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하나

2014. 12. 24. 16:15들꽃다회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하나

                            /  20141221~22 일~월요일 , 맑고 포근함

 

 

 

 

 

 

남천 

남천(南天)은 매자나무과에 속하는 나무로 남천속에 속하는 유일한 종이다.

남천죽(南天竹)이라고도 부른다.

 

 

 

 

 오늘 경주 서출지 옆 한옥에서

남쪽하늘(南天)을 보았다

 

 

 

 

 

 야선미술관에서 바라본 경주 남산 동남부

 

 

 

 야선미술관 식당 내부의 연등천장

 

 종도리(상량도리) 옆으로 삐친 추녀가

마치 백제식 하앙식 추녀결구를 닮아 있다.

지붕하중의 경감을 위한 하앙식 가구(架構)를 도입한 대목의 솜씨가 돋보인다.

 대들보와 중보 사이에 있는 판자형 마루대공 놓듯이 한 중대공이 특이한 형태를 보이며,

종도리를 받히고 있는 장여가 튼실하다.

 

종도리(상량도리) 장여에는 연향만리(蓮香萬里)라는 전서체 상량문으로 써놓아

손수 만든 연잎밥을 먹으며 진행하였다던 "가을로 가는 작은 콘서트"의

테마인 "연향만리"가 이 상량문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인 주돈이(周敦頤 1017∼1073)는 애련설(愛蓮說)에서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 하여 "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아진다."고 하였으니,

예술혼을 불태운 명작이나  아름다운 사람의 따뜻한 향기는

시공간을 뛰어넘어 전해지니 어찌 공간에만 국한하여 만리만 갈까??하는 생각이 든다.

 

 

 

 

 네채의 고옥을 뜯어다가 쓸만한 목재를 골라서

지은 집이라  천정의 가구구조(架構構造)가 다양한 형태를 보여준다.

 

궁륭형으로 굽은 튼실한 대들보와 툇마루 천장에나 설치되었음직한

아치형 퇴보의 결구 구조가 돋보인다.

 

 

 

애련설(愛蓮說)

                                                   /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중국 송나라 성리학자

                 

내가 오직 연을 사랑함은             予獨愛蓮之(여독애련지)

 

진흙 속에서 났지만 물들지 않고   出於泥而不染(출어어니이불염)  *

 

맑은 물결에 씻어도 요염하지 않으며, 濯淸漣而不妖(탁청연이불요)

 

속이 통하고 밖이 곧으며               中通外直(중통외직)

 

덩굴지지 않고 가지가 없기 때문이요, 不蔓不枝(불만불지)

 

향기가 멀수록 더욱 맑고,                  香遠益淸(향원익청)

 

우뚝 깨끗이 서 있어                         亭亭淨植(정정정식)

 

멀리 바라볼 수는 있으나                  可遠觀 而 (가원관 이)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는 연꽃을 사랑한다. 不可褻玩焉 (불가설완언)

 

 

 

 

 

 

 

 

 

 

 

 

 

 

 

 

선화가(禪畵家)이자 도예가, 그리고 천연염색가이신

야선(野仙) 박정희 선생님

 

ㅡ야선미술관에서는 한옥문화체험으로 남산 한두곳의 문화답사,

그리고 선화, 선식, 선차를 접할 수 있는 한옥컬쳐스테이를 운영중이다.

 

 

 

 

        전서체  선락당(仙樂堂) 현판

 

- 몇해전 선종하신  김수환 추기경님께서  사람이 산에  살면

선(仙)이라 하고 산에서 고을(谷)으로 내려가면 속(俗)이라 하니,

성속(聖俗)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들판에 살면서 야선(野仙)이라 이름하는 것은 훌륭한 아호(雅號)라 할 수 있겠다.

       

 

 

 

 

 

 

 

 

 

 

 

 

 

 

 

 

 

 

 

 

 

 

천연재료를 이용한 선식 상차림

- 선차를 달이고 있는 천동탑에서 모티브를 따온 알콜워머,

손수 만든 도자기 식기류와 차도구 ......

