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4. 21. 00:53ㆍ들꽃다회
경주 남산 벚꽃
20140405~06 일~월요일
흐리고 때때로 가랑비
동남산지구 남산동에서 ....
운무에 덮힌 남산 봉화곡
남산동 명선재
양기못 <전(傳) 양피지(讓避池)> 제방의 벚꽃
****전 양피지( "동경통지"에서 讓避堤) : 인근에 있는 서출지와 같이
신라 소지왕의 "금갑(琴匣)을 쏴라."의 전설이 깃들어져 있는 연못.
ㅡ『삼국유사』사금갑조(射琴匣條) 및 염불사조(念佛師條).....
네이버 블로그 <학원ALL>에서는 이 양기못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서출지라는 주장도 있음.
blog.naver.com/hakwonall/220129466042 학원올- HakwonALL
경주 남산동 전(傳) 양피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24호
동탑
서탑
사찰의 정확한 이름은 알 길이 없으나『삼국사기』신라본기 진평왕 9년 가을 7월조2) 및『신증동국여지승람』경주부 고적조에는 남산사(南山寺)라 전해지고, 『삼국유사』사금갑조(射琴匣條) 및 염불사조(念佛師條)에는 남산 동쪽의 양피사(讓避寺)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 절터의 동서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말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석등 복련 받침돌
남산리사지 출토 찬지비
남산리사지 출토 찬지비 이수
이 사지(寺址)에서는 일제강점기에 1개의 비편(碑片)과 이수(螭首)가 발견되었으며, 1963년에 1개의 비편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비편과 함께 출토된 이수는 현재 절반 가량 결실되었다. 경주 지역의 귀부(龜趺) 가운데 이수(螭首)가 남아 있는 것은 무열왕릉(武烈王陵) 귀부(龜趺)와 무장사지(鍪藏寺址) 귀부(龜趺)가 있는데, 이 이수의 형태는 당비(唐碑)를 모방한 무열왕릉 귀부의 이수와 같은 형태로 비교가 된다.
절반이 잘려 나간 이수(螭首)의 제액(題額)에는 ‘찬지비(飧之碑)’란 명문(銘文)이 해서(楷書)로 선각(線刻)되어 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 수장고에 있다
1960년대의 남산리삼층석탑
동탑
서탑
|
남산동 벚나무 가로수
남산동 傳 염불사지(念佛寺址 : 구 피리사 ) 삼층석탑
- 삼국유사 <염불사조(念佛師條)>에서 경주 남산 동쪽 산기슭에 피리촌는 마을이 있었고.
이 마을에 있는 절을 마을이름을 따라서 피리사라고 하였다는 기록이 있음.
이 피리사에 이름과 속성을 알 수 없는 이상한 노스님이 살았는데
늘 아미타불을 염불하다가 입적하였음.
신라사람들이 이 노승의 변함없는 염불을 기리기 위하여
절이름을 염불사로 개명하였다고 전하여 진다.
서남산지구 삼릉 입구에서 ......
경주 남산 삼릉골과 용장골의 유적지
삼릉곡 상선암
상선암 벚나무
제6사지에서 등산로를 따라 약 380m 가파른 길을 오르면 상선암(上禪庵)이라는 조그만 암자가 있다.
이 곳이 삼릉계 제9사지이다.
제7사지와 제8사지는 남아있는 문화재가 없고 절터의 흔적만 남아 있으므로,
대개 6사지 석조여래좌상을 보고는 바로 제9사지 상선암으로 오른다
이곳에는 근대에 지어진 법당과 요사채가 있고,
과거에 있었던 건물지들 위에 현존 건물이 축조되어 흔적을 알 수 없으나,
길가에는 장대석 1매가 있고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기와편들이 수습된다.
임필대(任必大)가 기록한 유동도록(遊東都錄)에는
‘상선암에 올라서 보면 앞쪽에는 하선암이 수석 사이에 있다.’고 하였다.
현재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아래쪽 제6사지가 하선암(下禪庵)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아래 위치하며, 그 외의 사지는 능선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가 않기 때문이다.
상선암에서 등산로를 계속 150여m 오르면 5.2m 높이의 마애여래좌상이 있고,
서편으로 돌아가면 선각여래좌상이 있다.
또한 바로 위쪽 정상부 서편으로는 금송정지(金松亭址)와 바둑바위가,
동편으로는 상사바위가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면 경주시내가 한 눈에 들어와 자연경관이 수려하다.
삼릉골 마애석가여래좌상
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
불상높이 ;5.2미터
남산에 있는 좌불 중에 가장 크며, 금오봉을 향하여 앉아 있다.
