜流,農流。 意。入道。先白母。母念已前夢。泣曰䚷。音倚。諾辭。 後謁父。父悔已晩悟。喜曰善。遂零 髮也衣也 雪山 太白山 五石寺。有五色石故名也。卽今順興浮石寺。 口精嘗藥。善解經義 力銳補天。女媧氏鍊五色石補天。比大師架空說法之意。 有法性禪師嘗扣騣 音宗 伽門 小乘法 于中夏者。大師師事數年。撢 探同 索無孑遺。性嘆曰。迅足駸駸。馬疾行貌 後發前至。吾於子驗之矣。吾悏 悏同。心悵也。 矣。無餘勇可賈於子矣。如子者宜西也。大師曰維。唯同 夜繩易惑。惑夜繩而爲實蛇。是偏計之情執。指小乘法執001_169b有之言也。 空縷難分。古有至愚者。詣織師求細布。以極細縷示之。愚人猶以爲麤。織師知其不分。乃指空曰。此縷何如。愚曰。何以無見。師曰。細故無見。若有見則是麤。此指大乘法之玄空也。 魚非緣木可求。孟子曰。以若所爲。求若所欲。猶緣木而求魚也。 兔非守株可待。韓子五蠹曰。宋人見兔觸株死。守株以待之。盖喩不可執一而學也。 故師所敎。己所悟。互有所長。苟珠火斯來。則蚌燧可棄。得珠棄蚌。得火棄燧。盖取得魚忘筌之義。○論衡曰。五月丙午日。銷鍊南方五色石銅。圓如鏡。中央霔。天晴向日。取火。十一月壬子日。鍊北方五色石銅。狀如盃盂。向月得水。 凡志於道者。何常師之有。尋移去。問驃訶健拏 華嚴 于浮石山釋澄大德。日敵三十夫。藍茜沮本色。淮南子。靑出於藍而靑於藍。絳生於茜而絳於茜。喩弟子過於師也。 顧坳盃之譬 莊子。覆盃水於坳堂之上。芥爲之舟。置盃焉膠。水淺而舟大也。謂向中原之計。 曰。東面而001_169c望。不見西牆。指中原。 彼岸不遙。何必懷土。遽出山並 音方。倚也。 海。覗西泛之緣。會國使歸瑞節 皇帝聖節 象魏下。象。像也。魏。巍也。天子之闕。托同 足而西。及大洋中。風濤欻顚怒。巨艑人。不可復振。大師與心友道亮。跨隻板恣業風。眞諦傳云。泛舶西歸。業風賦命。 通星 晝夜通也 半月餘。飄至劒山島 卽黑山島。島形如劒。故名曰劒山。 行之碕 音奇。曲岸頭也。 上。悵然甚久曰。魚腹中幸得脫身。涉海免死。 龍頷下庶幾攙 音斬。扶也。 手。庶得大寶。 我心非石。其可退轉乎。詩云。我心非石。不可轉也。 洎長慶 穆宗年號 初。朝正使 春秋傳。諸侯朝正於王。 王子昕 金陽。字魏昕。太宗之後。金周元之曾孫。 艤舟唐恩浦。南陽郡。 請寓載。許焉。旣達之罘 音浮 山㯟。山足。 顧先難後易。001_169d土揖 周禮秋官司儀。王南面見諸侯。土揖庶姓。時揖異姓。天揖同姓。註。土揖。推手少下也。時揖。平揖手也。天揖。推手少擧也。 海若 海神 曰。珍重鯨波。好戰風魔。行至大興城南山至相寺。遇說雜花者。猶在浮石時。有一䃜 音曳。美石。黑色。 顔耆年言提之曰。遠欲取諸物。易曰。近取諸身。遠取諸物。 孰與認而 汝也 佛。大師舌底大悟。自是置翰墨。游歷佛光寺。問道如滿。滿佩西江印。爲香山白尙書樂天空門友者。而應對有慚色曰。吾閱人多矣。罕有如是新羅子。他日中國失禪。將問之東夷耶。去謁麻谷寶徹和尙。服勤勞無所擇。人所難。己必易。衆目曰。禪門庾黔婁異行。黔婁爲孱陵令。父易在家遘疾。黔婁忽心驚。擧軆流汗。卽日棄官歸家。嘗糞甘苦。焚001_170a香祝天。父疾得愈。 徹公賢苦節。嘗一日告之曰。昔吾師馬和尙訣我曰。春蘤繁。秋實寡。攀道樹者所悲吒。音且。去聲。嘆也。 今授若印。異日徒中有奇功可封者。封之。無使刓。削也。 復云。東流之說。盖出鉤讖。古兵有鉤有鑲。皆劒屬。引來曰鉤。推去曰鑲。盖引當來說。故曰鉤讖。 彼日出處。善男子根殆熟矣。若若得東人可目語者。以心傳心。 