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둘

2014. 12. 25. 07:24들꽃다회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둘

                            /  20141221~22 일~월요일 , 맑고 포근함

      

 

 

 

 

 

 

 

 

보물 제199호 경주 남산 신선암

반가보살반가상 표석(標石)

 

 

 

 

 

 

 

 

 

한양대 정민 교수는 그의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라는 책에서,

진도 사람인 속우당(俗愚堂)이라는 사람이 쓴 < 대둔사초암서(大芚寺草蓭序) >를

다음과 같이 평하면서, 초의선사의 법제자인 범해 각안 스님의

<동사열전(東師列傳)>의 [초의선백전]의 글을 소개하고 있다.

 

 

" 한갓지고 고즈넉한  일지암의 주변 풍경과 초의의 일상이 그린듯이 묘사된 글이다.

초의는 화계를 조성하고 포도넝쿨을 올리며, 과원과 채마밭을 차례로 조성하면서

예전 다산이 거처하던 초당의 분위기를 하나씩 되살려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초의는 이후 만년까지 일지암에서 지냈다.

신헌이 <초의대종사탑비명(草衣大宗師塔碑銘)>에서 "일지암에서 세상을 떳다.

(示化於一枝蓭重)"이라고 한 이래, 대부분의 초의 관련 책자는 초의가 일지암에서

세상을 뜬 것으로 적고 있다. 하지만 초의의 법제자였던 범해 각안

자신이 저술한 <동사열전(東師列傳)>[초의선백전(草衣禪伯傳)]에서

 

- 동치(同治) 4년 을축(1865년) 7월 초이튿날에 쾌년각(快年閣)에서 입적하였다.(중략)

 처음에 몸을 은거할 둥지로 얽은 것은 일지암이었고,

나중에 겨우 몸 하나 들일 만한 굴을 얽은 것이 용마암(龍馬庵)이며,

다시 몸을 마칠 움막으로 세운 것이 쾌년각이었다. - "

 

ㅡ 정민 저 <새로 쓰는 조선의 차문화 : 2011. 김영사 간 > 261 쪽에서 ....

 

 

위의 초의선사의 법제자인 범해 각안 스님의 글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배워야 할 점은 처음 은거할  때에는

일지암 처럼 자급자족이 가능한 다소 규모가 있는 곳에서 살고

그 후 나이가 들어갈 수록 겨우 몸 하나 들일 만한 토굴로

이 세상을 하직하기 전에는 움막으로 옮겨사는 일이다.

 

이처럼 초의스님의 철저한 무소유 정신과

살만한 곳을 후학들에게 할양하는 다음 세대를 위한 배려는

노욕(老慾)에 물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탐욕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커다란 교훈으로 다가온다.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봉안를 위한 

전실 축조에 대한 추정

 

마애보살상 광배 합각부 위에 파여져 있는 수평홈의 용도는 전실이 사라진 현재에는

상부에서 흘러내리는 빗물이 마애보살상에 직접 닿지 않게 하는 목적으로

파여져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성 당시에 마애불을 보호하려는 전실(前室)이 있었다면 

종보를 받히는 장여(長舌)와 같이 별도의 가구재(架構材)를 설치할 목적으로

수직암반에 가로로 깊이 홈을 판 것으로 보인다.

이는 수직절벽에 목조전실을 접합하기 위하여 대들보와 수직암반을

결구(結構)하기 위한 목적으로 장여와 비슷한 보조 가구재(架構材)를

이 수평홈에 끼워서 설치하였을 것이다.

 

사진 좌측 상부에 있는 홈 끝단부에 파여져 있는 원형홈과

원호상의 내부쪽에 사선으로 홈이 파여져 있는 것이

지붕의 경사도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전실의 설치는 확실해 보인다.

이 사선홈이 주두 위 첨자와 수직암반과의 결구용인지는

밝히기 위해서는 더욱 세밀한 조사가 필요하다.