 

 

 

 

 

야선미술관 화실 연등천장

 

 

 

 

 

칠불암 가는 소나무 숲길

 

 

 

 

 

 

새로 지은 칠불암 요사채

 

 

 

 

요사채 지붕에 남은 잔설

 

 

 

 

 

 

칠불암 가는 대나무숲 계단

- 대나무 종류는 붓대롱 화살 등을 만들던 이대로

칠불암 뒤의 신선암마애불상이 있는 암봉이 하늘로 뾰죽한

문필봉(文筆峰)을 닮은 형상이라 문기(文氣)를 갈무리하려는

비보(備補)의 목적으로 칠불암 주위에 이 이대를 많이 심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이대가 화살용으로 많이 사용되므로 문약(文弱)에 빠지지 않고,

문무를 겸비한 인재의 양성을 위하여 대숲을 식재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칠불암 전경

 

 

 

    최남선은 [불함문화론]에서 화랑들에 의해 금강산 순례가 행해진 이유가 

“사람의 생명이나 국가의 운조(運祚)도 오로지 금강산신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하여

마치 희랍의 올림포스에 있어서와 같이 신탁과 예언에 이은

금강산에 걸린 안개비 구름을 응시하고 있었다.

에 미륵불이니 미륵암이니 하듯 미륵의 이름을 붙인 것이 많은 것도

불교 전래 후 이러한 민간신앙 위에 불교적인 산악관으로써

미륵정토 관념이 습합된 때문이다." 하였다.

 

庭光散人 김문배(글돋先生)이라는 분은  "남산 칠불암이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 7인이

국가의 중대사가 있을 때 모여서 함께 의논하였던 남산 우지암(亏知巖)이 바로 칠불암이고,

신선암마애반가상은 화랑의 풍류도와 불교를 화랑에 습합시킨 인물 중에 첫번째 풍월주인

이화공을 불교화한  모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확실한 전거(典據)를  밝히지 않은 것이 많고,

본인의 다소 신령적이며 주관적인 판단에 의존하는 것이 많아 그리 믿을 것은 못되나

이러한 다소 허황된 주장은 도외시한다고 하여도,

 

 우리 한민족고유의 산악숭배사상과

불교의 보살신앙이 결합하여 국가나 가문의 대소사가 있을 때 

산상의 큰 바위나 절 또는 마애불을 찾아서 함께 기도하며 의논하였을 개연성은

항상 존재한다고 보아도 그리 무리한 일은 아닐 것으로 보여진다.

 

 

 

 

******* 참고로 정광산인(庭光散人) 김문배 선생님의 칠불암과 신선암마애반가상에

대한 주장을 소개를 겸하여 실어 여러분들의 현명하신 판단에 맡기고자 한다.

 

 정광산인 글돋선생이라는 김문배 선생님이 자세히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당 박창화(南堂 朴昌和)의 <화랑세기(花郞世)>를 번역한

이종욱교수의 <대역 화랑세기(對譯 花郞世)> 대본으로  하여 이 글을 쓴 것이라면

 

국사편찬위원회의 박남수(朴南守) 선생에 의하여 , 박창화의 화랑세기(花郞世)가

신라 김대문(金大問)이 저술한 화랑세기(花郞世)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위작임이 밝혀졌고, 남당유고 자체가 박창화가 쓴 창작소설이라는 주장도 

상존하고 있는 까닭에

 

사료로서 가치는 일본황실 소장의 화랑세기 원본이 밝혀지기 전까지 유보된 상태이며,

다만 당시 상황을 단편적으로 유추하여 볼 수 있는

소설적인 설정임을 감안하고 아랫 글을 읽어야 한다. *******

 

 

"사실 ?화랑세기??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사를 편년 형식으로 나열하고,

 관련 자료의 상관관계를 역으로 추적하여 논리적인 고리를 만드는 한편

 필요시에 가공 인물과 스토리를 만들어간 일종 faction으로서 평가되는 것이다."

