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셋

2014. 12. 25. 08:00들꽃다회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헌다례 - 셋

                            /  20141221~22 일~월요일 , 맑고 포근함

 

 

 

        

 

 

 

 

 

 

 

 

 

 

 

 

 

 

 

 

 

 

 

 

 

 

 

 

 삼족오를 상징하는 듯

까마귀는 계속 날아오고 ......

 

경주 남산을 금오산(金鰲山)이라 함은

남산의 지형을 하늘에서 보면 자라를 닮았다는 것에서

이름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러나 황금까마귀인 금오(金烏)는 태양을 상징하고 있다는 것과

우리 한민족의 선조인 예맥족의 기저신앙이 태양신을 받들고 있다는 점에서 본다면,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전 신라 이두문에서 황금자라를 뜻하는 금오(金鰲)와

황금까마귀를 뜻하는 금오(金烏)가 서로 혼용되어 쓰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육당 최남선의 <불함문화론>에서 말하고 있는 민간신앙과 불교(佛敎)의 습합이라는

한반도 내에서 불교전래 초기인 포용기(包容期)에서

불과 밝음("불"의 扶餘, 沸流,不咸,  "환하다"의 桓, "밝다"의 朴達,倍達,白岳, 박달나무 단 檀)의 태양신이

조로아스터교(배화교, 중국에서 현교 顯敎)에서 근원한 

 불교의 태양신인 비로자나불과 융합하는 과정에서

금오(金烏)라는 이름에서 이두문식으로 음차(音借)하고

여기에 지형을 중시하는 풍수사상과 결합하여 황금자라인 금오(金鰲)라고

쓰여졌을 가능성이 크다.

 

태양을 상징하는 금오(金烏)는 고구려의 고분벽화와

신라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탄생설화인 황금알,

백제의 원이름인 부여(扶餘), 온조와 함께 남하한 비류(沸流 : 불의 이두식 표현) 등에서

 상징되고 있는 것처럼,고조선~ 삼국시대 초기에 요서지방~북만주지방~한반도에 걸쳐

동이족인 한민족의 원형질적인 기저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동명이산(同名異山)의 금오산이 여섯 군데 있다.

경북 구미 금오산(977m)과 경남 밀양 삼랑진 금오산(730m),

경남 하동 진교 금오산 (849m), 전남 여수 금오산(323m),

 경주 남산 금오산(468m) 그리고 충남 예산 금오산(234m)이 있다.

 

 섯 개 가운데 구미,밀양,예산은 황금까마귀란 뜻의 금오산(金烏山)이고

 나머지 셋은 황금자라(金鰲)라는 뜻의 금오산(金鰲山)이다.

 

금오산(金烏山)이라고 불리우는 곳은 내륙지방에 위치하고 있고,

금오산(金鰲山)이라 불리우는 곳인 하동, 여수 돌산도, 경주 지방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연안(沿岸)지역이거나 도서인 것으로 보아

해양문화의 영향을 배제하기 어렵다.

 

 

 

 

 

 

금오산 이름의 유래 설명한 다른 기록은

<삼국사 본전〔三國史本傳]>  [고운 선생 사적]에서

최치원 선생님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을 할 때,

동년(同年)의 당나라 벗인 고운(顧雲)이 최치원 선생에게 준 

송별시에 나타난다

 

 

 

 

 " 처음에 중국에 유학할 당시에 강동(江東)의 시인 나은(羅隱)과 알고 지내었다.

나은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남을 쉽게 인정하지 않았는데,

공이 지은 가시(歌詩) 5축(軸)을 누가 그에게 보여 주자 그만 감탄하여 마지않았다고 한다.