 

좌측 끝단의 원형홈은 평주 주두 위의 주도리와 수직암반의 접합부로 보여진다.

수평홈 오른쪽 상단에 있는 얕게 깨진 듯이 파인 원형홈은 종도리와 수직암반의 접합부의 흔적으로 보인다.

사선홈이 짧게 나있는 것은 대들보와 주도리의 결구부 보강재를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보여진다.

 

사진 오른쪽 상부 수평홈 아래에 있는 붉게 물던 얕은 원형 접합부의 흔적으로 보아,

 전실은 소실된 후에 규모를 조금 크게 하여 최소한 2번 이상 다시 지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흔적이다.

 

 

 

 

 

 

 

구름 위에 비스듬이 핀 하늘연꽃(天蓮) 송이 위

선정에 들다 잠시 방선(放禪)하신 듯

오른 발을 살포시 올려놓으신 유희좌(遊戱坐)의

마애보살반가상

 

 

 

 

 

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왼쪽 상부에

전실의 주도리가 접합되었음직한 부분의 자연암반이

원형상과 원호 밖으로 수평 막대상으로 유난히 붉은색을 띈다.

 

마치 기둥머리(柱頭)에 설치된 하중분산용 보아지 처럼

주도리와 수직암벽의 결속력을 증대시키기 위하여

수평보아지를 설치하였던 홈으로 보인다.

 

 

 

 

 

 신선암은 한자로 神仙岩이 아니라 神仙庵으로 표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금강산에 있는 보덕암 처럼 절벽 위에 작은 암자를 엮어

마애보살반가상을 모셨던 것으로  추정된다.

안양시 삼성산 삼막사 마애불 전실의 예에서 처럼 건물의 한쪽 면은 마애불이 계신 쪽으로

붙혀서 지어 건물의 정면만 절벽 위에 제비집 형상으로 지은 것은 아닐까?

 

 

마애보살반가상 좌우측에 사진에서 처럼

자연암반을 약간 파내어 나무 기둥을 세웠던 붉게 변색된 호박 크기의 돌로 덮은

부분을 포함하여 큰 원주상의 그랭이질한 주추의 흔적이 보인다.

 

신라의 장인들은 나무기둥의 밑면  요철에 맞추어

나무보다 몇배나 단단한 주춧돌에도 그랭이질을 한 것이 여러 궁궐지나 사지에서 나타날 정도로

신앙심으로 단련된 장인정신에 엄격한 사람들이였다.

그 중앙에 작은 원형으로 파인 구멍은 나무기둥의 수평이동을 방지하기 위한 결구나

기둥부식 방지나 흰개미에 의한 피해를 방지하기 위한 소금을 넣는 공간의 용도로 보인다.

 

주추를 덮은 호박돌의 표면과 자연암반인 기단부의 표면이 붉게 산화된 흔적은 

기존에 있었던 목조로 지은 암자가 화재에 의하여 소실되었을 때,

높은 열에 의하여 암석과 암반의 표면이 열화(劣化)되어 풍화가 진전되고

 일부 광물이 변질되어 붉은 적철석 계통의 광물과 점토광물이 잔류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자연암반에 천공된 암혈(岩穴)이 절벽에다 난간받침대를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도

추측하기도 하니, 가능하다면 사적기나 사료들을 찾아볼 일이다.

 

 

 

 

 

 

신선암에서 내려다 보이는 칠불암

- 신선암 바로 앞이 수십미터 높이의 절벽이다.

사진 오른쪽 중앙부 기왓장 쌓인 공터에서 절벽 쪽

푸른 소나무 아래에 마애칠불이 조성되어 있다.

 

 

 

 

 

헌다하는 세사람이 각자 준비한 찻잔으로 

차를 올리다. 

 

 

 

 

 

 

 

 

 

 

 

 

 

 

 

 

월간 <차의 세계>사 최석환 회장님은 오른쪽에 있는  신라토기형 금니고배로,

포항에서 오신 정덕선 보살님은 연잎이 새겨진 잔탁을 갖춘 연화문 흑유잔으로,

직접 제다하신 지리산 야생녹차를.....

