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건국

2015. 5. 5. 10:27우리 역사 바로알기

 

 

 

 

발해의 건국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8 00:44

 

      

 

1. 대중상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 대중상의 행적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조대기에서 말한다 개화 27년(보장왕의 연호) 9월 21일 평양성 함락 때 진국장군 대중상은 서압록하를 지키다가 변을 듣고 마침내 무리를 이끌고 험한 길을 달려 개원을 지나는데, 소문을 듣고 따르겠다고 원하는 자 8000인이 재빨리 모여들어, 동쪽으로 동모산에 이르러 웅거했다. 성벽을 굳게하여 스스로 보존하고 나라를 후고구려라 칭하고 기원을 중광이라 하였다. 이르는 곳마다 격문을 전하니 원근의 뭇 성들은 귀속해 오는 곳이 많았다. 다만 옛 땅을 회복함을 자기의 임무로 삼다가 중광 32년 5월 대중상은 붕어하였다.

 

    환단고기의 내용을 정리하면 이렇다. 평양성 함락 당시 대중상은 서압록하 일대를 지키던 고구려 장수였다. 앞서 보았던 고당3차 전쟁 당시 고구려군은 압록강에서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고, 당은 이를 돌파하기 위해 수십 만 대군을 동원했다. 대중상은 그 압록강 방어선의 한 부분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압록강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평양성 마저 함락 당하자, 대중상은 당군을 피해 군사와 백성들을 이끌고 동모산으로 피신을 한 것으로 보인다. 669년 2월 이세적은 당고종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고구려 성들 중 아예 백성들을 이끌고 도망가 버린 성이 7개 정도 된다고 적었다. 그 7개 성중에 개시압홀 이라는 지명이 있기는 하지만 이것이 서압록하를 의미하는 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668년 고구려 멸망 당시 많은 고구려인들은 당군과 저항하거나, 당군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피신해 저항하는 길을 택했고, 대중상도 이런 고구려인들 중 한명이었다는 것이다.


   대중상은 고구려 부흥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앞에서 보았 듯 당은 고구려인의 강력한 저항, 돌궐의 부활과 토번의 침공 등으로 인해 고구려 고토를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다. 고구려 땅은 사실상 힘의 공백지대 였고, 외부와 내부의 조건이 맞아 떨어지면, 언제든 새로운 대국의 부활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은 다가왔다.

 

 


2. 대조영

  

    태자 조영은 부사를 따라 영주 계성으로부터 무리를 이끌고 당도하여 제위에 오르다. 홀한성을 쌓아 도읍을 옮기고 군 10만을 모집하여 위성은 크게 떨치었다. 곧 계책을 세우고 제도를 세워 당나라에 대항하여 적에 복수할 것을 스스로 맹세했다.

    말갈의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의 장수 이진영 손을 잡고 병력을 연합하여 크게 당나라 장군 이해고를 천문령에서 격파했다. 뭇 장수들을 나누어 군현을 지키며 유망민을 초무하고 정착을 널리 보호하고 크게 백성의 신망을 얻어 모든 기강을 새롭게 했다. 국호를 정하여 대진이라 하고 연호를 천통이라 하고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하니 땅은 6000리가 개척되었다. 


   환단고기는 대중상이 임종을 했을 당시 대조영이 영주에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대조영은 왜 영주에 갔던 것일까.


   앞에서 거란의 봉기를 설명하면서 당시 영주에는 당에 복속된 종족들로 구성된 기미주가 다수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거란, 말갈, 해족, 습족은 물론이고 영주로 강제 이주당한 고구려인들도 있었다. 대중상은 이들과의 연합을 위해 아들 대조영을 영주에 보낸 것으로 추정이 된다.