또 동년(同年)인 고운(顧雲)과 벗으로 친하게 지냈는데,

공이 귀국할 즈음에 고운이 시를 지어 송별하였으니,

이는 대개 공에게 심복(心服)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내 듣건대 바다 위에 세 쌍의 황금 자라 / 我聞海上三金鼇
황금 자라 머리 위에 높고 높은 산 / 金鼇頭戴山高高
산 위에는 주궁패궐 황금전이요 / 山之上兮珠宮貝闕黃金殿
산 아래엔 천리만리 드넓은 바다라네 / 山之下兮千里萬里之洪濤
그 옆에 푸른 한 점 계림이 있는데 / 傍邊一點鷄林碧
금오산 빼어난 기운이 기걸한 인물을 내었나니 / 鼇山孕秀生奇特
십이 세에 배 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 十二乘船渡海來
문장으로 중화의 나라를 뒤흔들다가 / 文章感動中華國
십팔 세에 횡행하며 사원에서 힘 겨루어 / 十八橫行戰詞苑
화살 한 발로 금문의 과거에 급제하였다네 / 一箭射破金門策  "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에 전한다.

 

이는  비록 문학적인 수사라고 할지라도, 고운(顧雲)이 살고 있던

당나라에서 신라를 이상향인 삼신산으로 여기고 있었음을 뜻하며,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을 이상향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마리 황금자라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칠불암 마애불상군 불전(佛殿) 오른쪽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암반 사이로 약 150m 정도 오르면 고위봉 정상과 신선암으로 길이 갈라진다.

여기에서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암반으로 형성된 절벽 위로 가다

바위를 돌면 신선암 마애보살이 나타난다.

   통일신라 당시에는 제1사지의 사원에 예속된 암자였을 것으로는 짐작되지만,

근래까지 이곳에 신선암(神仙庵)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므로

현재는 제2사지의 보살상을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으로 부르고 있다.

 

 

 

   절벽위 제2사지 동쪽과 남쪽으로 거대한 바위가 돌출되어 있으며

서쪽과 북쪽은 능선과 접해 있다.

그 바위 동쪽 암반에는 난간을 설치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의 석공(石孔) 6개소가 있는데, 지름 11㎝, 깊이 10㎝이다.

원공과 원공사이의 간격은 일정하지 않으나 134∼213㎝에 이르며

내부 공간은 최대 303㎝이다.


   남측으로는 약간의 축대가 있고 서쪽은 고위산 정상으로 오를 수 있는

좁은 길이 있으나 현재는 통행이 금지되어 있으며

길 옆 작은 바위에는 지름 25㎝정도 되는 홈이 보이는데 석등을 세웠던 자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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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조상군에서 오른쪽 소로를 약 10분 정도 오르면 된다

 

 

 

칠불암에서 올려다 본 신선암 마애관음보살상(봉화곡 제2사지)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발췌......

 

 

 

 

 

 

 

 

 

 

 

 

 

 

 

 

 

 

 

 

 

 

 

 

 

 

 

 

 

 

 

 

 

 

 

 

 

 

 

 

 

 

 

 

 

 

 

 

 

 

 

 

 

 

 

 

 

 

 

 

 

 

 

 

 

 

 

 

 

 

 

 

 

 

 

 

 

 

 

 

 

 

 

 

 

 

 

 

칠불암 마애불상군 앞 촛불

 

 

 

 

 

 

근래에 새로 신축한 칠불암 법당 및 요사체

북쪽 창문이 있는 방이 법당이며 따로 불상은 없고 바깥 칠불을 향해 법회를 행한다

 

 

 

법당 남쪽의 삼성각

 

 

   봉화골의 칠불암은 통일전(統一殿)에서 남산 기슭을 따라 남쪽으로 약 3.5로 지점에 있으며

도보로 약 1시간 가량 소요된다.

 

비교적 완만한 비탈길을 걷다가 봉화계곡의 막바지에 이르러 141개의 계단을 오르면

암봉(巖峰) 우측 중턱에 축대를 마련하여 지은 조그마한 암자가 있고

암자 옆 넓은 터에는 통일신라기인 8세기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7구의 불상이 마애불로 남아 있다

뒤편 큰바위면에 본존불과 양 협시불, 앞쪽 바위에 돌아가며 네개의 불상,

해서 모두 일곱분의 부처님이 새겨져 있다.

