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塔谷 磨崖彫像群 ) / 부분 - 북면

2015. 4. 22. 00:50들꽃다회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塔谷 磨崖彫像群 )

( 부분 - 북면 )

 

- 신라 밀교와 호국정신으로 조성된 사방불정토(四方佛淨土)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201호로 지정되었다. 남면중존상()이 1.45m, 독립보살상() 2.14m, 서면여래상(西) 1.45m, 동면북측여래상() 1.75m이다.

   9m의 거대한 바위에 만다라적()인 회화처럼 묘사한 마애석불들로, 신인종() 계통의 사찰에 딸린 것으로 추측된다. 남쪽은 다른 3면보다 훨씬 높은 대지()이고, 목조건물의 터와 탑 및 석등의 유품들이 남아 있어, 결국 남면 불상을 주존()으로 한 남쪽으로 향해 앉힌 사찰을 경영하였음을 추측하게 한다. 남면의 바위 동쪽에는 직사각형의 감실()을 마련하여 삼존을 조각하였다. 오랜 세월의 풍화에 마멸되어 세부적인 수법은 알 수 없지만, 양식은 대체로 그대로 남아 있다. 본존()은 전대()와 달리 신체와 옷주름 등이 거칠고 형식화한 경향이 있지만, 웃음띤 얼굴과 어깨의 선이 부드럽고, 특히 왼쪽 보살은 본존의 다정한 귀엣말을 듣는 자세를 취하여 전체적으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거대한 바위에 불상·비천·보살·탑 등을 회화적으로 배치한 만다라적인 구조는 그 유래를 볼 수 없는 화려한 조상군이며 특수한 석굴사원의 한 예이다.   /   doopedia

 


 


 

탑곡(塔谷 탑골) 마애조상군 보고 옥룡암(옛 신인사지 舊 神印寺址)

앞을 내려오는 인근 화랑교육원 입소 학생들


 

**** 신인사지는 통일신라 초기에 고구려를 멸망시킨

나당연합군 중 잔류한 당나라군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신라에 밀교를 전한 명랑법사가  "문두루비법"으로 물리쳤다는 설화가 있는

낭산 사천왕사지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

명랑법사가 신인종(神印宗)을 창건한 절터로 알려짐.

 

**** 당나라군은 백제의 부여에 웅진도독부, 고구려의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동맹국이였던 통일신라를 군사력으로 영구지배하려 획책하였다.

 

 

 

 

 

안동도호부의 이동

 

안동도호부의 이동

 

출처 이미지 사이즈 709x800 | 한국학중앙연구원

 

 

 

 

안동도호부

요약 테이블
시대 고대/삼국
성격 군정기관
유형 제도
시행 668년
폐지 758년
시행처 당나라

분야

역사/고대사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설치한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당나라는 태종·고종 연간에 국력이 융성해져 그 영역이 사방으로 확대됨에 따라 변경지대에 도호부를 두었다. 안동도호부는 안북(安北)·선우(單于)·안서(安西)·안남(安南)·북정(北庭) 도호부와 함께 6개의 도호부를 구성하였다.

[내용]

   668년 고구려가 멸망된 직후, 당은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초대 도호로 임명된 당장(唐將) 설인귀(薛仁貴)는 2만인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주하면서 고구려 땅을 9도독부(都督部)·42주(州)·100현(縣)으로 나누어 다스릴 방침이었다.

이 때 당은 고구려의 유민들을 회유할 목적으로 그 유력자 중에서 도독·자사(刺史)·현령(縣令)을 삼아 고구려인의 자치에 맡길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정구역 자체가 어디까지나 계획에 지나지 않았으며 전면적으로 실시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당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할 무렵, 검모잠(劒牟岑)을 비롯한 고구려의 유민들이 각지에서 일어나 당에 대항하였다.

 

   한편, 신라가 이들을 배후에서 조종하면서 당과 전면적인 전쟁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당은 670년에는 도호부의 치소(治所)를 신성(新城 : 만주 撫順 서쪽)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뒤, 신라와의 전투에서 잇달아 참패한 당은 676년 2월에 한반도를 포기한 채 도호부의 출정본부를 요동성(遼東城 : 만주 遼陽)으로 옮겼다. 이 때 부치(府治)를 신성에서 요동성으로 옮겼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이듬해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 왕이었던 보장왕에게 요동도독(遼東都督)의 직책을 주고 조선군왕(朝鮮郡王)에 봉하여 요동으로 보내 자치를 허락하게 됨에 따라 도호부를 다시 신성으로 옮겼다.

