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 번역본

2015. 3. 10. 02:44우리 역사 바로알기

 

 

 

 

 

       일본서기 번역본| 백제 토론방

자이수 | 조회 367 |추천 0 | 2013.08.13. 19:14 http://cafe.daum.net/alhc/3Cdg/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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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19 흠명천황(欽明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 천국배개광정천황(天國排開廣庭天皇)(흠명천황(欽明天皇))은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계체천황(繼體天皇))의 적자(嫡子)이다. 어머니는 수백향황후(手白香皇后)라고 하는데, 천황이 사랑하여 항상 좌우에 두었다. 천황이 어릴 때 꿈에 어떤 사람이, “천황이 진대진부(秦大津父)258)라는 자를 총애하면, 커서 반드시 천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잠에서 깨어 사람을 보내어 널리 찾으니, 산배국(山背國) 기군(紀郡)의 심초리(深草里)에서 찾아냈다. 성()과 이름이 과연 꿈꾼 바와 같았다. 이에 매우 기뻐하며, 아직까지 없던 꿈이라고 찬탄하였다. 그리고 “그대에게도 무슨 일이 있었는가”라고 물으니, (진대진부(秦大津父)는) “없었습니다. 다만 신()이 이세(伊勢)에 가서 장사하고 돌아오는데, 산에서 두마리의 이리가 서로 싸워서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것에 맞딱뜨렸습니다. 곧 말에서 내려 입과 손을 씻고 기도하며, ‘너는 귀한 신인데 거친 행동을 즐기고 있다. 만일 사냥꾼을 만나면 잡히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여, 억지로 싸움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피묻은 털을 씻어주고 놓아 보내 다같이 생명을 보전하게 하였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반드시 이것이 그 보답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가까이에 두어 섬기게하고 총애함을 날로 새롭게하니, 크게 부요함을 누리게 되었다. 천황이 즉위하자 대장성(大藏省)에 임명되었다.



(원년) 2월 백제인(百濟人) 기지부(己知部)259)가 투화하였다. 왜국(倭國) 첨상군(添上郡) 산촌(山村)에 살게 하니, 오늘날 산촌(山村)의 기지부(己知部)의 선조이다.



(원년) 8월 고구려(高句麗)・백제(百濟)・신라(新羅)・임나(任那)가 함께 사신을 보내고, 아울러 공물을 바쳤다. 진인(秦人), 한인(漢人) 등 여러나라에서 투화하여 온 사람을 불러모아, 국군(國郡)에 안치하고 호적을 편성하였다. 진인(秦人)의 호수(戶數)가 총 7,053호()였다. 대장(大藏)掾260)을 진반조(秦伴造)로 삼았다.



(원년) 9월 을해(乙亥) 초하루 기묘(己卯) 난파축진궁(難波祝津宮)에 행차하였다. 대반대련김촌(大伴大連金村), 허세신도지(許勢臣稻持), 물부대련미여(物部大連尾輿) 등이 따라갔다.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사가 있으면 신라(新羅)를 칠 수 있겠는가”하고 물었다. 물부대련미여(物部大連尾輿) 등이, “적은 군사로는 쉽게 칠 수 없습니다. 지난번 남대적천황(男大迹天皇)(계체천황(繼體天皇)) 6년에 백제(百濟)가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임나(任那)의 상()哆리()・하()哆리()・사타(娑陀)・모루(牟婁)의 네 현()261)을 청하였는데, 대반대련김촌(大伴大連金村)이 표()에서 청한 대로 구하는 곳을 내려 주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의 원망이 여러 해 동안 쌓여 갔으니 가볍게 칠 수 없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때 대반대련김촌(大伴大連金村)은 주길(住吉)의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대고 조정에 나아오지 않았다. 천황은 청해부인(靑海夫人) 구자(勾子)를 보내 은근하게 위문하였다. 대련(大連)은 두려워하여 사죄하면서, “신()이 앓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니라, 지금 여러 신() 등이 신()이 임나(任那)를 멸망시켰다고 말합니다. 때문에 두려워서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장식한 말을 사신에게 주어 후하게 접대하며 경의를 표하였다. 청해부인(靑海夫人)이 사실대로 보고하였다. 명령을 내려, “오랫동안 충성을 다하였으니, 여러 사람의 말을 근심하지 말라”고 하였다. 드디어 허물삼지 않고 총애함이 더욱 깊었다.



(2년) 여름 4월 안라(安羅)262)의 차한기(次旱岐) 이탄해(夷呑奚)・대부손(大不孫)・구취유리(久取柔利)263) 등과 가라(加羅)264)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265), 졸마(卒麻)266)의 한기(旱岐), 산반해(散半奚)267)의 한기(旱岐)의 아들, 다라(多羅)268)의 하한기(下旱岐) 이타(夷他), 사이기(斯二岐)269)의 한기(旱岐)의 아들, 자타(子他)270)의 한기(旱岐) 등이 임나(任那)의 일본부(日本府)의 길비신(吉備臣)[이름이 빠졌다]과 더불어 백제(百濟)에 가서 함께 조칙(詔勅)을 들었다. 백제(百濟)의 성명왕(聖明王)271)이 임나(任那)의 한기(旱岐)들에게, “일본(日本)의 천황이 명령한 바는 오로지 임나(任那)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지금 어떤 계책으로 임나(任那)를 다시 일으키겠는가. 어찌 각기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마음을 받들어 펼치지 않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임나(任那)의 한기(旱岐) 등이, “전에 두세번 신라(新羅)와 더불어 의논하였으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도모하려는 뜻을 다시 신라(新羅)에 이른다 하여도 여전히 대답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마땅히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야 합니다. 임나(任那)를 재건하는 일은 대왕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공경하게 (왕의) 교지(敎旨)를 받드려 하는데 누가 감히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그러나 임나(任那)의 경계는 신라(新羅)와 접해 있어서 탁순(卓淳)272)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라고 말하였다[(탁순(卓淳)) 등이라 함은 㖨기탄(己呑)273), 가라(加羅)를 말한다. 탁순(卓淳) 등의 나라와 같은 패망의 화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성명왕(聖明王)은,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274), 귀수왕(貴首王)275)의 때에, 안라(安羅)・가라(加羅)・탁순(卓淳)의 한기(旱岐) 등이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고 서로 통교하여 친교를 두터이 맺어,276) 자제(子弟)의 나라로 여기고 더불어 융성하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신라(新羅)에게 속임을 당하여 천황을 노엽게 하고 임나(任那)를 한에 사무치게 한 것은 과인의 잘못이다. 나는 깊이 뉘우쳐 하부(下部) 중좌평(中佐平)277) 마로(麻鹵), 성방(城方)278) 갑배매노(甲背昧奴) 등을 보내어 가라(加羅)에 나아가 임나(任那)의 일본부(日本府)에 모여 서로 맹세하게 하였다. 그 후에도 계속 마음을 두고 임나(任那)를 재건하려고 하는 일을 아침 저녁으로 잊은 적이 없었다. 지금 천황이 명령을 내려, ‘속히 임나(任那)를 재건하라’고 말씀하셨다. 이로 말미암아 그대들과 함께 계책을 모의하여 임나(任那) 등의 나라를 세우려고 하니, 잘 생각하여야 한다. 또 임나(任那)의 경계에서 신라(新羅)를 불러, (조칙을) 받들 것인가의 여부를 물어야겠다.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 아뢰고 삼가 교시를 받들자. 만일 사자가 돌아오지 않았을 때 신라(新羅)가 틈을 엿보아 임나(任那)를 침략해 오면 나는 마땅히 가서 구원할 것이니 근심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잘 방비하고 삼가 경계하기를 잊지 말라. 또한 그대들은 말하기를, 탁순(卓淳) 등과 같은 화를 입을까 두렵다고 하였으나, (그것은) 신라(新羅)가 혼자 강하다고 하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㖨기탄(己呑)은 가라(加羅)와 신라(新羅)의 경계에 있어 해마다 공격을 받아 패배하였는데, 임나(任那)도 구원할 수가 없었고, 이로 말미암아 망하게 되었다. 남가라(南加羅)는 땅이 협소하여 불의의 습격에 방비할 수 없었고 의지할 바도 알지 못하여, 이로 인하여 망하였다. 탁순(卓淳)은 위・아래 사람들이 다른 마음을 지녔는데, 군주가 혼자 항복하려고 신라(新羅)에 내응하여, 이 때문에 망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살펴보니 삼국(三國)의 패망은 진실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옛적에 신라(新羅)가 고려(高麗)에 구원을 청하여 임나(任那)와 백제(百濟)를 쳤으나279) 오히려 이기지 못하였는데, 신라(新羅)가 어찌 혼자서 임나(任那)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이 그대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고 마음을 같이하여 천황에게 의지하면 임나(任那)는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기뻐하며 돌아갔다.



(2년) 가을 7월 백제(百濟)는 안라(安羅)의 일본부(日本府)가 신라(新羅)와 더불어 계책을 공모한다는 말을 듣고, 전부(前部) 나솔(奈率)280) 비리막고(鼻利莫古), 나솔(奈率) 선문(宣文), 중부(中部) 나솔(奈率) 목()리眯순(),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 등을 보내[기신(紀臣) 나솔(奈率)이라는 사람은 아마도 기신(紀臣)이 한()의 여자를 얻어 낳은 자로, 백제(百濟)에 머물러 나솔(奈率)이 된 사람일 것이다. 아버지는 알 수 없다. 다른 사람도 모두 이와 비슷하다], 안라(安羅)에 가서 신라(新羅)에 온 임나(任那)의 집사(執事)를 불러 임나(任那)를 세울 것을 도모하게 하였다. 따로 안라(安羅) 일본부(日本府)의 하내직(河內直)이 신라(新羅)와 공모한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가부지비직(加不至費直)・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좌로마도(佐魯麻都) 등()’이라고 하였으나 잘 알 수 없다] 그리고 왕은 임나(任那)에게, “옛적에 우리 선조 속고왕(速古王), 귀수왕(貴首王)이 옛날의 한기(旱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고서 형제가 되었다.281) 이에 우리는 그대를 자제(子弟)로 여기고, 그대는 우리를 부형(父兄)으로 생각하며, 함께 천황을 섬기고 함께 강적에게 항거하며,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왕실을 보전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선조가 엣날에 한기(旱岐)와 화친할 때의 말을 생각하면 해와 같이 밝음이 있다. 그 후 이웃과 삼가 우호를 닦아서 드디어 다른나라와 (관계가) 돈독하게 되었으니, 은혜가 골육보다 더하였다. 처음을 잘하고 끝도 좋아야 한다는 것은 과인이 항상 원하는 바이다. 그런데 무슨 까닭으로 가벼이 헛된 말들을 하고 몇 해 사이에 한탄스럽게 뜻을 잃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옛날 사람들이 ‘후회막급이다’라고 한 말은 바로 이를 두고 이른 것이로구나. 위로 하늘에 다다르고 아래로 지하에 이르기까지 이제 신()에게 맹세컨대, 옛날의 허물을 고치겠으며, 하나도 숨김 없이 행할 바를 밝히겠다. 정성이 신령에 통하고 깊이 자기를 책하는 것은 역시 취할 만한 바가 있다. 듣건대 선대(先代)의 뒤를 계승한 자는 조상이 남긴 궤범을 이어받고, 선조의 업을 번성하게 하여 공훈을 이루는 것을 귀하게 여긴다. 그러므로 지금 선세(先世)의 화친한 우호를 받들고 삼가 천황이 명령한 말에 따라, 신라(新羅)에게 빼앗긴 나라인 남가라(南加羅)와 㖨기탄(己呑) 등을 취하여 본래대로 돌이켜 임나(任那)에 옮기고, 길이 부형(父兄)의 나라가 되어 항상 일본(日本)을 섬길 것이다. 이는 과인이 먹어도 맛이 없고 자도 자리가 편안치 못한 바이다. 지난 일을 뉘우쳐 오늘날을 경계하는 것이 힘써 생각할 바이다. 신라(新羅)가 감언으로 속이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바인데도, 그대들은 망령되이 믿었다가 이미 다른 사람의 속임수에 빠졌었다. 바야흐로 지금 임나(任那)의 경계는 신라(新羅)와 접하고 있으니, 항상 방비를 하여야 한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할 것인가. 속이는 함정에 빠져 국가를 망하게 하며, 남에게 사로잡히게 될까 두려우니, 과인이 이를 생각하면 걱정이 되어 편안히 지낼 수 없다. 저으기 들으니 임나(任那)와 신라(新羅)가 계책을 꾸미는 자리에 벌과 뱀이 괴이함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그것은) 또한 많은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대개 괴이한 조짐은 행동을 경계하는 것이며, 재난과 이변은 사람을 깨우치는 것이다. 곧 이는 하늘이 경계하는 것이고 조상이 징조를 보이는 것이니, 화가 이르른 다음에 후회하고, 멸망한 후에 부흥하기를 생각하여도 누가 미칠 수 있겠는가. 이제 그대가 나를 따라 천황의 명령을 들으면 임나(任那)를 일으킬 수 있으니, 어찌 이루지 못할 것을 걱정하겠는가. 만약 본래의 땅을 길이 보존하고 원래의 백성을 영원히 다스리고 싶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으니,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성명왕(聖明王)이 다시 임나(任那)의 일본부(日本府)에, “천황(天皇)이 명령하여,‘임나(任那)가 멸망하면 너희는 의지할 데가 없어질 것이고, 임나(任那)가 일어나면 너희는 도움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마땅히 임나(任那)를 일으켜 세워 옛날과 같게 하여, 너희의 도움으로 삼고, 백성을 어루만져 기르도록 하라’고 하였다. 삼가 조칙을 받들고 나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슴에 가득차서, 정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任那)를 융성시킬 것을 기약하였다. 영원히 천황을 섬기기를 지난날과 같이 할 것이며, 먼저 앞의 일을 생각한 후에 편안히 쉴 것이다. 이제 일본부(日本府)가 (천황의) 조칙에 따라 임나(任那)를 구하면, 이는 천황이 반드시 칭송하는 바가 될 것이며, 그대 자신도 당연히 포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또한 일본부(日本府)의 경() 등은 오랫동안 임나국(任那國)에 머물러 있고, 신라(新羅)의 경계와 가까이 접하고 있어서, 신라(新羅)의 정세를 역시 알 것이다. (신라(新羅)가) 임나(任那)를 해치고 일본(日本)을 막으려고 모의하는 것은 그 유래가 오래된 것으로 단지 올해만의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감히 움직이지 못하는 것은 가까이는 백제(百濟)를 경계하고, 멀리는 천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신라(新羅)는) 거짓으로 조정(일본(日本))을 섬기고 거짓으로 임나(任那)와 화해했다. 이와 같이 (신라(新羅)가) 임나(任那)의 일본부(日本府)를 기쁘게한 것은 아직 임나(任那)를 빼앗지 못했으므로 거짓으로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이제 그 틈을 염탐하고 그 방비하지 못함을 엿보아,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임나(任那)를) 취하고자 하는 것이다. 천황이 조칙을 내려 남가라(南加羅), 㖨기탄(己呑)을 세우라고 권한 것은 단지 수십년 동안만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신라(新羅)가 한결같이 명을 듣지 않는 것은 경()들도 아는 바이다. 천황의 조칙을 삼가 믿고 임나(任那)를 세우려고 하는 데 어찌 이와 같은가. 경()등이 번번이 감언을 믿고 경솔하게 거짓말에 속아서 임나국(任那國)을 멸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두렵다. 경()들은 그것을 경계하고 남에게 속지 말라”라고 말하였다.



(2년) 가을 7월 백제(百濟)가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 중부(中部) 나솔(奈率) 기련(己連)을 보내어 하한(下韓)282)과 임나(任那)의 정사를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4년 여름 4월 백제(百濟)의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 등이 물러갔다.



(4년) 가을 9월 백제(百濟) 성명왕(聖明王)이 전부(前部) 나솔(奈率) 진모귀문(眞牟貴文), 호덕(護德)283) 기주기루(己州己婁)와 물부(物部) 시덕(施德) 마기모(麻奇牟) 등을 보내어, 부남(扶南)284)의 재물과 노() 2구()를 바쳤다.



(4년) 겨울 11월 정해(丁亥) 초하루 갑오(甲午) 진수련(津守連)을 보내어 백제(百濟)에 명령하기를, “임나(任那)의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百濟)의 군령(郡令)과 성주(城主)285)는 일본부(日本府)에 귀속시켜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조서(詔書)를 가지고 가서 선포하여, “그대가 여러번 표()를 올려 꼭 임나(任那)를 세우겠다고 말한 것이 10여년이 되었다. 표()에서 아뢴 바는 이와 같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였다. 대저 임나(任那)는 그대 나라의 동량(棟梁)이다. 만일 동량이 부러지면 어떻게 집을 짓겠는가. 짐의 걱정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대는 모름지기 빨리 세우도록 하라. 그대가 만약 빨리 임나(任那)를 세운다면, 하내직(河內直)[하내직(河內直)은 이미 윗글에 보인다] 등은 자연히 물러나게 될 것이니,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이 날 성명왕(聖明王)이 조칙을 듣기를 마치고 삼좌평(三佐平)286)과 내두(內頭)287) 및 여러 신하에게, “조칙이 이와 같으니, 또한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하고 두루 물었다. 삼좌평(三佐平)이, “하한(下韓)에 있는 우리 군령(郡令)과 성주(城主) 등은 나오게 할 수 없습니다. 나라를 세우는 일은 빨리 조칙을 따르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4년) 12월 백제(百濟)의 성명왕(聖明王)이 다시 앞서의 조서(詔書)를 군신(群臣)들에게 널리 보이며,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상좌평(上佐平) 사택기루(沙宅己婁), 중좌평(中佐平) 목()리마나(麻那), 하좌평(下佐平) 목윤귀(木尹貴), 덕솔(德率) 비리막고(鼻利莫古)288), 덕솔(德率) 동성도천(東城道天), 덕솔(德率) 목()리眯순(), 덕솔(德率) 국수다(國雖多), 나솔(奈率) 연비선나(燕比善那) 등이 함께 의논하여, “신()들은 품성이 아둔하고 도무지 지략이 없습니다. 그러나 임나(任那)를 세우라고 명령하셨으니, 빨리 칙언을 받들어야 하겠습니다. 이제 임나(任那)의 집사(執事)와 각국의 한기(旱岐)들을 소집하여 함께 계책을 모의하고 표()를 올려 뜻을 말하십시오. 또 하내직(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 등이 여전히 안라(安羅)에 있게 되면 아마도 임나(任那)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표()를 올려 본처(本處)로 옮겨달라고 구하십시오”라고 대답하였다. 성명왕(聖明王)이, “군신(群臣)이 의논한 바가 심히 과인의 마음에 맞는다”하고 말하였다.



(4년 12월) 이 달 (백제(百濟)가) 시덕(施德)289) 고분(高分)을 보내어 임나(任那)의 집사(執事)와 일본부(日本府)의 집사(執事)를 불렀다. 모두, “정월 초하루를 지내고 가서 듣겠다”라고 대답하였다.



5년 봄 정월 백제국(百濟國)이 사신을 보내어 임나(任那)의 집사(執事)와 일본부(日本府)의 집사(執事)를 불렀다. 모두, “신에게 제사지낼 때가 이르렀으니 제사를 마치면 가겠다”라고 대답하였다.



(5년 정월) 이 달 백제(百濟)가 또 사신을 보내어 임나(任那)의 집사(執事)와 일본부(日本府)의 집사(執事)를 불렀다. 일본부(日本府)와 임나(任那)가 모두 집사(執事)를 보내지 않고 지위가 낮은 사람을 보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百濟)가 임나국(任那國)을 세울 것을 함께 모의하지 못하였다.



(5년) 2월 백제(百濟)가 시덕(施德) 마무(馬武), 시덕(施德) 고분옥(高分屋), 시덕(施德) 사나노차주(斯那奴次酒) 등을 임나(任那)에 사신으로 보내어 일본부(日本府)와 임나(任那)의 한기(旱岐) 등에게, “나는 기신(紀臣)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 나솔(奈率) 기련(己連), 물부련(物部連) 나솔(奈率) 용기다(用奇多)를 보내어 천황에게 조회하고 알현하였는데, 미마사(彌麻沙) 등이 일본(日本)에서 돌아와 조서를 선포하여,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일본부(日本府)와 함께 빨리 좋은 계획을 세워 짐의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너희들은 경계하여 다른 사람의 속임에 빠지지 말라’라고 하였다. 또 진수련(津守連)이 일본(日本)에서 와서[『백제본기(百濟本記)』에서는 진수련기마노(津守連己麻奴)跪라 하였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하지 않아 잘 알 수 없다] 조칙을 전하고 임나(任那)의 정사를 물었다. 그러므로 일본부(日本府)와 임나(任那)의 집사(執事)와 함께 임나(任那)의 정사를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려고, 사자를 보내어 부른 것이 세 번이나 되는데 아직도 오지 않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임나(任那)의 정사를 도모할 계획을 함께 의논하여 천황에게 아뢰지 못하고 있다. 이제 진수련(津守連)을 머무르도록 청하고, 따로 빠른 사자로써 상황을 갖추어 천황에게 아뢰고자 한다. 3월 10일에 일본(日本)에 사자를 보내겠다. 이 사자가 도달하면 천황은 반드시 그대들을 문책할 것이다. 그대 일본부(日本府)의 경()과 임나(任那)의 한기(旱岐)들은 각기 사자를 보내어 내가 보내는 사자와 함께 천황이 베푸는 조서를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따로 하내직(河內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하내직(河內直)과 이나사(移那斯)와 마도(麻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방언이므로 정확한 것을 알 수 없다]에게, “옛날부터 지금까지 오직 그대의 악행만을 들어왔다. 그대의 선조들도[『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그대의 선조 나간타갑배(那干陀甲背), 가렵직기갑배(加獵直岐甲背)’라고 하였다. 또한 ‘나기타갑배(那奇陀甲背), 응기기미(鷹奇岐彌)’라고도 하였는데, 방언이므로 잘 알 수 없다] 모두 간악함을 품고 거짓되이 말하였다. 위가가군(爲哥可君)[『백제본기(百濟本記)』에 위가기미(爲哥岐彌)이고 이름은 유비기(有非岐)라고 하였다]이 그 말만을 믿어 국난을 걱정하지 않으며, 내 뜻을 어기고 포악한 일을 마음대로 자행하다가, 이로 말미암아 쫓겨났으니 오로지 그대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대들은 임나(任那)에 와서 살면서 항상 나쁜 짓을 행하였다. 임나(任那)가 나날이 해를 입는 것은 오로지 그대들 때문이다. 그대는 비록 하찮다고 할지 모르나, 비유컨대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다. 그대들이 악행을 저지름으로 말미암아 임나(任那)는 패망할 것이고, 마침내는 바다 서쪽 여러나라의 관가로 하여금 길이 천황의 곁에서 섬기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제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아뢰어 그대들을 옮겨 본래 있던 곳으로 돌려보내도록 청하겠다. 그대 또한 가서 들으라”라고 말하였다.

또 일본부(日本府)의 경()과 임나(任那)의 한기(旱岐) 등에게, “임나국(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천황의 위엄을 빌리지 않고서는 누가 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천황에게 가서 군사를 청하여 임나국(任那國)을 도우려 한다. 병사들의 양식은 내가 운반해야 하겠으나, 군사의 수를 아직 모르고 군량을 운반할 곳도 역시 혼자 결정하기 어렵다. 한 군데에 모여서 같이 가부(可否)를 의논하고, 그 좋은 것을 택하여 천황에게 아뢰기를 원하나, 여러 번 불러도 그대들이 오지 않아 의논할 수 없다”라고 말하였다.

일본부(日本府)가 답하여, “임나(任那)의 집사(執事)가 부름에 나아가지 않은 것은 우리가 보내지 않았던 까닭으로 가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천황에게 아뢰기 위하여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 ‘짐이 인기신(印奇臣)[방언이므로 알 수 없다]을 신라(新羅)에 보내고, 진수련(津守連)을 백제에 보내겠다. 그대는 칙을 들을 때를 기다리고, 혼자 수고로이 신라(新羅)・백제(百濟)에 가지 말라’고 하셨다 합니다. 조칙이 이와 같았는데 마침 인기신(印奇臣)이 신라(新羅)에 사신으로 간다는 것을 듣고, 좇아 보내어 천황이 말씀하신 바를 물었습니다. 조칙에는 ‘일본부(日本府)의 신()과 임나(任那)의 집사(執事)는 신라(新羅)에 가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하였고, 백제(百濟)에 가서 명을 들으라는 말씀은 없었습니다. 후에 진수련(津守連)이 이곳을 지날 때, ‘지금 내가 백제(百濟)에 파견되는 것은 하한(下韓)에 있는 백제(百濟)의 군령(郡令)・성주(城主)를 내보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만을 들었고, 임나(任那)와 일본부(日本府)가 백제(百濟)에 모여서 천황의 칙언을 들으라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않았으니 임나(任那)의 뜻이 아닙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에 임나(任那)의 한기(旱岐)들이, “사신이 와서 부르므로 곧 가려고 하였으나 일본부(日本府)의 경()이 떠나 보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가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임나(任那)를 세우려고 자세한 것까지도 지시하셨습니다. 이를 보고 기뻐함은 이루 다 말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5년(544) 3월 백제에서 나솔(奈率)290) 아()乇득문(得文)‧허세(許勢)의 나솔(奈率) 기마(奇麻)‧물부(物部)의 나솔(奈率) 기비(奇非)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려 말하였다.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나솔(奈率) 기련(己連) 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조서(詔書)291)를 받들어 ‘너희들은 저 일본부(日本府)와 함께 좋은 계책을 꾀하여 빨리 임나(任那)292)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니, 너희는 경계하여 저들(신라)에게 속지 말라’고 하였습니다293). 또 진수련(津守連) 등이 신의 나라에 이르러 칙서(勅書)를 받들어 임나(任那)를 세우는 일을 물었습니다. 삼가 칙()에 따라 감히 시간을 지체하지 못하고 함께 도모하고자 하여 사신을 보내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소오호파신(召烏胡跛臣)을 보내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적신(的臣)인 듯하다.] 일본부(日本府)와 임나(任那)를 불렀으나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이미 왔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294)’라고 말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므로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부르니 모두 대답하기를 ‘이미 제사지낼 때가 되었으니 지나간 다음에 가고자 한다’라고 말하였으나, 오랫동안 나아오지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사신을 보내어 불렀는데, 미천한 자를 보낸 까닭으로 함께 도모하지 못하였습니다. 무릇 임나(任那)가 부름에 나아오지 않은 것은 본심이 아니라, 아현이나사(阿賢移那斯)‧좌노마도(佐魯麻都)295)[두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윗 문장에 보인다.]가 간교하게 속여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무릇 임나(任那)는 안라(安羅)296)를 형()으로 삼아 오직 그 뜻을 좇고, 안라인(安羅人)들은 일본부(日本府)를 하늘로 삼아 오직 그 뜻을 따르므로[『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안라(安羅)를 아버지로 삼고 일본부(日本府)로써 근본을 삼았다고 하였다.], 이제 적신(的臣)·길비신(吉備臣)·하내직(河內直) 등은 모두 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의 지휘를 좇았을 따름입니다. 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는 비록 소가(小家)의 미천한 자이나 일본부(日本府)의 정치를 오로지 제멋대로 하며 또 임나(任那)를 제압하여 (길을) 막고 (사신을) 보내지 않았습니다297). 이로 말미암아 함께 꾀하여 천황(天皇)에게 답변을 아뢸 수 없었으므로, 기마노(己麻奴)跪298)[아마도 진수련(津守連)인 듯하다.]가 머무르고 있었는데 특별히 나는 새와 같이 빠른 사신을 보내어 천황(天皇)에게 받들어 아뢰기를, ‘만일 두 사람[두 사람은 이나사(移那斯)와 마도(麻都)이다.]이 안라(安羅)에 있어 간특하고 아첨하는 일을 많이 행하면 임나(任那)도 세우기 힘들 것이며, 바다 서쪽의 여러 나라도 반드시 섬길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이 두 사람을 옮겨 그 본래 있었던 곳으로 돌아가도록 하고 일본부(日本府)와 임나(任那)에게 조칙을 내려 임나(任那) 건설을 도모하도록 하십시오. 그러므로 신이 나솔(奈率) 미마사(彌麻沙)·나솔(奈率) 기련(己連) 등을 기마노(己麻奴)跪에게 딸려 보내어 표를 올립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적신(的臣) 등()[등()이라 한 것은 길비제군신(吉備弟君臣)·하내직(河內直) 등을 말한다.]이 신라를 왕래한 것은 짐의 뜻이 아니다. 옛날 인지미(印支彌)[자세하지 않아 모른다.]와 아로한기(阿鹵旱岐)가 있을 때 신라의 핍박을 받아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지 못하였는데, 백제는 길이 멀어 그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다. 적신(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함으로 말미암아 바야흐로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릴 수 있게 되었다고 짐은 일찍이 들었다. 만일 이미 임나(任那)를 세웠다면 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는 자연히 물러났을 것이니 어찌 족히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엎드려 이 조칙을 듣고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며, 신라가 천조를 속이고 칙명을 따르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신라는 봄에 탁순(啄淳)299)을 취하고 이어 우리의 구례산(久禮山)300) 수비병을 내쫒아 드디어 점유하였습니다. 안라(安羅)에 가까운 곳은 안라가 논밭을 일구어 씨를 뿌렸고, 구례산(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사라(斯羅)301)가 논밭을 일구고 씨를 뿌렸는데, 각각 경작하여 서로 침탈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가 남의 경계를 넘어 경작하다가 6월에 도망하였습니다. 인지미(印支彌)의 뒤에 온 허세신(許勢臣)의 때에는[『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우리가 인지미(印支彌)를 머무르게 한 뒤에 온 기()洒신()의 때”라고 하였으나 모두 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였습니다. 안라(安羅)는 신라의 핍박을 받아 농사짓지 못함을 말하지 않았는데, 신이 일찍이 듣건대 신라는 매년 봄과 가을에 군사와 무기를 많이 모아놓고 안라(安羅)와 하산(荷山)302)을 습격하고자 한다 하며, 또는 가라(加羅)를 습격하려 한다고 들었습니다303). 최근에 서신을 얻고서 문득 군대를 보내어 임나(任那)를 굳게 지키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자주 날랜 군사를 보내어 필요할 때마다 가서 구하였습니다. 이로써 임나(任那)가 때에 따라 농사를 짓고 신라가 감히 침범하여 핍박하지 못하였습니다. ‘백제는 길이 멀어 능히 위급함을 구하지 못하였는데, 적신(的臣) 등이 신라를 왕래하면서부터 바야흐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라고 아뢰었으니, 이는 위로는 천조를 속이는 것으로서 매우 간특한 일입니다. 사실의 명확함이 이와 같은데도 오히려 천조를 속이니 그 밖에도 거짓됨이 필시 많을 것입니다. 적신(的臣) 등이 여전히 안라(安羅)에 거주하고 있다면 임나의 나라를 건립하기는 어려울 것이니, 마땅히 일찍 물러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신이 매우 두려워 하는 것은 좌노마도(佐魯麻都)가 비록 한()의 출신으로서 지위가 대련(大連)에 이르러 일본 집사(執事)의 사이에 섞여 명예롭고 권세있는 자리에 들어섰지만, 이제는 오히려 신라 나마례(奈麻禮)304)의 관()을 썼다는 것입니다. 곧 몸과 마음으로 귀부하여 다른 사람에게 드러나기 쉽습니다. 행한 바를 자세히 보면 도무지 두려워 함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전에 악행을 아뢰고 모두 글을 갖추어 보고하였습니다. 아직도 다른 나라의 관복을 입고 날마다 신라의 땅에 나아가 공()·사()의 일로 래왕(來往)하면서 도대체가 꺼려하지 않습니다. 무릇 탁국(啄國)의 멸망은 다른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탁국(啄國)의 함파한기(函跛旱岐)305)가 가라국(加羅國)306)에 두 마음을 품어 신라에 내응하고 가라(加羅)는 밖에서 싸움으로써 이로 말미암아 망한 것입니다307). 만일 함파한기(函跛旱岐)로 하여금 내응하지 못하게 하였다면 탁국(啄國)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반드시 망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탁순(啄淳)의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였습니다. 만일 탁순국(啄淳國)의 왕이 신라에 내응하여 적들을 불러들이지 않았다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러 나라가 패망하게 된 화근을 살펴 보면 모두 안에서 응하여 두 마음을 품은 자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이제 마도(麻都) 등이 신라에 마음을 두어 드디어는 그 나라의 옷을 입고 아침 저녁으로 내왕하면서 속으로 간악한 마음을 굳혀왔습니다. 이에 임나(任那)가 이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할까 두렵습니다. 임나(任那)가 만일 멸망한다면 신의 나라가 고립되어 위태할 것이니, 조알(朝謁)하고자 생각하나 어찌 다시 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황께서는 깊이 살피시고 멀리 헤아리시어, 속히 본래 있었던 곳으로 옮기셔서 임나(任那)를 안정시키십시오.”

겨울 10월 백제의 사신 나솔(奈率) 득문(得文)‧나솔(奈率) 기마(奇麻) 등이 사행을 마치고 귀국하였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겨울 10월 나솔(奈率) 득문(得文)‧나솔(奈率) 기마(奇麻) 등이 일본(日本)으로부터 돌아와 ‘하내직(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이에 대한 칙은 없었다’고 말하였다”라 하였다.]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日本府) 신()과 임나(任那) 집사(執事)를 불러, “천황에게 조알하기 위하여 보낸 나솔(奈率) 득문(得文)‧허세(許勢)의 나솔(奈率) 기마(奇麻)‧물부(物部)의 나솔(奈率) 기비(奇非) 등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제 일본부(日本府) 신()과 임나국(任那國) 집사(執事)는 마땅히 와서 칙()을 듣고 함께 임나(任那)의 문제를 논의해야 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일본(日本)의 길비신(吉備臣), 안라(安羅)의 하한기(下旱岐) 대부손(大不孫)과 구취유리(久取柔利), 가라(加羅)의 상수위(上首位) 고전해(古殿奚)‧졸마군(卒麻君)‧사이기군(斯二岐君)‧산반해군(散半奚君)의 아이, 다라(多羅)308)의 이수위(二首位) 흘건지(訖乾智), 자타한기(子他旱岐), 구차한기(久嗟旱岐)가 이에 백제에 나아왔다. 이 때 백제왕 성명(聖明)309)이 대략 조서(詔書)를 보이며, “내가 나솔(奈率) 미마좌(彌麻佐)‧나솔(奈率) 기련(己連)‧나솔(奈率) 용기다(用奇多) 등을 보내어 일본에 조공하였는데, (천황이) 조칙을 내려 ‘조속히 임나(任那)를 건설하라’고 하였다. 또 진수련(津守連)이 칙을 받들어 임나(任那)를 만드는 일을 물으므로 (사신을) 보내 (그대들을) 불렀다. 마땅히 어떻게 해야 임나(任那)를 세울 수 있겠는가. 각각 자신의 계책을 말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였다. 길비신(吉備臣)‧임나한기(任那旱岐) 등이 “무릇 임나국(任那國)을 세우는 일은 오직 대왕에게 달려 있습니다. 왕을 따르고자 하니 모두 갖추어 아뢰어 (천황의) 칙()을 듣도록 합시다”라고 말하였다. 성명왕(聖明王)이 이들에게 일러, “임나(任那)라는 나라는 우리 백제와 예로부터 자제(子弟)가 되기를 약속하였다. 이제 일본부(日本府) 인기미(印岐彌)[임나(任那)에 있던 일본(日本) 신하의 이름이다.]가 이미 신라를 토벌하고 다시 장차 우리(백제)를 치려고 하며, 또 신라의 허망한 거짓말을 즐겨 듣는다. 무릇 인지미(印支彌)를 임나(任那)에 보낸 것은 본래 그 나라를 침탈하여 해롭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다.[자세하지 않아 모른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신라는 무도하며 약속을 어기고 신의를 거스려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충직한 나라를 속히 회복코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도리어 후회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신을 보내어 (일본부(日本府)의 신()과 임나(任那)의 집사(執事)를) 오게 하여 함께 은조(恩詔)를 받들어, 임나(任那)의 나라를 일으켜 맥을 잇고 옛날처럼 길이 형제가 되기를 바랬다. 가만히 듣건대 신라(新羅)‧안라(安羅) 두 나라 사이에는 큰 강이 있어310) 적을 방비하기 좋은 곳이라 한다. 내가 이를 차지하여 6성을 수축하려고311), 삼가 천황에게 3천 병사를 청하여 매 성마다 5백명씩 배치하고 아울러 우리 병사들이 (신라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지 못하도록 하려는데, 걱정스러운 것은 구례산(久禮山)의 5성()이 거의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였다는 점이다. 탁순(卓淳)의 나라는 또한 다시 부흥시켜야 할 것이니, 청한 병사는 내가 옷과 식량을 지급할 것이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 하는 계책이 첫째이다. 오히려 남한(南韓)312)에 군령(郡令)과 성주(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을 거스려 공조(貢調)의 길을 차단하고자 하는 것이겠는가. 다만 바라는 바는 많은 어려움을 이기고 강적(고구려)을 물리치려는 것이니, 무릇 그 흉칙한 무리들이 누구인들 부용하려고 꾀하지 않겠는가. 북쪽의 적(고구려)은 강대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니, 만일 남한(南韓)에 군령(郡令)‧성주(城主)를 설치하여 방호시설을 수리하지 않는다면 이 강적을 방어할 수 없을 것이며, 또한 신라를 제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들을 두어 신라를 공격‧핍박하여 임나를 위로하고 휼문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을 당해 조빙할 수 없을까 두렵다. 이를 천황에게 주청하고자 하니 그 책략의 둘째이다. 또 길비신(吉備臣)‧하내직(河內直)‧이나사(移那斯)‧마도(麻都)가 오히려 임나국(任那國)에 있기 때문에, 천황이 비록 조칙을 내려 임나(任那)를 세우라 하였으나 이를 시행할 수 없었다. 이 4명을 옮겨 각각 그 본읍(本邑)에 돌려보낼 것을 천황에게 아뢰어 청하는 것이 그 계책의 셋째이다. 마땅히 일본(日本) 신()‧임나(任那) 한기(旱岐) 등과 더불어 모두 받들어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사뢰고 은조(恩詔)를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길비신(吉備臣)과 한기(旱岐) 등이, “대왕(大王)이 말한 세 가지 책략은 또한 우리의 뜻과 같을 뿐입니다. 이제 돌아가 일본(日本) 대신(大臣)[임나(任那)에 있는 일본부(日本府)의 대신(大臣)을 일컫는다.], 안라왕(安羅王)‧가라왕(加羅王)에게 공경히 아뢰고 모두 사신을 보내어 함께 천황에게 주청하기를 원합니다. 이는 진실로 천년에 한번 올 정도의 기회로,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계획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6년 봄 3월 선신(膳臣)313) 파제편(巴提便)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여름 5월 백제가 나솔(奈率) 기()릉‧나솔(奈率) 용기다(用奇多)‧시덕(施德) 차주(次酒)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가을 9월 백제가 중부(中部) 호덕(護德)314) 보제(菩堤)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오()나라의 재화(財貨)를 일본부(日本府)의 신()과 여러 한기(旱岐)에게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이 달에 백제가 장육불상(丈六佛像)315)을 만들어 원문(願文)을 지었는데, “대개 듣건대 장육불(丈六佛)을 만들면 공덕(功德)이 매우 크다고 합니다. 이제 공경히 (이를) 만드니 이 공덕으로 천황께서 매우 훌륭한 덕()을 얻으시고 천황께서 다스리시는 미이거국(彌移居國)316)이 모두 복() 받기를 원합니다. 또한 하늘 아래 모든 중생들이 모두 해탈하기를 원하여, 이를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겨울 11월 선신(膳臣) 파제편(巴提便)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신이 사신으로 파견되자 처자도 뒤따라 백제의 바닷가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빈()은 바닷 가이다.] 해가 저물었으므로 머물러 숙박하였는데, 아이가 홀연히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날 밤 큰 눈이 내려 새벽녘에서야 비로소 찾아나서니 호랑이 발자국이 연이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이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고 찾아나서 바위 동굴에 이르렀는데, 칼을 빼어 ‘삼가 왕의 명을 받들어 뭍과 바닷길에 수고하고 비바람을 맞으며 돌아다니느라 어려웠으며, 풀섶을 깔고 가시와 함께 잤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여 아비의 업을 잇게 하고자 한 것이었다. 오직 네가 위맹한 신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한 가지일 것이다. 어젯 밤에 아이가 없어져서 뒤쫓아 찾아 나서 이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는 것은 두렵지 아니하므로 원수를 갚고자 왔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을 벌려 물려고 하니, 파제편(巴提便)이 갑자기 왼손을 빼어 그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 해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12월 갑오에 고려국(高麗國) 세군(細群)과 麤군()이 궁문(宮門)에서 싸웠는데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세군(細群)이 패하고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자 세군(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아 죽였다317). 무술에 狛국()의 향강상왕(香岡上王)318)이 죽었다319)”라고 하였다.]



