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유당전서보유>의 저작별 진위문제에 대하여(上) 다산 / 연구논문

2014. 12. 1. 23:42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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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당전서보유>의 저작별 진위문제에 대하여(上) 다산 / 연구논문

2010/09/10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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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종, 고려대 한문학과

다산학 9호(2006) : 123~175

 

머리말

 

   다산 정약용의 “자편고自編稿를 바탕으로 외현손外玄孫 김성진金誠鎭이 편차編次한 것을 정인보鄭寅普․안재홍安在鴻 등이 교정校正하여 1934년부터 1938년까지 5년에 걸쳐 경성京城의 신조선사新朝鮮社에서 연활자鉛活字로 인행印行한 초간본初刊本”을 우리는 대개 ‘신조본新朝本’이라 부른다. <정본여유당전서(가칭)>를 편찬함에 있어 ‘신조본’ 에 대한 재교열은 물론이고 나아가 정밀한 검토를 통해 오록誤錄된 것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마땅할 것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본고가 설정한 범위가 아니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이미 알려진 오류 한 가지에 대해서 상기하고자 한다. 민족문화추진회의 <표점영인 한국문집총간>의 <여유당전서> 1책의 142~149쪽에 수록되어 있는 <우세화시집又細和詩集>은 다산과 동대인물이던 이면백(李勉伯, 1767~1840)의 저작이므로 제외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다산학회 회장 박종홍 선생의 배려와 김영호 선생의 오랜 공력 끝에 1973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에 걸쳐 출간된 <여유당전서보유>(이하 ‘보유補遺’라 약칭한다) 5권은, 이을호 교수가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오층탑 조성(1, 2, 3, 4, 5권의 완간)에 공적이 지대하신 김영호金泳鎬 교수께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때로부터 30여년이 지난 오늘날 같은 상황에서는 이처럼 43종의 자료를 모은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계의 상황을 보면 <신조본> 연구에 치중하여 ?보유?를 홀시한 면이 없지 않다. 그 이유는 위당爲堂의 말씀대로 다산의 저술이 ‘지부해함地負海涵’하여 ?신조본?의 연구에도 부족하기 때문일까? 혹은 다산이 자편고를 편찬하면서 버린 것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여기에 다산의 저작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 일부 저술이 들어있다는 일부의 논의가 과장되어 편찬에 대한 신용도가 떨어져서일까? 단언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제 ?정본여유당전서定本與猶堂全書(이하 ?정본?으로 약칭한다)?를 편찬하기 위한 작업이 시작된 이상, ?보유?에 수록된 여러 자료에 대한 정밀한 검토를 더 이상 미뤄서는 안 되는 시점에 와 있다. 포전인옥抛磚引玉의 심정에서 먼저 이 문제에 대해 소략하게 접근하는 바이다.

 

   이제 1책부터 5책까지에 수록되어 있는 43종의 저술들을 차례로 배열한 다음, 서제書題에 대한 간단한 해설을 하고, ?정본?에의 수록 여부에 대한 졸견拙見을 부기하고자 한다.

 

<보유 1책>에는 ?다암시첩茶盦詩帖?이하 모두 5종이 수록되어 있다.

 

1) <다암시첩茶盦詩帖>

 

<다암시첩茶盦詩帖>은 다산이 강진 다산초당에서 지은 시 가운데 12수를 써서 다산초당의 원주인인 윤단尹慱의 손자이자 ‘다산 18제자’의 한 사람인 윤종삼(尹鍾參, 1798~1878)에게 주었던 것이다. 그 경개梗槪가 다산의 맏아들 정학연의 발문에 밝혀져 있다. 다암茶盦은 다산茶山의 암자라는 의미이다. ‘암盦’의 본뜻은 ‘복개覆蓋’ 즉 ‘그릇의 뚜껑’이나 ‘암庵’ 혹은 ‘암菴’자의 통용자通用字로 쓰인다. 이을호 교수의 소장이라는 <다암시첩茶盦詩帖>의 진위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정학연의 찬贊 48구句와 차운시次韻詩 12수首의 <정본> 수록 여부는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신조본>에 수록된 「천진소요집天眞消搖集」의 전례前例를 따른다면 수록하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2) <죽란유태집竹欄遺蛻集>

 

?죽란유태집?의 ‘죽란’은 ‘죽란시사竹欄詩社’를 말한다.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이 서울 명례방에 마련한 우거寓居의 울타리가 대나무로 되어 있었던 듯하다. 여기에서 이름을 딴 것으로 보인다. 죽란시사는 다산이 동갑 친구인 채홍원蔡弘遠과 함께 발의하여 위로 4살, 아래로 4살에 해당하는 남인 신진사류 15명으로 구성한 시회詩會이다. ‘유태遺蛻’는 ‘유물遺物’과 같은 뜻이다. 죽란시사는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폄직되기 직전에 조직한 시회로 보이는데, ?죽란유태집?은 더 이상 활동을 하지 못하게 된 뒤에 그 당시까지 지은 시편을 모은 것으로 보인다. 이 시회는 신유사옥이 일어나던 1800년까지 지속되었지만 결성된 시기는 다산이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 직전으로 34세 때인 1795년으로 보이며, 왕성한 활동기는 금정에서 도성으로 돌아 온 1795년 말부터 곡산부사로 임명되어 도성을 떠나던 1796년 윤6월까지로 보인다. 그 당시의 주요 시편들이 ?신조본?에 수록되어 있다. 이 <죽란유태집>이 「자편고自編稿」에서 빠진 까닭을 알기 어렵다. 시인時人들이나 후인後人들의 오해를 야기할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수록된 작품 대부분이 1795년부터 1800년 사이에 지어 진 것으로 보이나, 그 가운데 19세 때 지은 「제촉석루題矗石樓」가 수록되어 있는 점, 말미에 「대인제기고문代人祭其姑文」, 「대인제기처형문代人祭其妻兄文」 같은 두 편의 제문이 들어있음이 이상하기는 하다. 그러나 앞 두 편은 습유拾遺로, 뒷 두 편은 그 당시의 작품이므로 수록해 놓은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므로 ?정본?에 수록되어도 무방하다고 본다.

 

 

3) <진주선眞珠船>

 

   ‘진주선’은 중국 고서에서 그 용례를 찾아보면 지극히 진귀한 사물을 의미하는 말이다. 다산이 22세이던 1783년에 지은 「수중적화서水中摘禾黍」로부터 39세이던 1800년에 지은 「서우발라화가탄목단부용序優鉢羅花歌歎牧丹芙蓉」 등 160여餘 제題의 과시체시科試體詩와 응제시應製詩를 모아 놓은 것이다. 그 중 32세(1793)때의 작作으로 보이는 「여정목女貞木」에는 어비이상御批二上, 「가사호假四皓」에는 어비이중御批二中, 「대초미금사채중랑對焦尾琴謝蔡中郞」에는 어비이상御批二上, 「매전필금구수모이자표每戰必錦裘繡帽以自表」에는 상제삼중庠製三中, 「논연경기후탄천지지기수변論燕京氣候歎天地之氣隨變」에는 승보이하升補二下, 「좌지인우집장이중처左持引右執杖而中處」에는 상괴庠魁, 34세(1795) 때의 작作으로 보이는 「산우욕래풍만루山雨欲來風滿樓」에는 번옹비이중樊翁批二中, 「나체림중躶體林中」에는 번옹비이상樊翁批二上, 「함양저사방수가문□□자안부咸陽邸舍訪須賈問□□者安否」에는 번비이상樊批二上, 「첩여오십금輒予五十金」에는 어비상지하御批上之下 등의 정조正祖와 채제공의 평점評點이 부기附記되어 있다. 이러한 과시체시나 응제시는 대부분 중국의 고사故事와 인물의 사적事績을 시제試題로 하여 지은 것으로 일반적인 경우 문집文集 편찬시에 제외된다. 「자편고」에 수록되지 않은 것은 이러한 상황이 반영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산의 이러한 작품 가운데는 문재文才를 과시하는데 그치는 형식적인 것이 아닌 작품이 가끔 보인다. 예를 들어 「과삼전도탄한강하귀過三田渡歎漢江何歸」(150쪽)는 병자호란에 대한 다산의 감상을 담은 영회시詠懷詩이다. 또 「칠서수위서이자계무회소학漆書授衛徐二子戒無悔所學」(175쪽)에는 ?상서尙書?에 대한 다산의 관점이 드러나 있어 다산 경학 연구의 한 자료가 된다. 한 가지 부언附言할 것은 124쪽의 「증례직贈禮直」과 「증화진贈華眞」은 착간錯簡으로 보인다.

 

4) <동원수초桐園手鈔>

 

   김영호 선생이 해제에서 밝혀 두었듯이 ?동원수초桐園手鈔?는 선생의 유배지인 강진康津의 귤동橘洞에서 한 평생 다산선생 사업事業에 힘쓴 윤재찬尹在瓚 씨의 소장본이다. 여기엔 31제題의 시편詩篇이 수록되어 있고 그 가운데 12제題가 제화시題畵詩라는 특징이 있다. 5언시부터 7언시의 순서로 싣고 있다. 서두에 “여유당집與猶堂集 권지卷之”라고 되어 있고 그 아래에 “정약용丁若鏞, 호탁옹號籜翁, 우사암又竢菴, 세칭다산선생世稱茶山先生, 우자하도인又紫霞道人, 우태又苔[苕之誤 필자주]상조수上釣叟”라 하여 다산에 대한 소개를 하고 있다. “여유당집與猶堂集 권지卷之”이하에 보이는 이러한 작자소개의 글은 본문과는 필체가 달라 후에 첨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여기에 실린 31제의 시편 가운데 「채약사採藥詞」한 편을 제외한 나머지 시편들이 ?신조본?에 보이지 않는다. 「채약사」 이외의 시편들이 결코 산삭刪削해야 할 시들이 아닌데 어째서 ?신조본?에 보이지 않는지 알 수 없다. 「채약사」의 시구에 약간의 전도현상이 있음은 이상한 일이다. ?신조본?에 의하면,

 

采藥復采藥, 약초를 캐고 또 캐며

迢遞躋巖谷. 높이높이 바위 골짝을 오르네

手中三尺鑱, 손에 든 석자 가래삽으로

處處靈根斸. 곳곳에서 약초 뿌리를 찍어 낸다네

風吹微雨來, 바람이 불고 가랑비가 내리면

嫩芽初舒綠. 연한 싹이 푸릇 푸릇 나오지

尋苗涉幽澗, 싹을 찾아 깊은 골짝도 들어가고

引蔓穿深竹. 덩굴 따라서 빽빽한 대밭도 헤집으며

長懷鹿門隱, 늘 녹문의 은자 그리워하고

思酬小山曲. 회남소산의 노래에 화답하고 싶어라.

不獨駐流年, 세월 따라 안 늙기도 하려니와

聊以謝淆俗. 혼탁한 속세 떠나고 싶어서라네

 

이다. 그러나 <동원수초桐園手鈔>에 의하면,

 

采藥復采藥,

迢遞躋巖谷.

手中三尺鑱,

處處靈根斸.

長懷鹿門隱,

思酬小山曲.

尋苗涉幽澗,

引蔓穿深竹.

