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전(通典) 변방 전의 신라(新羅)

2015. 5. 2. 13:29우리 역사 바로알기

 

 

 

 

 

     통전(通典) 변방 전의 신라(新羅)| 문무의 조선사 해설

문 무 | 조회 105 |추천 0 | 2010.07.18. 13:50

 

 

                                    통전(通典) 변방 전의 신라(新羅)

 

    新 羅 國, 魏 時 新 盧 國 焉. 其 先 本 辰 韓 種 也. 辰 韓 始 有 六 國, 稍 分 為 十 二, 新 羅 則 其 一 也. 初 曰 新 盧, 宋 時 曰 新 羅. 或 曰 斯 羅. 其 國 在 百 濟 東 南 五 百 餘 里, 亦 在 高 麗 東 南, 兼 有 漢 時 樂 浪 郡 之 地. 東 濱 大 海. 魏 將 毋 丘 儉 討 高 麗, 破 之, 奔 沃 沮. 其 後 復 歸 故 國, 留 者 遂 為 新 羅 焉, 故 其 人 雜 有 華 夏, 高 麗, 百 濟 之 屬, 兼 有 沃 沮, 不 耐, 韓, 濊 之 地。其 王 本 百 濟 人, 自 海 逃 入 新 羅, 遂 王 其 國. 其 國 小, 不 能 自 通 使 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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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新羅)국”은 위(魏)때 “신로국(新 盧 國)”이다. 그 나라의 선조는 본시 “진한(辰韓)” 종(種)이다. 진한(辰韓)은 6개 나라였으나, 점점 나누어져 12개 나라가 되었는데, 신라(新羅)는 그 중의 한 나라였다. 【처음엔 “신로(新盧)” 송나라 땐 “신라(新羅)” 혹은 “사라(斯羅)”이다.】그 나라는 백제(百濟)동남(東南) 5백 여리에 있으며, 【 또한 고려(高麗=高句驪) 동남(東南)이며, 아울러 한나라 때의 낙랑군의 땅이다.】동쪽으로는 대해(大海)가이다. 위(魏)나라 장수 “관구검(毌 丘 儉)”이 고려(高麗=高句驪)를 쳐, 파하자 옥저(沃沮)로 도주하였다. 그 후에 다시 옛 나라로 돌아왔으나, 그곳에 머무르고 있던 자들이 신라(新羅)이다. 그 사람들은 화하(華夏)인. 고려(高麗=高句驪)인들이었고, 백제(百濟)에 속했는데, 아울러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에 있었다. 그 왕은 본래 백제(百濟)인이었다. 바다로 도망쳐 신라(新羅)에 들어가, 그 나라의 왕이 되었다. 그 나라는 조그마하여 스스로 사신을 보내 조공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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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苻 堅 時 , 其 王 樓 寒 遣 使 衛 頭 朝 貢 。 堅 曰 : 「 卿 言 海 東 之 事 與 古 不 同 , 何 也 ? 」 答 曰 : 「 亦 猶 中 國 , 時 代 變 革 , 名 號 改 易 , 今 焉 得 同 。 」 梁 武 帝 普 通 二 年王 姓 慕 名 秦 , 始 使 人 隨 百 濟 獻 方 物 。 其 俗 呼 城 曰 「 健 牟 羅 」, 其 邑 在 內 曰 「 喙 評 」 , 喙 , 呼 穢 反 。 在 外 曰 「 邑 勒 」 , 亦 中 國 之 言 郡 縣 也 。 國 有 六 喙 評、 五 十 二 邑 勒 。 土 地 肥 美 , 宜 植 五 穀 , 多 桑 麻 果 菜 鳥 獸, 物 產 略 與 華 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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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前秦)의 부견(苻 堅)때, 그 나라 왕 “루 한(樓 寒)”이 보낸 사신 “위 두(衛 頭)”가 조공(朝貢)했다. 부견이 이르기를, 『경(卿)은 해동(海東)의 일은 예전과 같지 않은가, 같은가?』