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 12. 28. 05:15ㆍ들꽃다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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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명집 제10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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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儷語) |
최 학사 고운 비의 서〔崔學士孤雲碑序〕 |
고구려, 백제, 신라의 나라는 비록 한 구역이지만, 봉래(蓬萊), 영주(瀛洲), 방장(方丈)의 산은 바로 삼신산(三神山)이다. 이에 쌓인 기운이 상서로워 기이한 분을 탄생시켰다. 아아, 단목(檀木)의 신인(神人)이 한 번 떠나간 뒤에는 태백산(太白山)이 텅 비었고, 동명왕(東明王)의 인마(麟馬)가 돌아오지 않으니 단지 조천석(朝天石)만 남아 있다.
상고 시대의 현풍(玄風)은 이미 멀어졌으며, 장생(長生)의 비결은 전해지지 않았다. 더구나 나라에서는 문(文)을 숭상하지 않아 사람들이 모두 무(武)를 높이는 데이겠는가. 시(詩)를 논하고 부(賦)를 짓는 선비는 적막하여 들을 수가 없고, 어느 누구나 말을 타고 활을 당기는 무리들이었다. 우리나라가 좌임(左袵)을 하여 해동(海東)에는 경전을 외우는 유자(儒者)가 없었으나, 문(文)이 여기에 있으니 영남(嶺南)에서 호련(瑚璉)의 그릇이 태어났다. 그리하여 학해(學海)에서 칼날을 갈았으며, 사림(詞林)에서 깃발을 세웠다.
공의 성은 최씨(崔氏)이고 이름은 치원(致遠)이며, 자는 고운(孤雲)이다. 어머니의 뱃속에서 70년 동안 있다가 태어났으며, 하늘의 명에 응하여 500년 만에 탄생하였다. 집안에는 상서로움이 돌아서 땅에서 연꽃이 피어났으며, 부여받은 자질이 신령스러워서 태어나자마자 오얏나무를 손으로 가리켰다. 시(詩)를 지음에 있어서는 아송(雅頌)을 추구하여 제량(齊梁)에서 후진(後塵)을 씻었고, 문(文)을 지음에 있어서는 전모(典謨)를 아울러 익혀 진한(秦漢)에서 선구(先驅)를 내달렸다. 광염(光焰)은 만 길이나 치솟아 명월(明月)의 구슬의 반열에 끼일 만하였으며, 율려(律呂)와 서로 조화되어 균천(勻天)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과 같았다. 종이 위에는 교룡(蛟龍)이 꿈틀거렸고, 붓끝에는 풍운(風雲)이 모여들었다. 이에 발해(渤海)의 굽이치는 파도는 굳건한 붓으로 인하여 장엄함을 더하였고, 부상(扶桑)의 해와 달은 높은 이름을 얻어 광채를 더하였다.
궁벽하게 삼한(三韓)에 거처하면서 매번 좁은 산하를 탄식하다가, 우러러 팔극(八極)을 바라보며 드넓은 우주에서 놀고자 하였다. 어찌 누항(陋巷)의 사립문 안에서만 거처하겠는가. 장차 상호(桑弧)와 봉시(蓬矢)의 뜻을 펼치고자 하였다. 동쪽 푸른 바다에 배를 띄워 한(漢)나라 사신이 탄 뗏목을 따라갔으며, 북쪽으로 중화(中華)에서 공부하여 주공(周公)의 도를 배우는 것을 기뻐하였다. 처음으로 기(冀) 땅 들판에 말이 있음을 알렸으니,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하지 못하였다. 노(魯)나라의 궁궐 뜰을 지날 적에는 계찰(季札)이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사모하였으며, 촉(蜀) 땅의 다리를 건널 적에는 상여(相如)처럼 기둥에 글을 썼다.
나이는 비록 감라(甘羅)와 같았으나, 재주는 대륙(大陸)을 울리었다. 임금이 있는 대궐에서 책문(策問)을 시험 보이니 자극궁(紫極宮)의 황제가 이름을 알았으며, 장수가 있는 막부(幕府)에서 글을 날리니 녹림(綠林)에 있는 도적들이 무릎을 꿇었다. 온 천하에 명성이 퍼지니 석우(石友)가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선사하였으며, 구천 하늘 위로 날아오르자 금규(金閨)에서 한림(翰林)의 명부에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었으니, 이에 초집규(楚執珪)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신선 같은 풍골(風骨)이 진세(塵世)를 벗어났으니 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이 하강하였고, 비단옷을 입고 신라로 돌아오니 노담(老聃)의 자기(紫氣)가 동쪽으로 옮겨 왔다. 나라 사람들은 그 기이한 재주에 숨을 죽였고, 여왕은 고귀한 직책을 제수해 주었다.
나라의 사직이 장차 어지러워지려는 때를 만나서 자신의 탄생이 좋은 때를 얻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열수(列宿)와 고봉(高峯)은 은하(銀河)와 무협(巫峽)에서 왕래하였고, 청송(靑松)과 황엽(黃葉)은 곡령(鵠嶺)과 계림(鷄林)에서 탄식하였다. 모이고 흩어지는 뜬구름을 보고서 공연스레 가생(賈生)의 눈물을 흘렸거니, 풍진 이는 세상에서 누가 백아(伯牙)의 거문고 소리를 알겠는가. 등불 앞의 만리의 마음이었고, 사물 밖의 푸른 산의 꿈이었다.
