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대무예(1)

2015. 5. 5. 16:18우리 역사 바로알기

 

 

 

 

무왕 대무예(1)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10 14:25

 

      

 

1. 흑수말갈을 둘러싼 당과의 갈등


   719년 즉위한 무왕 대무예 강력한 대외확장 정책을 펼쳤다. 무왕의 확장정책을 환단고기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개마, 구다, 흑수의 여러 나라가 모두 신하가 될 것을 청하고 공물을 바쳤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그러나 흑수말갈이 문제였다. 발해의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 흑수말갈이 722년 당에 접근하기 시작한 것이다. 발해에 대해 압박의 강도를 높이고 있던 당은 이에 호응해 726년 흑수말갈의 땅에 흑수부를 설치하고 관리를 파견했다.


이것은 발해에게 중대한 위협이었다. 무왕은 신하들에게 자신이 느끼고 있는 위기감에 대해 이렇게 토로했다.

   흑수가 우리 국경을 거쳐서 처음으로 당과 서로 통했다. 지난날 흑수말갈이 돌궐에게 토둔을 청할 적에도 모두 우리에게 먼저 알리고 함께 갔었다. 이제 뜻밖에 바로 당에 벼슬을 청했으니, 이는 반드시 당과 공모해 앞뒤로 우리를 치려는 것이다.

- 구당서 -

 

    무왕은 이것이 당의 발해 압살 프로젝트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다. 상대의 공격 의도가 명확하다면 이쪽도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이치였다. 무왕은 668년 고구려 멸망 때처럼,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결성되는 것에 대한 대비부터 해야했다.


   727년 신라를 견제할 목적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일본에 대한 발해 외교의 목적은 일본이 신라를 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때 파견된 사신이 무관인 영원장군 고인의 였다는 것은 발해의 대일본 외교정책이 군사적 성격이 강했음을 의미한다.


신라에 대한 대비를 마무리한 무왕은 흑수말갈에 대한 공격을 결정했다.


 

 

2. 대무예와 대문예


   당이 흑수말갈 땅에 흑수부를 설치한 상황에서 흑수말갈을 공격한다는 것은 당과의 일전도 각오하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무왕의 결정에 동생이었던 대문예가 반대를 했다.


   흑수가 당의 벼슬을 청했다 해서 우리가 그를 친다면 이는 당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당은 대국으로서 군사가 우리의 1만 배나 되는데, 그들과 원한을 맺는다면 우리는 곧 망합니다. 지난날 고구려가 전성기일 때 군사 30만으로 당과 맞서 싸운 것은 영웅스럽고 굳세다 할만하지만, 당병이 한번 덮침에 땅을 쓴 듯이 멸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군사가 고구려에 비한다면 3분의 1에 지나지 않으니 그들을 어겨서는 안됩니다.

- 구당서 -


   대문예는 아직은 발해가 당과 일전을 벌이기에는 힘이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그 강력했던 고구려도 결국 당에게 무너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무왕 대무예의 생각은 달랐다. 대문예가 지적한 그 이유 때문에 발해가 선공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의 공격 의도가 명확한 상황에서 배후의 흑수말갈 문제를 처리하지 않는다면 협공을 당할 우려가 있었다. 당 - 신라 - 흑수말갈이 협공해서 발해를 공격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적극적 대응이 필요했다.


   무왕은 대문예의 반대를 일축하고 오히려 대문예와 장인 임아상으로 하여금 원정군을 지휘하게 했다. 그러나 대문예는 끝까지 원정을 반대했고, 이에 무왕은 대문예 대신 종형 대일하를 사령관에 임명하고 대문예를 소환했다. 원정을 반대하는 이에게 지휘를 맡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뜻밖의 상황이 전개된다. 대문예가 당으로 망명한 것이다. 도대체 왜?


 

 

3. 무왕 대무예와 현종 이융기


   대문예는 왜 당으로 망명한 것일까? 기록에는 무왕이 대문예를 죽이려 했다고 전하고 있다. 대외정책에 대한 이견의 차이로 인한 두 사람의 갈등이 그만큼 극단적이었던 것일까


   대무예와 대문예의 대립을 왕권대립의 결과로 보는 해석도 있다. 728년 무왕의 장자였던 대도리행이 세상을 떠나자, 당이 친당파였던 대문예를 발해왕으로 즉위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즉 728년 무왕의 흑수말갈 원정을 대문예가 반대한 것은, 당의 힘을 빌려 왕이 되고자 했기 때문이고, 무왕이 이를 알아차리고 대문예를 죽이려 하자 당으로 망명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둘의 대립을 당까지 개입된 왕권다툼으로 보기에는 흑수말갈 원정을 반대하는 대문예의 행보가 너무 절박하다. 대문예는 원정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흑수말갈의 경계에 가서도 전쟁을 반대했다. 만약 대문예가 당의 지원을 받고 왕위를 노렸다면 차라리 원정군을 이끌고 회군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고려 말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처럼 말이다.


   발해는 관련 사료가 적어서 도대체 무왕 대무예와 대문예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추론을 할 수 밖에 없다. 여기서 과감히 소설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려고 한다.