그리고 옻칠 나무다완에 진한 가루차와 새미골찻잔에 지리산 녹차를 올리다.

 

  흑색토기에 황칠을 칠하여도 금니를 칠한 것과 같이 황금색으로 빛난다.

 

 

 

 

 

 

 

 

 

  

백제금동용봉대향로의 윗부분 뚜껑부의 형상은

도교의 영향을 많이 받은 삼신산을 상징하고 있다고

기존의 보도자료나 보고서에 발표되고 있으나,

 

겨져 있는 문양들을 자세히 살펴보고

우리 한민족의 상고사와 비교하여 본 결과,

한민족(특히 예맥족)의 시원과 이동을 상징하고 있고

하늘에 제사(天祭)를 지냈던 장소들을 조각으로 형상화하고 있어서,

백제왕실에서 대대로 황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신물(神物)로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리기 어렵다.

 

 

 

 

 

 

신선암의 마애보살반가상


보물 제199호인 이 불상은 칠불암 위의 곧바로 선 절벽면에 새겨져 있어

마치 구름 위에 앉아있는 듯이 보이는데 머리에 삼면보관을 쓰고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풍만하고 오른손에는 꽃가지를 들고 왼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서

설법하는 모양을 표현하였다.


팔각형으로 보이는 대좌 아래로 옷이 흘러내리고, 오른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놓은 자세이다.

발은 연꽃 위에 있으며, 이처럼 유희좌를 표현하였음은 드문 예이다.

그 아래에 뭉게뭉게 피어나는 구름이 조각되어 있다.
불상 높이는 1.4m이며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보인다.

 

 

 

 

 

 

삼족오를 닮은 까마귀가 오래된 시 한수를

일러주고 가는 듯하다.

 

 

 

 

 

경주 남산(금오산 金鰲山)의 신선암마애보살반가상 너머로 

태양을 상징하는 까마귀(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삼족오 三足烏)가 날아간다.

 

 

 

 

 

 

 

 

 

 

 

 

원효대사님이 창안하신 진하게 저은 가루차(濃茶)인

무애차(無碍茶)와 지리산 야생녹차로 헌다(獻茶)하다.

 

 

 

 

 

 

 

 

 

 

 

 

 

 

 

 

 

 

 

 

 

 

 

 

 

 

 

 

 

 

 

 부여 능사지에서 발굴된

백제금동용봉대향로(재현품)에 반초향(半初香)을 피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연유하였고

광복후에도 반세기 동안 서로 벌어져 있던 동서간의 화합을

신선암 마애반가사유상께 먼저 빌어본다.

 

시작이 반이거니.....

 

 

 

 

 

 

 

 

 

 

조선조 중기 4대문장가의 한사람인

묵소(默所) 장유(張維)선생의 <계곡선생집 권2(谿谷先生集卷之二)>에

실려있는 [삼화찬(三畵贊)] 중의 한수인

"비로거대(毗盧踞臺)"를 읊조려 본다.

 

 

저 자리 앉은 이 / 彼當座者
부처라 할지 악마라 할지 / 是佛是魔
둘러싸고 있는 저들 / 彼圍遶者
일이라 할지 다라 할지 / 是一是多
악마든 부처든 본래가 공하거니 / 魔佛本空
일이든 다이든 무슨 상관 있으리요 / 一多何知
비로자나 / 毗盧遮那
그 진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 眞身在玆

 


이상은 비로거대(毗盧踞臺)에 관한 것임.