황진(黃塵)이 눈을 가리자 의관(衣冠)을 걸어 두고서 훌쩍 돌아가서는, 자지(紫芝)를 뜯어 배고픔을 면하면서 임천(林泉) 속에서 높이 누워서 지냈다. 한 시내의 솔과 대는 월영당(月影堂)을 반쯤 가렸고, 만 골짝의 안개와 노을은 청학동(靑鶴洞)으로 멀리 이어졌다. 높은 언덕에 올라가서 맑은 휘파람을 불었고, 푸른 시내를 굽어보면서 길게 노래를 불렀다.
그는 어떤 사람이었던가? 방외(方外)에서 노니는 사람이었다. 마음은 현빈(玄牝)에 통하여 중묘(衆妙)의 문을 스스로 얻었고, 약(藥)은 금단(金丹)을 단련하여 참동(參同)의 계(契)를 다시금 이었다. 물외(物外)에서 형신(形身)을 길러 곰처럼 매달리고 새처럼 폈으며, 인간 세상의 구각(軀殼)을 벗어 매미처럼 허물 벗고 용처럼 변하였다. 오곡(五穀)을 먹지 않으면서 바람과 이슬을 들이켜고 경화(瓊華)를 씹었으며, 팔구(八區)를 떨쳐 버리고서 구름과 기운을 타고 일월(日月)을 잡아탔다. 후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成子)를 방문하였다.
지극한 사람이라 이름 붙일 수가 없어서 만상(萬象)에 뒤섞여 같은 몸이 되었으며, 신령한 기운이라 변하지 않아 천년이 지나서도 오히려 존재하였다. 출입하는 데에 그 단서를 알 수가 없었으며, 변화하는 데에 처음과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운산(雲山)의 옛 자취는 글을 올리던 집이 사라지지 않았으며, 악부(樂府)에 남은 음은 아직도 가야(伽倻)의 곡(曲)을 전한다.
아아, 저 혁서(赫胥)의 성읍을 바라다보니, 실로 선생께서 살던 옛 마을이다. 예전에 있었던 사람들은 현명한 자나 어리석은 자나 모두 함께 먼지로 돌아갔으며, 비록 썩지 않은 것이 있더라도 모두가 다 선생의 발 아래였다. 박제상(朴堤上)의 충성은 단지 열사(烈士)일 뿐이었고, 김유신(金庾信)의 영걸함은 문장(文章)이 빠져 있다. 오직 선생만이 꽉 막힌 사원(詞源)을 통하게 했고, 황폐한 학로(學路)를 열었다.
궁전에서 진경(秦鏡)을 거니 오장(五臟)이 모두 놀랐고, 산천에서 우부(禹斧)를 휘두르니 구주(九州)가 비로소 정해졌다. 동방의 기습(氣習)이 일변하여 문명(文明)의 나라가 되었고, 북극의 성신(星辰)이 높이 떠 있어서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보았다. 이 때문에 공을 성인(聖人)의 묘정(廟庭)에 배향하였고, 공의 시호를 문창(文昌)으로 정하였다. 천만여 년 동안 조두(俎豆)를 바치니, 70명의 고제(高弟)와 어깨를 나란히 하였다.
선현의 성대한 덕을 추모하여 지금까지 제사 지내거니,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글을 알게 한 것이 그 누구의 공이었던가. 나는 호량(濠梁)과 광야(曠野)에서 장수(莊叟)가 노닌 것을 생각하였고, 영수(潁水)와 기산(箕山)에서 허유(許由)의 좋은 손님을 꿈꾸었다. 그리고 유향(劉向)이 지은 《열선전(列仙傳)》을 읽고, 굴원(屈原)이 지은 〈원유(遠遊)〉를 읊조렸다. 석문(石門)이 아득히 높으니 고금(古今)을 어루만지면서 길게 탄식하였고, 쌍계(雙溪)가 맑으니 은일(隱逸)의 남은 자취를 찾아보았다. 만물을 무하(無何)에 부치니 바로 한 마리의 말이고, 진인(眞人)의 헤아릴 수 없음을 생각하니 바로 용과 같은 분이다.
[주D-001]봉래(蓬萊) …… 삼신산(三神山)이다 : 발해(渤海) 바다 가운데 세 산이 있는데, 하나는 방호(方壺)로 곧 방장(方丈)이고, 하나는 봉호(蓬壺)로 곧 봉래(蓬萊)이며, 하나는 영호(瀛壺)로 곧 영주(瀛洲)인데, 이들을 삼신산이라고 한다. 이 산들은 모양이 마치 병처럼 생겼으며, 그 속에는 신선들이 살고 불사약(不死藥)이 있으며, 새와 짐승이 모두 희고 궁궐이 황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拾遺記 卷1》
[주D-002]단목(檀木)의 …… 비었고 : 단목은 박달나무를 말하고 신인(神人)은 단군(檀君)을 가리킨다. 전설에 의하면, 당요(唐堯) 무진년에 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 내려왔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세워 임금으로 삼고는 평양에 도읍하고 단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지금 평양에 단군사(檀君祠)가 있다. 태백산에 대해서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평안도 묘향산(妙香山), 백두산(白頭山) 등의 설이 있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
[주D-003]동명왕(東明王)의 …… 있다 : 조천석(朝天石)은 평양의 부벽루(浮碧樓) 아래 기린굴(麒麟窟) 곁에 있는 바위인데, 전설에 의하면 고구려의 동명왕이 이곳에서 말을 타고 하늘에 조회하였다고 한다.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 제51권 평양부》
[주D-004]현풍(玄風) : 노자(老子)나 장자(莊子)의 사상을 말한다.
