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10. 02:44ㆍ우리 역사 바로알기
일본서기 번역본 백제 토론방
권 19 흠명천황(欽明天皇)
卷(권) 11 仁德天皇(인덕천황) (大(대)鵻鷯天皇(천황))
125)韓國(한국) : 三韓(삼한)(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加耶(가야) 등을 칭한 것이다.
일(日) 본(本) 서(書) 기(紀) 상(上)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신대(神代) 상(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1)이 기도전원(奇稻田媛)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각마유(脚摩乳). 수마유(手摩乳)2)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석송(石松)이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산(山)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소(素)전명존(鳴尊)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소(素)잔명존(鳴尊)이 뱀을 한(韓)서검(劍)3)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그 꼬리를 잘랐을 때 칼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르고 들여다 보니 따로이 칼 한자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초초(草艸)+치검(雉劍)4)이라 하였다. 이 칼은 옛날에 소(素)잔명존(鳴尊)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미장국(尾張國)에 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뱀을 베었던 칼은 지금 길비신부(吉備神部)에 있는데 출운국(出雲國)5)의 파천(川)6)가의 산이 바로 이곳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 신대(神代) 상(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천좌치호(千座置戶)7)의 벌을 내리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때 소(素)잔명존(鳴尊)은 그의 아들 오십맹신(五十猛神)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가 증시무리(曾尸茂梨)8)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출운국(出雲國) 파천(川)가에 있는 조상봉(鳥上峯)9)에 도착했다. 그때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큰 뱀이 있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천승작검(天蠅斫劍)으로 그 큰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의 꼬리를 베었을 때 칼날이 이지러졌으므로 꼬리를 쪼개어 보니 꼬리 가운데 한자루의 신령(神靈)스러운 칼이 있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 하고는 오세손(五世孫) 천지즙근신(天之葺根神)을 보내어 하늘에 바쳤다. 이것은 지금의 이른바 초초(草艸)+치검(雉劍)이다. 처음에 오십맹신(五十猛神)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종자(種子)를 많이 가지고 왔다.그러나 한지(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축자(筑紫)10)로부터 대팔주국(大八洲國)11)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오십맹명(五十猛命)을 일컬어 공(功)이 있는 신(神)이라 하는데, 기이국(紀伊國)12)에 모셔진 대신(大神)이 바로 이것이다.
권 1 신대(神代) 상(上),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이 “한향(韓鄕)의 섬에는 김은(金銀)이 있다13).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않다” 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쓰임새를 정하여 이르기를 “삼나무와 녹나무 이 두가지 나무는 배 만드는데 쓸만하고 전나무는 상서(祥瑞)로운 궁전을 짓는 재목으로 쓰며 비자나무는 천하 백성들이 장사지낼 때 죽은 이를 눕히는 도구로 쓸만하다. 또 모름지기 먹을 수 있는 80종의 나무를 모두 심어라” 하였다. 이때 소(素)잔명존(鳴尊)의 아들 오십맹명(五十猛命)과 그의 누이 대옥진희명(大屋津姬命) 그 다음인 과(목(木)+과(瓜))진희명(津姬命), 무릇 3명의 신(神) 역시 나무종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으므로 명을 받들어 기이국(紀伊國)으로 건너갔다. 그후 소(素)잔명존(鳴尊)은 웅성봉(熊成峯)14)에 살다가 마침내 근국(根國)으로 들어갔다. 기호(棄戶)를 우리말로 수다배(須多杯)라 하고 피(목(木)+피(皮))는 마기(磨紀)라 한다. 권5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言五十瓊殖天皇)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15)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16)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任那)는 축자국(筑紫國)17)에서 2,000여 리(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18) 계림(鷄林)19)의 서남쪽에 있다.
권6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言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 이 해에 임나인(任那人)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선황(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일설(一說)은 다음과 같다.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숭신천황(崇神天皇))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월국(越國)20) 笥반포(飯浦)21)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의부가라(意富加羅)22) 국왕(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23), 또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24)이다. 일본국(日本國)25)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혈문(穴門)26)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신(臣)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북해(北海)로부터 돌아 출운국(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활목천황(活目天皇)(수인천황(垂仁天皇))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천황이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에게 “너희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매우 바랍니다”고 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阿羅斯等)에게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다면 선황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어간성(御間城)27)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적직견(赤織絹)을 아라사등(阿羅斯等)에게 주어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은 받은 적견(赤絹)을 자기나라의 군부(郡府)에 간직하였는데, 신라인들이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 적견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맺은 시작이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 자기나라에 있을 때에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농막에 가려했는데, 황소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보니 발자취가 한 군가(郡家)에 머물렀다. 당시 한 노인이 “너희가 찾는 소는 이 군가(郡家)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 등이 ‘소가 짊어진 물건으로 미루어 보니 반드시 죽여서 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 오면 물건으로 배상하자’하고 곧 죽여서 먹었다. 만약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지 물으면 재물을 바란다고 하지 말고 군(郡)에서 제사지내는 신(神)을 얻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군공(郡公) 등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가”라고 하자, 노인이 기르쳐준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었다. 흰 돌을 소 값으로 주었으므로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더니,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동녀(童女)로 변하였다. 이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이 크게 크게 기뻐하여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阿羅斯等)이 다른 곳에 간 동안 동녀가 갑자기 없어졌다. 아라사등(阿羅斯等)이 크게 놀라 자기 부인에게 “동녀가 어디로 갔소”라고 물으니, “동방(東方)을 향해 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곧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멀리 바다에 떠서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갔다. 그가 찾던 동녀는 난파(難波)28)에 나아가서 비매어증사신(比賣語曾社神)이 되었고 또 풍국(豊國)29)의 국전군(國前郡)30)에 이르러 다시 비매어증사신(比賣語曾社神)이 되어, 이 두 곳에서 함께 제사를 받았다].
권6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3년 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31)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鵜록록(鹿鹿) 적석옥(赤石玉) 1개, 출석소도(出石小刀) 1자루, 출석(出石)鉾 1자루, 일경(日鏡)(청동거울) 1개, 웅신리(熊神籬)32) 1개 등 7가지였는데33), 단마국(但馬國)34)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천일창(天日槍)이 작은배를 타고 와서 파마국(播磨國)에 정박하여 육속읍(肉粟邑)35)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이 삼륜군(三輪君)의 시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倭直)의 시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播磨)에 보내어 천일창(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일본국(日本國)36)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지고(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엽세주(葉細珠), 족고주(足高珠), 鵜록록(鹿鹿) 적석주(赤石珠), 출석도자(出石刀子), 출석창(出石槍), 일경(日鏡), 웅신리(熊神籬), 담협천대도(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에게, “파마국(播磨國) 육속읍(肉粟邑)이나 담로도(淡路島) 출천읍(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천일창(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천은(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천일창(天日槍)이 菟도하(道河)37)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근강국(近江國)38) 오명읍(吾名邑)39)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근강(近江)으로부터 약협국(若狹國)40)을 거쳐 서쪽으로 단마국(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곡(鏡村谷)41) 도인(陶人)42)은 바로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 출도(出嶋)의 사람 태이(太耳)43)의 딸 마다오(麻多烏)와 결혼하여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저(但馬日楢杵)를 낳고 일유저(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으며 청언(淸彦)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
88년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무오(戊午) 여러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듣자하니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단마(但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신보(神寶)로 삼았는데, 짐이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천일창(天日槍)의 증손 청언(淸彦)에게 조칙을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청언(淸彦)이 조칙을 받고 스스로 신보(神寶)를 받들어 바쳤다.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鵜록록(鹿鹿) 적석옥(赤石玉) 1개, 일경(日鏡) 1개, 웅신리(熊神籬) 1개 등을 바쳤으나, 오직 출석(出石)이라는 소도(小刀)에 대해서는 청언(淸彦)이 갑자기 이를 바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도포 속에 숨겨놓고 자신이 차고 다녔다. 천황이 소도(小刀)를 숨겨놓은 것을 알지 못하고 청언(淸彦)을 총애하고자 하여 어소(御所)에 불러 술을 내렸다. 이 때 칼이 도포로부터 나와 드러나니, 천황이 보고 친히 청언(淸彦)에게, “네 도포 안에 있는 칼은 어떤 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청언(淸彦)이 칼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바친 신보(神寶)와 같은 종류의 물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청언(淸彦)에게, “그 신보(神寶)를 어찌 달리 둘 수 있겠느냐”라고 이르므로, 이에 바치니 모두 신부(神府)에 보관하였다. 그 후 얼마있다가 보부(寶府)를 열어보니 소도(小刀)가 없어졌다. 이에 사람을 시켜 청언(淸彦)에게, “네가 바친 칼이 홀연히 없어졌는데, 혹시 너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청언(淸彦)이 “어제 저녁에 칼이 저절로 신(臣)의 집에 이르렀다가 오늘 아침에 사라졌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천황이 두려워하며 다시 찾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 출석도자(出石刀子)가 저절로 담로도(淡路島)에 이르렀는데 그 섬 사람들이 ‘신(神)’이라 이르고 칼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는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낸다. 옛날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단마국(但馬國)에 정박하였는데, “너는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신라 왕자인데, 이름은 천일창(天日槍)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단마(但馬)에 머물러 그 나라 전진이(前津耳)[일설에는 전진견(前津見)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태이(太耳)라고 한다.]의 딸 마(麻)拕능오(能烏)와 결혼하여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는데 이가 청언(淸彦)의 할아버지이다.
