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1)

2015. 5. 5. 09:52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부흥운동(1)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2 22:56

 

      

1. 당태종의 무덤

 

   평양성 점령을 들은 당 고종의 머릿속에서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은 아버지 당 태종이었다. 고구려 원정을 위해 모든 것을 걸었지만, 결국 처참하게 실패해 무너지고 말았던 아버지 당 태종 그 아버지 무덤에 연개소문은 아니어도, 고구려 태왕이 무릎 꿇게 만든다면 지하에서 아버지가 기뻐하시리라.

 

   당 고종은 이세적에게 보장왕과 고구려 귀족들을 당 태종의 무덤을 참배하게 했다. 당 태종의 무덤을 참배할 때 보장왕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크나큰 굴욕감, 망국의 군주라는 비애 등을 느끼지 않았을까.

 

   668년 12월 당 고종은 포로가 된 보장왕과 남건, 남산 형제를 만났다. 이 자리에서 당 고종은 보장왕과 고구려 망국의 1등 공신 연남생, 신성 등에게 벼슬을 주었다. 반면 끝까지 당과 맞섰던 연남건을 귀양보냈다. 이제 남은 것은 고구려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였다.

 

   고구려 지역의 5부, 1백76성, 69만여 호를 나누어 9도독부, 42주, 1백 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여 이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우리의 장수들 중에서 공로가 있는 자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으로 삼아, 중국인들과 함께 이 지역을 다스리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우위위대장군(右威衛大將軍) 설인귀를 검교안동도호(檢校安東都護)를 삼아, 병사 2만을 거느리고 이 지역을 도와주고 위로하게 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당 고종의 구상은 고구려 땅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당에 투항한 고구려 귀족들을 도독, 자사, 현령 등으로 삼아 고구려인들의 저항을 최소화 하면서, 안동도호부에는 설인귀를 임명해 고구려 땅을 통치하게 했다.

 

당 고종은 이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 고종만의 생각이었다.

 

 

2. 고구려인 강제 이주

 

   669년 2월 이세적은 당 고종에게 충격적인 보고를 한다. 압록강 이북 지역에서 당에 점령된 성은 3개, 항복한 성은 11개에 지나지 않고, 투항하지 않은 성이 11개, 당군을 피해 주민 전체가 도망간 성이 7개 라는 것이다. 당의 고구려 통치 정책은 고구려인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힌 것인다.

 

   고구려 지배층 역시 당의 의도에 순순하게 응하지 않았다. 보장왕의 서자 였던 안승이 신라로 망명을 한 것이다. 곳곳에서 고구려인들이 강렬하게 저항하자, 당 고종은 고구려 지배층의 강제 이주를 지시했다.

 

   여름 4월, 당 고종이 2만8천3백 호를 강회(江淮)의 남쪽과 산남(山南)과 경서(京西) 등지에 있는 모든 주의 사람이 없는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고구려 백성 중 다수가 반란을 일으켰다. 황제는 조칙으로 고구려인 3만 8천 200호를 강회의 남쪽과 산남 및 장안 서쪽 여러 주의 광활한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 자치통감  -

 

   669년 5월 고려호 2만 8천 200호와 수레 1천 80대, 소 3천 300두, 말 2천 900필, 낙타 60두를 장차 내지로 옮기기 위해 내주와 영주에서 차례대로 발진해 강회(지금의 안휘성, 강소성)지역의 남쪽과 산남(지금의 섬서, 하남, 호북성 일대), 변주,(지금의 하남성 개봉), 양주(지금의 감숙성) 등 서쪽 여러 주의 광활한 빈 지역에 안치했다.

- 구당서 -

 

   669년 4월 당 고종은 2만8천3백호에 숫자로 치면 20만에 달하는 고구려인들의 강제 이주를 지시했다. 이는 고구려 지배층을 회유하려는 정책에서, 아예 고구려의 싹을 제거하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었다. 이렇게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들은 만주의 영주와 산둥반도의 내주로 이주했다. 그러나 고구려인들은 당의 강제 이주 정책에 순순히 당하지 않았다.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렇게 이주한 고구려인들은 당에 저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당의 입장에서는 반란이었지만 고구려인의 입장에서는 나라를 되찾으려는 부흥운동이었고,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한 목숨을 건 투쟁이었다. 그러나 적지 한복판에서의 일으킨 봉기였다. 수많은 전사들이 죽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강회, 산남, 양주 일대로 또다시 강제 이주되었다. 이 지역은 사람이 살지 않는 오지로, 당은 고구려인들을 이용해 황무지를 개간하고, 이 지역 방비를 맡겼다. 이렇게 강제 이주한 이들의 후손 중의 한명이 바로 고선지였다.


   이처럼 당의 고구려 지배 정책은 처음부터 엇나가기 시작했다. 고구려인들은 쉽사리 당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천손 추모성왕의 후손들이었다. 그 강한 자긍심은 세계 제국 당에 맞서 조국을 되찾기 위한 전쟁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그러한 고구려인들을 돕는 존재가 있었다. 바로 신라였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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