春風微雨來,

嫩芽初舒綠.

不獨駐流年,

聊以謝淆俗.

 

으로 3, 4, 5연이 5, 4, 3연으로 바뀌어 있다. ?신조본? 3연 초두의 ‘풍취風吹가 ‘춘풍春風’으로 되어있는 점도 다르다. 모두 상평성上平聲이어서 교정할 이유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이 시는 이동환 교수 소장의 ?다산시?(假題, 필사본 1책)에 실려 있는데 그 내용은 ?동원수초桐園手鈔?와 일치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시상詩想의 자연스런 전개를 볼 때 ?신조본?이 더 온당해 보이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이동환 교수 소장의 ?다산시?에는 총36수의 다산시가 실려 있는데 이 중 26수가 ?여유당전서?에 누락된 시들이다. ?동원수초?에 실린 31제의 시와 비교해 보면 12수가 중복된다.

 

?동원수초?에 실린 31제로 보이는 시편들은 다산의 작품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위의 이동환 소장 ?다산시?를 포함하여 중복된 것을 제외하고 정리․교감하여 ?정본?에 수록해야 할 것이다.

 

 

5) <열수문황洌水文簧>

 

    ‘열수洌水’는 원래 대동강大同江의 이칭異稱이지만 언제부턴가 한강漢江의 이칭으로도 사용되었고, 다산도 이를 한강의 이칭으로 견신堅信하여 자호 가운데 하나로 사용하였다. ‘황簧’ 다산 스스로 「자서自序」에서 밝혀 두었듯이 ?시경詩經? 「소아小雅․교언巧言」의 “교묘한 말 황簧과 같고 얼굴도 두텁구나[巧言如簧, 顔之厚矣]”에서 따온 것이다. 황簧은 관악기의 부리에 장치하여 그 진동으로 소리를 내는 엷은 조각이다. ‘문황’은 글 가운데 교묘한 글 즉 변려문騈儷文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열수문황?은 ‘정약용이 지은 변려문’이란 의미이다. 다산이 1826년 65세 때 쓴 「자서自序」를 보면, 학연․학유 두 아들이 다산이 지은 “표表, 전箋, 조詔, 제制 등等 잡체雜體”의 글인 460수의 변려문을 모아 3책으로 만든 것이다. 연대로 보면 15세 때인 1776년의 작作 「하일송인환초천시서夏日送人還苕川詩序」(1~733쪽)로부터 44세인 1805년에 지은 「이아암선자걸명소貽兒菴禪子乞茗疏」(1~738쪽)까지 망라되어 있다. 그러니까 대부분이 23세부터 30세까지의 성균관 유생시절과 대과 합격 후 신진 관료 시절에 지은 것이지만, 어려서 지은 작품도 있고 중년에 지은 작품도 있다. 「하권목록下卷目錄」에 의하면 다산이 ?여유당전서?의 「자편고自編稿」에서는 일생동안 지은 변려문 가운데서 후세에 전할 만하다고 생각하는 몇 편의 작품을 추린 다음, 문집에서 제외시켰던 것인 듯하다. 이는 「한강숙야재상량문寒岡夙夜齋上梁文」, 「상산정사당상량문象山政事堂上梁文」, 「해남민포당상량문海南民蒲堂上梁文」, 「대둔사만일암상량문大芚寺挽日菴上梁文」, 「금강산헐성루중수서金剛山歇星樓重修序」에 대해서는 “以上見洌水全書, 今不再錄”이라 하였고, 「경술각과도계화거수몽사구마사전庚戌閣課都計畫居首蒙賜廐馬謝箋」에 대해서는 “見本集, 玆不復錄”이라 하였음에서 알 수 있다. 다산이 이 책에 대해 비록 쓸데없는 글에 많은 정력을 허비하였다는 자평을 하였지만, 젊은 날 다산이 오륙년 동안 온갖 공력을 다해 지은 글들인 만큼, 다산 문학 연구의 지평을 넓히는데 중요한 자료로서 ?정본?에 수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하는 ?보유?제2책에 수록된 자료이다.

 

 

 

6) <금정일록金井日錄>

 

    1795년 을묘년 다산 34세 때, 천주교에 섭급涉及되었다는 혐의로 금정찰방으로 좌천되었을 때의 일기이다. 7월 26일, 27일, 28일, 29일, 8월 4일, 5일, 7일, 12일, 13일, 14일, 17일, 22일, 23일, 24일, 28일, 30일, 9월 3일, 4일, 5일, 13일, 15일, 17일, 24일, 10월 1일, 9일, 11일, 24일, 26일, 27일, 11월 5일, 13일, 19일, 29일, 12월 1일, 6일, 10일, 20일, 21일, 22일, 23일, 24일, 25일 모두 42일 분의 일기가 수록되어 있다. 34세 때인 을묘년 7월 26일에 발령을 받고 부임했다가, 동년 12월 22일에 내직內職으로 이동 발령을 받고 즉시 길을 떠나 25일에 서울 명례방明禮坊 소용동小龍衕 우거에 도착한다. 만5개월간 금정찰방으로 재직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일기를 통해서 다산이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쓰게 된 동기가 사장査丈이자 시임時任 나주목사인 이인섭李寅燮의 간곡한 권유(8월 7일)에 의한 것이며 쓰기 시작한 날이 11월 19일부터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목재 이삼환(1729~1813?)을 장석丈席에 모시고 다산을 비롯한 12명의 신진 학자들의 학술 토론회의 기록인 ?서암강학기西巖講學記?가 이루어지던 배경 또한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또한 친구였다가 평생의 원수가 된 이기경(李基慶, 1756~1819)의 편지도 그대로 수록되어 있으며, 다산이 주자학에서 이탈할 것을 걱정한 족친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가 자양서紫陽書를 읽기를 권한 편지(11월 29일)도 수록되어 있다. 목재 이삼환이 다산 인품의 장단점에 대해 정곡을 찌르는 지적을 한 희귀한 자료도 들어 있다. 다산의 생평生平을 연구하는데 있어 불가결의 자료가 아닐 수 없으므로 ?정본定本?에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7) <죽란일기竹欄日記>

 

<죽란일기竹欄日記>는 ?금정일록金井日錄?뒤에 부록되어 있다. ‘죽란竹欄’은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이 1776년에 서울 명례방 소룡동小龍衕에 마련한 우거寓居의 울타리가 대나무로 되어 있었다 하여 명명한 것이다. 다산이 15세부터 고향 마현馬峴으로 귀향하던 39세까지의 경거京居에서 가끔 다른 곳에서 살기도 했으나 대부분의 세월을 이곳에서 산 것으로 보인다.

 

?죽란일기竹欄日記?는 금정에서 돌아온 후인 병진년(1796년)의 정월 17일, 3월 7일, 3월 12일, 3월 15일, 3월 16일, 3월 19일, 3월 28일, 3월 30일 모두 8일분의 일기이다. 병진년 정월 17일이 정원正元 갑자일甲子日로 규성奎星이 처음 열리는 날이므로, 이 날 회임懷妊한 아이는 반드시 글 잘하는 똑똑한 아이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집집마다 ‘호합好合’이 있었다는 기록은 당시의 민속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3월 12일자의 기록은 음력 3월 중순에 꽃이 피지 않는 괴이한 사태를 당해서 실증을 통해 미신에 빠지지 않는 다산의 과학적 사고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일기의 말미에 퇴계 선생에 대한 사모의 정을 담은 한 수의 시 「조기감회早起感懷」가 부록되어 있고, “금정귀후金井歸後”라는 소주小注가 붙어 있다. 이를 통해서 ?여유당전서?에 보이는 「독퇴도유서讀退陶遺書」는 자편시自編時의 개제改題임을 알 수 있다. 이 자료 역시 다산이 「자편고」를 만들 때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물력物力이 부족하여 조금이라도 줄일 수밖에 없던 당시와는 사정이 다르므로 이 자료 또한 정리되어 ?정본?에 수록되어야 할 것이다.

 

8) <규영일기奎瀛日記>

 

   1796년 11월 16일에 주자소鑄字所(奎瀛府)의 교서校書 임명된 후 12월 1일 병조참지에 제수되어 떠날 때까지의 일기이다. 약 보름 가운데 11월 16일, 17일 이틀의 기록이 있을 뿐이다. 「자찬묘지명」에 의하면 “나를 규영부에 불러들여 이만수․이재학․이익진․박제가 등과 함께 ?사기영선史記英選?을 교정하도록 하였다. 여러 번 불러 면대의 기회를 주셨고 책 이름을 의논하여 정하였다.[召鏞入奎瀛府, 與李晩秀․李在學․李翼晉․朴齊家等 校史記英選, 數賜對, 議定書名.]”고 하여 이 때의 상황을 기록해 두었으나 ‘拔(발거)’과 ‘錄(녹취)’에 관한 구체적 논의를 알기에는 미흡하다. 서명 또한 ‘반마문선班馬文選’, ‘마반문선馬班文選’, ‘곤륜정척昆侖正脊’ 같은 안案이 있다가 그 뒤에 ?사기영선史記英選?으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자료 또한 ?정본?에 수록해야 할 것이다.

 

 

 

9) <함주일록含珠日錄>

 

    “함주含珠”란 죽은 자의 입에 물리는 구슬을 말한다. 그러니까 할 말이 아무리 많아도 시체처럼 입을 봉하고 지낼 때의 일록日錄이란 말이다. ?함주일록含珠日錄?은 동부승지에 임명되던 날로부터 곡산으로 떠나던 날까지 모두 17일간의 일록이다. 다산은 36세이던 정사년(1797) 6월 20일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제수된다. 우리는 이 일록을 통해서 동부승지 재임기간은 겨우 11일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다. 또한 다산이 오랜 고심 끝에 완성해 두었던 천주교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덧붙인 그 유명한 장문長文의 「변방사동부승지소辨謗辭同副承旨疏」를 임명된 다음 날인 21일에 올린 것임을 알게 된다. 다산의 소疏에 대한 정조의 비답은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어 알 수 있지만, 이 일록이 아니었더라면 이익운李益運․홍인호洪仁浩․조진관趙鎭寬․이면긍李勉兢․이만수李晩秀․이익진李翼晉․목만중睦萬中․심상규沈象奎․서유구徐有榘․오태증吳泰曾․한만유韓晩裕․성대중成大中․심환지沈煥之․김이소金履素․이조원李祖源․이시수李時秀․이경무李敬懋 등 당시 조정 문무 대신들의 뜨거운 반응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이 이러한 제인諸人의 언급을 다 수록한 것을 보아도 이 소疏의 진실성을 의심하는 일부의 의론은 선입관에 치우친 곡해임을 짐작하기에 어렵지 않다. 윤6월 초2일에 다산은 곡산부사에 낙점되었고 떠나기 전에 의례적인 인사를 치른 나흘 뒤인 6일에 정조에게 사은숙배를 하고 곡산 임지로 떠난다. 우리는 이 기록이 아니었으면 이런 정확한 사실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산이 박제가를 찾아가서 ?북학의?를 처음 본 날이 윤6월 25일이었음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산의 소疏에 대한 우의정 이병모(李秉模, 1742~1806)의 괜한 시비도 흥미롭다. 다산이 성리학을 맹자에, 서학을 맹자 당시의 양주․묵적에 비유하였는데 이병모는 양주․묵적도 현인이므로 다산의 이 비유가 망발이라 트집 잡은 것이다. 이병모의 억지에 대한 김화진金華鎭의 반론이나, 다산을 만났을 때 이병모가 늘어놓은 구구한 변명도 재미있는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 다산은 이때 이병모와 이 문제 이외에도 장시간 창담暢談을 하였는데 이것이 그와의 인간관계를 맺는 계기가 된 듯하다. 뒷날 신유년 봄(1801)에 사옥이 일어나 일생일대의 위기에 처했을 때 위관委官이던 이병모가 보여준 호의는 이때의 일이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끝부분에 보이는 노론 영수 심환지(沈煥之, 1730~1802)에 대한 기록도 흥미롭다. 심환지는 다산가의 경조사에 두 번이나 직접 찾아오는 성의를 보였고 임금 앞에서 은연중에 다산을 돕는 주달奏達이 적지 않았다. 그래서 늘 이를 감사히 여긴 다산이 곡산부사 부임전의 의례적인 인사를 가서 공치사를 이끌어 내려 힘썼지만, 심환지는 끝내 한마디의 공치사도 하지 않고 있다. 심환지의 다산에 대한 이러한 자세 역시 다산이 신유년의 위기를 벗어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다산의 삶을 이해하는데 매우 귀중한 이 자료들은 당연히 ?정본?에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10) <다산만필茶山漫筆>