90년 봄 2월 경자(庚子) 초하루 천황이 전도간수(田道間守)44)를 상세국(常世國)45)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향과(香菓)[이는 우리말로 개구능미(箇俱能未)라고 이른다.]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귤(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후기(後紀) (천황이 죽은) 다음 해 (경행천황(景行天皇) 2년) 봄 3월 신미(辛未) 초하루 임오(壬午)(12일) 전도간수(田道間守)가 상세국(常世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것은 사시사철 나는 향과(香菓) 8간(竿) 8縵46)이었다. 전도간수(田道間守)가 이에 슬피 울며 탄식하여, “천조(天朝)의 명을 받들어 먼 이국땅에 가서, 만리의 파도를 넘고 멀리 약수(弱水)47)를 건넜다. 이 상세국(常世國)은 신선(神仙)이 사는 신비한 구역으로서 속인(俗人)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로써 왕래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는데, 어찌 홀로 큰 파도를 넘어 다시 본토로 돌아올 줄을 기약했으리오. 그러나 성제(聖帝)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천황이 이미 돌아가셔서 다녀왔음을 보고할 수 없으니 신(臣)이 비록 살았다고 하나 또한 무엇이 보탬이 되리오”라 말하고, 천황의 능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뭇 신하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전도간수(田道間守)는 삼택련(三宅連)48)의 시조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8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 중애천황(仲哀天皇)
(8년) 가을 9월 을해(乙亥) 초하루 기묘(己卯) 군신(群臣)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웅습(熊襲)49)을 토벌하는 것을 의논케 했다. 이 때 신(神)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 주기를,“천황은 어찌 웅습(熊襲)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곳은 힘없고 쓸모없는 나라이니 어찌 군대를 일으켜 칠 만하겠는가. 이 나라보다 더욱 보물(寶物)이 많은 나라50)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과 같고 진(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녹(碌)은 우리말로 마용이지(麻用弛枳)라고 한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 나라를 杼금신라국(衾新羅國)51)이라고 한다. 네가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낸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나라가 반드시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또 웅습도 복종하게 될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천황의 배와 혈문직천립(穴門直踐立)이 바친 수전(水田), 이름하여 대전(大田)이라 이름하는 것 등의 물건을 폐백으로 하라”고 하였다. 천황이 신(神)의 말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 문득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대해(大海)를 바라보았으나, 넓고 멀기만 할뿐 그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신(神)에게 “제가 두루 살펴 보았으나 바다만 있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찌 텅빈 곳에 나라가 있겠습니까. 어떤 신(神)이길래 헛되이 저를 속이십니까. 또한 우리 황실의 여러 천황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 남은 신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신이 또한 황후에게 신탁하여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분명하게, 내려다 보아 내가 본 나라인데 어찌 없다고 하며 내 말을 비방하느냐. 그런데도 너는 이같이 말하고 마침내 믿지 않으니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지금 황후가 비로소 태기가 있으니 그 아들이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여전히 믿지 않고 웅습을 억지로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9년) 이 해 신라 정벌52)로 말미암아 천황을 장사지낼 수 없었다.
권 9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 신공황후(神功皇后)
9년 봄 2월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仲哀天皇))이 축자(筑紫)의 橿일궁(日宮)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53)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군신(群臣)과 백료(百寮)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소산전읍(小山田邑)에 齌궁(宮)을 다시 지었다. 여름 4월 임인(壬寅) 초하루 갑진(甲辰) 북으로 화전국(火前國) 송포현(松浦縣)에 이르러 옥도리(玉嶋里)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시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재국(財國)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시대를 드니 비늘이 잔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희견(希見)은 우리말로 매두라지(梅豆邏志)라 한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매두라국(梅豆羅國)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송포(松浦)54)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은어(銀魚)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징험이 있음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55) 하였다. 이에 신전(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나하(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신전(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적경강(迹驚岡)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무내숙(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열전구(裂田溝)라 하였다. 황후는 橿일포(日浦)56)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황조(皇祖)의 영(靈)을 힘입어 창해(滄海)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다. 안위(安危)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부초(不肖)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영(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군신(群臣)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57)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공(功)을 얻게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 경오(庚午) 초하루 기묘(己卯) 여러 나라로 하여금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게 했다. 이 때 군졸(軍卒)들이 잘 모이지 않았으므로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대삼륜사(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군중(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오옹(吾瓮)의 해인(海人) 오마려(烏摩呂)로 하여금 서해(西海)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했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기록(磯鹿)의 해인(海人) 명초(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며칠 뒤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대개 나라가 있는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일(吉日)을 점쳐서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데, 이 때 황후가 친히 부월(斧鉞)58)을 잡고 3군(軍)에게 명령하기를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곧 사졸(士卒)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이 많기를 탐하고 사사로이 처자(妻子)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적이 강하다고 해서 굴복해서도 안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요, 도주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신(神)이 가르치기를 “화혼(和魂)은 왕의 몸에 붙어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황혼(荒魂)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라 하였다[화혼(和魂)은 우리말로 이기(珥岐)瀰다마(多摩)라 하고 황혼(荒魂)은 우리말로 아라(阿邏)瀰다마(多摩)라고 한다]. 신(神)의 가르침을 얻고나서 배례(拜禮)하고, 의망오언남수견(依網吾彦男垂見)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이도현(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황혼(荒魂)을 군(軍)의 선봉으로 하고 화혼(和魂)을 청하여 왕선(王船)에 모셨다. 겨울 10월 기해(己亥) 초하루 신축(辛丑) 화이진(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천운(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59) 도적(圖籍)60)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사부(飼府)61)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62)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63)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군(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사부(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있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64)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65)를 볼모로 하여 김(金)‧은(銀)‧채색(彩色)‧능(綾)‧라(羅)‧縑견(絹)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조(調)를 일본국(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고려(高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 국왕66)이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67)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무술(戊戌) 초하루 신해일(辛亥日) 예전천황(譽田天皇)을 축자(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우(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이 축자(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사(沙)麽현주(縣主)의 조(祖)인 내피고국피고송옥종(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혈호직천립(穴戶直踐立)이 바친 수전(水田), 즉 대전(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김(金)‧은(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표통웅(表筒雄), 중통웅(中筒雄), 저통웅(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향(向)匱남문습대력오어혼속협등존(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부인(婦人)이다. 어찌 속협등(速狹騰)68)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69)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신(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70).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신 표통남(表筒男)‧중통남(中筒男)‧저통남(底筒男) 세 신이 황후에게 “우리 황혼(荒魂)을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혈문직(穴門直)의 조상인 천립(踐立)과 진수련(津守連)의 조상인 전상견숙(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신(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천립(踐立)을 황혼(荒魂)을 제사지내는 신주(神主)로 삼고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혈문풍포궁(穴門豊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판왕(坂王)‧인웅왕(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봄 3월 계묘(癸卯) 초하루 기유일(己酉日) 신라왕이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71)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72)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허지벌한(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대마(對馬)에 도착하여 鉏해(海)의 수문(水門)73)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미질허지(微叱許智)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습진언(襲津彦)에게 “미질허지(微叱許智)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습진언(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도(蹈)鞴진(津)74)에 이르러 초라성(草羅城)75)을 정벌하고 돌아왔다76).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원(桑原)과 좌(佐)糜‧고궁(高宮)‧인해(忍海) 4읍의 한인(漢人) 등의 시조이다.