畎道之。畎。田中溝。取其流引之意。道導同。 俾慧水丕冒於海隅。爲德非淺。師言在耳。吾喜若徠。來也。 今授印焉。俾冠禪侯于東土。往欽哉。則我當年作江西大兒。後世爲海東大父。其無媿先師乎。居無何。師化去。墨巾離首。服喪。 乃曰。筏旣捨矣。舟何繫焉。自爾浪遊飄飄然。001_170b勢不可遏。志不可奪。於是渡汾水。登崞 音郭 山。跡之古必尋。僧之眞必詣。凡所止舍。遠人烟。大要在安其危甘其苦。役四體爲奴虜。奉一心爲君主。就是中。顓 專同 以視篤癃恤孤獨爲己任。至祁寒酷暑。且煩渴。或皸瘃 手足凍瘡 侵。曾無勌容。耳名者不覺遙禮。囂作東方大菩薩。其三十餘年行事也如是。會昌五年。來歸。帝命也。武帝乙丑。勑外國僧。各還本蕃。詳見年譜。 國人相慶曰。連城璧復還。天實爲之。地有幸也。自是請益者。所至稻麻矣。入王城 慶州。省母社。大歡喜曰。顧吾疇昔夢。乃非優曇 般泥涅經云。閻浮提內有尊樹。名優曇鉢羅。若生金花。則有佛出世。 之一顯耶。願度來世。吾不001_170c復撓倚門之望也 王孫賈母言。已矣廼北行。擬目選終焉之所。會王子昕懸車。漢書。薛廣德乞骸歸沛。懸天子所賜安車以爲榮。傳之子孫。盖言致仕也。 爲山中宰相。梁陶弘景隱茅山。武帝每有大政。訪之。人謂山中宰相。 邂逅適願。不期而遇。 謂曰。師與吾俱祖龍樹 新羅太宗名 乙粲 職名。則師內外爲龍樹令孫。師以法嗣龍樹菩薩。 直瞠若不可及者。而滄海外。躡瀟湘故事。唐柳惲詩曰。洞庭有歸편002。瀟湘逢故人。謂唐恩浦相遇之事。 則親舊緣固不淺。有一寺在能州 今公州 坤隅。西南間藍浦聖住寺。 是吾祖臨海公受封之所。太宗第二子仁文公。字仁壽。以屠穢貊功。封能州。 間劫 燼同 流烖。天火。金田 須達長者以金布地。而買祗陀太子園以施佛故云。 半灰。匪慈哲。孰能興滅繼絶。可強爲朽夫住持乎。大001_170d師畣曰。有緣則住。大中初。唐宣宗年號。 始就居。且肸飾之。肸音惠。振也。言振整而飾也。 俄而道大行。寺大成。繇是四遠問津輩。視千里猶跬步。一擧足爲跬。再擧足爲步。 麗同 不億。不啻億也。 寔繁有徒。大師猶鍾待扣 大扣大鳴。小扣小鳴。 而鏡忘罷。音疲。胡來胡見。漢來漢現。如問卽答之意。 至者靡不以惠炤導其目。法喜 禪悅食也 娛其腹。誘憧憧之躅。變蚩蚩之俗。文聖大王 神武王之太子 聆其運爲。莫非裨王化。甚㤎 音哥。法也楷也。 之。飛手敎優勞。且多大師畣山相之四言。有緣則住四字。 易寺榜 舊名烏合寺 爲聖住。仍編錄大興輪寺。興輪。國之願堂。奴婢田沓。屬於聖住寺。 大師酬使者曰。寺以聖住爲名。招提固所爲榮。至寵庸僧。濫吹001_171a高笛。莊子。齊宣王好竽。南郭先生不知竽。而以吹竽食祿。 寔避風斯媲。音比。配也。莊子。海鳥避風。止於魯郊。魯侯御以觴之于廟。具太牢以爲膳。鳥乃眩視。憂悲不敢食飮。三日而死。是不以鳥養鳥。今王之寵師亦猶是也。 而隱霧可慙矣。陶答子不顧名譽而治家產。其妾諫曰。有玄豹。霧雨七日。不下食。欲澤其文章。隱而避害。凡豕貪啗無厭。故因以見俎。今子無隱霧之操。有凡豕之欲。妾懼之。 時憲安大王 文聖王之弟。神武王之次子。名宜靖。 與檀越 唐梵雙擧。檀。此云惠施。卽惠施越苦海也。弟也。舒發韓 翰同。職名。 魏盺。名也。姓金。 爲南北相。左右相也。 遙展攝齋 音咨。裳下縫也。師行。弟子攝師之齊。 禮。贄以茗馞 香也。使無虛月。至使名 霑同。 東國士流。不識大師之門。爲一世羞。得禮足者退必唶 音借。嘆聲。 曰。面謁百倍乎耳聞。口未出而心已入。抑有猴虎而冠者。亦熄其趮 音躁。輕急 001_171b貌也。