 

   심재心齋 조국원(趙國元, 1905~1988) 선생의 소장이었다는 ?다산만필?은 다산초당 시절(47~57세) 52세 때인 계유년(1813년) 음력 8월 5일 우중雨中에 당시의 이런저런 감상을 표로한 시와 문으로 다산의 친필이 분명하다.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1)은 ?보유? 2책 72~89쪽까지로 52세 때인 1813년 계유년 8월 5일에 쓴 것이고, 2)는 90~95쪽으로 그 이듬해인 갑술년 3월 25일에 쓴 것이다. 자료 1)은 다시 여섯 문단으로 나눌 수 있는데, ①은 초야 서생의 진정한 즐거움을, ②는 인생에는 필연적으로 영고성쇠가 있다는 내용의 시를 인용한 것, ③은 부지런하게 무언가를 모으는데 집착하여 끝내는 가진 것이 빌미가 되어 큰 화를 초래하는 꿀벌보다 아무 욕심없이 무소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나비가 지혜롭다는 느낌을, ④는 땅에 떨어지면 죽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아 재앙을 면하는 거미의 지혜를, ⑤는 작약芍藥의 생장을 점차 승급하는 벼슬자리에 비의比擬한 느낌을, ⑥은 인심과 도심의 구분에 대한 느낌을 적은 것이다. 2)의 ①은 탐욕스런 부인을 만나면 패가망신하게 된다는 경계를 담은 글이며, ②는 복암茯菴 이기양(李基讓, 1744~1802)의 달정達情에 관한 기록이며, ③은 세인의 훼방은 쾌락적 삶에 원인이 있으며 세인의 칭예稱譽는 인고적 삶의 결과라는 인생의 교훈을 서술한 것이다. 마땅히 ?정본?에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11) <아언지하雅言指瑕>

 

   ‘아언雅言’은 ‘상언常言’ 즉 ‘평상시의 말’, ‘일상용어’를 뜻한다. ‘지하指瑕’는 하자를 지적한다는 뜻이다. 서지학자 안춘근이 소장이었다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기증된 이 책은 ?신조본?에 수록된 ?아언각비雅言覺非(이하 ?覺非?라 약칭한다)?의 초고로 보인다. 그러니까 다산이 평소에 세간에서 잘못 쓰이는 자의字意나 성어成語를 수집해서 견해를 달아 두었던 원고의 이름이 ?아언지하雅言指瑕(이하 ?指瑕?라 약칭한다)?였는데 정식으로 책을 묶으면서 ?아언각비?라 고친 것으로 보인다. 총47조목으로, 모두 199조인 ?각비?에 대부분 수용되었다. 가끔 부분적으로 수용되지 않은 것도 보이는데 이는 다산이 스스로 산삭刪削한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초고임을 증명하기 위해 두 조목을 예로 들어 본다.

 

예 1)

 

?지하指瑕?의 첫 조목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수레에는 바퀴가, 꽃에는 부리가, 산에는 봉우리가, 물에는 물가가 있을 뿐이니 모두 방언이다. 륜輪을 바퀴라 하면서 식軾(수레앞턱 가로나무)․철轍(바퀴자국)․폭輻(바퀴살통)․곡轂(속바퀴)을 모두 ‘바퀴’라 한다. 뾰쪽한 것을 부리라 하면서 예蘂(꽃술)․악萼(꽃받침)․영英(꽃부리)․파葩(꽃)를 모두 부리라 한다. 또 악嶽(큰 산)․수峀(산 굴)․장嶂(높고 가파른 산)․헌巘(낭떠러지)은 본디 봉우리라는 뜻이 아니며, 주洲(섬)․저渚(모래 섬)․지沚(강 가운데 조그만 섬)․사汜(지류)는 각각 애涯(물가)와 다른 것인데 뭉뚱그려 가르쳐서 평생 정확한 의미를 모르니 참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다.[東俗, 車止有輪, 花止有尖, 山止有峯, 水止有涯. 皆方言. 謂輪爲朴回, 而軾轍輻轂, 並作朴回. 謂尖爲不伊, 而蘂萼英葩, 都云不伊. 又如嶽峀嶂巘, 本非峯意, 洲渚沚汜, 各與涯異者, 渾淪敎習, 終身迷昧, 亦可歎也.]

 

?각비?84조 「윤첨輪尖」에 실린 유사한 내용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칠 때 ‘수레’의 훈訓, 즉 새김에는 ‘륜輪’이 있을 뿐이다.(방언으로 ‘바퀴’라 한다) 꽃에는 첨尖이 있을 뿐이니(방언으로 ‘부리’라 한다) 어찌 글이 되겠는가? 폭輻이란 륜輪의 평교대[橑]인데 륜輪과 같이 ‘바퀴’라 새기고 축軸은 곡轂(속바퀴)을 꿰는 것을 말하는데 륜輪과 같은 훈으로 하고 모두 바퀴라 새긴다. 곡轂은 바퀴살[輻]이 모이는 곳이요, 철轍은 바퀴[輪]가 누른 것이요(바퀴 자국이란 말 : 역자주) 궤軌는 수레 바퀴 자국의 너비요, 할轄은 굴대 끝의 빗장이요, 진軫은 수레 뒤의 가로목이요, 원轅은 수레 앞의 굽은 나무를 말한다. 글자마다 뜻이 다르고 쓰임이 다른데 지금 뭉뚱그려 수레라 새겨서야 되겠는가? 예蘂는 꽃의 수염[鬚]이다. <두보의 시에 이르기를 “꽃술이 벌 수염에 묻었네[花蘂上蜂鬚].”라 하였다.> 악萼은 꽃의 받침[跗]이다. <?운부군옥韻府群玉?의 주에 이르기를 “꽃의 안 부분을 예蘂라 하고 바깥 부분을 악萼이라 한다.”고 하였다.> 영英은 꽃 가운데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이아爾雅?에 나온다.) 파葩는 꽃을 머금은 것이다.(장형張衡의 「사현부思玄賦」에 이르기를, “온갖 화초가 꽃을 머금었다[百卉含葩]”고 하였다.) 글자마다 의미가 다른데 지금 뭉뚱그려 ‘꽃부리[花尖]’라고 새겨서야 되겠는가?[東俗訓蒙, 車只有輪, 方言曰朴回, 花只有尖, 方言曰不伊, 何以文矣. 輻者輪之橑也, 訓之如輪. 軸者轂之貫也, 訓之如輪. 皆訓云朴回. 轂者輻所湊也, 轍者輪所碾也, 軌者轍跡之限也, 轄者軸耑之鍵也, 軫者車後之橫木也, 轅者車前之曲木也, 字各異義, 文各殊用, 今竝訓之爲輪可乎? 〇蘂者花之鬚也. 杜甫詩云, 花蘂上蜂鬚. 萼者花之跗也, 韻府注云, 花內曰蘂, 花外曰萼. 英者花之無實者也. 爾雅云, 葩者花之含也. 張衡賦云, 百卉含葩. 字各異義, 今竝訓之爲花尖, 可乎?]

 

예 2)

 

?지하?의 제8조이다.

 

낙양과 장안은 중국 두 수도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수도 한양의 명칭이 그 자체로 훌륭한데도 반드시 낙양․장안이라 칭한다. 사람들이 낙양․장안을 경읍의 총칭인 줄로 아는데 또한 조금도 근거가 없는 것이다.[洛陽, 長安, 中國兩京之名. 我國都漢陽, 名稱自佳, 而必稱洛陽長安, 人之知之, 殆若京邑之摠名, 亦殊無據也]

 

?각비?제1조에 보이는 유사한 기사이다.

 

장안과 낙양은 중국 두 수도의 이름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를 경읍의 통칭으로 삼는데 시와 문, 편지글 등에서 의심 없이 쓴다. 아마도 옛날 고구려가 평양平陽에 처음 도읍할 때 거기에 두 성이 있었는데, 동북의 성이 동황성東黃城이고 서남의 성이 장안성長安城이었다. 장안을 모칭冒稱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다. 낙양이라는 호칭은 더욱 근거없는 것이다. 경읍에 이른 것을 ‘여락戾洛’이라 하고, 경읍으로 돌아가는 것을 ‘귀락歸洛’이라 하며, ‘낙하친붕洛下親朋’, ‘낙중학자洛中學者’ 같은 말을 익숙히 쓰면서 합당한 것인지 살피지 않는다. 전에 일본인의 시집을 보았는데 그들 또한 이런 기휘를 범하고 있었다.[長安,洛陽, 中國兩京之名, 東人取之爲京邑之通名. 詩文書牘, 用之不疑. 蓋昔高句麗始都平陽, 厥有二城, 東北曰東黃城, 西南曰長安城. 長安冒稱, 疑自此始. 洛陽之稱, 益無可據. 至京曰戾洛, 還京曰歸洛. 洛下親朋, 洛中學者, 皆習焉而弗察. 嘗見日本人詩集, 亦犯此忌.]

 

?각비?가 ?지하?를 보충하고 윤색하였으며 의미를 분명히 했다는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부분도 대부분 이러하다. ?정본?을 만들 때는 ?지하?의 전체 내용을 ?각비?의 해당 조항 아래 첨부하는 것도 한 방안이라 생각된다.

 

 

12) <혼돈록餛飩錄>

 

    ‘혼돈餛飩’은 면식麵食의 한 종류로 면을 얇게 펴서 소를 싼 것이기도 하고 만두饅頭의 별명이기도 하며 물을 건널 때 쓰는 부낭浮囊을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혼돈록餛飩錄?에서의 의미는 ‘혼돈록混沌錄’ 즉, ‘두서없이 적은 글’이란 의미를 가진 겸사謙辭로 쓰인 듯하다. ‘혼돈餛飩’, ‘혼돈混沌’, ‘혼둔渾屯’, ‘운둔餫屯’ 등은 같은 의미의 연면어連綿語이다.

