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外

2015. 1. 28. 16:33들꽃다회

 

 

문화유적 답사~ (29)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셀라 2014.10.25 16:13

 

      

해피해피 산행후 만난 멋진 모습들.... 가을  경주는 도대체 안 예쁜 곳ㅎ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이뽀.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경주시 건천읍 단석산 중턱에 이르면 거대한 암벽이 ㄷ자 모양으로 높이 솟아 하나의 석실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 인공적으로 지붕을 덮어서 석굴 법당을 만들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바위면에는 10구의 불상과 보살상이 새겨져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동북쪽의 독립된 바위면에는 도드라지게 새긴 높이 8.2m의 여래입상이 1구 서 있다.

둥근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머리 위로 2단으로 된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작게 솟아있다.

양 어깨를 감싸고 있는 옷에는 U자형 주름이 선명하고, 트인 가슴 사이로는 띠매듭이 보인다.

오른손은 어깨 높이로 들어 손바닥을 보이고 왼손은 내려 손끝이 아래로 향하여 손바닥이 보이게 하고 있다.

 

동쪽면에는 높이 6m의 보살상이 새겨져 있는데, 상반신에는 옷을 걸치지 않았으며,

왼손은 들어서 가슴에 대었고 오른손은 몸 앞에서 보병을 쥐고 있다.

마멸이 심해서 분명하지는 않지만 남쪽면에도 광배(光背)가 없는 보살상 1구를 새겨서

 앞의 두 불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있다.

 

이 보살상의 동쪽면에는 400여 자의 글이 새겨져 있는데,

 ‘신선사(神仙寺)에 미륵석상 1구와 삼장보살 2구를 조각하였다’라는 내용이다.

 

북쪽 바위면에는 모두 7구의 불상과 보살상, 인물상이 얕게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왼쪽에서부터 여래입상, 보관이 생략된 보살입상, 여래입상, 반가사유상을 나란히 배치하였다.

반가사유상을 제외하고는 모두 왼손을 동쪽으로 가리키고 있어 본존불로 인도하는 독특한 자세를 보여준다.

 

아래쪽에는 버선같은 모자를 쓰고 공양을 올리는 모습을 한 공양상 2구와 스님 한분이 새겨졌는데,

신라인의 모습을 추정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7세기 전반기의 불상 양식을 보여주는 이 마애불상군은 우리나라 석굴사원의 시원(始原) 형식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클 뿐만 아니라, 당시 신앙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 다음 블로그 < 천년상생의 숲> 셀라 님의 글 중에서 발췌 .....

 

 

 

 

 

[산행스케치] 화랑 김유신의 이야기(경주 단석산)1| ◈─┨회원산행사진┠─

오리헌터 | 조회 97 |추천 0 | 2008.04.04.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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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들머리인 경주시 건천면 우중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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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은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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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아니 어린날의 추억이 어려있는곳.

대학시절 M.T비슷한 답사여행으로 경주에 5박6일 동안 머무른 적이 있었다.

신라의 역사를 알려면  김유신을 알아야 한다나?

암튼 경주 도착 다음날 첫번째로 올랐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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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숭아꽃?  ㅡ> 홍매(紅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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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달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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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루귀.

지난번 구절산행 때 공명님께 배워들은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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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은 10대때(19살) 올라 십여년 전 다시 한번.

그리고 8년전 낙동 때 다시 한번.

십여년전까지만 해도 임도길(일명:새마을길)을 따라

계곡을 끼고 걷던 곳이 이처럼 바뀌었다.

계곡길 함께 발담그던 순희는 어찌 변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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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상점들과 식당들이 있던 이곳에

암자가 하나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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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선원.

예전엔 음식점이었던걸로 기억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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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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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끝자락에 허름한 집 한채도 이미 흔적을 감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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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향수를 그대로 간직한 신선암.

지금은 신선사로 바뀌었다.

두어채 공양간이 늘어나기는 했지만 옛모습을 간직한

내 추억 속의 소중한 기억이 그대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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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그때는 약간 어둡고 두려운 모습이던 산령각(산신각)도

지금은 부드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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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배지붕 형식의 본당건물(대웅보전)

예전의 자그마한 암자들은 모두 동종을 법당 좌측에 저렇게 세워 놓았다.

예전과 똑같은 위치에 서있는 동종.

크기는 많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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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넘은 석불.

십년전 왔을 때 들은 이야기로는 어느 처사분께서 경주시내의 한 작은 암자에서

구해오셔서 이곳에 안치했다는...

7~8백년전 쯤 것으로 고려 양식의 반가좌불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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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령각과 대웅보전이 모두 보이는 마애불전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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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이며 국보 제199호 인 신선사 마애불.

신선사는 1,5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 마애불 군은 1,800년의 역사를 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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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사유상.

마애불의 형태를 하고 있으나 원래 제작의도는

반가사유석불을 만들 목적이었던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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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삼존불.