   환단고기는 대조영이 말갈 장수 걸사비우와 거란 장수 이진영과 손을 잡았다고 적고 있다. 이진영은 이진충과 손만영의 오기로 보인다. 즉 696년 5월 이진충의 봉기 당시에 대조영을 중심으로한 고구려 부흥군과 거란족이 연합전선을 구축했다는 것이다. 이는 충분한 개연성이 있다. 이진충이 있었던 영주는 서쪽으로는 당의 본토가 동쪽으로는 안동도호부가 있어 협공의 우려가 있었다. 이진충으로서는 안동도호부의 당군을 견제해줄 세력이 필요했다. 이는 대중상, 대조영 부자도 마찬가지였다. 고구려 부활을 위해서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고구려인들을 하나로 규합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당의 대군을 막아줄 바람막이가 필요했다. 대중상과 대조영은 그 바람막이로 이진충이 이끄는 거란족을 선택했다. 


    이처럼 696년 5월 당시 이진충과 대조영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했다. 두 세력의 동맹은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이진충의 거란족, 걸사비우의 말갈족, 대중상의 고구려 유민들이 연합봉기를 하자, 당은 당황했다. 측천무후는 이진충을 이진멸이라 고쳐 부르게 할 정도로 저주했으나, 말갈족과 고구려인들은 회유하고자 했다, 그들의 지도자인 걸사비우를 허국공, 대중상을 진국공에 봉한 것이 이를 말한다. 그러나 이런 회유책은 통하지 않았다. 고구려인과 말갈족은 요동 지역을 공략하며, 거란을 지원했다. 대중상은 이 무렵에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환단고기는 중광 32년 대중상이 세상을 떠났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중광 32년 서기 700년이 된다. 이는 다른 발해 관련 기록들과 맞지가 않다. 이 기록은 태백일사를 저술한 이맥의 착오가 아닐까 싶다.


    환단고기는 대조영이 홀한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군사 10만을 모으고 당에 대항해 복수할 것을 맹세했다고 적고 있다. 이 기록은 대조영이 거란족의 봉기 당시 각지에 산재해 있는 고구려인들을 규합해 안동도호부를 공략했음을 의미한다. 


    696년 11월 손만영은 안동도호부를 공략했는데, 청변도행군이 영주를 목표로 진군해 오자, 안동도호부 공략을 대조영에게 맡겼다. 이듬해 697년 청변도행구 대총관 무유의는 안동도호부 예하의 자사들과 장수, 부족에게 격려하는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안동도호 배현규에게는 서신을 보내지 못했다. 이는 안동도호부가 있는 신성이 고구려인에 의해 함락되었음을 의미한다. 


   고구려 부흥군의 기세는 맹렬했다. 돌궐의 도움을 받아 거란을 진압한 당은 고구려 부흥군을 다음 타켓으로 삼았다. 당은 항복한 거란 장수 이해고로 하여금 고구려 부흥군을 공격하게 했다.


   황장곡에서 당의 장수들을 처참하게 제압한 이해고였다. 이해고는 먼저 걸사비우가 이끄는 말갈족과 격돌해 걸사비우를 전사시켰다. 걸사비우와 말갈족의 희생으로 대조영은 천문령에서 진영을 구축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리고 천문령에서 고구려 복국의 운명을 건 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대조영은 당군을 대파했고, 이해고는 간신히 몸을 빠져 나와 목숨을 건졌다.


    천문령 전투는 698년 6월로 추정이 된다. 왜냐하면 당이 698년 6월 30일 안동도호부를 안동도독부로 축소시키는 조치를 단행했기 때문이다.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한 대조영은 대진국을 세웠다.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의 탄생이었다.

 

 


3. 환단고기 기록을 인용한 이유


   지금까지 발해 건국 과정을 다루었는데, 나는 여기서 환단고기를 인용하면서 설명했다. 문제는 환단고기가 진위논쟁 있는 사서라는 점이다. 어떤이는 환단고기를 역사서로 인정하지 않고 위서로 단정짓는다. 반면 어떤 이는 환단고기에 대한 강한 신뢰를 가지고 있다.


   내가 환단고기를 인용한 것은 발해와 관련된 기록이 너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해 건국 당시의 상황을 추론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부분은 과감하게 인용을 했다.