7년 봄 정월 갑진(甲辰) 초하루 병오(丙午) 백제의 사신 중부(中部) 나솔(奈率) 기련(己連)320)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이에 좋은 말 70필과 배 10척을 내려 주었다.

여름 6월 임신(壬申) 초하루 계미(癸未) 백제가 중부(中部) 나솔(奈率) 약엽례(掠葉禮) 등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이 해 고려(高麗)가 크게 어지러워 무릇 싸우다 죽은자가 2,000여 명이었다321).[『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고려(高麗)가 정월 병오에 중부인(中夫人)의 아들을 왕으로 세웠는데 나이 8살이었다322). 狛왕()에게는 세 부인(夫人)이 있었는데 정부인(正夫人)은 아들이 없었다. 중부인(中夫人)이 세자(世子)를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가 麤군()이었다. 소부인(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는데 그의 외할아버지는 세군(細群)이었다. 狛왕()(고구려왕)의 질병이 심해지자 세군(細群)과 麤군()이 각각 중부인(中夫人)과 소부인(小夫人)의 아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세군(細群)의 죽은 자가 2,000여 명이었다”라고 하였다323).]



8년 여름 4월 백제가 전부(前部)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나솔(奈率) 기마(奇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그리고 하부(下部)의 동성자언(東城子言)을 보내어 덕솔(德率) 문휴마나(汶休麻那)를 교대하게 하였다.



9년 봄 정월 계사(癸巳) 초하루 을미(乙未) 백제의 사신 전부(前部) 덕솔(德率) 진모선문(眞慕宣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청하는 구원병을 반드시 보내어 구원할 것이니, 마땅히 빨리 가서 왕에게 보고하라”고 하였다.

여름 4월 임술(壬戌) 초하루 갑자(甲子) 백제가 중부(中部) 간솔(杆率) 약엽례(掠葉禮) 등을 보내어 “덕솔(德率) 선문(宣文) 등이 칙을 받고 신()의 나라에 이르러 ‘청하는 구원병을 때에 맞춰 보내겠다’는 말을 전하였습니다. 삼가 은혜로운 조칙을 받고 기쁘고 즐겁기 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마진성(馬津城)의 전투에서[정월 신축에 고려(高麗)가 군대를 이끌고 마진성(馬津城)을 포위하였다.324)] 사로잡은 포로가 ‘(고려가 마진성(馬津城)을 공격한 것은) 안라국(安羅國)과 일본부(日本府)가 불러 들여 벌줄 것을 권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사정으로 미루어 상황을 보더라도 진실로 서로 비슷합니다. 그러나 그 말을 밝히고자 하여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으므로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공하신 천황(가외천황(可畏天皇))께서[서번(西蕃)들은 일본 천황을 모두 황공하신 천황(가외천황(可畏天皇))이라 일컫는다.] 먼저 상황을 살피기 위해 청했던 구원병을 잠시 멈추시고 신()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법식에 따라 올린 글을 보고 근심하는 바를 살펴보았다. 일본부(日本府)와 안라(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것은 짐이 또한 매우 싫어하는 바이다. 또 그들이 몰래 고려에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스스로 보냈을 것이지만 명하지 아니 하였는데 어떻게 갔겠는가. 원하건대 왕은 흉금을 터놓고 안심하여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 앉히고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임나(任那)와 함께 지난번의 칙에 따라 힘을 다하여 모두 북쪽의 적을 막고 각각 봉토를 지키라. 짐이 마땅히 약간의 사람를 보낼 것이니 안라(安羅)가 도망한 빈 땅을 채우도록 하라”고 하였다.

6월 신유(辛酉) 초하루 임술(壬戌)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칙을 내려, “덕솔(德率) 선문(宣文)이 돌아 간 후에 잘 도착하였으며,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너희 나라는 狛적()(고구려)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는데, 마땅히 임나(任那)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막도록 하라”고 하였다.

윤7월 경신(庚申) 초하루 신미(辛未) 백제의 사신 약엽례(掠葉禮)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갔다.

겨울 10월 370명을 백제에 보내어 득이신(得爾辛)325)에 성을 쌓는 것을 도왔다.



10년 여름 6월 을유(乙酉) 초하루 신묘(辛卯) 장덕(將德)326) 구귀(久貴)‧고덕(固德)327) 마차문(馬次文) 등이 사행을 마치고 돌아 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칙을 내려 “연나사(延那斯)‧마도(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고려(高麗)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며, 청한 군사는 청원에 따라 멈추겠다”라고 하였다.



11년 봄 2월 신사(辛巳) 초하루 경인(庚寅)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3월 12일 신유에 일본의 사신 아비다(阿比多)가 배 세 척을 거느리고 도성(都城) 아래에 이르렀다”고 하였다.] “짐이, 시덕(施德) 구귀(久貴)‧고덕(固德) 마진문(馬進文) 등이 올린 표()의 뜻에 따라 하나하나 교시하였으니,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자세하게 생각과 마음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대시두(大市頭)가 돌아 온 뒤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지만, 이제 다만 보고한 말을 밝히고자 하여 사신을 보낸다. 또 다시 짐이 듣건대 나솔(奈率) 마무(馬武)는 왕의 아끼는 신하로서 위의 말을 받아 아래에 전하는데 왕의 마음에 매우 흡족하도록 하며 왕을 잘 보좌한다고 한다. 만일 국가가 무사하여 오랫동안 관가(官家)328)가 되어 길이 천황을 받들려고 한다면 마땅히 마무(馬武)를 대사(大使)로 삼아 조공토록 하라”고 하였다. 다시 조칙을 내려 “짐이 듣건대 북쪽의 적이 강하고 사나우므로 화살 30구()329)를 내리니 한 곳 정도는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여름 4월 경진(庚辰) 초하루 백제에 있는 일본왕의 사람이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백제본기(百濟本記)』에는 “4월 1일 경진에 일본(日本) 아비다(阿比多)가 돌아갔다”고 하였다.] 백제왕 성명(聖明)이 왕의 사람에게 “임나(任那)의 일은 칙을 받들어 굳게 지키고, 연나사(延那斯)‧마도(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인지와 않을 것인지를 오로지 칙에 따르겠다”라 말하고, 고려노(高麗奴) 6구()를 바치고, 따로 왕의 사람에게 노() 1구()를 주었다.[모두 이림(爾林)330)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노()이다.]

을미(乙未) 백제가 중부(中部) 나솔(奈率) 구근(久斤)‧하부(下部) 시덕(施德) 작간나(灼干那) 등을 보내어 狛(고구려)의 포로 10구()를 바쳤다.



12년 봄 3월 보리 씨앗 1,000곡()을 백제왕에게 내려 주었다.

이 해 백제 성명왕(聖明王)이 몸소 군사 및 두 나라의 병사를 거느리고(두 나라는 신라(新羅)‧임나(任那)를 말한다) 고려(高麗)를 정벌하여 한성(漢城)의 땅을 차지하였다331). 또 진군하여 평양(平壤)332)을 토벌하였는데, 무릇 옛 땅 6군을 회복하였다333).



(권 19 흠명천황(欽明天皇))

13년(552) 5월 무진(戊辰) 초하루 을해(乙亥) 백제(百濟)‧가라(加羅)‧안라(安羅)가 중부(中部) 덕솔(德率) 목()리금돈(今敦)‧하내부(河內部)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을 보내어 “고려(高麗)가 신라(新羅)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임나(任那)를 멸하려고 도모합니다.334) 그러므로 삼가 구원병을 청해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천황의 명령에 따르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칙을 내려 “지금 백제왕(百濟王)‧안라왕(安羅王)‧가라왕(加羅王)이 일본부(日本府)의 신하들과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것을 다 들었다. 역시 임나(任那)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하나로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와 같이 한다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것이며 황공하신 천황의 영()에게 도움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겨울 10월 백제(百濟) 성명왕(聖明王)[다른 이름은 성왕(聖王)이다]이 서부(西部)의 희씨(姬氏) 달솔(達率)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 등을 보내어 석가불김동상(釋迦佛金銅像) 1구()와 번개(幡蓋)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바쳤다335). 따로 표()를 올려 (불법(佛法)을) 유통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입니다. 이해하기 어렵고 들어가기도 어려우니,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라도 오히려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법은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는 복덕(福德)과 과보(果報)를 생겨나게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위 없는 보제(菩提)를 이루게 하니, 비유하자면 사람이 수의보(隨意寶)를 품고 있으면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뜻대로 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오묘한 법의 보배도 그러하니 기원한 것이 뜻대로 되어 부족한 바 없습니다. 또 멀리 천축(天竺)으로부터 삼한(三韓)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에 따르고 받들어 지녀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百濟)왕 신() (성())명()은 삼가 배신(陪臣) 노리사치계(怒唎斯致契)를 보내 황제의 나라에 받들어 전하니, 기내(畿內)에 유통하시어 부처가 ‘나의 법이 동쪽으로 흘러갈 것이다’라고 수기(授記)한 것을 이루십시오”라고 하였다. 이 날 천황은 표를 보고 뛸듯이 기뻐하며 사신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예로부터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을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짐이 혼자 결정할 수 없다”라 이르고,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서쪽 번국이 바친 불상은 모습이 단아하고 엄숙하다. 일찍이 전혀 없었던 것이니, 예배해야 되겠는가 아닌가”라고 물었다. 소아대신(蘇我大臣) 도목숙(稻目宿)禰가 “서쪽 번국 여러 나라가 한결같이 모두 예배하는데, 풍추(豊秋)336) 일본(日本)이 어찌 홀로 거스리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물부(物部) 대련미여(大連尾輿)‧중신련겸자(中臣連鎌子)가 “우리나라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은 항상 천지(天地) 사직(社稷)의 180신()을 제사지내고 절하여 섬긴 때문인데, 바야흐로 이제 바꾸어 번국의 신을 섬긴다면 국신(國神)의 노여움을 부를까 두렵습니다”라고 함께 아뢰었다. 천황이 “원하는 사람인 도목숙(稻目宿)禰에 맡겨 시험삼아 예배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대신이 무릎 꿇고 받아 기뻐하며 소간전(小墾田)의 집에 안치하고 삼가 출세간(出世間)의 업()을 닦아 인()으로 삼았으며, 향원(向原)의 집을 깨끗한 마음으로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죽게 되었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많아졌으나 치료할 수 없었다. 물부(物部) 대련미여(大連尾輿)·중신련겸자(中臣連鎌子)가 함께 “지난날 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으시더니 이렇게 병들어 죽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제 오래지 않아 바로 돌이킨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불상을) 빨리 던져 버려 삼가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라 아뢰었다. 천황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유사(有司)가 이에 불상을 난파(難波)의 굴강(堀江)에 던져 버리고, 또 가람에 불을 놓으니, 다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337). 이 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이 없었는데 갑자기 대전(大殿)에서 불이 났다.

*이 해 백제(百濟)가 한성(漢城)과 평양(平壤)을 버렸다338). 이로 말미암아 신라(新羅)가 한성에 들어가 살았으니339), 현재 신라(新羅)의 우두방(牛頭方)·니미방(尼彌方)이다[지명은 자세하지 않다].



14년(553) 봄 정월 갑자(甲子) 초하루 을해(乙亥) 백제(百濟)가 상부(上部)의 덕솔(德率) 과야차주(科野次酒)·간솔(杆率) 예색돈(禮塞敦) 등을 보내 군사를 청했다.

*무인(戊寅) 백제(百濟)의 사신인 중부(中部)의 간솔(杆率) 목()리금돈(今敦)과 하내부(河內部)의 아사비다(阿斯比多) 등이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6월 내신(內臣)[이름은 빠져 있다]을 백제(百濟)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좋은 말 2필, 동선(同船)340) 2척(), 활 50장(), 화살 50구()를 주었다. 조칙을 내려 “청한 군대는 왕이 바라는 바에 따르겠다”고 하고, 다른 조칙을 내려 “의박사(醫博士)·역박사(易博士)·역박사(曆博士) 등은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사람들은 바로 교대할 때가 되었으니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341). 또 복서(卜書)·역본(曆本)과 여러가지 약물(藥物)도 보내라”고 하였다.

가을 7월 신유(辛酉) 초하루 갑자(甲子) 장구궁(樟勾宮)에 행차하였다. 소아대신(蘇我大臣) 도목숙(稻目宿)禰가 명령을 받들어 왕진이(王辰爾)342)를 보내 선부(船賦)를 세어 기록하였다. 바로 왕진이(王辰爾)를 선장(船長)으로 삼고 성을 선사(船史)라 내려 주었으니, 오늘날 선련(船連)의 선조이다.

8월 신묘(辛卯) 초하루 정유(丁酉) 백제(百濟)가 상부(上部)의 나솔(奈率) 과야신라(科野新羅), 하부(下部)의 고덕(固德) 문휴대산(汶休帶山) 등을 보내 표를 올려 “지난 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내신(內臣) 덕솔(德率) 차주(次酒)·임나(任那) 대부(大夫) 등을 보내 바다 밖 여러 미이거(彌移居)(みやけ: 관가(官家))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은혜로운 조칙을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들으니 신라(新羅)가 狛국()(고구려)과 함께 모의하여 ‘백제(百濟)와 임나(任那)가 자주 일본(日本)에 나아가니, 생각컨대 군사를 빌려 우리나라를 치려는 듯하다.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은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것과 같을 것이다. 일본(日本)의 군대가 떠나기 전에 안라(安羅)를 공격해 빼앗아 일본과의 통로를 끊자’라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획이 이와 같으니, 신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을 깊이 품었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천황께서 빨리 전군(前軍)과 후군(後軍)을 보내 서로 이어 와서 구원해주기를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밖 미이거(彌移居)를 굳게 지키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늦을 것입니다. 보낸 군대가 신의 나라에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신이 마땅히 공급할 것이고, 임나(任那)에 도착하여도 다시 이와 같을 것입니다. 만약 (임나(任那)가) 공급을 감당하지 못하면 반드시 신이 도와 충당하여 부족하고 모자라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따로 적신(的臣)이 삼가 천황의 조칙을 받들고 와서 신의 나라를 위로하고 일찍부터 늦게까지 쉬지 않고 모든 일에 힘썼습니다. 이 때문에 바다 밖의 번()들은 그의 훌륭함을 칭송하여 ‘틀림없이 영원히 바다 밖을 깨끗이 할 것이다’라 하였는데, 불행하게도 죽었다 하니 깊이 추모하여 가슴이 아픕니다. 이제 임나(任那)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천황께서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任那)를 진정시키기 바랍니다. 또 바다 밖의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한데,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것을 천황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으니, 천황께서 활과 말을 많이 내려 주시기 바랍니다”라 하였다.

겨울 10월 경인(庚寅) 초하루 기유(己酉) 백제(百濟)의 왕자 여창(餘昌)[명왕(明王)의 아들 위덕왕(威德王)343)이다]이 나라 안의 모든 군대를 내어 고려국(高麗國)을 향했는데344), 백합(百合)의 들판에 보루를 쌓고 군사들 속에서 함께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커다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는 드물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얼마 후 갑자기 북치고 피리부는 소리가 들리니 여창(餘昌)이 크게 놀라 북을 쳐 대응하였다. 밤새 굳게 지키다가 새벽이 되어 일어나 텅 비었던 들판을 보니 군대가 푸른 산처럼 덮여 있었고 깃발이 가득하였다. 때마침 날이 밝자 목에 경개(頸鎧)를 입은 자 1기(), 징을 꼽은 자[鐃자는 자세하지 않다] 2기(), 표범 꼬리를 끼운 자 2기() 모두 합해 5기()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있다’고 하였는데 어찌 맞이하는 예를 행하지 않는가. 우리와 더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미리 알고자 한다”고 하였다. 여창이 “성()은 (고려(高麗) 왕실과) 동성(同姓)이고 관위는 간솔(杆率)이며 나이는 29세이다”라고 대답하였다. 백제(百濟)편에서 반문하니 또한 앞의 법식대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표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百濟)는 고려(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끝에 찔러 들고 돌아와 군사들에게 보이니, 고려(高麗)군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군(百濟軍)이 환호하는 소리에 천지가 찢어질 듯하였다. 다시 그 부장(副將)이 북을 치며 달려 나아가 고려왕(高麗王)345)을 동성산(東聖山)346)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15년(554) (봄 정월 무자(戊子) 초하루) 병신(丙申) 백제(百濟)가 중부(中部)의 목()리시덕문차(施德文次), 전부(前部)의 시덕(施德) 왈좌분옥(曰佐分屋) 등을 축자(筑紫)에 보내 내신(內臣)·좌백련(佐伯連) 등에게 묻기를 “덕솔(德率) 차주(次酒)·간솔(杆率) 색돈(塞敦)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신 등은[신 등은 내신(內臣)을 말한다]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고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말할 뿐 자세하지 않았습니다. 오는 것입니까 아닙니까. 또 군대의 수는 얼마입니까. (자세한 내용을) 약간이나마 들어 미리 군영(軍營)을 쌓고자 합니다”라 하였다. 또 따로 ‘이제 들으니 황공하옵신 천황의 조칙을 받들어 축자(筑紫)에 나와서 보내줄 군대를 살펴보내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은 기쁨은 이루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보다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줄 군대를 정월에 도착하도록 해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이에 내신(內臣)이 명령을 받들어 “바로 도와줄 군대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2월 백제(百濟)가 하부(下部)의 간솔(杆率) 장군(將軍) 삼귀(三貴)와 상부(上部)의 나솔(奈率) 물부오(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청했다. 그리고 덕솔(德率) 동성자막고(東城子莫古)를 바쳐 전에 번()을 섰던 나솔(奈率) 동성자언(東城子言)을 교대하고, 오경박사(五經博士) 왕류귀(王柳貴)로 고덕(固德) 마정안(馬丁安)을 대신하고, 승() 담혜(曇慧) 등 9인으로 승 도심(道深) 등 7인을 교대하였다. 따로 명령을 받들어 역박사(易博士) 시덕(施德) 왕도량(王道良), 역박사(曆博士) 고덕(固德) 왕보손(王保孫), 의박사(醫博士) 나솔(奈率) 왕유(王有)릉타(), 채약사(採藥師) 시덕(施德) 반량풍(潘量豊)·고덕(固德) 정유타(丁有陀), 악인(樂人) 시덕(施德) 삼근(三斤)·계덕(季德) 기마차(己麻次)·계덕(季德) 진노(進奴)·대덕(對德) 진타(進陀)를 바쳤는데, 모두 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3월 정해(丁亥) 초하루 백제(百濟)의 사신인 중부(中部)의 목()리시덕문차(施德文次) 등이 사행(使行)을 마치고 돌아갔다.

여름 5월 병술(丙戌) 초하루 무자(戊子) 내신(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百濟)에 나아갔다.

겨울 12월 백제(百濟)가 하부(下部)의 간솔(杆率) 문사간노(汶斯干奴)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百濟王) 신() 명()과 안라(安羅)에 있는 왜신(倭臣)들, 임나(任那) 여러 나라의 한기(旱岐)들은 아룁니다. 사라(斯羅)가 무도(無道)하여 천황을 두려워하지 않고 狛(고구려)과 마음을 함께 하여 바다 북쪽의 미이거(彌移居)(:관가(官家))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기를 유지신(有至臣) 등을 보내 우러러 군사를 청해 사라(斯羅)를 정벌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천황께서 유지신(有至臣)을 보내시니,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왔으므로 신들은 매우 기뻤습니다. 12월 9일에 사라(斯羅)를 공격하러 보내면서, 신이 먼저 동방(東方)의 령()인 물부(物部) 막기무련(莫奇武連)을 보내 자기 방()의 군사를 거느리고 함산성(函山城)347)을 공격하도록 하였는데,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백성 죽사(竹斯)348) 물부(物部) 막기위사기(莫奇委沙奇)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威靈)의 도움을 받아 이달 9일 유시에 성을 불태우고 빼앗았으므로 한 사람의 사신을 보내 배를 달려 아룁니다”라고 하였다.

따로 아뢰기를 “만약 신라(新羅)뿐이라면 유지신(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도 충분할 것입니다. 그러나 狛이 사라(斯羅)와 마음을 함께 하고 힘을 합하였으므로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죽사도(竹斯島)에 있는 군사들을 빨리 보내, (그들이) 와서 신의 나라를 돕고 또 임나를 돕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한다면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또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보내 임나를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룁니다. 이번 일이 매우 급하여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며, 단지 좋은 비단 2필, 毾㲪 1령(), 도끼 300구(), 사로잡은 성()의 백성 남자 둘과 여자 다섯을 바칩니다. (보낸 물건이) 적어 송구합니다”라 아뢰었다.

여창(餘昌)이 신라(新羅)를 정벌할 것을 계획하자 기노(耆老)가 “하늘이 함께 하지 않으니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라고 간하였다. 여창(餘昌)이 “늙었구려. 어찌 겁내시오. 우리는 대국(大國)을 섬기고 있으니 어찌 겁낼 것이 있겠소”라 하고, 드디어 신라국(新羅國)에 들어가 구타모라(久陀牟羅)에 보루를 쌓았다. 그 아버지 명왕(明王)은 여창(餘昌)이 행군에 오랫동안 고통을 겪고 한참동안 잠자고 먹지 못했음을 걱정하였다. 아버지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의 효도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생각하고 스스로 가서 위로하였다. 신라(新羅)는 명왕(明王)이 직접 왔음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를 내어 길을 끊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新羅)에서 좌지촌(佐知村)의 사마노(飼馬奴) 고도(苦都)349)[ 다른 이름은 곡지(谷智)이다]에게 “고도(苦都)는 천한 노()이고 명왕(明王)은 뛰어난 군주이다. 이제 천한 노로 하여금 뛰어난 군주를 죽이게 하여 후세에 전해져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얼마 후 고도(苦都)가 명왕(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명왕(明王)이 “왕의 머리를 노()의 손에 줄 수 없다”고 하니, 고도(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세한 것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하더라도 노()의 손에 죽습니다”라 하였다[ 다른 책에는 “명왕(明王)이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차고 있던 칼을 곡지(谷知)에게 풀어주어 베게 했다”고 하였다]. 명왕(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 사무쳤다.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구차히 살 수는 없다”라 하고 머리를 내밀어 참수당했다. 고도(苦都)는 머리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 묻었다[ 다른 책에는 “신라(新羅)가 명왕(明王)의 두골(頭骨)은 남겨두고 나머지 뼈를 백제(百濟)에 예를 갖춰 보냈다. 지금 신라왕(新羅王)이 명왕(明王)의 뼈를 북청(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는데, 이 관청을 도당(都堂)350)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여창(餘昌)은 포위당하자 빠져나오려 하였으나 나올 수 없었는데 사졸들은 놀라 어찌 할 줄 몰랐다. 활을 잘 쏘는 사람인 축자국조(筑紫國造)가 나아가 활을 당겨 신라(新羅)의 말 탄 군졸 중 가장 용감하고 씩씩한 사람을 헤아려 쏘아 떨어트렸다. 쏜 화살이 날카로워 타고 있던 안장의 앞뒤 가로지른 나무(안교(鞍橋))를 뚫었고, 입고 있던 갑옷의 옷깃을 맞추었다. 계속 화살을 날려 비오듯하였으나 더욱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포위한 군대를 활로 물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여창(餘昌)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다. 여창(餘昌)이 (축자(筑紫))국조(國造)가 활로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고 높여 “안교군(鞍橋君)”이라 이름하였다[안교(鞍橋)는 우리 말로 구라(矩羅)이(くろじ)라 한다]. 이 때 신라(新羅) 장수들이 백제(百濟)가 지쳤음을 모두 알고 드디어 멸망시켜 남겨두지 않으려 했다. 한 장수가 “안된다. 일본(日本) 천황(天皇)이 임나(任那)의 일 때문에 여러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백제관가(百濟官家)를 멸망시키기를 꾀한다면 반드시 후환을 부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그만두었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9.(흠명천황(欽明天皇))



16년(555) 봄 2월.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왕자 혜()351)[왕자 혜()는 위덕왕(威德王)의 아우이다]를 보내어 “성명왕(聖明王)이 적()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에게 죽음을 당했으므로 지금 그것을 아뢰었다]. 천황이 듣고서 가엾고 한스럽게 여겼다. 그래서 사자(使者)를 보내어 나루352)에서 맞이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허세신(許勢臣)이 왕자 혜()에게 “이곳에 머물고자 하는가. 또는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는가”라고 묻자, 혜()가 “천황의 덕에 기대고 의지하여 돌아가신 부왕(父王)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하고 가련하게 여기셔서 병기(兵器)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고 원수를 갚는 것이 저의 바램입니다. 제가 가고 머무르는 것은 오직 명을 좇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잠시 후에 소아신(蘇我臣)이 찾아와 위문하며 “성왕(聖王)은 하늘의 도()와 땅의 이치에 통달하였고 명성(名聲)은 4방 8방에 퍼졌습니다. 길이 평안함을 지키고 바다 서쪽 번국(蕃國)을 통솔하여 천년만년(千年萬年) 천황을 받들어 모실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 하루 아침에 멀리 승하하시어 물처럼 돌아올 수 없게 되어 묘실에 안치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마음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고 슬픔이 얼마나 크십니까. 무릇 성정(性情)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누가 슬퍼하지 않겠습니까.혹시 어떤 허물이 이러한 화를 이르게 했는가. 지금 어떤 방도로 나라를 안정시키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혜()가 대답하기를 “ 저는 타고난 성품이 어리석어 큰 계책을 알지 못하니 어찌 하물며 화와 복이 말미암은 바와 나라가 존속하고 망하는 것을 알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소아경(蘇我卿)353)이 “ 옛날 대박뢰천황(大泊瀨天皇) 때 그대의 나라가 고구려로부터 침략을 받아354) 위험하기가 계란(鷄卵)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했습니다. 이에 천황이 신지백(神祗伯)355)에게 명하여 공경히 신지(神祗)로부터 계책을 받도록 하였습니다. 축자(祝者)356)가 이에 신의 말에 의탁하여 ‘나라를 세운 신357)을 청()해 모셔와 장차 망하려는 임금을 가서 구하면 나라는 반드시 평온해지고 사람들은 잘 다스려져 편안해질 것이다’라고 보고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을 청하여 가서 구원하였으므로 사직(社稷)이 평안해졌습니다. 무릇 나라를 세운 신이란 하늘과 땅이 나뉘어 구분되고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358)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만들어 세운 신입니다. 지난번에 그대 나라에서는 (사당(祠堂)을) 돌보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지금이라도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신궁(神宮)을 수리하여 신령(神靈)을 받들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크게 번성할 것입니다. 그대는 나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8월 백제 여창(餘昌)이 여러 신하들에게 “소자(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父王)을 받들기 위하여 출가하여 수도(修道)하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임금께서 출가하여 수도하고자 하신다면 우선 왕명을 받들겠습니다. 슬프도다. 전()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근심을 가지게 되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구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이 나라를 연 이후부터 지금까지 계속고 있으니,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넘겨주려하십니까. 모름지기 도리(道理)는 왕명을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만약 능히 기로(耆老)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여기에 이르렀겠습니까. 바라건대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서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원하시는 것359)을 굳이 하고 싶으시다면 나라 백성들을 출가시키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였다. 여창(餘昌)이 “좋다”고 대답하고는 곧 나아가 신하들에게 꾀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출가시키고 번개(幡蓋)를 많이 만들어 여러가지 공덕을 행하였다고 운운(云云)하였다.



17년(556) 봄 정월 백제 왕자 혜()가 돌아가기를 청하자 병기(兵器)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다. 또한 빈번히 상으로 물품을 내려 주었으므로 여러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찬탄하는 바가 되었다. 이에 아배신(阿倍臣),좌백련(佐白連),파마직(播磨直)을 보내어 축자국(筑紫國)의 수군(水軍)을 이끌고 그 나라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여 보내 주었다.별도로 축자화군(筑紫火君)[<<백제본기>>에는 축자군(筑紫君)의 아들 화중군(火中君)의 아우라 한다]을 보내어 용감한 군사 1,000명을 이끌고 미()..360)[미()..는 나루터 이름이다]에까지 호위하여 보내어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했다.

겨울 10월 소아대신(蘇我大臣) 도목숙(稻目宿)녜 등을 왜국 고시군(高市郡)에 보내어 한인(韓人) 대신협둔창(大身狹屯倉)361)[한인(韓人)이라 한 것은 백제이다],고려인(高麗人) 소신협둔창(小身狹屯倉)을 두고 기국(紀國)에 해부둔창(海部屯倉)을 두었다.[어떤 책에는 “곳곳에 있던 한인(韓人)들로써 대신협둔창(大身狹屯倉)의 전부(田部)362)로 삼고 고려인(高麗人)으로써 소신협둔창(小身狹屯倉) 전부(田部)를 삼았다”고 한다.이는 곧 한인(韓人), 고려인(高麗人)으로써 전부(田部)를 삼았던 까닭에 둔창(屯倉)이라 이름한 것이다]



18년(557) 봄 3월 경자(庚子) 초하루 백제 왕자 여창(餘昌)이 왕위를 이었는데363), 이가 위덕왕(威德王)이다.



21년(560) 가을 9월 신라가 미지기지(彌至己知) 내말(奈末)364)을 보내어 조부(調賦)를 바쳤는데 평상시보다 성대하게 연회를 베풀어주었다. 내말(奈末)이 기뻐하며 돌아가서 “조부(調賦)를 바치는 사자(使者)는 나라에서 귀중하게 여기는 바인데 나의 의론(議論)은 가볍고 비천한 것이고, 사자(使者)는 백성의 운명이 달려있는 사람인데 뽑아쓰는 것은 비천하고 낮은 사람입니다. 왕정(王政)의 폐해는 이로부터 말미암지 않음이 없으니, 바라건대 좋은 집 자제를 뽑아 사자(使者)로 삼으시고 비천한 사람을 사자(使者)로 삼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22년(561) 신라가 구례질(久禮叱) 급벌간(及伐干)365)을 보내어 조부(調賦)를 바쳤다. 사빈(司賓)366)이 연회를 베풀었는데 예우가 평상시보다 덜하였다. 급벌간(及伐干)이 분하고 한스럽게 여기며 돌아갔다.

이해 다시 노()지 대사(大舍)를 보내어 지난번의 조부(調賦)367)를 바쳤다. 난파(難波)의 대군(大郡)368)에서 여러 번국(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장객(掌客)369) 액전부련(額田部連)과 갈성직(葛城直) 등이 백제의 아래쪽 열에 서게 하여 인도했다. 대사(大舍)가 화를 내고 돌아가 관사(館舍)에 들지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혈문(穴門)370)에 이르렀다. 이때 혈문관(穴門館)을 수리하고 있었다. 대사(大舍)가 묻기를 “어떤 손님을 위하여 짓는가”라고 하자 공장(工匠) 하내마사수압승(河內馬飼首押勝)이 거짓으로 “서방(西方)의 무례한 짓을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물 숙소이다”라고 말하였다. 대사(大舍)가 나라에 돌아가 그가 말한 것을 고하였다. 그래서 신라는 아라(阿羅)의 파사산(波斯山)371)에 성을 쌓고서 일본에 대비하였다.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어떤 책에서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하였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任那)이고, 개별적으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안라국(安羅國),사이기국(斯二岐國),다라국(多羅國),졸마국(卒麻國),고차국(古嵯國)372),자타국(子他國)373),산반하국(散半下國)374),걸손국(乞飡國)375),임례국(稔禮國) 등 모두 열나라이다].

여름 6월 조칙을 내려 “신라는 서쪽의 오랑캐376)로 작고 보잘것 없는 나라이다. 하늘을 거스리고 예의가 없어 우리의 두터운 은혜를 져버리고 나의 관가(官家)를 깨트렸으며 나의 백성에게 해독을 끼치고 나의 군현(郡縣)을 멸망시켰다. 우리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377)은 거룩하고 총명하여 천하를 두루 돌아다니시며 뭇 인민(人民)을 힘써 보살피시고 온 백성을 먹이고 길렀다. 신라가 궁()해져가는 것을 애달피 여기시고 신라왕이 장차 목베일 것을 온전히 두었으며 신라에게 요충의 땅을 주었고 신라를 남달리 번영하게 해주시었다. 우리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께서 신라에 대하여 무엇을 가볍게 대우했으며 우리 백성이 신라에 무슨 원한이 있었는가. 그러나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임나를 릉욕(凌辱)해 멸망시켰고 강한 잇빨과 갈고리 같은 손톱으로 잔인하게 백성을 죽였다. 간을 꺼내고 발목을 끊어도 마음에 흡족해하지 않고 뼈를 드러내고 주검을 태워도 혹독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임나(任那)의 귀족과 백성 이하 모두는 칼을 다 쓰고 도마를 다하도록 이미 살륙당하고 회()쳐졌으니 어찌 온 천하가 왕의 신하라 말할 수 있겠는가. 또 다른 사람 곡식을 먹고 다른 사람 물을 마시면서 누가 차마 이것을 듣을 수 있겠으며 누가 마음으로 슬퍼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태자.대신이 형제 친척에게 피눈물을 흘리고 원한을 머금고 부탁하여, 번방(蕃邦)을 지키는 임무를 맡음에 머리를 부수는 것이 발꿈치에까지 이르도록 은혜롭게 하고 대대로 전조(前朝)의 덕을 받아 후대의 지위를 맡았으니 쓸개를 마시고 창자를 꺼내어 함께 간악한 역적을 죽여 천지의 큰 아픔을 씻고 임금과 아비의 원수를 갚지 못하면 죽어서도 신하와 아들의 도리를 이루지 못하는 한이 있다고 함에 있어서랴”라고 하였다.

가을 7월 기사(己巳) 초하루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조부(調賦)를 바쳤다. 그 사신이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나라(일본)의 은혜를 저버린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고 마침내 머물러 본토(本土)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국가의 백성과 같은 례()로 대우하였는데, 지금 하내국(河內國) 갱황군(更荒郡)378) 로()+조() 자()+조야읍(鳥野邑) 신라인의 선조(先祖)이다.