 

    이 책이 다산의 원작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음을 다음의 몇 구절에서 확인할 수 있다.

 

○ 余在長鬐. 隣人之子, 執親喪, 三年不食肉. 余以爲鄒魯之俗. 一夜月色 正明, 有簫聲起, 詢之, 乃不食肉者也.… (吹簫給喪)

○ 余聘翁洪節度和輔, □俠好義, 方蔡文肅之沈屈也,… (洪節度)

○ 坡州金司書敍九, 余仲氏聘翁也.… (金司書)

○ 余知谷山府時, 遂安笏谷之北, 採金如土, … (金粒盆)

○ 余妻兄洪元浩多病, 遭父喪,… (服喪三十六月)

 

   이 책은 다산이 고염무顧炎武의 ?일지록日知錄?,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을 의식하고 지은 것으로 보이며 강진으로 유배되는 40세 이후에 지은 것이 틀림없다. 이런 저작은 독서 후의 심득心得이나 오랫동안 고구考究했던 것이 풀렸을 때 기록한 것이므로 어느 한 시기의 수록隨錄은 아닌 것이다. 분량이 246조條 3만자萬字 내외에 그치고 분류 표목이 없는 것으로 보아 미완의 작作으로 보인다. 그러나 모든 조목條目이 단편적이긴 하지만 하나같이 다산의 깊은 학식을 알 수 있게 하는 보고寶庫가 아닐 수 없다. 다산의 학문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인 이 책은 잡저편雜著編에 수록되어야 할 것이다.

 

 

13) <아언각비보유雅言覺非補遺>

 

   다산은 여기서 「회檜」, 「삼杉」, 「로鱸」 3조條를 보유하였다. 그러나 이 3조는 모두 ?아언각비雅言覺非?에 원문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아언각비雅言覺非?의 저작연대는 소인小引의 “嘉慶乙卯冬, 鐵馬山樵序”를 통해 1819년 58세, 그러니까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 겨울에 완성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로鱸」에 박경유朴景儒의 설을 알리는 신작申綽의 말이 인용되어 있다.

 

 

 

14) <제아언각비후題雅言覺非後>

 

   이는 김매순(金邁淳, 1776~1840), 신작(申綽, 1760~1828), 홍석주(洪奭周, 1774~1842) 3인이 ?아언각비?초고를 읽고 독후감을 적은 쪽지[籤]를 보내 온 것을 다산이 모아 정리한 것이다. 김매순은 「장안낙양長安洛陽」 「계桂」․「직稷」․「일무一畝」․「도목都目」․「보처補處」 등 6조에, 신작은 「추楸」․「유楡」․「우위牛胃」․「유牖」․「걸사乞士」 등 5조에, 홍석주는 「장안낙양長安洛陽」․「태수사군太守使君」․「졸倅」 등 4조에 대한 첨籤을 보내왔다.

 

   그 중 신작의 첨은 원래 위의 「로鱸」를 합한 6조였던 듯하다. 「로鱸」를 그대로 반영하면서 여기서는 빼버린 것으로 보인다. 또 신작의 첨籤 가운데 「일무一畝」․「추楸」가 ?여유당전서?의 ?아언각비?에 보이지 않는데, 이는 아마도 원래 있었던 두 조목을 신작의 견해를 받아들여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이 자료는 다산이 아껴서 정리해 둔 것인 만큼 ?아언각비?의 뒤에 첨부해 두는 것이 좋을 듯하다.

 

 

15) <여유당잡고與猶堂雜考>

 

   김영호 선생은 해제解題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유당잡고?에는 「홍판서서첨매씨서평洪判書書籤梅氏書評」․「답김덕수答金德叟」․「여해거與海居」․「서일속쇄언후書一粟瑣言後」․「답홍성백첨시答洪聲伯籤示」․「독상서보전讀尙書補傳」․「방교기문方橋記聞」․「영우록永祐錄」․「사고역의四庫易議」․「인청정상량문引淸亭上樑文」 등이 포함되어 있다. ?잡고? 속에는 이 밖에도 몇 가지의 글이 있었으나 이미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것은 생략하였다.” ‘이미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것’의 상세한 상황을 조사해 보지 못했지만, 김 교수의 말에 의하면 ?잡고?에 실린 이 글들은 다산이 임의로 버린 글들이 되고 만다. 그러나 다산이 버렸다 하더라도 다산을 연구하는 우리에겐 하나같이 소홀히 할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여유당잡고’라는 제목은 다산이 직접 붙인 것이 아닐 것이다. 대부분의 글이 이미 다산이 자신의 손으로 ?여유당전서?를 편찬한 뒤에 쓴 글이므로 다산 자신이거나 아들들이 모아 둔 원고일 것으로 보인다. ?정본?의 취지에 맞추려면 이 한권의 책은 각각의 성격에 의해 분류되어 적당한 문류文類에 귀속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른바 ?잡고?의 첫 번째 자료인 「홍판서서첨매씨서평洪判書書籤梅氏書評」 다음에 「석천서石泉書」가 있는데 김 교수가 나열한 목록에서 빠졌고, 김 교수의 목록에 보이는 「인청정상량문引淸亭上樑文」은 영인影印에서 누락되었다.

 

① 「홍판서석주서첨매씨서평洪判書奭周書籤梅氏書評」

 

   이 글은 홍석주가 다산의 ?매씨서평?을 보고 쓴 16조의 독후감과 ?매씨서평?에 대한 「총론」일칙一則을 보내 온 것을 정리해 둔 것이다. 「총론」일칙一則 뒤에는 홍석주가 자신의 저술인 ?상서보전尙書補傳? 5책을 다산에게 보내면서 쓴 답서答書가 부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상서?의 고문․금문에 대한 채침蔡沈의 태도를 그대로 지지하면서 채침의 부족한 부분인 고증考證을 추보追補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도 ?상서?에 대한 다산의 태도가 당시 조선 지식인들의 수준에 비추어 보아 얼마나 진보적이면서도 정확한 것이었던 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고증에 있어 다산은 홍석주의 의견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서첨書籤의 제1조를 보면 홍석주는 장패張覇가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다산이 이 사실을 몰랐음을 알 수 있다. 현전하는 ?여유당전서?본 ?매씨서평?의 「장패위서고제칠張覇僞書考第七」의 말미 소주小注에서 전한前漢에 한 명, 후한後漢에 한 명 모두 두 명의 장패張覇가 있었음을 고증하고 있다. 홍석주의 견해를 반영한 것이다. 홍석주는 서첨書籤의 제2조에서 오늘날 전하는 ?서경잡기?는 진晉 갈홍葛洪의 원본原本이 아니라 남조南朝 양梁나라 오균吳均이 가짜로 지은 것이라 하였다. 홍석주는 이것을 사고총목四庫總目에서 보았다고 했다. 다산은 홍석주의 견해를 그대로 따르면서 다음과 같이 썼다.

 

?서경잡기?는 진나라 갈홍이 지은 것으로 내용이 모두 망탄하여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연천 홍성백이 이르기를 ‘지금 전하는 ?서경잡기?는 오균이 지은 가짜이지 갈홍이 지은 그것이 아니다. 청나라 사람들이 지은 ?사고전서서목?에 매우 분명하게 변증 되어있다.[西京雜記者, 晉人葛洪作, 言皆誕妄, 不足據者. 淵泉洪聲伯云, ‘西京雜記今所傳者, 又是吳均贗本, 非葛洪作也. 淸人所纂四庫書目, 辨證甚明’]

 

    홍석주의 이 서첨書籤은 다산이 노년에 ?매씨서평?을 개수하는 과정을 이해하는 데 있어 요긴한 자료가 될 수 있으므로 ?정본?의 알맞은 곳에 부록되어야 할 것이다.

 

 

 

② 「석천서石泉書」

 

   이 글은 석천 신작申綽이 다산의 ?매씨서평?을 읽고 9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여 보낸 편지이다. 그 가운데 제1조와 제3조를 살펴보자. 제1조에서 신작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以余所見竹書, 武王年九十四, 此必有一誤.” 이는 다산이 ?매씨서평? 「태서․상」에서 무왕의 향년을 ?예기? 「문왕세자」에 의거 누차 “武王九十三而終”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신작은 ?예기?보다 지어진 연대가 더 빠른 ?죽서기년竹書紀年?의 기록을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산은 신작의 주장을 채택하지 않았다.

 

   제3조에서 신작은 “正義荒雜, 類皆如此, 此語欠稱停”이라 하였다. 다산이 “공영달의 정의正義가 황잡하기가 대개 이와 같다”라고 비난하였음을 두고 “이 말이 적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현전하는 ?매씨서평?에 이 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 다산이 신작의 이 충고를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신작의 이 편지가 편지의 원모原貌를 그대로 전하는 것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 또한 ?매씨서평?을 읽고 난 뒤의 첨籤인지도 모를 일이다. ?정본?에서는 ?매씨서평?의 말미에 부록해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③ 「답김덕수答金德叟」

 

   이 글은 다산이 대산 김매순에게 답한 두 통의 편지이다. 각각 66세인 1827년 1월 12일과 13일에 쓴 것이다. ?여유당전서? 권20 서書에는 다산이 김매순에게 보낸 4통의 편지와 김매순이 다산에게 보낸 편지 6통이 수록되어 있는데, 대부분 ?상서尙書?에 관한 심도 있는 논의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유당전서?에 실린 편지들은 모두 다산의 나이 60세, 61세 때 주고받은 것이다.

 

   그러니까 이 2장의 편지는 그로부터 5년 후에 쓴 것이었기 때문에,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편지 1은 아마도 김매순이 보내온 방포方苞의 ?망계집望溪集?을 읽고 그 느낌을 적은 것이다. 방포의 ?시경?․?상서?․? 주역?․?주례? 등에 대한 견해를 일별할 때, 그가 모기령毛奇齡이나 안원顔元의 아류亞流로 보일 뿐 대단한 학자로 보이지 않으며, 문장지학文章之學에 힘쓴 사람으로 여겨진다는 것인데, 이는 방포方苞에 대한 학계의 역사적 평가와 거의 일치한다.

 

   편지 2는 ?사기?에 인용된 ?상서?의 경문에 대한 방포의 견해, 선천도에 대한 방포의 견해, ?주역? 상하편의 경문經文과 십익十翼을 모두 문왕文王의 괘위卦位로 풀이하려는 방포의 견해 등이 모두 잘못된 것임을 언급한 것이다.

 

   이 두 편지는 다산 학술의 진면모를 알게 하는 자료로 ?정본?의 ‘서書’류類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④ 「여해거與海居」

 

   이 글은 홍석주(洪奭周, 1774~1842)의 아우 홍현주(洪顯周, 생몰미상)에게 쓴 편지로 해거海居는 홍현주의 재호齋號이다. 다산은 70세를 전후한 시기에 홍석주, 홍길주(洪吉周, 1786~1841), 홍현주 3형제와 친하게 지내는데 그들과 창수한 시편이 ?여유당전서?에 수록되어 있다. 맏형인 홍석주는 규장각 각신이었던 시절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이 한통의 편지는 다산 경학을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므로 당연히 ?정본?에 수록되어야 할 것이다.