音革。更也。 其虣。音暴。虎也。猛也。周禮大司편003徒。以刑敎中。則民不虣。 而傹 競同 犇馳善道。曁憲王嗣位。賜書乞言。大師畣曰。周禮對魯公之語。有旨哉。著在禮經。請銘座側。哀公問曰。何爲則民服。孔子對曰。擧直措諸枉則民服。又問。一言可以興邦。有諸。對曰。人之言曰。爲君難。爲臣不易。如知爲君之難。不幾乎一言興邦乎。又問。一言可以喪邦。有諸。對曰。人之言曰。予無樂乎爲君。惟其言而莫予違。如其不善而莫之違。則不幾乎一言喪邦乎。 逮贈太師先大王 景文王也。姓金名膺廉。僖康王孫。阿飡啓明子也。憲安無子。立以爲嗣。 卽位。欽重如先朝志。而日加厚焉。 凡同 所施爲。必馳問然後擧。咸通 懿宗年號 十二年秋。飛鵠頭書。天子詔。以紫泥封之。含於丹鳳頭。以五色絲係而下之。諸侯以黃泥封之。含於黃鵠頭。以綵線引而下也。 以傳 去聲。卽驛馬也。 召曰。山林何親。城市何疎。大師001_171c謂生徒曰。逃命伯宗。左傳。梁山崩。晉侯以傳召伯宗。伯宗避之。 深慚遠公。通載云。慧遠公在廬岑。天子至潯陽。三召不出。 然道之將行也。時乎不可失。念付囑。故 佛涅槃時。以佛法流通。付囑國王大臣也。 吾其往矣。歘爾至轂下。及見先大王 景文王 冕服。拜爲師。君夫人世子曁大弟相國。羣公子公孫。環仰如一。一如古伽藍繢壁面寫出西方諸國長侍勃陁 佛陀同 樣式。上曰。弟子不佞。少好屬文。嘗覽劉勰 音叶。梁武帝時人。推爲昭明太子所重。著文心雕편004五十卷。 文心。有語云。滯有守無。徒銳偏解。欲詣眞源。其般若之絶境。則境之絶者。或可聞乎。大師對曰。境旣絶矣。理亦無矣。斯印也默行爾。上曰。寡人固請少進。爰命001_171d徒中錚錚者。光武謂樊崇。鐵中錚錚。 更手撞擊。隨問以答。如鍾撞擊。 舂容盡聲。舂容。鯨枹舂鍾之聲。言說法之意。 剖滯祛煩。若商颷之劃陰靄然。於是上大喜。懊 恨也 見大師晩曰。恭己南面。司南 司。守主也。南。任也。 南宗。舜何人哉。余何人也 用孟子語。 旣出。卿相延迓。與謀不暇。士庶趨承。欲去不能。自是。國人皆認衣珠。法華中。有人衣內係珠。喩事不煩引。 隣叟罷窺廡玉焉。尹文子云。魏叟得徑尺玉。隣人曰。此至恠石也。拋置廡下。夜間光照一室。益大駭。棄之野。隣人獻之王。王賜獻玉者千金。長食上大夫祿。 俄若樊笯中。樊笯。養鳥之具。比王宮。 卽亡去。上知不可強。乃降芝檢。瑞命記云。王者德仁則芝艸生。故王之手書。謂芝檢。 以尙州深妙寺不遠京。請禪那別舘。辭不獲。往居之。一日必葺。儼若化001_172a城。別開一城。誘引權少。故云化城。 乾符 僖宗年號 三年春。先大王不預。命近侍曰。亟迎我大醫王來。使至。大師曰。山僧足及王門。一之謂甚。知我者。謂聖住爲無住。不知我者。謂無染爲有染乎。然顧與吾君有香花因緣。郭子儀與吐蕃結香火之約。言焚香告天而結兄弟。 忉利之行 此云三十三天。帝王之死。云乘天賓天。故取其意也。 有期矣。盍就一訣。復步至王居。設藥言。施箴戒。不覺疾愈。擧國異之。旣逾月。獻康大王居翼室。捨正殿而居翼室。以居憂故也。 泣命王孫勛榮。諭旨曰。孤幼遭悶凶 父死。未能知政。致君奉佛。誧 普同 濟海人。與獨善其身不同言也。幸大師無遠適。所居惟所擇。對曰。古之師則六籍 王守仁曰。六經001_172b是聖心之記籍。 存。今之輔則三卿在。老山僧何爲者。坐蝗蠹桂玉哉。蝗蠢害穀虫。○戰國策。蘇秦說楚王曰。米貴於玉。薪貴於桂。 就有三言。庸可留獻。曰能官人。言任賢人。 翌日。挈山裝鳥逝。自爾騎置 音智。驛傳也。漢烏孫傳。騎置以聞。師古曰。今之顓馬。 傳訊。影綴巖溪。