그 뒤, 697년에 당의 요동지배의 일대 근거지였던 영주(營州)가 거란인들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자 당의 안동도호부 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더욱이 고구려유민들이 주축이 되어 발해를 건국함에 따라 그 직접적인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당은 보장왕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로 하여금 만주지방의 고구려유민들을 다스리게 하는 통치방침을 채택해 일단 도호부를 폐지하고, 699년에 안동도독부를 두어 고덕무를 안동도독에 임명, 부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704∼705년경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도호부는 부치를 714년에 평주(平州)로, 다시 743년에는 요동군으로 옮겼다. 그 임무는 설치 당시의 고구려유민에 대한 감시로부터 말갈족 견제로 변경되었으며, 차차 도호부 자체의 실권을 평로절도사(平盧節度使)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도호부는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758년경 폐지되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구당서(舊唐書)』
  • 『신당서(新唐書)』
  • 『당회요(唐會要)』
  • 『자치통감(資治通鑑)』
  • 「고구려의 일부유민에 대한 당의 추호정책」(이병도, 『진단학보』 25·26·27합병호, 1964 ;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 1976)
  • 「安東都護府考」(津田左右吉,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 東京大學文科大學, 1915)
  • 「高句麗滅亡後の流民の叛亂及び唐と新羅の關係」(池內宏,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1930 ;『滿鮮史硏究』 上世 2, 吉川弘文館, 1960)
  • 『唐代安東都護府考略』(王懷中, 禹貢 6-3·4, 1936)
  • 『안동도호부고』(김육불, 제언, 1948) 저자명
  • 『동북통사』(김육불, 낙천출판사, 1971)
  • 「唐代前期的邊防」(康樂, 『國立臺灣大學文史叢刊』 51, 1979)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磨崖彫像群 (북면과 동면 부분)  

보물 제201호


 


 

 <탑곡 마애조상군의 위치>

 

   사천왕사지에서 통일전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가다가 약400m 지점의 다리를 건너 바로 우회전,

강변을 난 도로를 따라가면 약 600m지점 왼쪽에 안내판과 주차장이 있다.

 

   이 곳에 주차를 하고 약 300m쯤 걸어도 되고 승용차라면 그냥 타고가서 절의 주차장에 주차하여도 된다



 

 

옥룡사 대밭

 

- 어느 눈 밝으신 노스님의 안목이시려나?

 

이 호국의 얼이 서린 사방불정토에 온전하게 시선을 붙잡아두기 위하여,

계곡부 쪽으로 참대밭을 배치하신 분의 눈높으신 배려와

현대 감각적인 전통조경기법을 도입하심에 존경을 보낸다.

 

우리의 선조들께서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에 까지도

정토를 가꾸고 꾸미려는 배려가 깊이 스며들어 있다.

조경을 겸하여 계류에 쓸려나가는 비탈흙을 대나무 뿌리로 보호한다.

그리고 그 대나무 그늘에 검소한 접이의자를 마련하신 분은......

 

굵직한 나무등걸에 해먹을 매달아 놓고

대바람소리와 솔바람소리를 들으며 솔방울을 주워다가 차를 달이는 꿈을 꾸어보다......

 

 

 

 

 

 

 


 

사방불정토를 쉽게 풀어보면,

 

   우주에는 영원불변하는 우주 본체가 있는데 그 빛은 온 누리에 그림자를 드리지 않고 비춘다.

이 빛을 형상으로 나타낸 것이 비로자나(法身佛)부처님인데,

사방불의 근본에는 이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셔서 동서남북 사방으로 각기 필요한 때 필요한 곳에

알맞은 모습으로 나타나심을 표현한 것이다.

 

 

 

 

9층목탑과 7층목탑 (북면)

- 동쪽 9층목탑은 인근 9국이 복속하는 의미로 건립한

황룡사 9층목탑의 원형으로 사학계에서 추정하고 있음.