 

 

⑤ 「서일속쇄언후書一粟瑣言後」

 

   이 발문跋文은 1828년 다산 나이 67세인 10월 18일에 쓴 것이다. 일속자一粟子로 자처하고 자신의 저서 수십권을 쇄언瑣言이라 낮추어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으나, 다산과 동대의 사람으로 한 포의布衣였던 것은 틀림없다. 이 글은 ?정본?의 ‘발跋’에 포함시켜야 할 것으로 보인다.

 

   ⑥ 「답홍성백첨시答洪聲伯籤示」

 

   이 편지는 1828년 1월, 음력으로는 정해년(1827년) 12월 8일에 다산이 홍석주에게 보낸 것이다. 홍석주가 다산의 ?매씨서평?을 읽고 문제점을 지적한 첨籤을 보내 온 것에 대한 회신이다. 다산은 홍석주의 견해 가운데 사소한 고증은 받아 들였으나 큰 틀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견지하는 태도를 보이는데, 이 편지는 다산의 상서학을 연구하는 데 있어 중요한 자료이다. ?정본?의 ‘서書’란에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⑦ 「독상서보전讀尙書補傳」

 

    이 글은 다산이 해거재海居齋 홍현주가 보내 온 연천 홍석주洪奭周의 ?상서보전尙書補傳?을 읽은 뒤의 단평短評을 곁들인 독후감인데 모두 25조條로 구성되어 있다. 다산이 유배지에서 돌아와 고향 마현馬峴에서 지내던 1827년(66세) 겨울 정조正祖의 사위인 홍현주가 찾아와 다산의 ?매씨서평?을 빌어 보기를 청한 바 있고 뒤에 인편을 통해 부쳐 준 적이 있었다. 홍현주는 이미 ?상서?에 관한 저술을 쓴 형 홍석주에게 보였고 홍석주는 위에서 언급한대로 ?매씨서평?에 관한 첨籤인 「매씨서평梅氏書評」을 써서 보내준 바 있었다. 그때 홍석주는 홍현주를 통해 다산에게 자신의 저작 ?상서보전尙書補傳?을 보냈고 다산 역시 이 글을 써서 보내 주었던 것이다. 연대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아마도 1828년 초의 저술이 아닌가 한다. 「보전補傳」이란 채침蔡沈의 ?서집전書集傳?에서 언급하지 못한 바를 보補하였다는 것이다.

 

    다산은 이 책이 멀리로는 ?한시외전韓詩外傳?, ?가의신서賈誼新書?와 가까이로는 구준丘濬이나 고염무顧炎武의 학문과 발걸음을 나란히 할 수 있는 우수한 저술이라고 칭찬한다. 그러나 오역吳棫, 주희朱熹, 오징吳澄, 귀유광歸有光, 매작梅鷟, 염약거閻若據로 이어지는 의고문학파疑古文學派의 저작에 대한 이해가 있는 사람이 어찌 금고문今古文을 동렬同列에 놓는 애매한 자세를 취하느냐고 책망하고 있다. 「순전舜典」부분의 독후감에서 전개하고 있는 이러한 일포일폄一褒一貶을 통해서 우리는 ?상서보전尙書補傳?과 홍석주의 상서학의 경개梗槪를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시대를 뛰어넘는 다산의 정벽精闢한 학술의 진면모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본?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⑧ 「방교기문方橋記聞」

 

   이 글은 정조正祖의 아버지 사도세자 즉 장헌세자의 연보年譜 초고草稿로 보인다. 분량이 겨우 608자인데 그 가운데 두 줄의 표제자(英宗十二年乙卯正月卄一日莊獻世子誕生. 夏四月命移處于儲承殿)와 인용서명을 포함한 소주小注 56자를 제하면 본문은 겨우 552자에 지나지 않는다. 그 내용 또한 사도세자의 탄생과 3개월 후에 저승전儲承殿으로 거처를 옮겼을 때의 상황에 관한 기록일 뿐이다. 전거典據 또한 정조 어제인 ?현륭원지顯隆園誌? 2조와 사도세자 사건의 전말을 쓴 박하원朴夏源의 ?대천록待闡錄? 2조에 지나지 않는다. 편자의 성명도 없어 이 책이 과연 다산이 직접 편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여유당잡고?라는 제목의 책에 함께 묶여져 있는 것을 보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다만 확실한 것은 모두 608자에서 그쳤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이 글 다음에 합철合綴된 ?영우록永祐錄?이 동일한 내용의 것일 뿐 아니라 그 분량이 이 글의 2배가 되기 때문이다.

 

 

⑨ 「영우록永祐錄」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글은 사도세자의 연보年譜로 작성된 것이다. 「방교기문」이 사도세자가 탄생한 지 4개월 뒤의 시점에서 끝난 것과 달리 3세 때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다. 「방교기문」의 인용서가 ?현륭원지?와 ?대천록? 2종인 반면, 이 책은 앞의 두 책에다 ?선원보략璿源譜略?․?신임록辛壬錄?․?국조보감國朝寶鑑?․?동소록桐巢 錄?․?지문誌文? 등 4종과 1종의 문서를 더하였고, 기사記事 또한 상대적으로 상세하다. 또한 여기에는 「방교기문」에 보이지 않는 편자의 안어按語도 몇 군데 보인다. 그러나 이 또한 미완성의 글로 보인다.

 

이상 두 편의 글 「방교기문」과 「영우록」은 미완성의 글일 뿐 아니라 별다른 참고 가치가 없으므로 ?정본?에서 제외해도 무방하리라 생각한다.

 

 

⑩ 「사고역의四庫易議」

 

   이 글은 다산이 ?흠정사고전서총목欽定四庫全書總目?의 경부일經部一․역류일易類一의 총론總論을 읽은 다음 그 논지에 대해 대체로 수긍하나 ?역경易經?의 핵심이 상수象數에 걸쳐 있다는 견해에 대해서는 의견을 달리한다는 주장을 담은 것이다. 다산은 역학의 핵심이 상象에 있을 뿐, 수數에 담긴 것은 아니라 생각하였다. 이는 그의 ?주역사전?에 일관하는 주장이다. 아마도 다산은 해배 후에야 ?흠정사고전서총목?을 본 듯하다. 그리하여 자기의 일관된 주장에 의거, 총론總論을 변박辨駁한 것이다. 이 짧은 글은 다산 역학의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이므로, ?정본?에서는 기존의 ‘의議’조에 포함시켜 처리해야 할 것이다.

 

 

⑪ 「인청정상량문引淸亭上樑文」

 

    <여유당전서>에는 다산이 37세인 무오년(1798)에 지은 「상산정사당상량문象山政事堂上樑文」을 비롯한 4편의 상량문이 실려 있다. 소재지 불명이라는 이른바 ?여유당잡고?를 찾아 이 글을 ?정본?에 보충해야 할 것이다.

 

16) <청관물명고靑館物名考>

 

   김영호 선생은 「해제」에서 “다산이 ?물명고?를 저술했다는 기록은 ?여유당전서?에 기록되어 있거니와 이번에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청관물명고?가 바로 다산의 ?물명고?라는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여유당전서?에는 「발죽란물명고跋竹欄物名考」일문一文이 있는데 그 내용을 보자.

 

위의 ?죽란물명고? 한 권은 내가 편집한 것이다. 중국은 말과 글이 일치하므로 한 물건을 입으로 부르면 그것이 바로 글이고, 한 물건을 글로 쓰면 그것이 바로 말이다. 그러므로 이름과 실상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표준말과 방언이 서로 다르지 않다. 우리나라는 그렇지 않다. 마유麻油 한 가지만 예를 들어 말하더라도, 방언으로는 참길음參吉音이라 하고, 문자文字로는 진유眞油라고 하는데, 사람들은 ‘진유’라고 하는 것만이 표준말인 줄 알고, 향유香油ㆍ호마유胡麻油ㆍ거승유苣蕂油 등의 본명本名이 있는 줄은 모른다. 또 그보다 어려운 것이 있다. 내복萊葍은 방언으로 무우채蕪尤菜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후채武侯菜의 와전임을 모른다.

 

   송채菘菜는 방언으로 배초拜艸라고 하는데, 이것은 백채白菜의 와전임을 모른다. 이런 예로 말하건대 중국에서는 한 가지만 배워도 충분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세 가지를 배워도 오히려 부족하다. 내가 이 때문에 물명物名을 편집하는 데 있어서는 본명本名을 위주로 하고 방언으로 해석하여, 유별로 나누고 같은 종류끼리 모은 것이 모두 32쪽인데 빠진 것이 반이 넘는다. 그러나 규모는 이제 정해졌으니, 아마 아이들이 이를 이어서 완성할 것이다. 죽란정자竹欄靜者는 쓴다.

 

   다산이 여기에서 예로 든 마유麻油, 내복萊葍, 송채菘菜에 대한 설명이 ?아언각비?의 ‘호마胡麻 백소白蘇’․ ‘백채白菜’․ ‘무후채武侯菜’에 각각 나온다. 우리는 여기에서 ?죽란물명고?는 ?아언각비?의 저본底本임을 짐작할 수 있다. ?죽란물명고?(40세 이전)는 후일에 확대 보충되어 ?아언각비?(58세. 1819년)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이 ?청관물명고?는 과연 다산의 저술인가? 김영호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청관靑舘이라는 서제명書題名은 다산茶山의 「백언시百諺詩」가 「청관백언시靑舘百言詩」로 되어있다든지 혹은 ?제경弟經? 끝머리에 생청관장生靑舘藏이라는 친필親筆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그의 당호堂號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 또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 정규영丁奎英의 「사암선생연보俟菴先生年譜」40세조에 실려있는 「백언시百諺詩」의 서敍를 보자.

 

…… 전에 성호선생께서 우리나라의 속담을 모았는데 모두 백여 구였다. 사리詞理는 비록 밝았으나 다만 협운叶韻이 되어있지 않아 옛 속담과 다른 점이 있었다. 신유년 여름 내가 장기長鬐에 있었다. 귀양살이에 할 일이 없어 성호께서 모아 놓으신 것을 운韻이 있게 만들었다. 이것을 일러 ?백언시百諺詩?라 하였다.

 

   그러니까 다산은 장기長鬐에서 성호의 ?백언해百諺解?가 운어韻語로 되어있지 않은 것을 보고 중국 고언古諺의 경우 대체로 운韻이 있음을 생각하여 협운叶韻이 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다산의 저술 가운데 중국과 우리나라의 속담을 협운이 되게 모아 정리한 것으로 ?이담속찬耳談續纂?이 있다. 이 책은 귀양에서 돌아온 지 이태째 되는 59세(1820)에 이루어졌다. 다산은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하여 생각건대 성호선생의 ?백언해?는 우리나라의 속담을 모은 것인데 모두 협운叶韻이 되어있지 않다. 지금 그 가운데 운어韻語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취하여 운을 달고 또 빠진 것을 모았다.