46년(366) 봄 3월 을해(乙亥) 초하루 사마숙(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77)에 보내었다.[사마숙(斯麻宿)禰는 어떤 성씨(姓氏)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왕말금한기(卓淳王末錦旱岐)가 사마숙(斯摩宿)禰에게 “갑자년(甲子年) 7월에 백제인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78) 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구(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사마숙(斯摩宿)禰는 종자(從者)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肖古王)79)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견(綵絹) 각 1필과 각궁전(角弓箭) 및 철정(鐵鋌) 40매(枚)를 이파이(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자(使者)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지마숙(志摩宿)禰에게 보고했다. 바로 탁순(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47년(367) 여름 4월 백제왕이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조사(調使)가 구(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예전별존(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구(久)氐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신라(沙比新羅)80)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구(久)氐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천조(天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황태후와 예전별존(譽田別尊)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천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 천신이 “무내숙(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사자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천웅장언(千熊長彦)은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일설에는 무장국인(武藏國人)이니 지금의 액전부(額田部) 규본수(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한다. 『백제기(百濟記)』81)에 직마나나가비(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한 사람은 대개 이 사람인 듯하다]. 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49년(369) 봄 3월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82)와 사사노(沙沙奴)跪83)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沙白)‧개로(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比自)㶱‧남가라(南加羅)‧㖨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84)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85)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미다례(彌多禮)86)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87)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辟중(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88)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父子)와 황전별(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의류촌(意流村)89)[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지산(支山)90)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91)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370) 봄 2월 황전별(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천웅장언(千熊長彦)과 구(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久)氐 등이 “천조(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다사성(多沙城)92)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驛)으로 삼게 했다.
51년(371) 봄 3월 백제왕이 또 구(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부자(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귀국(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372) 가을 9월 정묘(丁卯) 초하루 병자일(丙子日) 구(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93)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94)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95)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96)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375)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죽었다.
56년(376) 백제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
62년(38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백제기(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사지비(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가라국(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국사리(國沙利)‧이라마주(伊羅麻酒)‧이문지(爾汶至) 등이 그 인민(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97)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로 가서 “천황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유리(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加羅)98)에 모여 그 사직(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사지비(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비(比)跪가 몰래 사인(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사지비(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비(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비(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384)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99)
65년(385)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100)
권 10 응신천황(應神天皇) (예전천황(譽田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 예전천황(譽田天皇)(응신천황(應神天皇))은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仲哀天皇))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신공황후(神功皇后))이다. 천황(天皇)은 (신공(神功))황후(皇后)가 신라(新羅)를 정벌하던 해인 경신년(庚辰年)(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2월에 축자(筑紫)의 문전(蚊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물을 깨달아 보는 것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하는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성스러운 모습은 남다름이 있었다. 황태후(皇太后)가 섭정한 지 3년 되던 해에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그 때 나이가 3세였다]. 처음 천황이 뱃속에 있을 때, 하늘과 땅의 신이 삼한(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굳은살이 팔뚝 위에 나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화살통(병:ほむた)과 같았는데, 이것은 황태후가 남장(男裝)을 하고 화살통을 매고 있던 모양과 비슷하였다[초(肖)는 우리말로 아예(阿叡)라 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예전(譽田)(ホムタ)천황(天皇)이라 하였다[옛날 사람들은 병(화살통)을 「포무다(褒武多)」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천황(天皇)이 태자(太子)가 되었을 때 월국(越國)에 가서 각록(角鹿)의 笥반대신(飯大神)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때 대신(大神)과 태자(太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신(大神)을 거래사별신(去來紗別神)이라 부르고, 태자(太子)를 예전별존(譽田別尊)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대신(大神)의 본래 이름은 예전별신(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거래사별존(去來紗別尊)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다른 데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잘 알 수 없다].
391 (3년) 이 해101) 백제(百濟)의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일본(日本))의 천황(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102), 기각숙(紀角宿)禰・우전시대숙(羽田矢代宿)禰・석천숙(石川宿)禰・목(木)菟숙(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에서는 진사왕(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103) 기각숙(紀角宿)禰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104) 돌아왔다.
395 7년 가을 9월 고려인(高麗人)・백제인(百濟人)・임나인(任那人)・신라인(新羅人)이 함께 래조(來朝)하였다. 그 때 무내숙(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한인지(韓人池)105)라 불렀다.
396 8년 봄 3월 백제인(百濟人)이 래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는, “아화왕(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106) (일본(日本)이)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峴南)・지침(支侵)・곡나(谷那)・동한(東韓)의 땅107)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108)를 천조(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396 9년 여름 4월 무내숙네(武內宿)禰를 축자(筑紫)에 보내어 백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 때 무내숙(武內宿)禰의 동생 감미내숙(甘美內宿)禰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무내숙(武內宿)禰는 항상 천하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축자(筑紫)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홀로 축자(筑紫)를 나누고 삼한(三韓)을 불러들여 나에게 조회하도록 한 다음 장차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무내숙(武內宿)禰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무내숙(武內宿)禰는 탄식하며·····.
402 14년 봄 2월 백제왕(百濟王)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래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始祖)이다.
402 (14년) 이 해 궁월군(弓月君)109)이 백제(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臣)은 우리나라 120현(縣)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가라(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403 15년 가을 8월 임술(壬戌) 초하루 정묘(丁卯) 백제왕(百濟王)이 아직기(阿直伎)110)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輕)111)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阿直伎)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구판(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阿直伎)는 또 경전(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天皇)은 아직기(阿直伎)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왕인(王仁)112)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百濟)에 보내어 왕인(王仁)을 불렀다. 아직기(阿直伎)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始祖)이다.
16년 봄 2월 왕인(王仁)이 왔다. 태자(太子)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왕인(王仁)에게서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은 서수(書首)113) 등의 시조(始祖)이다.
404 (16년) 405 이 해 백제(百濟)의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 천황(天皇)은 직지왕(直支王)114)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동한(東韓)은 감라성(甘羅城)115)・고난성(高難城)116)・이림성(爾林城)117)이다].