이 달에 대장군(大將軍) 기남마려숙(紀男麻呂宿)녜379)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차(구()+다())리(구()+리())에서 출동하고, 부장군(副將軍) 하변신경부(河邊臣瓊缶)는 거증산(居曾山)으로부터 출동하도록 하여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상황에 대하여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임나에 도착하여 천집부수등(薦集部首登)이를 백제에 보내어 군사계책을 약속케 했다. 등()이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트렸다. 신라가 군사계획을 모두 알고 갑자기 군사를 크게 일으켰으나 얼마 후에 패하였으므로 항복하여 귀부(歸附)하기를 빌었다. 기남마려숙(紀男麻呂宿)녜가 승리를 거두고 나서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에 돌아갔다. 군중(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을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가르침이다. 지금 처해 있는 땅은 들개와 이리와 같이 사나운 무리들과 이웃해 있으니 가볍고 소홀히 하여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으랴. 하물며 또 태평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놓지 않는 법이니,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깊이 경계하고 이 명령을 받드는데 힘쓰라”라고 하였다. 병졸들은 모두 마음으로부터 복종하고 섬겼다.

하변신경부(河邊臣瓊缶)는 홀로 나아가 이곳 저곳에서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문득 흰 깃발을 들고 무기를 던져버리고 항복했는데, 하변신경부(河邊臣瓊缶)는 원래 군사(軍事)에 밝지 못하여 마주 대하여 흰기를 들고 헛되이 혼자 앞으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하변신(河邊臣)이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고 하고는 진군하여 역습하여 싸웠다. 매우 날쌔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트렸는데, 맨 앞선 부대는 패()한 바가 매우 많았다. 왜국조수언(倭國造手彦)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군사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의 해()자에까지 뒤쫒아와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수언(首彦)은 날랜 말을 타고 있었으므로 성의 해자를 뛰어 건너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의 해자가에 서서 “구수니자리(久須尼自利)”[이는 신라말로 자세하지 않다]라고 탄식하였다. 이에 하변신(河邊臣)은 마침내 군사를 이끌고 물러나와 들에 급히 군영을 만들었다. 이때 병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우르러 따르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스스로 군영에 나아가 하변신경부(河邊臣瓊缶) 등과 그를 따라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 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다. 신라 장군이 하변신(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중에서 어느 것을 더 아끼는가”라고 묻자 “어찌하여 한 여자를 아껴 화를 취하겠습니까. 어떤 것도 목숨보다 더한 것은 없습니다”라 대답하고 첩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은 마침내 벌판에서 그 여자를 간음하였다. 여자가 후에 돌아가니, 하변신(河邊臣)이 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은 매우 부끄럽고 한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옛날에 당신이 저의 몸을 가볍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로 만나겠는가”하고는 마침내 승락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판본신(坂本臣)의 딸인데 이름을 감미원(甘美媛)이라 한다.

함께 사로잡혔던 조길사이기(調吉士伊企)탄은 사람됨이 용맹하여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을 빼서 목을 치려고 하며 억지로 잠뱅이를 벗기고 이어서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장군은 내 엉덩이를 물어라”라고 크게 부르짖게 하자[부르짖는다(규())는 것은 울부짖으며 소리친다는 말이다], 곧 “신라왕은 내 엉덩이를 먹어라”고 소리쳤다. 비록 고통과 핍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앞에서와 같이 소리쳤다. 이로 말미암아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들 구자(舅子) 역시 그의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이기(伊企)탄의 말하고자 하는 바를 빼앗기 어려운 것이 모두 이와 같았다. 이로 말미암아 특히 여러 장수들이 가슴 아파하는 바가 되었다. 그의 아내 대엽자(大葉子)도 역시 잡혔는데 비통하게 노래하기를 “한국(韓國)의 성()위에 서서 대엽자(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일본으로 향하네”라고 하자, 어떤 사람이 화답(和答)하기를 “한국(韓國)의 성위에 서서 대엽자(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어 보이며 난파로 향하네”라고 하였다.

8월 천황이 대장군 대반련협수언(大伴連狹手彦)을 보내어 군사 수만명을 이끌고 고려를 치게 하였다. 협수언(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꾀를 써서 고려를 쳐서 깨트렸다380). 그 왕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협수언(狹手彦)은 마침내 승세를 타고 왕궁에 들어가 진귀한 보물과 갖가지 재화,칠직장(七織帳)381),철옥(鐵屋)을 모두 얻어 돌아왔다.[옛 책에 “철옥(鐵屋)은 고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으며 직장(織帳)은 고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다”고 한다]. 칠직장(七織帳)은 천황에게 바치고 갑옷 2벌,금으로 장식한 칼 2자루,무늬를 새긴 구리종 3개,오색번(五色幡) 2간(竿),미녀 원()[원()은 이름이다] 및 그의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소아도목숙(蘇我稻目宿)녜 대신(大臣)에게 보내었다. 이에 대신(大臣)은 두 여자를 맞아 들여 처로 삼고 경()382)의 곡전(曲殿)에 살게 했다.[철옥(鐵屋)은 장안사(長安寺)에 있다. 이 절이 어느 나라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어떤 책에는 “11년에 대반협수언련(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려왕 양향(陽香)383)을 비진류도(比津留都)에서 쫒아내었다”고 한다].

겨울 11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물건을 바치고 아울러 조부(調賦)를 바쳤다. 사신은 신라가 임나를 멸망시킨 것을 일본이 분하게 여기고 있음을 알고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였다. 형벌을 받을까 두려워 본국에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백성과 같은 례()로 취급하였는데, 지금의 섭진국(攝津國) 삼도군(三嶋郡) 직(토()+직())로() 신라인의 선조이다.



26년(565) 여름 5월 고려인 두무(頭霧)리(구()+리())야폐(耶陛) 등이 축자(筑紫)에 투화(投化)하였으므로 산배국(山背國)에 안치하였다. 지금의 무원(畝原),내라(奈羅),산촌(山村)의 고구려인 선조이다.



30(569)년 봄 정월 신묘 초하루 조칙을 내려 “전부(田部)384)를 헤아려 둔 것은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 나이가 10여세가 되었는데도 호적에서 빠져 과역(課役)을 면제받는 사람이 많다. 마땅히 담진(膽津)385)(담진(膽津)은 왕진이(王辰爾)의 조카이다)을 보내어 백저전부(白猪田部)의 정적(丁籍)을 살펴 정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31년,570) 여름 4월 갑신(甲申) 초하루 을유(乙酉) 박뢰시리궁(泊瀨柴籬宮)에 거동하였다. 월인(越人) 강정신군대(江渟臣裙代)가 서울에 와서 “고려 사신이 바람과 파도에 시달려 배 댈곳을 잃고 헤매다가 물결 따라 떠다니던 중 홀연히 해안에 다다랐는데, 군사(郡司)가 숨겨두었으므로 제가 밝히는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조칙을 내려 “내가 왕업을 이은 지 얼마 안된 때에 고려인이 길을 잃고 헤매다가 처음으로 월()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비록 물에 빠지고 떠다니는 고생은 하였지만 아직 목숨은 온전하니 어찌 나라를 다스리는 훌륭한 계책이 널리 미치고 지극한 덕이 우뚝 높은 것이 아니겠는가. 어진 교화가 주위에 통하였고 큰 은혜가 넓고 넓은 것이 아니겠는가. 담당 관서는 마땅히 산성국(山城國) 상락군(相樂郡)에 객관(客館)을 세워 깨끗이 정돈하고 후한 재물로 돌보라”고 하였다.

이달에 (천황이) 수레를 타고 박뢰시리궁(泊瀨柴籬宮)으로부터 이르렀다. 동한씨직강아(東漢氏直糠兒)와 갈성직난파(葛城直難波)를 보내어 고려 사신을 맞이하여 불렀다.

5월 선신경자(膳臣傾子)를 월()에 보내어 고려 사신을 대접했다.[경자(傾子)는 우리말로 가(주()+가())타부고(部古)라 한다]. (고려) 대사(大使)가 자세히 살펴보고는 선신(膳臣)이 바로 천자의 사자(使者)인 것을 알고, 도군(道君)에게 “네가 천황이 아니라는 것은 과연 내가 의심한 대로구나. 너는 이미 선신(膳臣)에게 엎드려 절하였으니 백성이라는 것을 더욱 알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앞서 나를 속여 조(調)를 취하여 자신이 가졌으니 마땅히 그것을 빨리 되돌려 달라. 번잡하게 말을 많이 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선신(膳臣)이 듣고서 사람을 시켜 그 조(調)를 조사하게 하여 모두 그에게 주었다. 서울에 돌아와 복명하였다.

7월 임자(壬子) 초하루 고려 사신이 근강(近江)에 도착하였다.

이달에 허세신원(許勢臣猿)과 길사적구(吉士赤鳩)를 보냈다. 난파진(難波津)에서 출발하여 협협파산(狹狹波山)에서 배를 끌고와 식선(飾船)386)을 장식하고 이에 근강(近江)의 북쪽 산에 가서 맞이하였다. 마침내 산 뒤쪽의 고()위(목()+위())관()에 인도하여 들이고 동한판상직자마려(東漢坂上直子麻呂)와 금부수대석(錦部首大石)을 보내어 지키게 하였다. 또 상락관(相樂館)에서 고려 사자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32년(571) 봄 3월 무신(戊申) 초하루 임자(壬子) 판전이자랑군(坂田耳子郞君)을 신라에 사신으로 보내어 임나를 멸망시킨 사유를 물었다.

이달 고려가 바친 물품(物品)과 표문(表文)을 아직 받들어 아뢰지 못하였다. 수십일이 지나도록 좋은 날을 점쳐 기다렸다.

여름 4월 무인(戊寅) 초하루 임진(壬辰) 천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누웠다. 황태자는 밖에 나가 없었으므로 역마로 불러들였다. (천황이) 누워 있는 내전에 불려 들어가니, 그의 손을 잡고 명하기를 “내 병이 심하니 이후의 일을 너에게맡긴다. 너는 반드시 신라를 쳐서 임나를 세워 봉()하라. 다시 서로 화합하여 옛날과 같이 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고 하였다.

가을 8월 병자(丙子) 초하루 신라가 조문사 미질자실소(未叱子失消) 등을 보내어 빈소에서 (천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이달 미질자실소(未叱子失消) 등이 돌아갔다.

 

 

(권) 11 仁德天皇(인덕천황) ((대)鵻鷯天皇(천황))



(卽位前紀(즉위전기)) (대)鵻鷯天皇(천황)(仁德天皇(인덕천황))은 譽田天皇(예전천황)(應神天皇(응신천황))의 네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仲姬命(중희명)이며 五百城入彦皇子(오백성입언황자)의 손자이다. 天皇(천황)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용모가 아름다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자애로왔다. (應神天皇(응신천황)) 41년 봄 2월에 譽田天皇(예전천황)이 죽었다. 그 때 太子(태자) 菟道稚郞子(도치랑자)는 왕위를 (대)鵻鷯(존)에게 양보하며 帝位(제위)에 오르지 아니하였다. (中略(중략)) 이 때 額田大中彦皇子(액전대중언황자)는 (왜)의 屯田(둔전)과 屯倉(둔창)을 장악하려고 屯田司(둔전사)인 出雲臣(출운신)의 조상 淤宇宿(우숙)禰에게, “이 屯田(둔전)은 원래 山守(산수)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내가 다스릴 것이다. 너는 주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淤宇宿(우숙)禰가 太子(태자)에게 이 일을 아뢰자 太子(태자)는, “너는 곧 (대)鵻鷯(존)에게 말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淤宇宿(우숙)禰는 (대)鵻鷯(존)에게, “(신)이 맡고 있는 屯田(둔전)을 大中彦皇子(대중언황자)가 방해하여 다스리지 못하게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대)鵻鷯(존)은 倭直(왜직)의 조상인 麻呂(마려)에게, “(왜)의 屯田(둔전)이 원래 山守(산수)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신)은 모릅니다. (신)의 아우 吾子籠(오자롱)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吾子籠(오자롱)은 韓國(한국)125)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대)鵻鷯(존)은 淤宇宿(우숙)禰에게, “네가 직접 韓國(한국)에 가서 吾子籠(오자롱)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淡路(담로)의 海人(해인)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淤宇宿(우숙)禰는 韓國(한국)에 가서 즉시 吾子籠(오자롱)을 데리고 왔다·····.



(11년) 이 해 新羅人(신라인)이 朝貢(조공)하였다. 따라서 이 役事(역사)126)에 동원하였다.



12년 가을 7월 辛未(신미) 초하루 癸酉日(계유일) 高麗國(고려국)이 (철)로 만든 방패와 (철)로 만든 과녁을 바쳤다.



(12년) 8월 庚子(경자) 초하루 己酉(기유) 高麗(고려)에서 온 사신들을 朝廷(조정)에서 향응하였다. 이 날에 群臣(군신) 및 百官(백관)들을 모아놓고 高麗(고려)에서 바친 (철)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的臣(적신)의 조상인 盾人宿(순인숙)禰만이 (철)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高麗(고려)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盾人宿(순인숙)禰를 칭찬하고 的戶田宿(적호전숙)禰라는 이름을 내렸다. 같은 날에 小泊瀨造(소박뢰조)의 조상인 宿(숙)禰(신)에게 이름을 내려 賢遺臣(현유신)이라 하였다[賢遺(현유)는 우리말로 (좌)가(능)려(리)라 한다].



17년 新羅(신라)가 朝貢(조공)하지 않았다.



(17년) 가을 9월 的臣(적신)의 조상인 砥田宿(지전숙)禰와 小泊瀨造(소박뢰조)의 조상인 賢遺臣(현유신)을 (新羅(신라)에) 보내어 朝貢(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新羅人(신라인)은 두려워하여 貢物(공물)을 바쳤다. 貢物(공물)은 비단 1,460필 및 여러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41년 봄 3월 紀角宿(기각숙)禰를 百濟(백제)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127) 이 때 百濟(백제)의 왕족인 酒君(주군)128)이 무례하게 행동하였으므로 紀角宿(기각숙)禰는 백제의 왕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百濟王(백제왕)은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酒君(주군)을 묶어서 襲津彦(습진언)에게 딸려보내어 바쳤다. 酒君(주군)은 (일본에) 와서 곧 石川錦織首許呂斯(석천금직수허려사)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酒君(주군)은) 속여 말하기를, “天皇(천황)은 이미 나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의지하여 살고 싶다”고 하였다. 오랜 뒤에 天皇(천황)은 드디어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



43년 가을 9월 庚子(경자) 초하루 依網(의망)의 屯倉(둔창)에 있는 (아)弭(고)가 기이한 새를 잡아서 天皇(천황)에게 바치며, “(신)은 항상 그물을 쳐서 새를 잡는데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는 잡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이하게 생각되어 그것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天皇(천황)은 酒君(주군)을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하고 물었다. 酒君(주군)은, “이와 같은 새는 百濟(백제)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여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온갖 새들을 잡습니다. 百濟(백제) 사람들은 이 새를 ‘俱知(구지)’[이것은 지금의 매이다]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 새를) 酒君(주군)에게 주어 길들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酒君(주군)은 가죽으로 만든 낚싯줄을 그 발에 매고 작은 방울을 그 꼬리에 달아서 팔뚝 위에 올려 놓고 天皇(천황)에게 바쳤다. 이 날 白舌鳥野(백설조야)에 행차하여 사냥을 하였다. 그 때 꿩이 많이 날아 올랐는데 매를 놓아 잡도록 하니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의 꿩을 얻었다.129)



53년 新羅(신라)가 朝貢(조공)을 하지 않았다.



(53년) 여름 5월 上毛野君(상모야군)의 조상인 竹葉瀨(죽엽뢰)를 (新羅(신라)에)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가는 도중에 흰사슴을 잡았으므로 돌아와 天皇(천황)에게 바치고 다시 날을 받아 출발하였다. 잠시 후에 또다시 竹葉瀨(죽엽뢰)의 아우인 田道(전도)를 보내면서 (조)를 내려, “만약 신라가 대항하거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고 하고, 날랜 병사를 주었다. 新羅(신라)는 군사를 일으켜 맞섰다. 이 때 新羅人(신라인)은 매일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田道(전도)는 요새를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그 때 신라 군졸 한 명이 진영 밖으로 나온 것을 붙잡아다가 동정을 물으니, “힘 센 사람이 있어 百衝(백충)이라 하는데 그는 날래고 용감하여 항상 (군)의 오른쪽 선봉이 되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아 왼쪽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新羅軍(신라군)이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였다. 이에 田道(전도)는 날랜 기병을 계속하여 보내 그 왼쪽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新羅軍(신라군)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병사를 풀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4(읍)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58년) 겨울 10월 吳國(오국)・高麗國(고려국)이 함께 朝貢(조공)하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 권 13, 雄朝津間稚子宿(웅조진간치자숙)녜天皇(천황)[允恭天皇(윤공천황)].



3년 봄 정월 辛酉(신유) 초하루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의원)을 구하였다. 가을 8월 醫員(의원)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130).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42년 봄 정월 乙亥(을해) 초하루 戊子(무자) 천황이 죽었다. 이때 나이는 若干(약간)131)이었다. 이에 신라왕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배 80척으로 조공하고 아울러 각종 樂人(악인)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對馬島(대마도)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울고 筑紫(축자)에 이르러 또 큰 소리로 울었다. 難波津(난파진)132)에 이르러 모두 흰옷을 입었다. 조공물을 받쳐들고 또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難波(난파)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울부짖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屍身(시신)을 모셔둔 곳에 參禮(참례)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의 弔問使(조문사)들이 問喪(문상)의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京城(경성) 근방에 있는 耳成山(이성산), 畝傍山(무방산)133)을 좋아하였다. 琴引坂(금인판)134)에 도착하여 그곳을 돌아보며 “우네메하야 미미하야(내 사랑하는 우네메여 미미여)”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까닭에 畝傍山(무방산)을 ‘于泥口(우니구)+(양)(우네메)’라 잘못 말하고 耳成山(이성산)을 ‘(수)+(미) (수)+(미)(미미)’로 잘못 말한 것이다. 이때 왜의 飼部(사부)135)에 속해있던 사람이 신라사람을 따라갔는데, 이 말을 듣고 의심하기를 신라사람이 采女(채녀)136)와 정을 통했다고 여겨 돌아와 大泊瀨(대박뢰) 皇子(황자)137)에게 아뢰었다. 황자는 곧 신라의 使者(사자)들을 모두 가두고는 사실여부를 캐물었다. 이때 신라 使者(사자)들이 “采女(채녀)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서울 근방에 있는 두 산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잘못된 말인 것을 알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매우 원망하여 다음부터는 바치는 물건의 종류와 배의 수를 줄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 권 14,大泊瀨幼武天皇(대박뢰유무천황)[雄略天皇(웅략천황)].



2년 가을 7월 백제 池津媛(지진원)은 천황이 장차 同寢(동침)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石川楯(석천순)[옛 책에는 石河股合首(석하고합수)의 조상 (순)이라 한다]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대반실옥대련)에게 명하여 來目部(래목부)138)를 시켜 부부의 四支(사지)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百濟新撰(백제신찬)>>139)에는 “己巳年(기사년)에 蓋鹵王(개로왕)이 즉위하였다140). 천황이 阿禮奴足(아례노족)+(위)(궤)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慕尼夫人(모니부인)의 딸 適稽女郞(적계여랑)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5년) 여름 4월 백제 加須利君(가수리군)141)[蓋鹵王(개로왕)이다]은 池津媛(지진원)[適稽女郞(적계여랑)이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采女(채녀)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 나라의 이름을 失墜(실추)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軍君(군군)142)[昆支(곤지)이다]에게 “네가 마땅히 日本(일본)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軍君(군군)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加須利君(가수리군)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군군)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따라서 이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6월 丙戌(병술) 초하루. 임신한 부인이 과연 加須利君(가수리군)의 말처럼 筑紫(축자)의 各羅嶋(각라도)143)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도군)144)이라 하였다. 이에 軍君(군군)은 곧 한 척의 배로 嶋君(도군)을 나라에 보내었는데, 이가 武寧王(무녕왕)145)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주도)라 일컬었다.

가을 7월. 軍君(군군)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百濟新撰(백제신찬)에 “辛丑年(신축년)에 蓋鹵王(개로왕)이 아우 昆支君(곤지군)을 보내어 大倭(대왜)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146), (형)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7년) 이해 吉備上道臣田狹(길비상도신전협)이 궁중에서 侍從(시종)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稚媛(치원)147)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와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귀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稚媛(치원)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田狹(전협)을 任那(임나) 國司(국사)148)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稚媛(치원)과 동침하였다. 田狹臣(전협신)은 稚媛(치원)에게 장가들어 兄君(형군)과 弟君(제군)을 낳았다.[다른 책에서는 “田狹臣(전협신) 아내의 이름은 毛媛(모원)인데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의 아들 玉田宿(옥전숙)녜149)의 딸이다. 천황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남편을 죽이고 자기가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田狹(전협)은 이미 任地(임지)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中國(중국)’150)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田狹臣(전협신)의 아들 弟君(제군)과 吉備海部直赤尾(길비해부직적미)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懲罰(징벌)하라”고 하였다. 이때 西漢才伎(서한재기) 歡因知利(환인지리)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韓國(한국)151)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歡因知利(환인지리)를 弟君(제군)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弟君(제군)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152)로 변하여 忽然(홀연)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弟君(제군)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153)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제군)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쳐 데리고 올 재주있는 사람들을 큰 섬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任那國司(임나국사) 田狹臣(전협신)은 弟君(제군)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弟君(제군)에게 警戒(경계)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자식에 대해서는 윗글에서 이미 보았다154)]. 이제 (화)가 나에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任那(임나)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弟君(제군)의 아내 樟媛(장원)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君臣(군신)의 (의)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海部(해부) 直赤尾(직적미)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弟君(제군)이 죽은 것을 알고 日鷹吉士堅磐固安錢(일응길사견반고안전) [堅磐(견반)은 우리말로 柯陀之波(가타지파)라 한다]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마침내 倭國(왜국) 吾礪(오려) 廣津(광진)[廣津(광진)은 우리말로 比慮岐頭(비려기두)라 한다](읍)155)에 안치하였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황이 大伴大連室屋(대반대련실옥)에게 (조)를 내려 東漢直(동한직)국에게 명하여 新漢(신한)156) 陶部(도부) 高貴(고귀), 鞍部(안부) 堅貴(견귀), 畵部(화부) 因斯羅我(인사라아), 錦部(금부) 定安那錦(정안나금), 譯語(역어) 卯安那(묘안나) 등을 上桃原(상도원),下桃原(하도원),眞神原(진신원)의 3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어떤 책에는 “吉備臣弟君(길비신제군)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漢手人部(한수인부),衣縫部(의봉부),肉人部(육인부)를 바쳤다”고 한다].



8년 봄 2월. 身狹村主靑(신협촌주청)과 (회)외民使博德(민사박덕)을 (오)나라157)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중국)’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고려)와 우호를 맺었다158).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전마)) [典馬(전마)는 우리말로 于麻柯比(우마가비)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축족류성)159)[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도구사기성)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임나왕)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철류))160)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일본부행군원수)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임나왕)이 膳臣斑鳩(선신반구)[斑鳩(반구)는 우리말로 伊柯屢俄(이가루아)라 한다], 吉備臣小梨(길비신소리), 難波吉士赤目子(난파길사적목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선신) 등이 아직 軍營(군영)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선신)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선신)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군중)에 (령)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지도)161)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선신)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고려)와 新羅(신라)를 말한다]. 膳臣(선신)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관군)162)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천조)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권 14 雄略天皇(웅략천황)



9년(465) 3월 천황이 新羅(신라)를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다. (신)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천황이 이로 말미암아 가지 않았다. 그리고 紀小弓宿(기소궁숙)禰·蘇我韓子宿(소아한자숙)禰·大伴談連(대반담련)[(담)은 우리말로 箇陀利(개타리)라고 한다]·小鹿火宿(소록화숙)禰 등에게 칙명으로 “新羅(신라)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미쳐 몸을 對馬(대마)의 밖에 두고 자취를 匝(라)163) 밖에 감춘 채 高麗(고려)의 조공을 막고 百濟(백제)의 (성)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리같은 사나운 마음이 있어 배부르면 나는 듯 달려가고 굶주리면 붙좇는다. 그대들 네 (경)을 대장으로 삼으니 王師(왕사)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紀小弓宿(기소궁숙)禰는 大伴室屋大連(대반실옥대련)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호소해주도록 하면서 “신이 비록 미약하지만 삼가 칙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아내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 되어 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공)은 이 일을 갖추어 천황께 아뢰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室屋大連(대반실옥대련)이 갖추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슬피 탄식하면서 吉備上道(길비상도)의 采女(채녀) 大海(대해)를 紀小弓宿(기소궁숙)禰에게 하사하여 그를 따라가서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밀어 (군대를) 보냈다. 紀小弓宿(기소궁숙)禰 등이 곧 新羅(신라)에 들어가 이웃 (군)을 함께 공격하였다[行屠(행도)는 함께 가서 함께 공격한다는 것이다]. 新羅王(신라왕)은 밤에 官軍(관군)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관군이) 㖨164)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기)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小弓宿(소궁숙)禰는 (新羅軍(신라군)을) 쫓아가 (진)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탁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紀小弓宿(기소궁숙)禰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大伴談連(대반담련)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이날 저녁 大伴談連(대반담련)과 紀岡前來目連(기강전래목련)이 모두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談連(담련)의 시종으로 같은 (성)인 津麻呂(진마려)는 나중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주인을 찾았다. 진영에서 찾지 못하자 나와서 “우리 주인 大伴公(대반공)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너의 주인 등은 적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주며 주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津麻呂(진마려)는 그 말을 듣고 땅을 구르면서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 소리치고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大將軍(대장군) 紀小弓宿(기소궁숙)禰는 병에 걸려 죽었다.

여름 5월 紀大磐宿(기대반숙)禰165)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음을 듣고 新羅(신라)를 향하면서 小鹿火宿(소록화숙)禰가 관장하던 兵馬(병마)와 船官(선관) 및 小官(소관)들을 장악하고 명령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小鹿火宿(소록화숙)禰는 大磐宿(대반숙)禰를 매우 원망하여 韓子宿(한자숙)禰에게 거짓으로 “大磐宿(대반숙)禰가 저에게 ‘내가 다시 韓子宿(한자숙)禰가 장악한 관리들을 뺏는 것이 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데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韓子宿(한자숙)禰는 大磐宿(대반숙)禰와 틈이 벌어졌다. 이 때 百濟王(백제왕)은 日本(일본)의 장수들이 작은 일 때문에 틈이 벌어졌음을 듣고 韓子宿(한자숙)禰 등에게 사람을 시켜 “나라의 경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림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子宿(한자숙)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갔는데, 강에 이르러 大磐宿(대반숙)禰가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때 韓子宿(한자숙)禰가 뒤에서 大磐宿(대반숙)禰의 말안장 뒤를 받친 나무에 활을 쏘았다. 大磐宿(대반숙)禰가 놀라 돌아보며 韓子宿(한자숙)禰를 쏘니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들이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길에서 행렬이 어지러워져 百濟(백제)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采女(채녀) 大海(대해)가 小弓宿(소궁숙)禰의 관을 따라 日本(일본)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大伴室屋大連(대반실옥대련)에게 근심스럽게 상의하기를 “저는 장례치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골라주십시오”라 하니, 大連(대련)이 곧 아뢰었다. 천황이 大連(대련)에게 명령하여 “大將軍(대장군) 紀小弓宿(기소궁숙)禰는 용처럼 뛰어 오르고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8(방)을 널리 바라보았고, 반역자들을 불시에 토벌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몸은 만리 밖에서 수고로웠고 목숨이 三韓(삼한)에서 떨어졌으니, 매우 불쌍히 여겨 장례를 담당할 사람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 大伴卿(대반경)과 紀卿(기경) 등은 같은 나라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서 유래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大連(대련)이 명령을 받들어 土師連小鳥(토사련소조)로 하여금 田身輪邑(전신륜읍)166)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지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大海(대해)가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韓奴(한노) (실)·兄麻呂(형마려)·弟麻呂(제마려)·御倉(어창)·小倉(소창)·(침) 6 (구)를 大連(대련)에게 보냈는데, 吉備上道(길비상도)의 蚊嶋田邑(문도전읍) 家人部(가인부)가 이들이다. ···



11년(467) 가을 7월 百濟國(백제국)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貴信(귀신)이라고 하였다. 또 貴信(귀신)은 (오)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반여)의 吳琴(오금)167)을 타는 壃手屋形麻呂(수옥형마려) 등이 바로 그 후손이다.



15년(471) (진)의 백성168)을 (신)·(련)169) 등에게 분산시켜 각각 원하는 바에 따라 부리도록 하고 秦造(진조)170)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秦造酒(진조주)가 매우 근심스럽게 여기며 천황을 섬겼다. 그러므로 천황은 그를 총애하여 (조)를 내려 (진)의 백성을 모아 秦酒公(진주공)에게 주니, 공은 이에 180(종)의 (승)171)을 거느리고 庸調(용조)로 (견)縑172)을 바쳐 朝廷(조정)에 가득 쌓았다. 그러므로 (성)을 하사하여 禹豆麻佐(우두마좌)라 하였다[일설에는 禹豆母利麻佐(우두모리마좌)라 하였는데, 모두 가득 쌓은 모양이다].



16년(472) 가을 7월 (조)를 내려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國縣(국현)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 (진)의 백성을 분산하여 옮겨서 庸調(용조)를 바치도록 하였다.



20년(476)173) 겨울 高麗(고려)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백제)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창하)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고려)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백제)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백제국)은 日本國(일본국)의 官家(관가)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백제기)』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개로왕) 乙卯年(을묘년)(475) 겨울 狛174)의 大軍(대군)이 와서 大城(대성)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왕성)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위례)175)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21년(477) 봄 3월 천황이 百濟(백제)가 고구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구마나리)176)를 汶洲王(문주왕)177)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178). 당시 사람들이 모두 ‘百濟(백제)국은 비록 거의 망해 倉下(창하)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汶洲王(문주왕)은 蓋鹵王(개로왕)의 동생이다179). 『日本舊記(일본구기)』에서는 “久麻那利(구마나리)를 末多王(말다왕)180)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구마나리)는 任那國(임나국)의 (하)哆呼唎縣(호리현)의 別邑(별읍)이다].



23년(479) 여름4월 百濟(백제)의 文斤王(문근왕)181)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곤지왕)182)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말다왕)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兵器(병기)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축자국)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동성왕)183)이 되었다.

*이 해 百濟(백제)에서 바친 調賦(조부)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筑紫(축자)의 安致臣(안치신)·馬飼臣(마사신)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高麗(고려)를 쳤다.

8월 庚午(경오) 초하루 丙子(병자) 천황의 병이 더욱 심해져 관료들과 하직하고, 또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천황이) 大殿(대전)에서 죽었다.··· 이 때 新羅(신라)를 정벌하러 갔던184) 장군 吉備臣尾代(길비신미대)의 행렬이 吉備國(길비국)에 이르러 집을 지나갔다. 뒤를 따르던 500蝦夷(하이)들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천황이 죽었으니 때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모여 이웃 (군)을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尾代(미대)가 집으로부터 와서 蝦夷(하이)와 娑婆水門(사파수문)에서 만나 싸우며 활을 쏘니 蝦夷(하이)들이 뛰어오르거나 엎드려서 능히 화살을 피해 벗어나므로 끝내 쏘아 맞힐 수 없었다.···



권15 弘計天皇(홍계천황) 顯宗天皇(현종천황)



3년(487) 봄 2월 丁巳(정사) 초하루 阿閉臣事代(아폐신사대)가 명을 받들고 任那(임나)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이 때 月神(월신)이 사람에게 의탁하여 “나의 조상 高皇山靈(고황산령)은 이미 天地(천지)를 녹여 만든 공이 있었으니, 백성의 땅으로 月神(월신)인 나를 받들어야 한다. 만약 청에 따라 나에게 바친다면 복과 경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事代(사대)가 이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와 갖추어 아뢰니 歌荒(가황)樔(전)으로써 받들었으며[歌荒(가황)樔(전)은 山背國(산배국) 葛野郡(갈야군)에 있다], 壹伎縣主(일기현주)의 선조인 押見宿(압견숙)禰가 사당에 모셨다.

*이 해 紀生磐宿(기생반숙)禰가 任那(임나)를 점거하고 高麗(고려)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삼한)의 왕노릇하려고 官府(관부)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신성)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임나)의 左魯(좌노)·那奇他甲背(나기타갑배)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백제)의 適莫爾解(적막이해)를 爾林(이림)185)에서 죽이고[爾林(이림)은 高麗(고려)의 땅이다], 帶山城(대산성)186)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백제)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영군)187) 古爾解(고이해)·內頭(내두)188) 莫古解(막고해)189)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대산성)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생반숙)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담력)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임나)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백제국)이 左魯(좌노)·那奇他甲背(나기타갑배) 등 300여 인을 죽였다.



億計天皇(억계천황) 仁賢天皇(인현천황)



6년(493) 가을 9월 己酉(기유) 초하루 壬子(임자) 日鷹吉士(일응길사)를 보내 高麗(고려)에 사신으로 보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 이번 가을 日鷹吉士(일응길사)가 사신으로 파견된 후에, 어떤 여인이 難波(난파)의 御津(어진)에 살았는데 곡을 하며 “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 어린 풀같은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 하였다[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라 한 것은 우리말로는 於慕尼慕是(어모니모시) 阿例尼慕是(아례니모시)이다190) .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고 한 것은 우리 말로는 阿我圖摩播耶(아아도마파야)라 한다. 어린 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에 어린 풀로 부부를 비유하였으므로 어린 풀을 남편이라 여겼던 것이다]. 곡소리가 매우 슬퍼 사람들의 (장)을 끊는 듯하였다. 菱城邑(능성읍) 사람 鹿父(녹부)[녹부는 사람 이름이다. 사람들은 (부)를 柯曾(가증)이라고 부른다]가 듣고 앞으로 나아가 “어찌 슬피 우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라 하니, 여인이 답하기를 “가을 나무의 슬픔이 더하여 두 배로구나((쌍)은 둘이다). 받아들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鹿父(녹부)가 “그렇다”라 하며 말하는 내용을 알았다. 동반자가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알았습니까”라 물으니, (녹부가) 답하기를 “難波玉作部(난파옥작부)鯽魚女(어녀)[鯽魚女(어녀)라 한 것은 우리 말로 浮儺謎(부나미)라 한다]가 韓白水郞(한백수랑)전[韓白水郞(한백수랑)전이라 한 것은 우리 말로 阿羅摩能波陀該(아라마능파타해)이니, 전은 보리밭을 경작하는 것이다]에게 시집가서 哭女(곡녀)를 낳았고, 哭女(곡녀)[哭女(곡녀)라 한 것은 우리 말로 儺俱謎(나구미)라 한다]는 住道人(주도인) 山杵(산저)에게 시집가서 飽田女(포전녀)를 낳았다. 韓白水郞(한백수랑)전과 그 딸 곡녀는 모두 일찍 죽었는데, 住道人(주도인) 山杵(산저)가 앞서 玉作部(옥작부)鯽魚女(어녀)와 간통하여 추(麤의 약자)(촌)을 낳았다. 麤(촌)은 飽田女(포전녀)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이 때 麤(촌)이 日鷹吉士(일응길사)를 따라 高麗(고려)를 향해 출발하였으므로 그 처인 飽田女(포전녀)가 배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마음의 갈피를 잃고 상심하여 곡소리가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장을 끊을 듯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 해 日鷹吉士(일응길사)가 高麗(고려)로부터 돌아와 工匠(공장) 須流枳(수류지)·奴流枳(노류지) 등을 바치니, 지금의 大倭國(대왜국) 山邊郡(산변군) 額田邑(액전읍)191) 熟皮高麗(숙피고려)192)가 그 후예이다.

 

 

125)韓國(한국) : 三韓(삼한)(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加耶(가야) 등을 칭한 것이다.

126)이 役事(역사) : 바로 앞의 기사 즉, 仁德天皇(인덕천황) 11년 겨울 10월조에 보이는, 難波高津宮(난파고진궁)의 북쪽 들판을 파서 아래의 물을 끌어다 서쪽바다(大阪灣(대판만))에 대게 한 일과, 북쪽 내에 물이 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茨田堤(자전제)를 쌓은 일을 가리킨다.

127)처음으로 나라의·····모두 기록하였다 : 『日本書紀(일본서기)』 권25 孝德天皇(효덕천황) 大化(대화) 원년 7월 百濟(백제)의 사신에게 내린 (조)에, ‘是我遠皇祖之世(시아원황조지세) 以百濟國(이백제국) 爲內官家(위내관가) ···· 後遣三輪栗(후견삼륜율)隈君東人(군동인) 觀察任那國堺(관찰임나국계) 是故(시고) 百濟王隨勅(백제왕수칙) 悉示其堺(실시기계)’라고 되어 있는데, 仁德天皇(인덕천황) 31년의 이 기사는 여기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진 기사가 아닌가 한다.

128)酒君(주군) : 酒君(주군)의 世系(세계)는 알 수 없다. 다만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 右京諸蕃(우경제번) 刑部(형부)・同和泉諸蕃(동화천제번) 百濟公(백제공)・六人部連(육인부련) 등의 姓氏(성씨)가, ‘出自百濟國酒王也(출자백제국주왕야)’라고 되어 있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때 百濟(백제)에서 酒君(주군)을 바쳤다는 기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29)『日本書紀(일본서기)』 仁德天皇(인덕천황) 同年(동년) 同月(동월) 是月條(시월조)에 의하면, 이 달에 처음으로 鷹甘部(응감부)를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시 사람들은 매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鷹甘邑(응감읍)이라 하였다고 한다.