불상 모두의 손이 가리키는 방향은

본존불로 향하고 있는 점이 독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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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존불을 향해 공양을 올리는 듯한 형식의

신라인 공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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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후에 새겨진 걸로 추측되는 작은 마애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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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 중앙에 위치한 본존불.

우측 벽면엔 지금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마모가 되었지만

가득 메운 각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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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의 전체적인 모습

천정은 최근 들어서 다시 한 것으로 보인다.

79년도에는  지붕이 없었고.

그 후에는 어설픈 지붕을 만들어 놨던 걸로 기억한다.

 

 ㅡ 다음 카페 < 광주팀 백두산악회> 오리헌터 님의 글 중에서 발췌 ......

 

 

 

 

 

 

☆4월16일(화)경주-단석산 산행합니다

 

 

                                       사진 출처 :  부산일보 산&산에서 가져옴..

 

                 진달래가 피어 있을찌  한번 가보는 겁니다..아님 마애불이라도 보고 올려고..                                                                                        

                                        

           가는 곳 : 경주-단석산(827m) 

 

* 코     스:모시발각단-전망대-갈림길-마애불-고개-천주암-갈림길-정상-신선암-

             능선길로-505봉-절골             

               (대충 11km 정도되는 산행 거리입니다.)                                      

           (산행지 및 코스는 당일날 사정에 의하여  수정 변경될 수도 있습니다.)

 

 * 산행시간: 6 시간 

 

 * 준 비 물 : 식수, 중식 기타 간식 및 방수 방풍 점퍼 ,여벌옷,,

 

  ㅡ 다음 카페 < 부산화요만남> 산도 님의 글 중에서 발췌 ......

 

 

 

 

여행

대구경북

 

기사 관련 사진

 단석산 정상의 중앙이 갈라진 바위. 김유신이 '내가 앞으로 삼한일통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으면 칼에 갈라지게 해주십시오'하고 기원하며 칼로 내리쳤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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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연의>에는 재미있는 장면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유비와 손권이 동오에서 바위를 앞에 놓고 차례로 칼솜씨를 뽐내는 대목이다. 유비는 속으로 '내가 무사히 형주로 돌아가 대업을 성취할 수 있으면 이 칼에 바위가 갈라지게 해주십시오' 하며 칼을 휘두른다. 손권이 '무엇을 빌었느냐'고 묻자 유비가 대답한다. '우리가 조조를 물리쳐 한의 정통을 이을 수 있게 해주십사 기원했다'고 응수한다.

   손권도 이어 칼로 바위를 가른다. '내가 형주를 차지하여 대업을 이룰 수 있다면 바위가 갈라지게 해주십시오.' 유비가 '무엇을 빌었느냐'고 묻자 손권도 유비와 대동소이한 대답을 한다. <삼국지연의>의 이 장면과 유사한 전설을 품고 있는 역사유적이 경주에 있다. 바로 단석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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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석산에는 한가운데가 칼로 벤 듯 갈라진 바위들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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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천IC에서 오른쪽으로 들어서면 단석산으로 간다. 왼쪽으로 내리면 금척 고분군을 거쳐 법흥왕릉, 김춘추 묘, 서악 고분군으로 간다. 그러나 만약 등산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여행자라면 먼저 단석산부터 오르는 게 좋다. 단석산은 신라의 상징 인물인 김유신이 청소년 시절 입산하여 무예를 닦으며 통일을 염원한 곳이다. 국보 마애불도 있다.

   '단석산(斷石山)'이라면 '돌[石]을 자른[斷] 산'이라는 뜻이다. 단석산의 이름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 이곳에 들어 무예를 수련하던 중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칼로 내리쳐 두 동강이 낸 데서 유래했다. 유신은,

   "이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 삼한일통이 이루어지고, 아니 갈라지면 통일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겠나이다."

하고 천지신명께 기원했는데, 유신의 칼에 바위가 정확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그 바위가 지금 단석산 정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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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최초의 석굴로 추정되는 단석산의 거대한 바위 사이의 기도처. 문화재 보호를 위해 지금은 하늘쪽을 가리개로 덮어 두었지만 신라 때에는 기와를 이어 지붕을 설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바위 벽에 국보 마애불이 새개져 있다.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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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 상인암, 신라 최초의 석굴 사원

   신라 화랑들은 전국 곳곳을 돌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호연지기를 길렀다. 따라서 김유신도 단석산에만 머문 것은 아니다. '영남 알프스'라 부르는 가지산 일대에서도 수련을 했고, 팔공산 끝자락의 불굴사 뒤편 동굴에서도 무예를 연마하고 하늘에 기원을 올렸다. 하지만 그의 자취가 가장 분명하게 남은 곳은 단석산이다.