 

   신라 때 세워져 오랫동안 법등을 이어왔으나 오랜 세월 속에 절은 폐사되고

불상만 우거진 수풀 속에 숨어있었는데 약 팔십여년전(1930년대),

아랫마을에 살던 황연화(법명) 할머니가 칡넝쿨과 대나무숲에 가려있던

이 불상을 우연히 발견히면서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

 

황연화할머니는 아들과 함께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칠불을 모셨는데

세월따라 주인도 바뀌고 암자 또한 근래에 새로 지었다

 

 

   칠불암이라는 명칭은 옛 사지(寺址)에 황할머니가 와서 암자를 새로 지은 이후

일곱구의 불상이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신라 때의 사찰명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이곳에서 발견된 고려시대(1011세기)의 명문와에 ()()라 기록되어 있으며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명문와가 다수 발견되었다고 하나

현재 남아 있는 유물이 없어 사지의 이름을 알 수 없다.

   문화재명으로는 봉화골 제1사지로 불리는 이 칠불암은

삼존불과 사방불(四方佛)의 장대한 규모 그리고 이 곳에서 출토된 경석편(經石片),

화려한 꽃무늬로 장식된 막새기와 조각들이 출토되고 있음으로 미루어 볼 때

국가적 차원에서 세운 거대한 가람이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 칠불암의 경내 건물로는 요사채를 겸한 암자 1채와 삼성각(三聖閣)이 있을 뿐이다.

 

 

 

 

 

   칠불이 있는 암벽 앞으로는 3단으로 층계를 이뤄 약 2m 높이의 석축을 쌓아

불전(佛殿)을 마련하였는데 불전의 규모는 남북 8.5m, 동서 5.1m이다

   불전 앞에는 남북 16.40m, 동서 13m의 대지(臺地)가 있으며 이 곳이 사찰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삼존불이 조각되어 있는 바위의 뒷면과 옆면에는 목조건축의 흔적으로 추정되는

방형공(方形孔)이 남아 있고 사방불 위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두 곳이 있는데

북쪽의 경우 바로 아래 약 7×6크기의 방형공이 있다.

 

   따라서 삼존불과 사방불이 놓여 있는 불전은 본래 목조로 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며,

 불전 남쪽 3m에는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 43×66,

깊이 17의 크기로 남아 있음이 확인이 되는데 이곳은 출입구로 생각된다.

 

다만 불전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장대석 등이 석축 아래 놓여 있다는 점은

 건물 내부와 축대가 창건 이후 원형이 변형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봉화곡 제1사지(칠불암)의 평면도

 

   불전의 서쪽 끝에는 길이 840m, 최대 너비 16.3m, 높이 2.15m

비교적 규모가 큰 반원형(半圓形) 바위가 놓여 있는데

동향(東向)한 부분에 삼존불이 부조(浮彫)되어 있다.

 

   그리고 삼존불 바위면에서 동쪽으로 1.74m쯤 간격을 두고

1.8m×1.86m의 석주(石柱)가 서 있는데 각 면마다 여래상을 새겨 사방불(四方佛)을 나타내었다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발췌......

 

 

 

 

 

 

   사방불의 존명에 대해서는 당나라에서 8세기초에 번역된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

의거하여 순서대로 동쪽면에는 약사불(藥師佛), 남쪽면에는 보생불(寶生佛)

서쪽면에는 아미타불(阿彌陀佛)북쪽면에는 세간왕불(世間王佛) 등으로 추정되나

사방불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지는 곳이 많아 확실하다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동면의 약사불은 약합이 있어 약사불이 확실하므로 반대쪽 아미타불도 틀림이 없을 것이다.