130) 醫員(의원)이 新羅(신라)로부터 ...병이 나았다 : <<古事記(고사기)>>((권) (하))에 “此時(차시)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신량국주공진어조팔십일)척 爾御調大使金波鎭漢紀武(이어조대사금파진한기무) 此人深知藥方(차인심지약방) 故治差帝皇之御病(고치차제황지어병)”이라 하여, 允恭天皇(윤공천황)의 持病(지병)을 신라의 조공사 金波鎭漢紀武(금파진한기무)가 치유했다고 한다.

131) 若干(약간) : 卜部兼右本(복부겸우본)과는 달리 北野本(북야본)과 內閣文庫本(내각문고본)에는 ‘八十一(팔십일)’로 되어있다. 한편 <<古事記(고사기)>>(卷下(권하))에서는 “天皇御年(천황어년) 漆拾捌歲(칠십팔세)”라 하여 允恭天皇(윤공천황)이 78세에 죽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32) 難波津(난파진) : 難波(난파)는 지금의 大阪市(대판시) 지역인데, 大阪(대판)의 瀨戶(뢰호) 內海(내해)의 동쪽 끝과 山背川(산배천) 어구는 옛날부터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좋은 항구가 발달해 있었다. 그곳이 바로 難波津(난파진)인 듯하다.

133) 耳成山(이성산),畝傍山(무방산) : 耳成山(이성산)은 지금의 奈良縣(내량현) 강((목)+(강))原市(원시) 木原(목원)에 있으며 畝傍山(무방산) 역시 강原市(원시)에 있다.

134) 琴引坂(금인판) : 지금의 奈良縣(내량현) 御所市(어소시) 富田(부전)의 白鳥陵(백조릉) 부근으로 추정된다.

135) 飼部(사부) : 이는 律令(률령) 용어로 馬寮(마료)에 소속되어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아보는 品部(품부)이다.

136) 采女(채녀) : 天皇(천황) 옆에서 음식 등을 시중드는 女官(여관)으로, 그 명칭은 後漢(후한)의 宮中官制(궁중관제)에서 기원한다. 일본에서의 采女(채녀)는 지방 호족들이 중앙조정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충성의 保證物(보증물)로 자신의 누이 혹은 딸을 바쳐 천황을 섬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大和改新(대화개신) 때 采女(채녀) 貢進(공진)이 법제화되었다.
신라 사신이 畝傍山(무방산)을 찬미하여 “우네메하야”한 것을 일본 飼部(사부)가 采女(채녀)를 범한 것으로 오해한 이유는 采女(채녀)의 일본어 발음이 “우네메”였기 때문이다.

137) 大泊瀨(대박뢰) 皇子(황자) : 允恭天皇(윤공천황)의 다섯째 아들로 후에 雄略天皇(웅략천황)이 되었다.

138) 來目部(래목부) : 久米部(구미부) 혹은 大來目部(대래목부)라고도 한다. 大和朝廷(대화조정)에서 군대의 中核(중핵)이 되고 있던 品部(품부)의 하나이다.

139) 百濟新撰(백제신찬) : <<日本書紀(일본서기)>> 백제관계 기사의 細註(세주)에 인용된 백제의 史書(사서)로 <<백제기>>, <<백제본기>>와 함께 百濟三書(백제삼서)라 불리운다. 이들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곳과 武烈天皇(무렬천황) 4년조 등 백제 웅진시대의 사실에 관해서는 <<백제신찬>>만이 인용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웅진시대의 사적을 적은 책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140) 己巳年(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했다 : <<三國史記(삼국사기)>> 와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毗有王(비유왕)의 맏아들인 개로왕은 455년(乙未(을미)년)에 즉위하여 475년(乙卯年(을묘년))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로왕 治世(치세) (중)에는 己巳年(기사년)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본서에는 <<百濟新撰(백제신찬)>>을 인용하여 ‘己巳年(기사년)에 개로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일본서기>> 찬자의 誤寫(오사)일지도 모르겠다.

141) 加須利君(가수리군) : ‘蓋鹵(개로)’ 혹은 개로왕의 이름인 ‘慶司(경사)’를 音寫(음사)한 표기로 보인다. 본서(권 24) 皇極天皇(황극천황) 원년 2월조에 蓋蘇文(개소문)을 加須彌(가수미)로 표기한 것이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개로왕은 백제 제 21대 왕으로 ‘近蓋婁王(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 455년에 毗有王(비유왕)을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다가 475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자신도 고구려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42) 軍君(군군) : ‘(군)’과 ‘(곤)’,‘(군)’과 ‘(지)’는 각각 음과 뜻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이다. 昆支(곤지)를 琨支(곤지)로도 적는다(본서 16,武烈天皇(무렬천황) 4년 是歲條(시세조)). 본서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라 하였으나, <<삼국사기>>(권26)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로 東城王(동성왕)의 아버지라 하여 兩書間(량서간)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문주왕 3년(477) 4월에 內臣佐平(내신좌평)이 되었으며 그해7월에 죽었다. 458년에 (송)으로부터 征虜將軍左賢王(정로장군좌현왕)의 관작을 받은 余昆(여곤)과도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는 昆支(곤지)를 河內飛鳥戶造(하내비조호조)의 시조라 하였다.

143) 各羅嶋(각라도) : 지금의 長岐縣(장기현) 東松浦郡(동송포군) 鎭西町(진서정)의 加唐島(가당도)에 비정되고 있다.

144) 嶋君(도군) : ‘(도)’의 일본어 발음이 ‘세마’이므로 嶋君(도군)은 곧 ‘세마임금’ 혹은 ‘세마왕’이라 할 수 있다. 본서(권 16) 武烈天皇(무렬천황) 4년 是歲條(시세조)에 인용한 <<백제신찬>>에 武寧王(무녕왕)의 이름을 斯麻王(사마왕)이라 하였으며, <<삼국사기>>(권 26)에서도 斯摩(사마)라 하였다. 그리고 1971년에 발굴한 武寧王陵(무녕왕릉) 안에 있던 왕의 지석에도 斯麻王(사마왕)이라 하였다. 이는 모두 ‘嶋君(도군)’을 音寫(음사)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5) 武寧王(무녕왕) : 백제 제 25대 왕으로 이름은 斯麻(사마)((마))이다. 그의 계보에 관해서는, 東城王(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과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곤지)의 아들로서 東城王(동성왕)의 異母兄(이모형)이라는 두 설이 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武寧王(무녕왕)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1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재위기간은 501년-523년이다.

146) 辛丑年(신축년)에 개로왕이...천황을 모시게 했는데 : 개로왕 재위기간 중의 辛丑年(신축년)은 461년 즉 개로왕 7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史書(사서)에는 이 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147) 稚媛(치원) : 雄略天皇(웅략천황)의 둘째 (비)로 稚姬(치희)라고도 한다. 稚媛(치원)을 吉備上道臣(길비상도신)의 딸 혹은 그의 아내라고도 하며, 또는 葛城氏(갈성씨)인 玉田宿(옥전숙)녜의 딸이라고도 한다. 雄略天皇(웅략천황)이 죽은 직후 그녀의 아들 星川皇子(성천황자)에게 모반을 敎唆(교사)한 죄로 火刑(화형)을 당하였다.

148) 國司(국사) : 大和改新(대화개신) 이후 大寶(대보), 養老律令(양로률령)에 의하여 법제화된 정식 지방관의 총칭으로, 임기는 보통 6년이었으며 재직기간 동안에 職分田(직분전)을 받았다. 그러나 大和改新(대화개신) 이전의 國司(국사)는 國宰(국재)(구니노미고도모찌)와 같은 뜻으로 천황이 임시로 파견하는 지방장관을 의미한다.

149)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의 아들 玉田宿(옥전숙)녜 : 본서(권 13) 允恭天皇(윤공천황) 5년 7월조에서는 玉田宿(옥전숙)녜를 葛城襲津彦(갈성습진언)의 孫子(손자)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아들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0) 中國(중국) : 日本(일본)을 가리킨다. 645년의 大和改新(대화개신)과 701년의 大寶律令(대보률령) 반포를 통한 통치조직의 정비와 天武(천무),持統(지통),文武天皇代(문무천황대)의 중앙집권정책 성공으로 국내외적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일본은 中國(중국)의 華夷思想(화이사상)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높혀 中國(중국)이라 표현한 듯하다.

151) 韓國(한국) :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변한,진한 즉 三韓(삼한)의 總稱(총칭)이다.

152) 늙은 여자 :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라 기사에 老女(노녀)+(구)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豫知(예지)와 占卜(점복)을 행하는 샤먼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崔光植(최광식),<三國史記(삼국사기) 소재 老女(노녀)+(구)의 性格(성격)>,<<史叢(사총)>> 25,1981.9쪽). 그렇다면 본서의 新羅國神(신라국신) 변한 늙은 여자도 弟君(제군)의 신라정벌을 豫防(예방)했다는 점에서, 노구와 같은 의미로 파악될 수 있을 듯하다.

153) 하루 : 前後(전후) 내용으로 보아 ‘하루(一日(일일))’라는 표현은 부자연스럽다. <<日本書紀通言(일본서기통언)+(정)>>에서는 ‘一日(일일)’을 ‘一月(일월)’로 적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154) 자식에 대해서는 ...보았다 : 본서(권 14) 雄略天皇(웅략천황) 원년 3월조에 의하면, 稚姬(치희)((원))는 천황의 두 아들을 낳았는데 磐城皇子(반성황자)와 星川稚宮皇子(성천치궁황자)가 바로 그들이다.

155) 吾礪(오려) 廣津邑(광진읍) : 吾礪(오려)는 지금의 大阪府(대판부) 八尾市(팔미시) 植松町(식송정) 부근이고 廣津(광진)은 難波津(난파진) 남쪽의 옛 명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56) 新漢(신한) : 옛날에 귀화한 阿知使主(아지사주),都加使主(도가사주) 계열의 漢人(한인)과 대비하여 이 때 새롭게 귀화한 漢人(한인)이라는 뜻이다.



157) (오)나라 : 464년 당시 중국에는 (오)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오)는 중국 남조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 해에 사신으로 간 身狹村主靑(신협촌주청)과 檜隅民使博德(회우민사박덕)은 2년 뒤인 雄略天皇(웅략천황) 10년 9월에 귀국하였다. 그후 同王(동왕) 12년 4월에 재차 (오)에 갔다가 14년 정월에 돌아왔다.

158) 高麗(고려)와 우호를 맺았다 : 신라는 백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4세기 후반에 高句麗(고구려)와 우호관계를 맺어 군사 정치적인 도움을 받았다.그러나 433년의 羅濟同盟(라제동맹)과 450년에 하슬라성주 三直(삼직)이 悉直(실직)에서 고구려 邊將(변장)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관계는 梗塞(경새)되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464년 당시 신라, 고구려의 우호관계 속에서 고구려 군사가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9) 筑足流城(축족류성) : 지금의 大邱地方(대구지방)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60) 綴旒(철류) : 깃대에 묶어서 늘어트린 술은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이 임금을 마음대로 할 때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철류))에 비유한다. <<後漢書(후한서)>> 張衡傳(장형전)에 “君若綴旒(군약철류) 人無所麗(인무소려)”라는 말이 있다.

161) 地道(지도) :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땅을 파서 만든 길로 地下道(지하도) 혹은 塹濠(참호) 등을 말한다.

162) 官軍(관군) : 任那(임나)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말한다. 中國(중국)의 華夷觀(화이관)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中國(중국)’이라 일컬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163)匝(라): 草羅(초라)·歃(량)으로 보아, 지금의 경상남도 梁山(양산)으로 추정하고 있다. 匝은 歃과 같은 음 sap을 옮긴 것이며, (량)·(라)는 (국)을 의미하는 地名語尾(지명어미)이다. 양산은 신라와 가야의 교통로에서중요한 거점이었다.

164)㖨: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경산)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근래에 靈山(영산)·密陽(밀양) 방면의 한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금태식),「6세기 전반 伽耶南部諸國(가야남부제국)의 소멸과정 고찰」(『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 1, 1988).

165) 紀大磐宿(기대반숙)禰: 紀小弓宿(기소궁숙)禰의 아들이다.

166)田身輪邑(전신륜읍):지금의 大阪府(대판부) 泉南郡(천남군) 岬町淡輪(갑정담륜)이다.

167)吳琴(오금): 일본 職員令(직원령) 雅樂寮(아악료)조에 “腰鼓師(요고사) 二人(이인)”이라 하고 그 義解(의해)에서 “(위) 吳樂(오악) 其腰鼓亦爲吳樂之器也(기요고역위오악지기야)”라 하였는데, 伎樂(기악)에 사용되는 악기는 吳鼓(오고) 외에는 (적)·(동)鈸이 있을 뿐 (금)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금)이 아닌 대륙 계통의 (금)에는 고구려에서 발달한 玄琴(현금)(6(현)), 신라에서 발달한 伽耶琴(가야금) 즉 新羅琴(신라금)(12(현))이 있다. 그러나 貴信(귀신)이 백제에서 왔다고 했으므로 吳琴(오금)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8)秦民(진민): 應神天皇(응신천황) 14년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한 弓月君(궁월군)의 후예이다.

169)臣連(신련): 일본 고대의 (성)이다. 大和朝廷(대화조정)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조정에 참여한 여러 豪族(호족)에게 (씨)를 주어 고유의 직업을 세습하게 하는 한편 (성)(可婆(가파)禰)을 부여하여 각 씨의 職掌(직장)을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성)은 경칭적인 성격이 농후한 것과 사회적 입장이나 직능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신)·(련)은 전자에 속한다. 즉 (신)은 조정에서 政務(정무)를 맡고 있던 (씨)에게, (연)은 정무 이외의 특수한 職役(직역)을 맡고 있는 (씨) 중 큰 (씨)에게 부여된 성이다.

170)秦造(진조): (진)의 백성을 관리하는 伴造(반조)인데, 天武(천무) 12년 9월에는 (연), 14년 6월에는 忌寸(기촌)이라고 (성)을 바꾸었으며, 그 일부는 延曆(연력) 연간(782-805)에 宿(숙)禰라고 바꾸었다.

171)(승): マサ·タヘ라고도 읽지만 (촌)의 首長(수장)인 韓語(한어)에서 유래한 スグリ라고 읽는 것이 적당한 듯하다. 즉 고대 일본의 (성)으로, 百濟(백제)에서 건너가 秦氏伴造(진씨반조)를 거느리며 지방의 秦部(진부)를 관할하는 지위에 있었다.

172)縑: 곱게 짠 平織(평직)의 (견)이다.

173)雄略天皇(웅략천황) 20(년):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25 백제본기 蓋鹵王(개로왕) 21(을묘)년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거련)(長壽王(장수왕))이 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한성)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세주)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백제기』의 기사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18 고구려본기 長壽王(장수왕)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삼국사기)』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자비마립간) 17년(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경)이 아들 文周(문주)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174)狛: 高句麗(고구려)의 別稱(별칭)인 듯하다. 『同文通考(동문통고)』에서 “狛 與高麗訓同(여고려훈동) 狛音泊(음박) 獸名(수명) (안)狛 蓋貊之訛(개맥지와) 貊國名(맥국명) 三韓之屬(삼한지속)”이라 하였다.

175)尉禮(위례): 백제 초기의 도성으로, 『三國史記(삼국사기)』에서는 漢城(한성)이라 하였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春宮里(춘궁리) 일대, 風納里(풍납리) 토성, 二聖山城(이성산성), 夢村土城(몽촌토성)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의 서울 강동구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176)久麻那利(구마나리):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쫒겨 옮겨간 熊津(웅진)을 말하며 현재의 충청남도 公州(공주)이다. 구마나리의 古訓(고훈)은 コムナリ로, コム는 한국어 곰(kom)이고 ナリ는 고대 한국어 나리(나루·노리)로 (천)·(진)의 뜻이다.

177)汶洲王(문주왕): 文周王(문주왕), 文州王(문주왕)이라고도 하는데, 재위기간은 475년-477년이다. 蓋鹵王(개로왕) 때 上佐平(상좌평)을 역임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 때 개로왕의 명에 따라 신라에 구원병을 청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개로왕이 이미 죽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그러므로 즉위하여 (목)劦滿致(만치)와 祖彌桀取(조미걸취)의 도움을 받아 熊津(웅진)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실추되어 왕비족인 (해)씨가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특히 兵官佐平(병관좌평) 解仇(해구)가 권력을 독점하여 왕도 통제하지 못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178)久麻那利(구마나리)~: 일본 왕이 공주지역을 주어 백제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 백제가 漢城(한성)에서 熊津(웅진)으로 遷都(천도)한 것을 말한다.

179)蓋鹵王母弟(개로왕모제): 『三國史記(삼국사기)』 권26 文周王(문주왕)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우라 하였으니 확실하지 않다. 한편 개로왕 4년(458) 중국 南朝(남조)의 (송)에서 輔國將軍(보국장군)을 제수받은 餘都(여도)과 동일인물로 보고, 개로왕의 동생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李基東(이기동),「中國史書(중국사서)에 보이는 百濟王(백제왕) 牟都(모도)에 대하여」『歷史學報(력사학보)』 62, 1974).

180)末多王(말다왕): 다음의 23년 여름4월의 기사로 미루어 三斤王(삼근왕)(또는 文斤王(문근왕))이 죽고 즉위하는 東城王(동성왕) 牟大(모대)를 말하는 듯하다.

181)文斤王(문근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三斤王(삼근왕),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三乞王(삼걸왕)이라 하였다. 문주왕 3년 4월 태자로 봉해졌다가 부왕을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6 삼근왕조에는 文周王(문주왕)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표와 『삼국유사」의 왕력에 의거하여 문주왕이 3년만에 죽고 즉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의 재위기간은 477년-479년이다.

182)昆支王(곤지왕): 雄略天皇(웅략천황) 5년(461) 4월의 기사에는 軍君(군군)이라 하였고, 개로왕의 아우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삼국사기)』 권26 문주왕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는 문주왕의 아우라 하였다. 한편 개로왕 4년(458) 중국 남조의 (송)으로부터 征虜將軍(정로장군) 左賢王(좌현왕)을 제수받은 餘昆(여곤)과 동일인물로 보고 문주왕과 함께 개로왕의 아우라고 본 견해도 있다(이기동, 앞의 글). 461년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왜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문주왕 3년 4월 內臣佐平(내신좌평)이 되었다가 7월에 죽었다.

183)東城王(동성왕): 『삼국사기』 권26 동성왕조에 의하면 (휘)는 牟大(모대), 摩牟(마모)이며 『三國遺事(삼국유사)』에 의하면 摩帝(마제), 餘大(여대)라고도 한다. 재위기간은 479년-501년이다.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184)신라를 정벌: 雄略天皇(웅략천황) 7년 吉備上道臣田狹(길비상도신전협)의 아들 弟君(제군)과 吉備海部(길비해부) 直赤尾(직적미)에게 명하였으나, 제군이 백제에까지 갔다가 공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8년에는 가야(임나)왕이 당시 가야에 와 있던 吉備臣小梨(길비신소리) 등에게 고구려와 싸우는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또 9년에도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吉備臣尾代(길비신미대)가 언제 신라에 갔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185)爾林(이림): 爾林城(이림성)인데, 지금의 충청남도 大興(대흥)(옛이름 任城郡(임성군))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전라북도 金堤郡(금제군) 利城(이성)(옛이름 乃利阿(내리아))에 비정되기도 한다. 세주에서 고려의 땅이라 한 것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보아도 무리일 듯하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 영락6년(396)의 정벌 때 수군이 남한강 상류로 진출하여 충주지역을 차지하고 國原城(국원성)을 두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李道學(이도학),「永樂(영락) 6(년) 廣開土王(광개토왕)의 南征(남정)과 國原城(국원성)』,『孫寶基博士停年紀念(손보기박사정년기념) 韓國史學論叢(한국사학논총)』,1988, 知識産業社(지식산업사)).

186)帶山城(대산성): 지금의 전라북도 井邑郡(정읍군) 泰仁面(태인면)이 신라시대에 帶山縣(대산현)이었으므로(『三國史記(삼국사기)』 권37 地理(지리)4) 이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187)領軍(령군): 백제의 軍政(군정)에서 동서남북과 중앙 5(방)에 있었던 領軍(영군)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188)內頭(내두): 백제의 1품관직인 6佐平(좌평) 중 하나인 內頭佐平(내두좌평)으로, 재정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내두좌평을 고이왕 27년(260) 설치했다고 하나, 사비 천도 이후에 좌평제도가 완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莫古解(막고해):백제 근초고왕 24년(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약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190)於慕尼慕是(어모니모시) 阿例尼慕是(아례니모시) : 일본어로는 おもにもせ あれにもせ라 읽는다.

191)額田邑(액전읍): 지금의 大和郡(대화군) 山市(산시) 額田部(액전부) 北町(북정)·寺町(사정)·南町(남정) 부근이다.

192)熟皮高麗(숙피고려): 일본의 職員令(직원령) 大藏省(대장성)조에 “典革一人(전혁일인)(掌雜革染作(장잡혁염작) 檢校(검교)狛(부)) 狛部六人(부육인)(掌雜革染作(장잡혁염작)) 狛(호)”라 하였는데, 牛皮(우피)·麓皮(록피)를 만들었던 수공업자 집단으로 보인다.

193) 意多郞(의다랑);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데 왜에 온 백제 왕족이 아닐까 추측된다.

 

 

일(日) 본(本) 서(書) 기(紀) 상(上)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신대(神代) 상(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1)이 기도전원(奇稻田媛)과 결혼하고자 하여 청하니 각마유(脚摩乳). 수마유(手摩乳)2)가 “바라건대 먼저 저 뱀을 죽이십시오. 그런 다음 결혼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저 뱀은 머리에 각각 석송(石松)이 나 있고 양쪽 겨드랑이에는 산(山)이 있어 매우 무섭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그를 죽이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소(素)전명존(鳴尊)이 꾀를 내어 독한 술을 빚어서 그에게 먹였다. 뱀이 취하여 잠이 들자 소(素)잔명존(鳴尊)이 뱀을 한(韓)서검(劍)3)으로 머리와 배를 베었다. 그 꼬리를 잘랐을 때 칼날이 조금 이지러졌다. 그래서 그 꼬리를 가르고 들여다 보니 따로이 칼 한자루가 있었는데 이름하여 초초(草艸)+치검(雉劍)4)이라 하였다. 이 칼은 옛날에 소(素)잔명존(鳴尊)이 가지고 있었으나 지금은 미장국(尾張國)에 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뱀을 베었던 칼은 지금 길비신부(吉備神部)에 있는데 출운국(出雲國)5)의 파천(川)6)가의 산이 바로 이곳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1, 신대(神代) 상(上), 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의 하는 짓이 매우 버릇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들이 천좌치호(千座置戶)7)의 벌을 내리고 마침내 쫓아 내었다. 이때 소(素)잔명존(鳴尊)은 그의 아들 오십맹신(五十猛神)을 데리고 신라국(新羅國)에 내려가 증시무리(曾尸茂梨)8)란 곳에 살았다. 말하기를 “이 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 하고는 찰흙으로 배를 만들어 그것을 타고 동쪽으로 바다를 건너 출운국(出雲國) 파천(川)가에 있는 조상봉(鳥上峯)9)에 도착했다. 그때 그곳에는 사람을 잡아먹는 큰 뱀이 있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천승작검(天蠅斫劍)으로 그 큰 뱀을 베어 죽였다. 뱀의 꼬리를 베었을 때 칼날이 이지러졌으므로 꼬리를 쪼개어 보니 꼬리 가운데 한자루의 신령(神靈)스러운 칼이 있었다. 소(素)잔명존(鳴尊)이 “이것은 내가 사사로이 사용할 수 없다” 하고는 오세손(五世孫) 천지즙근신(天之葺根神)을 보내어 하늘에 바쳤다. 이것은 지금의 이른바 초초(草艸)+치검(雉劍)이다.

처음에 오십맹신(五十猛神)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나무의 종자(種子)를 많이 가지고 왔다.그러나 한지(韓地)에는 심지 않고 모두 가지고 돌아와 마침내 축자(筑紫)10)로부터 대팔주국(大八洲國)11)안에 심어 푸른 산이 되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오십맹명(五十猛命)을 일컬어 공(功)이 있는 신(神)이라 하는데, 기이국(紀伊國)12)에 모셔진 대신(大神)이 바로 이것이다.

 

권 1 신대(神代) 상(上),제 8단.

 

어떤 책에는 말하였다.

소(素)잔명존(鳴尊)이 “한향(韓鄕)의 섬에는 김은(金銀)이 있다13). 만약 내 아들이 다스리는 나라에 배가 없으면 좋지 않다” 하고는 수염을 뽑아 뿌리니 삼나무가 되었다. 또 가슴의 털을 뽑아서 뿌리니 이것이 전나무가 되었고 꽁무니의 털은 비자나무가 되었으며 눈썹의 털은 녹나무가 되었다. 그런 다음 그것들의 쓰임새를 정하여 이르기를 “삼나무와 녹나무 이 두가지 나무는 배 만드는데 쓸만하고 전나무는 상서(祥瑞)로운 궁전을 짓는 재목으로 쓰며 비자나무는 천하 백성들이 장사지낼 때 죽은 이를 눕히는 도구로 쓸만하다. 또 모름지기 먹을 수 있는 80종의 나무를 모두 심어라” 하였다.

이때 소(素)잔명존(鳴尊)의 아들 오십맹명(五十猛命)과 그의 누이 대옥진희명(大屋津姬命) 그 다음인 과(목(木)+과(瓜))진희명(津姬命), 무릇 3명의 신(神) 역시 나무종자를 널리 퍼뜨릴 수 있었으므로 명을 받들어 기이국(紀伊國)으로 건너갔다. 그후 소(素)잔명존(鳴尊)은 웅성봉(熊成峯)14)에 살다가 마침내 근국(根國)으로 들어갔다. 기호(棄戶)를 우리말로 수다배(須多杯)라 하고 피(목(木)+피(皮))는 마기(磨紀)라 한다.

권5 어간성입언오십경식천황(御間城入言五十瓊殖天皇) 숭신천황(崇神天皇)

 

65년 가을 7월 임나국(任那國)15)이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16)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임나(任那)는 축자국(筑紫國)17)에서 2,000여 리(里) 떨어져 있고, 북쪽은 바다로 막혀있으며18) 계림(鷄林)19)의 서남쪽에 있다.

 

권6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言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2년 이 해에 임나인(任那人)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가 자기나라에 돌아가고자 청하였다. 선황(先皇)의 시대에 조공하러 왔다가 돌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나갈질지(蘇那曷叱知)에게 많은 상을 주고 붉은 비단 1백 필을 가지고 가 임나왕에게 주게 하였다. 그러나 신라인이 길을 막고 그것을 빼앗았다. 그 두 나라의 원한은 이 때 처음으로 시작되었다. [일설(一說)은 다음과 같다. 어간성천황(御間城天皇)(숭신천황(崇神天皇)) 때에 이마에 뿔이 난 사람이 한 척의 배에 타고 월국(越國)20) 笥반포(飯浦)21)로 그곳을 각록(角鹿)이라 이름하였다. 그에게 “어느 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의부가라(意富加羅)22) 국왕(國王)의 아들로, 이름은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23), 또 다른 이름은 우사기아리질지간기(于斯岐阿利叱智干岐)24)이다. 일본국(日本國)25)에 훌륭한 임금이 있다고 전해 들었으므로 귀화하려 합니다. 혈문(穴門)26)에 도착했을 때, 그 나라에 이도도비고(伊都都比古)라는 이름의 사람이 있었는데 신(臣)에게 ‘나는 이 나라의 왕이다. 나를 제외하고는 다시 두 왕이 없다. 그러므로 다른 곳으로 가지 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런데 신이 그 사람됨을 자세히 보니 기필코 왕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곧 다시 그곳을 물러났으나 길을 몰라 섬과 포구를 오랫동안 맴돌다가 북해(北海)로부터 돌아 출운국(出雲國)을 거쳐 이 곳에 왔습니다”고 말하였다. 그 때 천황의 죽음을 만나 (이곳에) 머물러 활목천황(活目天皇)(수인천황(垂仁天皇))에게 벼슬하여 3년에 이르렀다. 천황이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에게 “너희 나라에 돌아가고 싶은가”라고 묻자, “매우 바랍니다”고 답하였다. 천황이 아라사등(阿羅斯等)에게 “네가 길을 잃지 않고 빨리 왔다면 선황을 뵙고 모셨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 본국의 이름을 바꾸되 어간성(御間城)27)천황의 이름을 따서 바로 너희 나라 이름으로 하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적직견(赤織絹)을 아라사등(阿羅斯等)에게 주어 본국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러므로 그 나라 이름을 미마나국(彌摩那國)이라 부르는 것은 이러한 인연 때문이다. 이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은 받은 적견(赤絹)을 자기나라의 군부(郡府)에 간직하였는데, 신라인들이 듣고 군대를 일으켜 와서 그 적견을 모두 빼앗았다. 이것이 두 나라가 서로 원한을 맺은 시작이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과거에 도노아아라사등(都怒我阿羅斯等)이 자기나라에 있을 때에 황소에 농기구를 싣고 농막에 가려했는데, 황소가 갑자기 없어져 그 자취를 찾아보니 발자취가 한 군가(郡家)에 머물렀다. 당시 한 노인이 “너희가 찾는 소는 이 군가(郡家)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군공(郡公) 등이 ‘소가 짊어진 물건으로 미루어 보니 반드시 죽여서 먹으려는 것이다. 만약 그 주인이 찾아 오면 물건으로 배상하자’하고 곧 죽여서 먹었다. 만약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지 물으면 재물을 바란다고 하지 말고 군(郡)에서 제사지내는 신(神)을 얻고자 할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였다. 얼마 후 군공(郡公) 등이 와서 “소 값으로 어떤 물건을 얻기를 바라는가”라고 하자, 노인이 기르쳐준 대로 대답하였다. 그들이 제사지내는 신은 흰 돌이었다. 흰 돌을 소 값으로 주었으므로 가지고 와서 침실 속에 두었더니, 그 신석(神石)이 아름다운 동녀(童女)로 변하였다. 이에 아라사등(阿羅斯等)이 크게 크게 기뻐하여 동침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아라사등(阿羅斯等)이 다른 곳에 간 동안 동녀가 갑자기 없어졌다. 아라사등(阿羅斯等)이 크게 놀라 자기 부인에게 “동녀가 어디로 갔소”라고 물으니, “동방(東方)을 향해 갔습니다”고 대답하였다. 곧 찾기 시작하여 드디어 멀리 바다에 떠서 일본국(日本國)에 들어갔다. 그가 찾던 동녀는 난파(難波)28)에 나아가서 비매어증사신(比賣語曾社神)이 되었고 또 풍국(豊國)29)의 국전군(國前郡)30)에 이르러 다시 비매어증사신(比賣語曾社神)이 되어, 이 두 곳에서 함께 제사를 받았다].

 

권6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3년 봄 3월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31)이 귀화했다. 가지고 온 물건은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鵜록록(鹿鹿) 적석옥(赤石玉) 1개, 출석소도(出石小刀) 1자루, 출석(出石)鉾 1자루, 일경(日鏡)(청동거울) 1개, 웅신리(熊神籬)32) 1개 등 7가지였는데33), 단마국(但馬國)34)에 보관하여 항상 신물(神物)로 삼았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처음에 천일창(天日槍)이 작은배를 타고 와서 파마국(播磨國)에 정박하여 육속읍(肉粟邑)35)에 있었다. 그 때 천황이 삼륜군(三輪君)의 시조 대우주(大友主)와 왜직(倭直)의 시조 장미시(長尾市)를 파마(播磨)에 보내어 천일창(天日槍)에게, “너는 누구이며,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었다. 천일창(天日槍)이, “저는 신라 국왕의 아들인데, 일본국(日本國)36)에 성황(聖皇)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라를 동생 지고(知古)에게 주고 귀화하였습니다”라 대답하고, 물건을 바쳤는데 엽세주(葉細珠), 족고주(足高珠), 鵜록록(鹿鹿) 적석주(赤石珠), 출석도자(出石刀子), 출석창(出石槍), 일경(日鏡), 웅신리(熊神籬), 담협천대도(膽狹淺大刀) 등 8가지였다. 이에 (천황이) 천일창(天日槍)에게, “파마국(播磨國) 육속읍(肉粟邑)이나 담로도(淡路島) 출천읍(出淺邑)의 두 읍 중에서 너의 마음대로 살도록 하라”고 조칙을 내렸다. 이 때 천일창(天日槍)이, “신이 장차 거주할 곳에 대하여 만일 천은(天恩)을 내려 신이 원하는 곳을 허락하신다면, 신이 직접 여러 나라를 돌아보고 마음에 드는 곳을 지급받고자 합니다”라고 아뢰니, 이를 허락하였다. 이에 천일창(天日槍)이 菟도하(道河)37)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북으로 근강국(近江國)38) 오명읍(吾名邑)39)에 들어가 잠시 머물다가 다시 근강(近江)으로부터 약협국(若狹國)40)을 거쳐 서쪽으로 단마국(但馬國)에 이르러 거주처를 정하였다. 근강국(近江國) 경촌곡(鏡村谷)41) 도인(陶人)42)은 바로 천일창(天日槍)을 따라온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천일창(天日槍)은 단마국(但馬國) 출도(出嶋)의 사람 태이(太耳)43)의 딸 마다오(麻多烏)와 결혼하여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다. 제조(諸助)는 단마일유저(但馬日楢杵)를 낳고 일유저(日楢杵)는 청언(淸彦)을 낳았으며 청언(淸彦)은 전도간수(田道間守)를 낳았다.]

 

88년 가을 7월 기유 초하루 무오(戊午) 여러 신하들에게 조칙을 내려, “짐이 듣자하니 신라 왕자 천일창(天日槍)이 처음 올 때에 가지고 온 보물이 단마(但馬)에 있다고 한다. 처음에 나라 사람들이 이를 보고 귀하다고 여겨 신보(神寶)로 삼았는데, 짐이 그 보물을 보고자 한다”라 하고, 그 날 사자를 보내 천일창(天日槍)의 증손 청언(淸彦)에게 조칙을 내려 바치도록 하였다. 청언(淸彦)이 조칙을 받고 스스로 신보(神寶)를 받들어 바쳤다. 우태옥(羽太玉) 1개, 족고옥(足高玉) 1개, 鵜록록(鹿鹿) 적석옥(赤石玉) 1개, 일경(日鏡) 1개, 웅신리(熊神籬) 1개 등을 바쳤으나, 오직 출석(出石)이라는 소도(小刀)에 대해서는 청언(淸彦)이 갑자기 이를 바쳐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하여 도포 속에 숨겨놓고 자신이 차고 다녔다. 천황이 소도(小刀)를 숨겨놓은 것을 알지 못하고 청언(淸彦)을 총애하고자 하여 어소(御所)에 불러 술을 내렸다. 이 때 칼이 도포로부터 나와 드러나니, 천황이 보고 친히 청언(淸彦)에게, “네 도포 안에 있는 칼은 어떤 칼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청언(淸彦)이 칼을 숨길 수 없음을 알고, “바친 신보(神寶)와 같은 종류의 물건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천황이 청언(淸彦)에게, “그 신보(神寶)를 어찌 달리 둘 수 있겠느냐”라고 이르므로, 이에 바치니 모두 신부(神府)에 보관하였다. 그 후 얼마있다가 보부(寶府)를 열어보니 소도(小刀)가 없어졌다. 이에 사람을 시켜 청언(淸彦)에게, “네가 바친 칼이 홀연히 없어졌는데, 혹시 너의 집에 돌아오지 않았느냐”라고 물었다. 청언(淸彦)이 “어제 저녁에 칼이 저절로 신(臣)의 집에 이르렀다가 오늘 아침에 사라졌습니다”라고 대답하므로, 천황이 두려워하며 다시 찾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 출석도자(出石刀子)가 저절로 담로도(淡路島)에 이르렀는데 그 섬 사람들이 ‘신(神)’이라 이르고 칼을 위하여 사당을 세웠다. 이는 지금까지도 제사를 지낸다. 옛날 한 사람이 작은 배를 타고 단마국(但馬國)에 정박하였는데, “너는 어느나라 사람인가”라고 물으니, “신라 왕자인데, 이름은 천일창(天日槍)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단마(但馬)에 머물러 그 나라 전진이(前津耳)[일설에는 전진견(前津見)이라 하고, 또 일설에는 태이(太耳)라고 한다.]의 딸 마(麻)拕능오(能烏)와 결혼하여 단마제조(但馬諸助)를 낳았는데 이가 청언(淸彦)의 할아버지이다.

 

90년 봄 2월 경자(庚子) 초하루 천황이 전도간수(田道間守)44)를 상세국(常世國)45)에 보내어 사시사철 나는 향과(香菓)[이는 우리말로 개구능미(箇俱能未)라고 이른다.]를 구하도록 하였는데, 지금 귤(橘)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것이다.