대답하여 이르기를, 『또한 중국(中國)과 같습니다. 시대의 변혁에 따라 이름과 호칭은 달라져 지금의 것과 같습니다.』하였다. 량(梁) 무제 보통2년, 왕의 성(姓 )은 모(慕)요, 이름은 “秦(진)”이었는데, 처음 백제의 사신을 따라 방물(方物)을 바쳤다. 그 나라는 풍속에 따라 성(城)을 “건모라(健 牟 羅)”라 호칭하였으며, 그 나라의 도읍지 내를 “훼 평(喙 評)”이라 하였으며, 도읍지 밖은 “읍륵(邑勒)”이라 일렀다. 중국말의 군현(郡縣)이다. 구나 안에는 6개 “훼 평”이 있고, 52개의 “읍륵(邑勒)”이 있다. 땅은 기름지고 좋아, 마땅히 5곡을 심고, 많은 뽕(桑). 마(麻), 과일. 야채. 새와 짐승이 있었으며, 물산(物産)은 모두 화(華)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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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至 隋 文 帝 時 , 遣 使 來 貢 。 其 王 姓 金 名 真 平 , 隋 東 蕃 風 俗 記 云 :「 金 姓 相 承 三 十 餘 葉 。 」 文 帝 拜 為 樂 浪 郡 公 、 新 羅 王 。 其 王 至 今 亦 姓 金。 按 梁 史 云 姓 慕 , 未 詳 中 間 易 姓 之 由 。 其 先 附 屬 於 百 濟 , 後 因 百 濟 征 高 麗 , 人 不 堪 戎 役 , 相 率 歸 之 , 遂 致 強 盛 , 因 襲 加 羅 、 任 那 諸 國 , 滅 之 。 並 三 韓 之 地 。 其 西 北 界 犬 牙 出 高 麗 、 百 濟 之 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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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나라 문제(文帝)때,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그 나라 왕의 성은 김(金)이며, 이름은 “진평”이었다. 【수 동번(東蕃) 풍속기에서 이르길, 김(金)성은 서로 계승한지 30여 세(世 : 가지(葉)이다.】문제(文帝)가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벼슬을 내렸다. 【그 왕은 지금까지 이르렀는데, “김(金)” 성이 같다. 량 사(梁 史)를 살펴보면 이르기를, 성(姓)은 모(慕)이다. 중간에 역성(易姓)이 된 이유는 자세하지 않다.】그 나라의 선대는 백제에 딸려 속해 있었으나, 후에 백제가 고려를 정벌할 때 이로 인해, 백성들이 전쟁(戎 役)에 견디어 내지 못하고, 서로 이끌고 돌아와, 이루는데 바쳐 강성해져, 가라(加羅). 임나(任那) 여러 나라를 엄습하여 멸하였다. 【 나란히 삼한(三韓)의 땅이다.】그 나라의 서북(西北) 경계(之 境) 사이는 백제(百濟)와 고려(高驪)가 개의 이빨이 서로 맞지 않는 것처럼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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❶ 신라(新羅)는 『고려(高麗=高句驪)의 동남지방에 있으며, 한(漢)나라 때의 “낙랑군”의 땅에 있었다.』는 원전의 내용은 민망키만 하다. 신라(新羅)의 서울인 경주(慶州)는 “천년고도(千年古都)”라 부르는 것은 “경주(慶州)”가 신라(新羅)의 도읍지로 천도(遷都)한 번 하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이곳에 황도(皇都)를 두고 있었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경상도 경주”가 한(漢)나라 때는 “낙랑군”이었다? 그러면 고구려(高句驪)의 평양 주위에 있었다는 “낙랑군”은 어디에서 찾아내야 할 것인가? 반도 역사 해설에서는 <낙랑 국(樂浪 國). 고구려의 낙랑군(樂浪 郡). 신라의 낙랑군(樂浪 郡)>등 세 곳의 “낙랑(樂浪)”이 있었다고 한다.> 과연 올바른 역사 해설인가? 그건 그들만이 알 뿐이다.