遽入 驛卒 知往抵聖住。卽皆雀躍。叢手易轡。慮滯王程。猶尺寸地。由是。騎常侍 司馬門校尉。卽今宣傳官。 倫伍 倫輩。伍卒。 得急宣。爲輕擧。乾符帝 僖宗 錫命之歲。冊封獻康王。 令國內舌抄有可道者。以道治國之政事。 貢興利除害策。別用蠻牋 南蠻所出美牋 書。言荷天寵有所自。因垂益國之問。大師引出何尙之獻替宋文帝 劉宋 心聲 孟子曰。言者。心之聲也。 爲對。太傅王覽謂介弟001_172c介。大也。 南宫相 有南北相 曰。三畏 孟子曰。君子有三畏。畏天命。畏大人。畏聖人。 比三歸。五常均五戒。能踐王道。是符佛心。大師之言至矣哉。吾與汝宜惓惓。中和西狩之年秋。僖宗辛丑。避黃巢亂。入蜀。 上謂侍人曰。國有大寶珠。畢世 櫝同 而藏之。其可乎。曰。不可。不若時一出。俾醒萬戶眼。醉四隣心。曰。我有摩尼 如意珠 上珍。匿曜在崇巖山。脫闢秘藏。宜照透三千界。何十二乘之足道哉。我文考懇迎。嘗再縣矣。昔酇侯譏漢王拜大將如召少兒。不能致商山四老人。以此。今聞天子蒙塵。黃巢亂。 趣令奔問官守。天子之官守。 勤王加厚。歸佛居先。將邀大師。必叶外議。吾豈敢倚其001_172d一慢其二哉。用孟子爵齒德語。 乃重其使。卑其辭徵之。大師云。孤雲出岫。寧有心哉。有緣乎大王之。無固乃上士之道。遂來見。見如先朝之禮。禮之加。焯灼可屈指者。面供饌。一也。手傳香 表信。二也。三禮者三。三也。秉鵲尾爐 香爐有長柄者。締生生世世緣。四也。加法稱曰廣宗。五也。翌日。命振鷺。少昊鳥官之時。以鵷鷺爲三公。 趨鳳樹。鳳非梧桐不棲。鳳樹。指大師留宿之所。 雁列賀。六也。敎國中磋磨 如磋如磨 六義 風雅頌比賦興 者。賦送歸之什。在家弟子王孫蘇判嶷榮。首唱。斂成軸。侍讀翰林才子朴邕。爲引而 引始於班固典引。引與序一也。 贈行。七也。申命掌次 禮記。掌次。卽修正處所次知官。 張淨室。要叙別。八也。001_173a臨告別。求妙訣。乃眴 音旬。以目指揮。 從者。擧眞要。有若詢乂,圓藏,靈源,玄影 四禪中得淸淨者。緖柚 杼。持緯者。柚。受經者。 其慧。表纖旨。注意無怠。沃心有餘。太甲曰。啓乃心。沃朕心。 上甚悅。擡拜曰。擡。擧也。擧手而拜。 昔文考爲捨瑟之賢。今寡人忝避席之子。捨瑟。曾點言志事。曾子避席。見孝經。 繼體 紹父之體 得崆峒之請。廣成子在崆峒上。黃帝問長久之道。 服膺 中庸。眷眷服膺而不失。 開混沌之源。混沌。元氣未分之前。卽生無極。 則彼渭濱老翁。姜太公 眞釣名者。圯上孺子。張子房 盖履跡焉。履。古人言跡。 雖爲王者師。徒弄三寸舌也。曷若吾師語。密傳一片心乎。奉以周旋。不敢失墜。太傅王雅善華言。金玉之音。不患衆咻聒而能出口。成001_173b儷語。偶配之語。 如宿構云。大師旣退。且往應王孫蘇判鎰。共言數返。卽嘆曰。昔人主有遠體 體度 而無遠神 神知 者。而吾君備。人臣有公才而無公望者。而吾子全。國其庶乎。孟子云。齊其庶幾乎。 宜好德自愛。及歸謝絶。於是。遣輶軒 輕車。 標放生場 立禁標。使獵士不入。故謂放生。顏眞卿作放生碑。 界。則鳥獸悅。紐 結也 銀鉤。扎 寫也 聖住寺題。則龍蛇活。盛事畢矣。昌期忽兮。獻康昇遐 定康大王 獻康之弟 莅阼。兩朝寵遇。師而行之。使緇素重使迎之。辭以老且病。太尉王 卽位之初。帝命錫太尉。 流恩海表。仰德高山。嗣位九旬。馳訊十返。俄聞曁 音期痛也 腰之苦。遽命國醫往爲之 治也。至則請苦狀。大師微001_173c破顏曰。老病無煩治。糜飧二時。必聞鍾後進。其徒憂食力虧。陰戒掌枹者。陽密擊。乃目牖而命撤。將化往。命傍侍。警遺訓于介衆 左傳。