 

 

 

사방불 북쪽면 세간왕불(世間王佛)과 마애삼존불

 

 

 북면 세간왕불(世間王佛)

 

 

 

마애삼존불(磨崖三尊佛)

 

 

관음보살                      석가여래불                      다라보살

 

 

 

 

  

위 솔뫼님의 인용글에서 확실하지 않다는 설명이 있으나,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불상군이

밀교 경전의 하나인 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에 의거하여

사방불의 존명이 붙혀진 것이라면 통일신라 초기에 

호국불교신앙과 밀교의 발전에 대한 단서를 이 칠불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경석(經石)

칠불암 불상 옆에서 발견된 경석편

 

   이 곳에서는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금강반야바라밀경(金剛般若波羅密經)

석편(石片) 한 점이 일제강점기에 처음 발견된 이후 현재 까지 모두 4점이 발견되었다.

이러한 석경은 서남산(西南山)의 창림사지(昌林寺址)에서 다수 출토된 바 있다.

 

   칠불암은 8세기초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므로 아마도 사원건축에 있어 석경(石經)을 사용한 것은

이곳 봉화골 제1사지(칠불암)가 기원일 것으로 여겨진다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의 경우에도 석경이 사용되었으나,

화엄사는 경덕왕대에 창건되었지만 석경으로 벽체를 장엄하였던

각황전의 전신인 장육전(丈六殿)9세기말경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이 석재들은 크기가 가로 60㎝, 세로 40㎝,높이 27㎝인 방형대석(方形臺石)인데,

 옆면에는 천의(天衣) 자락의 역동적 표현과 함께 두팔을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리며

춤추는 도무상(跳舞像)이 조각되어 있다.

전체적 분위기는 감산사지(甘山寺址) 출토 기단석의 십이지(十二支) 도무상(跳舞像)과 흡사하다.

 

   이 석재들은 얼마전까지도 칠불암 입구 계단을 오르다 경내에서 15m아래 지점의

오른편에는 노출되어 있던 것을 이 곳으로 옮 긴 것이다

 

 ㅡ 다음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님의 글 중에서 발췌......

 

 

불공견삭신변진언경[不空羂索神變眞言經]

 

   8세기 초 인도 출신의 학승 보리유지가 번역하였다.

총 30권 78품으로 구성된 이 경은 불공견삭관음보살의 여러 가지 진언과 이 진언을 외우는 법,

제단을 만드는 법, 섬기는 법 등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이역본으로는 보사유의 불공견삭다라니자재왕주경」(3권)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공견삭신변진언경 [不空羂索神變眞言經]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도서출판 녘)

 

 

 

불공견삭다라니자재왕주경[ ]

 

7세기 말 인도 출신의 학승 보사유가 번역하였다.

총 3권으로 16분으로 구성된 이 경은 불공견삭관음의 진언이 가지는 신비한 힘과

이 진언을 외워 여러 가지 소원을 성취하는 법에 대해 설법하고 있다.

이역본으로는 이무첨의 「불공견삭다라니경」(1권)을 비롯한 여러 종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불공견삭다라니자재왕주경 [不空羂索陀羅尼自在王呪經]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도서출판 들녘)

 

 

 

 


   밀교는 대승불교의 발전사에서 마지막에 나타난 사상체계로서

 이론적으로는 화엄경에서 전개한 장대한 '비로자나불의 장엄한 법계' 구도를 확대 발전시켜 가다가

요가적인 명상체계로 변형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고도로 발전된 상징주의적인 형상성과 신비주의의 극치로 나타나는

밀교는 기존의 대승적 사상을 명상적인 초월의식으로 중층화시킴으로써

강렬한 우주적 입체감과 색채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것은 우리들 내면에 신, 불, 우주라 하는 장엄한 초월적 존재를 직접 파악하여

일체화하는 과정으로 얘기될 수 있는데,

밀교에서는 그 일체화 과정을 성()과 속()의 일치를 위한 비밀스런 의례 행위로 발전시켰다.

