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부흥운동(3)

2015. 5. 5. 10:11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구려 부흥운동(3)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3 17:55

 

      

1. 비운의 검모잠



    함형() 원년(서기 670) 경오 여름 4월, 검모잠()이 나라를 다시 일으키기 위하여, 당나라를 배반하고 임금의 외손 안순()[『신라본기』에는 승()으로 되어 있다.]을 세워 왕으로 삼았다. 당 고종이 대장군 고간()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삼아 이를 토벌케 하였다. 안순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도주하였다.

-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

   6월, 고구려 수임성() 사람인 대형 모잠()이 유민들을 모아 궁모성()으로부터 패강(浿)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 등을 죽였다. 그들은 신라로 향하던 중에 서해의 사야도()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을 만나 한성 안으로 맞아들여 왕으로 삼았다. 소형 다식() 등을 신라에 보내 슬프게 고하였다.

   “망한 나라를 일으키고 끊어진 대를 잇게 해주는 것은 천하의 공평한 도리이니 오직 대국이 그렇게 해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우리나라의 선왕은 도의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우리나라의 귀족인 안승을 받들어 군주로 삼았습니다. 바라옵건대 신라의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임금은 그들을 서쪽 지방인 금마저()에 살게 하였다.
한기부()의 여자가 한꺼번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으므로 곡식 2백 섬을 주었다.

- 삼국사기 신라 본기 -


   670년 4월 대형 검모잠은 고구려 유민을 모아 당나라 관리를 죽이고 고구려 부흥운동에 나섰다. 그는 왕족인 고안승을 왕으로 추대하여 고구려 부흥운동의 깃발을 내걸었다.


   그러나 검모잠의 봉기 시점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와 신라 본기의 기록이 다르다. 고구려 본기는 4월이라 한 반면 신라 본기는 6월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검모잠이 봉기를 일으킨 것은 4월이고, 신라에 도움을 요청한 시점이 6월임을 의미한다. 검모잠은 한 해전 신라로 망명했던 왕족 고안승을 한성으로 맞이하여 왕으로 추대했는데, 이는 검모잠의 봉기에 신라의 도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 신라 본기는 안승을 연정토의 아들로 기록하고 있으나, 고구려 본기 보장왕의 서자 기록하고 있다. 검모잠이 안승을 왕으로 추대했다는 것으로 보았을 때, 안승은 보장왕의 서자로 보는 것이 옳을 듯 하다.


   검모잠의 봉기를 들은 당은 대장군 고간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하게 했다. 고간의 당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고구려 부흥군 내부에서는 분열이 발생했다. 검모잠은 항전을 주장한 반면, 안승은 당군을 피해 신라로 망명을 주장했다. 결국 안승은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로 망명하고 말았다.


   큰 뜻을 품고, 고구려를 부활시키려고 했던 검모잠은 뜻을 이루지도 못하고 죽었다. 검모잠을 죽이고 신라 품에 안긴 안승 그는 이후 어떻게 되었을까?

 

 


2. 안승의 운명


   신라의 품에 안긴 안승. 자신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안승을 보며 문무왕은 고구려 부흥군을 이용할 계책을 생각했다. 당시 당과 일전을 앞두고 있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전투력이 막강한 고구려 부흥군의 도움이 필요했다. 이들을 이용할 방법 중의 하나가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하는 것이었다.

 

  

    사찬 수미산(須彌山)을 보내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하였다. 그 책문(冊文)은 다음과 같다.
“함형(咸亨) 원년 경오(서기 670) 가을 8월 1일 신축에 신라왕은 고구려의 후계자 안승에게 책봉의 명을 내린다. 그대의 태조 중모왕(中牟王, 주몽)은 북쪽 산에 덕을 쌓고 남쪽 바다에 공을 세워, 위풍이 청구(靑丘, 우리나라의 별칭)에 떨쳤고 어진 가르침이 현도(玄菟, 고구려를 의미)를 덮었다. 자손이 대대로 이어지고, 본류와 지류가 끊어지지 않았으며, 개척한 땅이 천리요, 역사가 8백 년이나 되었다.

남건(男建)과 남산(南産) 형제에 이르러 집안에서 화가 일어나고 골육간에 틈이 생겨 집안과 나라가 멸망하고 종묘사직이 사라졌으며, 백성들은 동요하여 마음을 둘 곳이 없게 되었다. 그대는 산과 들에서 위기와 곤란을 피해 다니다가 홀몸으로 이웃나라에 투신하였으니, 떠돌아다닐 때의 괴로움은 그 자취가 진문공(晉文公)1)과 같고 망한 나라를 다시 일으킴은 그 사적이 위후(衛侯)2)와 같다고 하겠다.