상선암 뒤쪽으로 약 150m 가량 떨어진 암벽에 남쪽을 향하여
높이 7m∙너비 5m의 광배형으로 생긴 암벽에 지방유형문화재 제158호이며
남산에 있는 좌불 중에서는 제일 큰 불상인 마애여래좌상이 있다.
자연 암반을 둥글게 다듬어 광배로 삼고 그 내부에 여래좌상을 새겼는데,
여래좌상은 커다란 연꽃 위에 결가부좌하고 설법을 하는 자세로 읹아 있다.
불상의 머리는 배광면에서 66.6센티미터나 튀어 나와 입체상에 가까울 정도로 사실적이며
몸체는 바위 면을 이용하여 부피 없는 선각으로 새겨 놓았지만
불상의 몸체는 빈약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바위 자체가 갖고 있는 양감(量感)이 둥근 머리와 충분한 균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몸체머리에서 어깨까지는 돋을 새김으로 나타남이 뚜렷하나
하체는 선각처리하여 흐지부지 처리하는 조각 방법은
정적이 아니라 앞으로 움직이는 생동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중생을 구제하려고 하늘(자연)에서 사바세계로 걸어나오는 듯한
느낌이 나게 하기 위한 고차원적인 조각기법이다
머리는 곱슬머리가 아닌 소발에 육계는 나지막하고 얼굴은 살이 많아 방형에 가깝우며
눈과 눈썹, 코, 입은 세밀하게 조각하여 예리한 인상을 준다.
통견의 법의는 가슴 아래 깊게‘U’자형을 이루며 내려오고,
그 안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표현되었고
옷주름은 선각으로 구불구불하게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 앞에서 엄지, 중지, 약지를 맞대고 설법인(設法印)을 취하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하여 결가부좌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대좌는 중대석이 생략된 채 앙련과 복련이 맞붙어 있고,
두 겹으로 된 앙련의 연판 내부는 보상화문으로 장식하였다.
얼굴 표정은 매우 숙련된 솜씨이나, 평판적인 신체 표현,
힘이 빠진 옷주름 선 등으로 보아 9세기 불상양식을 반영하는 巨佛像群에 속한다.
몸체를 머리와 같은 수법으로 조각하지 아니하고 바위 모양을 이용하여
반자연 반인공으로 표현한 신라인의 예술적인 안목이 놀랍기만 하다.
불상의 크기는 높이 521㎝∙무릎 너비 350㎝이다
이 불상을 찍은 사진은 경주 남산을 소개할 때 단골로 등장을 한다
소나무 줄기 밑둥에 보이는 것처럼 큰 암반 낙반으로
예불과 산행시 안전을 위하여 현재 등산로 폐쇄중임.
마애불에서 150여 미터 아래에 있는 상인암 처사분에게
사전 양해를 구한 후 예불함.
금오산(金鰲山) 정상을 바라보는
삼릉곡 마애석가여래좌상
경주시내 조망이 가장 좋다는 이 전망대에 봄비에 적셔가며 올라보니,
운무에 덮혀서 바로 앞의 능선 위의 소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이곳은 상선암 마애여래좌상 위쪽 정상부로, 기암곡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상에 암반이 있는 곳이다.
북, 서, 동쪽이 암반으로 연결되어 있고, 남쪽은 트여 급경사를 이룬다.
건물지는 2.7×2.7m 크기의 단칸 구조로 추정되고,
서쪽의 남서 기둥은 암반에 25×15㎝ 크기의 홈을 파서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건물지 주변에 통일신라시대 와편들이 다수 산재되어 있고, 이형석재가 1점 있다.
신라 경덕왕(景德王)때 옥보고(玉寶高)란 사람이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지 오십년만에
스스로 신조(新調)를 지어 타자 현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또는 현금이라 부르며,
금송정(琴松亭)은 보고(寶高)가 노닐며 즐기던 곳이라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금송정지와 상사암의 위치
<금송정관련문헌자료>
琴松亭在金鰲山頂玉寶高遊樂之處寶高新羅沙粲恭永之子景德王時人也入智異山雲上院學琴五十年自題新調三十曲彈之有玄鶴來 舞遂名玄鶴琴又云玄琴世傳寶高得仙道.
<금송정재김오산정옥보고유악지처보고신라사찬공영지자경덕왕시인야입지이산운상원학금오십년자제신조삼십곡탄지유현학래 무수명현학금우운현금세전보고득선도>
금송정은 금오산 마루턱에 있다. 옥보고가 노닐고 즐기던 곳이다. (옥)보고는 신라 사찬 공영의 아들인데 경덕왕때 사람이다. (그는) 지리산 운상원에 들어가 거문고를 50년동안 배웠다. 스스로 새로운 곡조 30곡을 만들어서 타니 검은 학(玄鶴)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드디어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 이름 부른다. 세상에 전하는 말에는 (옥)보고는 신선의 도를 얻었다고 한다.