問于介衆。介。大也。 曰。已過中壽。上壽百。中壽八十。下壽六十。 難逃大期。我儂遠遊。楚人謂我爲儂 爾曹好住。講若畫一。守而勿失。古之吏尙如是。今之禪宜勉旃。吿訣哉 欃同 罷。慹然 慹。音執。不動貌。 而化。大師性恭謹。語不傷和氣。禮所云中退然言吶吶然 禮記註。中。身也。退。謙也。吶。同訥。 者乎。黌侶 學侶也 必目以禪師。接賓客。未嘗殊敬乎尊卑。故滿室慈悲。烝徒悅隨。五日爲期。俾來求者質疑。諭生徒則曰。心雖身主。身要作心師。患不爾思。道豈遠而。001_173d汝也。 設是田舍兒 農夫 能擺脫塵羈。我馳則心馳矣。導師敎父。寧有種乎。又曰。彼所啜。不濟我渴。彼所噉。不救我餒。盍努力自飮自食。或謂敎 儒也佛也 爲無同。吾未見其宗。不同之宗 語本夥頤。陳涉世家云。楚人謂多爲夥。服虔曰。頤者。助聲之謂也。 非吾所知。大較 音角。大略。 同弗與。許也 異弗非。禮記儒行篇註。與其所可與。不必同乎己也。非其所可非。不必異乎己也。同於己者或鄕愿。公而不與。異於己者或行怪。惡而不非。 宴坐息機。斯近縷褐被者歟。其言顯而順。其旨奧而信。故能使尋相爲無相。道者勤而行之。道經云。上士聞道。勤而行之也。 不見有歧中之歧。楊子。有亡羊。歧中多歧。故不知所之。喩大道本一。而人各異說。 始壯及衰。自貶爲基。食不異糧。衣必均服。凡所營葺。001_174a役先衆人。每言祖師嘗踏泥。佛造祗垣精舍。所舍利弗爲匹。迦葉踏泥。 吾豈暫安栖。至摙水 摙。音連。負擔也。 負薪。或窮親。且曰。山爲我爲塵。言名山由我居而汚也。 我安得安身。其克己勵物。皆是類。大師少讀儒家書。餘味在唇吻。故酬對多韻語。門弟子名可名者。厪二千人。索居而稱坐道場者。曰僧亮。曰普愼。曰詢乂。曰僧光。諸孫詵詵。音侁。衆也。 厥衆濟濟。盛貌 實可謂馬祖毓龍子。東海掩西河焉。子貢弟子田子方。敎授於西河。學者數千人。 論曰。麟史不云乎。公侯之子孫必復 入聲 其始。則昔武烈大王 太宗金春秋也 爲乙粲時。爲屠穢貊乞師計。將眞德女君命。陛覲昭陵皇帝。唐太宗。 面陳願奉正朔。001_174b易服章。天子嘉許。庭賜華裝 玩好寶物。 授位特進 品秩。一日。召諸蕃王子宴。大置酒。堆寶貨。俾恣滿所欲。王乃杯觴則禮以防亂。繒綵則智以獲多。臮 洎同 辭出。文皇 唐宗 目送而嘆曰。國器。及其行也。以御製幷書溫陽晉祠二碑曁御撰晉書一部 太宗卽位之初。魏王泰請撰晉書。音賴。賜也。 之。時蓬閣 校書官名 寫是書。裁竟二本上。一賜儲君。一爲我賜復命。華資官 疑是護賓官也 祖道靑門外。高辛氏之子累祖。遠遊死於道。後人發行祭之。則他鬼不侵云。 則寵之優禮之厚。設矓盲乎。智者亦足駭耳目。自玆吾土一變至於魯。八世之後。大師西學而東。化加一變至於道。則莫之與京 大也。捨我謂誰。001_174c偉矣哉。先祖 武烈大王 平二敵國。高麗百濟。 俾人變外飾。易服章。 大師降六魔賊。俾人修內德。故得千乘主。兩朝拜起。四方民萬里奔趨。動必頤使之。賈誼曰。頤指如意。言易使也。 靜無腹非者。庸詎非應半千而顯大千者歟。復其始之說。亦何慊乎哉。彼文成侯爲師漢祖。大誇封萬戶。位列侯爲韓相子孫之極。則㑋矣。假學仙有始終。果能白日上升。去於中止。得爲鶴背上一幻軀爾。言子房托仙之非。 又焉珿 音畜。齊也。 大師拔俗於始。濟衆於中。潔己於終矣乎。美盛德之形容。古尙乎頌。頌偈類也。扣寂爲銘。扣寂。遠公註。扣虛課寂。 其詞曰。