[주D-005]좌임(左衽) :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는 것으로, 오랑캐의 풍속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이르기를 “관중(管仲)이 아니었으면 나는 머리를 풀어 헤치고 옷깃을 왼쪽으로 여미게 되었을 것이다.” 하였다.
[주D-006]문(文)이 …… 태어났다 : 영남 지역에서 도(道)를 담당할 인재가 태어났다는 뜻으로, 최치원(崔致遠)이 영남 지역에서 태어난 것을 말한다. 최치원은 신라의 6두품(六頭品) 출신으로, 경주 사량부(沙梁部) 사람이다. 문(文)이 여기에 있다는 것은 도가 최치원에게 있었다는 뜻으로, 공자가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이미 별세하셨으니, 문이 이 몸에 있지 않겠는가?” 하였다. 호련(瑚璉)은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적에 쓰는 예기(禮器)로, 흔히 나라를 다스릴 만한 훌륭한 인재를 뜻한다.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자신은 어떤 그릇이냐고 묻자, 공자가 “너는 호련이다.”라고 하였다. 《論語 子罕, 公冶長》
[주D-007]학해(學海) : 학문(學問)의 세계를 이른다. 학문의 범위가 넓은 것을 바다에 비유하여 한 말이다.
[주D-008]사림(詞林) : 사단(詞壇)과 같은 말로, 학자나 문인들의 세계를 말한다.
[주D-009]어머니의 …… 태어났으며 : 어머니의 뱃속에 70년 동안 있다가 태어난 고사는 누구의 고사인지 분명치 않으며, 최치원의 설화에서는 이런 설화를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노자(老子)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81년이나 있다가 태어난 후 바로 말을 하였으며, 태어났을 때 머리가 이미 하얗게 세었다고 한다. 《列仙傳》
[주D-010]하늘의 …… 탄생하였다 : 최치원이 성인의 자질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뜻이다. 예전에 중국에서는 천지의 정기(精氣)가 모여서 500년마다 한 사람씩 큰 성인(聖人)이 태어난다고 여겼다.
[주D-011]땅에서 …… 피어났으며 : 육지에서 연꽃이 피어난 것은 누구의 고사인지 분명치 않다. 다만 최치원의 설화에 “최치원의 어머니가 금돼지에게 잡혀 갔다가 최치원의 아버지인 최충의 계략에 의하여 구출된 뒤 여섯 달 만에 최치원을 낳았는데, 최충이 금돼지의 아들인가 의심하여 아이를 내다 버리라고 하였다. 이에 종이 최치원을 내다 버렸으나 소나 말이 피해 가고 밤이면 선녀가 내려와 보살펴 주었으므로 다시 연못에 버렸는데, 갑자기 연꽃 한 송이가 피어올라 최치원을 받들었고 백학 한 쌍이 날아와서 날개로 덮어주었다.”라고 하였다. 최치원에 관한 설화는 아주 많은데, 성임(成任)의 《태평통재(太平通載)》 권68에 〈최치원전(崔致遠傳)〉이 들어 있으며, 권문해(權文海)의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권15에 〈선녀홍대(仙女紅袋)〉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주D-012]태어나자마자 …… 가리켰다 : 태어나면서부터 아주 뛰어났다는 뜻이다. 노자(老子)의 어머니가 노자를 낳을 적에 오얏나무 아래에서 낳았는데, 노자는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하여 오얏나무를 가리키면서 “이것으로 나의 성을 삼을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이씨(李氏)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 《神仙傳 卷1 老子》
[주D-013]시(詩)를 …… 씻었고 : 시를 지으면서는 남북조 시대의 부화한 시풍을 씻어 냈다는 뜻이다. 아송(雅頌)에서의 아(雅)는 조정의 악곡(樂曲)이고 송(頌)은 종묘의 악곡인데, 《시경》에 이들 노래가 실려 있으므로, 전하여 《시경》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제량(齊梁)은 남북조 시대의 제(齊)와 양(梁) 두 나라에서 유행했던 시체(詩體)인 제량체(齊梁體)를 말하는데, 이 시기의 시풍은 성정(性情)의 표현보다는 성조(聲調)와 수사학(修辭學)적인 기교를 더욱 강조하였다. 후진(後塵)은 흔히 후배(後輩)를 뜻하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뒷날에 일으킨 먼지를 뜻하는 말로 쓰였다.
[주D-014]문(文)을 …… 내달렸다 : 문을 지으면서는 선진고문(先秦古文)을 추구하였다는 뜻이다. 전모(典謨)에서의 전(典)은 《서경》 가운데 〈요전(堯典)〉과 〈순전(舜典)〉을 가리키고, 모(謨)는 〈대우모(大禹謨)〉와 〈고요모(皐陶謨)〉를 가리키는데, 전하여 《서경》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진한(秦漢)은 진나라와 한나라 때의 문으로, 일반적으로 고문(古文)을 가리킨다.
[주D-015]명월(明月)의 구슬 : 명월주(明月珠)로, 대합에서 나오는 진주 비슷한 구슬인데, 밤에도 환히 비춘다고 한다.