 

 

 

 

 

 

 

 

계곡선생집 제2권 원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잠(箴) 명(銘) 찬(贊) 16수
삼화찬(三畫贊) 이하 속고(續稿)임

 

 


삼천 명의 제자가 행단(杏壇)에 입시(立侍)한 가운데 안회(顔回)는 오현금(五絃琴)을 타고 증점(曾點)은 거문고를 뜯는 광경
남곽자기(南郭子綦)가 궤안(几案)에 기대어 앉아 마른 나무와 싸늘한 재처럼 하고 있는 모습
비로자나(毗盧遮那)가 천광대(天光臺)에 걸터앉아 있는 가운데 일천불(佛)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광경

병중(病中)에 한가로이 있으면서 어쩌다 이 세 가지 광경을 떠올리게 되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곤 한다. 그래서 그림 그리는 사람의 손을 빌려 세 폭 병풍으로 만들고 싶은데, 다만 오늘날 세상에서 용면(龍眠)과 같은 절묘한 솜씨를 만나기가 어려워 그림을 쉽게 만들 수가 없기에 우선 먼저 세 개의 찬을 짓는 바이다.

봄바람 불고 해맑은 날씨 / 條風淑景
살구꽃 뜰에 가득한데 / 杏花滿庭
제자는 줄 퉁기고 / 弟子拊絃
선생은 가만히 듣고 있나니 / 先生默聽
화기애애한 분위기 / 一團和氣
간격없이 녹아 흐르는 / 冲融無間
그 정경을 묘사할 수는 있어도 / 其形可描
속뜻만은 어떻게 기릴 수가 없고녀 / 意不容讚
이상은 행단금슬(杏壇琴瑟)에 대한 것임.

전엔 궤안에 기댄 모습 팔팔한 용과 범 같더니 / 昔之隱几者生龍活虎
지금은 싸늘한 재, 마른 나무 같소그려 / 今之隱几者死灰槁木
팔팔한 용과 범일 때도 발동된 적 한 번 없고 / 生龍活虎未嘗動
사회 고목 같은 때도 가만히 있는 건 아니라오 / 死灰槁木未嘗寂
그대여 귀뿌리를 떼어 내 버려 보소 / 請君割却耳根
그러면 하늘 피리 소리를 들을지니 / 然後天籟可聞
이상은 남곽은궤(南郭隱几)에 대한 것임.

저 자리 앉은 이 / 彼當座者
부처라 할지 악마라 할지 / 是佛是魔
둘러싸고 있는 저들 / 彼圍遶者
일이라 할지 다라 할지 / 是一是多
악마든 부처든 본래가 공하거니 / 魔佛本空
일이든 다이든 무슨 상관 있으리요 / 一多何知
비로자나 / 毗盧遮那
그 진신이 여기에 있는 것을 / 眞身在玆
이상은 비로거대(毗盧踞臺)에 관한 것임.


 

[주D-001]행단(杏壇) :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유지(遺址)로서 택반(澤畔) 가운데 높은 곳이다. 《莊子 漁夫》
[주D-002]남곽자기(南郭子綦)가 …… 모습 :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나온다.
[주D-003]비로자나(毗盧遮那) : 불(佛)의 진신(眞身)에 대한 존칭인데, 일반적으로 법신불(法身佛)을 말한다.
[주D-004]용면(龍眠) : 송(宋) 나라 이공린(李公麟)을 말한다. 그가 그린 산장도(山莊圖)는 세상의 보물로 일컬어졌으며 특히 인물의 묘사에 뛰어나 고개지(顧愷之)와 장승요(張僧繇)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받았다. 《宋史 卷444》

 

ⓒ 한국고전번역원 ┃ 이상현 (역) ┃ 1994

 


 

 

 

 

 

 

 

 

 

 

谿谷先生集卷之二 번역문  원문이미지  새창띄우기
확대 원래대로 축소
 [贊] 四首
三畫贊以下續稿 a_092_045c
[UCI]G001+KR03-KC.121115.D0.kc_mm_a333_av002_09_051:V1_0.S3.INULL.M01_XML UCI복사 URL복사


 

 

 