001_174d可道爲常道。。無用之體。卽非常道。 如穿艸上露。卽佛爲眞佛。馬祖說法。卽心卽佛爲眞佛。 如攬水中月。道常得佛眞。海東金上人。本枝根聖骨。瑞蓮資報身。脩臂授蓮。 五百年擇地。十三歲離塵 出家。 雜花引鵬路。授花嚴于浮石。 窽木浮鯨津。隻板至劒山島事。 觀光堯日下 中原。 巨筏悉能捨。指徹公化去後浪遊。 先達皆嘆云。苦行無及者。如滿言 沙之復汰之。東流是天假。會昌年間。仍戒賢僧沙汰佛法之事。 心珠瑩麻谷。目鏡燭桃野。商受本記。東海桃索山。有大桃樹。根盤五千里。東西南北枝長各三千里。是以東土謂之桃也。 旣得鳳來儀。衆翼爭追隨。試觀龍變化。凡情那測知。仁方示方便。聖住強住持。松門遍掛錫。巖徑難容錐。我非待三顧。我001_175a非迎七步。北齊文宣王謁僧稠。稠趺坐不迎。其徒有勸迎者。稠曰。昔賓頭廬尊者迎阿育王。起行七步。致王失國七年。貧道雖寡德。冀王獲福。 時行則且行。爲緣付囑故。二王拜下風。一國滋甘露。鶴出洞天秋 出山。雲歸海山暮 入山。來貴乎業龍。西遊記。涇河龍王。夢見唐太宗曰。陛下是眞龍。小臣是業龍。以罪業故。爲龍行雨。 去高乎冥鴻。冥。空也。色斯之鴻。 渡水陿巢父。堯讓天下。許由洗耳。巢父飮犢上流。比師入京則反陿也。 入谷超朗公。釋僧朗。常在京洛。乞飯饍。未嘗入山。今師則還山。故超也。 一從歸島外。自中原返東國。 三返遊壺中。費長房爲汝南市椽。見賣藥翁。市罷。入壺中。長房隨入。則別有天地。 群迷謾臧否。至極何異同。是道澹無味。然須強飮食 去聲。他酌不吾醉。他飧不吾飽。誡衆點心何。糠名復粃利。勸俗飾身何。甲仁復胄義。001_175b汲引無棄遺。其實天人師。昔在世間時。擧國成琉璃。自寂滅歸後。觸地生蒺莉。西域記。莊法師到摩竭陀國菩薩金剛座上。荊棘匝地云。 泥洹一何早。通載。老子至流沙。嘆曰。吾生一何晩。泥洹一何早。不見釋迦文。中心空懊惱。又黃庭。丹中眞火。自尾閭上升。過夾脊,玉京,髓海。入浘洹宮中。則昇天。如佛之涅槃也。 今古所共悲。甃石復刊石。藏形且顯跡。鵠塔點靑山。龜碑撑翠壁。是豈向來心。徒勞文字覛。音麥。相視貌。 欲使後知今。猶如今視昔。君恩千載深。師化萬人欽。誰持有柯斧。元曉詩。誰許沒柯斧。以作撑天柱。 誰倚無絃琴。喩大師無生說法也。 禪境雖沒守。客塵寧許侵。鷄峯待彌勒。付法持應與迦梨入鷄足山。三峯合爲一峰。乃至彌勒出世。 長在東鷄林。始林有鷄異。故改名鷄林。詳見東史。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형태서지 | 저 자 | 가계도 | 행 력 | 편찬 및 간행 | 구성과 내용
  형태서지
권수제  桂苑筆耕集
판심제  桂苑筆耕
간종  활자본
간행년  1834年刊
권책  20권 4책
행자  10행 20자
규격  23×17(㎝)
어미  上黑魚尾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도서번호  奎4220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
 저자
성명  최치원(崔致遠)
생년  857년(통일신라 헌안왕 1)
몰년  ?
 海雲(夫)
 孤雲
본관  慶州
시호  文昌侯
특기사항  文廟에 배향
 가계도
 崔肩逸
 
 崔致遠
 

기사전거 : 新羅國初月山大崇福寺碑銘(崔致遠 撰)에 의함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헌안왕 1 857 정축 大中 11 1 慶州 沙梁部에서 태어나다.
