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란 독립운동(3)

2015. 5. 5. 09:39우리 역사 바로알기

 

 

 

 

거란 독립운동(3)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7 15:06

 

      

1. 돌궐의 선택


   동협석 전투의 결과는 돌궐에게도 알려졌다. 카파간 카간은 다시 측천무후에게 사신을 보냈다. 거란 토벌을 도와주겠다는 것이었다. 대신 요구사항이 많아졌다. 당이 돌궐로부터 탈취했던 선우도호부의 토지, 곡물 종자, 농기구, 쇠등을 요구했다.


   동협석 전투에서의 패배 이후, 좌절감에 빠져있던 측천무후는 돌궐의 요구조건을 수용할 수 밖에 없었다. 측천무후는 697년 4월 18일 무의종을 신병도행군대총관에 임명해 세 번째 거란 토벌군을 조직하게 하면서 한편으로는 돌궐의 요구 조건을 수용하면서 거란 토벌에 돌궐의 군사력을 이용하기로 결심했다.


   당만 돌궐의 힘을 이용하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었다. 거란의 손만영 역시 돌궐의 힘을 빌리고자 했다. 비록 동협석 전투에서 당군을 완파했지만, 북방의 돌궐의 존재가 신경쓰였다. 송막을 급습했던 696년 11월처럼, 돌궐이 배후에서 거란을 공격하면, 버틸 재간이 없었다. 손만영은 사신을 보내 함께 당의 유주를 칠것을 제의했다.


   카파간 카간은 거란 사신을 환영했다. 만약 당이 이번에도 제안을 거절한다면, 아예 거란과 손을 잡는 방안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것 같았다. 그러나 당이 돌궐의 요구를 모두 수용하겠다는 답변을 보내오자, 카파간 카간은 거란 사신을 죽이고, 당을 돕기로 결정했다. 


2.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돌궐의 대군이 거란을 향해 출병하고, 당 역시 루사덕, 사타충의등에게 20만 군사를 주어 거란을 공격하던 그  시점에 손만영과 거란군은 당의 유주를 공략하고 있었다. 무유의는 장수를  파견해 유주를 지원했으나 대패했다. 무의종이 지휘하는 신병도행군은 거란 장수 낙무정이 두려워 후퇴했고, 거란은 조주를 도륙했다.


   전황은 거란에게 유리했다. 당이 또다시 20만 토벌군을 조직했다는 정보가 들어왔으나 두렵지 않았다. 손만영은 거란족의 독립국가를 세울 날이 멀지 않았음을 느꼈다. 그러나 돌궐의 개입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돌궐의 대군이 거란의 신성을 함락시키고, 성 안의 거란인들을 포로로 잡았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란군은 크게 동요했다. 당에 버금가는 대국인 돌궐이 당과 손을 잡았다면 이것은 얘기가 달랐다. 비록 당과의 전투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고 있었지만, 당은 대국이었다. 물자보급, 병력충원 등에서 거란보다 몇수는 위였다. 거기에 당 못지 않은 대국이며, 강력한 전투력을 가진 돌궐의 개입 그리고 두 대국의 연합은 거란군을 순식간에 와해시켰다. 해족이 당에 내통해 거란의 배후를 쳤고, 청변도행군 20만이 협공에 나서자 거란군은 무너졌다. 


당의 추격을 피하던 손만영은 노수 인근 숲에서 가노에게 살해되었다. 697년 6월 20일의 일이었다. 죽기 전 손만영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지금 당으로 돌아가려 해도 죄가 이미 크고, 돌궐에 가도 역시 죽고, 신라에 가도 역시 죽을 것이니, 어디로 가야 하는가!


   손만영의 죽음으로 거란의 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웅지는 실패로 끝났다. 거란의 독립은 200년 후 야율아보기의 등장때 까지 기다려야 했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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