 

<신라(新羅)의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이다. 그러면 남쪽은 대해(大海)가 아니고 육지(陸地)였다는 말인가?> 반도사관과 식민사관에서는 『당시 기록을 한 자들이 상세한 지리(地理)정보 없이 기록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라고 변명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실제 역사해설을 보면 그런 말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이 『또 필요한 대륙사서를 인용하여 신라는 반도에 있었다.』고 설명 하는 것은 무슨 작태일까? 이러한 이중적인 잣대는 『내가 하는 사랑은 아름다운 것이나, 다른 사람이 하는 사랑은 불륜이다.』라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❷ 본시 “신라(新羅)”의 백성들은 잡탕으로 “백제인. 화하인. 고구려인, 연나라 인”등이 모여 이룬 것이 “신라(新羅)”이며, 이들 백성들과 신라(新羅)는 본시 백제(百濟)에 속해 있었다. 또한 그 땅은 옥저(沃沮). 불내(不耐). 한(韓). 예(濊)의 땅이었다. 【백의민족이니 한겨레니 한민족이란 말은 왜 사용되는 것일까? 이것 역시 근대사의 정치적 용어일 것이다.】 또 신라(新羅)는 너무나 조그만 나라였기 때문에 다른 나라와 외교활동(外交活動)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백제(百濟)의 외교사절(外交使節)을 따라 처음으로 갔었다는 다른 기록을 입증(立證)하는 내용이다.

 

신라 백성들 구성은,

 

『백제(百濟)인 + 화하(華夏)인 + 고려(高驪)인 + 연(燕)인 = 신라(新羅)인』이다.

 

곧 신라는 혼혈(混血)종족인 셈이다. 그러고도 신라(新羅)가 반도(半島) 동남쪽 모퉁이에서 자생(自生)했다고 한다면, 이들은 하늘에서 떨어진 천인(天人)의 후예(後裔)일까? 인간은 단세포 동물이 아니기 때문에 홀로 자손을 번식시킬 수 없다.

 

❸ 량 무제(梁 武 帝)때 신라(新羅)왕의 성(姓)이 『“모(慕)”, 이름이 “진(秦)”』이었다는 것에서, 이것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을 말하는 것으로 책 부 원 구(冊 府 元 龜)의 기록(記錄)에는 성(姓)은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 기록(記錄)하고 있다.

 

또한 『삼국유사(三國遺事) 왕력(王 曆)편에는 이름이“(진)秦”』이라 했다. 또한 “량서(梁 書) 및 남사(南史)의 신라 전(新羅 傳)”에도 위와 같이 기록(記錄)하고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諱【죽은 이의 이름 휘】는 원종(原 宗)이며, 지증왕의 원자(元子)로써 모(母)는 연제부인(延 帝 夫人)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記錄) 때문에 법흥왕이 혹시 모용 씨(慕容 氏)의 종족(種族)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모용(慕容)氏는 고구려(高句麗)와 동족(同族)일 수밖에 없는 선비(鮮卑)족이며, 『모용외(慕容 廆) 및 子 모용황(慕容 皝)은 요동군공(遼東郡公)을 역임(歷任)했고, 조선왕(朝鮮 王)이 되었다』는 사서의 기록이 있다.

 

❹ 『신라(新羅)는 본래 백제(百濟)에 부속되어 있어, 고구려(高句驪)를 칠 때, 많은 백성들이 전쟁에 참가하였으나 견디지 못하고, 되돌아와 열심히 나라를 위해 일을 하여 결국 강해지자, 가라, 임나 등의 여러 나라들을 멸망시켜 강성해졌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신라(新羅)”에 대한 설명은 기존 학계의 역사해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대한민국 강단 사학계는 식민사학을 추종하는 한 “문제아(問題兒)”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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官 有 十 六 等 , 其 一 曰 伊 罰 于 , 貴 如 相 , 次 伊 尺 于, 次 迎 于 , 次 破 彌 于 , 次 大 河 尺 于 , 次 河 尺 于 , 次 乙 吉 于 , 次 沙 咄 于 , 咄 , 都 骨 反 。 次 及 伏 于 , 次 大 奈 摩 , 次 大 舍 , 次 小 舍 , 次 吉 土 , 次 大 烏, 次 小 烏 , 次 達 位 。 外 有 郡 縣 。 文 字 、 甲 兵 同 於 中 國 。選 人 壯 健 者 悉 入 軍 , 烽 、 戍 、 邏 郎 佐 反。 俱 有 屯 營 部 伍 。 風 俗 , 刑 政 、 衣 服 略 與 高 麗 、 百 濟 同 。