[주D-016]율려(律呂) : 옛날에 악률(樂律)을 정하는 기구이다. 중국 황제(黃帝) 시대 영륜(伶倫)이 대나무를 잘라 통을 만들어서 통의 길이를 가지고 성음(聲音)의 청탁(淸濁)과 고하(高下)를 구분하였는데, 악기의 음은 이것으로 기준을 삼는다. 음양(陰陽)을 각각 여섯으로 나누어 양(陽)이 율(律)이 되고 음(陰)이 여(呂)가 되며, 이를 합해 12음이 된다.
[주D-017]균천(勻天)의 음악 : 균천은 하늘의 한복판으로, 천제(天帝)가 사는 곳이다. 균천의 음악은 하늘나라의 음악으로, 여기서는 대궐의 음악을 뜻하는 말로 쓰였다. 옛날에 진 목공(秦穆公)과 조 간자(趙簡子)가 비몽사몽 간에 천제(天帝)의 처소에 올라가 그 음악을 들었다고 한다. 《列子 周穆王》
[주D-018]발해(渤海) : 중국과 우리나라 사이에 있는 바다로, 중국에서는 동해로 칭하기도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서해라고 칭한다.
[주D-019]부상(扶桑) :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의 이름으로, 흔히 해가 뜨는 곳에 있는 나라인 우리나라나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데, 여기서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주D-020]팔극(八極) : 팔방(八方)의 아주 먼 곳으로 천하의 끝을 가리킨다.
[주D-021]상호(桑弧)와 봉시(蓬矢)의 뜻 : 천하를 유람하고자 하는 큰 뜻을 말한다. 상호는 뽕나무로 만든 활을 말하고, 봉시는 쑥대로 만든 화살을 말한다. 옛날에 아들이 태어나면 뽕나무로 활을 만들고 쑥대로 화살을 만들어서 천지 사방에 활을 쏘아, 남아로 태어났으면 응당 사방을 돌아다닐 뜻을 품어야 함을 표상하였다. 《禮記 內則》
[주D-022]동쪽 …… 따라갔으며 : 최치원이 중국 사신을 따라 중국으로 들어간 것을 말한다. 한나라의 사신이 탄 뗏목은, 본디 한나라의 장건(張騫)이 무제(武帝)의 명에 의하여 대하(大夏)에 사신으로 가 황하의 근원을 찾게 하였을 때 타고 간 뗏목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당나라 사신이 타고 온 배를 말한다.
[주D-023]북쪽으로 …… 기뻐하였다 : 최치원이 중국에 유학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는 뜻이다. 주공(周公)의 도는 유학(儒學)을 말한다. 최치원은 소년 시절부터 성격이 세밀하고 민첩하였으며 학문을 좋아하였다. 12세 때 배를 타고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였는데, 떠날 적에 그의 아버지가 “10년이 되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 가서 힘써 노력하라.”라고 하였다고 한다.
[주D-024]처음으로 …… 알렸으니 : 우리나라에도 인재가 있었다는 뜻이다. 기(冀) 지역은 예로부터 명마(名馬)가 많이 나는 지방인데, 흔히 인재가 나는 지방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당나라 한유(韓愈)의 〈송온처사부하양군서(送溫處士赴河陽軍序)〉에 이르기를 “백락(伯樂)이 한 차례 기북(冀北)의 들판을 지나가자 준마가 드디어 한 마리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하였다.
[주D-025]진(秦)나라에 …… 못하였다 : 중국에서 최치원을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다는 뜻이다.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사회(士會)가 진(秦)나라로 망명 가 있었는데, 진(晉)나라에서는 진(秦)나라가 사회의 계책을 쓸까 두려워하였다. 이에 계책을 써서 사회를 진(晉)나라로 돌아오게 하였는데, 사회가 돌아올 때 진(秦)나라의 대부(大夫)인 요조(繞朝)가 사회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우리 진(秦)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여기지 말라. 나의 계책이 지금 쓰이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하였다. 《春秋左氏傳 文公13年》
[주D-026]노(魯)나라의 …… 사모하였으며 : 춘추 시대 오(吳)나라의 계찰(季札)이 노나라에 갔을 때 주(周)나라의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려 달라고 청하자, 노나라 임금이 악공을 시켜 주남(周南)과 소남(召南)을 연주하게 하니, 계찰이 아름답다고 하였으며, 이 이후에 회(鄶)의 음악을 연주하자 “회 이하는 평론하고 말고 할 것도 없다.”라고 하였다. 《春秋左氏傳 襄公29年》
[주D-027]촉(蜀) …… 썼다 : 과거에 급제하여 공명과 현달을 구하기로 맹세하였다는 뜻이다. 한(漢)나라 때 성도(成都)의 북쪽에 승선교(升仙橋)란 다리가 있었는데, 사마상여(司馬相如)가 자신의 고향인 촉에서 장안(長安)으로 갈 적에 이 다리를 지나면서 다리 기둥에 글을 쓰기를 “말 네 마리가 끄는 높은 수레를 타지 않고서는 이 다리를 다시 건너오지 않겠다.” 하였는데, 뒤에 과연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太平御覽 卷73》
[주D-028]나이는 …… 울리었다 : 최치원이 12세 때 중국에 들어가 온 천하에 이름을 알렸다는 뜻이다. 감라(甘羅)는 전국 시대 진(秦)나라 사람인 감무(甘茂)의 손자로, 여불위(呂不韋)의 가신(家臣)이었다. 일찍이 여불위에게 등용되어 12세 때 조(趙)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조나라를 설득하여 다섯 개의 성을 할양받고 연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영토를 획득하였다. 《史記 卷71 甘茂列傳》
[주D-029]임금이 …… 알았으며 :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한 지 7년 만인 18세에 예부 시랑(禮部侍郞) 배찬(裴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입격하여 황제에게 이름이 알려진 것을 말한다. 자극궁(紫極宮)은 옥황상제가 산다고 하는 하늘 위에 있는 궁전인데, 전하여 황제가 있는 궁궐을 뜻하는 말로 쓰인다.