三千弟子。立侍杏壇。回琴點瑟。
南郭子綦。隱几而坐。槁木死灰。
毗盧遮那。踞天光臺。千佛圍遶。
病裏閑居。偶思此三件景象。不覺神融。欲倩畫筆㨨作三障子。顧今世難得龍眠妙手。畫未易成。姑先作三贊。
092_045d條風淑景。杏花滿庭。弟子拊絃。先生默聽。一團和氣。沖融無間。其形可㨨。意不容讚。右杏壇琴瑟   昔之隱几者。生龍活虎。今之隱几者。死灰槁木。生龍活虎未嘗動。死灰槁木未嘗寂。請君割却耳根。然後天籟可聞。右南郭隱几 彼當座者。是佛是魔。彼圍遶者。是一是多。魔佛本空。一多何知。毗盧遮那。眞身在茲。右毗盧踞臺


 

 

 

 

 

 

 

 

 

 

 

 

 

 

 

선화가(禪畵家) 야선(野仙) 박정희 선생님의

선선암 유희좌 마애반가상 그림 (부분)

 

 

 

 

 

 

 

 

 

 

 

 

 

 

 

 

 

 

 

 

 

 

 

 

 

 

 

 

 

 

 

 

 

 

 

 

 

 

 

 

 

 

 

 

 

 

 

 

 

 

 

 

 

 

 

 

 

 

 

 

- 한재  이목의 <다부(茶賦)> 중

 

 

- 茶의 7가지 효능 (七段階 修身求道)

 

1. 한잔을 마시니 메마른 창자가 눈녹인 물로 씻어낸 듯 깨끗이 씻겨내리고

2. 두잔을 마시니 마음과 혼이 상쾌하여 신선이 된 듯하고

3 .석잔을 마시니 병골에서 깨어나 두통이 없어지며 浩然之氣가 생겨나고

4. 넉잔을 마시니 가슴에 웅혼한 기운이 생기며 근심과 울분이 없어지고

5. 다섯 잔을 마시니 색마가 도망가고 탐욕이 사라지며

6. 여섯 잔을 마시니 세상의 모든 것이 거적떼기에 불과하며

해와 달이 방촌에 들어 신기함이 하늘나라에 오르는 듯하고

7. 일곱 잔은 채 반도 마시기 전에 맑은 바람이 울울이 옷깃에 일어난다.

 

 

 

 

 

茶의 5가지 공로 (五功效)

 

ㅡ 차의 다섯 가지 공효를 음다경험을 통해서 집약 부술 .

 

1. 목마른 갈증을 풀어주고

2. 마른 창자와 가슴의 울적함을 풀어주고

3. 주객의 정을 서로 즐기게 하고

4. 뱃속의 중독에 대한 해독으로 소화가 잘되게 하고

5. 숙취에 대한 정주 즉 술을 깨게 해독해 준다.

 

 

 

 

 茶의 6가지 德性

 

 

사람으로 하여금

 

1. 오래 살게 하고 덕을 닦게 한다

2. 병을 그치게 하고

3. 기을 맑게 하고

4. 마음을 편케 하고

5. 신령(仙人) 스럽게 하고

6. 예의롭게 한다.

 

 

 

 

 

 

 

- "하늘의 성(性)이 바로 나의 성이고

하늘의 마음(心)이 내 마음이며

하늘의 도(道)가 나의 도요

하늘이 좋아하고 싫어하는(好惡) 바가

바로 내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바이니

까닭에 내 마음 안에 하늘의 마음이 있다 (吾心之內在天心) " -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


   이에 스스로 기뻐하며 노래하기를

 

  “ 내가 세상에 태어남에, 풍파(風波)가 모질구나.

    양생(養生)에 뜻을 둠에 너를 버리고 무엇을 구하리오?

    나는 너를 지니고 다니면서 마시고, 너는 나를 따라 노니,

    꽃피는 아침, 달뜨는 저녁에, 즐겨서 싫어함이 없도다.”

 

 

   내 항상 마음속으로 두려워하면서 경계하기를, ‘삶-生-은 죽음의 근본이요,

 죽음-死-은 삶의 뿌리라네.