 

 南堂 朴昌和와 그의 遺稿에 대한 몇 가지 문제 /朴 南 守(국사편찬위원회)

 

 

 

< “화랑세기” 기록에 남산에 화랑 우두머리(풍월주) 7명은 나라가 국난 있을 시

만나서 의논했던 그 절이 바로 칠불암이란 것을 깨달았다.

 

칠명의 화랑의 우두머리 중에 김유신과 이화공이 있었다.

 이화공은 선도와 불교를 습합시킨 분이며, 그는 이미 불법을 깨우친 승려와 같았다.

12풍월주 보리공에게 계를 받은 14대풍월주 호림공(虎林:탈의지지장으로 불릴 정도로

불교에 귀의함)은 자장과 명랑법사의 부친이다.

보리공은 화랑의 우두머리로서 이미 화랑의 풍류도와 불교를 습합시킨 인물이다

그도 탈의지장보살이라 불리울 정도로 불법을 깊이 받아드린 이였다. 

 

    공은 누구인가. 그 유명한 원광법사와 풍월주 보리공의 아버지였다.

이화공은 진흥왕의 모친인 지소부인의 딸 숙명공주의 남편이며,

숙명공주가 진흥왕 몰래 이화공에 반해 밀회를 하여 나은 아들이 원광법사와 보리공이다. 

호림공은 보리공의 조카이며 불교계를 받은 인물이기도 하다.

림공의 아들과 조카가 그 유명한 자장율사와 명랑법사(조카)이다. 모두 진골 출신들이다.

 

    호림공의 누이가 진흥왕의 아내 마야부인이기도 하다. 

이화공은 화랑의 풍류도와 불교를 화랑에 습합시킨 인물 중에 첫번째 풍월주이다.

그는 부처를 숭상함이 깊어져 유신공에게 풍월주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茂林居士)라 불렀다.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국가에 큰 일이 있으면 반드시 받들었다.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염장공(廉長),유신공(庾信),보종공(寶宗) 등과

더불어 칠성우(七星友)를 이루어 남산 亏知巖(우지암)에서 회유(會遊)했다.

(삼국사기. 1.<기이> 상, 진덕왕조에 나옴,화랑세기 14세 호림공 /이종욱 화랑세기 231페이지)

 

참고:亏(우)는 于 자의 本音이며 于와 같다.

삼국유사 원본을 해독한 이병도 譯 '삼국유사' 책엔 亏 자를 汚(삼수변 없는 오)로 오역하여

'오지암'이라 번역하여, 화랑세기를 번역한 이종욱교수도 주석에 '오지암'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를 바로 잡는다. '우지암'이다.

 

    통사업도 7인의 공 등으로 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옛 화백회의와 같이 신라가 국난이 있을 시 7인의 회의를 주도하는 7명의 우두머리였다.

최남선이 말했듯 국가의 운조도 남산산신의 의사 여하에 달렸다고

민간신앙 위에 불교적인 산악관으로 남산 신선불이 되었다.

 

-ㅡ중략 ㅡ

 

국유사 기이1편 선덕여왕편에 신라왕경에는 신령스런 땅이 네곳이 있다.

첫째는 靑松山, 둘째 남쪽 우지산(亏(于의 본음)知山, 3째가 서쪽 피전(皮田) ,

4째가 북쪽 금강산(지금의 소금강산) 나온 구절을 뇌리 속으로 입상불은 전해주고 있었다.

 七星友(알천공, 호림공, 영장공, 유신공, 임종공, 술종공,보종공)들은

나라 큰일이 있으면 하지와 추분 사이엔 南山 亏知巖(우지암:于知巖)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하였다.

남산의 큰 바위, 즉 우지암에 모여서 큰 일을 결정했던 것이다.

 

  于뜻에는 '넓은 모양(廣,大貌)' '말할(曰也)'‘행하다’ 뜻이 들어있다.