404 (16년) 8월 평군목(平群木)菟숙(宿)禰・적호전숙(的戶田宿)禰를 가라(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詔)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木)菟숙(宿)禰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그래서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거느리고 습진언(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420 420 25년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久爾辛)118)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목만치(木滿致)119)가 국정(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백제기(百濟記)』에는, “목만치(木滿致)는 목라근자(木羅斤資)120)가 신라(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功)으로 임나(任那)에서 전횡(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貴國)(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천조(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423 28년 가을 9월 고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121)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表)에 “고려왕(高麗王)은 일본국(日本國)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그 표(表)를 읽고 노하여 고려(高麗)의 사자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表文)이 무례하다고 하여 표(表)를 파기하였다.
31년 가을 8월 여러 신하들에게 조(詔)를 내려, “관선(官船) 가운데 고야(枯野)라고 하는 것은 이두국(伊豆國)에서 바친 배이다. 그런데 이 배는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용(官用)으로 쓰인 공(功)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조(詔)를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재목(材木)을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게 하였다. 그래서 500광주리(롱(籠))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는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무고(武庫)의 수문(水門)에 모아 놓았다. 이 때 신라(新羅)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新羅)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新羅人)을 책망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저명부(猪名部) 등의 시조(始祖)이다·····.
37년 봄 2월 무오(戊午) 초하루 아지사주(阿知使主)・도가사주(都加使主)122)를 오(吳)나라123)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아지사주(阿知使主) 등은 고려국(高麗國)을 지나서 오(吳)나라로 가고자 하여, 먼저 고려(高麗)에 도착하였으나 (오(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高麗)에 구하니, 고려왕(高麗王)은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吳)의 왕은 공녀(工女) 형원(兄媛)・제원(弟媛)・오직(吳織)・혈직(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39년 봄 2월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124)이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1) 素(소)잔鳴尊(명존) : 거친 男神(남신) 혹은 出雲國(출운국) 飯石郡(반석군) 및 紀伊郡(기이군) 在田郡(재전군)에 있는 須佐(수좌)라는 곳의 主神(주신)이다. 신화에 의하면, 伊(이)장諾尊(락존)의 아들로 根國(근국)을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命(명)을 어기고 高天原(고천원)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았기 대문에 추방되어 出雲國(출운국)에 내려와 八岐(팔기) 大蛇(대사)를 물리치고 草艸(초초)+雉劍(치검)을 얻어 天照大神(천조대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卷 11 仁德天皇 (大鵻鷯天皇)
(卽位前紀) 大鵻鷯天皇(仁德天皇)은 譽田天皇(應神天皇)의 네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仲姬命이며 五百城入彦皇子의 손자이다. 天皇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용모가 아름다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자애로왔다. (應神天皇) 41년 봄 2월에 譽田天皇이 죽었다. 그 때 太子 菟道稚郞子는 왕위를 大鵻鷯尊에게 양보하며 帝位에 오르지 아니하였다. (中略) 이 때 額田大中彦皇子는 倭의 屯田과 屯倉을 장악하려고 屯田司인 出雲臣의 조상 淤宇宿禰에게, “이 屯田은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내가 다스릴 것이다. 너는 주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淤宇宿禰가 太子에게 이 일을 아뢰자 太子는, “너는 곧 大鵻鷯尊에게 말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大鵻鷯尊에게, “臣이 맡고 있는 屯田을 大中彦皇子가 방해하여 다스리지 못하게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大鵻鷯尊은 倭直의 조상인 麻呂에게, “倭의 屯田이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臣은 모릅니다. 臣의 아우 吾子籠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吾子籠은 韓國125)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大鵻鷯尊은 淤宇宿禰에게, “네가 직접 韓國에 가서 吾子籠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淡路의 海人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韓國에 가서 즉시 吾子籠을 데리고 왔다·····.
(11년) 이 해 新羅人이 朝貢하였다. 따라서 이 役事126)에 동원하였다.
12년 가을 7월 辛未 초하루 癸酉日 高麗國이 鐵로 만든 방패와 鐵로 만든 과녁을 바쳤다.
(12년) 8월 庚子 초하루 己酉 高麗에서 온 사신들을 朝廷에서 향응하였다. 이 날에 群臣 및 百官들을 모아놓고 高麗에서 바친 鐵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的臣의 조상인 盾人宿禰만이 鐵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高麗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盾人宿禰를 칭찬하고 的戶田宿禰라는 이름을 내렸다. 같은 날에 小泊瀨造의 조상인 宿禰臣에게 이름을 내려 賢遺臣이라 하였다[賢遺는 우리말로 左가能려里라 한다].
17년 新羅가 朝貢하지 않았다.
(17년) 가을 9월 的臣의 조상인 砥田宿禰와 小泊瀨造의 조상인 賢遺臣을 (新羅에) 보내어 朝貢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新羅人은 두려워하여 貢物을 바쳤다. 貢物은 비단 1,460필 및 여러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41년 봄 3월 紀角宿禰를 百濟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127) 이 때 百濟의 왕족인 酒君128)이 무례하게 행동하였으므로 紀角宿禰는 백제의 왕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百濟王은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酒君을 묶어서 襲津彦에게 딸려보내어 바쳤다. 酒君은 (일본에) 와서 곧 石川錦織首許呂斯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酒君은) 속여 말하기를, “天皇은 이미 나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의지하여 살고 싶다”고 하였다. 오랜 뒤에 天皇은 드디어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
43년 가을 9월 庚子 초하루 依網의 屯倉에 있는 阿弭古가 기이한 새를 잡아서 天皇에게 바치며, “臣은 항상 그물을 쳐서 새를 잡는데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는 잡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이하게 생각되어 그것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天皇은 酒君을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하고 물었다. 酒君은, “이와 같은 새는 百濟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여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온갖 새들을 잡습니다. 百濟 사람들은 이 새를 ‘俱知’[이것은 지금의 매이다]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 새를) 酒君에게 주어 길들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酒君은 가죽으로 만든 낚싯줄을 그 발에 매고 작은 방울을 그 꼬리에 달아서 팔뚝 위에 올려 놓고 天皇에게 바쳤다. 이 날 白舌鳥野에 행차하여 사냥을 하였다. 그 때 꿩이 많이 날아 올랐는데 매를 놓아 잡도록 하니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의 꿩을 얻었다.129)
53년 新羅가 朝貢을 하지 않았다.
(53년) 여름 5월 上毛野君의 조상인 竹葉瀨를 (新羅에)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가는 도중에 흰사슴을 잡았으므로 돌아와 天皇에게 바치고 다시 날을 받아 출발하였다. 잠시 후에 또다시 竹葉瀨의 아우인 田道를 보내면서 詔를 내려, “만약 신라가 대항하거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고 하고, 날랜 병사를 주었다. 新羅는 군사를 일으켜 맞섰다. 이 때 新羅人은 매일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田道는 요새를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그 때 신라 군졸 한 명이 진영 밖으로 나온 것을 붙잡아다가 동정을 물으니, “힘 센 사람이 있어 百衝이라 하는데 그는 날래고 용감하여 항상 軍의 오른쪽 선봉이 되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아 왼쪽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新羅軍이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였다. 이에 田道는 날랜 기병을 계속하여 보내 그 왼쪽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新羅軍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병사를 풀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4邑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58년) 겨울 10월 吳國・高麗國이 함께 朝貢하였다.
<<日本書紀>> 권 13, 雄朝津間稚子宿녜天皇[允恭天皇].