 

   그 가운데 운어韻語로 만들 수 있는 것을 취하여 운韻을 달았다는 것은 예를 들어 성호가 “三日不食, 鮮無盜心”으로 번역한 우리 속담을 다산은 “人饑三日, 無計不出”로, 성호의 “狗尾藏久, 不成獷尾”를 다산은 “狗尾三朞, 不成貂皮”로 고치는 식이다. ‘식食’은 거성去聲 치부寘部, ‘심心’은 평성平聲 침부侵部로 압운이 되지 않지만, ‘일日’ 과 ‘츨出’ 은 모두 입성入聲 질부質部로 압운이 된다. ‘구久’는 상성上聲 유부有部, ‘미尾’는 상성上聲 미부尾部로 압운이 되지 않지만, ‘기朞’와 ‘피皮’는 모두 평성平聲 지부支部로 압운이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른바 ?백언해?가 ?이담속찬?에 산절刪節 변용變容되어 수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우리는 다산이 장기에서 지은 ?백언시百諺詩?가 왜 전하지 않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필자는 이른바 「청관백언시靑舘百言詩」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 책이 다산의 저작이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청관靑舘’이 다산의 재호齋號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김영호 선생은 “?제경弟經? 끝머리에 생청관장生靑舘藏이라는 친필親筆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그의 당호堂號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고 하였는데 ?제경弟經?은 다산이 지은 것이 아니며, 끝머리에 보이는 장서인藏書印인 ‘생청관장서生靑舘藏書’의 생청관生靑舘이 다산의 서재명書齋名이라는 아무런 증거가 없다. 이 ?청관물명고?는 위의 상황을 참고할 때 다산의 저술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한말의 정치가 겸 학자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우리나라는 천문, 지리, 신체, 복용, 궁실, 초목, 조수, 충어 등 일체의 이름을 모두 방언으로 부른다. 그러므로 글을 대하면 어리둥절해서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 실로 책은 책대로, 말은 말대로 따로 논다는 탄식을 하게 되니, 예를 들면 천天자에 하날河涅이라 주를 단 것과 같은 것이다. 정유산丁酉山 학연學淵이 ?물명고物名考?를 편찬하였는데 불서佛書 가운데 당나라 방융房融의 필수筆受와 같아 고반문촉叩槃捫燭의 병폐가 없다. 내가 연경燕京에 들어갔을 때 청淸나라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운서韻書의 아래에 언주諺註가 달린 것을 보고 우리나라의 음으로 불렀다. 우리나라 사람의 경우는 화음華音이 달린 것을 보게 되는데, 운서에 중국의 음과 우리나라의 음 두 가지를 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필수筆受는 범어梵語에 정통했던 당나라 방융房融이 인도의 중 반랄般剌 밀체密諦 등과 함께 번역한 ?수릉엄경首楞嚴經?을 말한다. 방융은 겸손하게도 그들의 말을 받아 적었을 뿐이라고 했다. ‘췌약고반揣籥叩盤’은 ‘고반문촉叩槃捫燭’과 같은 말이다. 해를 본 적이 없는 소경에게 누군가가 해는 구리 반과 같다고 하자 소경은 구리 반을 두드려 보고 그 소리가 해의 소리이려니 했다는 것이다. 또 누군가가 햇빛은 촛불과 같다고 하자 소경은 초를 만져보고 해의 모양도 이러하려니 했다는 것이다. 정확한 실체를 모르는 편면적片面的 지식 즉 반쪽 지식을 비유한 것이다. 이런 구체적 비유까지 든 것을 보면 이유원은 정학연의 ?물명고?를 직접 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김영호 선생이 본 ?청관물명고?가 반드시 정학연의 ?물명고?라는 증거는 없지만 필자는 같은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아래에서 다룰 ?제경?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제경?이 정학연․정학유 형제가 공편共編한 책에 아버지 다산이 음훈音訓을 단 것인 데다가, 필사본 말미의 “생청관장서” 다섯 자는 이 책이 정학연의 소장이며 ‘청관靑館’ 혹은 ‘생청관生靑館’은 정학연의 재명齋名임을 증거하는 것일 수도 있다.

 

17) 「교치설敎穉說

 

   이 글은 34쪽으로 이루어진 서첩書帖이다. 28~29쪽의 “반산盤山 종인宗人 내칙內則이 그 아들이 글을 배울 나이가 되자 나에게 가르치는 법을 물었다. 나는 마음속에 있던 것을 써서 알려주며 그가 깨닫기를 바랐다. 임신모춘에 다산노초 씀. [盤山宗人內則之胤, 年及成童, 問余以敎授之法. 余以存諸中者, 書以告之, 冀其了悟. 壬申暮春 茶山老樵.]”이라는 글을 볼 때, 이 글은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는 「위반산정수칠증언爲盤山丁修七贈言」의 초고로 보인다. 내칙內則은 정수칠의 자字다. 여기서 우리는 「위반산정수칠증언」이 1812년에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두 글을 비교해 보니 이 글의 주요 내용이 「위반산정수칠증언」에 수용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다산이 이 초고를 바탕으로 증감增減하여 「위반산정수칠증언」을 완성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서첩을 정수칠丁修七에게 준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인다. 교훈적인 말이 끝난 33쪽 뒤의 35쪽에 다음과 같은 글이 보이기 때문이다. “흰 꽃뱀은 관절통과 마비증을 고칠 수 있다. 모름지기 말린 다음 술에 담그어야 좋다.[白花蛇能治風痹, 須腊以醞之乃可.]” 이것은 비망록의 하나일 것으로 보이므로 남에게 주는 증언贈言의 한 구절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혹 정수칠이 풍비증으로 고생하고 있어 조언을 해 준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다산 자신이 이 증세를 앓고 있어서 흰 꽃뱀을 구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첨언添言 형식으로 쓴 것도 아닌데다 문장의 격식에 전혀 맞지 않으므로 앞 문장과 연결된 것으로 보기는 곤란하다. 또 이 글은 「위반산정수칠증언」에 비해 조리條理가 없고 내용도 충실하지 못하다. 그러므로 실제로 준 것이 아니라 초고草稿일 것이라는 추론을 해 보는 것이다. ?정본?에서는 「위반산정수칠증언」에 부록附錄해 두는 것도 한 방안일 것이다.

 

18) 「불가독설不可讀說

 

   이 글은 「천자千字」․「사략불가독설史略不可讀說」․「통감절요불가독설通鑑節要不可讀說」 3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모두 ?여유당전서?의 「잡평雜評」류類에 「천문평千文評」․「사략평史略評」․「통감절요평通鑑節要評」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다. 두 판본의 차이점은 「불가독설不可讀說」에 실린 글이 과격한 것과는 달리, 「잡평雜評」에 실린 글은 보다 부드럽게 다듬어져 있다는 것이다. 과격한 표현의 예는 다음과 같다.

 

“不然, 亦焚可也.”(千字)

“欲我邦文敎蔚興, 必自焚史略始也.”(史略不可讀說)

“其爲書, 可謂必焚無疑也.”(通鑑節要不可讀說)

 

   이처럼 다산은 이러한 책들은 태워 없애 버려야 된다고 말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격양된 논조가 적지 않으나 ?여유당전서?에서는 모두 삭제하였다. 이는 다산이 문집을 편찬하면서 스스로 고친 것으로 보인다. 문장의 정치精緻함에 있어서도 전자와 후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다산 자신이 아니고서는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불가독설」에 실린 이 글들을 ?정본������에 실을 필요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 가치를 ?여유당전서?에 수록된 글을 교감校勘할 수 있다는 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19) <아학편兒學編>

 

이    책은 주흥사周興嗣의 ?천자문?이 아동용 자학서字學書가 아니며 우리나라에서 아동용 자학서로 널리 통용되는 바람에 그 폐해가 적지 않다는 소신을 가진 다산이 그 폐해를 증구拯救하기 위해 편찬한 자학서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당연히 ?정본?에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20) <제경弟經>

 

   이 책은 다산의 두 아들인 정학연․정학유가 편찬한 것이다. 이는 「기양아寄兩兒」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에 안지顔芝는 ?효경孝經?의 전傳을 내었고, 마융馬融은 ?충경忠經?을 지었으며, 진덕수眞德秀는 ?심경心經?을 편찬하였다. 너희들이 ?제경弟經?을 지으려 하니, 매우 좋은 일이다. 그 문목門目은 정연하고 난잡하지 않아야 하므로 시험 삼아 아래와 같이 열거해 보니 다시 헤아려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 원본原本․기거起居․음식飮食․의복衣服․언어言語․시청視聽․집사執事․추공推功 …… 경서經書나 예서禮書 중에서, 성인들의 말씀을 12조목씩 뽑아 윗부분에 기록하고, 그 아랫부분에는 ?소학? ․?명신록?․?십칠사十七史? 등에 있는 효자들의 훌륭한 전기傳記와 정한봉鄭漢奉의 ?일찬日纂?과 ?퇴계언행록退溪言行錄?․?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조야수언朝野粹言?중에서 공경[弟]에 절실한 가언嘉言ㆍ선행善行의 글을 절요節要해서 다시 12조목을 만들어 그 아랫부분에 기록하도록 한다.

 

   우리는 이를 통해서 고향 마재에 있던 두 아들이 먼저 ?제경? 편찬의 뜻을 다산에게 알려 왔음을 알 수 있다. 무척 기뻐한 다산은 위와 같이 상세한 목차를 정해준다. 그대로 이행되었으면 좋은 책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전하는 책을 보면 다산의 뜻이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두 아들은 그리 많지 않은 대목을 오직 ?소학小學? 한 책에서 뽑았을 뿐이다. 그러나 다산은 실망하지 않고 음훈音訓을 달아 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을 다산의 저술에 포함시킬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21)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

 

   이능화(1869~1943)는 1918년에 자비 출판한 ?조선불교통사?의 「神行禪師」 條에서 “해남 대흥사 여러 스님이 편찬한 ?대동선교고?에 이르기를[海南大興寺諸德所纂 ?大東禪敎考?曰]”이라 한 다음, “대동선교고” 다섯 자에 다음과 같은 협주夾註를 달았다.

 

   완호윤우가 감정하고 아암혜장이 류수하였으며. 수룡색성․초의의순이 편집하였다. 감천 윤동의 발에 이르기를, “이 ?대동선교고?는 자하산방이 편집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생각건대 자하산방은 정약용이다. 상세한 것은 뒤의 대둔사지 주에 보인다.[玩虎尹佑鑑定. 兒庵惠藏留授. 袖龍賾性․草衣意洵編輯. 紺泉尹峒跋云, “右大東禪敎考, 紫霞山房所編摩也.” 案紫霞山房者, 丁若鏞也. 詳見後大芚寺志註.]

 

   이능화는 윤동의 발문을 보았고 자하산방이 다산 의미하는 것임을 알았으면서도 어째서 이를 협주에서 처리하였을까? 이능화는 본문에서는 대흥사 여러 스님이 이 책의 편찬자라고 하고, 협주에서는 그 스님들이 구체적으로 색성과 의순 두 사람임을 밝혔다. 그런 다음에 다산의 이름을 거론하였으니 이는 고서 저술의 관례에 비추어 볼 때 ‘다산 편찬설’을 일설一說 정도로 취급한 것이다. 일본 천리대 도서관 소장의 야사집 ?광사廣史?(실물은 동경대지진 때 대부분 소실. 일부 권과 전체목차만 남아 있음.) 제10집에 수룡색성袖龍賾性․초의의순草衣意洵의 저작으로 포함되어 있음은 이능화의 의도를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어서 최남선이 1927년에 「대동선교고 해제」에서 이 책의 편자가 다산임을 밝혔다. 이 분야의 연구자 장휘옥의 설명을 보자.