[주D-030]장수가 …… 꿇었다 : 최치원이 〈토황소격(討黃巢檄)〉을 지어 황소(黃巢)의 무리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을 말한다. 장수는 고변(高騈)을 가리키고, 녹림(綠林)에 있는 도적들은 황소의 무리를 가리킨다. 879년(헌강왕5)에 황소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이들을 쳤는데, 이때 최치원은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 동안 군막에서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 등을 짓는 일을 맡았다. 귀국한 뒤에 이때 지은 글을 정선하여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20권을 완성하였는데, 그 가운데 특히 〈토황소격〉은 명문으로, 황소가 이 격문을 보다가 “천하 사람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아마 땅 속의 귀신까지도 몰래 베어 죽이려고 의논하리라.〔不惟天下之人皆思顯戮 抑亦地中之鬼已議陰誅〕”라는 구절에 이르러 놀라 앉았던 걸상에서 떨어졌다 한다. 《三國史記 卷46 列傳6 崔致遠》
[주D-031]석우(石友)가 …… 선사하였으며 : 최치원이 신라로 돌아오려 할 때 중국 사람으로서 최치원과 동년(同年)인 고운(顧雲)이 〈유선가(儒仙歌)〉를 지어 송별한 것을 말한다. 석우는 정의(情誼)가 금석(金石)과 같이 단단한 벗으로, 여기서는 고운을 가리킨다. 〈유선가〉는 《삼국사기》 〈최치원열전〉에 실려 있는데, 그 한 구절에 이르기를 “열두 살에 배 타고 바다 건너 와, 문장이 중화를 뒤흔들었네. 열여덟 살에 사원을 두루 누비며, 한 화살로 금문책을 깨뜨리었네.〔十二乘船渡海來 文章感動中華國 十八橫行戰詞苑 一箭射破金門策〕” 하였다.
[주D-032]금규(金閨)에서 …… 올렸다 : 최치원이 황소의 난 때 세운 공으로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承務郞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승차되고, 겸하여 비은어대(緋銀魚袋)와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것을 말한다. 최치원이 한림학사에 제수된 것은 신라로 귀국한 뒤로, 귀국한 뒤에 시독 겸 한림학사 수 병부시랑 지서서감사(侍讀兼翰林學士守兵部侍郞知瑞書監事)에 임명되었다. 금규(金閨)는 한(漢)나라 때의 궁궐 문인 금마문(金馬門)으로, 본디 학사(學士)들이 대조(待詔)하던 곳이었는데, 전하여 조정(朝廷)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주D-033]왕중선(王仲宣)의 땅이 아니었으니 : 중국 땅이 최치원의 고국은 아니었다는 뜻이다. 중선(仲宣)은 한나라 말기의 시인 왕찬(王粲)의 자(字)이다. 왕찬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산양(山陽) 사람인데, 박식하고 문장이 뛰어나 건안 칠자(建安七子)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일찍이 한 헌제(漢獻帝) 때 난리를 피해 형주(荊州)의 유표(劉表)에게 15년 동안 의탁해 있었는데, 이때 시사(時事)를 한탄하고 고향을 그리면서 중선루(仲宣樓)라는 누각에 올라가 〈등루부(登樓賦)〉를 읊어 시름을 달래었다. 《三國志 卷21 魏書 王粲傳》
[주D-034]초집규(楚執珪)의 노래를 연주하였다 : 최치원이 고국을 그리워하면서 슬픈 노래를 불렀다는 뜻이다. 초집규는 전국 시대 월(越)나라 사람으로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규(珪)를 잡을 만큼의 고관 자리에 올랐던 장석(莊舃)을 가리킨다. 장석이 초나라에서 벼슬하여 높은 관직에 올라 부귀를 누리게 되었으나 고국을 잊지 못하여 병중에도 월나라의 노래를 불러서 고향을 그리는 정을 부쳤다. 《史記 卷70 張儀列傳》
[주D-035]동방삭(東方朔)의 성정(星精) : 동방삭은 전한 무제(前漢武帝) 때 사람으로, 자는 만청(曼淸)이다. 해학과 직언을 잘하였고 선술(仙術)을 좋아하였는데, 하늘나라의 반도(蟠桃) 3개를 훔쳐 먹어 3천 년을 살았다고 한다. 성정은 별의 영기(靈氣)를 말한다.
[주D-036]노담(老聃)의 …… 왔다 : 노담은 노자(老子)를 가리킨다. 노자가 일찍이 주(周)나라에서 사관(史官)으로 있다가 주나라가 쇠약해진 것을 보고는 주나라를 떠났는데, 노자가 서쪽으로 가 함곡관(函谷關)에 이르렀을 때 관령(關令)으로 있던 윤희(尹喜)가 이에 앞서 함곡관 위에 자색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로부터 얼마 뒤에 노자가 동쪽에서 푸른 소를 타고 왔다고 한다. 《列仙傳》
[주D-037]여왕은 …… 주었다 : 여왕은 진성여왕(眞聖女王)을 가리킨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하였는데, 이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다.