   당시 당과의 일전을 각오한 무왕의 결정에 대해서 온건파는 반대를 했을 것이다. 당에 숙위를 다녀왔던 대문예를 중심으로 온건파는 뭉쳤고, 그들은 무왕이 결정을 바꾸기를 요구했다. 그러나 무왕과 강경파의 의지는 단호했다. 726년 당이 흑수말갈에 관리를 파견하면서 시작된 발해 내부의 논쟁은 무왕이 온건파의 중심인 대문예를 자신의 장인인 임아상과 함께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하면서 일단락된다. 강경파가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전쟁이 발해에 재앙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 대문예는 흑수말갈과의 경계에서 공격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은 아닐까. 오히려 군대를 회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비슷한 경우가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이다. 최영은 요동정벌의 불가를 외치는 이성계를 오히려 요동정벌 사령관에 임명했다. 이성계는 출병 중에도 최영과 우왕에게 회군을 요청했고, 거부당하자 결국은 위화도에서 회군을 했다. 대문예도 마찬가지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대문예의 회군은 실패했다. 무왕의 장인인 임아상이 대문예의 회군을 저지했고, 쿠타타에 실패한 대문예는 어쩔 수 없이 당으로 망명했다. 이것이 무왕이 대문예를 죽이려했던 이유이며 줄기차게 당에 대문예의 송환을 요구한 이유는 아닐까?


   종형 대일하가 중심이 된 흑수말갈 원정에서 발해는 흑수말갈 복속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당과의 연결을 차단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흑수말갈 문제가 마무리 되자 무왕은 당 현종에게 강력하게 대문예를 죽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 현종은 대문예를 좌효위장군에 임명하고 안서에 보낸후 발해에는 영남으로 귀양보냈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문예가 영남에 가지 않음을 알아낸 무왕은 현종에게 "대국이 어찌 권모술수로 일을 처리하고 속이는가" 라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문원영화에는 이무렵 당 현종이 무왕 대무예에게 전한 국서가 전한다.

 


   홀한주자사()·발해군왕() 대무예()에게 칙서를 보낸다. 경이 형제지간에 서로 다툰 탓에 문예()가 곤궁하여 나에게 돌아왔으니 어찌 따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를 서쪽 변경에 둔 것은 경을 위한 까닭이었으니, 또한 잘못은 아니라고 할 수 있으며 자못 제자리를 얻은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경은 바다 모퉁이에 있으면서 당의 문화를 항상 익혔으니, 형제간의 우애 같은 것을 어찌 익힐 필요가 있겠는가? 골육간의 정은 깊어 스스로 차마하지 못하는 바이다. 문예가 비록 과오가 있더라도 또한 그 뉘우침을 받아들어야 할 것이다.

   경은 마침내(문예를) 데리고 동쪽으로 돌아가고자 요청하지만(그 의도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 같다. 짐은 효성와 우애로써 천하에 가르쳐왔으니 어찌 이런 일을 차마 들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경의 명성과 행실을 아까워하기 때문이지, 어찌 도망친 자를 보호하려는 것이겠는가? 경은 나라의 은혜를 모르고 마침내 짐을 배반하려고 한다. 경이 믿는 것은 멀리 있다는 것뿐이지,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짐은 근래 관용을 품고 중원을 보살펴왔다.(그러나 경이) 명령을 받들지 않으면 무슨 일이 언제인가 있게 될 것이지만, 경이 잘못을 뉘우치고 충성을 바친다면 전화위복이 될 것이다.(경은) 말은 공손하게 하면서도 뜻은 여전히 완미하여, 문예를 죽인 뒤에 귀국하겠다고 하니 이 무슨 말인가? 경의 표문을 보니 또한 충성스러움이 있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그렇게 믿기에) 용이하지 않다.

   지금 내사(使)를 보내어 짐의 생각을 알리되, 일일이 다 구술하도록 하였다. 경의 사신 이진언()도 짐이 친히 처분한 것은 모두다 알 것이다. 가을이 차가워지는데 경과 아관(), 수령(), 백성들은 모두 평안하기를. 아울러 최심읍()도 함께 동행해 보낸다. 편지를 보내지만 그 뜻이 다 미치지는 못한( 점을 양해바란)다.

[네이버 지식백과] 문원영화 발해서 (문화콘텐츠닷컴 (문화원형백과 해동성국 발해), 2004, 한국콘텐츠진흥원)


   이 국서에서 당 현종은 대문예 송환을 계속 요구할 경우, '무슨 일이 언제인가 있게 될 것' 이라며 무왕 대무예를 협박했다. 대문예를 죽일 수도 내놓을 수도 없음을 강력하게 밝힌 것이다.


   당이 이처럼 강경하게 대문예를 보호하는 이유는 명확했다. 당시 발해를 공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던 당의 입장에서 대문예는 중요한 정보원이었다. 현종은 고구려 멸망 당시 연남생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처럼 대문예를 활용하려고 하였다.


   당의 침략적 의도가 명확한 상황. 그리고 발해의 제1왕제이며 일급 정보를 알고 있는 대문예가 당 현종의 품에 있는 상황. 무왕은 더이상 당과의 충돌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무왕은 칼을 빼들었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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