 


 

연화대에 정좌하신 본존불과 천개(天蓋 또는 보개 寶蓋)


 

 

 

동쪽 9층목탑  상륜부 위에 있는 2구의 비천상

- 사진 왼쪽 상부 희미하게 번진 부분.

 

 

 

 


서쪽 7층목탑과 기단부의 숫사자상


 

 


갈기와 꼬리의 형상으로 보아 하늘을 날으는 숫사자상


 


 

동쪽 9층목탑

 

 

 

 

 


 

동쪽 9층목탑 기단부 암사자상

 

 

 

 

목탑 추녀 모서리 마다 달려 있는 풍경상( 풍탁상 風鐸像)


 

 


 


 

 

탑곡마애조상군의 북면-영산정토(靈山淨土)

 

- 이곳 사방불정토에서 영산회상불보살곡을 연주하며

<평화와 통일 나아가서 사해일가를 위한 헌다례>

올린다면 뜻깊은 행사가 될 것이다.

 

 

   북면은 사찰 전체를 바위에 자연스레 표현한 것이라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부처님 세계를 지키는 아상과 훔상의 사자가 아래에 있고 좌우에 웅장한 9층과 7층의 쌍탑이 있다. 두 탑의 사이 윗쪽에는 석가여래가 연화대좌 위에 앉아 계시고 머리 위에는 천개(天蓋 또는 보개)를 새겨 법당임을 알려주고 있다. 천개 위로 두명의 비천이 부처님쪽으로 날아와 공양을 드리며 불법을 찬양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북면의 암벽은 정면으로 높이 5.7m, 너비가 9m이다.

이 면은 석가여래가 주재하고 있는 곳으로 영산정토를 나타내고 있다.

 

 

   

   왼쪽의 구층탑 위에는 2구의 비천상이 석가여래본존불을 향하여 날고 있는데 뚜렷하지는 않으나 손에 공양물을 들고 있다.

 

목탑의 아래쪽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새겨져 있는데 사자는 부처님을 수호하는 상징적 동물로 많은 불교 조상에 나타나고 있다

보는 자리에서 왼쪽의 사자는 앞발은 치켜들고 세가닥의 갈라진 꼬리가 곡선을 그리며 뒤로 휘날리고 있어 생동감을 주고 있으며 오른쪽 사자는 목 뒤의 갈기로 보아 숫사자임을 알 수 있다. 

 

 

 

 

북면 본존불과 천개

 

 

 

 

<아래의 글은 경주남산연구소(http://www.kjnamsan.org)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탑골 사방불암(塔谷 四方佛巖)

 

   부처바위라고도 불리는 탑골 사방불암은 신라시대 사방불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내용이 다양하다.

이 곳에서는 많은 기와조각과 무늬막새가 출토되었는데 목조건축이 있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1940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塔谷의 遺蹟」과『慶州南山の 佛蹟』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日本人)

오오사까(大坂金太郞)가 신인사(神印寺)라 명문이 새겨져 있는 기와를 발견하였다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 부처바위는 신인종(神印宗)에 속한 가람이라 믿을 수 있는데, 신인종은 삼국통일을 위해 온 국민이

힘쓰던 7세기에 명랑법사(明朗法師)에 의해 개조(開祖)된 불교의 한 종파다.

따라서 부처바위의 연대를 7세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옷자락이 손을 가리고 있는 점, 연꽃 잎이 넓게 표현된 점, 자유스럽고 천진한 모습 등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특색으로서, 중국 남조 불상양식이 백제를 통해 전해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특히 여성적으로 경사진 부드러운 어깨 선은

신라불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부처바위의 연대에 대해서는 대표적으로 7세기 중엽으로 추정하는 견해와 9세기로 추정하는 견해로 나누어지고 있다. 