 

    그(필자주: 최남선)는 1927년에 ?대둔사지? 권4에 수록되어 있는 ?대동선교고?가 ?대일본속장경?에 편입되면서 제목과 편집자 이름이 ‘조선선교고朝鮮禪敎考, 한양漢陽 박영선朴永善 편집’으로 잘못 기록되었음을 알고 이를 시정하기 위해 그해 ?불교? 제37 특집호에 「대동선교고 해제」를 실었다. 이것에 의하면, ?대동선교고?는 서술체제가 정약용의 다른 저술들과 궤를 같이하고 있으며, 더구나 발문에 ‘자하산방’이라 한 것은 정약용의 당호堂號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정약용 스스로가 ‘자하산인紫霞山人’ 혹은 ‘자하산방주인’이라 한 것에서도 증명된다고 하였다. 이후 ?대동선교고?의 발문을 쓴 감천 윤동이 다산의 제자라는 점이 보강 되면서 이 설은 더욱 굳혀져, 현재 학계에서 ?대동선교고?가 다산 정약용의 저술이라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1920~30년대에 이 책의 저자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며 편자가 다산이라는 결론은 필사본 말미에 있는 윤동(尹峒, 1793~1853)의 발跋을 통해서 추출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윤동은 발跋에서 “?대동선교고?가 자하산방이 편마編摩한 것이며 이 책이 선가禪家의 보물일 것이다.[右大東禪敎考, 紫霞山房所編摩也. … 是編也, 其禪家之禹鼎與.]”라고 저자와 가치를 밝혀 둔 바 있다. ‘자하紫霞’는 ‘탁옹籜翁’․‘탁피려인籜皮旅人’ 등과 함께 다산이 강진 적거시謫居時에 사용하던 별호別號 가운데 하나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점은, 보유의 끝부분에 “자홍안慈弘案”이란 자양字樣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홍慈弘은 다산이 강진 적거 시절 가장 친하게 지내던 아암兒菴 혜장(惠藏, 1772~1811)의 제자이다. 자홍의 생몰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혜장의 제자인 것으로 보아 다산 보다 아무래도 20여년 이상은 어린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이 다산의 편저가 아니라고 의심할 수 있는 아무런 근거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내용 가운데서 다산의 저서임을 증명하는 유력한 증거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산의 독특한 주장과 나름대로의 고증을 거친 주장이 여기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산은 평소 우리 역사의 한 시절에 한강 이북과 대동강 사이가 중국 땅이었다고 주장하였다. 낙랑의 존재를 의식한 것이다. 다산은 낙랑이 평양에서 춘천에 이르는 땅을 점유하고 있었다고 보았다. 또 우리가 서울 앞을 흐르는 강을 ‘한강漢江’이라 부르는 것은 그 강 위쪽에 한나라 사람들이 살았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이는 여타의 역사학자들에게서 볼 수 없는 다산의 독특한 주장인데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

 

   열수洌水 이북에서 압수鴨水 이남은 한무제漢武帝 이래로 늘 한 나라 땅이었는데, …… 그러나 패수浿水 이남과 한수漢水 이북은 마침내 한 나라 관리의 관할 하에 들어갔으니, 위魏ㆍ진晉을 지나 북위北魏 때까지 그렇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하니 동사東史를 엮는 자는 패수浿水 이남과 열수洌水 이북의 지역에 대해서는 별도로 한리표漢吏表를 만들고, 아울러 그 사실을 기록하여 그 자취를 참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동사東史에는 모두 이러한 사실이 빠졌으니, 이것은 불완전한 사례 가운데 큰 것이다. 열수洌水는 지금 서울 앞을 흐르는 강이다. 이 강 이북以北은 본래 한 나라 땅에 속하였고 이남以南은 삼한三韓으로서, 이 강물은 곧 삼한과 한 나라의 경계선이었다. 그러므로 삼한 사람들은 이 열수를 가리켜 ‘한강漢江’이라고 하였다.

 

다산은 ?대동선교고?의 ‘백제선교시말百濟禪敎始末’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생각건대 당시에 삼국이 솥발처럼 대치하고 있었다. 지금 한수漢水 이북에서 패수浿水 이남은 본래 한漢나라 땅이었다. 중국에서 관리를 파견해 오기도 하고 토추土酋가 자립하기도 하였다.

 

나름대로의 고증을 거친 한 주장이란 무엇인가? 다산은 불교의 백제 전래를 개괄하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생각건대 침류왕 때 비록 불사佛寺를 창건하였다고 하나 한산漢山 이외에는 광건廣建하지 않았다. 성왕 때 비록 승관僧官을 두었다고 하나, 사비泗沘에 도읍하기 전에는 불법佛法이 크게 행해지지 않았다. 법왕法王에 이른 다음에야 백제에 불교가 행해지게 되었다.

 

이 주장은 아래에 다루어질 ?제만일암지題挽日庵志?에서도 다음과 같이 반복된다.

 

내가 김부식의 백제사를 읽어 보니 백제에 불법이 처음 행해진 것이 비록 침류왕 때이나 한산 이외에는 불사를 창건하지 않았다. 그 후 불법은 곧 폐지되고 말았다. …… 법왕이 비로소 살생을 금하는 명령을 내리고 이어서 사비수가에 왕흥사를 창건하였다.

 

이 두 가지만 해도 이 글이 다산의 편저임을 증명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본?에 수록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2) <제만일암지題挽日庵志>

 

   다산은 강진 시절에 승려 은봉두운隱峯斗云의 부탁을 받고 두운이 중창重創한 만일암挽日菴을 위한 「중수만일암기重修挽日菴記」를 지어 준 바 있다. 만일암은 대둔사大芚寺의 부속 암자이다. ?여유당전서? 권22에는 「만일암중수상량문挽日庵重修上梁文」이 실려 있는데, 이 글에 대해 약간의 의문이 든다. 다산이 두운의 부탁을 받고 친필로 「만일암제명挽日菴題名」과 「만일암실적挽日菴實蹟」을 써 준 바 있는데 「만일암제명」에서 “아암화상 혜장. 상량문을 지었다.[兒菴惠藏. 撰上梁文]”라고 했기 때문이다. 두운이 지은 「만일암실적」의 끝부분에도 “연파대사 혜장이 상량문을 지어 들보위에 감춰 두었다[煙波大師惠藏撰上樑文弆于樑上]”라고 하였다. 혜장의 글이 잘못 편집되어 ?여유당전서?에 실린 것인지 다산이 따로 만일암을 위해 상량문을 지은 것인지 알 수 없다. 글의 내용을 살펴보아도 여전히 알 수 없다.

 

   이 글 ?제만일암지?는 다산 52세이던 1813년 가을에 지은 것이다. 4년전인 1809년에 은봉두운이 자신이 편찬한 「만일암실적」과 「만일암제명」을 가지고 와서 서첩書帖에 써 주기를 부탁하였다. 이렇게 해서 쓴 다산의 필적이 ?여유당전서보유? 제2책에 영인되어 수록되어 있다. 이 글을 쓴 이유는 두운의 「만일암실적」을 써 줄 때, 두운이 잘못 기록한 것을 바로잡지 못하고 그대로 써 주었던 자신의 실수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두운은 「만일암실적」에서 만일암이 유송劉宋 문제文帝 원가元嘉 3년(서기 426년)에 백제 승 정관淨觀에 의해 창건되었고 그 후 양무제梁武帝 천감天監 7년(서기 508년)에 백제 승 선행善行에 의해 중건되었다고 하였는데 다산은 그대로 믿고 써 주었던 것이다. 그런 뒤 4년 후에 대둔사의 중 제성濟醒이 채팽윤(1669~1731)이 지은 「대흥사사적비」의 기술과 다름을 발견하고 찾아와 사실 확인을 해 주기를 부탁하자 쓴 글이다. 이에 다산은 여러 사적을 점검해 보고 만일암의 창건이 서기 426년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당나라 정관貞觀 8년(서기 634년, 백제 무왕 35년) 이후에 지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그 전말을 기록한 글이다. 다산의 글이 분명하므로 ?정본?의 ‘제題’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다산은 ?제만일암지?를 쓰기 한해 전인 1812년 추분 이튿날에 만일암에 갔을 때 「만일암실적」을 다시 펴 보고 두운의 기록 가운데 “생각건대, 만일암 뜰에 칠층 석탑이 서 있는데 고기古記에 의하면 아육왕이 세운 것이라 한다. 그러나 백제에는 아육왕이 없으니 마땅히 아신왕의 오류일 것이다.[案菴有七層石塔立于庭. 古記云, 阿育王之所建. 然百濟無阿育王, 當是阿莘王之誤也.]”라고 했던 부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부기附記하였다.

 

   아육왕은 인도에서 불탑을 세운 왕인데 고기에서 잘못 인용한 것이다. 나는 불서佛書에 밝지 못해 전에 은봉두운을 위해 고사古事를 고증할 때 백제 아신왕의 와전인 줄로 의심하였다. 부끄럽다. 가경 17년 추분 이튿날 내가 만일암을 방문하였다.[阿育王者, 西土建塔之君. 古記誤用之也. 余不嫺佛書, 舊爲隱峰考古, 疑其爲百濟阿莘之譌, 可愧也. 嘉慶十七年秋分翼日余過挽日菴.]

 

   두운이 의심한 것을 자신 또한 의심하여 바로 잡지 못했음을 말한 것이다. 우리는 이 한 조목에 대한 고증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의심을 할 수 있지만 이 글이 다산이 지은 것임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다산의 글이라면 빠트려서는 안 될 ?정본?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수용되어야 할 것이다.

 

23) <만일암제명挽日菴題名>

 

   이 글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두운이 기초해 온 것을 다산이 적어 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정본?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24) 「만일암실적挽日菴實蹟

 

이 글 역시 위의 「만일암제명挽日菴題名」과 같은 성질의 문적文蹟이므로 ?정본?에서 취급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25) <동언잡지東言雜識>

 

   이 책은 18세기에 볼 수 있었던 중국의 사史․집부集部 가운데 나오는 신라․고려․조선 등에 관한 기사를 집록輯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구양수歐陽修의 ?신당서新唐書?, 탁극탁托克托의 ?송사宋史?, 주이준朱彛尊의 ?명시종明詩綜?, 전겸익錢謙益의 ?목재집牧齋集?, 섭몽득葉夢得의 ?석림연어石林燕語?, 양신楊愼의 ?단연록丹鉛錄?, 원매袁枚의 ?수원시화隨園詩話?, 왕세정王世貞의 ?예원치언藝苑巵言?, 단성식段成式의 ?유양잡조酉陽雜俎? 등이다. 이 책이 다산이 집록輯錄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단안을 내리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 김영호 선생은 해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책이 다산저작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으나 이가원李家源 교수의 필체고증筆體考證, 안춘근安春根 선생의 서지적書誌的 검증, 그리고 위의재謂矣齋란 호號가 다산茶山의 서한書翰 속에 나온다는 증언證言, 그리고 내용內容 검토 등을 거쳐 포함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1) 이가원 교수의 필체고증, 2) 안춘근 선생의 서지고증, 3) 위의재謂矣齋란 재호가 다산의 서한에 나온다, 4) 내용검토. 이 네 가지를 보아 다산의 저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쉽게 납득 되는 것이 없다.