안-心-만을 다스리면, 바깥-身-이 시든다.’고

 혜강(嵆康)은 양생론(養生論)을 지어서 그 어려움을 말하였으나,

지혜로운 사람이 물을 즐기고, 어진 사람이 산중에서 사는 것과 같으리오?

 

 

   이와 같이 차를 통해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그 즐거움을 꾀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내 마음의 차-吾心之茶-’이나니.

 “ 어찌 또 다시 마음 밖에서 구하겠는가?”

 

- 한재 선생은 철저한 道學者요, 실천하는 茶人이었다.

 

 ㅡ 茶賦(다부)  중에서 .... /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

 

 

 

이의차 사백이 차를 보내 준 은혜에 감사하며....

                      /  원 천 석

 

 

반가운 소식 시골집에 이르니

가는 풀잎으로 새로 봉한 작설차라네

식후 한 잔 차 그 맛 더욱 좋고

취한 뒤의 석 잔은 최상의 맛이라오

마른 창자 윤택해짐에 찌끼기 없고

병든 눈 맑아져 현기증이 사라지네

그 신령스런 공덕 헤아리기 어려워

시마(詩魔)가 가까이 이르니

수마(睡魔)가 물러가네.

 

 

 

 

 

 

경남 하동군 운수리 삼신산 자락 쌍계사 경내에는 진감국사대공탑비(眞鑑國師大空塔碑)가 서 있다.

 신라 말 대문장가인 최치원이 찬한 사산비명(四山碑銘) 중의 하나인 이 탑은 비문 중에

‘한명’(漢茗)이라는 글자를 남기고 있어, 차인들에게는 가장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한명이란 바로 중국 차를 뜻한다. 비문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다.

 

 

    “선사의 성품은 질박함을 흐트러뜨림이 없으며 기교를 좋아하지 않았다.

입는 것은 헌 솜이나 삼베도 따뜻하게 여겼고, 먹는 것은 보리라도 달게 여겼다.

상수리와 콩을 섞은 범벅에 나물 반찬도 두 가지를 넘지 않았으며,

신분이 고귀한 사람이 가끔 찾아오더라도 다른 반찬이 없었다.

 

제자들이 뱃속을 더럽히는 것이라고 올리기를 어려워하면

선사가 말하기를 ‘마음이 있어 여기에 왔을 것이니 비록 거친 현미인들 무엇이 해로우랴’라고 했으며

지위가 높거나 낮거나 늙은이나 젊은이를 가리지 않고 대접함이 한결 같았다.

(중략) 한차(漢茗)를 공양으로 바치는 자가 있으면 땔나무로 돌가마솥에 불을 지피고

가루로 만들지 않고 그대로 끓이면서 말하기를 ‘나는 맛이 어떤지 분별하지 못한다.

다만 이 차로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라고 말하였다.

참된 것을 지키고 속된 것을 싫어함이 모두 이와 같았다.”

 


ㅡ <28> 불교의 길, 차의 길 ⑥선차악, 풍류차의 종조, 진감 선사 

/ [박정진의 차맥] 글 중에서 발췌 ....

 

 

 

 

 

차는 즐기면 그 뿐......

 

차는 그냥 마시면 그 뿐...

굳이 신라 진감국사 혜소(慧昭) 큰스님의 "나는 맛이 어떤지 분별하지 못한다.

다만 이 차로 뱃속을 적실 따름이다." 라는 구절이나,

 

운곡 원천석(耘谷 元天錫, 1330-?)의

"마른 창자 윤택해짐에 찌끼기 없고"라는 구절을 되새겨보지 않더라도

 

아무런 바램이 없이 차를 올리거나 마시면 그 뿐이고....

 

한재 이목(寒齋 李穆, 1471~1498)  선생님께서 <다부(茶賦)>에서 설파하신 것 처럼

"까닭에 내 마음 안에 하늘의 마음이 있다 (吾心之內在天心) " 이나

 

 

   이와 같이 차를 통해 안과 밖이 하나가 되는 깊은 경지에 들어가면,

그 즐거움을 꾀하지 않아도 저절로 이르게 되느니라.