 

7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

 

   신인사라는 명문기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명랑법사가 개조한 신인종의 가람이다. 하현달 모양으로 새겨진 눈에 웃음이 어려 있다.(8세기 이후 부처님들은 입가에만 웃음이 있다.) 여래상의 가슴에 비스듬히 승기지(가슴을 가리는 옷)가 그려져 있다. 군(裙 ; 치마)을 동여맨 옷끈 매듭이 부채살처럼 나타난다. 상현좌(裳懸座)의 모습은 중국 남북조시대 후기(494∼534)의 오래된 양식이고 일본에서도 이러한 양식은 7세기에 유행했다. 금강역사가 무장한 모습이나 금강저를 들고 있는 모습은 고식에 나타나는 양식이다.  


 

9세기로 보는 견해

 

   북면에 조각된 쌍탑은 통일기 쌍탑가람배치의 구조를 받아들인 것이다. 불상조각이 삼국기의 단순 소박한 조소성(彫塑性)이 결여되어 있으며 고졸(古拙)의 미(美)와도 거리가 멀다.

남쪽에 있는 삼층석탑의 존재, 불상들의 윤곽선 강조, 평면부조에 추상적 옷주름의 선적(線的)처리, 자유분방한 회화적 구성과 도상의 배치, 많은 부분의 치졸한 조각수법 등은 통일신라의 전성기 이후의 조각양식이다.

 

   북쪽과  동쪽은 주위 지표가 매우 낮아 바위와 낭떠러지를 이루는 반면, 서쪽과 남쪽은 지표가 높아 바위의 높이가 나지막하다. 사방불 서쪽에는 또다른 바위들이 있고 그 바위 아래는 축대를 이중으로 쌓음으로써 사방불암 서남쪽 안으로 넓은 지표면을 마련하였다. 따라서 지형적으로 동향건물이 들어설 만한 평탄면이 주어져 있다.삼층석탑 안쪽의 넓은 평탄면인 부처바위 남쪽에는 건물 기단이나 건물 외곽에 들었음직한 "ㄱ"자형 석축 1단이 일부 남아 있어 건물이 들어섰을 당시를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더욱이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의 평기와 편이 흔히 눈에 띄기도 한다.

 

 

 

 

ㅡ 다음 블로그 <토함산솔이파리> 솔뫼 님의 자료 중에서 발췌 인용......

솔뫼 2011.03.09 14:10
경주 남산탑곡마애조상군의 도면 view 발행 | * 경주 남산

 

 


 

**** 두보의 시 <춘야희우(春夜喜雨)>처럼  봄비가 겨울 가뭄을 해갈하고

초목들을 싹틔우기 위함인지 소리없이 내림으로

카메라 렌즈 안으로 습기가 배어 사진이 전체적으로 어둡고 어지럽다.

 

 

 

춘야희우(春夜喜雨)

 

                                  ㅡ 두시언해

    ㅡ  두보(杜甫, 712-770) 당(唐)의 시인.

자는 자미(子美). 호는 소릉(少陵).  

 

됴 비 時節(시절)을 아니,

보 當(당)야 베퍼 나게 놋다.

 조차 마니 바 드니

物(물)을 저져 라 소리 업도다.

해 길헨 구루미 다 어듭고,

 옌 브리 오아 도다.

새배 불근 저즌  보니,

錦官城(금관성)에 고지 해 폣도다.

 

 

好雨知時節

當春乃發生

隨風潛入夜

潤物細無聲

野經雲俱黑

江船火獨明

曉看紅濕處

花重錦官城


 

 

[시어, 시구 풀이]

 됴 비 : 좋은 비[甘雨]

 베퍼 : 베풀어

 놋다 : 하는구나

 조차 : 따라

 물(物)을 : 만물을

 저져 : 적시어

 라 : 가늘어서

 해 : 들에

 길헨 : 길에는

 옌 : 배에는

 오아 : 홀로

 새배 : 새벽

 불근 : 붉은

 해 : 많이

 폣도다 : 피었도다. 피었을 것이다

 

 

[전문 풀이]

 좋은 비는 그 내릴 시절을 알고 있나니

 봄이 되면 내려서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구나.

 비는 바람 따라 살며시 밤에 내리나니

 사물을 적시거늘 가늘어서 소리가 없도다.

 들길은 낮게 드리운 구름과 함께 캄캄하고

 강 위에 떠 있는 배의 고기잡이 불만 밝게 보인다.

 날 밝으면 붉게 비에 젖어 있는 곳을 보게 되리니

 금성관에 만발한 꽃들도 함초롬히 비에 젖어 있으리라.