3년 봄 정월 辛酉 초하루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을 구하였다. 가을 8월 醫員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130).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42년 봄 정월 乙亥 초하루 戊子 천황이 죽었다. 이때 나이는 若干131)이었다. 이에 신라왕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배 80척으로 조공하고 아울러 각종 樂人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對馬島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울고 筑紫에 이르러 또 큰 소리로 울었다. 難波津132)에 이르러 모두 흰옷을 입었다. 조공물을 받쳐들고 또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難波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울부짖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屍身을 모셔둔 곳에 參禮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의 弔問使들이 問喪의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京城 근방에 있는 耳成山, 畝傍山133)을 좋아하였다. 琴引坂134)에 도착하여 그곳을 돌아보며 “우네메하야 미미하야(내 사랑하는 우네메여 미미여)”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까닭에 畝傍山을 ‘于泥口+羊(우네메)’라 잘못 말하고 耳成山을 ‘水+彌 水+彌(미미)’로 잘못 말한 것이다. 이때 왜의 飼部135)에 속해있던 사람이 신라사람을 따라갔는데, 이 말을 듣고 의심하기를 신라사람이 采女136)와 정을 통했다고 여겨 돌아와 大泊瀨 皇子137)에게 아뢰었다. 황자는 곧 신라의 使者들을 모두 가두고는 사실여부를 캐물었다. 이때 신라 使者들이 “采女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서울 근방에 있는 두 산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잘못된 말인 것을 알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매우 원망하여 다음부터는 바치는 물건의 종류와 배의 수를 줄였다.
<<日本書紀>> 권 14,大泊瀨幼武天皇[雄略天皇].
2년 가을 7월 백제 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石川楯[옛 책에는 石河股合首의 조상 楯이라 한다]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에게 명하여 來目部138)를 시켜 부부의 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百濟新撰>>139)에는 “己巳年에 蓋鹵王이 즉위하였다140). 천황이 阿禮奴足+危(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慕尼夫人의 딸 適稽女郞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5년) 여름 4월 백제 加須利君141)[蓋鹵王이다]은 池津媛[適稽女郞이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 나라의 이름을 失墜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軍君142)[昆支이다]에게 “네가 마땅히 日本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軍君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加須利君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따라서 이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6월 丙戌 초하루. 임신한 부인이 과연 加須利君의 말처럼 筑紫의 各羅嶋143)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144)이라 하였다. 이에 軍君은 곧 한 척의 배로 嶋君을 나라에 보내었는데, 이가 武寧王145)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라 일컬었다. 가을 7월. 軍君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百濟新撰에 “辛丑年에 蓋鹵王이 아우 昆支君을 보내어 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146), 兄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7년) 이해 吉備上道臣田狹이 궁중에서 侍從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稚媛147)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와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귀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稚媛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田狹을 任那 國司148)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稚媛과 동침하였다. 田狹臣은 稚媛에게 장가들어 兄君과 弟君을 낳았다.[다른 책에서는 “田狹臣 아내의 이름은 毛媛인데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녜149)의 딸이다. 천황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남편을 죽이고 자기가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田狹은 이미 任地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中國’150)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田狹臣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懲罰하라”고 하였다. 이때 西漢才伎 歡因知利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韓國151)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歡因知利를 弟君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弟君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152)로 변하여 忽然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弟君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153)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쳐 데리고 올 재주있는 사람들을 큰 섬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任那國司 田狹臣은 弟君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弟君에게 警戒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자식에 대해서는 윗글에서 이미 보았다154)]. 이제 禍가 나에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任那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弟君의 아내 樟媛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君臣의 義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海部 直赤尾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弟君이 죽은 것을 알고 日鷹吉士堅磐固安錢 [堅磐은 우리말로 柯陀之波라 한다]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마침내 倭國 吾礪 廣津[廣津은 우리말로 比慮岐頭라 한다]邑155)에 안치하였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황이 大伴大連室屋에게 詔를 내려 東漢直국에게 명하여 新漢156) 陶部 高貴, 鞍部 堅貴, 畵部 因斯羅我, 錦部 定安那錦, 譯語 卯安那 등을 上桃原,下桃原,眞神原의 3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어떤 책에는 “吉備臣弟君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漢手人部,衣縫部,肉人部를 바쳤다”고 한다].
8년 봄 2월. 身狹村主靑과 檜외民使博德을 吳나라157)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158).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159)[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160)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斑鳩[斑鳩는 우리말로 伊柯屢俄라 한다], 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161)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와 新羅를 말한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162)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권 14 雄略天皇
9년(465) 3월 천황이 新羅를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다. 神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천황이 이로 말미암아 가지 않았다. 그리고 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談은 우리말로 箇陀利라고 한다]·小鹿火宿禰 등에게 칙명으로 “新羅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미쳐 몸을 對馬의 밖에 두고 자취를 匝羅163) 밖에 감춘 채 高麗의 조공을 막고 百濟의 城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리같은 사나운 마음이 있어 배부르면 나는 듯 달려가고 굶주리면 붙좇는다. 그대들 네 卿을 대장으로 삼으니 王師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紀小弓宿禰는 大伴室屋大連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호소해주도록 하면서 “신이 비록 미약하지만 삼가 칙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아내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 되어 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公은 이 일을 갖추어 천황께 아뢰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室屋大連이 갖추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슬피 탄식하면서 吉備上道의 采女 大海를 紀小弓宿禰에게 하사하여 그를 따라가서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밀어 (군대를) 보냈다. 紀小弓宿禰 등이 곧 新羅에 들어가 이웃 郡을 함께 공격하였다[行屠는 함께 가서 함께 공격한다는 것이다]. 新羅王은 밤에 官軍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관군이) 㖨164)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騎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小弓宿禰는 (新羅軍을) 쫓아가 陣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탁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紀小弓宿禰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大伴談連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이날 저녁 大伴談連과 紀岡前來目連이 모두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談連의 시종으로 같은 姓인 津麻呂는 나중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주인을 찾았다. 진영에서 찾지 못하자 나와서 “우리 주인 大伴公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너의 주인 등은 적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주며 주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津麻呂는 그 말을 듣고 땅을 구르면서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 소리치고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병에 걸려 죽었다. 여름 5월 紀大磐宿禰165)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음을 듣고 新羅를 향하면서 小鹿火宿禰가 관장하던 兵馬와 船官 및 小官들을 장악하고 명령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小鹿火宿禰는 大磐宿禰를 매우 원망하여 韓子宿禰에게 거짓으로 “大磐宿禰가 저에게 ‘내가 다시 韓子宿禰가 장악한 관리들을 뺏는 것이 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데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韓子宿禰는 大磐宿禰와 틈이 벌어졌다. 이 때 百濟王은 日本의 장수들이 작은 일 때문에 틈이 벌어졌음을 듣고 韓子宿禰 등에게 사람을 시켜 “나라의 경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림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子宿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갔는데, 강에 이르러 大磐宿禰가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때 韓子宿禰가 뒤에서 大磐宿禰의 말안장 뒤를 받친 나무에 활을 쏘았다. 大磐宿禰가 놀라 돌아보며 韓子宿禰를 쏘니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들이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길에서 행렬이 어지러워져 百濟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采女 大海가 小弓宿禰의 관을 따라 日本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大伴室屋大連에게 근심스럽게 상의하기를 “저는 장례치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골라주십시오”라 하니, 大連이 곧 아뢰었다. 천황이 大連에게 명령하여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용처럼 뛰어 오르고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8方을 널리 바라보았고, 반역자들을 불시에 토벌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몸은 만리 밖에서 수고로웠고 목숨이 三韓에서 떨어졌으니, 매우 불쌍히 여겨 장례를 담당할 사람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 大伴卿과 紀卿 등은 같은 나라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서 유래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大連이 명령을 받들어 土師連小鳥로 하여금 田身輪邑166)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지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大海가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韓奴 室·兄麻呂·弟麻呂·御倉·小倉·針 6 口를 大連에게 보냈는데, 吉備上道의 蚊嶋田邑 家人部가 이들이다. ···
11년(467) 가을 7월 百濟國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貴信이라고 하였다. 또 貴信은 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의 吳琴167)을 타는 壃手屋形麻呂 등이 바로 그 후손이다.
