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왕 대무예(2)

2015. 5. 5. 16:30우리 역사 바로알기

 

 

 
무왕 대무예(2)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13 09:09

 

 

      

1. 돌궐과 거란의 부활

   당과의 일전을 결심한 무왕은 돌궐 및 거란과 당의 대립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했다. 카파간 카간 사후, 혼란에 빠졌던 돌궐은 빌케 카간 노력으로 다시 중흥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돌궐 비문은 빌케 카간의 노력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하늘이 투르크 민족의 번영을 위해 (나에게) 카간 직위를 맡겼다. 굶주리고 헐벗은 백성이 카간이 됐도다. 우리 조상들이 힘겹게 성취하신 민족의 이름을 소멸시켜서는 안된다는 책임감으로 내 형제와 뜻을 함께 했도다. 투르크 민족을 위해 밤에는 자지 않고 낮에는 쉬지 않고 일했다. 퀼 테기과 샤드들과 함께 그토록 열심히 일했다."

 

 

    돌궐의 부활은 당으로서는 악재였고, 발해로서는 호재였다. 돌궐이 측면에서 당을 견제해 준다면, 발해로서는 당을 상대하기가 한결 수월했기 때문이다. 

   730년에는 거란의 실력자 가돌간이 송막군왕 이소고를 죽이고 돌궐과 연합해 당의 기미지배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발해 건국에 큰 영향을 주었던 돌궐과 거란이, 당과의 일전을 앞둔 시점에서 다시 부활한 것이다. 


   신라 견제를 목적으로 시작한 일본과의 외교도 이 시점에서는 성과를 거두기 시작했다. 731년 4월 일본이 신라를 공격한 것이다.

 

  

    4월 죄수를 사면하였다. 왕이 연로자에게 술과 음식을 하사했다.

일본국 병선 300척이 바다를 건너 우리의 동변을 침습하므로 왕이 장수와 병사를 출동시켜 대파하였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 30년 -

 

 

    이 시점이 중요한 것은 두달전인 731년 2월 당 현종이 신라 성덕왕에게 비단 2500필을 선물로 주는 등, 신라를 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발해와의 긴장이 고조되고, 돌궐과 거란이 부활하는 등, 주변 정세가 당에게 불리하게 돌아가자, 현종은 신라를 동맹국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조치를 취한 것이다. 그로부터 두달 후에 일본이 신라를 공격한 것은 신라에 대한 견제와 경고의 메시지가 될 수 있었다.


   주변 정세가 발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는 지금이 당과 일전을 치룰 기회라고 무왕은 생각했다. 732년 9월 무왕은 드디어 칼을 빼들었다.


 

 

2. 발해와 나당연합군의 충돌

 

   732년 3월 이의, 배요경, 조함장, 오승체 등의 당군이 해와 거란족을 공격해 큰 타격을 주었다. 해족  추장 이시쇄고 당에 투항했고, 가돌간은 잔여 무리를 이끌고 도망쳤다. 이로 인해 유주 전역이 당의 지배 하에 들어갔는데, 유주는 수와 당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전진기지 역할을 하던 곳이라는 점에서 발해에게는 위협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건국초 해와 거란의 반란으로 당의 압력을 피할 수 있었고, 해와 거란이 당의 기미지배를 받자, 위협을 받았던 발해로서는 당과의 일전을 미룰 수가 없었다.


   이것이 가돌간의 원조요청을 무왕이 받아들인 이유였다. 무왕은 과감한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732년 9월 대장 장문휴가 이끄는 발해 수군이 당이 등주를 기습 공격한 것이다.

   대장 장문휴를 보내 자사 위준을 죽이고, 등주와 동래를 취하여 성읍으로 삼았다. 당나라 왕 융기가 노하여 병사를 보냈으나 이기지 못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발해의 기습 공격에 당 현종은 경악했다. 설마 수군을 이용해 산둥반도 일대를 초토화시킬 것이라는 생각은 못했던 것이다. 현종은 즉각 반격에 나섰다. 현종은 신라에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  김유신의 손자 김윤중을 사령관으로 지목하면서 발해를 공격할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하여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5년만에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었다. 목표는 고구려의 후예 발해였다.