만다라나 주문, 인상()과 같이 시각적인 또는 청각적인 의례형식을 고도로 발전시켜

세속의 현실을 철저히 우주적인 전망과 일치시켰던 것이다.



   밀교가 중국에 전래된 것은 「대일경」이나 「금강정경」보다 먼저 성립하여 유행하던

초기 밀교계통 경전이 번역되면서 부터 였다.

320년경 동진 원제 때 최초로 전래된 뒤,

「대공작왕신주경 이나 관정경 등이 차례로 번역되어 유포되었다.

 

 

밀교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대일경」은 천축 구법을 떠났던 무행()이 일찍이 입수했던 것인데,

그가 북인도에서 객사하는 바람에 책만 중국으로 보내져 장안의 화엄사에 보관되어 있다가

당 현종 개원 13년(725) 인도 승려 선무외()가 찾아내어 번역했다.

이어서 「금강정경」이 당나라가 한창 혼란에 빠져 있던

현종 말기인 753년에 불공()에 의해 번역되어 유포됨으로써,

밀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중국에 전래되었다.

 

 밀교가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은 7세기에 들어오면서 부터였다.

신라 구법승 안홍()이 진평왕 27년(605)에 수나라에서 귀국하면서 밀교를 전했다.

그 뒤 명랑()은 선덕여왕대에 중국 유학을 가서 밀교를 배우고 돌아와

 자기 집을 금광사()로 고쳐서 밀교신앙을 펴나갔다.

 

곧이어 혜통()이 당 유학길에 올라 밀교를 체계적으로 배워

문무왕 5년에 귀국, 새로운 밀교신앙운동을 활발히 펼쳤다.



   문무왕 10년(670), 함께 고구려를 무너뜨렸던 중국 당나라가

이번에는 거꾸로 신라를 치려고 뱃길로 군대를 보내어 침공하자,

명랑은 낭산() 남쪽 신유림에 임시로 비단을 둘러 사천왕사를 짓고

풀로 오방신상()을 만들어 밀교 승려 12인과 함께 문두루() 비법을 행하여

군선들을 침몰시킴으로써 나라를 지켰다고 한다.

 

문두루 비법은 「관정경」에서 설해진 것으로 재난이 닥쳤을 때,

오방신상을 만들어 비법을 행하면 신불의 도움으로 재난을 물리칠 수 있다고 한다.

이렇듯 호국적인 관심과 결합하여 밀교운동은 많은 발전을 보여

고려대에 이르면 명랑법사를 개조로 하는 신인종()이 형성되었고,

혜통법사를 개조로 하는 총지종()도 성립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밀교의 세계

(한 권으로 읽는 팔만대장경, 2007.6.10, 도서출판 들녘)에서 발췌 .........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 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 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사상인 순밀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잡밀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밀교 승려들의 활약과 전래교법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밀교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사상 신인비법(神印祕法)·사리탑(舍利塔)·

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소재활동(消災活動:재앙을 없앰)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사방불에 있는 유구(나무를 끼웠던 자리)- 북면과 서면 사이에 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사방불의 윗면

기둥을 세우기 위해 ㄱ자로 파낸 홈이 남동쪽과 북서쪽 두 곳에 있다.