[주D-038]열수(列宿)와 …… 왕래하였고 : 최치원의 연장(年狀)에 이르기를 “무협 중봉의 해에 무명옷 입고 중화에 들어갔다가, 은하 열수의 해에 비단옷 입고 우리나라에 돌아왔다.〔巫峽重峯之歲 絲入中原 銀河列宿之年 錦還東土〕” 하였는데, 무협 중봉의 해는 무협이 12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12세를 뜻하고, 은하 열수의 해는 열수가 28수(宿)로 이루어져 있으므로 28세를 뜻한다.
[주D-039]청송(靑松)과 …… 탄식하였다 : 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흥할 것을 알고는, 고려 태조에게 “곡령에 솔이 푸르고 계림엔 잎이 누르다.〔鵠嶺靑松 鷄林黃葉〕”라는 글을 올렸다.
[주D-040]모이고 …… 흘렸거니 : 최치원이 시무책을 올려 신라 사회를 개혁하려 하였으나,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에 의해 개혁안이 거부되자,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40여 세 장년의 나이로 관직을 버리고 떠나가면서 슬퍼한 것을 가리킨다. 가생(賈生)은 한(漢)나라 때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를 지낸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가의는 글을 잘 지었는데, 문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되어 정삭(正朔)을 고치고, 복색(服色)을 바꾸며, 법도(法度)를 제정하고, 예악(禮樂)을 일으켰다. 그 뒤에 장사왕의 태부가 되어 나가면서 상수(湘水)를 건너다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대개 자신의 처지를 비유한 것이다. 다시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로 옮겼는데, 양 회왕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가의 역시 상심하여 죽으니, 그때 나이가 겨우 33세였다. 《史記 卷84 屈原賈生列傳》
[주D-041]풍진 …… 알겠는가 : 최치원을 알아주는 친구가 없었다는 뜻이다. 옛날에 백아(伯牙)는 금(琴)을 잘 탔고, 종자기(鍾子期)는 소리를 잘 들었는데, 백아가 금을 타면서 뜻이 높은 산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아아(峨峨)하기가 태산(泰山)과 같구나.” 하였고, 뜻이 흐르는 물에 있으면 종자기가 말하기를 “좋구나 양양(洋洋)하기가 강하(江河)와 같구나.” 하였다. 그 뒤에 종자기가 죽자 백아가 다시는 금을 타지 않았다. 《列子 湯問》
[주D-042]등불 …… 마음 : 최치원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에 이르기를 “가을바람에 처량하게 읊조리나니, 온 세상에 나의 음을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에는 삼경의 비가 오는데, 등불 앞에 아물아물 만리의 마음이여.〔秋風唯苦吟 擧世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하였다.
[주D-043]사물 …… 꿈 : 최치원의 《계원필경집》 권17 〈재헌계(再獻啓)〉에 이르기를 “인간 세상의 요로와 통진은 눈 앞에 열리는 곳이 없고, 사물 밖의 청산과 녹수는 꿈속에서 돌아갈 때가 있네.〔人間之要路通津 眼無開處 物外之靑山綠水 夢有歸時〕” 하였다.
[주D-044]황진(黃塵)이 …… 돌아가서는 : 속세의 벼슬을 버리고 은거하였다는 뜻이다. 황진은 누런 먼지로 속세를 가리킨다. 한(漢)나라 때 사람인 공사(龔舍)가 일찍이 미앙궁(未央宮)에서 숙직하다가 거미줄에 날벌레가 걸려서 날아가지 못하는 것을 보고는 탄식하기를 “나의 삶도 저와 마찬가지다. 벼슬이란 것은 사람에게 거미줄과 같은 것이다. 어찌 머물러 있을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는 즉시 관(冠)을 나무에 걸어 둔 다음 떠나갔다. 《漢書 卷72 龔勝龔舍傳》 《太平御覽 卷948》
[주D-045]자지(紫芝)를 …… 지냈다 : 산속에서 은거하며 지냈다는 뜻이다. 자지는 자색이 도는 고사리로, 진(秦)나라 말기에 동원공(東園公), 녹리선생(甪里先生), 기리계(綺里季), 하황공(夏黃公)이 진나라의 학정을 피하여 상산(商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그들이 부른 노래에 이르기를 “아득하고 아득히 먼 상락 지역에 이르니, 깊고 깊은 산골짜기 길게 뻗었네. 반짝이며 빛을 내는 고사리 잎새, 굶주린 배 채우기에 충분하다네.〔漠漠商洛 深谷威夷 曄曄紫芝 可以療飢〕” 하였다.
[주D-046]월영당(月影堂) : 창원(昌原)의 남쪽 바닷가에 있는 월영대(月影臺)를 말한다. 최치원이 일찍이 이곳에서 노닐었다고 하는데, 서거정(徐居正)의 시 〈월영대〉에 이르기를 “월영대 앞에 달은 길게 있건만, 월영대 위에 사람은 이미 갔네. 최고운이 고래를 타고 하늘로 올라간 뒤, 흰 구름만 아득하여 찾을 곳이 없구나.〔月影臺前月長在 月影臺上人已去 孤雲騎鯨飛上天 白雲渺渺尋無處〕” 하였다.