▶ 금송정 동도유적 27수 중. 성여신. 부사집 권1 琴松亭 東都遺跡二十七首中. 成汝信. 浮査集 卷一)
金鰲山頂松亭在聞昔高仙抱瑟遊彈盡新調玄鶴舞如今往事水東流
금오산정송정재문석고선포슬유탄진신조현학무여금왕사수동류
(右琴松亭, 景德王時有玉寶高者入智異山學琴五十年自題新調彈之有玄鶴來舞遂名玄鶴琴又云玄琴琴松亭寶高遊樂之處)
(우금송정 경덕왕시유옥보고자입지이산학금오십년자제신조탄지유현학래무수명현학금우운현금금송정보고유악지처)
금송정 금오산 꼭대기에 금송정 있는데 그 옛날 고선(高仙)이 거문고 타고 놀았다네. 신(곡)조 두드리자 현학이 날아와 덩실 춤을 추었다고 하나 이제는 모두 지나간 일, 동으로 물만 흘러가는구려.
(금송정에는 경덕왕 때 옥보고란 사람이 있었다. 그는 지리산에 들어가 거문고를 배운지 오십 년만에 스스로 신조을 지어 타자 현학이 날아와서 춤을 추었으므로 현학금(玄鶴琴) 또는 현금(玄琴)이라 이름 부른다. 금송정은 보고(寶高)가 노닐며 즐기던 곳이다.)
금송정 터
상사암
ㅡ 감실과 감실 아래 불두를 잃은 석조여래입상
상사바위
삼릉골 정상의 마애석가여래불좌상을 보면서 남산의 능선을 타고 오르면, 포석계곡에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게 되는데 이곳에 상사바위이라는 영험한 바위가 있다.
상사암은 높이 13m, 길이 25m쯤 되는 주름이 많은 큰 바위이다. 이 험상궂은 바위더미는 아득한 옛날부터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의 병을 낫게 하고 아들 낳기를 바라는 부녀자의 소원을 들어준다고 하는 바위이다
바위 동쪽면 중앙에 가로 1.44m, 높이 56cm, 깊이 30.3cm 되는 감실과 제단이 마련되어 있고 주위에 돌무지도 확인된다
감실은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켠 촛불에 의하여 검게 그을려 있다.
상사암의 감실 아래에는 높이 80cm에 너비 35cm의 작은 석불입상이 있다. 머리는 없어졌고 두 손은 가슴에 모아 붙이고 있다. 아마도 남산에서 가장 작은 불상일 것이다.
이 민간 신앙터에 불상이 서 있는 것은 오랫동안 토속신앙과 불교가 밀착되어 왔음을 알게 해준다.
바위 서쪽면에는 사람들이 남근석과 여근석으로 여기고 치성을 드린 자리가 있다.
이 상사바위에는 할아버지와 피리소녀에 담긴 애틋한 얘기가 담겨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예전에 주변의 마을에 혼자된 할아버지와 피리라는 이름의 소녀가 있었다.
피리는 할아버지를 잘 모시고, 할아버지도 피리를 아꼈다. 그러던 어느 날 피리는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늘 자신을 보살펴 주었던 피리가 없는 것이 상당히 허전했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피리를 생각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후 피리는 무서운 꿈을 꾸게 되는데, 뱀이 몸을 휘감고 혀를 내밀어 자신을 괴롭히는 꿈을 꾸게 된다. 마을 사람들이 할아버지의 혼이 상사뱀이 되어 피리소녀를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다.
그러던 중 꿈에 피리를 괴롭히던 뱀이 할아버지로 변해 아무리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그래도 잊지 못하여 피리아가씨를 괴롭히고 있는 거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사죄하고 국사골로 들어가 바위가 되어 자신을 바라보는 꿈을 꾸었다.
피리아가씨는 자신을 그리워하다가 참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할아버지를 측은히 여겨 할아버지가 변한 바위에서 뛰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피리의 영혼도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 옆에 서 있어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고 부른다고 한다.
- 경주남산 삼릉계5-삼릉계 제9사지 상선암절터와 주변
경주 남산 정상 - 금오봉
삼화령으로 내려가다가 되돌아 본 남산 정상 금오봉
삼화령 연화대좌는 가랑비로 다음 번에 가보기로 하고 용장사지로 향하다.