 

이 ㄱ자로 파낸 두개의 홈이 사방불용 닷집이나

목조전각의 지붕 가구구조용 기둥을 세우기 위한

용도 또는 석굴 천장부 판석 거치용으로 쓰였는지에 대하여

앞으로 더욱 자세한 검토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이 홈은 목조건물의 기둥 이음새와 비슷한 형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방불 상부에 조성되었을지도 모르는 불상의 연화대좌 거치이거나 또는

불탑의 옥개석 설치를 위한 결구구조용으로 파내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사유로는 사방불이 위치한 바위의  홈이 파인 상부면이

인공적으로 평평하게 가공되어 있으므로

아래 사진의 용장사지 삼륜대좌석 여래좌상의 예에서 처럼

 상부에 불상 조성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삼륜대좌석 여래좌상(용장사지 석불좌상)

 

 

 

 

 

삼존불이 새겨져 있는 암벽 뒷면에 있는 기둥자리 흔적

 

   사방불의 윗면은 동서 166, 남북 198의 평면인데 동남쪽과 서남쪽

두 모퉁이에 24.2깊이의 자형 홈이 있으며,

또 동남북 3면 꼭대기에는 작은 구멍이 있다.

이 유구들은 이곳에 목재로 된 건물의 지붕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이 곳 불상 옆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불교의 경전을 화강암에다 새긴

석경(石經)의 파편(破片)들이 발견되기 시작하였는데

지리산 화엄사(華嚴寺) 각황전(覺皇殿)의 경우로 미루어 보아

석경은 불전 내부의 벽체를 장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이 사찰의 불전은 각 벽면을 화엄사의 각황전과 같이 석경으로 구축하고

지붕은 반석굴(半石窟) 형식(形式)으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옛 칠불암의 모습

 

 

 신라 신인비법(神印祕法)

 

  신라 신인비법(神印祕法)은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밀교와 오대산 신앙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ㅡ 중략 ㅡ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 현교(顯敎) : 태양신과 불을 경배하는 조로아스터교.

조로아스터교와 불교의 비로자나불 중심사상은 우리 한민족 고유의 기저신앙인

태양숭배사상과 종교적인 친연성(親緣性)을 가지고 있다.

 

:박달은 "밝다"의 이두문식 표현,

 환(桓), 환단(桓檀)은 "환하다"의 이두문식 표현,

비류, 부여, 불함 등은 "불"의 이두문식 표현임.

 

 

밀교와 사리탑신앙(舍利塔信仰)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 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 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을 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 밀교 ㅣ  전법사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한국학중앙연구원

중에서 발췌 ......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에 헌다례를 올리고 나서 느낀 점은

금오산(金鰲山)이라 이름한 이 남산이

우리 민족 기저민속신앙인 산악숭배 사상과 신라 화랑의 수련과 기도를 겸하였던 곳에서

한민족 고유의 칠성신앙과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이며,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오대산신앙에서 비롯된 오방불(五方佛) 배치법을 응용한

사방불(四方佛)과 마애삼존불의 조성으로 더욱 신성한 불국토로 바뀌게 되었다는 점이다.

 

동해 바다에 있는 삼신산(三神山)이 뿌리가 없어서 어디로 흘러갈지 알 수 없자

 천제(天帝)가 거대한 황금 자라 여섯 마리로 하여금

그 산을 머리로 떠받치게 했다는 신화가 《열자(列子)》 〈탕문(湯問)>편에 전해지고 있듯이,

 

최고운(崔孤雲)선생님의  벗인 고운(顧雲)이 살고 있던

당나라에서 신라를 이상향인 삼신산(三神山)으로 여기고 있다는 송별시에서 나타난 

경주의 남산인 금오산(金鰲山)이 이상향을 떠받치고 있는 

여섯마리 황금자라 중의 하나라고 보고 있는 도교적 성격의 찬사까지 되새겨 보며

 

원효대사가 스승이신 대안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셨다는  칠불암에서

이 화려하고 장엄한 화엄세계를 더욱 아름답고 복되게 가꾸어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는 다짐을 다시 해본다.

 

우리 배달민족 고유신앙인 태양숭배사상

화엄경에서 전개한 장대한 '비로자나불의 장엄한 법계'를 구현하려는

신라 밀교 특유의 새로운 만다라 체계가 결합되어 이룩된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신선암 마애반가보살상께 

갑오년 동짓날을 하루 앞두고 고요히 무애차(無碍茶)를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