이것이 바로 ' 마음의 차(吾心之茶)',

 “ 어찌 또 다시 마음 밖에서 구하겠는가?”라는

 

깊은 경지에는 다다르지 못하더라도

차를 올리는 시공간과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면 되고,

헌다례 후에 차를 서로 음복하면서 차향을 즐기면 그  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의 편린이 이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앞에서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이나 연유가 있어서인지를 잘 알지 못하겠다.

 

 

 

 

 

 

<문종실록>에 나오는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1410~1481)의 내용이다.

 

병조정랑 김수온은 중 신미(信眉)의 아우였다.

비록 유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지만,

천성이 불서를 지독히 좋아하여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능엄경은 중용보다 낫다고 한다.”

김수온은 서거정(徐居正강희맹(姜希孟)과 함께 조선 초기 3대 문장가로

손꼽히는 인물로 특히 시문에 뛰어났다.

그는 많은 차시를 남긴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식우집(拭疣集) 권4>에 보이는실제(失題)’라는 시다.


입이 마를 때 마다 차로 입을 적시고,                 枯吻時時只點茶

창자를 지탱해 주는 보리밥은 한낮에야 먹는다.        撑腸麥飯午交加

뼈에 사무치는 청빈함 아직도 옛날과 같으니,          淸貧徹骨猶依舊

이 꼴이 높은 벼슬의 부원군 집이라 말하지 마오.       莫道封候府院家

 

 

 

 

 

 

 

사풍기공견방(謝豊基公見訪)

 

 

늘그막에 관직이 한가하여 누추한 집에 누었더니,                              垂老官閑臥弊盧

  차 그릇과 또한 술잔만 남았구나....                                                                    茶甌兼復酒樽餘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사립문은 닫지 않았고,                                  衡門不向世人設

높은 의자는 다만 찾아 올 아름다운 객을 위해 닦아 두었다.                      高榻只爲佳客除

고요할 때는 이리저리 석가와 노자를 탐구하고,                                靜裏沿洄探釋老

한가할 때는 친구들과 시서를 담론한다.                                       閑中談笑駁詩書

은근히 다시 백련의 모임을 약속하고                                                                   殷勤更約白蓮會
한 해가 저물 때 서로 쫓아 모임을 맺으리                                                             歲宴相從結社居

『식우집(拭疣集)』 권4   

  /  괴애 김수온(乖崖 金守溫·1410~1481)의 한시

 

 

 

굳이 어떤 목적을 갖거나 조급한 탐심을 내지 않더라도

그냥 한평생을 무심하게 살아가다가  위의 괴애 김수온의 한시 2수에서 처럼

 

 " 입이 마를 때 마다 차로 입을 적시고,

고요할 때는 이리저리 석가와 노자를 탐구하며,

한가할 때는 친구들과 시서(詩書)를 담론한다."

 

묘용(妙用)만이라도 잘 하게 되면,

그 즐거움을 스스로 꾀하지 아니 하더라도

불가에서는 선차문화(禪茶文化)가,

속가에서는 차문화와 그 저변문화(詩書畵. 律呂,영상, 공연문화 등)가 더불어 꽃피우는

수류화개(水流花開)가 저절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여진다.

 

 

 

 

 

 

 

 

문평공 괴애 김수온 초상

- 다음 카페 < 영산 김씨> 운곡 김윤호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 뮤지컬 `화랑`(사진=MJ컴퍼니)

 

 

 

 

 

 

 

 

뮤지컬 풍월주 프레스콜 사진 모음 자료 중에서 발췌 ......

- 다음 티스토리 <뮤지컬배우 신성민 기사, 영상모음>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ㅡ 다음 카페 < 아미타파 > 망양 님의

[원효대사 사진 모음] 자료 중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