전(傳) 삼화령은 경주박물관에 미륵삼존불이 발굴된 곳으로,
금오봉에서 상서장으로 가는 북쪽능선인 해목령 근처이다.
동국대 황수영 박사는 전(傳) 삼화령을 충담사가 삼월 삼짓날과 중구일(음 9월 9일)에
미륵불에게 차를 올렸던 삼화령으로 보고 있다.
경주 남산의 삼화령(三花嶺)은 2군데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 중인 (전)삼화령에서 출토 석조삼존불상
중앙의 본존불이 1925년대 전삼화령에서 출토된 것이고,
좌협시보살(우측)이 일명 애기부처로 불리는 불상이다
국립경주박물관 미술실에는 경주 남산 삼화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석조삼존불상이 있다.
1925년에 발견되어 발굴한 뒤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이관한 불상이다.
삼화령석조삼존불이 발견된 삼화령은 남산의 북쪽,
신라 말엽의 문필가 최치원(崔致遠)이 머무르면서 공부하던 곳이라 전해지는
상서장(上書莊) 옆 등산로를 따라 약 800m 가량 오르면 해목령 못미쳐 있다.
등산로 옆 오른편으로 40여m 들어가면 무덤 10여 기가 모여 있는데 그 중간쯤으로,
1m 가량의 돌기둥으로 둘려 쌓인 곳이 전삼화령이다.
현재 누군가가 조상의 묘를 써서 작은 봉분이 만들어져 있다.
1925년 출토 당시의 모습.
(전)삼화령 석실 속에 이 불상과 보살상들이 봉안되어 있었다
1925년 불상이 출토된 이후,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주장이 있다. 동국대 총장을 지낸 황수영 박사의 주장으로 불상 조각양식이 삼국시대의 것이며, 무덤 중 세 개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만큼 삼화령을 ‘화랑 세 명의 무덤’으로 해석하고 이곳이 삼화령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이전부터, 금오산 남쪽에 있는 생의사터의 연화대좌가 있는 곳을 '삼화령'으로 불러왔기 때문에 이와 구분하기 위해서, 삼화령으로 추정된다’는 뜻으로 ‘전(傳)’자를 붙여 (전傳)삼화령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전 삼화령 앞의 이정표
전 삼화령(傳 三花嶺)
경주 남산에서 삼화령으로 부르는 곳은 2곳인데, 남산 금오봉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에 한 곳씩 있다.
남쪽에 있는 것이 '삼화령(三花嶺)'이고 북쪽에 있는 것이 '(전)삼화령(傳 三花嶺)'이다.
'삼화령'과 '전 삼화령'의 위치
금오봉 남쪽에 있는 삼화령(三花嶺)은 금오봉 정상과 통일전을 잇는 탐방로 (지금은 탐방로이지만 옛날에는 경주와 언양을 잇는 중요도로였던 길) 중간쯤에 있다.
등산로에서 길 왼편의 조금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어 숲을 헤치고 오르면 지름 2m가 넘는 연화대좌가 나온다. 바위를 둥그렇게 둘러 연잎이 새겨져 있다.
이곳을 삼화령으로 보는 주장은 지형에 따른 것으로, 이곳과 금오봉과 천룡사가 있는 고위봉을 각각 하나의 꽃잎으로 보고 ‘삼화령(三花嶺)’이라고 이름 붙여졌으며 (전)삼화령에서 불상이 출토되기 이전부터 이곳을 삼화령이라고 불러왔다.
이곳은 신라 경덕왕때 충담스님이 매년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 : 3과 9가 두 번 겹치는 날로 3월 3일과 9월 9일을 말함)에 미륵세존 부처님께 차 공양을 올리던 곳으로 전해오는 장소이며 생의사미륵불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한다.
현재 삼화령의 연화좌대는 비록 주인을 잃었지만 충담 스님을 추념하며 이곳에 차나무를 심고 매년 다례를 올리고 있다.
이 삼화령에는 근대까지 불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지만 언제, 어떻게 사라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 전(傳)삼화령 미륵삼존불
옛 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있을 때의 삼존불
우협시보살 본존불 좌협시보살
◈ 삼화령미륵불 연화대좌
금오봉 남쪽의 삼화령은 세 개의 산봉우리가 세개의 연꽃잎을 이루었다고 하여 옛부터 삼화령(三花嶺)이라고 불리어진 곳이다 1천여년 전, 충담스님이 다 헤어진 장삼과 버드나무통을 메고 매년 중삼중구일(重三重九日 : 3과 9가 두 번 겹치는 날로 3월 3일과 9월 9일을 말함)에 삼화령 미륵불전에 차 공양을 올리던 곳이다.