   단석산은 신라의 군사들이 오가는 길의 남쪽에 있는 산이다. 북쪽은 선도산이다. 두 산줄기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신라의 장수와 군사들은 싸우러 다녔다. 그래서 단석산이 화랑들의 수련장소로 애용되었을 것이다. 전쟁터로 나아가고 또 돌아오는 장졸들을 두 눈으로 생생하게 보면서 신라의 청소년들은 저절로 몸과 마음이 가다듬어지고 단단해졌으리라.

'선도산은 높이도 낮지만 본래가 신라인들의 기도처였으니 화랑들의 입산 수련장이 되지는 않았을 거야.'  

   이런저런 역사적 생각을 하며 단석산 827m를 오르면, 무심코 등산을 하는 데 비해 훨씬 힘이 덜 든다. 물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이 오르막을 탔을 어린 화랑들의 수련에 견주면 오늘의 1회 산행이야 '힘이 든다, 안 든다' 할 만한 게재도 못 되는 일이지만.

   단석산, 김유신의 단칼에 반 토막으로 난 바위를 볼 수 있는 재미있는 역사 체험장이다. 특히 청소년 자녀와 함께 경주를 방문한 답사자라면 반드시 찾아보아야 할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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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암 불전에 들어 기도를 올리고 있는 등산객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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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선암 마애불상은 단석산 정상가는 중간쯤에 있다. 신선암은 신라 천년고찰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건물도 아니고, 현재 면모 또한 옹색하다. 그러나 암자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마애불상은 보는 이의 숨을 가로막을 만큼 장엄하다.  

   높이 8m, 입구 폭 3m, 깊이 10m의 거대한 ㄷ자형 암벽 틈으로 들어가면 삼면에 불상이 새겨져 있다. 어마어마한 암벽 사이로 들어가는 느낌도 대단하려니와, 김유신이 입산 수도를 한 7세기 전반의  불상으로 추정되는 부처상 1구와 보살상 8구를 눈앞에서 대하노라니 비록 불신자는 아니지만 저절로 엄숙해진다.

   국보 199호 마애불상군이 새겨진 이 암벽의 이름은 상인암(上人巖)이다. 전문가들은 이 상인암을 신라 최초의 석굴(石窟)사원으로 인정한다. 토함산 석굴과, '제2 석굴암'으로 널리 알려진 경북 군위의 삼존불보다도 200~300년 앞선 시대의 석굴사원으로 보는 것이다.

   석굴 사원이라면 천정으로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지금은 하늘이 뻥 뚫려 있다. 그래서 뜨거운 폭염과 소나기, 삭풍한설이 안으로 쏟아진다. 결국 석불이 손상될까 봐 보호막을 씌웠다. 그러나 옛날에는 기와 지붕을 덮어둔 것으로 추정된다. 주위에서 신라 시대의 기와 조각이 다수 발견되었다.

 

 

 



단석산 정상, 난승에게 도 깨친 김유신의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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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암(위)과 속칭 '제2 석굴암'(경북 군위 소재). 그러나 '제2석굴암'이 먼저 생겼으니 군위로서는 억울한 일이다.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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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인암 앞으로 지나 조금 나아가면 왼쪽으로 등산로가 나타난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이다. 봄에 찾으면 참꽃이 만발한 길이지만, 겨울에 들르면 습기에 젖은 참나무 잎새들에 휘둘려 넘어지기 십상인 험로의 인상만 남는다. 그 길이 바로 김유신이 화랑이던 10대 때 수련 도중 난승(難勝)이라는 도사를 만나 도를 깨친 후 산 정상으로 뛰어올라 커다란 바위를 단칼에 베었다는 전설이 있는, 바로 그 단석(斷石)을 찾아가는 길이다.

   단석은 정확히 산꼭대기에 있다. 게다가 좌우로 분명하게 한복판이 갈라져 있다. 갈라진 바위 사이로 하늘이 시원하다. 이 광경을 보노라면, 날카로운 검법의 소유자가 단칼에 두 동강이를 내었다는 '전설'은 저절로 '사실'이 된다.

   단석산, 뜻을 품고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 홀로 깊은 산중에 들어와 몸과 마음을 단련했던 김유신의 자세를 배울 수 있는 곳이다. 위에서 아래로 칼날같이 갈라진 바위를 매만져보며 어린 나이에도 그토록 철저하게 시간을 영위했던 김유신을 생각해본다.

   정상에 서면 동북쪽 아래로 경주 시내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다시 고개를 북쪽으로 조금 돌리면 무열왕릉이 지키고 섰는 선도산 아래를 한 줄로 지나가는 길이 보인다. 아(!) 신라의 군사들이 줄을 지어 힘차게 행진하는 모습이 환상처럼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장편소설 <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을 낸 소설가, <대구의 풍경> 등 개인전 10회를 연 사진작가, <미국 학부모회 연구><문학교육론> 등을 낸 교육평론가    더보기

 

 

   ㅡ <오마이뉴스> 기사 중에서  전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