 

 

 

 창덕궁 성정각의 희우루

- 누각 이름을 두보의 시 <춘야희우>에서 따왔음......

 

 

 

 

성정각 보춘정의 동편 살구나무 행단(杏壇)이 있는 쪽에

걸려있는 편액이 희우루이다.

 

 

  - 계속 -

 

 

 

******* 後記 :     조선왕조실록의 기술에서 난(亂)과 전쟁(戰爭)은 엄격하게 구분되어 쓰여진다.

                        난(亂)은 동족간의 싸움에 전쟁(戰爭)은 이민족 간의 영토확보 경쟁에서 쓰이는 용어이다.

 

                             예를 들자면 임진왜란 , 정유재란, 정묘,병자호란 등의 용어는 사관(史官)의 입장에서 보면,

                        동일한 한민족(韓民族)의 구성민족의 하나였던 왜와 여진족이 일으킨 변란으로 보고  있는 점이

                        일반인들의 역사관과 차이가 있다. 마치 625동란(경인란), 동학란, 묘청의 난, 홍경래의 난 처럼

                        국내에서 일어난 변란의 하나로 보고 있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반면에 이민족인 한족(漢族) 중심의 한(漢) ,수(隨)와 당(唐)과는 한고조선전쟁,수당전쟁 등

                        전쟁(戰爭) 등으로 기술하고 있다.

 

                            사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이에 대하여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것은 대일항쟁기 때에

                        일제의 식민사관에 물들은 강단사학자들이 만든 역사책으로 국사를 배워왔던 까닥이다. 

                        또한 다른 원인으로는 모화사상에 물든 조선조 성리학자들의 영향도 크다고 할 것이다.

 

 

                             조선왕조를 개국한 태조 이단(李旦)은 고려말 대대로 원나라의 부족장인 다루가치를

                        역임해왔으며, 역성혁명의 참여군사 중에는 여진족의 퉁두란(후에 이지란으로 개명)이

                        수렵민들인 여진족 부대를 이끌고 상당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때만 하더라도 예맥족 위주의 고려의 백성들과 여진족을 별개의 이민족으로 보고 있지

                         않고 있다는 실례가 된다. 왜는 백제의 담로 중의 하나이였다가 후에 고구려와 발해의

                         유민들이 해류를 타고 이주하여 지배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사관들이

                         동일한 한민족으로 보고 있다는 시각에서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기술한 것이다.

 

 

                             요(遼), 금(金), 청(淸) 등 고조선과 고구려 강역에서 살고 있었던 동이족들이

                         한족(漢族)들과 영토경쟁에서 승리하여 중원땅을 제패하고 있다는 것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은 식민사관에 물들은 강단사학자들의 역사관일 뿐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전인 645년(선덕여왕 14)에 처음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에서

                          872년 황룡사 9층목탑(皇龍寺九層木塔)을 중수(重修)하면서 심초석(心礎石) 안에

                          봉안한 사리내함(舍利內函)에 새긴 기록인 ‘황룡사 찰주본기’ 의하면 

 

                          "선덕여왕(善德女王) 12년 자장(慈藏)이 중국의 종남산(終南山)에서 원향선사(圓香禪師)에게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면 해동(海東)의 아홉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 돌아와 고한 뒤 이 탑의 조성이 추진되었다."고 했다.

 

                               이 황룡사의 9층목탑을 모델로 하여 통일신라 초기에 바위에 새긴 것이 탑골마애조상군

                          북면의 상이고, 여기에 9층목탑, 7층목탑 쌍탑과 석가여래인 본존불이 있는 가람의 형상을 바위에

                          새긴 것이다.

 

 

 

 

                               아래에 KBS 역사스페셜 " 만주 대탐사 제2부 -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였다."

                             인용하여 본다.

 

         여진족은 순수 우리민족이라고 보긴 힘들지만 여진족을 이끌고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의

      조상이 고려인 김함보이고,  그 후손이 다시 후금(淸)을 세우는데 바로 누르하치이다.

 

   《송막기문》에는 '여진추장은 신라사람(女眞酋長乃 新羅人)'이라는 기록이 있고,

《금사(金史)》에는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이며 고려에서 왔다.