[주D-047]청학동(靑鶴洞) : 지리산에 있는 골짜기 이름으로, 최치원이 노닐었던 곳이다. 최치원은 관직에서 떠난 뒤에 경주(慶州)의 남산(南山), 의성(義城)의 빙산(氷山), 합천(陜川)의 청량사(淸凉寺), 지리산의 쌍계사(雙磎寺), 창원의 월영대, 동래(東萊)의 해운대(海雲臺) 등지에서 노닐었다고 한다.
[주D-048]방외(方外) : 방내(方內)와 방외란 말이 《장자(莊子)》에 나오는데, 방내는 세속의 법도 안에 사는 것을 말하고, 방외는 세속의 법도를 초월한 것을 말한다.
[주D-049]현빈(玄牝) : 만물을 생성하고 기르는 본원(本源)을 뜻하는 말로, 《노자(老子)》에 이르기를 “곡신은 죽지 않는데, 이것을 일러 현빈이라고 한다.〔谷神不死 是謂玄牝〕” 하였다.
[주D-050]참동(參同)의 계(契) : 한나라 때 위백양(魏伯陽)이 지은 책인 《참동계(參同契)》로, 《주역》의 효상(爻象)을 빌려 금단(金丹)을 단련하는 법을 논하였다.
[주D-051]곰처럼 …… 폈으며 : 옛날에 행하던 일종의 양생법(養生法)으로, 곰과 같이 나뭇가지에 기어오르고 새처럼 다리를 쭉 뻗는 것을 말한다. 《장자》 〈각의(刻意)〉에 이르기를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하여 심호흡을 하며, 곰이 나뭇가지에 매달리듯 새가 다리를 쭉 뻗듯 체조를 하는 것은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주D-052]경화(瓊華) : 전설 속에 나오는 경수(瓊樹)의 꽃으로, 옥가루와 비슷하다고 한다.
[주D-053]팔구(八區) : 팔방(八方)과 같은 말로, 천하를 가리킨다.
[주D-054]후령(緱嶺)에서 자진(子晉)에게 읍하였으며 : 신선이 되어 떠나갔다는 뜻이다. 자진은 주(周)나라 영왕(靈王)의 태자 진(晉)이다. 도가(道家)의 고사에 “주나라 영왕의 태자 진이 칠월 칠석에 흰 학을 타고 피리를 불며 후산(緱山)의 마루에 머물러 있다가 손을 들어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했다. 《後漢書 卷82 王喬列傳》
[주D-055]공동(崆峒)에서 광성자(廣城子)를 방문하였다 : 공동산(崆峒山)은 계주(薊州)에 있는 산이고, 광성자는 중국 상고 시대의 선인(仙人)이다. 광성자가 공동산의 석실(石室)에 은거하고 있었는데, 황제 헌원씨(軒轅氏)가 그를 찾아가 함께 노닐면서 수신법(修身法)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주D-056]운산(雲山)의 …… 않았으며 : 경주 금오산(金鼇山)의 북쪽 문천(蚊川) 가에 상서장(上書莊)이 있는데, 진성여왕 8년에 최치원이 이곳에서 시무책(時務策) 10여 조(條)를 지어서 올렸다고 한다.
[주D-057]혁서(赫胥)의 성읍 : 박혁거세(朴赫居世)가 있었던 경주를 가리키는 듯하다. 혁서는 본디 혁서씨(赫胥氏)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혁거세의 음과 비슷하므로 따다가 쓴 것인 듯하다. 혁서씨는 아득한 옛날에 태평 시대의 제왕으로, 혁연(赫然)한 덕이 있어 백성으로 하여금 서로 따르게 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혁서씨의 시대에는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서 즐거워하고 배를 두드리며 놀았다고 하며, 돌로 병기(兵器)를 만들고 나무를 잘라 궁실(宮室)을 만들었다고 한다. 《莊子 馬蹄》
[주D-058]박제상(朴堤上)의 충성 : 《삼국사기》에서는 박제상이라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김제상(金堤上)이라 하였는데, 박씨나 김씨의 성을 붙인 것은 후대의 일이고, 본래는 제상(堤上)이다. 신라가 402년(실성왕1)에 왜(倭)와 강화하기 위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인질로 보냈는데, 박제상이 미사흔을 구하기 위하여 일본으로 가 신라에서 도망쳐 온 사람인 듯 행세하였다. 그때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하여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참언하므로, 왜왕이 군사를 파견하여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오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하여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왕의 앞에 끌려갔다. 왜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하여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하려 하였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하며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에 처해져 불에 타 죽었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편, 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1990》
[주D-059]궁전에서 …… 놀랐고 : 최치원이 조정에 벼슬하여 당시 관료들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였다는 뜻이다. 진경(秦鏡)은 진 시황(秦始皇)이 가지고 있던 거울이다. 이 거울은 물건의 본질을 잘 밝혀 주므로 아무리 변형하여도 본질 그대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오장(五臟)을 비춰 보면 그 사람의 질병은 물론 그 사람의 선악과 속셈까지도 다 드러나 보인다고 한다. 《西京雜記 卷3》
[주D-060]산천에서 …… 정해졌다 : 우부(禹斧)는 우 임금이 가지고 있던 도끼를 말한다. 우 임금이 천하 하천(河川)의 물길을 다스릴 적에 이 도끼로 용문산(龍門山)을 끊어 물길이 통하게 하였다고 하며, 중국 전체를 구주(九州)로 나누어 다스렸다고 한다. 《淮南子》
[주D-061]공의 …… 정하였다 : 고려 태조(太祖)를 도운 공이 있다고 하여 최치원은 1020년(현종11)에 내사령(內史令)에 추증되었으며, 1023년에 문창후(文昌侯)에 추시(追諡)되어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인(泰仁)의 무성서원(武成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함양의 백연서원(柏淵書院), 영평(永平)의 고운영당(孤雲影堂), 대구 해안현(解顔縣)의 계림사(桂林祠) 등에 제향되었다.