우지암은 큰 바위로서 뜻(知)을 의논하는 영험한 바위란 뜻이다.

 

ㅡ중략 ㅡ

 

원광과 보리공의 유언으로 명랑법사는 선덕여왕과 유지를 받들어,

그들을 남산 구국의 산신불로 만들어 놓았다.

특히 그 우두머리 이화공을 남산 신선불로 조성해 놓았다.

 

     사 국난이 있을 시, 7불로 남산을 지키며 나라를 지킬 수 있는 남산 신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화공은 동쪽 햇살이 떠 오를 때 동해 기운을 받아 호국신으로 남았다.

 

불교와 민간신앙을 살펴보자. 환웅은 (태백산산신), 단군(구월산) , 수로(구지봉), 해모수(웅심산),

 신라6촌장(표암봉, 형산), 탈해왕은 토함산신, 경주 선도산(사소성모:박혁거세 모친),

 경순왕도 현재 兄山(경주와 포항입구 산)의 산신으로 남아 있다.

 

관세음보살로 호국의 신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살펴보자.

치술령에는 치술공주성모(화랑세기에 의하면 실성왕의 딸 치술공주)로 나오는

박제상의 처로 기술되어 있다.

 

 

   지리산의 ‘위숙성모’, 가야산은 ‘정견묘주’ ,영취산(울산문수산)’의 변재천녀(辨財天女),

운제산(포항에 있음, 오어사가 있음)의 ‘운제성모’

불교와 선도, 불교적인 산악관에 의한 호국신들로 남아 있는 예이다.>

 

- 庭光散人글돋先生 2014.06.08 13:58

http://blog.daum.net/kmb2274/17045616 

다음 블로그 < 전혀 다른 향가 및 만엽가> 

[남산 칠불암과 신선암의 정체성을 찾아서] 중에서 발췌 ......

 

 

 

 

 

 

 

 

칠불암 마애불상군

 

 

 

 

 

 

 

 

 

 

 

 

 

 

 

 

 

 

 

 

 

 

 

 

 

 

 

 

 

 

 

 

 

 

 

신선암 마애반가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도 이대가

대나무숲 터널을 이루고 있다.

 

 

 

 

 

 

 

 

 

 

 

 

 

 

 

 

 

 

 

촬영중인 <차의 세계>사 최석환 회장님 

- 야선 선생님의 젊은 제자 부부가 무거운 백제금동용봉대향로를

신선암까지 가지고 가느라 큰 노고를 아끼지 않았다.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

 

 

 

오후 4시가 가까워지자

 산그림자는 이미 남산 동쪽 산록에 드리우고 ....

 

 

 

 

 

 

 

 

 

 

 

 

 

 

 

 

 

 

 

신선암마애반가상 전실(前室) 또는 난간 설치용 암혈(岩穴) 

 

 

 

 

 암혈 주변부 자연암반이 큰 원형으로 다듬어져 있어 

큰 지름을 갖는 기둥이 서 있을 수 있도록 그랭이질이 되어 있으므로

전실 설치의 가능성이 커졌다고 볼 수 있다.

 

 

 

 

 

 암혈 주변 자연암반에 큰지름의 원형 그랭이질이 되어 있고,

 한쪽의 원호 일부 잘려 판재와의 접합면이 돌출되어 있다.

 

- 기둥과 접합부 부근의 암반이 주변부 보다 더 붉다. 

붉게 변색된 사유에 대한 추론은 다음 글에서 설명하기로 한다.

 

중앙부의 원형 암혈은 기둥 밑면을 돌출시켜서

수평횡압력에 대한 저항을 증가시키기 위한 결구구조용 또는

목재기둥의 부식을 방지하고 흰개미류에 의한 목재 손상을 방지하기 위하여

소금을 넣어두는 용도로 보면 무방할 것이다.

 

이렇듯 자연암반에 보일듯 말듯하게 일부의 인공을 가미하여 

주추로 활용하는 것은 삼척 죽서루 기초 등 여러 곳에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