 

활목입언오십협모천황(活目入彦五十狹茅天皇) 수인천황(垂仁天皇) 후기(後紀)

(천황이 죽은) 다음 해 (경행천황(景行天皇) 2년) 봄 3월 신미(辛未) 초하루 임오(壬午)(12일) 전도간수(田道間守)가 상세국(常世國)으로부터 돌아왔는데, 가지고 온 것은 사시사철 나는 향과(香菓) 8간(竿) 8縵46)이었다. 전도간수(田道間守)가 이에 슬피 울며 탄식하여, “천조(天朝)의 명을 받들어 먼 이국땅에 가서, 만리의 파도를 넘고 멀리 약수(弱水)47)를 건넜다. 이 상세국(常世國)은 신선(神仙)이 사는 신비한 구역으로서 속인(俗人)이 갈 수 없는 곳이다. 이로써 왕래하는 가운데 10년이 지났는데, 어찌 홀로 큰 파도를 넘어 다시 본토로 돌아올 줄을 기약했으리오. 그러나 성제(聖帝)의 신령(神靈)에 힘입어 겨우 돌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천황이 이미 돌아가셔서 다녀왔음을 보고할 수 없으니 신(臣)이 비록 살았다고 하나 또한 무엇이 보탬이 되리오”라 말하고, 천황의 능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스스로 목숨을 끊으니 뭇 신하들이 듣고 모두 눈물을 흘렸다. 전도간수(田道間守)는 삼택련(三宅連)48)의 시조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권 8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 중애천황(仲哀天皇)

 

(8년) 가을 9월 을해(乙亥) 초하루 기묘(己卯) 군신(群臣)에게 조칙(詔勅)을 내려 웅습(熊襲)49)을 토벌하는 것을 의논케 했다. 이 때 신(神)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 주기를,“천황은 어찌 웅습(熊襲)이 복종하지 않는 것을 근심하는가. 그곳은 힘없고 쓸모없는 나라이니 어찌 군대를 일으켜 칠 만하겠는가. 이 나라보다 더욱 보물(寶物)이 많은 나라50)가 있으니 비유하면 처녀의 눈썹과 같고 진(津)의 건너편에 있는 나라이다[녹(碌)은 우리말로 마용이지(麻用弛枳)라고 한다] 눈부신 금과 은, 비단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이 나라를 杼금신라국(衾新羅國)51)이라고 한다. 네가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낸다면 칼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그 나라가 반드시 스스로 항복해 올 것이며 또 웅습도 복종하게 될 것이다. 제사를 지낼 때에는 천황의 배와 혈문직천립(穴門直踐立)이 바친 수전(水田), 이름하여 대전(大田)이라 이름하는 것 등의 물건을 폐백으로 하라”고 하였다. 천황이 신(神)의 말을 듣고 의심하는 마음이 있어 문득 높은 산에 올라 멀리 대해(大海)를 바라보았으나, 넓고 멀기만 할뿐 그 나라는 보이지 않았다. 이에 천황이 신(神)에게 “제가 두루 살펴 보았으나 바다만 있고 나라는 없었습니다. 어찌 텅빈 곳에 나라가 있겠습니까. 어떤 신(神)이길래 헛되이 저를 속이십니까. 또한 우리 황실의 여러 천황들이 하늘과 땅의 모든 신들에게 제사를 드렸는데, 어찌 남은 신이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그때 신이 또한 황후에게 신탁하여 “물에 비친 그림자처럼 분명하게, 내려다 보아 내가 본 나라인데 어찌 없다고 하며 내 말을 비방하느냐. 그런데도 너는 이같이 말하고 마침내 믿지 않으니 너는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직 지금 황후가 비로소 태기가 있으니 그 아들이 얻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천황은 여전히 믿지 않고 웅습을 억지로 공격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왔다.

 

(9년) 이 해 신라 정벌52)로 말미암아 천황을 장사지낼 수 없었다.

 

권 9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 신공황후(神功皇后)

 

9년 봄 2월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仲哀天皇))이 축자(筑紫)의 橿일궁(日宮)에서 죽었다. 이 때 황후는 천황이 신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다가 일찍 죽은 것을 슬퍼하고 신의 재앙임을 알아 재물이 많은 보배로운 나라53)를 얻고자 하였다. 그래서 군신(群臣)과 백료(百寮)들에게 명하여 죄를 빌고 잘못을 뉘우치도록 하고 소산전읍(小山田邑)에 齌궁(宮)을 다시 지었다.

여름 4월 임인(壬寅) 초하루 갑진(甲辰) 북으로 화전국(火前國) 송포현(松浦縣)에 이르러 옥도리(玉嶋里)의 작은 냇가에서 식사를 하였다. 이 때 황후가 바늘을 구부려 낚시바늘을 만들어 밥알을 미끼로 하고 치마의 실을 풀어서 낚시줄로 하여 물 가운데의 돌 위로 올라가 낚시를 던지고 “짐은 서쪽의 재국(財國)을 얻고자 합니다. 만약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면 물고기가 낚시를 물게 하소서”라고 빌었다. 인하여 낚시대를 드니 비늘이 잔 고기가 걸려 있었다. 이 때 황후가 말하기를 “보기 드문 것이다.”[희견(希見)은 우리말로 매두라지(梅豆邏志)라 한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곳을 매두라국(梅豆羅國)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송포(松浦)54)라고 하는데 잘못 전해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 나라 여인이 매년 4월 상순에는 물속에 낚시를 던져서 은어(銀魚)를 잡는 것이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으며, 남자는 비록 낚시질을 하더라도 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황후는 신의 가르침이 징험이 있음을 알아서 다시 하늘과 땅의 신에게 제사지내고 몸소 서쪽을 치고자55) 하였다. 이에 신전(神田)을 정하여 이를 경작시켰다. 그 때에 나하(儺河)의 물을 끌어다가 신전(神田)을 기름지게 하고자 하여 도랑을 팠는데, 적경강(迹驚岡)에 이르러 커다란 바위가 막고 있어 도랑을 팔 수 없었다. 황후가 무내숙(武內宿)禰를 불러 칼과 거울을 받들고 하늘과 땅의 신에게 기도하여 도랑이 통하기를 구하게 했다. 그러자 천둥과 번개가 쳐 바위를 깨뜨려 물을 통하게 하였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그 도랑을 열전구(裂田溝)라 하였다. 황후는 橿일포(日浦)56)에 돌아와서 머리를 풀고 바닷가에서 “나는 하늘과 땅의 신의 가르침을 받고 황조(皇祖)의 영(靈)을 힘입어 창해(滄海)를 건너가 몸소 서쪽을 치고자 합니다. 그래서 머리를 바닷물에 씻는데 만약 영험이 있다면 머리카락이 저절로 양쪽으로 나뉘도록 해주소서”라고 하였다. 곧 바다에 들어가 씻었더니 머리카락이 저절로 나뉘어졌다. 황후는 나뉘어진 머리카락을 묶어 상투를 틀었다. 인하여 군신에게 “무릇 군대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이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다. 안위(安危)와 성패는 반드시 여기에 있다. 지금 정벌할 곳이 있는데 이 일을 여러 신하들에게 맡겨 만약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죄가 그대들에게 있게 되므로 이는 매우 걱정스러운 것이다. 나는 부녀자이고 부초(不肖)하지만 잠시 남자의 모습을 빌려 웅대한 계략을 일으키고자 한다. 위로는 하늘과 땅의 신의 영(靈)을 힘입고 아래로는 군신(群臣)의 도움을 받아 군대를 일으켜 험한 파도를 건너 선박을 정돈하여 재물이 많은 땅57)을 얻고자 한다. 만약 일이 이루어지면 그대들과 함께 공(功)을 얻게될 것이고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에게만 죄가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이런 뜻이 있으니 이를 함께 의논하자”고 하였다. 군신(群臣)이 모두 “황후가 천하를 위하여 종묘 사직을 안정시키고자 하고 또 죄가 신하에게 미치지 않도록 하시니 머리를 조아려 명령을 받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가을 9월 경오(庚午) 초하루 기묘(己卯) 여러 나라로 하여금 선박을 모으고 군사를 훈련하게 했다. 이 때 군졸(軍卒)들이 잘 모이지 않았으므로 황후가 “반드시 신의 마음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곧 대삼륜사(大三輪社)를 세우고 칼과 창을 바치자 군중(軍衆)들이 저절로 모였다. 이에 오옹(吾瓮)의 해인(海人) 오마려(烏摩呂)로 하여금 서해(西海)로 나가서 나라가 있는지 살펴 보도록 했다. 돌아와서 “나라는 보이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또 기록(磯鹿)의 해인(海人) 명초(名草)를 보내어 살펴보게 했다. 며칠 뒤 돌아와서 “서북쪽에 산이 있는데 구름이 띠처럼 두르고 있었습니다. 대개 나라가 있는 듯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길일(吉日)을 점쳐서 출발하기까지 며칠이 남았는데, 이 때 황후가 친히 부월(斧鉞)58)을 잡고 3군(軍)에게 명령하기를 “징과 북소리가 절도가 없고 깃발이 뒤섞여 어지러우면 곧 사졸(士卒)들이 정돈되지 않는다. 재물이 많기를 탐하고 사사로이 처자(妻子)의 일을 생각하면 반드시 적의 포로가 될 것이다. 적이 적더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되며 적이 강하다고 해서 굴복해서도 안된다. 폭력으로 부녀자를 범한 자를 용서하지 말고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 전쟁에 이기는 자는 반드시 상을 받을 것이요, 도주하는 자는 당연히 죄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얼마후 신(神)이 가르치기를 “화혼(和魂)은 왕의 몸에 붙어서 목숨을 지킬 것이고, 황혼(荒魂)은 선봉이 되어 군선을 인도할 것이다”라 하였다[화혼(和魂)은 우리말로 이기(珥岐)瀰다마(多摩)라 하고 황혼(荒魂)은 우리말로 아라(阿邏)瀰다마(多摩)라고 한다]. 신(神)의 가르침을 얻고나서 배례(拜禮)하고, 의망오언남수견(依網吾彦男垂見)을 신에게 제사지내는 주재자로 삼았다. 이 때 마침 황후의 산달이었는데 황후가 돌을 들어 허리에 차고 빌며 “일이 끝나고 돌아오는 날 이 땅에서 낳게 해주소서”라고 빌었다. 그 돌은 지금 이도현(伊覩縣)의 길가에 있다. 이리하여 황혼(荒魂)을 군(軍)의 선봉으로 하고 화혼(和魂)을 청하여 왕선(王船)에 모셨다.

겨울 10월 기해(己亥) 초하루 신축(辛丑) 화이진(和珥津)으로부터 출발했다. 이 때 바람의 신은 바람을 일으키고 파도의 신은 파도를 일으켰으며 바다 속의 큰 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도왔다. 곧 큰 바람이 순조롭게 불고 배는 물결을 따라 갔으므로 노젓는 데 힘들이지 않고 바로 신라에 도착하였다. 이 때 배를 실은 물결이 멀리 나라 가운데까지 미쳤으니 곧 하늘과 땅의 신들이 모두 도왔음을 알겠다. 신라왕은 이에 두려워 떨며 몸둘 바를 모른채 여러 사람을 모아놓고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에 넘친 일을 듣지 못했다. 만약 천운(天運)이 다했다면 나라가 바다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배가 바다에 가득차고 깃발들이 햇빛에 빛났다. 북과 나팔소리가 나니 산천이 모두 떨었다. 신라왕이 멀리서 바라보고 심상치 않은 군대가 장차 자기 나라를 멸망시킬 것으로 여겨 두려워하며 싸울 뜻을 잃었다. 잠시후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니 동쪽에 신국(神國)이 있는데 일본(日本)이라고 하며 성스러운 왕이 있어 천황(天皇)이라고 한다. 반드시 그 나라의 신병(神兵)일 것이니 어찌 병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라 하고 곧 흰 기를 들고 스스로 항복하여 왔다. 흰 끈을 목에 걸어 항복하고59) 도적(圖籍)60)을 봉인하여 왕의 배 앞에 와서 항복하였다.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금 이후로는 하늘과 땅과 같이 길이 엎드려 사부(飼府)61)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틈없이 봄 가을로 말의 털을 씻는 빗과 말채찍62)을 바치겠습니다. 또한 바다가 먼 것을 번거롭게 여기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조(調)를 바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의 해가 다시 서쪽에서 떠오르지 않는다면, 또한 아리나례하(阿利那禮河)63)가 오히려 거꾸로 흐르고, 냇돌이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봄 가을의 조공을 거르고 빗과 채찍을 바치지 않거나 게을리하면 하늘과 땅의 신이 함께 토벌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신라왕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황후는 “처음에 금은의 나라를 주겠다고 한 신의 가르침을 받들고 3군(軍)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고 하였다. 지금 이미 재국(財國)을 얻었고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했으니 죽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하였다. 이에 항복의 결박을 풀고 사부(飼部)로 삼았다. 드디어 그 나라안에 들어가 보물 창고를 봉하고 도적문서(圖籍文書)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고 있던 창을 신라왕의 문에 세워 후세의 증거로 삼았다. 그래서 그 창은 지금도 신라왕의 문에 서있다. 이에 신라왕 파사매금(波沙寐錦)64)은 미질기지파진간기(微叱己知波珍干岐)65)를 볼모로 하여 김(金)‧은(銀)‧채색(彩色)‧능(綾)‧라(羅)‧縑견(絹)을 배 80척에 싣고 관군(官軍)을 따르게 했다. 이리하여 신라왕은 항상 80척의 조(調)를 일본국(日本國)에 바쳤는데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 이 때 고려(高麗)와 백제(百濟)의 두 나라 국왕66)이 신라가 도적(圖籍)을 거두어 일본국에 항복하였다는 것을 듣고 몰래 그 군세(軍勢)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군영(軍營) 밖에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서약하여 “지금 이후로는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67)으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삼한(三韓)이다. 황후가 신라로부터 돌아왔다.

12월 무술(戊戌) 초하루 신해일(辛亥日) 예전천황(譽田天皇)을 축자(筑紫)에서 낳았다. 그래서 그 때 사람들이 낳은 곳을 우(宇)瀰라고 불렀다.[일설은 다음과 같다.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이 축자(筑紫) 강일궁에 머무르고 있을 때 신이 사(沙)麽현주(縣主)의 조(祖)인 내피고국피고송옥종(內避高國避高松屋種)에게 신탁하여 천황에게 “천황이 만약 보배의 나라를 얻고자 한다면 실제로 주리라”고 깨우쳐 주었다. 다시 말하기를 “거문고를 가지고 와서 황후에게 바쳐라”고 하였다. 곧 신의 말을 따라 황후가 거문고를 탔다. 이에 신이 황후에게 신탁하여 가르쳐주기를 “지금 천황이 바라고 있는 나라는 비유하면 사슴의 뿔과 같아서 실속이 없는 나라이다. 지금 천황이 타고 있는 배와 혈호직천립(穴戶直踐立)이 바친 수전(水田), 즉 대전(大田)이란 것을 폐백으로 하여 나에게 제사를 잘 지내면 미녀의 눈썹과 같은 김(金)‧은(銀)이 많은 눈부신 나라를 천황에게 주리라”고 하였다. 이 때 천황이 신에게 “비록 신이라고 하지만 어찌 거짓말을 하는가, 어디에 나라가 있다는 말인가, 또 내가 탄 배를 신에게 바치면 나는 어느 배를 타야하는가, 그러나 어떤 신인지도 모르니 그 이름을 알고 싶다”고대답 하였다. 이 때 신이 그 이름을 일컫기를 “표통웅(表筒雄), 중통웅(中筒雄), 저통웅(底筒雄)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세 신의 이름을 일컫고 또한 거듭하여 “나의 이름은 향(向)匱남문습대력오어혼속협등존(男聞襲大歷五御魂速狹騰尊)이다”라고 말하였다. 이 때 천황이 황후에게 “듣기 거북한 말을 하는 부인(婦人)이다. 어찌 속협등(速狹騰)68)이라고 말하는가”라고 하였다. 이 때 신이 천황에게 “왕 그대가 이같이 믿지 않으니 반드시 그 나라를 얻지 못할 것이다. 오로지 지금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얻게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날 밤 천황이 갑자기 병이 나서 죽었다. 그 뒤 황후가 신의 가르침을 따라 제사지냈다. 즉 황후는 남자의 복장을 하고 신라를 정벌하였다. 이 때 신이 (황후에게) 머물며 인도하였으므로 배를 따라 파도가 일어 멀리 신라까지 미쳤다. 이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69)이 나와서 맞이하여 무릎을 꿇고 왕의 배에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며 “신(臣)은 지금 이후로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가 되어 조공을 끊지 않겠습니다”라 하였다. 또 일설은 다음과 같다.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데리고 가서 왕의 무릎뼈를 빼고 돌 위에서 기게 하였다. 조금 있다가 목베어 모래 속에 묻었다. 그리고 한 사람을 머물게 하여 신라의 재상으로 삼고 돌아왔다. 그 후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주검을 묻은 곳을 몰라서 혼자 재상을 꾀일 생각을 하였다. 곧 재상을 유인하여 “당신이 왕의 주검을 묻은 곳을 가르쳐 준다면 반드시 후하게 보답하고 또 제가 당신의 아내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재상이 속이는 말을 믿고 주검을 묻은 곳을 몰래 알려 주었다. 그러자 왕의 처가 나라 사람들과 함께 의논하여 재상을 죽이고 또 왕의 주검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사지냈다. 이 때 재상의 주검을 왕묘의 밑에 묻고 왕의 널을 들어 그 위에 얹고 “높고 낮음의 순서는 진실로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를 천황이 듣고 다시 매우 화가 나 크게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멸망시키려고 하였다. 그래서 군선(軍船)이 바다에 가득차서 나아가니, 이 때 신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곧 서로 모여 함께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사죄하였다]70).

이에 군대를 따라갔던 신 표통남(表筒男)‧중통남(中筒男)‧저통남(底筒男) 세 신이 황후에게 “우리 황혼(荒魂)을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서 제사지내도록 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이 때 혈문직(穴門直)의 조상인 천립(踐立)과 진수련(津守連)의 조상인 전상견숙(田裳見宿)禰가 황후에게 “신(神)이 머물고자 하는 땅을 반드시 받들어 정하여야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래서 천립(踐立)을 황혼(荒魂)을 제사지내는 신주(神主)로 삼고 혈문산전읍(穴門山田邑)에 사당(祠堂)을 세웠다. 신라를 친 이듬해 봄 2월에 황후는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혈문풍포궁(穴門豊浦宮)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천황의 널을 거두어 바닷길로 서울을 향했다. 이 때 麛판왕(坂王)‧인웅왕(忍熊王)이 천황이 죽고, 또 황후가 서쪽을 정벌하고 천황의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5년 봄 3월 계묘(癸卯) 초하루 기유일(己酉日) 신라왕이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71) 부라모지(富羅母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는데 전에 볼모로 와 있던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72)을 돌아가게 하려는 생각이 있었다. 이에 허지벌한(許智伐旱)을 꾀어 “사신 汙례사벌(禮斯伐)과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나에게 ‘우리 왕이 제가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는 것에 연루시켜 처자를 모두 종으로 삼았다’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데 잠시 본토에 돌아가서 그 사정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요”라 속이게 하였다. 황태후가 곧 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딸려 보냈다. 함께 대마(對馬)에 도착하여 鉏해(海)의 수문(水門)73)에 머물렀다. 이 때 신라의 사신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이 몰래 배와 뱃사공을 나누어 미질한기(微叱旱岐)를 태우고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 풀을 묶어 사람 모습을 만들어 미질허지(微叱許智)의 자리에 두고 거짓으로 병든 사람인 채하고 습진언(襲津彦)에게 “미질허지(微叱許智)가 갑자기 병이 들어서 죽으려고 한다”고 하였다. 습진언(襲津彦)이 사람을 시켜 병자를 돌보게 했는데, 속인 것을 알고 신라 사신 세 사람을 붙잡아서 우리 속에 집어넣고 불태워 죽였다. 그리고 신라에 나아가 도(蹈)鞴진(津)74)에 이르러 초라성(草羅城)75)을 정벌하고 돌아왔다76). 이 때 사로잡힌 사람들이 오늘날의 상원(桑原)과 좌(佐)糜‧고궁(高宮)‧인해(忍海) 4읍의 한인(漢人) 등의 시조이다.

 

46년(366) 봄 3월 을해(乙亥) 초하루 사마숙(斯摩宿)禰를 탁순국(卓淳國)77)에 보내었다.[사마숙(斯麻宿)禰는 어떤 성씨(姓氏)의 사람인지 모른다] 이 때 탁순왕말금한기(卓淳王末錦旱岐)가 사마숙(斯摩宿)禰에게 “갑자년(甲子年) 7월에 백제인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78) 세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이 동방에 일본이라는 귀한 나라가 있음을 듣고 우리들을 보내어 그 나라에 조공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여기에 왔습니다. 만약 신들에게 길을 통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우리 왕이 반드시 군왕(君王)에게 덕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 때 구(久)氐 등에게 ‘전부터 동쪽에 귀한 나라가 있다고 들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어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바다가 멀고 파도가 험하여 큰 배를 타야 겨우 통할 수 있을 것이니 비록 길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도달할 수 있겠는가’라 하였다. 그러자 구(久)氐 등이 ‘그렇다면 지금은 갈 수 없겠습니다. 그렇지 않고 가려면 다시 돌아가서 배를 갖춘 뒤에 가야 하겠습니다’라 하고 ‘만약 귀한 나라의 사신이 오면 반드시 우리나라에도 알려 주십시요’라 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이에 사마숙(斯摩宿)禰는 종자(從者) 이파이(爾波移)와 탁순인(卓淳人) 과고(過古) 두 사람을 백제국에 보내어 그 왕을 위로하였다. 이 때 백제 초고왕(肖古王)79)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고, 다섯가지 빛깔의 채견(綵絹) 각 1필과 각궁전(角弓箭) 및 철정(鐵鋌) 40매(枚)를 이파이(爾波移)에게 주었다. 또 보물창고를 열어 여러가지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같은 진기한 보물들이 많이 있다. 귀한 나라에 바치고자 하나, 길을 알지 못하여 마음만 있을 뿐 따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 사자(使者)에게 부쳐서 바친다”고 하였다. 이에 이파이(爾波移)가 일을 받들고 돌아와서 지마숙(志摩宿)禰에게 보고했다. 바로 탁순(卓淳)으로부터 돌아왔다.

 

47년(367) 여름 4월 백제왕이 구(久)氐‧미주류(彌州流)‧막고(莫古)를 보내어 조공하게 했다. 이 때 신라국의 조사(調使)가 구(久)氐와 함께 왔다. 이에 황태후와 태자 예전별존(譽田別尊)이 매우 기뻐하며 “선왕이 바라던 나라 사람들이 지금 와서 조공하니, 천황에게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도다”라 하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나라의 공물을 조사하였더니 신라의 공물은 진기한 것이 매우 많았는데, 백제의 공물은 적고 천하여 좋지 않았다. 이에 구(久)氐 등에게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니 어찌된 것이냐”고 물었다. “우리들이 길을 잃어서 사비신라(沙比新羅)80)에 이르렀는데 신라인들이 우리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세 달이 지난 후 죽이고자 하였는데 이 때 구(久)氐 등이 하늘을 향하여 저주하였더니 신라인들이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을 우리 나라의 공물로 바꾸었습니다. 또 우리들에게 ‘만약 이 일을 말하면 돌아가는 날 너희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구(久)氐 등은 두려워서 그대로 따랐습니다. 이리하여 겨우 천조(天朝)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고 대답하였다. 이 때 황태후와 예전별존(譽田別尊)이 신라 사신을 책망하고 천신에게 기도하여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일의 사실 여부를 조사시키며, 누구를 신라에 파견하여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라 하였다. 천신이 “무내숙(武內宿)禰로 하여금 의논하도록 하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사자로 삼으면 소원대로 될 것이다”라고 가르쳐 주었다[천웅장언(千熊長彦)은 어떤 성씨의 사람인지 분명히 알지 못한다. 일설에는 무장국인(武藏國人)이니 지금의 액전부(額田部) 규본수(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한다. 『백제기(百濟記)』81)에 직마나나가비(職麻那那加比)跪라고 한 사람은 대개 이 사람인 듯하다]. 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신라에 보내어 백제가 바치는 물건을 훔친 것을 질책하였다.

 

49년(369) 봄 3월 황전별(荒田別)과 녹아별(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구(久)氐 등과 함께 군대를 거느리고 건너가 탁순국(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이 때 어떤 사람이 “군대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으니, 다시 사백(沙白)‧개로(蓋盧)를 보내어 군사를 늘려 주도록 요청하십시요”라 하였다. 곧 목라근자(木羅斤資)82)와 사사노(沙沙奴)跪83)에게[이 두 사람은 그 성(姓)을 모르는데 다만 목라근자(木羅斤資)는 백제 장군이다] 정병(精兵)을 이끌고 사백(沙白)‧개로(蓋盧)와 함께 가도록 명하였다. 함께 탁순국에 모여 신라를 격파하고, 비자(比自)㶱‧남가라(南加羅)‧㖨국(國)‧안라(安羅)‧다라(多羅)‧탁순(卓淳)‧가라(加羅)의 7국84)을 평정하였다. 또 군대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 고해진(古奚津)85)에 이르러 남쪽의 오랑캐 忱미다례(彌多禮)86)를 무찔러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초고(肖古)와 왕자 귀수(貴須)87)가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이 때 비리(比利)‧辟중(中)‧포미지(布彌支)‧반고(半古)의 4읍88)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그래서 백제왕 부자(父子)와 황전별(荒田別)‧목라근자(木羅斤資) 등이 의류촌(意流村)89)[지금은 주류수기(州流須祇)라 한다]에서 함께 서로 만나 기뻐하고 후하게 대접하여 보냈다. 오직 천웅장언(千熊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이르러 辟지산(支山)90)에 올라가 맹세하였다. 다시 고사산(古沙山)91)에 올라가 함께 반석 위에 앉아서 백제왕이 “만약 풀을 깔아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 나무로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갈까 걱정된다. 그러므로 반석에 앉아 맹세하는 것은 오래도록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니, 지금 이후로는 천년 만년 영원토록 늘 서쪽 번국이라 칭하며 봄 가을로 조공하겠다”라고 맹세하였다. 그리고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데리고 도읍에 이르러 후하게 예우를 더하고 구(久)氐 등을 딸려서 보냈다.

 

50년(370) 봄 2월 황전별(荒田別) 등이 돌아왔다.

여름 5월 천웅장언(千熊長彦)과 구(久)氐 등이 백제로부터 이르렀다. 이 때 황태후가 기뻐하며 구(久)氐에게 “바다 서쪽의 여러 한(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 주었는데 지금 무슨 일로 이리 자주 오느냐”고 물었다. 구(久)氐 등이 “천조(天朝)의 큰 은택이 멀리 우리나라에까지 미쳤으므로 우리 왕이 기쁨에 넘쳐 그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에 지극한 정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비록 만세까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겠습니까”라고 아뢰었다. 황태후가 명령하여 “너의 말이 훌륭하구나. 이는 나의 생각이기도 하다”라 하고 다사성(多沙城)92)을 더 주어 오고 가는 길의 역(驛)으로 삼게 했다.

 

51년(371) 봄 3월 백제왕이 또 구(久)氐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가 태자와 무내숙(武內宿)禰에게 “내가 백제국과 교류하여 친하게 지내는 것은 하늘이 이르게 한 것이지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다. 진기한 물건들은 전에는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늘 와서 바치니 이런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기쁘다. 내가 있을 때처럼 은혜를 돈독하게 하라”고 하였다.

이 해에 천웅장언(千熊長彦)을 구(久)氐 등에게 딸려 백제국에 보냈다. 큰 은혜를 내려 “나는 신의 징험한 바를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에게 주었다. 지금 다시 두텁게 우의를 맺고 길이 은총을 내리리라”고 하였다. 이 때 백제왕 부자(父子)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귀국(貴國)의 큰 은혜는 하늘과 땅보다 무거우니 어느 날 어느 때인들 감히 잊을 수 있으리요. 성스러운 왕이 위에 있어 해와 달같이 밝고 신이 아래에 있어 산악과 같이 굳세니 길이 서쪽 번국(蕃國)이 되어 끝내 두 마음이 없을 것이오”라 아뢰었다.

 

52년(372) 가을 9월 정묘(丁卯) 초하루 병자일(丙子日) 구(久)氐 등이 천웅장언(千熊長彦)을 따라와서 칠지도(七枝刀)93) 1자루와 칠자경(七子鏡)94) 1개 및 여러가지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백제왕의) 계(啓)에 “우리나라 서쪽에 시내가 있는데 그 근원은 곡나철산(谷那鐵山)95)으로부터 나옵니다. 7일 동안 가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멉니다. 이 물을 마시다가 문득 이 산의 철을 얻어서 성스러운 조정에 길이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손자 침류왕(枕流王)96)에게 ‘지금 내가 통교하는 바다 동쪽의 귀한 나라는 하늘이 열어준 나라이다. 그래서 천은(天恩)을 내려 바다 서쪽을 나누어 우리에게 주었으므로 나라의 기틀이 길이 굳건하게 되었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다져 토물(土物)을 거두어 공물을 바치는 것을 끊이지 않는다면 죽더라도 무슨 한이 있겠느냐’라 일러두었습니다”라 하였다. 이 이후로 해마다 계속하여 조공하였다.

 

55년(375) 백제 초고왕(肖古王)이 죽었다.

 

56년(376) 백제왕자 귀수(貴須)가 왕이 되었다.

 

62년(38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이 해에 습진언(襲津彦)을 보내어 신라를 쳤다[『백제기(百濟記)』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임오년(壬午年)에 신라가 귀국(貴國)을 받들지 않았으므로 귀국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토벌하게 하였는데, 신라인은 미녀 두 사람을 단장시켜 나루에서 맞아 유혹하게 하였다. 사지비(沙至比)跪는 그 미녀를 받아 들이고 오히려 가라국(加羅國)을 쳤다. 가라국왕 기본한기(己本旱岐)와 아들 백구지(百久至)‧아수지(阿首至)‧국사리(國沙利)‧이라마주(伊羅麻酒)‧이문지(爾汶至) 등이 그 인민(人民)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여97) 오니 백제는 후대하였다. 가라국왕의 누이 기전지(旣殿至)가 대왜(大倭)로 가서 “천황이 사지비(沙至比)跪를 보내어 신라를 토벌하게 했는데 신라 미녀를 받아 들이고 (왕명을) 저버리고 토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망시켜 형제와 인민들이 모두 유리(流離)하게 되어 걱정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으므로 와서 아룁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목라근자(木羅斤資)를 보내어 군대를 거느리고 가라(加羅)98)에 모여 그 사직(社稷)을 복구시켰다고 한다. 일설은 다음과 같다. 사지비(沙至比)跪가 천황이 노한 것을 알고 몰래 돌아와 스스로 숨어 있었다. 그 누이가 황궁에서 총애를 받고 있었는데 비(比)跪가 몰래 사인(使人)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릴지 어떨지를 물어 보았다. 누이는 꿈에 가탁하여 “오늘 밤 꿈에 사지비(沙至比)跪를 보았습니다”라 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비(比)跪가 어찌 감히 오느냐”라고 하였다. 누이가 천황의 말을 전하였더니 비(比)跪는 면할 수 없음을 알고 바위굴에 들어가서 죽었다].

 

64년(384) 백제국 귀수왕(貴須王)이 죽었다. 왕자 침류왕(枕流王)이 즉위하였다.99)

 

65년(385) 백제 침류왕이 죽었다. 왕자 아화(阿花)가 어렸으므로 숙부 진사(辰斯)가 왕위를 빼앗아 즉위하였다.100)

 

 

 

권 10 응신천황(應神天皇) (예전천황(譽田天皇))

 

(즉위전기(卽位前紀)) 예전천황(譽田天皇)(응신천황(應神天皇))은 족중언천황(足仲彦天皇)(중애천황(仲哀天皇))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기장족희존(氣長足姬尊)(신공황후(神功皇后))이다. 천황(天皇)은 (신공(神功))황후(皇后)가 신라(新羅)를 정벌하던 해인 경신년(庚辰年)(중애천황(仲哀天皇) 9년) 겨울 12월에 축자(筑紫)의 문전(蚊田)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사물을 깨달아 보는 것이 깊고 원대하였으며, 하는 행동은 절도가 있었고 성스러운 모습은 남다름이 있었다. 황태후(皇太后)가 섭정한 지 3년 되던 해에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그 때 나이가 3세였다]. 처음 천황이 뱃속에 있을 때, 하늘과 땅의 신이 삼한(三韓)을 주었다. 태어났을 때 굳은살이 팔뚝 위에 나 있어서 마치 그 모양이 화살통(병:ほむた)과 같았는데, 이것은 황태후가 남장(男裝)을 하고 화살통을 매고 있던 모양과 비슷하였다[초(肖)는 우리말로 아예(阿叡)라 한다]. 그러므로 그 이름을 예전(譽田)(ホムタ)천황(天皇)이라 하였다[옛날 사람들은 병(화살통)을 「포무다(褒武多)」라 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처음에 천황(天皇)이 태자(太子)가 되었을 때 월국(越國)에 가서 각록(角鹿)의 笥반대신(飯大神)에게 제사하였는데, 그 때 대신(大神)과 태자(太子)가 서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래서 대신(大神)을 거래사별신(去來紗別神)이라 부르고, 태자(太子)를 예전별존(譽田別尊)이라 이름하였다. 그러므로 대신(大神)의 본래 이름은 예전별신(譽田別神)이고, 태자의 원래 이름은 거래사별존(去來紗別尊)이었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다른 데 기록이 보이지 않으므로 잘 알 수 없다].

 

391  (3년) 이 해101) 백제(百濟)의 진사왕(辰斯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일본(日本))의 천황(天皇)에게 예의를 잃었으므로102), 기각숙(紀角宿)禰・우전시대숙(羽田矢代宿)禰・석천숙(石川宿)禰・목(木)菟숙(宿)禰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망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百濟國)에서는 진사왕(辰斯王)을 죽여 사죄하였다.103) 기각숙(紀角宿)禰 등은 아화(阿花)를 왕으로 세우고104) 돌아왔다.

 

395  7년 가을 9월 고려인(高麗人)・백제인(百濟人)・임나인(任那人)・신라인(新羅人)이 함께 래조(來朝)하였다. 그 때 무내숙(武內宿)禰에게 명하여 여러 한인(韓人)들을 이끌고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때문에 이 연못을 이름하여 한인지(韓人池)105)라 불렀다.

 

396  8년 봄 3월 백제인(百濟人)이 래조(來朝)하였다[『백제기(百濟記)』에는, “아화왕(阿花王)이 왕위에 있으면서 귀국(貴國)에 예의를 갖추지 않았기 때문에106) (일본(日本)이) 우리의 침미다례(枕彌多禮) 및 현남(峴南)・지침(支侵)・곡나(谷那)・동한(東韓)의 땅107)을 빼앗았다 이에 왕자 직지(直支)108)를 천조(天朝)(일본조정)에 보내어 선왕(先王)의 우호를 닦게 하였다”고 되어 있다].

 

396  9년 여름 4월 무내숙네(武內宿)禰를 축자(筑紫)에 보내어 백성을 감찰하게 하였다. 이 때 무내숙(武內宿)禰의 동생 감미내숙(甘美內宿)禰는 형을 폐하고자 천황에게, “무내숙(武內宿)禰는 항상 천하를 엿보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축자(筑紫)에 있으면서 비밀리에 모의하여, ‘홀로 축자(筑紫)를 나누고 삼한(三韓)을 불러들여 나에게 조회하도록 한 다음 장차 천하를 지배하겠다’고 말하였다고 합니다”라고 참소하였다. 이에 천황은 즉시 사자를 파견하여 무내숙(武內宿)禰를 죽이게 하였다. 그러자 무내숙(武內宿)禰는 탄식하며·····.

 

402  14년 봄 2월 백제왕(百濟王)이 봉의공녀(縫衣工女)를 바쳤다. 진모진(眞毛津)이라고 하였는데, 이가 오늘날 래목의봉(來目衣縫)의 시조(始祖)이다.

 

402  (14년) 이 해 궁월군(弓月君)109)이 백제(百濟)로부터 와서 귀화하였다. 그리고 아뢰기를, “신(臣)은 우리나라 120현(縣)의 인부(人夫)를 이끌고 귀화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나 신라인(新羅人)이 방해하여 모두 가라국(加羅國)에 머물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갈성습진언(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가라(加羅)에서 데리고 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3년이 지나도 습진언(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403 15년 가을 8월 임술(壬戌) 초하루 정묘(丁卯) 백제왕(百濟王)이 아직기(阿直伎)110)를 보내어 좋은 말 2필을 바쳤다. 곧 경(輕)111)의 산비탈 부근에 있는 마굿간에서 길렀는데, 아직기(阿直伎)로 하여금 사육을 맡게 하였다. 때문에 말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구판(廐坂)이라고 한다. 아직기(阿直伎)는 또 경전(經典)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 때 천황(天皇)은 아직기(阿直伎)에게, “혹 너보다 뛰어난 박사가 또 있느냐”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왕인(王仁)112)이라는 분이 있는데 훌륭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상모야군(上毛野君)의 조상인 황전별(荒田別)과 무별(巫別)을 백제(百濟)에 보내어 왕인(王仁)을 불렀다. 아직기(阿直伎)는 아직기사(阿直岐史)의 시조(始祖)이다.

 

16년 봄 2월 왕인(王仁)이 왔다. 태자(太子)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스승으로 모시고 왕인(王仁)에게서 여러 전적(典籍)들을 배웠는데,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이른바 왕인(王仁)이라는 사람은 서수(書首)113) 등의 시조(始祖)이다.