 

   무릇 백성에게는 주인이 없으면 안 되며, 하늘은 반드시 운명을 돌보아 주시는 것이다. 선왕의 정당한 후계자로는 오직 그대가 있을 뿐이니, 제사를 주재할 사람이 공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삼가 사신 일길찬 김수미산 등을 보내 책명을 전하여 그대를 고구려왕으로 삼으니, 그대는 마땅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써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할지어다. 아울러 멥쌀 2천 섬과 갑옷을 갖춘 말 한 필, 비단 다섯 필과 명주와 가는 실로 짠 베 각 10필, 목화 15칭(稱)을 보내니 왕은 그것을 받으라.”


- 삼국사기 신라 본기 - 



   안승을 고구려 왕으로 책봉한 이 조치에 대해 신라와의 전쟁을 위해 파견된 설인귀는 671년 7월 문무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이렇게 비난했다.

 

   

    또한 고구려의 안승(安勝)은 아직 나이도 어리고, 남아 있는 고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으로 줄어서 스스로 어떻게 해야 할 지 의구심을 품고있으니 나라를 맡는 중한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병선에 돛을 활짝 펴고 깃발을 휘날리며 북쪽 해안을 순시할 때 안승이 지난 날 활에 상한 새의 신세가 된 것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내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를 외부의 응원세력이라 믿고 있으니 이는 얼마나 잘못된 것입니까?

 

 

 

   능력도 안되는 애송이, 불쌍해 차마 토벌하지 못했던 안승 따위를 응원세력으로 믿고 당에 도전하느냐는 힐난이었다. 그러나 설인귀의 생각은 오판이었다. 문제는 안승이 아니라 안승을 따르는 고구려 부흥군이었다.


    고구려 부흥군의 진가는 백수성 전투에서 드러났다. 672년 8월 당군은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는 백수성을 공격했는데, 이에 신라는 원군을 보내 백수성을 돕게 했다. 당군과 고구려부흥군, 신라 연합군의 격돌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구려 부흥군과 신라군은 당군 수천을 베는 전과를 올렸다.


    비록 석문 전투에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이 패배하긴 했지만, 연합군의 위력은 설인귀가 생각하는 만큼 활에 당한 새의 그것이 아니었다.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 땅에서 그리고 고구려 옛 땅에서 치열하게 당과 격돌했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이 버티는 동안 전력을 증강할 수 있었고, 675년 매초성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한 이후 승기를 잡았다. 당 역시 토번의 공세 때문에 신라와의 전선에 집중할 수 없었다. 결국 676년 기벌포 해전에서의 패배 이후 당은 한반도 전선에서 물러났다.


    고구려 부흥군의 도움을 받아 당을 축출한 신라였다. 그러나 신라는 안승으로 하여금 유민들을 어루만져 모아들이고 옛 왕업을 이어 일으켜, 영원토록 이웃나라로써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며 공경하고 공경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는 잡아먹는 것이 원칙.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은 683년 안승의 보덕국(674년 문무왕은 안승을 보덕국왕에 봉했다.)을 폐쇄시키고, 안승을 경주로 불러 들였다.


   이 조치는 고구려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샀다. 안승은 힘없이 경주로 끌려갔지만 그의 조카였던 고대문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은 금마저를 점령하고 신라에 저항했다. 고구려인들이 신라에 온것은 고구려 부흥을 위해 신라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지, 신라의 백성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고대문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의 저항은 격렬해서 진압군 장수였던 핍실,김영윤 등이 전사하는 등 신라군의 피해도 컸다. 삼국사기 열전에는 핍실, 김영윤의 죽음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문명() 원년 갑신(서기 684)에 고구려의 남은 적들이 보덕성()에 자리잡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대왕()이 장수에게 토벌을 명하였는데, 핍실을 귀당제감()으로 삼았다. 그는 떠날 때 아내에게 말했다.

“나의 두 형이 이미 나라 일로 죽어서 이름이 영원히 남아 있거늘, 내 비록 불초()하나 어찌 죽기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살겠소? 오늘은 당신과 살아서 헤어지지만 결국에는 사별이 될 것이니 상심하지 말고 잘 사시오!”
적진을 마주하게 되자 단신으로 나가 맹렬하게 공격하여 수십 명을 참살하고 죽었다.

- 삼국사기 열전  핍실 -


   이윽고 가서 보니, 실복은 가잠성() 남쪽 7리 지점까지 나와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제 이 흉악한 무리들은 비유하자면, 제비가 장막 위에 둥지를 틀고 물고기가 솥 안에서 노는 것과 같아서, 만 번 죽기로 싸워도 하루 사는 목숨 밖에 안 된다. 옛말에 ‘궁지에 몰린 도둑은 쫓지 말라.’고 하였으니, 좀 물렀다가 적이 극도로 피로해지기를 기다려 공격한다면 칼날에 피도 묻히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다.”