 

 

4. 대중상과 대조영 그리고 걸사비우에 대한 단상


   기록의 제한으로 이 세인물에 대한 서술을 간단하게 했다. 그러나 이 세인물은 발해 건국의 3걸이었다. 발해의 역사서가 남아있다면, 우리가 발해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세 인물의 발해 건국 서사의 웅장함을 느낄 수가 있었을 텐데 그렇지 못함이 아쉽다.


   대중상은 고구려의 장군이었다. 평양성이 점령당했던 668년의 가을. 대중상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동모산에 웅거했다. 그의 평생의 목표는 고구려의 자식들이 다시 나라를 영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대중상은 보장왕이 요동주도독 조선군왕에 677년 ㅡㅡㅡㅡ그와 내통한 말갈족 중의 한명이지 않았을까. 보장왕이 당에 소환되고, 고구려 부흥군이 하나둘 쓰러지던 상황 속에서도 대중상은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남쪽에서 안승의 보덕국이 신라에 의해 폐쇄되고, 고대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 많은 고구려인들이 쓰러졌다는 비보를 접했을 때도, 대중상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며 고구려 복국의 기회를 만들고자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런 의지의 사나이 대중상에게는 대조영과 말갈족의 지배자 걸사비우가 있었다. 거란족이 봉기한 696년 노령이었던 대중상은 이것이 바로 고구려 복국의 기회라고 여겼다. 그러나 자신이 전면에 나서기에는 세월이 너무 흘렀다. 대중상은 고구려 복국이라는 과제를 아들 대조영에게 물려주었다.


   대조영, 활과 말타기를 잘했던 그는 전형적인 고구려의 전사였다. 동시에 뛰어난 판단력과 지략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천문령 전투에서 당군을 격파하고, 이후 발해 건국 초의 혼란스런 정세속에서 발해를 키워나가는 모습에서 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는 아버지가 버텨온 와신상담의 세월을 옆에서 지켜본 아들이었다. 대조영은 거란의 나라를 세우겠다는 이진충과의 동맹을 성사시켰고, 고구려 복국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온몸을 걸었다.


   696년 이진충의 봉기는 새로운 시대의 서막과도 같았다. 이진충과 대조영은 자신들이 그 새로운 시대의 주인공이라 여겼다. 그러나 웅지를 이룬 것은 대조영이었다. 돌궐과 당이라는 두 대국의 협공으로 거란의 꿈은 짓밟히고, 당의 대군이 천문령까지 추격해 왔을 때, 대조영은 숨이 막힐 듯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아버지 대중상이 30년 동안 절치부심하며 키워왔던 고구려 복국의 꿈이, 고향을 되찾으려는 고구려인들의 열망이. 이루어지느냐 짓밟히느냐의 갈림길에 서있던 상황. 그리고 그 처절한 상황에서 대조영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천문령 대첩에서 이해고의 당군을 격파한 대조영. 모두의 운명을 건 극한의 승부에서 대조영과 고구려인들은 승리했고, 그 결과물이 바로 발해였다.


   그리고 걸사비우. 말갈족의 지배자. 말갈족은 우리 민족과 전혀 다른 존재가 아니다. 우리민족과 혈연관계에 있는 존재다. 말갈족의 후예인 만주족의 창세신화 천궁대전에서 만주족의 어머니 아부카허허의 우리말이 버들꽃 여신 즉 유화부인이다. 또한 말갈족은 오랜 세월 고구려에 복속되어, 고구려 백성으로 살았다. 일부에서는 말갈족이 수렵생활이나 유목생활을 하던 고구려인들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그 말갈족의 지배자가 바로 걸사비우였다. 걸사비우는 대중상, 대조영 부자 못지 않게 고구려 복국을 위해 모든 것을 던졌다. 당의 회유를 뿌리치고, 거란의 용장이자 이제는 당의 장수가 된 이해고와 용맹하게 싸웠다. 그의 희생으로 대조영은 당군을 상대할 시간을 벌 수 있었고, 천문령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대국 발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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