 

404 (16년) 405 이 해 백제(百濟)의 아화왕(阿花王)이 죽었다. 천황(天皇)은 직지왕(直支王)114)을 불러, “그대는 본국으로 돌아가서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동한(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동한(東韓)은 감라성(甘羅城)115)・고난성(高難城)116)・이림성(爾林城)117)이다].

 

404 (16년) 8월 평군목(平群木)菟숙(宿)禰・적호전숙(的戶田宿)禰를 가라(加羅)에 보냈다. 그리고 날랜 군사를 주면서 조(詔)를 내려, “습진언(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반드시 신라가 막고 있기 때문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新羅)를 공격하여 그 길을 열라”고 하였다. 이에 목(木)菟숙(宿)禰 등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진격하여 신라(新羅)의 국경에 다다르자, 신라왕(新羅王)은 두려워하며 그 죄를 자복(自服)하였다. 그래서 궁월(弓月)의 인부(人夫)를 거느리고 습진언(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420 420   25년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이 죽었다. 곧 아들 구이신(久爾辛)118)이 왕위에 올랐다. 왕은 나이가 어리므로 목만치(木滿致)119)가 국정(國政)을 잡았는데, 왕의 어머니와 서로 정을 통하여 무례한 행동이 많았다. 천황(天皇)은 이 말을 듣고 그를 불렀다[『백제기(百濟記)』에는, “목만치(木滿致)는 목라근자(木羅斤資)120)가 신라(新羅)를 칠 때에 그 나라의 여자를 아내로 맞아 낳은 사람이다. 아버지의 공(功)으로 임나(任那)에서 전횡(專橫)하다가 우리나라로 들어왔다. 귀국(貴國)(일본(日本))에 갔다가 돌아와 천조(天朝)의 명을 받들어 우리나라의 국정을 잡았는데, 권세의 높기가 세상을 덮을 정도였다. 그러나 천조(天朝)에서는 그의 횡포함을 듣고 그를 불렀다”라고 되어 있다].

 

423  28년 가을 9월 고려왕(高麗王)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121) 그리고 표(表)를 올렸는데, 그 표(表)에 “고려왕(高麗王)은 일본국(日本國)에 교(敎)한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때 태자(太子)인 菟도치랑자(道稚郞子)는 그 표(表)를 읽고 노하여 고려(高麗)의 사자를 꾸짖었다. 그리고 그 표문(表文)이 무례하다고 하여 표(表)를 파기하였다.

 

31년 가을 8월 여러 신하들에게 조(詔)를 내려, “관선(官船) 가운데 고야(枯野)라고 하는 것은 이두국(伊豆國)에서 바친 배이다. 그런데 이 배는 썩어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관용(官用)으로 쓰인 공(功)을 잊을 수가 없다. 어떻게 하여야 그 배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후세에 전해지도록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신하들은 조(詔)를 받고 담당 관리에게 명령하여 그 배의 재목(材木)을 땔감으로 하여 소금을 굽게 하였다. 그래서 500광주리(롱(籠))의 소금을 얻어 여러 나라에 두루 나누어 주고는 배를 만들게 하였다. 이에 여러 나라에서는 한꺼번에 500척의 배를 만들어 바쳤다. 그것을 모두 무고(武庫)의 수문(水門)에 모아 놓았다. 이 때 신라(新羅)의 조공 사신이 모두 무고(武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신라(新羅) 사신의 숙소에서 갑자기 불이 나 모아 놓은 배에까지 번져 많은 배가 타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신라인(新羅人)을 책망하였다. 신라왕(新羅王)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고 두려워하여 즉시 뛰어난 장인(匠人)을 바쳤다. 이들이 저명부(猪名部) 등의 시조(始祖)이다·····.

 

37년 봄 2월 무오(戊午) 초하루 아지사주(阿知使主)・도가사주(都加使主)122)를 오(吳)나라123)에 보내어 봉공녀(縫工女)를 구하게 하였다. 아지사주(阿知使主) 등은 고려국(高麗國)을 지나서 오(吳)나라로 가고자 하여, 먼저 고려(高麗)에 도착하였으나 (오(吳)나라로) 가는 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길을 아는 사람을 고려(高麗)에 구하니, 고려왕(高麗王)은 구례파(久禮波)와 구례지(久禮志) 두 사람을 딸려 보내어 안내자로 삼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오(吳)나라에 이를 수 있었다. 오(吳)의 왕은 공녀(工女) 형원(兄媛)・제원(弟媛)・오직(吳織)・혈직(穴織) 등 4명의 여자를 주었다.

 

39년 봄 2월 백제(百濟)의 직지왕(直支王)124)이 누이 신제도원(新齊都媛)을 보내어 섬기게 하였다. 신제도원(新齊都媛)은 7명의 여자를 이끌고 와서 귀화하였다.

 

1) (소)잔鳴尊(명존) : 거친 男神(남신) 혹은 出雲國(출운국) 飯石郡(반석군) 및 紀伊郡(기이군) 在田郡(재전군)에 있는 須佐(수좌)라는 곳의 主神(주신)이다. 신화에 의하면, (이)장諾尊(락존)의 아들로 根國(근국)을 다스리라는 아버지의 (명)을 어기고 高天原(고천원)에서 난폭한 짓을 일삼았기 대문에 추방되어 出雲國(출운국)에 내려와 八岐(팔기) 大蛇(대사)를 물리치고 草艸(초초)+雉劍(치검)을 얻어 天照大神(천조대신)에게 바쳤다고 한다.

2) 脚摩乳(각마유).手摩乳(수마유) : 出雲國(출운국)의 (신)으로 奇稻田媛(기도전원)의 부모이다.

3) (한)서(검) : 十握劍(십악검)이라고도 한다. 명칭으로 보아 한반도에서 전래된 小刀(소도)로 보인다.

4) (초)치(검) : 天照大神(천조대신)이 내려주었다는 3(종)의 神器(신기) 중의 하나이다. 본래 이름은 天叢雲劍(천총운검)이었는데, 이는 (소)잔鳴尊(명존)이 죽였던 큰 뱀이 있는 곳 위에 항상 구름이 덮혀 있었기 때문에 붙혀진 이름이다. 景行天皇(경행천황) 때에 日本武尊(일본무존)이 이 칼을 휴대하고 東國(동국)을 정벌하던 중, 駿河(준하)의 燒津(소진)에서 적군의 火攻(화공)을 이 칼로 풀을 잘라내어 위기를 모면했으므로 (초)치(검)이라 이름하였다고 한다. 日本武尊(일본무존)이 원정에서 돌아오던 길에 尾張國(미장국) 熱田(열전)에 두었으므로 이후에는 그곳에서 보관하고 제사를 받들었다고 한다.

5) 出雲國(출운국) : 지금의 島根縣(도근현) 동부에 해당하는데 동쪽으로는 鳥取縣(조취현), 남쪽으로는 廣島縣(광도현), 서쪽으로는 島根縣(도근현) 서부, 북쪽으로는 동해에 접해있는 지역이다.

6) 파(천) : 仁多郡(인다군) 般通山(반통산)에서 발원하여 島根縣(도근현) 동쪽을 통과하여 북쪽으로 흘러가 肉道湖(육도호)에 흘러 들어가는 지금의 (비)+文伊川(문이천)이다.

7) 千座置戶(천좌치호) : 신에게 잘못을 빌기 위하여 많은 祭物(제물)을 바치고 속죄하는 것으로, 千位置戶(천위치호)라고도 한다.

8) 曾尸茂梨(증시무리) : 신라의 옛 이름인 徐伐(서벌)과 같은 뜻으로 지금의 경주 지방이라는 견해와 牛頭州(우두주) 즉 강원도 춘천지방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9) 鳥上峯(조상봉) : 島根縣(도근현) 仁多郡(인다군) 般通山(반통산)의 옛 지명인 듯하다.

10) 筑紫(축자) : 지금의 .... 筑前(축전),筑後(축후)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만엽집)>>에는 都久紫(도구자), 都久志(도구지)로 표기하였다.

11) 大八洲國(대팔주국) : (이)장諾尊(락존)과 (이)장염(존)이 만들었다고 하는 8개의 큰 섬으로 일본 전국을 가리킨다.

12) 紀伊國(기이국) : 현재의 和歌山縣(화가산현) 전부와 三重縣(삼중현) 일부 지역으로 산과 나무가 많아 木國(목국)이라고도 한다.

13) 韓鄕(한향)의 섬에는 金銀(김은)이 있다 : 韓鄕(한향)은 신라, 가야지역을 의미하는 듯하다. <<三國志(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변.진한에 철이 많이 난다고 하며, <<古事記(고사기)>> 와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 “金銀彩色(김은채색) 多在其國(다재기국)”, “西方有國(서방유국) 金銀爲本(김은위본)”, “金銀之國(김은지국)”, “金銀蕃國(김은번국)”이라 하여 신라를 金銀(김은)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다. 신라의 國號(국호)인 徐伐(서벌) 혹은 徐羅伐(서라벌)과 金官加耶(김관가야)의 異稱(이칭)인 須那羅(수나라)가 이 지방의 金銀(김은) 혹은 철생산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末松保和(말송보화),<<任那興亡史(임나흥망사)>>,1949.138쪽)

14) 熊成峯(웅성봉) : 紀伊國(기이국)과 出雲國(출운국)에 ‘구마나리’란 지명이 있으며, 우리나라의 熊津(웅진)도 ‘구마나리’로 칭하여졌다. (소)잔鳴尊(명존)의 행적에 관한 이설이 많기 때문에 그가 살았다는 熊成峯(웅성봉)의 구체적인 위치는 알 수 없다.

15) 任那國(임나국): 금관가야 또는 가야연맹체의 異稱(이칭)이다. 임나라는 말이 가장 먼저 보이는 우리나라의 자료는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인데 ‘任那加羅(임나가라)’라 하였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권46 列傳(렬전)6 强首傳(강수전)에 의하면 강수가 ‘臣本任那加良人(신본임나가량인)’이라 하였다. 한편 鳳林寺眞境大師碑(봉림사진경대사비)에는 “俗姓新金氏(속성신금씨) 其先任那王族(기선임나왕족) ··· 遠祖興武大王(원조흥무대왕)”이라 하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欽明天皇(흠명천황) 23년(562) 봄 정월조에 의하면, “통털어 말하면 임나라 하고, 따로 말하면 加羅國(가라국)·安羅國(안라국)·斯岐國(사기국)·多羅國(다라국)·卒麻國(졸마국)·古嵯國(고차국)·子他國(자타국)·散半下國(산반하국)·乞飡國(걸손국)·稔禮國(임례국)이니 합하면 10국이다’라고 하였다. 한편 가야국의 명칭은 학계에서는 보편적으로 加耶(가야)를 사용하나, 각종 저술에서는 伽倻(가야), 伽耶(가야), 加羅(가라), 伽羅(가라), 迦羅(가라), 呵羅(가라), 加良(가량), 駕洛(가락), 伽落(가락)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16) 蘇那曷叱知(소나갈질지):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 의하면 都怒我(도노아)(쓰누가)는 都怒賀(도노하) 혹은 都奴加(도노가)로 되어 있는데 모두 蘇那曷(소나갈)(소나가)의 同音異寫(동음이사)이다. 蘇那(소나)를 都怒(도노)·都努(도노)·都奴(도노)로 표현한 것은 이마에 뿔(일본어로 쓰노)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데서 윤색한 것이다. 정말 뿔이 아니라 머리에 쓴 것이 뿔과 같이 보인 때문인데, 낙동강 연안지역의 고분에서 출토되는 새 깃털 모양의 (관)을 쓴 弁辰(변진)·가야 계통의 首長(수장)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이해되고 있다. (갈)과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의 (아)는 加夫都(가부도)(가후도)에 해당하는 말로서 冠帽(관모)를 뜻하는 韓語(한어) 갈(kar), 갓(kat)의 寫音(사음)이라고 생각되고 있다. 한편 叱智(질지)는 三韓(삼한)의 渠帥(거수)의 이칭인 臣智(신지)·秦支(진지)라고 이해되고 있다(李丙燾(이병도),「蘇那曷叱智考(소나갈질지고)」, 『韓國古代史硏究(한국고대사연구)』, 博英社(박영사), 1976, pp. 339-350).

17) 筑紫國(축자국): 지금의 大阪(대판) 부근인데, 筑前(축전)과 筑後(축후)를 합한 지역의 옛 명칭이다. 『萬葉集(만엽집)』에서는 都久紫(도구자)·都久志(도구지)로 표현하였다.

18) 北阻海(북조해): 임나의 북쪽이 바다로 막혀있다는 것은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잘못인 듯하다. 한편 이 구절을 근거로 임나를 오늘날의 對馬島(대마도)로 비정하는 예도 있다(田溶新(전용신), 『 完譯(완역) 日本書紀(일본서기)』, 一志社(일지사), 1990, p. 104).

19) 鷄林(계림): 신라를 가리킨다. 원래는 慶北(경북) 慶州(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경주 김씨의 발상지이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1 脫解尼師今(탈해니사금) 9년 춘3월조에 의하면 흰 닭이 울고 있던 나무 위에 걸린 금궤에서 작은 아이가 태어났는데 閼智(알지)라 이름하고 성은 김씨라 하였으며, 始林(시림)을 鷄林(계림)이라 이름을 바꾸고 국호로 삼았다.

20) 越國(월국): 古代(고대) 國郡制(국군제) 시행 이전의 北陸(북륙)지방의 범칭이다. 현재의 福井(복정)·石川(석천)·富山(부산)·新潟(신석)의 4현을 가리킨다.

21) 笥飯浦(반포): 福井縣(복정현) 敦賀市(돈하시) 氣比神社(기비신사) 부근이다.

22) 意富加羅(의부가라): 意富(의부)를 ‘오호’로 音讀(음독)하여 (대)의 뜻으로 풀이하여 대가야를 지칭한다고 보기도 한다(李丙燾(이병도), 앞글, p. 340).

23)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 阿羅(아라)는 于斯岐阿利叱智干岐(우사기아리질지간기)의 阿利(아리)와 마찬가지로 신라의 閼川(알천)·閼智(알지)의 (알), 廣開土王陵碑(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阿利水(아리수)의 아리와 상통하는 말로 (대)를 뜻하는 것으로 추측된다(李丙燾(이병도), 앞글, p. 345).

24) 于斯岐阿利叱智干岐(우사기아리질지간기): 干岐(간기)는 (간)(khan), (한)(han)으로, 삼한사회에서는 帥長(수장)을 칭하였으며 동북아시아 민족 사이에서는 군주를 부르는 공통어로 쓰였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는 旱岐(한기)라고도 칭했다.

25) 日本國(일본국):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6 文武王(문무왕) 10년(679)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왜국경호일본) 自言近日所出以爲名(자언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新唐書(신당서)』 東夷傳(동이전) 日本條(일본조)의 “日本(일본) 古倭奴也(고왜노야) ··· 咸亨元年(함형원년)(670) 遣使賀平高麗(견사하평고려) 後稍習夏音(후초습하음) 惡倭名(악왜명) 更號日本(갱호일본) 使者自言國近日所出以爲名(사자자언국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한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 일본국이라는 국호가 이 무렵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26) 穴門(혈문): 古代(고대) 國郡制(국군제) 시행 이전에 지금의 山口縣(산구현) 지방에 있었던 나라로, 畿內(기내)와 筑紫(축자)를 연결하는 內海(내해)교통의 요충이었다.

27) 御間城(어간성): 일본음으로 미마끼. 任那(임나)(nima-na)를 mima-na로 발음한 것으로, 고대 우리말에서 n과 m이 서로 넘나드는 음운법칙에 따른 것이다.

28) 難波(난파): 현재의 大阪市(대판시)이다.

29) 豊國(풍국): 豊前(풍전)·豊後(풍후)를 합한 지역의 古稱(고칭)으로, 『古事記(고사기)』의 大八島生成神話(대팔도생성신화)에서는 筑紫島(축자도)가 筑紫國(축자국)·豊國(풍국)·肥國(비국)·熊曾國(웅증국)의 넷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풍국이라는 명칭은 고대 國郡制(국군제)의 성립과 함께 소멸하고, 대신 풍전국·풍후국으로 칭해졌다.

30) 國前郡(국전군): 후일의 豊後國(풍후국) 國埼郡(국기군)으로, 지금의 東國(동국) 東部(동부)·西國(서국) 東部(동부)·豊後高田市(풍후고전시) 및 杵築市(저축시)의 일부를 포함한 지역이다.

31) 天日槍(천일창) : 『古事記(고사기)』 應神天皇條(응신천황조)에는 天之日矛(천지일모)라고 이르고 있는데 귀화의 동기와 경로 등은 위의 기사와 차이가 있다. 즉 “又昔(우석) 有新羅國主之子(유신라국주지자) 名謂天之日矛(명위천지일모) 是人人蔘渡來也(시인인삼도래야) 所以人蔘渡來者(소이인삼도래자) 新羅國有一沼(신라국유일소) 名爲阿具奴摩(명위아구노마) 此沼之邊(차소지변) 一賤女晝寢(일천녀주침)‧‧‧姙娠生赤玉(임신생적옥)”이라 하고, 그녀가 일본으로 도망하자 찾아나서 그녀가 숨어있는 難波(난파)(지금의 大阪(대판) 지방)에 도착하였으나, (신)의 저지로 多遲摩國(다지마국)(但馬國(단마국))에 정착함으로써 인삼을 전래했다는 내용이다. 이는 일면 『日本書紀(일본서기)』 垂仁天皇(수인천황) 2년조 都怒我阿羅斯等(도노아아라사등)에 대한 일설과 동일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기원전 무렵 辰韓人(진한인)의 일본 이주설화로 풀이하거나(李丙燾(이병도), 『韓國史大觀(한국사대관)』, 1964, p.64 ; 金錫亨(금석형), 『초기조일관계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66 ; 三品彰英(삼품창영),「天之日矛歸化年代攷(천지일모귀화년대고)」,『日鮮神話傳說(일선신화전설)の硏究(연구)』, 1943), 『三國遺事(삼국유사)』 延烏郞(연오랑) 細烏女(세오녀) 설화와 비교하여 태양신화의 이동 전설로 보기도 한다(蘇在永(소재영), 「延烏郞細烏女說話考(연오랑세오녀설화고)」, 『국어국문학』 36, 1967 ; 李寬逸(이관일), 「延烏郞細烏女說話(연오랑세오녀설화)의 한 硏究(연구)」, 「국어국문학』 55-57, 1972).

32) 神籬(신리) : 『日本書紀(일본서기)』 권2, 神代(신대) (하) 9(단)의 高皇産靈尊(고황산영존)의 (칙)에 ‘天尊神籬(천존신리)’가 보이는데, 이는 屋內外(옥내외)에 특별히 만든 곳으로서 (신)이 강립하는 장소를 뜻한다. 여기에서 天日槍(천일창)이 가지고 왔다는 神籬(신리)는 신이 강림하는 장소에 까는 일종 돗자리와 같은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33) 七物(칠물) : 『古事記(고사기)』 應神天皇條(응신천황조)에는 「玉津寶(옥진보)』에 근거하여 “珠二貫(주이관) 又振浪比禮(우진랑비례)‧切浪比禮(절랑비례)‧振風比禮(진풍비례)‧切風比禮(절풍비례)‧ 又奧津鏡(우오진경)‧邊津鏡(변진경) 幷八種也(병팔종야)”라 하고, 이들은 但馬國(단마국) 出石郡(출석군) 出石鄕(출석향)에 있는 伊豆志坐神社(이두지좌신사)의 八前大神(팔전대신)이 되었다고 하였다.

34) 但馬國(단마국) : 지금의 兵庫縣(병고현) 북부지방.

35) 播磨國(파마국) 肉粟邑(육속읍) : 지금의 兵庫縣(병고현) 播粟郡(파속군).

36) 日本國(일본국) : 『日本書紀(일본서기)』 찬자의 윤색인 듯하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6, 문무왕 10년(670) 12월조에는 “倭國更號日本(왜국갱호일본) 自言(자언) 近日所出以爲名(근일소출이위명)”이라 하였는데, 이는 『新唐書(신당서)』 東夷傳(동이전) 日本條(일본조) “日本(일본) 古倭奴也(고왜노야)‧‧‧天智死(천지사) 子天武立(자천무립) 子摠持立(자총지립) 咸亨元年(함형원년)(670) 遣使賀平高麗(견사하평고려) 後稍習夏音(후초습하음) 惡倭名(악왜명) 更號日本(갱호일본) 使者自言(사자자언) 國近日所出(국근일소출) 以爲名(이위명)”의 기사에서 비롯한 것으로서 日本國(일본국)이란 국호가 이 때에 만들어졌음을 보여준다.

37) 菟道河(도하) : 지금의 宇治川(우치천)을 일컬음.

38) 近江國(근강국)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坂田郡(판전군) 近江町(근강정) 箕浦(기포) 부근.

39) 吾名邑(오명읍)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蒲生郡(포생군) 龍王町(룡왕정) 綾戶(능호)의 蒲生郡(포생군) 長村(장촌) 神社(신사) 부근으로 추측됨.

40) 若狹國(약협국) : 近江國(근강국)의 북부지역.

41) 鏡村(경촌) : 지금의 滋賀縣(자하현) 蒲生郡(포생군). 한때 鏡宿(경숙)으로 일컬었는데 鏡村谷(경촌곡)은 鏡山(경산)의 동쪽 기슭에 있다.

42) 陶人(도인) : 토기를 제작하는 사람. 鏡村谷(경촌곡)이 있는 鏡山(경산) 가까이에 須惠(수혜)란 곳이 있는데, 5세기 무렵 한반도에서 전래된 陶質土器(도질토기) 須惠器(수혜기)는 이곳의 이름과 관련된 듯하며, 天日槍(천일창)을 따라와 鏡村谷(경촌곡)에 도착하였다는 陶人(도인)도 그러한 관련에서 기록에 전승된 것으로 짐작된다. 須惠器(수혜기)의 일본 전래에 대해서는 崔鍾圭(최종규), 「美術上(미술상)으로 본 韓日關係(한일관계)-陶質土器(도질토기)와 須惠器(수혜기)-」,(『古代韓日文化交流(고대한일문화교류)』,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0) 참조.

43) 太耳(태이) : 『日本書紀(일본서기)』 권6, 垂仁天皇(수인천황) 88년 7월조에는 ‘前津耳(전진이)’‘前津見(전진견)’이라 하였다.

44) 田道間守(전도간수) : 垂仁天皇(수인천황) 3년 일본에 귀화한 신라 왕자 天日槍(천일창)의 高孫(고손). 『日本書紀(일본서기)』 권6, 垂仁天皇(수인천황) 3년조에 ‘天日槍(천일창)-但馬諸助(단마제조)-但馬日楢杵(단마일유저)-淸彦(청언)-田道間守(전도간수)’의 家系(가계)가 보인다.

45) 常世國(상세국) : 속인이 왕래할 수 없는 理想鄕(리상향)으로서, 사물이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不老(부로) 不死(부사)하는 樂土(락토)를 일컫는다.

46) 8竿(간) 8縵 : 『延喜內膳式(연희내선식)』 新嘗祭供御料條(신상제공어료조)에 “橘子卄四蔭(귤자입사음) 鉾橘子十枝(귤자십지)”라고 보이는데, 竿(간)은 꼬챙이로 꼽은 모양을, 縵은 줄 같은 것으로 이은 모양을 나타낸 것으로 짐작되므로, ‘8竿(간) 8縵’은 田道間守(전도간수)가 가지고 온 (귤)의 수량을 일컬은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47) 弱水(약수) : 신선이 살고 있는 곳에 있다는 강으로, 기러기 털도 가라앉을 정도여서 가죽으로 만든 배만이 이를 건널 수 있다고 한다.

48) 三宅連(삼택련) : 『古事記(고사기)』에도 “三宅連之祖(삼택련지조) 名多遲麻毛理(명다지마모리)”라는 구절이 보이며, 신라 왕자 天之日矛(천지일모)로부터 내려오는 家系(가계)를 전하고 있다.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 右京諸蕃(우경제번)‧同攝津諸蕃條(동섭진제번조)에도 “新羅國王子天日(신라국왕자천일)鉾命之後也(명지후야)”라 하였으며, 同族(동족)으로서 橘守(귤수)‧糸井造(정조) 등이 있다.

49) 熊襲(웅습); 오늘날 九州(구주) 남부의 日向(일향)‧大隅(대우)‧薩摩(살마) 지방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50) 寶國(보국); 신라를 가리켜 寶國(보국)이라 한 듯하다.

51) 杼衾新羅國(금신라국); 杼는 白布(백포)를 말하며 (금)은 寢具(침구)를 의미하는 말로, 이는 신라의 産物(산물)로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52) 新羅役(신라역); 神功(신공) 攝政(섭정) 前紀(전기)의 이른바 신라 정벌을 가리킨다.

53) 財寶國(재보국); 신라를 가리킴.

54) 松浦(송포); ‘마쯔라’라고 읽는데 梅豆邏(매두라)는 ‘메즈라’라고 읽으므로 이와 (음)이 비슷했으므로 松浦(송포)에 比定(비정)한 듯하다.

55) 西征(서정); 서쪽 정벌이란 곧 신라를 정벌하겠다는 뜻.

56) 橿日浦(일포); 福岡市(복강시) 香椎(향추).

57) 財國(재국); 신라를 가리킴.

58) 斧鉞(부월); 원래 형벌의 도구로서 중국에서는 天子(천자)가 정벌할 때 大將(대장)에게 주어서 誅殺(주살)을 마음대로 하게 했다고 한다.

59) 흰 끈을 목에 건다는 표현은 곧 自殺(자살)하고 싶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항복을 뜻하는 것임.

60) 圖籍(도적); 토지의 도면과 인민의 호적으로 이를 封印(봉인)하여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의 상실을 의미함.

61) 飼部(사부);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며 馬具(마구)와 말먹이 등을 관장하는 부서인데 飼部(사부)가 되겠다는 표현은 항복하여 비천한 일을 하겠다는 뜻으로 곧 신라가 일본의 복속국이 되겠다는 의미.

62) 馬梳(마소) 馬鞭(마편); 말의 털을 빗는 솔과 말채찍인데 말을 기르는데 필요한 도구로서 이를 바치겠다는 것은 곧 비천한 일을 自任(자임)하는 것임.

63) 阿利那禮河(아리나예하); 경주의 閼川(알천) 또는 광개토왕비에 보이는 백제 도성하의 阿利水(아리수)로 보기도 하는데 막연히 강을 일컫는 보통명사로 보기도 한다.

64) 波沙寐錦(파사매금): 波沙(파사)는 『삼국사기』의 신라 5대 婆沙尼師今(파사니사금)과 이름이 같지만 동일인이라고 볼 수는 없을 듯하며 寐錦(매금)은 광개토왕비와 智證大師碑(지증대사비) 등에도 보이는데 尼師今(니사금)과 같은 왕호의 일종이다.

65) 微叱己知波珍干岐(미질기지파진간기); 微叱己知(미질기지)는 제15대 奈勿王(내물왕)의 아들인 未斯欣(미사흔)(또는 美海(미해))을 일컫는 것이라 생각되며 波珍干岐(파진간기)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 4위인 波珍飡(파진손)(또는 波珍干(파진간), 海干(해간))이라 여겨진다. 5년 3월 조에는 微叱許智(미질허지) 伐旱(벌한)이라고 보이며 欽明(흠명) 21년 9월 조에는 신라 使人(사인)으로 彌至己知(미지기지) 奈末(나말)이 보이는데 同名異人(동명이인)이라 생각된다.

66) 高麗(고려) 百濟(백제) 二國王(이국왕): 고려는 물론 高句麗(고구려)를 가리키는 것이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고구려의 명칭이 처음 나타나는 것은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중애) 9년 이른바 신라 征討(정토)기사의 맨끝에 나오는 것인데 이는 일반적으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고 있으며, 事實(사실)을 기재한 것은 雄略紀(웅략기) 20년(478)의 고구려의 백제 공격기사가 가장 오래된 것이라 보고 있다. 백제의 이름이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처음 보이는 것은 고구려와 동시인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중애) 9년의 이른바 신라 征討(정토)기사의 맨 끝에 나오는 것이며 이어서 神功皇后(신공황후) 攝政(섭정) 46년에 斯麻宿(사마숙)禰의 傔(인)이 백제에 도착했다는 기사이다. 이 46년조의 기사를 『日本書紀(일본서기)』의 紀年(기년)을 120년 뒤로 내려서 丙寅年(병인년)(366)의 일이라고 한다면 일본과 백제의 최초의 교섭기사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67) 內官家屯倉(내관가둔창); 미야게의 말뜻은 御宅(어택) 즉 屋舍(옥사) 倉庫(창고)에 대한 敬稱(경칭)인데 『日本書紀(일본서기)』에서 말하는 屯倉(둔창)은 국가제도로서의 미야게를 일컫는 것으로 大化(대화) 前代(전대)에는 朝廷(조정) 직할의 농업경영지 또는 直轄領(직할령)이라고 할 수 있다. 官家(관가)는 屯倉(둔창)과는 별개의 것으로 欽明紀(흠명기) 등에 보이는 用例(용례)는 모두 백제나 任那諸國(임나제국) 자체를 가리키는 것이며 군사기지라기 보다는 일본 朝廷(조정)에 대한 貢納國(공납국)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68) 速狹騰尊(속협등존)이라는 말은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天照大神(천조대신)을 천상으로 보내는 데서 유래한 것으로 하늘에 오른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곧 천황이 어찌 속협등이라 하는가라고 비난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는 速狹騰(속협등)을 하야사아가리라고 읽을 수 있는데 사는 神稻(신도)를 뜻하고 아가리는 죽음을 뜻하므로 神稻(신도)가 枯死(고사)한다는 의미가 되어 천황의 급작스런 죽음을 예언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한다.

69)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 신라왕이라고 되어 있으나 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列傳(렬전)에 나오는 于老(우로)가 아닐까 한다. 이에 의하면 于老(우로)는 奈解尼師今(나해니사금)(196-229)의 아들로 舒弗邯(서불감)의 관등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宇流助富利智干(우류조부리지간)이라 표기한 듯하다.

70) 이는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昔于老傳(석우로전)의 于老傳說(우로전설)에는 이와는 달리 우로의 (처)가 왜의 使臣(사신)을 (취)하게 하여 불태워 죽임으로써 남편의 원수를 갚자 倭人(왜인)들이 분노하여 金城(김성)을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하였다.

71)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박제상을 혹은 毛末(모말)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므로 毛麻利叱智(모마리질지)가 곧 박제상을 지칭한 것으로 보고 있다.

72) 微叱許智伐旱(미질허지벌한); 신공황후 攝政前紀(섭정전기) 仲哀天皇(중애천황) 9년 10월조에는 微叱己知波珍干岐(미질기지파진간기)로 나오는데 奈勿王(나물왕)의 아들 未斯欣(미사흔)(또는 美海(미해), 未叱喜(미질희))을 가리킨다. 미사흔이 왜에 볼모로 간 시기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實聖王(실성왕) 원년(402)으로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에는 奈勿王(나물왕) 36년(390)으로 되어 있다.

73) 鉏(해)의 水門(수문); 막연히 신라 방면의 바다를 가리키며 구체적으로는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기도 하고 대마도 北端(북단)의 鰐浦(악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74) (도)鞴(진); 오늘날의 부산 다대포가 아닐까 추측됨.

75) 草羅城(초라성);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인 듯.

76)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5 朴堤上傳(박제상전)에 의하면 堤上(제상)이 미사흔을 왜에서 탈출시킨 후 제상은 木島(목도)에 유배되었다가 불태워 죽임을 당하였으며 미사흔은 신라로 돌아오자 6부의 환영을 받았다고 하였다. 實聖王代(실성왕대)의 倭兵(왜병) 침입기사는 4년 4월, 6년 3월에 보이며 7년 2월에도 왜의 침공에 대비한 기사, 14년 8월에 왜인과 風島(풍도)에서 싸워 이긴 기사 등이 보인다.

77) 卓淳國(탁순국); 欽明天皇(흠명천황) 5년 3월조에는 㖨(순)이라고 나오는데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로 비정되어 왔으나 최근 경남 창원지방에 있었던 가야연맹의 한 小國(소국)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이에 따르면 탁순국은 6세기 전반에 高靈(고령)의 대가야국을 주축으로 한 후기 가야연맹에 소속되어 있다가 534년에서 541년 사이에 신라에 복속되어 멸망하였으며 欽明紀(흠명기)에 나오는 阿利斯等(아리사등) 또는 己能末多干岐(기능말다간기)는 창원 탁순국의 마지막 지배자로 추정된다고 한다.

78) 莫古(막고);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4 近仇首王(근구수왕)의 즉위 이전에 즉 近肖古王(근초고왕) 24년(369) 고구려 故國川王(고국천왕)이 백제를 침략하자 태자인 近仇首王(근구수왕)이 나가 싸웠는데 근구수왕이 계속 진격하자 장군 莫古解(막고해)가 道家(도가)의 말을 빌어 중지할 것을 요청한 적이 있는데, 이 두 사람이 동일인이 아닐까 추측된다.

79) 肖古王(초고왕);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3에 보이는 肖古王(초고왕)이 아니라 권 24에 보이는 13대 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80) 沙比新羅(사비신라); 신라의 歃良州(량주)가 있던 오늘날의 梁山(양산)지방을 가리키는 듯하다.

81) 百濟記(백제기);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百濟係(백제계) 史書(사서)의 하나로 神功紀(신공기)에서 雄略紀(웅략기)에 걸쳐 인용되어 있다. 따라서 『백제기』의 내용은 주로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에서 蓋鹵王(개로왕)에 이르는 시기의 기사로서 백제 前期(전기)의 사실이 인용되어 있어서 『百濟本紀(백제본기)』보다는 앞서 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서기』에 인용되어 있는 『백제기』의 내용은 설화적인 성격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며 細註(세주)에 뿐만 아니라 본문에 인용되어 있는 경우도 있으나 (왜)를 貴國(귀국)으로 표현하는 등 백제계 史書(사서)로서의 원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점도 있다.

82) 木羅斤資(목라근자); 木羅(목라)는 (목)劦이라고도 쓰는데 백제의 8姓大族(성대족)의 하나이다. 『日本書紀(일본서기)』에 (목)劦不麻甲背(부마갑배), (목)劦眯(순), (목)劦今敦(금돈), (목)劦施德文次(시덕문차) 등이 보이며 木羅斤資(목라근자)의 아들로 木滿致(목만치)가 보이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 蓋鹵王(개로왕) 21년(475)조에 “文周與木(문주여목)劦滿致(만치) 祖彌桀取(조미걸취)((목)劦 祖彌皆複姓(조미개복성) 隋書以木(수서이목)劦爲二姓(위이성) 未知孰是(미지숙시)) 南行焉(남행언)”이라는 기록에 나오는 (목)劦滿致(만치)와 木滿致(목만치)는 동일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83) 沙沙奴(사사노)跪; 未詳(미상)

84) 7(국); 7국의 위치에 관하여 여러가지 견해가 나와 있는데 우선 比自(비자)㶱은 경남 창령지방을 가리키는 듯한데, 眞興王巡狩碑(진흥왕순수비) 가운데 하나인 昌寧碑(창령비)(561년 건립)에 比子伐(비자벌)로 나오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地理志(지리지)에 나오는 比自火郡(비자화군)(또는 比斯伐(비사벌))이 곧 比自(비자)㶱과 같은 곳으로 믿어진다. 南加羅(남가라)는 곧 낙동강 河口(하구)인 金海(김해)에 있던 本加耶(본가야)를 지칭한 것으로 믿어지는데 본가야는 532년에 신라에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南加羅(남가라)의 명칭은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41 金庾信傳(금유신전)에 인용되어 있는 庾信碑(유신비)에 ‘則南加耶始祖首露(칙남가야시조수로)’라는 기록이 보인다. 㖨(국)은 㖨己呑國(기탄국)과 같은 것으로 大邱(대구) 부근의 慶山(경산)지방으로 추정해 왔으나, 최근 이를 경남의 靈山(령산), 密陽(밀양) 일대의 한 지역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6세기 전반까지 가야연맹을 구성하고 있던 小國(소국)으로 529년을 전후한 2-3년 사이에 가장 먼저 신라에 병합되었다고 한다. 安羅(안라)는 경남 咸安(함안)으로 보고 있는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咸安郡(함안군)을 阿尸良國(아시량국)(또는 阿那加耶(아나가야))이라 하였고 『三國遺事(삼국유사)』 권 1의 五伽耶(오가야)조에는 阿羅(아라)(또는 (야))伽耶(가야)를 당시의 咸安(함안)이라고 하였다. 多羅(다라)는 경남 陜川(합천)지역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 江陽郡(강양군)조에 본래 大良(대량)(또는 (야))州郡(주군)인데 경덕왕 때에 이름을 바꾸었으며 지금의 陜州(합주)라고 하였다. 卓淳(탁순)은 대개 오늘날의 大邱(대구) 부근으로 보아 왔으나 이를 경남 창원지방에 있던 가야 소국으로 보는 새로운 견해가 있다. 加羅(가라)는 경북 高靈(고령)지방에 있던 大加耶(대가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7국 平定(평정)의 주체는 왜가 아니라 百濟軍(백제군)의 가야지역에 대한 작전을 기록한 것으로 이 때 가야 여러 나라는 백제의 세력권 속에 들어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85) 古奚津(고해진); 古奚(고해)는 『三國志(삼국지)』 東夷傳(동이전) 馬韓(마한)조에 보이는 狗奚國(구해국)으로서 오늘날의 전남 康津(강진)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으며, 狗奚國(구해국)을 전남 海南(해남)으로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86) 忱彌多禮(미다례); 應神天皇(응신천황) 8년조의 百濟記(백제기)에도 보이는데 『隋書(수서)』 등에 耽羅(탐라)로 기록된 오늘날의 제주도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앞의 古奚津(고해진)의 중심되는 부락으로서 康津(강진)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다.