  大 唐 貞 觀 二 十 二 年, 其 王 金 春 秋 來 朝, 拜 為 特 進, 請 改 章 服 以 從 華 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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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신라(新羅)에 관한 기록 중에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성종(成宗) 임 오 원년(元年) (서기 982년)』의 한 대목을 보자.

 

❲於 是, 値 金 雞 自 滅 之 期, 乘 丙 鹿 再 興 之 運, 不 離 鄕 井, 便 作 闕 庭, 定 遼 浿 之 驚 波,➊ 得 秦 韓 之 舊 地, 十 有 九 載, ➋ 統 一 寰 瀛, 可 謂 功 莫 高 矣. (中略). : 이에 금계【金鷄 : 신라(新羅)를 말하는 것이다. 】 가 멸망(滅亡)하는 시기를 만나고 병록【 丙 鹿 : 고구려(高句驪)를 말한다. 】 이 다시 일어나는 운수를 타고 나서, 향리(井: 1리 사방의 땅)를 떠나지 않고 편리하게 조정의 대궐이 되어, 요수(遼水)ㆍ패수(浿水)의 놀란 물결을 안정시키고, 진한(秦 韓)의 옛 땅을 얻어서 19년 만에 『천하【寰 : 기내 환(畿內) 瀛 : 바다 : 봉건왕조시절의 천자(天子)가 직접 통치하던 영토를 말하는 것으로 이곳에서 사해(四海)를 다스렸으므로 “천하(天下)”를 칭하는 말이다.】』를 통일하였으니, 이보다 높은 공이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위 상소문을 올린 사람은 고려(高麗)의 대학자(大 學者) “최 승 노”가 그의 군주(君主)였던 고려황제(高麗皇帝) “성종(成宗)”에게 올린 글 내용 중의 일부이다. 이 글은 수년전에 한 번 언급한 적이 있는 것이나 이 중에서 ▶표를 한 ➊❲得 秦 韓 之 舊 地❳과 ➋ ❲統 一 寰 瀛❳에 관한 것을 언급하고 하는 것이다.

 

❲得 秦 韓 之 舊 地 : 진한(秦韓)의 옛 땅을 득하여(얻어)❳

 

반도사관 및 식민사관의 주장은 반도(半島)엔 삼한(三韓 : 辰韓+馬韓+弁韓)이 있었다고 했으며, 이어 이들은 삼국(三國 : 高句驪+百濟+新羅)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 이들 삼국(三國)의 뒤를 이어 고려(高麗)가 삼국(三國)의 땅을 얻어 통일의 과업을 이루었다고 하니, 신라(新羅)의 땅과 백제의 옛 땅과 고구려의 남쪽 일부 땅을 득(得)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고려대신(高麗大臣)인 “최 승 노”가 자신의 군주(君主)에게 말한 “진한(秦韓)의 구토(舊土)”는 어디에 있는 어떤 곳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고려 태조 왕건(高麗 太祖 王建)이 얻은 땅은 옛 진한(辰韓)의 땅이지 “진한(秦韓)”의 땅일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진한(秦韓=辰韓)의 땅은 장성(長城)의 남쪽에 있다고 했기 때문이며, 진한(秦韓)은 그 백성들이 말하기를, 진(秦 : 시황제의 나라)나라의 유민(遺民)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역사서를 저술한 학자들이 “진(辰)과 진(秦)”을 구별하지 못해 생긴 일도 아니며, 또한 이들이 진(秦)의 난리를 피해 다니다가 마한(馬韓) 왕이 동쪽의 땅을 주어 살게 한 곳이 현 반도 경상도 땅이라면 그 서쪽에 있던 변한(弁韓)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남쪽의 왜(倭)와 접했다는 땅은 어디에서 또 찾아야 될까?