 

   첫째, 필체가 다산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둘째, 서지 고증을 할 아무런 근거가 없다. 셋째, 다산이 어떤 서한에서 위의재謂矣齋란 재호齋號를 사용하였는지 알 수 없다. 넷째, 내용검토를 통해서도 이것이 다산의 집록임을 증명할 길이 없다.

 

   집자輯者의 명의名義 위의재謂矣齋 가운데 ‘위의謂矣’는 ?시경詩經? 「습상隰桑」의 “마음으로 사랑하니 어찌 말하지 않으리오[心乎愛矣, 遐不謂矣]”에서 따 온 것이다. 이 책이 다산의 편저인지 아닌지는 숙고해야 할 부분이 많으므로 우선 보류해 두고자 한다.

 

 

26)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

 

   이 책은 원래 다산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1730~1792)이 편찬한 것이다. 다산이 38세이던 기미년(1799)에 쓴 「압해가승서押海家乘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버님께서 선세先世의 사적事蹟, 혼인婚姻한 내력 및 비지碑誌, 행장行狀을 손수 수집하여 4권으로 엮어서 압해가승押海家乘이라 제목을 붙였다. 내가 정서淨書하는 일을 도왔으므로 그것을 가져다 읽고는 ‘아름답도다. 가법이여’라고 하였다.[先君手輯先世事蹟婚系及碑誌行狀, 編之爲四卷, 題之曰押海家乘. 鏞旣相繕寫之役, 因取而讀之曰, ‘媺哉家法也.’]

 

   그런데 이 책에는 다산이 가필加筆한 부분이 적지 않다. 시조 정윤종丁允宗으로부터 21세 정지해(丁志諧, 1712~1756)까지의 기사는 대부분 정재원의 초고草稿위에 다산의 가필이 있었을 것이나, 정재원에 관한 기록과 이에 부록된 백형伯兄 정약현(丁若鉉, 1751~1821)․정약전(丁若銓, 1758~1816)에 관한 기사는 전량全量이 보록補錄이다. 정약현의 후배後配 의성김씨義城金氏가 죽은 1834년의 기록까지 있는 것을 보면, 다산이 서거 2년 전까지도 이 책을 편마編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을 다산의 저술이라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가 완성한 책을 아들이 추록追錄․보록補錄했다고 하여 아들의 저술로 간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다산이 조상을 위해 쓴 글 여러 편이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다. 예를 들면 「석갑산정씨육총변石岬山丁氏六塚辨」․「압해정승묘변押海政丞墓辨」․ 「압해가승서押海家乘序」․「가승유사家乘遺事」․「선친유사先親遺事」․「방친유사傍親遺事」․「해좌공유사海左公遺事」 등이 있다. 이를 통해서 충분히 다산의 세계世系나 조상 사적을 알 수 있다. 후인들이 ?압해정씨가승押海丁氏家乘?에 다산의 가필이 들어있다고 해서 다산의 저작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필자는 무리한 일이라 여긴다.

 

   첨언하는 바이지만, 이 책의 편차에는 약간의 착간이 있다. 12세 정수강丁壽崗조의 끝부분(보유2, 567쪽)에서 느닷없이 ?가승외편家乘外編?(보유 568~587쪽)이 영인되어 있다. 또 21세 정지해조의 쪽수에 있어 661쪽 다음의 내용이 658쪽에 실려 있다. 정재원丁載遠조의 660쪽 다음의 내용이 657쪽에 있으며 그 다음 쪽이 662에 있다. 또 588쪽에서 604쪽에 실려 있는 「동원기문東園記聞」도 착간이다.

 

27) <가승외편家乘外篇>

 

   이 글은 ?여유당전서?에 실려 있는 「방친유사傍親遺事」와 비슷한 글이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대소잡기代嘯雜記?․?상촌집象村集?․?지봉집芝峰集? 등의 문적에서 정언황丁彦璜․정시한丁時翰․정윤우丁允祐․정언구丁彦球․정호관丁好寬․정윤지丁胤祉․정창도丁昌燾․정재중丁載重 등 방친傍親들의 입조사적立朝事蹟을 모은 것이다. 다산의 작업이 분명하므로 ?정본?에 수록되어야 할 것이다.

 

28) 「동원기문東園記聞

 

   이 글은 다산의 7대조 동원東園 정호선(丁好善, 1571~1634)의 저술 ?동원유고東園遺稿?의 일부분이다. 다산이 쓴 「동원유고서東園遺稿序」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이 책도 ?월헌집月軒集?(다산의 11대조 정수강丁壽崗의 문집 : 필자주)의 전례를 모방하여 위로 도헌공都憲公(정호선의 아버지 대사간 정윤복丁胤福 : 필자주)의 저술을 싣고 아래로 교리공校理公(정호선의 아들 정언벽丁彦璧 : 필자주) 참의공(정호선의 손자 정시윤丁時潤 : 필자주)의 저술을 붙여서 또한 4대 3권에 그친다.[今此編宜倣月軒集例, 上載都憲公所著述, 下附校理公參議公之所著述, 亦四世三卷而止.]

 

   이를 보면 ?동원유고東園遺稿?는 다산이 수집 편찬한 것이다. 그 일부분인 이 글은 다산의 저술이 아니므로 ?정본?에 포함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정치精緻한 글씨는 다산의 친필이 분명하여 다산 서체 연구에 있어 일정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29) <동남소사東南小史>

 

    이 글은 동암東巖 이발(李潑, 1544~1589), 남계南溪 이길(李洁, 1547~1589) 형제의 삶과 그들이 겪은 참담한 일에 관계되는 기록을 모은 것이다. 이발은 동인東人과 북인北人의 중심인물로 활동하다가 서인西人들의 미움을 받던 중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받고 장살杖殺되었던 인물이다. 이발이 죽은 뒤 82세의 노모와 8세의 아들도 엄형嚴刑으로 죽었는데, 그 노모는 형벌이 너무 지나치다고 꾸짖으면서 끝내 역모에 관한 일을 승복하지 않았으며, 문생․노비도 모두 엄형을 가하였으나 승복하는 자가 없었다 한다. 그 아우 이길 역시 이 사건에 연루되어 희천으로 귀양 갔다가 뒤에 불려와서 역시 죽음을 당하였다.

 

   두 형제를 비롯한 이씨 가문의 참혹한 피화被禍에는 억울한 일이 많았으므로 후인들이 이 사건을 다룬 여러 문적을 모은 것이 ?동남소사東南小史?이다. ‘동東’은 이발의 호 동암東巖에서, ‘남南’은 이길의 호 남계南溪에서 따온 것이다. ?여유당전서보유 2?에 실린 필사본에는 “洌水 丁若鏞 輯”이라 하여 다산의 저술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정황이 이 사실을 의심케 한다.

 

   이 책의 첫 대본臺本은 동암 ․ 남계의 족손族孫 이두망李斗望이 수집 정리한 「이공유사기二公遺事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당시 전라도 광양에 적거謫居중이던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1698년 3월에 이두망의 부탁을 받고 쓴 「서동암남계이공사실기書東巖南溪二公事實記」 와 지도智島에 적거謫居 중이던 이봉징(李鳳徵, 1640~1705)이 이두망의 부탁을 받고 쓴 서敍에 상세하다. 이봉징은 “천천히 그 기록을 살펴보았더니 두망씨는 두 분의 평생을 대략 서술하고 당세 저명 인사들의 이 사건에 대한 기록을 매우 상세히 뽑아 놓았다.[徐案其記, 斗望氏略敍二公平生, 歷選當世聞人公案文字甚詳]”라고 하였던 것이다. 이씨 형제는 숙종 20년 1694년에 신원伸寃되는데, 여기엔 이두망 등의 활동이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그로부터 백여 년 후, 이씨 가문의 누군가가 이 글을 다산에게도 보여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제목 또한 「이공유사기二公遺事記」 혹은 「동암남계이공사실기東巖南溪二公事實記」에서 「동남소사東南小史」로 바뀌어 있었던 듯하다. 1694년의 신원 이래로 내용의 증보增補 또한 이루어 졌을 것이다. 다산은 그 독후감에 해당하는 글 「발동남소사跋東南小史」 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위의 ?동남소사東南小史? 2권은 동복이씨同福李氏의 소장所藏이다. 향리鄕里의 문헌가文獻家로서 이씨의 사적史蹟을 쓰는 자는 언제나 동암東巖ㆍ남계南溪가 앙화殃禍를 입은 전말을 상세히 기록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한다. “두 분의 사적은 국사國史며 야사野史에 올려져 있으므로, 천백 년이 지나더라도 없어질 수 없을 것이니, 걱정할 것이 없다. 다만 그 조씨趙氏의 외로운 아이는 깊은 산 속으로 달아나 목숨이 보전되었고, 화가花家의 한 아이는 시비侍婢에게 맡겨서 혈맥血脈이 전해졌으니, 그 사실은 매우 신기하나 그 자취는 숨겨지기가 쉽다. 참으로 단정하고 올바른 선비가 이 사실을 믿을 수 있게 전하지 않는다면 후세에 그 누가 이를 밝혀 주겠는가? 이는 부암浮菴 나처사羅處士 경炅의 말로써 내가 받아 쓴 것이다. 나는 비록 언행言行의 소양이 없으나 나처사는 청렴 결백하고 독실한 학자이므로 말을 함부로 하지 않으니, 그의 말을 징신徵信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산의 문집이 세상에 공간公刊된 것은 1936년 신조선사新朝鮮社에 의한 것이었으니 그 이전에는 학자들도 다산의 이 글을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다만 다산이 이 글을 읽고 의견을 표시했다는 사실은 널리 퍼져 이 책이 다산의 편저인 것으로 알려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혹은 누군가가 이 책의 성가聲價를 높이기 위해 다산의 이름에 가탁假託했을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이 책은 계속 증보되어 다산이 보았던 2권에서 5권으로 늘어났으며 편자編者 또한 다산인 것처럼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881년에 안세영安世泳이 동암東巖의 후손 이승필李承弼의 부탁을 받고 쓴 「동남소사서東南小史序」에 “洌水所輯小史”라는 여섯 글자가 보이는데 이것이 기록상의 첫 사례일 것이다. 한말韓末의 학자 회당晦堂 장석영(張錫英, 1851~1929) 또한 1921년에 이병하李炳夏의 부탁을 받고 쓴 「교간동남소사서校刊東南小史序」에서, “열수 정공이 이백년 후에 태어나 조정朝廷의 문적文籍과 야사野史에 실린 것을 모아 동남소사를 지었다.[洌水丁公, 生二百年之後, 裒輯朝家文字及野乘所載, 作東南小史.]”라고 하였는데 이 또한 다산의 「발동남소사」를 보지 못한 소치일 뿐이다.

 

   이 책은 다산이 편집한 것이 아니므로 ?정본?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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