87) 貴須(귀수); 近仇首王(근구수왕)을 가리킨다.

88) 4(읍); 4(읍)의 위치에 관해서는 대개 이를 전라도 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는데, 布彌支(포미지)와 辟(중)은 각각 오늘날의 羅州(라주)와 寶城(보성)으로 비정되고 있으며 이는 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346-375)이 馬韓(마한)을 멸하여 전라도 남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천관우는 比利(비리) 등 4읍을 比利(비리)‧辟(중)‧布彌(포미)‧支半(지반)‧古四(고사)의 5읍으로 읽어 이를 각각 扶安(부안)(保安(보안))‧金堤(금제)‧井邑(정읍)‧扶安(부안)‧井邑(정읍)(古阜(고부))에 비정하였다.

89) 意流村(의류촌); 백제의 始祖(시조) 溫祚(온조)가 도읍을 정했던 尉禮城(위례성)과 (음)이 비슷하므로 백제국의 聖地(성지)로서 王都(왕도) 漢城(한성)을 지칭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0) 辟支山(지산); 백제의 옛 지명으로 오늘날의 전북 김제로 비정된다.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東夷傳(동이전)에 보이는 馬韓(마한)의 한 국가인 辟卑離國(비리국), 『南齊書(남제서)』 百濟傳(백제전)에 보이는 辟(중),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보이는 辟(성)‧碧骨(벽골)과 같은 곳으로 짐작된다.

91) 古沙山(고사산);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6 지리지에 古阜郡(고부군)을 본래 백제의 (고)眇((사)의 잘못인 듯)夫里郡(부리군)이라 하였으므로 古沙山(고사산)도 오늘날의 전북 古阜(고부)지방으로 비정하고 있다.

92) 多沙城(다사성); 蟾津江(섬진강) 河口(하구) 부근의 오늘날의 河東(하동)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34 지리지에 河東郡(하동군)을 본래 韓多沙郡(한다사군)이었다고 하였다.

93) 七枝刀(칠지도); 7개의 가지가 달린 칼을 말하는데 여기에는 백제에서 바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제의 近肖古王(근초고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일본 奈良縣(나양현) 天理市(천리시) 石上神宮(석상신궁)에 보관되어 있는 이른바 七枝(칠지)((지))(도)가 바로 이것이라고 믿어지는데 이 刀面(도면)의 양쪽에 모두 69자의 銘文(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에 의하면 이 칼은 泰和(태화) 4년에 백제왕이 (왜)의 侯王(후왕)에게 下賜(하사)할 목적으로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으며 당시 백제와 倭國(왜국)과의 친교관계를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이 泰和(태화) 4년을 일본 학계에서는 東晉(동진)의 太和(태화) 4년(369)으로 보고 있는데 이에 대해 北魏(북위) 太和(태화) 4년(480)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며 銘文(명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여러가지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94) 七子鏡(칠자경); 보름달과 같이 둥근 형태의 거울인 듯한데 七曜紋(칠요문)이 있는 거울 또는 七鈴鏡(칠령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藝文類聚(예문유취)』의 天部(천부) (양) 簡文帝(간문제)의 望月(망월)의 (시)에 “形同七子鏡(형동칠자경) 影類九秋霜(영류구추상)”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데 奈良時代(나량시대)까지의 거울은 일반적으로 圓形(원형)이므로 七子鏡(칠자경)도 원형 거울로 추정된다.

95) 谷那鐵山(곡나철산); 당시 백제 王都(왕도)가 오늘날의 서울 부근이었고 나라 서쪽에 (강)이 있다고 한 기록의 강은 臨津江(임진강), 禮成江(예성강)으로 추정되므로 谷那(곡나)는 이 두 강의 상류에 있는 황해도 谷山郡(곡산군) 일대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6) 枕流王(침류왕); 『三國史記(삼국사기)』에 의하면 枕流王(침류왕)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384-385년 2년간 在位(재위)하였고 元年(원년)에 불교를 수용하였다.

97) 가야사에서 가야의 국왕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하였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데 이는 혹 근초고왕대의 백제가 가야 서부지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듯하다.

98) 加羅(가라); 여기에 나오는 加羅(가라)가 구체적으로 김해의 본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아니면 고령의 대가야를 일컫는 것인지 또는 다른 가야 소국을 가리키는지는 잘 알 수 없다.

99) 貴須王(귀수왕)은 『삼국사기』의 近仇首王(근구수왕)(375-384)을 일컫는 것으로 믿어지는데 이에 의하면 근구수왕은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아들로서 王太子(왕태자) 시절부터 父王(부왕)인 近肖古王(근초고왕)의 정복사업을 크게 도왔으며 즉위 후에도 父王(부왕)의 사업을 착실히 계승하여 3년(377) 10월에는 그 자신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한 일도 있었는데, 사기에는 10년(384) 4월에 돌아간 것으로 되어 있다. 近仇首王(근구수왕)을 이어 즉위한 枕流王(침류왕)(384-385)은 近仇首王(근구수왕)의 元子(원자)로서 (모)는 (아)尒夫人(부인)이며 아버지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100) 『三國史記(삼국사기)』 권 25에 辰斯王(진사왕)에 관하여 近仇首王(근구수왕)의 仲子(중자)이며 枕流王(침류왕)의 아우인데 침류왕이 죽자 太子(태자)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다고 하였다. 王子(왕자) 阿花(아화)는 『三國史記(삼국사기)』에 백제 제 17대 왕인 阿莘王(아신왕)(또는 阿芳(아방))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즉 『三國史記(삼국사기)』에 阿莘王(아신왕)(392-405)은 침류왕의 元子(원자)였는데 父王(부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叔父(숙부)인 辰斯(진사)가 즉위했으나 辰斯王(진사왕)이 在位(재위) 8년만에 죽자 阿莘王(아신왕)이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日本書紀(일본서기)』에는 진사왕이 왕위를 빼앗은 것으로 되어 있고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왕위 계승이 순조로웠던 것처럼 서술하고 있는 것이 다르며, 또 『日本書紀(일본서기)』의 年代(년대)는 120(년)을 내려야 『三國史記(삼국사기)』의 辰斯王(진사왕) 卽位年代(즉위년대)와 일치하게 된다.

101)是歲(시세) : 이 해는 壬辰年(임신년)이다. 그러나 百濟(백제)의 阿花(아화)((신))(왕)이 즉위한 해는 392년 壬辰年(임진년)이므로, 書紀(서기) 紀年(기년)을 2(순)을 수정하면 『三國史記(삼국사기)』의 기사와 일치하게 된다.

102)百濟(백제)의 辰斯王(진사왕)이····예의를 잃었으므로 : ‘貴國(귀국)에 예의를 잃었다’는 표현은 應神紀(응신기) 8년조 注文(주문)을 통하여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百濟(백제)가 日本(일본)의 半島政策(반도정책)에 따르지 않을 때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이 기사의 경우는 百濟(백제)의 對高句麗(대고구려)정책과 관련이 있다고 보여진다. 즉 당시 辰斯王代(진사왕대)은 高句麗(고구려)의 南下政策(남하정책)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왕이 죽던 해인 辰斯王(진사왕) 8년 7월에는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 “高句麗王德談(고구려왕덕담)(廣開土王(광개토왕)) 帥兵四萬(수병사만) 來攻北鄙(래공북비) 陷石峴等十餘城(함석현등십여성) 王聞德談能用兵(왕문덕담능용병) 不得出拒(부득출거) 漢水北諸部落(한수북제부락) 多沒焉(다몰언)”이라 되어 있는 바와 같이, 高句麗(고구려) 廣開土王(광개토왕)에게 漢水(한수) 以北(이북)의 諸城(제성)을 빼앗기기도 하였다.

103)이로 말미암아····사죄하였다 : 辰斯王(진사왕)의 죽음에 대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辰斯王(진사왕) 8년조에는 “王田於狗原(왕전어구원) 經旬不返(경순부반) 十一月(십일월) 薨於狗原行宮(훙어구원행궁)”이라고 되어 있다. 이 문장의 표현형식으로 미루어 辰斯王(진사왕)이 불시에 고의적으로 죽임을 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書紀(서기)에 보이는 이 기록은 그 진상을 전하는 것이라 보여진다. 辰斯王(진사왕)의 즉위에 대하여는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 “太子(태자)(阿花(아화))(소) 故叔父辰斯卽位(고숙부진사즉위)”라고 되어 있고, 書紀(서기) 神功皇后條(신공황후조)에 “王子阿花年少(왕자아화년소) 叔父辰斯奪立爲王(숙부진사탈립위왕)”이라고 되어 있어서, 즉위에 이르기까지 조카 阿花(아화)와의 사이에 갈등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辰斯王(진사왕)의 죽음은 이와 같은 왕위계승상의 문제 및 당시 百濟(백제)의 對高句麗(대고구려)정책과 그에 따른 日本(일본)의 대응 등과 크게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104)阿花(아화)를 왕으로 세우고 : 阿花王(아화왕)에 대하여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는, “阿莘王(아신왕)[或云(혹운) 阿芳(아방)] 枕流王之元子(침류왕지원자)·····王薨時年少(왕훙시년소) 故叔父辰斯繼位(고숙부진사계위) 八年薨(팔년훙) 卽位(즉위)”라고 되어 있고, 『三國遺事(삼국유사)』 王曆(왕력)에는, “第十七阿莘王(제십칠아신왕) 一作河芳(일작하방) 辰斯子(진사자) 壬辰立(임진립) 治十五年(치십오년)”이라고 되어 있어,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阿花(아화)와 阿莘(아신)・阿芳(아방)・河芳(하방)을 비교해보면, (화)와 (방)은 뜻이 통하고, (음) 또한 비슷하다. 그러나 (신)은 (화)와 음이나 뜻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아마도 (신)은 (화)의 誤字(오자)가 아닐까 한다. 따라서 阿花(아화) 또는 阿華(아화)라 하는 것이 옳다고 하겠다. 阿花王(아화왕)의 즉위에 이르는 사정은 辰斯王(진사왕)의 즉위 및 죽음과 관련하여 이미 설명한 바 있다. 阿花王(아화왕)의 재위 15년 동안에는 중국에 조공사신을 보낸 기사가 보이지 않는다.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에는 同王代(동왕대)에 高句麗(고구려)와 해마다 전쟁이 계속되었고, (왜)와의 교섭도 여러모로 행해졌음을 기록하고 있다.

105)韓人池(한인지) : 『古事記(고사기)』 應神段(응신단)에, “亦新羅人參渡來(역신라인삼도래) 是以建內宿(시이건내숙)禰命引率(명인솔) 爲役之堤池(위역지제지) 而作百濟池(이작백제지)”라는 비슷한 기사가 있다. 韓人池(한인지)와 百濟池(백제지)는 모두 歸化人(귀화인)에 의하여 축조된 것이라는 점에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百濟池(백제지)는 奈良縣(나량현) 北葛城郡(북갈성군) 百濟村(백제촌)의 땅에 비정되고, 韓人池(한인지)는 奈良縣(나량현) 磯城郡(기성군) 川東村(천동촌)의 唐古池(당고지)에 비정되기도 한다. 이하 應神(응신)・仁德(인덕) 兩紀(양기)에는 이와 같은 治水土木(치수토목)・土地開發(토지개발) 등 농업관계 기사가 많이 보이는데, 일본에 있어서 이와 같은 治水土木(치수토목)의 성행은 半島(반도)에서 歸化人(귀화인)이 많이 渡來(도래)해 오던 시기와 맞물려, 이들이 새로운 농업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歸化人(귀화인)에 의한 農耕(농경)의 발전은 일본 大和朝廷(대화조정)의 경제적 능력을 증대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06)阿花王(아화왕)이····갖추지 않았기 때문에 :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無禮於貴國(무례어귀국))’고 한 것은 앞서 살펴본 辰斯王(진사왕)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高句麗(고구려)에 대한 굴종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高句麗(고구려)의 공격에 대하여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던 辰斯王(진사왕)을 제거하고 즉위한 阿花王(아화왕)은 당연히 高句麗(고구려)에 대하여 강경책을 취하였다.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阿莘王(아신왕) 2년 가을 8월 기사에, ‘王謂武曰(왕위무왈) 關彌城者(관미성자) 我北鄙之襟要也(아북비지금요야) 今爲高句麗所有(금위고구려소유) 此寡人之所痛惜(차과인지소통석) 而卿之所宜用心而雪恥也(이경지소의용심이설치야) 遂謀將兵一萬(수모장병일만) 伐高句麗南鄙(벌고구려남비)····’라 되어 있는 것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즉위 직후부터 阿花王(아화왕)은 高句麗(고구려)에 빼앗긴 漢水(한수) 以北(이북)의 諸城(제성)을 되찾기 위하여 北進(북진)을 개시하였다. 그리하여 同王(동왕) 3년과 4년에 계속적으로 高句麗(고구려)와의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廣開土王碑文(광개토왕비문)의 丙申(병신)년(396) 기사에 의하면, 阿花王(아화왕) 5년 고구려의 廣開土王(광개토왕)은 대규모로 南進(남진)하여 百濟(백제)의 王都(왕도)를 공략하고 百濟王(백제왕)을 臣伏(신복)시켰다.‘無禮於貴國(무례어귀국)’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와 같은 상황과 관련이 깊다. 바로 이 때문에 百濟(백제)는 王子(왕자) 直支(직지)를 日本(일본)에 보내게 되었다.

107)峴南(현남)・支侵(지침)・谷那(곡나)・東韓(동한)의 땅 : 4개를 각각 별개의 지역으로 보는 설이 있고, ‘峴南(현남)・支侵(지침)・谷那(곡나) 등 東韓(동한)의 땅’이라고 하여, ‘東韓(동한)의 땅’이 위의 세곳을 총칭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후자는 應神天皇(응신천황) 16년 是歲條(시세조) 分注(분주)에, 「東韓者(동한자) 甘羅城(감라성)・高難城(고난성)・爾林城是也(이림성시야)」라고 되어 있는 것을 취한 해석이다. 즉, 峴南(현남)을 甘羅(감라)에, 支侵(지침)을 爾林(이림)에 그리고 谷那(곡나)를 高難(고난)에 비정한 것이다. 그 각각이 구체적으로 어디를 가리키는 지 잘 알 수 없지만, 대체로 峴南(현남)은 全北(전북)방면이 아닐까 추정되며, 支侵(지침)은 忠淸南道(충청남도) 洪城(홍성)・大興(대흥) 부근, 谷那(곡나)는 全羅南道(전라남도) 谷城(곡성)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08)直支(직지) : 『三國史記(삼국사기)』에는 腆(지), 『宋書(송서)』에는 (영)이라고 쓰여 있다. 直支(직지)를 日本(일본)에 보낸 사실은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阿莘王(아신왕) 6년 5월조에도, ‘王與倭國結好(왕여왜국결호) 以太子(이태자)腆支爲質(지위질)’이라 기록되어 있어, 書紀(서기)의 기사와 일치한다. 그는 阿花王(아화왕)의 사후 百濟(백제)에 돌아오 왕위를 계승하였다(應神天皇(응신천황) 16년 是歲條(시세조) 참조).

109)弓月君(궁월군) : 『新撰姓氏錄(신찬성씨록)』에는 “太秦公宿(태진공숙)禰 秦始皇帝十三世孫(진시황제십삼세손) 孝武王之後也(효무왕지후야) 男功滿王足仲彦天皇八年來朝(남공만왕족중언천황팔년래조) 男融通王(남융통왕)[一云(일운) 弓月王(궁월왕)] 譽田天皇(예전천황) 十四年來歸(십사년래귀)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솔백이십칠현백성귀화) 獻金銀玉帛等物(헌김은옥백등물)····”이라 하여, 弓月君(궁월군)을 秦始皇帝(진시황제)의 후예라고 기록해 놓았다.

110)阿直伎(아직기) : 『古事記(고사기)』에서는 阿知吉師(아지길사)라고 하였는데, 여기서의 吉師(길사)는 族長(족장)을 나타내는 敬稱(경칭)이다.

111)(경) : 奈良縣(나량현) 橿原市(원시) 大輕町(대경정) 부근.

112)王仁(왕인) : 『古事記(고사기)』에서는 和邇吉師(화이길사)라고 하였다. 書紀(서기)에는 그가 阿花王(아화왕) 말년경에 일본으로 건너온 것처럼 기록되어 있는 데 반하여, 『古事記(고사기)』에는 百濟(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 때의 사람으로 되어 있어 전후 30~40년간의 차이가 있다. 『續日本紀(속일본기)』 延曆(연력) 14년 4월 8일조에는, “漢高帝之後曰鸞(한고제지후왈난) 鸞之後王狗(난지후왕구) 轉云百濟(전운백제) 百濟久素王(백제구소왕)(貴首王(귀수왕))(시) 聖朝遣使徵召文人(성조견사징소문인) 久素王(구소왕) 卽以狗孫王仁貢獻(즉이구손왕인공헌) 是文武生等之祖也(시문무생등지조야)‘라고 하여, 王仁(왕인)을 중국계 王氏(왕씨)의 인물로 기술하였다. 王仁(왕인)은 阿直伎(아직기)와 더불어 百濟文化(백제문화)를 일본에 전해줌으로써 일본의 고대문화를 발달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우리나라 문헌에는 그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전라남도 영암군에는 왕인석상을 비롯하여, 王仁(왕인)이 독서하였다는 왕인책굴 등이 있다. 王仁(왕인)의 무덤은 日本(일본) 大阪(대판)과 京都(경도)의 중간지점인 枚方(매방)에 있다.

113)書首(서수) : 文首(문수)라고도 하며, 東文氏(동문씨)에 대하여 西文氏(서문씨)라고 하기도 한다. 文筆(문필) 전문의 姓氏(성씨)로서, 河內(하내)에 거주하는 史姓諸氏(사성제씨) 가운데 중심적 지위를 점하였다. 天武(천무) 12년 9월에 (련), 同王(동왕) 14년 6월에 忌寸(기촌), 延曆(연력) 10년 4월에 일부가 宿(숙)禰라고 改姓(개성)하였다.

114)直支王(직지왕) : 阿花王(아화왕)의 長子(장자)로서 阿花王(아화왕) 8년에 인질로 日本(일본)에 와 있었다.

115)甘羅城(감라성) : 全羅北道(전라북도) 咸悅(함열)에 해당한다는 설이 있다.

116)高難城(고난성) : 應神天皇(응신천황) 8년 3월조 分注(분주)에 보이는 谷那(곡나)(全羅南道(전라남도) 谷城(곡성))로 비정하는 설이 있지만 잘 알 수 없다.

117)爾林城(이림성) : 忠淸南道(충청남도) 洪城(홍성)・大興(대흥)(옛날 명칭은 任城郡(임성군))에 비정하는 견해와 全羅北道(전라북도) 金堤郡(금제군) 利城(리성)(옛날 명칭은 乃利阿(내리아))에 해당한다고 보는 두가지 설이 있다.

118)久爾辛(구이신) :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久爾辛王(구이신왕) 元年條(원년조)에, ‘腆(지)(直支(직지))王長子(왕장자) 腆支王薨(지왕훙) 卽位(즉위)’라 되어 있고, 同王(동왕) 8년조에, ‘冬十二月王薨(동십이월왕훙)’이라 되어 있다.

119)木滿致(목만치) : 『三國史記(삼국사기)』 百濟本紀(백제본기) 蓋鹵王(개로왕) 21년조에 보이는 (목)劦滿致(만치)이다. 劦은 리의 잘못인 듯하다. (목)리는 百濟(백제)의 複姓(복성)으로 (목)・木羅(목라)와 같다.

120)木羅斤資(목라근자) : 百濟(백제) 近肖古王(근초고왕), 近仇首王(근구수왕) 때의 장군으로 생몰년은 미상이다. 神功皇后攝政(신공황후섭정) 49년 3월조에 보인다. (비)자(벌)・南加羅(남가라)・啄國(탁국)・安羅(안라)・多羅(다라)・卓淳(탁순)・加羅(가라) 등의 가야지역과 新羅(신라)를 공격 또는 회유하여 선린관계를 맺는 한편, 百濟(백제)의 동남부 강역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관한 日本書紀(일본서기)의 전승은 百濟(백제) 近肖古王代(근초고왕대)의 영토확장 과정과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인다.

121)高麗王(고려왕)이····조공하였다 : 이 기사는 사실인가 의심스럽다. 이 시기의 高句麗(고구려)는 廣開土王(광개토왕)・長壽王(장수왕)의 치세 때로서 日本(일본)과는 항상 적대관계에 있었으므로 일본에 朝貢(조공)사신이나 (표)를 보냈다고 보기 어렵다.

122)都加使主(도가사주) : 應神天皇(응신천황) 20년 9월조에 倭漢直(왜한직)의 조상인 阿知使主(아지사주)와 그 아들 都加使主(도가사주)가 17(현)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歸化(귀화)하였다고 되어 있다.

123)(오)나라 : 중국 江南(강남)지역을 가리킨다. 이 해는 丙寅(병인)으로 干支(간지)를 2(순) 수정하면 426년 丙寅(병인)이 되는데, 이시기 중국의 江南(강남)은 南朝(남조) (송)의 시대이다.

124)直支王(직지왕) : 應神天皇(응신천황) 25년 기사에 直支王(직지왕)이 죽었다고 되어 있는 것과 모순이다.

125)韓國(한국) : 三韓(삼한)(馬韓(마한)·辰韓(진한)·弁韓(변한))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고구려)·百濟(백제)·新羅(신라)·加耶(가야) 등을 칭한 것이다.

 

 

 

 

11  仁德天皇 (大鵻鷯天皇)

 

(卽位前紀)  大鵻鷯天皇(仁德天皇)은 譽田天皇(應神天皇)의 네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仲姬命이며 五百城入彦皇子의 손자이다. 天皇은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슬기로우며 용모가 아름다왔다. 어른이 되어서는 어질고 너그러우며 자애로왔다. (應神天皇) 41년 봄 2월에 譽田天皇이 죽었다. 그 때 太子 菟道稚郞子는 왕위를 大鵻鷯尊에게 양보하며 帝位에 오르지 아니하였다. (中略) 이 때 額田大中彦皇子는 倭의 屯田과 屯倉을 장악하려고 屯田司인 出雲臣의 조상 淤宇宿禰에게, “이 屯田은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내가 다스릴 것이다. 너는 주관할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였다. 淤宇宿禰가 太子에게 이 일을 아뢰자 太子는, “너는 곧 大鵻鷯尊에게 말하여라”라고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大鵻鷯尊에게, “臣이 맡고 있는 屯田을 大中彦皇子가 방해하여 다스리지 못하게 합니다”하고 아뢰었다. 大鵻鷯尊은 倭直의 조상인 麻呂에게, “倭의 屯田이 원래 山守의 땅이었다고 하는데 어떠한가”하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臣은 모릅니다. 臣의 아우 吾子籠만이 알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침 이 때 吾子籠은 韓國125)에 파견되어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에 大鵻鷯尊은 淤宇宿禰에게, “네가 직접 韓國에 가서 吾子籠을 불러 와라. 밤낮을 가리지 말고 빨리 가도록 하라”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淡路의 海人 80명을 뽑아서 뱃사공으로 하였다. 이에 淤宇宿禰는 韓國에 가서 즉시 吾子籠을 데리고 왔다·····.

 

(11) 이 해  新羅人이 朝貢하였다. 따라서 이 役事126)에 동원하였다.  

 

12년 가을 7월 辛未 초하루 癸酉日  高麗國이 鐵로 만든 방패와 鐵로 만든 과녁을 바쳤다.

 

(12) 8월 庚子 초하루 己酉  高麗에서 온 사신들을 朝廷에서 향응하였다. 이 날에 群臣 및 百官들을 모아놓고 高麗에서 바친 鐵로 된 방패와 과녁에 활을 쏘아 보게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과녁을 쏘아 꿰뚫지 못하였으나 的臣의 조상인 盾人宿禰만이 鐵로 된 과녁에 활을 쏘아 통과시켰다. 이 때 高麗에서 온 사신들이 그것을 보고 그 활쏘는 솜씨의 훌륭함에 두려워하며 모두 일어나 절하였다. 다음날 盾人宿禰를 칭찬하고 的戶田宿禰라는 이름을 내렸다. 같은 날에 小泊瀨造의 조상인 宿禰臣에게 이름을 내려 賢遺臣이라 하였다[賢遺는 우리말로 左가能려里라 한다].

 

17년  新羅가 朝貢하지 않았다.

 

(17) 가을 9월  的臣의 조상인 砥田宿禰와 小泊瀨造의 조상인 賢遺臣을 (新羅에) 보내어 朝貢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이에 新羅人은 두려워하여 貢物을 바쳤다. 貢物은 비단 1,460필 및 여러가지 물품을 합하여 모두 80척이었다.

 

41년 봄 3월  紀角宿禰를 百濟에 보내어 처음으로 나라의 강역을 나누고 그 땅에서 나는 산물을 모두 기록하였다.127) 이 때 百濟의 왕족인 酒君128)이 무례하게 행동하였으므로 紀角宿禰는 백제의 왕을 질책하였다. 그러자 百濟王은 두려워하여 쇠사슬로 酒君을 묶어서 襲津彦에게 딸려보내어 바쳤다. 酒君은 (일본에) 와서 곧 石川錦織首許呂斯의 집으로 도망가 숨었다. (酒君은) 속여 말하기를, “天皇은 이미 나의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므로 그대에게 의지하여 살고 싶다”고 하였다. 오랜 뒤에 天皇은 드디어 그의 죄를 용서하였다.  

 

43년 가을 9월 庚子 초하루  依網의 屯倉에 있는 阿弭古가 기이한 새를 잡아서 天皇에게 바치며, “臣은 항상 그물을 쳐서 새를 잡는데 아직까지 이와 같은 새는 잡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이하게 생각되어 그것을 바칩니다”라고 말하였다. 天皇은 酒君을 불러 새를 보이며, “이것이 무슨 새인가”하고 물었다. 酒君은, “이와 같은 새는 百濟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여 사람을 따르게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빨리 날아서 온갖 새들을 잡습니다. 百濟 사람들은 이 새를 ‘俱知’[이것은 지금의 매이다]라고 부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 새를) 酒君에게 주어 길들이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들일 수 있었다. 그래서 酒君은 가죽으로 만든 낚싯줄을 그 발에 매고 작은 방울을 그 꼬리에 달아서 팔뚝 위에 올려 놓고 天皇에게 바쳤다. 이 날 白舌鳥野에 행차하여 사냥을 하였다. 그 때 꿩이 많이 날아 올랐는데 매를 놓아 잡도록 하니 잠깐 사이에 수십 마리의 꿩을 얻었다.129)

 

53년 新羅가 朝貢을 하지 않았다.

 

(53) 여름 5월 上毛野君의 조상인 竹葉瀨를 (新羅에) 보내어 조공을 거른 일을 문책하였다. 가는 도중에 흰사슴을 잡았으므로 돌아와 天皇에게 바치고 다시 날을 받아 출발하였다. 잠시 후에 또다시 竹葉瀨의 아우인 田道를 보내면서 詔를 내려, “만약 신라가 대항하거든 군사를 일으켜 공격하라”고 하고, 날랜 병사를 주었다. 新羅는 군사를 일으켜 맞섰다. 이 때 新羅人은 매일 싸움을 걸어 왔다. 그러나 田道는 요새를 굳게 지키고 나가지 않았다. 그 때 신라 군졸 한 명이 진영 밖으로 나온 것을 붙잡아다가 동정을 물으니, “힘 센 사람이 있어 百衝이라 하는데 그는 날래고 용감하여 항상 軍의 오른쪽 선봉이 되고 있다. 그러니 기회를 엿보아 왼쪽을 공격하면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新羅軍이 왼쪽을 비워놓고 오른쪽을 방비하였다. 이에 田道는 날랜 기병을 계속하여 보내 그 왼쪽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新羅軍이 무너지자, 그 틈을 타 병사를 풀어 수백명의 사람들을 죽이고, 4邑의 백성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58) 겨울 10월 吳國・高麗國이 함께 朝貢하였다.  

 

          <<日本書紀>> 13, 雄朝津間稚子宿녜天皇[允恭天皇].

 

  3년 봄 정월 辛酉 초하루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뛰어난 醫員을 구하였다. 가을 8월 醫員이 신라로부터 이르자 천황의 병을 치료하게 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나았다130). 천황이 기뻐하여 의원에게 후한 상을 주어서 자기 나라에 돌려보냈다.

 

  42년 봄 정월 乙亥 초하루 戊子 천황이 죽었다. 이때 나이는 若干131)이었다. 이에 신라왕은 천황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고 슬퍼하여 배 80척으로 조공하고 아울러 각종 樂人 80명을 바쳤다. 이들은 對馬島에 도착하여 큰 소리로 울고 筑紫에 이르러 또 큰 소리로 울었다. 難波津132)에 이르러 모두 흰옷을 입었다. 조공물을 받쳐들고 또 여러가지 악기를 연주하며 難波로부터 서울에 이르기까지 울부짖기도 하고 춤추고 노래부르기도 하였는데, 마침내 屍身을 모셔둔 곳에 參禮하였다.

  겨울 11월 신라의 弔問使들이 問喪의 예를 마치고 돌아갔다. 신라인은 늘 京城 근방에 있는 耳成山, 畝傍山133)을 좋아하였다. 琴引坂134)에 도착하여 그곳을 돌아보며 “우네메하야 미미하야(내 사랑하는 우네메여 미미여)”라고 하였다. 이는 민간에서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아직 익숙지 않았던 까닭에 畝傍山을 ‘于泥口+(우네메)’라 잘못 말하고 耳成山을 ‘水+彌 水+(미미)’로 잘못 말한 것이다. 이때 왜의 飼部135)에 속해있던 사람이 신라사람을 따라갔는데, 이 말을 듣고 의심하기를 신라사람이 采女136)와 정을 통했다고 여겨 돌아와 大泊瀨 皇子137)에게 아뢰었다. 황자는 곧 신라의 使者들을 모두 가두고는 사실여부를 캐물었다. 이때 신라 使者들이 “采女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서울 근방에 있는 두 산을 사랑한다고 말했을 뿐입니다”라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잘못된 말인 것을 알고는 모두 풀어주었다. 이에 신라인들은 매우 원망하여 다음부터는 바치는 물건의 종류와 배의 수를 줄였다.

 

            <<日本書紀>> 14,大泊瀨幼武天皇[雄略天皇].

 

  2년 가을 7월 백제 池津媛은 천황이 장차 同寢하려는 것을 거스리고 石川楯[옛 책에는 石河股合首의 조상 楯이라 한다]과 몰래 정을 통하였다. 천황이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에게 명하여 來目部138)를 시켜 부부의 四支를 나무에 펼쳐 임시로 만든 시렁 위에 올려 놓고 불에 태워 죽였다.[<<百濟新撰>>139)에는 “己巳年에 蓋鹵王이 즉위하였다140). 천황이 阿禮奴足+()를 보내와 여자를 물색하게 하였으므로 백제에서 慕尼夫人의 딸 適稽女郞을 잘 꾸며서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5) 여름 4월 백제 加須利君141)[蓋鹵王이다]은 池津媛[適稽女郞이다]이 불에 타 죽었다는 것을 전해 듣고 의논하기를 “옛날에 여자를 바쳐 采女로 삼았다. 그러나 예의가 없어 우리 나라의 이름을 失墜시켰으니 지금부터는 여자를 바치지 않는 것이 옳겠다” 하였다. 이에 그의 아우 軍君142)[昆支이다]에게 “네가 마땅히 日本에 가서 천황을 섬겨라”고 말하였다. 軍君이 “임금님의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바라건대 임금님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면 그런 다음 떠나라는 명을 받들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加須利君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주며 “나의 임신한 아내는 이미 해산할 달이 되었다. 만약 도중에 아이를 낳게 되면, 바라건대 1척의 배에 태워서 따라서 이른 곳이 어디건 속히 나라에 보내도록 하라”고 하였다. 마침내 작별하고 조정에 파견되는 명을 받들었다.

  6월 丙戌 초하루. 임신한 부인이 과연 加須利君의 말처럼 筑紫의 各羅嶋143)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을 嶋君144)이라 하였다. 이에 軍君은 곧 한 척의 배로 嶋君을 나라에 보내었는데, 이가 武寧王145)이 되었다. 백제 사람들은 이 섬을 主嶋라 일컬었다.

  가을 7. 軍君이 서울에 들어왔다. 이미 다섯 아들을 두었다.[百濟新撰에 “辛丑年에 蓋鹵王이 아우 昆支君을 보내어 大倭에 가서 천왕을 모시게 했는데146), 兄인 왕의 우호를 닦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7) 이해 吉備上道臣田狹이 궁중에서 侍從하고 있었는데, 큰 소리로 친구들에게 稚媛147)에 대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미인들 중에서 내 아내만한 이가 없다. 빼어나게 아름다와 온갖 좋은 점을 갖추었고 환히 빛나고 온화하여 여러가지 좋은 용모를 구비하였다. 화장도 필요 없으며 향수를 바를 것까지도 없다. 넓은 세상에서 견줄만한 이가 드무니 이 시대에 홀로 빼어난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천황이 귀를 귀울여 멀리서 듣고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자기가 稚媛을 얻어 시중드는 여자로 삼고자 하여 田狹을 任那 國司148)로 삼았다. 얼마 지난 후 천황이 稚媛과 동침하였다. 田狹臣은 稚媛에게 장가들어 兄君과 弟君을 낳았다.[다른 책에서는 “田狹臣 아내의 이름은 毛媛인데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녜149)의 딸이다. 천황이 용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그 남편을 죽이고 자기가 데리고 살았다”고 한다]. 田狹은 이미 任地에 가 있었는데, 천황이 그의 아내와 사통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움을 얻고자 신라에 들어갈 생각을 하였다. 이 때 신라는 ‘中國’150)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이 田狹臣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直赤尾에게 명하여 “너희들은 마땅히 가서 신라를 懲罰하라”고 하였다. 이때 西漢才伎 歡因知利가 옆에 있다가 나아가 “저희들보다 뛰어난 자가 韓國151)에 많이 있으니 불러서 부릴만 합니다”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여러 신하들에게 “그러면 마땅히 歡因知利를 弟君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 길을 취하고 아울러 칙서를 내려 재주가 뛰어난 자를 바치게 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弟君은 명을 받들어 무리를 이끌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그 나라(신라)에 들어가는데 나라의 신이 늙은 여자152)로 변하여 忽然히 길에서 맞이하였다. 弟君이 나라의 멀고 가까움을 묻자 늙은 여자가 “다시 하루153)를 더 간 다음에야 다다를 수 있다”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길이 멀다고 여겨 정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에서 바쳐 데리고 올 재주있는 사람들을 큰 섬안에 모아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핑계로 몇달 동안 머물러 있었다.

  任那國司 田狹臣은 弟君이 (신라)를 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어 弟君에게 警戒하여 “너의 목이 얼마나 단단하기에 다른 사람을 치는가. 전하는 말을 듣건대 천황이 나의 아내와 사통하여 자식까지 있다고 한다.[자식에 대해서는 윗글에서 이미 보았다154)]. 이제 禍가 나에까지 미치기는 발을 들고 서서 기다리는 것 만큼이나 순식간일 것이다. 내 아들인 너는 백제를 차지하고 앉아 일본에 통하지 않도록 하라. 나는 任那를 차지하고서 역시 일본에 통하지 않겠다” 라고 하였다.        

  弟君의 아내 樟媛은 국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깊고 君臣의 義를 중히 여기며, 충성스러운 마음은 밝은 해보다 더하고 절의는 푸른 소나무보다 뛰어났다. 그래서 그 모반을 미워하여 몰래 남편을 죽여 집안에 숨겨 묻어두고 海部 直赤尾와 함께 백제에서 바친 손재주 좋은 기술자를 거느리고 큰 섬에 있었다. 천황은 弟君이 죽은 것을 알고 日鷹吉士堅磐固安錢 [堅磐은 우리말로 柯陀之波라 한다]을 보내어 함께 복명하게 했다. 마침내 倭國 吾礪 廣津[廣津은 우리말로 比慮岐頭라 한다]155)에 안치하였으나 병들어 죽은 사람이많았다. 이로 말미암아 천황이 大伴大連室屋에게 詔를 내려 東漢直국에게 명하여 新漢156) 陶部 高貴, 鞍部 堅貴, 畵部 因斯羅我, 錦部 定安那錦, 譯語 卯安那 등을 上桃原,下桃原,眞神原의 3곳에 옮겨 살게 하였다.[어떤 책에는 “吉備臣弟君이 백제로부터 돌아와 漢手人部,衣縫部,肉人部를 바쳤다”고 한다].

