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궐 부흥운동

2015. 5. 5. 09:47우리 역사 바로알기

 

 

 

 

돌궐 부흥운동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7 10:10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고토에서는 고구려인들의 치열한 부흥운동이 있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에 도움을 준 첫 번째 존재는 신라였다. 당의 한반도 지배 야욕을 분쇄해야 했던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우익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나당전쟁이 끝나자, 고구려인들을 버렸다. 683년의 보덕국 압살이 그것이다.


   두 번째 존재는 돌궐과 거란이다. 돌궐과 거란의 봉기는 당군이 요동방면에 집중하지 못하게 했고, 이는 고구려인들의 부흥운동에 유리한 국면을 조성했다.


 

 

1. 나라를 가진 민족이었다.


   유라시아 초원 일대를 지배하며, 고구려, 중원과 함께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돌궐은, 582년 동서로 분열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결국 630년에 동동궐이 658년 서돌궐이 당에게 멸망하였다. 돌궐 비문은 국가를 잃은 비통함을 울부짖고 있다.

 

나라를 가진 민족이었는데, 우리나라는 어디에 있으며, 군주를 가진 민족이었는데, 우리의 군주는 누구인가?

   

    비통함에 울부짖고 있던 돌궐인들의 부흥운동은 679년에 시작되었다. 지도자는 아사나 씨족의 쿠틀룩이었다. 쿠틀룩은 톤유쿡의 도움을 받아 5천 군사를 양성하며 부흥운동을 준비했다. 드디어 681년 당 북부 연주를 습격하면서 쿠틀룩의 부흥운동은 본격화되었다. 이어 682년 거란과 오구즈족을 패퇴시키고, 돌궐제국의 수도였던 외튀겐 지역 확보에 성공하였다. 이해에 쿠틀룩은 카간으로 즉위했고, 일 테리쉬라는 칭호를 썼다. 돌궐 제국의 부활이었다. 쿠틀룩의 돌궐제국 부활 과정은 그의 아들이 세운 비문에 기록되었다.

 

   (중국인들은) 이만큼 봉사한 것을 생각하지도 않고 "투르크 부족을 죽여야겠어. 그들의 씨를 말려야겠어"라고 말했다. (투르크인은) 전멸될 지경이었다. 위에 있는 투르크의 하늘과 투르크의 신성한 땅과 물이 분명 이렇게 말했다. 투르크 부족민은 없어지지 말라고, 부족이 되라고, 나의 아버지 일 테리쉬 카간과 나의 어머니 일 빌게 하툰을 텡그리(하늘)가 높은 곳으로 들어올렸다.(중략)


   내 아버지 카간은 17명의 군사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밖으로 갔다."는 것을 듣고, 도시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갔고 산에 있는 자들은 내려왔다. 모여서 70명이 됐다. 하늘이 힘을 주셨기 때문에 나의 아버지 카간의 군사들은 늑대와 같았고, 적은 양과 같았다. 동으로 서로 출정해 (사람을) 모았다. 모두 700명이 됐다, 700명이 되어 나라 없이 카간 없이 남은 부족민을 계집종이 되거나 사내종이 된 부족민을, 투르크의 풍속을 버린 부족민을 옛 조상의 법에 따라 교화하고 가르쳤다,(중략)


   남쪽으로는 중국인이 적이었고, 북쪽으로는 토쿠즈 오구즈 부족들이 적이었다. 키르기즈, 쿠리칸, 오투즈 타타르, 거란이 모두 적이었다. 내 아버지 카간은 이처럼 마흔 일곱 번 출정했고 스무 번 싸웠다. 하늘이 시켰기 때문에, 나라 있는 자들을 나라 없게 만들었고 군주 있는 자들을 군주 없게 만들었고 적들을 복속시키고 힘 있는 자를 무릎 꿇게 하고 오만한 자들을 머리 숙이게 했다.


2. 당에 대한 파상 공세


   돌궐 부활에 성공한 일 테리쉬 카간 다음 목표는 당이었다. 나라를 빼앗은 원수였고, 고토 회복과 생활 물자를 조달해야 한다는 현실적 이유 때문이었다. 682년 평주를 8차례 침략한 것을 시작으로 683년 정주, 규주, 울주, 남주 등을 습격했고, 684년에는 삭주를 685년에는 대주와 흔주를 습격했다.


   686년에는 돌궐은 삭주와 대주 등지를 습격 했는데, 이때 돌궐군을 저지한 것이 백제 유장 흑치상지였다. 백제 부흥운동 실패 후 당에 망명했던 흑치상지는 토번과의 전선에서도 활약했는데, 이번에는 돌궐군을 격퇴한 것이다. 측천무후는 687녀에도 돌궐이 쳐들어오자 흑치상지에게 이를 막게 했는데, 흑치상지는 황화퇴에서 돌궐군을 격퇴하면서 연국공에 봉해지고, 식읍 3천호를 받았다. 그러나 689년에 모반사건에 연좌되어 교형을 당하고 말았다.


   돌궐은 거의 해마다 당을 침략했다. 691년 일 테리쉬 카간이 죽고 동생인 카파간이 카간위를 계승했는데, 카파간 카간 역시 형 못지 않은 정복군주여서 693년에는 당의 영주 지방을 폐허로 만들정도로 강력하게 공격을 했다.


돌궐의 부활과 파상공세. 고구려 부활을 염원하며 싸우던 고구려 부흥군에게 이것은 청신호였다.

 

 


3. 돌궐 부활에 대한 단상


   돌궐 제국이 682년은 고구려의 마지막 왕인 보장태왕이 숨을 거둔해였다. 한때는 라이벌었고, 우호국이기도 했던 두 대국의 운명이 기묘하다고 느껴지는 대목이다.


   돌궐은 자체 기록을 남겼는데, 그것이 돌궐 비문이다. 필자는 이 돌궐 비문 전문을 읽어 보지는 못했다. 내가 글을 쓰며 인용한 것은 이윤섭 님이 쓰신 다시 읽는 삼국사에서 재인용한 것이다. 

   북방민족의 특징이랄까. 몽골비사도 그렇고 이 돌궐 비문도 그렇고, 무미 건조하게 사실만 전달하는 삼국사기나 중국의 역사서와 다르게 웅장하고 가슴을 뜨겁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돌궐비문에서 망국의 비통함을 읊고 있는 부분이라든지 쿠틀룩이 돌궐 제국을 부활시키는 부분은 광활한 초원을 지배했던 사나이들의 울분과 기개 등이 느껴지는 듯 하다.


   만약 발해인들이 자체 기록을 남겼다면, 이러한 특징들이 보이지 않았을까. 돌궐 비문이 전하는 망국의 비통함은 고구려인들 역시 느끼고 있는 감정이었을 것이고, 쿠틀룩의 돌궐 부활과정을 기록한 비문의 내용은 주어를 대조영과 고구려로 바꾸면, 역시 고구려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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