15년(471) 秦의 백성168)을 臣·連169) 등에게 분산시켜 각각 원하는 바에 따라 부리도록 하고 秦造170)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秦造酒가 매우 근심스럽게 여기며 천황을 섬겼다. 그러므로 천황은 그를 총애하여 詔를 내려 秦의 백성을 모아 秦酒公에게 주니, 공은 이에 180種의 勝171)을 거느리고 庸調로 絹縑172)을 바쳐 朝廷에 가득 쌓았다. 그러므로 姓을 하사하여 禹豆麻佐라 하였다[일설에는 禹豆母利麻佐라 하였는데, 모두 가득 쌓은 모양이다].
16년(472) 가을 7월 詔를 내려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國縣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 秦의 백성을 분산하여 옮겨서 庸調를 바치도록 하였다.
20년(476)173)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174)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175)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21년(477) 봄 3월 천황이 百濟가 고구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176)를 汶洲王177)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178). 당시 사람들이 모두 ‘百濟국은 비록 거의 망해 倉下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汶洲王은 蓋鹵王의 동생이다179). 『日本舊記』에서는 “久麻那利를 末多王180)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任那國의 下哆呼唎縣의 別邑이다].
23년(479) 여름4월 百濟의 文斤王181)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182)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兵器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183)이 되었다. *이 해 百濟에서 바친 調賦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筑紫의 安致臣·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高麗를 쳤다. 8월 庚午 초하루 丙子 천황의 병이 더욱 심해져 관료들과 하직하고, 또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천황이) 大殿에서 죽었다.··· 이 때 新羅를 정벌하러 갔던184) 장군 吉備臣尾代의 행렬이 吉備國에 이르러 집을 지나갔다. 뒤를 따르던 500蝦夷들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천황이 죽었으니 때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모여 이웃 郡을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尾代가 집으로부터 와서 蝦夷와 娑婆水門에서 만나 싸우며 활을 쏘니 蝦夷들이 뛰어오르거나 엎드려서 능히 화살을 피해 벗어나므로 끝내 쏘아 맞힐 수 없었다.···
권15 弘計天皇 顯宗天皇
3년(487) 봄 2월 丁巳 초하루 阿閉臣事代가 명을 받들고 任那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이 때 月神이 사람에게 의탁하여 “나의 조상 高皇山靈은 이미 天地를 녹여 만든 공이 있었으니, 백성의 땅으로 月神인 나를 받들어야 한다. 만약 청에 따라 나에게 바친다면 복과 경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事代가 이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와 갖추어 아뢰니 歌荒樔田으로써 받들었으며[歌荒樔田은 山背國 葛野郡에 있다], 壹伎縣主의 선조인 押見宿禰가 사당에 모셨다. *이 해 紀生磐宿禰가 任那를 점거하고 高麗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의 왕노릇하려고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의 左魯·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의 適莫爾解를 爾林185)에서 죽이고[爾林은 高麗의 땅이다], 帶山城186)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187) 古爾解·內頭188) 莫古解189)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이 左魯·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億計天皇 仁賢天皇
6년(493) 가을 9월 己酉 초하루 壬子 日鷹吉士를 보내 高麗에 사신으로 보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 이번 가을 日鷹吉士가 사신으로 파견된 후에, 어떤 여인이 難波의 御津에 살았는데 곡을 하며 “어머니에게도 兄이요 나에게도 형이며, 어린 풀같은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 하였다[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라 한 것은 우리말로는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이다190) .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고 한 것은 우리 말로는 阿我圖摩播耶라 한다. 어린 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에 어린 풀로 부부를 비유하였으므로 어린 풀을 남편이라 여겼던 것이다]. 곡소리가 매우 슬퍼 사람들의 腸을 끊는 듯하였다. 菱城邑 사람 鹿父[녹부는 사람 이름이다. 사람들은 父를 柯曾이라고 부른다]가 듣고 앞으로 나아가 “어찌 슬피 우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라 하니, 여인이 답하기를 “가을 나무의 슬픔이 더하여 두 배로구나(雙은 둘이다). 받아들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鹿父가 “그렇다”라 하며 말하는 내용을 알았다. 동반자가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알았습니까”라 물으니, (녹부가) 답하기를 “難波玉作部鯽魚女[鯽魚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浮儺謎라 한다]가 韓白水郞전[韓白水郞전이라 한 것은 우리 말로 阿羅摩能波陀該이니, 전은 보리밭을 경작하는 것이다]에게 시집가서 哭女를 낳았고, 哭女[哭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儺俱謎라 한다]는 住道人 山杵에게 시집가서 飽田女를 낳았다. 韓白水郞전과 그 딸 곡녀는 모두 일찍 죽었는데, 住道人 山杵가 앞서 玉作部鯽魚女와 간통하여 추(麤의 약자)寸을 낳았다. 麤寸은 飽田女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이 때 麤寸이 日鷹吉士를 따라 高麗를 향해 출발하였으므로 그 처인 飽田女가 배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마음의 갈피를 잃고 상심하여 곡소리가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장을 끊을 듯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 해 日鷹吉士가 高麗로부터 돌아와 工匠 須流枳·奴流枳 등을 바치니, 지금의 大倭國 山邊郡 額田邑191) 熟皮高麗192)가 그 후예이다.