'삼국유사'에는 충담 스님과 관련된 ‘생의사돌미륵(生義寺石彌勒)’ 조의 기록이 있다. 선덕여왕 때 도중사(道中寺)에 생의라는 스님이 있었다. 어느 날 꿈에 한 수도승이 나타나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한 곳에 풀을 묶어 표시하고 남쪽 골짜기에 이르러 말했다. ‘아까 표한 곳에 내가 묻혀 있으니 파내다 고개 위에 묻어 달라.’
잠에서 깬 뒤 표를 해 놓은 곳을 찾아 땅을 파보니 돌미륵이 나와, 이를 삼화령 위로 옮겨 놓았다. 선덕왕 13년(644년)에 그곳에 절을 세우고 살았는데 후에 생의사라 했다. 충담 스님이 해마다 중삼중구일에 차를 달여 공양한 대상이 이 부처로서 삼화령이 남산 남쪽에 있다는 것은 이 내용에 기초한 것이다.
실제 삼화령 연화좌대 서쪽 계곡에 절터가 있고. 이곳 절터의 흔적이 연화좌대 방향으로 연결되는 만큼 이곳이 생의사터가 아닌가 하는 추측에 신빙성이 높다.
충담스님이 경덕왕을 만난 날도 3월 3일 삼화령에 들려 헌다(獻茶)를 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경덕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서, 앵통(櫻筒, 앵두나무로 만든 통) 속에 다구[茶具]가 담긴 통을 둘러메고 오는 충담 스님을 본다.
경덕왕이 누구이며,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묻자, 충담스님은 해마다 중삼일[重三日, 3월 3일]과 중구일[重九日,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三花嶺)에 계시는 미륵세존(彌勒世尊)께 차를 끓여 올리는데, 지금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한다. 경덕왕은 스님에게 차 한 사발을 얻어 마셨습니다. 차는 맛이 훌륭했으며, 향기가 났다.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 '이안민가(理安民歌)'를 지어달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스님은 ‘백성을 다스려 편안히 할 노래’를 짓지 않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노래 즉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바친다. 즉, 백성을 권위로서 다스릴 것이 아니라 덕으로 다스려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각기 자기 본분을 다하면 나라와 백성이 편할 것”이라고 노래하였다. 스님은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고 한다. 왕사(王師)로 봉하겠다는 경덕왕의 청을 굳이 사양한 인품에서 볼 수 있듯이 충담스님은 참다운 다인(茶人)이자 가인이었다
차공양을 하는 벽화(기림사 약사전)
삼국시대에 처음으로 들어왔던 차(茶)는 불교와 더불어 꽃을 피웠다. 충담스님이 미륵세존께 차를 올린 것이 바로 헌다의식(獻茶儀式)의 시원(始原)이며, 차를 마시는 것은 불가에서는 수행의 한 방편이 된 것이다.
사복이 원효 스님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설화나 보천·효명 두 태자가 오대산에서 수도할 때 문수보살에게 차를 공양했다는 기록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경덕왕은 월명 스님에게 차를 예물로 주기도 했다. 그러나 차가 널리 성행한 것은 흥덕왕 3년(828)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은 뒤부터라고 한다.
♣ 경덕왕이 충담을 만나다 (765년)
3월 3일(765년)에 왕이 귀정문(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위의(威儀)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 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좌우 측근들이 그를 보고 데려다 보이니,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衲衣)를 입고 앵통(櫻筒)을 지고서 또는 삼태기를 졌다고도 한다. 남쪽에서 왔다.
왕이 그를 보고 기뻐하면서 누 위로 맞아서 그 통 속을 보니, 다구(茶具)가 들어 있을 뿐이었다. 왕이 묻기를, “그대는 누구요?”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충담 (忠談)이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어디서 오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대답하기를, “소승은 3월 3일(重三)과 9월 9일(重九)에는 남산 (南山) 삼화령의 미륵세존(彌勒世尊)에게 차를 다려 공양하는데, 지금도 차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과인에게도 차 한 잔을 줄 수 있소?”라고 하니, 승려가 곧 차를 다려 왕에게 드렸는데, 차의 맛이 이상하고 찻잔 속에는 특이한 향이 풍겼다.
왕이 말하기를, “짐이 일찍이 듣기로는 스님이 기파랑 (耆婆郞)을 찬양한 사뇌가(詞腦歌)가 그 뜻이 매우 높다고 하던데, 과연 그러하오?”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그러하옵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짐을 위해 백성을 편안히 다스릴 노래를 지어주시오”라고 하니, 승려가 즉시 칙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그를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로 봉하니, 승려는 두 번 절하고 굳이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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