경문왕 8 868 무자 咸通 9 12 당 나라에 건너가 國子監에 유학하다.
경문왕 14 874 갑오 乾符 1 18 9월, 예부시랑 裵瓉이 主試한 賓貢科에 급제하여 進士가 되다.
헌강왕 1 875 을미 乾符 2 19 洛陽을 遊浪하며 지은 賦 5수, 詩 100수, 雜詩賦 30수를 모아 3편으로 편집하다.
헌강왕 2 876 병신 乾符 3 20 宣州 溧水縣尉가 되다. 이때 公私間에 지은 글을 모아 「中山覆簣集」 5권을 만들다.
헌강왕 3 877 정유 乾符 4 21 겨울, 율수현위를 사직하다.
헌강왕 4 878 무술 乾符 5 22 宏詞科에 응시하기 위해 終南山에서 공부하다.
헌강왕 5 879 기축 乾符 6 23 黃巢의 난이 일어나자 諸道行營兵馬都統 高騈의 종사관이 되어 書記의 일을 맡다. 이후 4년간 軍幕에서 表ㆍ狀ㆍ書ㆍ啓ㆍ檄文 등을 도맡다.
헌강왕 6 880 경자 廣明 1 24 7월, 〈討黃巢檄文〉을 지어 文名을 천하에 떨치다.
헌강왕 8 882 임인 中和 2 26 황제로부터 紫金魚袋를 하사받다.
헌강왕 9 883 계묘 中和 3 27 고변의 書記로 있으면서 지은 만여 편의 글 중에 정수만을 뽑아 「桂苑筆耕」 20권을 만들다.
헌강왕 10 884 갑진 中和 4 28 10월, 귀국을 결심하고 〈歸勤啓〉를 올리자 唐 僖宗이 送詒使로 삼아 詔書를 내려 허락하다. 顧雲ㆍ楊贍ㆍ吳巒 등과 석별하며 시를 주고받다. ○ 풍랑 때문에 曲浦에서 체류하다.
헌강왕 11 885 을사 光啓 1 29 3월, 귀국하다. ○ 侍讀 兼翰林學士 守兵部侍郞 知瑞書監事가 되다. ○ 왕명으로 〈大崇福寺碑文〉을 짓다.
헌강왕 12 886 병오 光啓 2 30 1월, 당에서 지은 「계원필경」ㆍ「중산복궤집」 및 詩賦 3권을 헌강왕에게 올리다.
진성여왕 1 887 정미 光啓 3 31 1월, 〈大華嚴宗佛國寺毘盧遮那文殊普賢像讚並序〉를 짓다.
진성여왕 4 890 경술 大順 1 34 시기하는 자들로 인해 외직을 자원하여 太山郡(泰仁) 太守가 되다. ○ 왕명으로 〈朗慧和尙碑文〉을 짓다.
진성여왕 7 893 계축 景福 2 37 富城郡(瑞山) 太守가 되다. 마침 조정에서 賀正使로 삼아 당에 파견하려 했으나 흉년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사방에서 도적이 일어나 중지되다.
진성여왕 8 894 갑인 乾寧 1 38 2월, 時務十餘條를 올리다. 왕이 가납하여 阿飡에 임명하다. 그러나 시무책은 시행되지 못한다.
진성여왕 9 895 을묘 乾寧 2 39 7월, 〈海印寺妙吉祥塔記〉를 짓다.
진성여왕 10 896 병진 乾寧 3 40 가족을 데리고 伽倻山으로 들어가다.
효공왕 2 898 무오 光化 1 42 1월, 〈新羅伽倻山海印寺結界場記〉를 짓다.
효공왕 4 900 경신 光化 3 44 12월, 〈海印寺善安住院壁記〉를 짓다.
현종 11 1020 경신 天禧 4 - 內史令에 추증되고 문묘에 從祀되다.
현종 14 1023 계해 天聖 1 - 2월, 文昌侯로 追封되다.
명종 7 1552 임자 嘉靖 31 - 후손에게 군역을 부과하지 말도록 전교하다.
명종 16 1561 신유 嘉靖 40 - 慶州에 서원이 세워지다.(1623년 西岳書院으로 사액)
광해군 7 1615 을묘 嘉靖 43 - 泰仁 武城에 서원이 세워지다.(1696년 武城書院으로 사액)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 咸陽 柏淵에 서원이 세워지다.