(金之始祖諱函普初從高麗來)'라는 기록이 있다.(금시조 함보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이다)

 

    즉, 송막기문과 금사는 금나라의 시조를 한반도에서 찾은 것 같다.

아골타의 8대선조 함보의 연대는 대략 900년. 신라멸망 시기 전란을 피해

함보(씨족)이 만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흠정 만주원류고》에는 '사서를 보니 신라왕실인 김씨가 수십세 이어왔고

금이 신라로부터 온 것은 의심할 바 없다. 금나라 국호 또한 김씨 성을 취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 중략 -

 

   《고려사》예종 10년에는 '평주의 승려인 금준이 여진에 들어가 금나라의 선조가 되었다.

혹은 평주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라고 한다(我平州僧今後金之先或曰平州僧金幸之子克守)'기록이 있고,

《해사록》에는 '완안 아골타는 경순왕의 외손이자 권행의 외손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금사》에는 '여진인과 발해인은 같은 조상에서 나왔다(女眞渤海同本一家).'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여진과 발해 사이에는 친연관계가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금나라는 지금의 북경에 대규모 도시를 건설했다.

그 도시 건설 책임자의 이름은 '장호'였다. 《금사》에는 그를 '장호는 요양 발해인이다.

본래 성은 고씨동명왕의 후손이다(張浩遼陽渤海人本性高氏東明王之後).'라고 하였다.

장호 뿐 아니라 수 많은 발해인들이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을 형성하였다.

그것은 여진족과 발해인의 친연관계 뿐 아니라 대제국을 경영하였던 발해사람들의 

경험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요양 박물관에는 '통혜원명 대사 탑명'이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은 관찰사 '이후'의 딸로 발해인이었으며, 남편은 아골타의 셋째 아들인 '허왕'이며

아들은 '동경유수 정국공'이었다고 한다. 정국공은 금의 세종을 말한다.

 

금의 4대 황제 혜릉왕의 어머니 또한 발해인 대씨였다고 한다.

발해인은 금나라의 고위 관료층과 왕비족으로 자리를 잡았다.

금나라 발해의 후손인 왕비족과 신라 후예인 왕족이 낳은 국가였다고 볼 수 있다.

 

청나라

 

청 황실의 성은 '아이신줘러'였다.

역사스페셜이 중국에서 만난 청 건륭황제 7대손은 자신의 성을 金氏라고 하였다.

 

누르하치는 1616년 만주에서 후금을 건국한 후 심양을 수도로 정했다.

청 황실의 성 '아이신줘러'는 한자로 '애신각라(愛新覺羅)'이다.

《만주실록》에는 '愛新의 원래 뜻은 金(愛新漢語金)'이라 하며,

각라는  만주어 줘러를 차음표기한 것인데 성, 씨족이라는 뜻이라고 한다(覺羅姓也).

즉, '아이쉰줘러' '금부족, 김씨족' 이라는이다.

신라 왕족인  경주 김씨의 후손을 의미한다.

 

[출처] 역사스페셜 만주 대탐사 제2부 -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의 후예였다.|작성자 지킴이

 

 

      "해동(海東)의 아홉 나라가 모두 신라에 항복할 것"이라는 건립 사유를 밝히고 있는

 "황룡사 찰주본기"와 같이 황룡사 9층목탑과 이를 새긴 것으로 알려진 신인사지 탑곡 마애조상군에서 

 우리들이 배울 수 있는 점은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이 세운 금(金)과 청(淸)의 중원 제패가

 이 "찰주본기"에서 나타난 우리 선조들의 염원과 같이 우리 한민족의 진취성과 개척정신이 면면히 이어져

 온 것의 발로라는 점을 시사한다 것은 지나친 논리의 비약이 아닐 것이다.

 

    이러하듯이 온 백성들이 마음을 합쳐서 세운 염원과  이들이 온갖 정성을 다하여 이룩하려는 사방정토는

 시간과 공간을 달리하여서라도 언젠가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 신앙의 큰 힘이라 할 수 있다.

 분단된 국토의 평화통일과  여러 나라들과의 선린관계도 우선 먼저 마음을 한자락 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