 

 

   당나라는 비밀히 신라와 약속하여 동남의 여러 군과 읍을 급습하여 천정군에 이르렀다. 제는 조서를 내려 보병과 기병 2만을 보내 이를 격파케 하였다. 이 때 신라와 당의 군사는 동사자가 아주 많았다. 이에 추격하여 하서의 이하에 이르러 국계를 정하니, 지금 강릉의 북이하가 그것이다. 해주 암연현은 동쪽으로 신라(新羅)와 접했는데 암연은 지금의 옹진이다. 이로부터 신라는 해마다 입공하고 임진강 이북의 제성은 모조리 우리에게 속했다. 다시 이듬해 당나라는 신라의 병사와 연합하여 침입하였으나 결국은 아무 공도 없이 물러났다.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결과는 대패였다. 당과 신라군은 발해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무왕은 승리의 여세를 몰아 윤3월 마도산까지 진격하였다.

 

이듬해 수비장수 연충린이 말갈병과 함께 요서의 대산의 남쪽에서 크게 당나라 군사를 격파하였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이에 당은 오승체가 휘하 병사를 거느리고 400리에 이르는 참호를 구축해 결사적으로 방어했고, 흑수말갈과 실위가 당을 지원했다. 이에 발해군은 철수하였다.


    732년 9월 발해의 등주 상륙 작전으로 시작된 발해와 나당연합군의 대결은 발해의 완승으로 끝나고 말았다. 당 현종은 발해의 강성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고, 무왕은 힘으로 발해의 존재를 입증했다.

 

 


3. 무왕에 대한 단상


   734년 돌궐의 빌게 카간이 독살되면서 돌궐은 다시 몰락의 길을 걸었다. 돌궐의 약화로 더이상 당을 견제할 수 없게 되자, 무왕은 당과의 화친을 도모했다. 발해의 강성함을 인정하고 있던 당 역시 이를 받아들이면서 두 대국은 공존의 길을 걸었다. 당의 압력에 맞서 발해의 강력함을 힘으로 입증한 무왕은 737년 세상을 떠났다. 환단고기는 그의 치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고 있다.

 

 

    5경 60주 1군 38현을 소유하니 그 원폭이 9,000리였다. 성대한 나라였다. 이 해 당나라 신라 및 왜도 나란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니 천하는 해동성국이라고 칭송했다. 이에 발해 사람 셋이면 한 마리 호랑이를 당한다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때의 군민은 화락하고 역사를 논하며 의를 즐겼다. 오곡은 풍성하고 사해는 안락했다. 대진육덕의 노래라는 것이 있어 이러한 대진국을 찬미했다. 다음해 3월 안민현에 감로가 내리다. 예관은 계장을 올려 하의할 것을 청하여 이에 따랐다. 이 달 16일 삼신일체의 상제를 서압록하의 강변에서 제사하였다. 서압록하는 고리(高離)의 옛 나라의 땅이다. 19년 제께서 붕어하시니 묘호(廟號)를 광종(光宗)이라 하고 시호(諡號)는 무황제라 했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무왕이 즉위했던 719년은 발해에게는 위기의 시간이었다. 돌궐의 내분, 해와 거란의 약세 등으로, 당의 압력으로부터 발해를 보호하던 방어막들이 모두 사라진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당시 당의 군주는 개원의 치를 이룩한 현종. 당의 압력이 증대되는 상황 속에서 군주의 자리에 오른 무왕의 임무는 발해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개국 보다 여러운 수성이 그에게 주어진 과제였다.


   결과적으로 무왕은 이 과제를 성공적으로 이루어냈다. 동북의 오랑캐들을 신하로 삼아 발해를 동방의 대국으로 만들었고, 나당연합군을 격파하고 당의 내륙까지 쳐들어가, 발해가 결코 만만치 않음 존재임을 당이 깨닫게 만들었다. 그는 무(武)라는 시호가 어울리는 군주였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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