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2)

2015. 5. 5. 10:00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부흥운동(2)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3 08:31

 

 

      

1. 당과 신라의 갈등


    이 무렵 신라는 당에 대한 강한 불만과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당이 약속을 지키지 않음은 물론, 아예 신라 까지 점령하려 한다는 것이었다.


의혹의 시작은 백제 멸망 시점으로 올라간다. 신라와 당이 동맹당시에 맺은 영토분할 약정에 따르면 대동강을 기점으로 그 이남은 신라의 영토였다. 따라서 백제 영토에 대한 통치권은 신라에게 있었다. 그러나 당은 이를 지킬 마음이 없었다는데 문제가 있다.


   당은 백제의 수도 사비성을 점령한 이후 웅진 도독부를 비롯한 5개 도독부를 설치했다. 이는 신라에게 백제땅을 양도할 의도가 없음을 보여준 행동이었다. 신라로서는 이런 당의 행동에 분노했지만 백제 부흥군을 진압해야 하는 문제, 그리고 북방의 고구려 때문에 분노를 억눌렀다. 그러나 백제부흥군 진압이 막바지에 이른 문무왕 3년 당 고종이 일방적으로 신라에 계림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에 임명하자, 문무왕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문무왕에게 깊은 빡침을 준 사건은 665년 8월 문무왕과 유인원, 부여융이 백마를 잡아 서맹한 것이었다. 이때 유인궤가 지은 당의 맹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약한 자를 감싸 주고 배반하는 자를 토벌하는 것이 선왕의 아름다운 전례요, 망한 자를 일으켜 주고, 끊어진 나라를 이어 주는 것은 옛 철인의 규정이었습니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여러 사서에 전해오고 잇습니다. 그런 까닭에 전 백제 사가정경 부여융을 세워 웅진도독으로 삼아 제사를 받들고 그의 고토를 보존하게 하니 신라와 서로 의존해 길이 우방으로서 각자 묵은 감정을 버리고 굳고 화친할 것이며, 천자의 명을 공손히 받들고 길이 번국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문무왕은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욕설을 참아야 했을 것이다. 당이 약속을 저버린 것은 물론이고, 패망한 백제와 신라를 동급으로 대우한 것이다. 그러나 문무왕은 이를 악물고 참았다. 지금은 때가 아니었다. 북방에 고구려가 남아있었고, 당과 일전을 할 역량이 신라에게는 없었다. 문무왕은 때를 기다렸다.

 

 


2.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의 연합


   고구려 멸망 이후 문무왕은 전쟁에 공을 세운 이에게는 상을 주고, 전사한 이는 추모하며, 죄인들을 사면하고, 백성들의 빚을 탕감해 주는 등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를 단행한다. 문무왕은 더 이상 전쟁이 없기를 바랬다.


   그러나 문제는 당이었다. 당은 약속을 지킬 의도가 없었고, 오히려 신라까지 집어삼키려 하였다. 고구려 멸망 이후 당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신라를 압박했다. 당은 사신으로 온 신라의 쇠뇌 기술자 구진천을 포섭하려다가 실패하자 그를 죽였고, 사신이었던 양도가 감옥에서 죽었다. 삼국사기는 당의 이런 조치가 신라가 백제의 땅을 공격했기 때문이라고 적고 있다.


   신라와 당의 갈등은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문무왕은 전쟁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때마침 국제 정세도 신라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엇다. 바로 토번과 고구려 부흥군의 존재였다.


   당시 토번이 동투르기스탄을 급습하자, 당은 안동도호 설인귀를 소환해 토번의 침공을 막게 했다. 이틈을 타 문무왕은 백제지역 점령에 나섰고, 당 고종은 이를 질책해 신라 사신 구진천과 양도를 죽인 것이다.


   이후 토번은 670년 4월 서역의 14주를 함락하면서, 당에 대한 파상공세를 펼쳤다. 당의 주력군은 토번을 견제하는데 투입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설인귀 등이 이끄는 15만 당의 대군은 가르친링이 지휘하는 토번군에게 참패를 하였다.


   당과 토번의 충돌은 문무왕에게는 기회였다. 그리고 고구려 부활을 위해 각지에서 싸우던 고구려 부흥군에게도 기회였다. 신라와 고구려인들은 손을 잡았다. 한때의 적이었지만, 지금은 공동의 적을 가진 동업자였다.

 

   3월, 사찬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태대형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기 정예병 1만을 거느리고 압록강(鴨淥江)을 건너 옥골(屋骨)[원문에 3글자 빠져 있음]에 이르렀는데, 말갈의 병사들이 먼저 개돈양(皆敦壤)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 4일, 대적하여 싸워서 우리 병사가 크게 이겼으니, 목을 베어 죽인 숫자를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당나라 병사가 계속 당도하였기에 우리 병사는 물러나 백성(白城)에서 지키고 있었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의 연합 작전이었다. 이는 신라가 백제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벌인 양동작전의 성격이었다. 신라는 백제지역 점령을 위해 북으로 내려오는 당군을 견제할 세력이 필요했고, 여기에 최적화된 존재가 바로 고구려 부흥군이었다. 고구려 부흥군 역시 당과 대결하기 위해서는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런 판단하에 신라의 존재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이가 바로 검모잠이었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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