 

또한 백제(百濟)가 당(唐)과 신라(新羅)의 협공으로 망하고 난 뒤 그 땅(百濟의 땅)은 당사자인 당(唐)의 영토(領土)가 되지 않고, 말갈(靺鞨)과 신라(新羅)가 차지했다고 한다. 말갈(靺鞨)이 차지한 백제(百濟)의 땅은 반도(半島)의 서남지방 어느 곳일까? 또 당(唐)은 왜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한 것일까?

 

말갈(靺鞨)! 그들은 또 누구인가? 반도(半島)로부터 7-8천리 떨어져 있던 서역(西域)의 북방쯤에 있었던 자들이 반도(半島)의 백제(百濟)땅을 어떻게 신라(新羅)와 협상하여 나누어 가졌을까? 백제의 유민(遺民)들은 또 어떻게 돌궐(突厥)과 말갈(靺鞨)의 영토로 도망을 갈 수 있었을까?

 

진한(秦韓)의 옛 땅은 반도(半島) 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진한(辰韓)이 처음 일어난 곳은 실크로드(사주지로=하서회랑) 주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한(辰韓)이 진한(秦韓)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統 一 寰 瀛 : 천하를 통일

 

환(寰)이란 무슨 뜻일까. 『寰』이란 『왕조시대에 기내(畿內)의 땅을 말하는데, 기(畿)는 경기 기(京畿)라 하며, 천자(天子)가 있는 곳이며, 천자(天子)가 직접 통치 관할하는 영토(領土) 500 리 의 땅을 말하는데, 황성(皇城)을 중심으로 사방 500 리를 기준하고 있다.

 

영(瀛)은 바다 곧 대해(大海)를 의미하며,

 

환 영 (寰 瀛)은 사해를 다스리는 중심지역인 기내(畿內)와 기내를 벗어난 사방의 사해(四海) 곧 대해(大海)를 정복했으므로 천하(天下)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고려태조(高麗太祖) “왕건(王建)”이 천자(天子=황제)가 되어 “기내(畿內)”를 다스리며, 사해(四海=大海)의 땅은 제후국(諸侯國)을 두어 통치(統治)했다는 의미다.

 

고려(高麗)시대엔 “조선 공(朝鮮 公). 조선 후(朝鮮 侯). 평양 후(平壤 侯). 금관 후(金官 侯). 변한 후(卞 韓 侯). 상안 후(常 安 侯). 부여 후(夫餘 侯). 진한 후(辰韓 侯). 낙랑 백(樂浪 伯). 천수 공(天水 公)” 등의 여러 제후국(諸侯國)의 왕인 “제후(諸侯)”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신강(新疆) 북방지대 중가리아 사막(沙漠)지대에서 활동했던 “철륵(鐵勒)” 의 돌격기병(突擊騎兵)을 천하(天下)를 통일(統一)할 때 동원(動員)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왕건(王建)”이 천자(天子)일 때 가능한 일이다.

 

천하(天下)를 경영(經營)했던 고려황제(高麗皇帝)와 그 영토(領土)를 역성혁명(易姓革命)을 통해 천하(天下)를 뒤집어 버린 『이성계(李成桂)!』

 

그가 진정 고려황제(高麗皇帝)의 지위(地位)와 그 영토(領土)를 버리고, 반도(半島) 땅 모퉁이로 이동(移動)하여 새로운 “조선(朝鮮)”을 개국(開國)하였다면 그는 “천하(天下)의 바보다.”

 

왜냐하면, 반도와 그 부속도서를 합친 것보다 50-70배의 큰 땅을 버렸으니 『멍청한 친구』고, 1억 명(一 億 名) 이상의 백성(百姓)들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일백만 명(一 百 萬 名)도 되지 않는 백성(百姓)을 선택한 “수천 년래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천하의 바보』라는 말이 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일은 없었다.』는 것이 당시의 기록이 말해 주고 있다.

 

                                                       2010년 07월 18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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