 

  8년 봄 2. 身狹村主靑과 檜외民使博德을 吳나라157)에 사신보냈다. 천황이 즉위한 때부터 이해에 이르기까지 신라국은 천황의 명을 듣지 않고 마음대로 하며 공물을 보내지 않았는데, 지금 8년째가 된다. 그리고는 ‘中國’의 마음을 몹시 두려워하여 高麗와 우호를 맺었다158). 이로 말미암아 고려왕이 날랜 병사 100명을 보내어 신라를 지켜 주었다. 얼마되지 않아 고려 군사 한사람이 말미를 얻어 자기 나라에 돌아갈 때 신라사람을 말몰이(典馬) [典馬는 우리말로 于麻柯比라 한다]로 삼았는데, 돌아보면서 “너희 나라는 우리나라에게 망할 날이 멀지 않았다”고 하였다.[어떤 책에는 ‘너희 나라가 우리의 땅이 될 날이 멀지 않았다’ 하였다고 한다].  말몰이가 그 말을 듣고 거짓으로 배가 아프다고 하여 뒤에 처져 있다가 마침내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돌아와 그가 말한 것을 설명하였다. 이에 신라왕은 고려가 거짓으로 지켜주는 것을 알고는 사자를 급히 보내어 나라 사람들에게 “사람들이여, 집안에서 기르는 수탉을 죽여라”라고 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 뜻을 알고는 나라 안에 있는 고려사람들을 모두 죽였다. 그런데 살아남은 고려사람 1명이 틈을 타서 빠져나가 도망하여 자기 나라에 들어가 모든 것을 이야기하였다. 고려왕이 곧 군사를 일으켜 筑足流城159)[어떤 책에서는 都久斯岐城이라고 한다]에 모여 진을 치고서 드디어 노래하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하였다. 신라왕은 밤에 고려군이 사방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소리를 듣고 적군이 모두 신라땅에 들어왔음을 알았다.이에 사람을 시켜 任那王에게 “고려왕이 우리나라를 정벌합니다. 지금의 시기는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160)과 같고 나라의 위태로움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보다 더하여 나라 운명의 길고 짧음을 헤아릴 수 없을 때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日本府行軍元帥에게 구원을 청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任那王이 膳臣斑鳩[斑鳩는 우리말로 伊柯屢俄라 한다], 吉備臣小梨, 難波吉士赤目子에게 권하여 가서 신라를 구해주도록 했다. 膳臣 등이 아직 軍營에 이르지 않고 머물러 있었다. 고려의 여러 장수들은 膳臣 등과 싸우기도 전에 모두 두려워 하였다. 膳臣 등은 힘써 군사를 위로하고 軍中에 令을 내려 속히 공격하기 위한 준비를 갖추게 하고 급히 나아가 공격하였다. 고려군과 서로 10여일을 대치하다가 밤에 지세가 험한 곳을 파서 地道161)로 삼고는 군대의 짐을 모두 옮기고 기습할 군사를 그곳에 배치하였다. 날이 밝을 무렵에 고려는 膳臣 등이 도망한 것으로 여기고 모든 군사로 뒤쫓아왔다. 이에 기습군사를 풀어놓아 보병과 기병이 협공하여 그들을 크게 깨뜨렸다. 두 나라의 원한은 이로부터 생겼다[두 나라라는 것은 高麗와 新羅를 말한다]. 膳臣 등이 신라에게 “너희는 매우 약한데 매우 강한 나라와 부닥쳤다. 官軍162)이 구해주지 않았다면 반드시 업신여김을 당하는 바가 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른 사람의 영토가 되었다면 이는  아마 이번 전쟁에 의해서였을 것이다. 지금 이후로 어찌 天朝를 배반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

   

권 14  雄略天皇

 

9(465) 3  천황이 新羅를 직접 정벌하려고 하였다. 神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고 경계하니, 천황이 이로 말미암아 가지 않았다. 그리고 紀小弓宿禰·蘇我韓子宿禰·大伴談連[談은 우리말로 箇陀利라고 한다]·小鹿火宿禰 등에게 칙명으로 “新羅는 본래 서쪽 땅에 있으면서 여러 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조빙을 어기지 않았고 공물도 잘 바쳤다. 짐이 천하를 다스림에 미쳐 몸을 對馬의 밖에 두고 자취를 匝羅163) 밖에 감춘 채 高麗의 조공을 막고 百濟의 城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다시 조빙을 이미 걸렀으며 공물도 바치지 않았음에 있어서이겠는가. 이리같은 사나운 마음이 있어 배부르면 나는 듯 달려가고 굶주리면 붙좇는다. 그대들 네 卿을 대장으로 삼으니 王師를 거느리고 가 쳐서 하늘이 내리는 벌을 받들어 행하라”고 하였다. 이에 紀小弓宿禰는 大伴室屋大連으로 하여금 천황에게 호소해주도록 하면서 “신이 비록 미약하지만 삼가 칙명을 받들겠습니다. 다만 지금 신의 아내가 목숨이 다할 무렵이 되어 신을 돌볼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公은 이 일을 갖추어 천황께 아뢰어 주십시오”라 하였다. 大伴室屋大連이 갖추어 아뢰니 천황이 듣고 슬피 탄식하면서 吉備上道의 采女 大海를 紀小弓宿禰에게 하사하여 그를 따라가서 돌보게 하였다. 드디어 수레를 밀어 (군대를) 보냈다. 紀小弓宿禰 등이 곧 新羅에 들어가 이웃 郡을 함께 공격하였다[行屠는 함께 가서 함께 공격한다는 것이다]. 新羅王은 밤에 官軍이 사방에서 북을 울리는 소리를 듣고 (관군이) 164)의 모든 땅을 얻었음을 알고 수백 騎와 함께 어지러이 도망갔다. 그러므로 크게 패배시키고 小弓宿禰는 (新羅軍을) 쫓아가 陣 속에서 적장을 베었다. 탁의 땅이 모두 평정되었으나 남은 무리들이 항복하지 않았다. 紀小弓宿禰는 또한 군사를 거두어 大伴談連 등과 만나 군대를 다시 크게 일으켜 남은 무리와 싸웠다. 이날 저녁 大伴談連과 紀岡前來目連이 모두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談連의 시종으로 같은 姓인 津麻呂는 나중에 진영 안으로 들어가 자신의 주인을 찾았다. 진영에서 찾지 못하자 나와서 “우리 주인 大伴公은 어느 곳에 계십니까?”라고 물으니, 사람들이 “너의 주인 등은 적의 손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주며 주검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津麻呂는 그 말을 듣고 땅을 구르면서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혼자 살겠는가”라 소리치고 적에게 나아가 함께 죽었다. 얼마 후 남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가니 관군도 따라서 물러났다.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병에 걸려 죽었다.

 여름 5월  紀大磐宿禰165)는 아버지가 이미 돌아가셨음을 듣고 新羅를 향하면서 小鹿火宿禰가 관장하던 兵馬와 船官 및 小官들을 장악하고 명령을 마음대로 하였다. 그러므로 小鹿火宿禰는 大磐宿禰를 매우 원망하여 韓子宿禰에게 거짓으로 “大磐宿禰가 저에게 ‘내가 다시 韓子宿禰가 장악한 관리들을 뺏는 것이 머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원컨데 굳게 지키십시오”라고 고했다. 이로 말미암아 韓子宿禰는 大磐宿禰와 틈이 벌어졌다. 이 때 百濟王은 日本의 장수들이 작은 일 때문에 틈이 벌어졌음을 듣고 韓子宿禰 등에게 사람을 시켜 “나라의 경계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왕림하시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韓子宿禰 등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갔는데, 강에 이르러 大磐宿禰가 강에서 말에게 물을 먹였다. 이 때 韓子宿禰가 뒤에서 大磐宿禰의 말안장 뒤를 받친 나무에 활을 쏘았다. 大磐宿禰가 놀라 돌아보며 韓子宿禰를 쏘니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세 신하들이 앞에서 서로 다투었으므로 길에서 행렬이 어지러워져 百濟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 때 采女 大海가 小弓宿禰의 관을 따라 日本에 도착하였다. 드디어 大伴室屋大連에게 근심스럽게 상의하기를 “저는 장례치를 곳을 모르겠습니다. 원컨대 좋은 땅을 골라주십시오”라 하니, 大連이 곧 아뢰었다. 천황이 大連에게 명령하여 “大將軍 紀小弓宿禰는 용처럼 뛰어 오르고 호랑이처럼 노려보며 8方을 널리 바라보았고, 반역자들을 불시에 토벌하고 사방의 적들을 물리쳤다. 그러므로 몸은 만리 밖에서 수고로웠고 목숨이 三韓에서 떨어졌으니, 매우 불쌍히 여겨 장례를 담당할 사람을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또 그대 大伴卿과 紀卿 등은 같은 나라  가까운 곳의 사람으로서 유래가 오래되었도다”라고 하였다. 이에 大連이 명령을 받들어 土師連小鳥로 하여금 田身輪邑166)에 무덤을 만들어 장례지내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大海가 기뻐 가만히 있을 수 없어 韓奴 室·兄麻呂·弟麻呂·御倉·小倉·針 6 口를 大連에게 보냈는데, 吉備上道의 蚊嶋田邑 家人部가 이들이다. ···

 

11(467) 가을 7  百濟國으로부터 도망해 온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이름을 貴信이라고 하였다. 또 貴信은 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의 吳琴167)을 타는 壃手屋形麻呂 등이 바로 그 후손이다.    

 

15(471)  秦의 백성168)을 臣·連169) 등에게 분산시켜 각각 원하는 바에 따라 부리도록 하고 秦造170)에게 맡기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秦造酒가 매우 근심스럽게 여기며 천황을 섬겼다. 그러므로 천황은 그를 총애하여 詔를 내려 秦의 백성을 모아 秦酒公에게 주니, 공은 이에 180種의 勝171)을 거느리고 庸調로 絹縑172)을 바쳐 朝廷에 가득 쌓았다. 그러므로 姓을 하사하여 禹豆麻佐라 하였다[일설에는 禹豆母利麻佐라 하였는데, 모두 가득 쌓은 모양이다].

 

16(472) 가을 7월   詔를 내려 뽕나무 재배에 적당한 國縣에 뽕나무를 심도록 하였다. 또 秦의 백성을 분산하여 옮겨서 庸調를 바치도록 하였다.

 

20(476)173) 겨울  高麗의 왕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百濟를 쳐서 없앴다. 이 때 조금 남은 무리들이 있어 倉下에 모여 있었는데 군량이 다하자 매우 근심하여 울었다. 이에 高麗의 장수들이 왕에게 “百濟는 마음이 일정하지 않습니다. 신들은 그들을 볼 때마다 모르는 사이에 착각하게 됩니다. 다시 덩굴처럼 살아날까 두려우니, 쫓아가 없애기를 청합니다”고 하였다. 왕은 “안된다. 과인이 듣기에 百濟國은 日本國의 官家가 되었는데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고 한다. 또 그 왕이 들어가 천황을 섬긴 것은 사방의 이웃들이 다 아는 바이다”라 하였으므로 드디어 그만두었다[『百濟記』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蓋鹵王 乙卯年(475) 겨울 狛174)의 大軍이 와서 大城을 7일 낮밤을 공격하였다. 王城이 항복하여 함락되니 尉禮175)를 잃었다. 국왕과 태후, 왕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21(477) 3월  천황이 百濟가 고구려에게 패배했음을 듣고 久麻那利176)를 汶洲王177)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원해 일으키게 하였다178). 당시 사람들이 모두 ‘百濟국은 비록 거의 망해 倉下에 모여 근심하고 있으나, 실로 천황에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만들게 되었다’고 하였다[汶洲王은 蓋鹵王의 동생이다179). 『日本舊記』에서는 “久麻那利를 末多王180)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久麻那利는 任那國의 下哆呼唎縣의 別邑이다].  

 

23(479) 여름4 百濟의 文斤王181)이 죽었다. 천왕이 昆支王182)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王이 어린 나이에 총명하므로 칙명으로 궁궐에 불러 직접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근하게 조심하도록 타이르고 그 나라의 왕으로 삼았다. 그리고 兵器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 군사 500인을 보내 자기나라로 호위해 보냈는데, 이 사람이 東城王183)이 되었다.

 *이 해  百濟에서 바친 調賦가 평상시보다 많았다. 筑紫의 安致臣·馬飼臣 등이 수군을 거느리고 高麗를 쳤다.  

8庚午 초하루 丙子  천황의 병이 더욱 심해져 관료들과 하직하고, 또 손을 잡고 흐느껴 울었다. (천황이) 大殿에서 죽었다.··· 이 때 新羅를 정벌하러 갔던184) 장군 吉備臣尾代의 행렬이 吉備國에 이르러 집을 지나갔다. 뒤를 따르던 500蝦夷들이 천황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서로 이르기를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천황이 죽었으니 때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서로 모여 이웃 郡을 침략하여 노략질하였다. 이에 尾代가 집으로부터 와서 蝦夷와 娑婆水門에서 만나 싸우며 활을 쏘니 蝦夷들이 뛰어오르거나 엎드려서 능히 화살을 피해 벗어나므로 끝내 쏘아 맞힐 수 없었다.···  

 

권15  弘計天皇 顯宗天皇

 

3(487) 2丁巳 초하루 阿閉臣事代가 명을 받들고 任那에 사신으로 나아갔다. 이 때 月神이 사람에게 의탁하여 “나의 조상 高皇山靈은 이미 天地를 녹여 만든 공이 있었으니, 백성의 땅으로 月神인 나를 받들어야 한다. 만약 청에 따라 나에게 바친다면 복과 경사가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事代가 이로 말미암아 서울로 돌아와 갖추어 아뢰니 歌荒樔田으로써 받들었으며[歌荒樔田은 山背國 葛野郡에 있다], 壹伎縣主의 선조인 押見宿禰가 사당에 모셨다.

*이 해 紀生磐宿禰가 任那를 점거하고 高麗와 교통하였으며, 서쪽에서 장차 三韓의 왕노릇하려고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고 칭하였다. 任那의 左魯·那奇他甲背 등이 계책을 써서 百濟의 適莫爾解를 爾林185)에서 죽이고[爾林은 高麗의 땅이다], 帶山城186)을 쌓아 동쪽 길을 막고 지켰으며, 군량을 운반하는 나루를 끊어 군대를 굶주려 고생하도록 하였다. 百濟의 왕이 크게 화가 나, 領軍187) 古爾解·內頭188) 莫古解189) 등을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帶山城에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磐宿禰는 군대를 내보내 맞아 쳤는데 膽力이 더욱 왕성하여 향하는 곳마다 모두 깨트리니 한 사람이 백 사람을 감당할 정도였다. (그러나) 얼마 후 군대의 힘이 다하니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百濟國이 左魯·那奇他甲背 등 300여 인을 죽였다.

                         

 億計天皇 仁賢天皇

 

6(493) 가을 9己酉 초하루 壬子 日鷹吉士를 보내 高麗에 사신으로 보내 손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불러오게 하였다.

* 이번 가을 日鷹吉士가 사신으로 파견된 후에, 어떤 여인이 難波의 御津에 살았는데 곡을 하며 “어머니에게도 兄이요 나에게도 형이며, 어린 풀같은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 하였다[어머니에게도 형이요 나에게도 형이며라 한 것은 우리말로는 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이다190) . 나의 남편 가련하구나라고 한 것은 우리 말로는 阿我圖摩播耶라 한다. 어린 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옛날에 어린 풀로 부부를 비유하였으므로 어린 풀을 남편이라 여겼던 것이다]. 곡소리가 매우 슬퍼 사람들의 腸을 끊는 듯하였다. 菱城邑 사람 鹿父[녹부는 사람 이름이다. 사람들은 父를 柯曾이라고 부른다]가 듣고 앞으로 나아가 “어찌 슬피 우는 것이 이처럼 심한가”라 하니, 여인이 답하기를 “가을 나무의 슬픔이 더하여 두 배로구나(雙은 둘이다). 받아들여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였다. 鹿父가 “그렇다”라 하며 말하는 내용을 알았다. 동반자가 있었는데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어찌 알았습니까”라 물으니, (녹부가) 답하기를 “難波玉作部鯽魚女[鯽魚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浮儺謎라 한다]가 韓白水郞전[韓白水郞전이라 한 것은 우리 말로 阿羅摩能波陀該이니, 전은 보리밭을 경작하는 것이다]에게 시집가서 哭女를 낳았고, 哭女[哭女라 한 것은 우리 말로 儺俱謎라 한다]는 住道人 山杵에게 시집가서 飽田女를 낳았다. 韓白水郞전과 그 딸 곡녀는 모두 일찍 죽었는데, 住道人 山杵가 앞서 玉作部鯽魚女와 간통하여 추(麤의 약자)寸을 낳았다. 麤寸은 飽田女를 부인으로 맞아 들였다. 이 때 麤寸이 日鷹吉士를 따라 高麗를 향해 출발하였으므로 그 처인 飽田女가 배회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돌아보고, 마음의 갈피를 잃고 상심하여 곡소리가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사람들의 장을 끊을 듯하였다”라고 하였다.···

* 이 해  日鷹吉士가 高麗로부터 돌아와 工匠 須流枳·奴流枳 등을 바치니, 지금의 大倭國 山邊郡 額田邑191) 熟皮高麗192)가 그 후예이다.

 

125)韓國 : 三韓(馬韓·辰韓·弁韓)의 총칭으로 표시되나 시기적으로 보아 高句麗·百濟·新羅·加耶 등을 칭한 것이다.

126)이 役事 : 바로 앞의 기사 즉, 仁德天皇 11년 겨울 10월조에 보이는, 難波高津宮의 북쪽 들판을 파서 아래의 물을 끌어다 서쪽바다(大阪灣)에 대게 한 일과, 북쪽 내에 물이 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하여 茨田堤를 쌓은 일을 가리킨다.

127)처음으로 나라의·····모두 기록하였다 : 『日本書紀』 권25 孝德天皇 大化 원년 7월 百濟의 사신에게 내린 詔에, ‘是我遠皇祖之世 以百濟國 爲內官家 ···· 後遣三輪栗隈君東人 觀察任那國堺 是故 百濟王隨勅 悉示其堺’라고 되어 있는데, 仁德天皇 31년의 이 기사는 여기에서 비롯되어 만들어진 기사가 아닌가 한다.

128)酒君 : 酒君의 世系는 알 수 없다. 다만 『新撰姓氏錄』에 右京諸蕃 刑部・同和泉諸蕃  百濟公・六人部連 등의 姓氏가, ‘出自百濟國酒王也’라고 되어 있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이 때 百濟에서 酒君을 바쳤다는 기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129)『日本書紀』 仁德天皇 同年 同月 是月條에 의하면, 이 달에 처음으로 鷹甘部를 두었는데, 이로 말미암아 당시 사람들은 매 기르는 곳을 이름하여 鷹甘邑이라 하였다고 한다.

130) 醫員이 新羅로부터 ...병이 나았다 : <<古事記>>(卷 下)에 “此時 新良國主貢進御調八十一척 爾御調大使金波鎭漢紀武 此人深知藥方 故治差帝皇之御病”이라 하여, 允恭天皇의 持病을 신라의 조공사 金波鎭漢紀武가 치유했다고 한다.

131) 若干 : 卜部兼右本과는 달리 北野本과 內閣文庫本에는 ‘八十一’로 되어있다. 한편 <<古事記>>(卷下)에서는 “天皇御年 漆拾捌歲”라 하여 允恭天皇이 78세에 죽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132) 難波津 : 難波는 지금의 大阪市 지역인데, 大阪의 瀨戶 內海의 동쪽 끝과 山背川 어구는 옛날부터 해상교통의 요지로서 좋은 항구가 발달해 있었다. 그곳이 바로 難波津인 듯하다.

133) 耳成山,畝傍山 : 耳成山은 지금의 奈良縣 강(+)原市 木原에 있으며 畝傍山 역시 강原市에 있다.

134) 琴引坂 : 지금의 奈良縣 御所市 富田의 白鳥陵 부근으로 추정된다.

135) 飼部 : 이는 律令 용어로 馬寮에 소속되어 말을 기르고 훈련시키는 일을 맡아보는 品部이다.

136) 采女 : 天皇 옆에서 음식 등을 시중드는 女官으로, 그 명칭은 後漢의 宮中官制에서 기원한다. 일본에서의 采女는 지방 호족들이 중앙조정에 복속하는 과정에서 충성의 保證物로 자신의 누이 혹은 딸을 바쳐 천황을 섬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大和改新 때 采女 貢進이 법제화되었다.
  신라 사신이 畝傍山을 찬미하여 “우네메하야”한 것을 일본 飼部가 采女를 범한 것으로 오해한 이유는 采女의 일본어 발음이 “우네메”였기 때문이다.

137) 大泊瀨 皇子 : 允恭天皇의 다섯째 아들로 후에 雄略天皇이 되었다.

138) 來目部 : 久米部 혹은 大來目部라고도 한다. 大和朝廷에서 군대의 中核이 되고 있던 品部의 하나이다.

139) 百濟新撰 : <<日本書紀>> 백제관계 기사의 細註에 인용된 백제의 史書로 <<백제기>>, <<백제본기>>와 함께 百濟三書라 불리운다. 이들은 모두 현전하지 않는다. 이곳과 武烈天皇 4년조 등 백제 웅진시대의 사실에 관해서는 <<백제신찬>>만이 인용되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 책은 웅진시대의 사적을 적은 책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140)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했다 : <<三國史記>> <<三國遺事>>에 의하면, 毗有王의 맏아들인 개로왕은 455(乙未년)에 즉위하여 475(乙卯年)에 죽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개로왕 治世 中에는 己巳年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본서에는 <<百濟新撰>>을 인용하여 ‘己巳年에 개로왕이 즉위했다’고 한 것은 <<일본서기>> 찬자의 誤寫일지도 모르겠다.

141) 加須利君 : ‘蓋鹵’ 혹은 개로왕의 이름인 ‘慶司’를 音寫한 표기로 보인다. 본서(24) 皇極天皇 원년 2월조에 蓋蘇文을 加須彌로 표기한 것이 이와 비슷한 경우이다. 개로왕은 백제 제 21대 왕으로 ‘近蓋婁王’이라고도 한다. 455년에 毗有王을 이어 즉위하여 21년간 재위하다가 475년에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 한강유역을 상실하고 자신도 고구려군에 의하여 살해되었다.

142) 軍君 : ‘軍’과 ‘昆’,‘君’과 ‘支’는 각각 음과 뜻으로 서로 상통하는 말이다. 昆支를 琨支로도 적는다(본서 16,武烈天皇 4년 是歲條). 본서에서는 곤지를 개로왕의 아우라 하였으나, <<삼국사기>>(26)에서는 개로왕의 둘째 아들로 東城王의 아버지라 하여 兩書間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는 문주왕 3(477) 4월에 內臣佐平이 되었으며 그해7월에 죽었다. 458년에 宋으로부터 征虜將軍左賢王의 관작을 받은 余昆과도 동일인물로 여겨진다. 한편 <<新撰姓氏錄>>에는 昆支를 河內飛鳥戶造의 시조라 하였다.

143) 各羅嶋 : 지금의 長岐縣 東松浦郡 鎭西町의 加唐島에 비정되고 있다.

144) 嶋君 : ‘嶋’의 일본어 발음이 ‘세마’이므로 嶋君은 곧 ‘세마임금’ 혹은 ‘세마왕’이라 할 수 있다. 본서(16) 武烈天皇 4년 是歲條에 인용한 <<백제신찬>>에 武寧王의 이름을 斯麻王이라 하였으며, <<삼국사기>>(26)에서도 斯摩라 하였다. 그리고 1971년에 발굴한 武寧王陵 안에 있던  왕의 지석에도 斯麻王이라 하였다. 이는 모두 ‘嶋君’을 音寫 표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45) 武寧王 : 백제 제 25대 왕으로 이름은 斯麻()이다. 그의 계보에 관해서는, 東城王의 둘째 아들이라는 기록과 개로왕의 동생인 昆支의 아들로서 東城王의 異母兄이라는 두 설이 있다. 1971년 공주 송산리 왕릉에서 발견된 武寧王 지석에 의하면 그는 461년에 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재위기간은 501-523년이다.

146) 辛丑年에 개로왕이...천황을 모시게 했는데 : 개로왕 재위기간 중의 辛丑年은 461년 즉 개로왕 7년에 해당한다. <<삼국사기>> 등 우리나라 史書에는 이 때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없다.

147) 稚媛 : 雄略天皇의 둘째 妃로 稚姬라고도 한다. 稚媛을 吉備上道臣의 딸 혹은 그의 아내라고도 하며, 또는 葛城氏인 玉田宿녜의 딸이라고도 한다. 雄略天皇이 죽은 직후 그녀의 아들 星川皇子에게 모반을 敎唆한 죄로 火刑을 당하였다.

148) 國司 : 大和改新 이후 大寶, 養老律令에 의하여 법제화된 정식 지방관의 총칭으로, 임기는 보통 6년이었으며 재직기간 동안에 職分田을 받았다. 그러나 大和改新 이전의 國司는 國宰(구니노미고도모찌)와 같은 뜻으로 천황이 임시로 파견하는 지방장관을 의미한다.

149)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녜 : 본서(13) 允恭天皇 57월조에서는 玉田宿녜를 葛城襲津彦의 孫子라고 하였으나 여기서는 아들이라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0) 中國 : 日本을 가리킨다. 645년의 大和改新과 701년의 大寶律令 반포를 통한 통치조직의 정비와 天武,持統,文武天皇代의 중앙집권정책 성공으로 국내외적으로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다. 이를 기반으로 하여 일본은 中國의 華夷思想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높혀 中國이라 표현한 듯하다.

151) 韓國 : 한반도 남부에 있던 마한,변한,진한 즉 三韓의 總稱이다.

152) 늙은 여자 : <<삼국사기>>, <<삼국유사>>의 신라 기사에 老女+區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를 豫知와 占卜을 행하는 샤먼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다(崔光植,<三國史記 소재 老女+區의 性格>,<<史叢>> 25,1981.9). 그렇다면 본서의 新羅國神 변한 늙은 여자도 弟君의 신라정벌을 豫防했다는 점에서, 노구와 같은 의미로 파악될 수 있을 듯하다.

153) 하루 : 前後 내용으로 보아 ‘하루(一日)’라는 표현은 부자연스럽다. <<日本書紀通言+>>에서는 ‘一日’을 ‘一月’로 적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154) 자식에 대해서는 ...보았다 : 본서(14) 雄略天皇 원년 3월조에 의하면, 稚姬()는 천황의 두 아들을 낳았는데 磐城皇子와 星川稚宮皇子가 바로 그들이다.

155) 吾礪 廣津邑 : 吾礪는 지금의 大阪府 八尾市 植松町 부근이고 廣津은 難波津 남쪽의 옛 명칭이라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156) 新漢 : 옛날에 귀화한 阿知使主,都加使主 계열의 漢人과 대비하여 이 때 새롭게 귀화한 漢人이라는 뜻이다.

157) 吳나라 : 464년 당시 중국에는 吳나라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여기에서의 吳는 중국 남조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이 해에 사신으로 간 身狹村主靑과 檜隅民使博德은 2년 뒤인 雄略天皇 109월에 귀국하였다. 그후 同王 124월에 재차 吳에 갔다가 14년 정월에 돌아왔다.

158) 高麗와 우호를 맺았다 : 신라는 백제의 침략 위협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4세기 후반에 高句麗와 우호관계를 맺어 군사 정치적인 도움을 받았다.그러나 433년의 羅濟同盟과 450년에 하슬라성주 三直이 悉直에서 고구려 邊將을 죽인 사건을 계기로 하여 양국관계는 梗塞되었다. 그런데 본서에서는 464년 당시 신라, 고구려의 우호관계 속에서 고구려 군사가 신라에 주둔하고 있었다고 한 사실은 <<삼국사기>>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159) 筑足流城 : 지금의 大邱地方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160) 綴旒 : 깃대에 묶어서 늘어트린 술은 아래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랫사람이 임금을 마음대로 할 때 깃대에 묶어놓은 술(綴旒)에 비유한다. <<後漢書>> 張衡傳에 “君若綴旒 人無所麗”라는 말이 있다.

161) 地道 : 적을 공격하거나 방어하기 위하여 땅을 파서 만든 길로 地下道 혹은 塹濠 등을 말한다.

162) 官軍 : 任那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말한다. 中國의 華夷觀을 모방하여 스스로를 ‘中國’이라 일컬었던 것과 같은 경우이다.

163)匝羅: 草羅·歃良으로 보아, 지금의 경상남도 梁山으로 추정하고 있다. 匝은 歃과 같은 음 sap을 옮긴 것이며, 良·羅는 國을 의미하는 地名語尾이다. 양산은 신라와 가야의 교통로에서중요한 거점이었다.

164): 지금의 경상북도 慶山으로 추정되어 왔는데, 근래에 靈山·密陽 방면의 한 지역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제시되었다(金泰植,6세기 전반 伽耶南部諸國의 소멸과정 고찰」(『韓國古代史硏究』 1, 1988).

165) 紀大磐宿禰: 紀小弓宿禰의 아들이다.

166)田身輪邑:지금의 大阪府 泉南郡 岬町淡輪이다.

167)吳琴: 일본 職員令 雅樂寮조에 “腰鼓師 二人”이라 하고 그 義解에서 “謂 吳樂 其腰鼓亦爲吳樂之器也”라 하였는데, 伎樂에 사용되는 악기는 吳鼓 외에는 笛·銅鈸이 있을 뿐 琴은 보이지 않는다. 일본 琴이 아닌 대륙 계통의 琴에는 고구려에서 발달한 玄琴(6), 신라에서 발달한 伽耶琴 즉 新羅琴(12)이 있다. 그러나 貴信이 백제에서 왔다고 했으므로 吳琴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168)秦民: 應神天皇 14년 백제로부터 와서 귀화한 弓月君의 후예이다.

169)臣連: 일본 고대의 姓이다. 大和朝廷이 통일하는 과정에서 조정에 참여한 여러 豪族에게 氏를 주어 고유의 직업을 세습하게 하는 한편 姓(可婆禰)을 부여하여 각 씨의 職掌을 뚜렷하게 구별하였다. 姓은 경칭적인 성격이 농후한 것과 사회적 입장이나 직능적 성격이 농후한 것으로 나눌 수 있는데, 臣·連은 전자에 속한다. 즉 臣은 조정에서 政務를 맡고 있던 氏에게, 連은 정무 이외의 특수한 職役을 맡고 있는 氏 중 큰 氏에게 부여된 성이다.

170)秦造: 秦의 백성을 관리하는 伴造인데, 天武 129월에는 連, 146월에는 忌寸이라고 姓을 바꾸었으며, 그 일부는 延曆 연간(782-805)에 宿禰라고 바꾸었다.

171): マサ·タヘ라고도 읽지만 村의 首長인 韓語에서 유래한 スグリ라고 읽는 것이 적당한 듯하다. 즉 고대 일본의 姓으로, 百濟에서 건너가 秦氏伴造를 거느리며 지방의  秦部를 관할하는 지위에 있었다.

172): 곱게 짠 平織의 絹이다.

173)雄略天皇 20: 『三國史記』의 기사와는 차이가 있다.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蓋鹵王 21(을묘)년조에 따르면 고구려왕 巨璉(長壽王)9월에 군사 3만을 거느리고 漢城을 포위하였는데, 왕이 싸우지 못하고 달아나자 고구려인이 쫓아가 살해하였다고 한다. 細註의 개로왕 을묘년이라고 한 『백제기』의 기사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사와 『三國史記』 권18 고구려본기 長壽王 63년조와 일치한다. 한편 『三國史記』 권3 신라본기 慈悲麻立干 17(개로왕 20, 장수왕 62) 7월에 고구려의 침입을 받은 백제왕 慶이 아들 文周를 보내 도움을 구하므로 왕이 군사를 내어 도우려 하였으나 군대가 이르기 전에 백제는 함락되고 왕도 죽었다고 하였다.  

174): 高句麗의 別稱인 듯하다. 『同文通考』에서 “狛 與高麗訓同 狛音泊 獸名 按狛 蓋貊之訛 貊國名 三韓之屬”이라 하였다.

175)尉禮: 백제 초기의 도성으로, 『三國史記』에서는 漢城이라 하였다. 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春宮里 일대, 風納里 토성, 二聖山城, 夢村土城 등 여러가지 설이 있었는데, 최근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금의 서울 강동구에 있는 몽촌토성으로 비정되고 있다.

176)久麻那利: 백제가 고구려의 침입에 쫒겨 옮겨간 熊津을 말하며 현재의 충청남도 公州이다. 구마나리의 古訓은 コムナリ로, コム는 한국어 곰(kom)이고 ナリ는 고대 한국어 나리(나루·노리)로 川·津의 뜻이다.

177)汶洲王: 文周王, 文州王이라고도 하는데, 재위기간은 475-477년이다. 蓋鹵王 때 上佐平을 역임하였으며, 고구려의 침입 때 개로왕의 명에 따라 신라에 구원병을 청해 1만명의 군사를 이끌고 돌아왔으나, 개로왕이 이미 죽고 한강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그러므로 즉위하여 木劦滿致와 祖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熊津에 도읍을 정하고 국가의 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왕권이 실추되어 왕비족인 解씨가 권력을 장악하였는데, 특히 兵官佐平 解仇가 권력을 독점하여 왕도 통제하지 못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살해되었다.  

178)久麻那利~: 일본 왕이 공주지역을 주어 백제를 부흥시킨 것이 아니라, 백제가 漢城에서 熊津으로 遷都한 것을 말한다.

179)蓋鹵王母弟: 『三國史記』 권26 文周王조에서는  개로왕의 아들이라 하였는데, 여기에서는 아우라 하였으니 확실하지 않다. 한편 개로왕 4(458) 중국 南朝의 宋에서 輔國將軍을 제수받은 餘都과 동일인물로 보고, 개로왕의 동생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다(李基東,「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歷史學報』 62, 1974).

180)末多王: 다음의 23년 여름4월의 기사로 미루어 三斤王(또는 文斤王)이 죽고 즉위하는 東城王 牟大를 말하는 듯하다.

181)文斤王: 『三國史記』에는 三斤王, 『三國遺事』에는 三乞王이라 하였다. 문주왕 34월 태자로 봉해졌다가 부왕을 이어 13세에 즉위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권26 삼근왕조에는 文周王이 재위 4년만에 죽고 왕이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연표와 『삼국유사」의 왕력에 의거하여 문주왕이 3년만에 죽고 즉위한 것으로 보이므로, 그의 재위기간은 477-479년이다.

182)昆支王: 雄略天皇 5(461) 4월의 기사에는 軍君이라 하였고, 개로왕의 아우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 권26 문주왕조에 의하면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고 곤지는 문주왕의 아우라 하였다. 한편 개로왕 4(458) 중국 남조의 宋으로부터 征虜將軍 左賢王을 제수받은 餘昆과 동일인물로 보고 문주왕과 함께 개로왕의 아우라고 본 견해도 있다(이기동, 앞의 글). 461년 고구려의 남진 압박에 왜와 공동으로 대처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가 활동하였으며, 그 후 귀국하여 문주왕 34월 內臣佐平이 되었다가 7월에 죽었다.  

183)東城王: 『삼국사기』 권26 동성왕조에 의하면 諱는 牟大, 摩牟이며 『三國遺事』에 의하면 摩帝, 餘大라고도 한다. 재위기간은 479-501년이다.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184)신라를 정벌: 雄略天皇 7년 吉備上道臣田狹의 아들 弟君과 吉備海部 直赤尾에게 명하였으나, 제군이 백제에까지 갔다가 공격하지 않았다고 하였다. 한편 8년에는 가야(임나)왕이 당시 가야에 와 있던 吉備臣小梨 등에게 고구려와 싸우는 신라를 구원하도록 권했다고 한다. 9년에도 신라를 정벌하였는데, 吉備臣尾代가 언제 신라에 갔는지는 자세하지 않다.    

185)爾林: 爾林城인데, 지금의 충청남도 大興(옛이름 任城郡)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전라북도 金堤郡 利城(옛이름 乃利阿)에 비정되기도 한다. 세주에서 고려의 땅이라 한 것은 고구려 전성기의 판도로 보아도 무리일 듯하다. 한편 고구려 광개토왕 영락6(396)의 정벌 때 수군이 남한강 상류로 진출하여 충주지역을 차지하고 國原城을 두어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였다는 견해도 있다(李道學,「永樂 6年 廣開土王의 南征과 國原城』,『孫寶基博士停年紀念 韓國史學論叢』,1988, 知識産業社).

186)帶山城: 지금의 전라북도 井邑郡 泰仁面이 신라시대에 帶山縣이었으므로(『三國史記』 권37 地理4) 이곳으로 비정되고 있다.

187)領軍: 백제의 軍政에서 동서남북과 중앙 5方에 있었던 領軍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자세하지 않다.

188)內頭: 백제의 1품관직인 6佐平 중 하나인 內頭佐平으로, 재정관계 업무를 담당하였다. 『三國史記』에 의하면 내두좌평을 고이왕 27(260) 설치했다고 하나, 사비 천도 이후에 좌평제도가 완비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89)莫古解:백제 근초고왕 24(369)에 고구려 고국원왕이 침입하자 태자와 함께 출전하여 격퇴한 장군의 이름이 막고해인데, 120여 년간의 연대 차이가 있으므로 동일인물이라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190)於慕尼慕是 阿例尼慕是 : 일본어로는 おもにもせ あれにもせ라 읽는다.

191)額田邑: 지금의 大和郡 山市 額田部 北町·寺町·南町 부근이다.

192)熟皮高麗: 일본의 職員令 大藏省조에 “典革一人(掌雜革染作 檢校狛部) 狛部六人(掌雜革染作) 狛戶”라 하였는데, 牛皮·麓皮를 만들었던 수공업자 집단으로 보인다.

193) 意多郞;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데 왜에 온 백제 왕족이 아닐까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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