    모든 장수들이 그 말을 옳게 여겨 잠시 물러나려고 하는데, 유독 영윤만이 수긍하지 않고 싸우고자 하였다. 그의 종자가 여쭈었다.
“지금 여러 장수들이 어찌 모두 살기를 탐하며 죽기를 애석하게 여기는 무리이겠습니까? 조금 전의 의견이 옳다고 여긴 것은 적들의 틈을 엿보아 이익을 얻고자 함입니다. 그러므로 혼자 앞으로 나가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영윤이 말했다.
“전쟁에 임하여 용기가 없는 것은 『예경()』에서 경계한 바이고, 전진이 있을 뿐 후퇴하지 않는 것은 사졸로서 지켜야 할 당당한 본분이다. 장부가 일에 임해서는 스스로 결정할 것이지, 어찌 꼭 무리의 의견만을 따르겠는가?”
그리고 마침내 적진으로 달려가서 싸우다가 죽었다.

- 삼국사기 열전 김영윤 -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대문을 중심으로한 반란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대문은 사형을 당한다. 그러자 실복을 비롯한 고구려인들이  보덕성을 점령하고 격렬하게 저항했다. 그러나 결국 신라군에게 진압당하고, 고구려인들은 여러 곳으로 강제 이주 당하고 말았다.

 

 


3. 검모잠과 안승에 대한 단상


   2006년 kbs에서 대조영을 방영했었다. 그 드라마에서 검모잠의 마지막 장면이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안승의 계략에 넘어가 최후를 맞이햇던 검모잠의 비통한 절규는 압권이었다.

 

   " 네 이놈 안승아...니놈이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아느냐...너를 이 고구려국의 태왕으로 내세운 것은 죽은 이 땅에 살아있는 뜻을 세우게 위함이었다. 니 놈은 영달만을 쫓는 졸장부였다. 살아있는 이 땅에 죽은 나뭇가지만을 꽂아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고구려 부활을 위해 거대제국 당과 싸우고, 또 그러기 위해 한때의 적이었던 신라와도 손잡았던 검모잠. 그의 인생 최대의 실수는 졸장부 안승을 태왕으로 세운 것이었다.


   살아있는 이 땅에 죽은 나뭇가지만을 꽂아놓는 꼴이 되고 말았다는 드라마 속 검모잠의 절규는 670년 여름 피투성이가 되어 숨을 거두었던 검모잠의 절규였을 것이다. 그 검모잠의 저주를 받았던 안승.


   신라로 망명한 안승과 고구려인들은 이후 신라와 함께 당과 치열한 격전을 벌인다. 무수히 많은 고구려 전사들이 죽어갔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죽음이 고구려 부활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안승이었다. 그는 자신을 따랐던 고구려 전사들의 주인이 될 자질이 부족한 자였다. 674년 귀순한다는 의미의 보덕국왕에 자신을 봉할 때 문무왕에게 대들지 못했고. 680년 문무왕이 자신의 딸을 보내자, 이를 기뻐할 뿐, 고구려 부흥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지 못했다. 676년 사실상 당과의 전쟁이 종료되었기에 이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신라의 도움을 요구했어야 했지만 그는 그럴만한 베짱도 용기도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신라로 간 고구려인들의 처지는 삼국통일 전쟁 당시의 신라와 같았다. 삼국 통일 후 신라는 자신들이 당에게 이용당했고, 오히려 당이 자신들 마저 지배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당과 신라에서 신라와 고구려인으로 바뀌었을 뿐, 이용당하고 버려질 운명인 것은 고구려인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신라에는 용기와 의지가 있는 문무왕이 지도자였고, 고구려인에게는 영달만을 쫓는 죽은 나뭇가지 안승이 지도자라는 것이 달랐다. 지도자의 차이가 신라에게는 생존과 번영을 고구려인에게는 또하나의 좌절을 안겨주었다.


   683년 안승은 힘없이 경주로 끌려갔다. 그에게 걸맞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의 조카인 대문은 달랐다. 그의 몸속엔 그래도 고구려의 기개가 있었다. 대문은 약속을 버리고 고구려인들을 압살하려는 신라에 저항했다.


   684년 신라의 대군과 맞서는 고구려인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자신의 지도자 였던 안승에 대한 분노와 저주가 약속을 버린 신라에 대한 그것 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 고구려 땅에서 쓰러져 갔던, 그리고 지금도 싸우고 있는 동지들이 그리고 고구려의 광활한 땅이 그립지 않았을까


684년 10월의 익산은 고구려인들의 붉은 피와 한으로 뒤덮였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72


 

'우리 역사 바로알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발해의 건국   (0) 2015.05.05
고구려 부흥운동(4)  (0) 2015.05.05
고구려 부흥운동(2)  (0) 2015.05.05
고구려 부흥운동(1)  (0) 2015.05.05
돌궐 부흥운동  (0) 2015.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