125)韓國 : 三韓(馬韓·辰韓·弁韓)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百濟·新羅·加耶 등을 칭한 것이다. 126)이 役事 : 바로 앞의 기사 즉, 仁德天皇 11년 겨울 10월조에 보이는, 難波高津宮의 북쪽 들판을 파서 아래의 물을 끌어다 서쪽바다(大阪灣)에 대게 한 일과, 북쪽 내에 물이 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茨田堤를 쌓은 일을 가리킨다. 127)처음으로 나라의·····모두 기록하였다 : 『日本書紀』 권25 孝德天皇 大化 원년 7월 百濟의 사신에게 내린 詔에, ‘是我遠皇祖之世 以百濟國 爲內官家 ···· 後遣三輪栗隈君東人 觀察任那國堺 是故 百濟王隨勅 悉示其堺’라고 되어 있는데, 仁德天皇 31년의 이 기사는 여기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진 기사가 아닌가 한다. 128)酒君 : 酒君의 世系는 알 수 없다. 다만 『新撰姓氏錄』에 右京諸蕃 刑部・同和泉諸蕃 百濟公・六人部連 등의 姓氏가, ‘出自百濟國酒王也’라고 되어 있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때 百濟에서 酒君을 바쳤다는 기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29)『日本書紀』 仁德天皇 同年 同月 是月條에 의하면, 이 달에 처음으로 鷹甘部를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시 사람들은 매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鷹甘邑이라 하였다고 한다. 130) 醫員이 新羅로부터 ...병이 나았다 : <<古事記>>(卷 下)에 “此時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척 爾御調大使金波鎭漢紀武 此人深知藥方 故治差帝皇之御病”이라 하여, 允恭天皇의 持病을 신라의 조공사 金波鎭漢紀武가 치유했다고 한다. 131) 若干 : 卜部兼右本과는 달리 北野本과 內閣文庫本에는 ‘八十一’로 되어있다. 한편 <<古事記>>(卷下)에서는 “天皇御年 漆拾捌歲”라 하여 允恭天皇이 78세에 죽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32) 難波津 : 難波는 지금의 大阪市 지역인데, 大阪의 瀨戶 內海의 동쪽 끝과 山背川 어구는 옛날부터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좋은 항구가 발달해 있었다. 그곳이 바로 難波津인 듯하다. 133) 耳成山,畝傍山 : 耳成山은 지금의 奈良縣 강(木+畺)原市 木原에 있으며 畝傍山 역시 강原市에 있다. 134) 琴引坂 : 지금의 奈良縣 御所市 富田의 白鳥陵 부근으로 추정된다. 135) 飼部 : 이는 律令 용어로 馬寮에 소속되어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아보는 品部이다. 136) 采女 : 天皇 옆에서 음식 등을 시중드는 女官으로, 그 명칭은 後漢의 宮中官制에서 기원한다. 일본에서의 采女는 지방 호족들이 중앙조정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충성의 保證物로 자신의 누이 혹은 딸을 바쳐 천황을 섬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大和改新 때 采女 貢進이 법제화되었다. 137) 大泊瀨 皇子 : 允恭天皇의 다섯째 아들로 후에 雄略天皇이 되었다. 138) 來目部 : 久米部 혹은 大來目部라고도 한다. 大和朝廷에서 군대의 中核이 되고 있던 品部의 하나이다. 139) 百濟新撰 : <<日本書紀>> 백제관계 기사의 細註에 인용된 백제의 史書로 <<백제기>>, <<백제본기>>와 함께 百濟三書라 불리운다. 이들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곳과 武烈天皇 4년조 등 백제 웅진시대의 사실에 관해서는 <<백제신찬>>만이 인용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웅진시대의 사적을 적은 책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140)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했다 :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에 의하면, 毗有王의 맏아들인 개로왕은 455년(乙未년)에 즉위하여 475년(乙卯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로왕 治世 中에는 己巳年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본서에는 <<百濟新撰>>을 인용하여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일본서기>> 찬자의 誤寫일지도 모르겠다. 141) 加須利君 : ‘蓋鹵’ 혹은 개로왕의 이름인 ‘慶司’를 音寫한 표기로 보인다. 본서(권 24) 皇極天皇 원년 2월조에 蓋蘇文을 加須彌로 표기한 것이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개로왕은 백제 제 21대 왕으로 ‘近蓋婁王’이라고도 한다. 455년에 毗有王을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다가 475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자신도 고구려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42) 軍君 : ‘軍’과 ‘昆’,‘君’과 ‘支’는 각각 음과 뜻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이다. 昆支를 琨支로도 적는다(본서 16,武烈天皇 4년 是歲條). 본서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라 하였으나, <<삼국사기>>(권26)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로 東城王의 아버지라 하여 兩書間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문주왕 3년(477) 4월에 內臣佐平이 되었으며 그해7월에 죽었다. 458년에 宋으로부터 征虜將軍左賢王의 관작을 받은 余昆과도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新撰姓氏錄>>에는 昆支를 河內飛鳥戶造의 시조라 하였다. 143) 各羅嶋 : 지금의 長岐縣 東松浦郡 鎭西町의 加唐島에 비정되고 있다. 144) 嶋君 : ‘嶋’의 일본어 발음이 ‘세마’이므로 嶋君은 곧 ‘세마임금’ 혹은 ‘세마왕’이라 할 수 있다. 본서(권 16) 武烈天皇 4년 是歲條에 인용한 <<백제신찬>>에 武寧王의 이름을 斯麻王이라 하였으며, <<삼국사기>>(권 26)에서도 斯摩라 하였다. 그리고 1971년에 발굴한 武寧王陵 안에 있던 왕의 지석에도 斯麻王이라 하였다. 이는 모두 ‘嶋君’을 音寫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5) 武寧王 : 백제 제 25대 왕으로 이름은 斯麻(摩)이다. 그의 계보에 관해서는, 東城王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과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의 아들로서 東城王의 異母兄이라는 두 설이 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武寧王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1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재위기간은 501년-523년이다. 146) 辛丑年에 개로왕이...천황을 모시게 했는데 : 개로왕 재위기간 중의 辛丑年은 461년 즉 개로왕 7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史書에는 이 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147) 稚媛 : 雄略天皇의 둘째 妃로 稚姬라고도 한다. 稚媛을 吉備上道臣의 딸 혹은 그의 아내라고도 하며, 또는 葛城氏인 玉田宿녜의 딸이라고도 한다. 雄略天皇이 죽은 직후 그녀의 아들 星川皇子에게 모반을 敎唆한 죄로 火刑을 당하였다. 148) 國司 : 大和改新 이후 大寶, 養老律令에 의하여 법제화된 정식 지방관의 총칭으로, 임기는 보통 6년이었으며 재직기간 동안에 職分田을 받았다. 그러나 大和改新 이전의 國司는 國宰(구니노미고도모찌)와 같은 뜻으로 천황이 임시로 파견하는 지방장관을 의미한다. 149)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녜 : 본서(권 13) 允恭天皇 5년 7월조에서는 玉田宿녜를 葛城襲津彦의 孫子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아들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0) 中國 : 日本을 가리킨다. 645년의 大和改新과 701년의 大寶律令 반포를 통한 통치조직의 정비와 天武,持統,文武天皇代의 중앙집권정책 성공으로 국내외적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일본은 中國의 華夷思想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높혀 中國이라 표현한 듯하다. 151) 韓國 :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변한,진한 즉 三韓의 總稱이다. 152) 늙은 여자 :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라 기사에 老女+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豫知와 占卜을 행하는 샤먼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崔光植,<三國史記 소재 老女+區의 性格>,<<史叢>> 25,1981.9쪽). 그렇다면 본서의 新羅國神 변한 늙은 여자도 弟君의 신라정벌을 豫防했다는 점에서, 노구와 같은 의미로 파악될 수 있을 듯하다. 153) 하루 : 前後 내용으로 보아 ‘하루(一日)’라는 표현은 부자연스럽다. <<日本書紀通言+正>>에서는 ‘一日’을 ‘一月’로 적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154) 자식에 대해서는 ...보았다 : 본서(권 14) 雄略天皇 원년 3월조에 의하면, 稚姬(媛)는 천황의 두 아들을 낳았는데 磐城皇子와 星川稚宮皇子가 바로 그들이다. 155) 吾礪 廣津邑 : 吾礪는 지금의 大阪府 八尾市 植松町 부근이고 廣津은 難波津 남쪽의 옛 명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56) 新漢 : 옛날에 귀화한 阿知使主,都加使主 계열의 漢人과 대비하여 이 때 새롭게 귀화한 漢人이라는 뜻이다. 157) 吳나라 : 464년 당시 중국에는 吳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吳는 중국 남조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 해에 사신으로 간 身狹村主靑과 檜隅民使博德은 2년 뒤인 雄略天皇 10년 9월에 귀국하였다. 그후 同王 12년 4월에 재차 吳에 갔다가 14년 정월에 돌아왔다. 158) 高麗와 우호를 맺았다 : 신라는 백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4세기 후반에 高句麗와 우호관계를 맺어 군사 정치적인 도움을 받았다.그러나 433년의 羅濟同盟과 450년에 하슬라성주 三直이 悉直에서 고구려 邊將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관계는 梗塞되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464년 당시 신라, 고구려의 우호관계 속에서 고구려 군사가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9) 筑足流城 : 지금의 大邱地方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60) 綴旒 : 깃대에 묶어서 늘어트린 술은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이 임금을 마음대로 할 때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에 비유한다. <<後漢書>> 張衡傳에 “君若綴旒 人無所麗”라는 말이 있다. 161) 地道 :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땅을 파서 만든 길로 地下道 혹은 塹濠 등을 말한다. 162) 官軍 : 任那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말한다. 