영조 31 1755 을해 乾隆 20 - 大丘 解顔縣에 桂林祠를 세워 影幀을 봉안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光 14 - 「桂苑筆耕集」이 간행되다.(洪奭周ㆍ徐有榘의 序)
- - 1926 병인 - - - 6월, 후손 崔國述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盧相稷의 序) ○ 겨울, 후손 崔勉植 등이 「孤雲先生文集」을 간행하다.(李商永의 序)

기사전거 : 孤雲先生事蹟 등에 의함
 편찬 및 간행
저자는 당 나라에서 귀국한 직후인 886년에 在唐時의 저작을 정리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도합 28권을 헌강왕에게 올렸다. 이때 아울러 올린 桂苑筆耕集序에 저작목록이 실려 있다. 즉 私試今體 5수 1권, 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雜詩賦 30수 1권, 「中山覆簣集」 1부 5권, 「桂苑筆耕集」 1부 20권이다. 〈私試今體〉ㆍ〈五言七言今體詩〉ㆍ〈雜詩賦〉는 東都를 유랑하며 붓으로 호구지책을 할 때 지은 것이고, 「중산복궤집」은 宣州 溧水縣尉로 있을 때 公私間에 지은 것이다. 「계원필경집」은 879년부터 4년간 고변의 幕府에서 從事巡官으로서 書記의 職任을 맡고 있을 때 지은 만여 편의 글 가운데서 정수만을 뽑아 20권으로 편차한 四六文의 전형적인 글이다. 이 중 詩도 약간 포함되어 있다.
이 밖에 저자의 저술에 관하여 「新唐書」에는 四六集 1권, 桂苑筆耕 20권, 「삼국사기」에는 文集 30권, 「해동문헌총록」에는 崔氏文集 30권, 桂苑筆耕 20권, 四六集 1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존하는 것은 「계원필경집」 20권을 비롯하여 「고운선생문집」 등이다.
「계원필경집」은 삼국사기ㆍ해동문헌총록 등의 기록으로 미루어 고려ㆍ조선 중엽까지 여러 차례 간행된 것으로 보이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 후 1834년 徐有榘가 호남 관찰사로 재직 중 洪奭周의 집에 家藏된 舊本을 얻어 編目과 義例는 그대로 두고 잘못된 글자만을 교정하여 全州에서 聚珍字로 간행하였다.《1834年刊本》 이 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奎4220), 국립중앙도서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18년에는 후손 崔基鎬 등이 慶州 伊上齋에서 木活字로 간행하였다.《1918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한46-가142-2), 고려대ㆍ연세대 중앙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1930년에는 陰城 慶州崔氏文集發行所에서 新活字로 간행하였다.《1930年刊本》 이 본은 현재 국립중앙도서관(古3648-文82-68)에 소장되어 있다.
본서의 저본은 1834년 全州에서 간행된 활자본으로 서울대 규장각장본이다.

기사전거 : 序(洪奭周ㆍ徐有榘ㆍ崔致遠 撰) 등에 의함
 구성과 내용
본 문집은 20권 4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부분 文이다.
권수에는 1834년에 쓴 洪奭周와 徐有榘의 校印桂苑筆耕集序와 886년 저자가 「桂苑筆耕」을 포함하여 雜詩賦 및 表奏集 합 28권을 저작목록과 함께 헌강왕에게 올릴 때 쓴 自序가 실려 있다.
권1~16은 淮南에서 高騈의 종사관으로 있을 때 그를 대신하여 지은 軍文이며, 권17~20은 저자 자신의 입장에서 쓰여진 글이다. 그리고 권 앞에는 각각 목록이 첨부되어 있다.
권1에는 表 10수, 권2에는 表 10수, 권3에는 狀 10수, 권4에는 奏狀 10수, 권5에는 奏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대부분 天子에게 올린 글이다. 권6은 堂狀으로 狀 10수가 실려 있는데 中國 諸官에게 올린 글이다. 권7~10은 別紙로서 각각 20수가 실려 있다. 권11에는 檄書 4수, 書 6수가 실려 있다. 이 중 〈詩黃巢檄文〉은 저자의 文名을 천하에 떨친 글이다. 권12는 委曲으로 20수의 中國下官에게 보낸 私信이 실려 있다. 권13~14는 擧牒으로 각각 25수가 실려 있는데, 下官들의 人事異動을 통지하는 私信이다. 권15에는 道敎관계의 글인 齋詞 15수, 권16에는 祭文 4수, 書 2수, 記 2수, 疏 2수가 실려 있다.
권17에는 啓狀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고변의 功德을 칭송한 七言紀德詩 30수가 〈獻詩啓〉 아래에 附記되어 있다. 권18에는 書ㆍ狀ㆍ啓 25수가 실려 있다. 권19에는 狀啓 1수, 別紙 9수, 雜著 10수가 실려 있다. 이 중 잡저는 편지 글이다. 권20에는 啓狀 4수, 別紙 5수, 祭文 1수, 詩 30수가 실려 있다. 대부분 저자가 귀국할 즈음에 올린 狀과 귀국전후의 심경을 읊은 시이다.


필자 : 金圻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