[주D-062]천만여 …… 하였다 : 최치원이 문묘에 배향되어 공자의 제자들과 나란히 제사를 받고 있다는 뜻이다. 70명의 고제(高弟)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재주가 뛰어난 72명의 제자를 말하는데, 대략의 수를 거론하여 칠십자(七十子)라고 칭한다.
[주D-063]호량(濠梁)과 …… 생각하였고 : 호량은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호수(濠水)에 있는 다리이고, 광야 역시 장자의 우화에 나오는 넓은 들판이다. 장수(莊叟)는 장자를 가리킨다. 장자가 혜자(惠子)와 더불어서 호수 가의 다리 위를 걷다가 “피라미가 나와서 유유히 헤엄치고 있군. 피라미는 참 즐거울 거야.” 하니, 혜자가 “자네가 피라미가 아닌데 어떻게 피라미가 즐거우리라는 것을 아는가?” 하자, 장자가 “자네는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가?” 하니, 혜자가 “나는 자네가 아니라서 본시 자네를 알지 못하네. 자네도 본시 피라미가 아니니 자네가 피라미의 즐거움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하네.” 하였다. 또 천근(天根)이란 사람이 무명인(無名人)이란 사람을 만나 천하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서 묻자, 무명인이 말하기를 “그대는 물러가라. 난 지금 조물자와 벗하려 하고 있다. 싫증이 나면 다시 저 아득히 높이 나는 새를 타고 이 세계 밖으로 나가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노닐며, 끝없이 넓은 들판〔壙埌之野〕에서 살려고 한다.” 하였다. 《莊子 秋水, 應帝王》
[주D-064]영수(潁水)와 …… 꿈꾸었다 : 허유(許由)는 요 임금 때의 고사(高士)이고, 허유의 좋은 손님은 소부(巢父)를 가리킨다. 요 임금 때의 고사인 소부와 허유가 기산(箕山)에 들어가 숨어 살았는데, 요 임금이 허유를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허유가 그 소리를 듣고는 더러운 말을 들었다고 하면서 영수의 물에 귀를 씻었다. 소부가 영수 가로 소를 끌고 와서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그 까닭을 물으니, 허유가 “요 임금이 나를 불러 구주의 장을 삼으려고 하므로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씻는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소부가 그 귀를 씻은 물을 먹이면 소의 입을 더럽히겠다고 하면서,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 《高士傳 許由》
[주D-065]석문(石門)이 …… 찾아보았다 : 지리산(智異山)에 쌍계사(雙溪寺)가 있는데, 최치원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고 한다. 골짜기의 입구에는 두 바위가 서로 마주 서 있어 대문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는데, 최치원이 동쪽의 바위에는 ‘쌍계’, 서쪽의 바위에는 ‘석문’이라고 새겼다고 한다.
[주D-066]만물을 …… 말이고 : 무하(無何)는 《장자》에 나오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으로, 아무것도 없이 끝없이 펼쳐진 적막한 세계를 말하는데, 이는 장자가 설파한 이상향(理想鄕)이다. 혜자(惠子)가 장자에게 “위왕(魏王)이 나에게 박씨를 주어 그것을 심었더니 박이 열리기는 하였으나 너무 커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고, 또 큰 나무가 있는데 너무 못생겨서 쓸모가 없다.”라고 하자, 장자가, “그 큰 박은 그대로 강호(江湖)에 띄우면 될 것이고, 그 나무는 무하유(無何有)의 고장, 광막(廣莫)한 들판에 심으면 될 게 아니냐.”라고 하였다. 또 ‘만물이 한 마리의 말’이란 말도 역시 《장자》에 나오는 것으로, 장자가 말하기를 “손가락으로써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손가락 아닌 것으로써 손가락이 손가락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고, 말로써 말이 말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이, 말 아닌 것으로써 말이 말이 아님을 깨우치는 것만 못하다.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요,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以指喩指之非指 不若以非指喩指之非指也 以馬喩馬之非馬 不若以非馬喩馬之非馬也 天地一指也 萬物一馬也〕” 하였는데, 이는 천지 만물의 사이에 시비 진위(是非眞僞)의 차별을 두지 말고 모두 상대적으로 보아서 하나로 귀착시켜야 한다는 뜻이다. 《莊子 逍遙遊, 齊物論》
[주D-067]진인(眞人)의 …… 분이다 : 변화를 예측할 수 없는 용과 같이 도(道)의 경지가 심오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진인은 신선(神仙)을 뜻한다. 공자가 노자를 만나 보고 나서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나는 용에 대해서는 그것이 어떻게 바람과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오늘 노자를 만나 보았는데, 그는 용과 같은 존재였다.” 하면서 감탄하였다. 《史記 卷63 老子列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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