中國의 華夷觀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中國’이라 일컬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163)匝羅: 草羅·歃良으로 보아, 지금의 경상남도 梁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匝은 歃과 같은 음 sap을 옮긴 것이며, 良·羅는 國을 의미하는 地名語尾이다. 양산은 신라와 가야의 교통로에서중요한 거점이었다. 164)㖨: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근래에 靈山·密陽 방면의 한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6세기 전반 伽耶南部諸國의 소멸과정 고찰」(『韓國古代史硏究』 1, 1988). 165) 紀大磐宿禰: 紀小弓宿禰의 아들이다. 166)田身輪邑:지금의 大阪府 泉南郡 岬町淡輪이다. 167)吳琴: 일본 職員令 雅樂寮조에 “腰鼓師 二人”이라 하고 그 義解에서 “謂 吳樂 其腰鼓亦爲吳樂之器也”라 하였는데, 伎樂에 사용되는 악기는 吳鼓 외에는 笛·銅鈸이 있을 뿐 琴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琴이 아닌 대륙 계통의 琴에는 고구려에서 발달한 玄琴(6絃), 신라에서 발달한 伽耶琴 즉 新羅琴(12絃)이 있다. 그러나 貴信이 백제에서 왔다고 했으므로 吳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8)秦民: 應神天皇 14년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한 弓月君의 후예이다. 169)臣連: 일본 고대의 姓이다. 大和朝廷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조정에 참여한 여러 豪族에게 氏를 주어 고유의 직업을 세습하게 하는 한편 姓(可婆禰)을 부여하여 각 씨의 職掌을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姓은 경칭적인 성격이 농후한 것과 사회적 입장이나 직능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臣·連은 전자에 속한다. 즉 臣은 조정에서 政務를 맡고 있던 氏에게, 連은 정무 이외의 특수한 職役을 맡고 있는 氏 중 큰 氏에게 부여된 성이다. 170)秦造: 秦의 백성을 관리하는 伴造인데, 天武 12년 9월에는 連, 14년 6월에는 忌寸이라고 姓을 바꾸었으며, 그 일부는 延曆 연간(782-805)에 宿禰라고 바꾸었다. 171)勝: マサ·タヘ라고도 읽지만 村의 首長인 韓語에서 유래한 スグリ라고 읽는 것이 적당한 듯하다. 즉 고대 일본의 姓으로, 百濟에서 건너가 秦氏伴造를 거느리며 지방의 秦部를 관할하는 지위에 있었다. 172)縑: 곱게 짠 平織의 絹이다. 173)雄略天皇 20年: 『三國史記』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21(을묘)년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長壽王)이 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백제기』의 기사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長壽王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년(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174)狛: 高句麗의 別稱인 듯하다. 『同文通考』에서 “狛 與高麗訓同 狛音泊 獸名 按狛 蓋貊之訛 貊國名 三韓之屬”이라 하였다. 175)尉禮: 백제 초기의 도성으로, 『三國史記』에서는 漢城이라 하였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春宮里 일대, 風納里 토성, 二聖山城, 夢村土城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의 서울 강동구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176)久麻那利: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쫒겨 옮겨간 熊津을 말하며 현재의 충청남도 公州이다. 구마나리의 古訓은 コムナリ로, コム는 한국어 곰(kom)이고 ナリ는 고대 한국어 나리(나루·노리)로 川·津의 뜻이다. 177)汶洲王: 文周王, 文州王이라고도 하는데, 재위기간은 475년-477년이다. 蓋鹵王 때 上佐平을 역임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 때 개로왕의 명에 따라 신라에 구원병을 청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개로왕이 이미 죽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그러므로 즉위하여 木劦滿致와 祖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熊津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실추되어 왕비족인 解씨가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특히 兵官佐平 解仇가 권력을 독점하여 왕도 통제하지 못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178)久麻那利~: 일본 왕이 공주지역을 주어 백제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 백제가 漢城에서 熊津으로 遷都한 것을 말한다. 179)蓋鹵王母弟: 『三國史記』 권26 文周王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우라 하였으니 확실하지 않다. 한편 개로왕 4년(458) 중국 南朝의 宋에서 輔國將軍을 제수받은 餘都과 동일인물로 보고, 개로왕의 동생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李基東,「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歷史學報』 62, 1974). 180)末多王: 다음의 23년 여름4월의 기사로 미루어 三斤王(또는 文斤王)이 죽고 즉위하는 東城王 牟大를 말하는 듯하다. 181)文斤王: 『三國史記』에는 三斤王, 『三國遺事』에는 三乞王이라 하였다. 문주왕 3년 4월 태자로 봉해졌다가 부왕을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6 삼근왕조에는 文周王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표와 『삼국유사」의 왕력에 의거하여 문주왕이 3년만에 죽고 즉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의 재위기간은 477년-479년이다. 182)昆支王: 雄略天皇 5년(461) 4월의 기사에는 軍君이라 하였고, 개로왕의 아우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 권26 문주왕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는 문주왕의 아우라 하였다. 한편 개로왕 4년(458) 중국 남조의 宋으로부터 征虜將軍 左賢王을 제수받은 餘昆과 동일인물로 보고 문주왕과 함께 개로왕의 아우라고 본 견해도 있다(이기동, 앞의 글). 461년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왜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문주왕 3년 4월 內臣佐平이 되었다가 7월에 죽었다. 183)東城王: 『삼국사기』 권26 동성왕조에 의하면 諱는 牟大, 摩牟이며 『三國遺事』에 의하면 摩帝, 餘大라고도 한다. 재위기간은 479년-501년이다.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184)신라를 정벌: 雄略天皇 7년 吉備上道臣田狹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 直赤尾에게 명하였으나, 제군이 백제에까지 갔다가 공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8년에는 가야(임나)왕이 당시 가야에 와 있던 吉備臣小梨 등에게 고구려와 싸우는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또 9년에도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吉備臣尾代가 언제 신라에 갔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185)爾林: 爾林城인데, 지금의 충청남도 大興(옛이름 任城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전라북도 金堤郡 利城(옛이름 乃利阿)에 비정되기도 한다. 세주에서 고려의 땅이라 한 것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보아도 무리일 듯하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 영락6년(396)의 정벌 때 수군이 남한강 상류로 진출하여 충주지역을 차지하고 國原城을 두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李道學,「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1988, 知識産業社). 186)帶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井邑郡 泰仁面이 신라시대에 帶山縣이었으므로(『三國史記』 권37 地理4) 이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187)領軍: 백제의 軍政에서 동서남북과 중앙 5方에 있었던 領軍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188)內頭: 백제의 1품관직인 6佐平 중 하나인 內頭佐平으로, 재정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내두좌평을 고이왕 27년(260) 설치했다고 하나, 사비 천도 이후에 좌평제도가 완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莫古解:백제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약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190)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 : 일본어로는 おもにもせ あれにもせ라 읽는다. 191)額田邑: 지금의 大和郡 山市 額田部 北町·寺町·南町 부근이다. 192)熟皮高麗: 일본의 職員令 大藏省조에 “典革一人(掌雜革染作 檢校狛部) 狛部六人(掌雜革染作) 狛戶”라 하였는데, 牛皮·麓皮를 만들었던 수공업자 집단으로 보인다. 193) 意多郞;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데 왜에 온 백제 왕족이 아닐까 추측된다.
|
'우리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요(거란) 정리(2) - 중경, 동경, 요하 (0) | 2015.04.23 |
---|---|
요(거란) 정리 (1) (0) | 2015.04.23 |
기황후의 생애 (0) | 2015.03.10 |
일제가 급히 마무리한 ‘금관총’ 정식 발굴 돌입 (0) | 2015.03.05 |
갈석산(碣石山)이 무엇이고 몇 개이며 어디에 있는가? (0) | 2015.03.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