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3장 동서전쟁

2015. 5. 10. 23:57우리 역사 바로알기

 

 

 

 

       제9편 삼국 혈전의 시작 제3장 동서전쟁 조선상고사 / 고전문집 

 

2012/12/31 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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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백제 王孫 薯童(서동)과 신라 공주 善花(선화)의 결혼

 

    기원 6 세기 하반에 백제 위덕왕 ( 威德王 ) 의 증손 서동 ( 薯童 ) 은 준수한 도련님으로 삼국 중에 크게 이름이 났었고 , 신라 진평왕 ( 眞平王 ) 의 둘째 따님은 삼국 중에 가장 이름난 어여쁜 아가씨였다 . 그런데 진평왕은 아들이 없고 딸만 몇을 낳은 가운데 선화가 꽃같이 어여 쁘므로 가장 사랑하여 “신라의 왕 된 것이 나의 자랑이 아니라 , 선화의 아버지된 것이 나의 자랑이다 .”라고 하며 늘 선화를 위해 사윗감을 구했는데 , 서동의 이름을 듣고는 선화의 남편으로 희망하였고 , 위덕왕은 그 증손 서동을 위해 증손부 ( 曾孫歸 ) 감을 구하였는데 , 또한 선화의 이름을 듣고 서동의 아내로 희망하였다 . 가족 제도의 시대라 한 가정의 어른 , 양편의 주혼자 ( 主婚者 ) 로서 하물며 각기 한 나라의 대왕으로서 이렇게 생각했다면 그 결혼이 물론 쉬웠을 것이지마는 그 결혼은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절대로 되지 않을 사정이 있었다 . 설혹 누가 그 결혼을 제의한다고 하더라도 진평왕이나 위덕왕이 반드시 크게 노하여 역적놈이라고 처벌할 만한 사정이 있었다 . 그것은 무슨 사정인가 하면 신라는 여러 대 이래로 박 ( 朴 ) · 석 ( 昔 ) · 김 ( 金 ) 세 성이 서로 결혼 하여 그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으로 왕위를 잇게 하여 왔으므로 , 타성의 딸은 혹 세 성의 집으로데려올수 있으나 , 세 성 집안의 딸은 타성에게로 시집가지 못하는 터이었다 . 그렇기 때문에 소지왕 ( 炤知王 ) 이 백제의 동성왕 ( 東城王 ) 에게 딸을 주었다고 하고 , 법흥왕 ( 法興王 ) 이 밈라가라의 가실왕 ( 嘉實王 ) 에게 누이동생을 주었다고 한 것은 실은 친딸 친누이동생이 아니라 , 육부 ( 六部 ) 귀골 ( 貴骨 ) 의 딸이나 누이동생을 준 것이었다 . 그러므로 김씨인 진평의 딸 선화의 장래 남편은 박씨가 아니면 석씨 , 석씨가 아니면 그 동성 김씨라야 하였으니 어찌 신라 사람도 아닌 백제의 부여씨 ( 扶餘氏 ) 서동의 아내가 될 수 있으랴 ? 이는 선화 편의 사정이거니와 , 백제는 신라처럼 결혼에 관하여 성자 ( 姓字 ) 에 엄격한 제한은 없으나 위덕왕의 아버지 성왕 ( 聖王 ) 을 죽인자가 누구인가 하면 , 곧 진평왕의 아버지인 진흥왕 ( 眞興王 ) 이요 , 진흥왕은 누구인가 하면 성왕의 사위였다 . 증손부 며느리 를 어디서 데려오지 못하여 아버지 죽인 원수의 5 녀를 데려오랴 ? 장인을 죽인 괴악한 사위의 손녀를 데려오랴 ? 엄중한 심리상 ( 心理上 ) 의 꾸중이 있으니 , 서동의 장래 아내가 백제의 목씨 ( 木氏 ) · 국씨 ( 國氏 ) 등 8 대성 (八大姓 ) 의 여자이거나 , 그렇지 않으면 민가의 여자는 될지언정 어찌 전대의 원수인 진흥왕의 자손이 될 수 있으랴 . 이것은 서동 편의 사정이었다 . 백제나 신라의 여러 신하들이 거의가 전쟁에서 서로 죽이던 이의 자손이라 모두 그 결혼을 반대할 것이었다 . 이것도 양편이 결혼할 수 없는 부속된 사정이었다 .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서동은 커갈수록 백제 왕가에 태어나지 않고 신라의 민가 자제로나 태어났더라면 선화의 얼굴이라도 한 번 바라볼 수 있을 것을 , 선화의 눈에 내 모습이라도 한 번 보여줄 수 있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아니하여 마침내 백제 왕궁에서 탈출하여 신라 동경 ( 東京 ), 지금의 경주 ( 慶州) 를 찾아갔다 . 가서는 머리를 깎고 어느 대사 ( 大師 ) 의 제자가 되었다 . 이때 신라에서는 불교를 존중하여 왕이나 왕의 가족들이 궁중에 중을 청하여 재도 올리고 백고좌 ( 百高座 ) 도 베풀고 이름난 중의 설법도 듣고 하는 때였으므로 , 서동은 법연 ( 法筵 ) 을 기회하여 오래 그리던 선화와 만날 길을 얻었다 . 만나서 두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선화는 백제의 서동이 사랑스러운 사나이라지만 아마 저 중만은 못할 것이다 하고 그날부터는 서동에 대한 생각을 버리고 중을 그리게 되었으며 , 서동 또한 “내가 네 남편이 되지 못할진대 죽어버리리라 . 너도 내 아내가 되지 않으려거든 죽어버리라 .” 하여 두 사람의 마음이 서로 맺어졌다 . 그래서 서동이 선화의 시녀에게 뇌물을 주어 밤을 타 선화의 궁에 들어가 사통하였다 . 선화는 서동이 아니고는 다른 여자의 남편이 되지 않으리라고 굳게 맹세를 하였지만 , 주위의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 데야 어찌하랴 ? 서동과 선화는 의논한 끝에 차라리 이 일을 드러내서 세상에 널리 알려 세상에서 허락하면 결혼하고 그렇게 되지 않으면 함께 죽기로 작정하고 , 서동이 가끔 엿이며 밤이며 그 밖의 여러 가지 과일을 많이 사가지고 거리로 돌아다니며 아이들을 꾀어 “선화 아가씨는 염통이 반쪽이라네 . 본래는 온통이었지만 반쪽은 떼어 서동에게 주고 반쪽은 남겨 가지고 있으나 상사병에 병들어 있다네 . 서동이여 , 어서 오소서 . 어서 와서 염통을 도로 주시어 선화 아가씨를 살리소서 ” 하고 노래부르게 하여 그 노래가 하루 아침에 신라 서울 동경 ( 東京 ) 에 쫙 퍼져서 모르는 이가 없게 되었다 . 그리고 선화는 아버지 진평왕에게 고백하고 , 서동은 귀국하여 증조부 위덕왕에게 바른대로 고하며 ,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 하면 죽기로 반대하였다 . 진평왕과 위덕왕은 처음에는 부모나 조부모 몰래 남녀가 사통한 것은 가정의 큰 변이라 하여 당장 사형에 처할 듯 했지마는 그러나 사랑하는 딸 사랑하는 손자를 어찌하랴 ? 진평왕은 박·석·김 세 성의 결혼 습관을 깨뜨리고 , 위덕왕은 아버지의 원수를 잊고 서동과 선화의 결혼을 허락하여 두 나라 왕실이 다시 새 사돈 사이가 되었다 .

 

 

2. 결혼후 10년 동안의 두 나라동맹

 

    두 사람이 결혼한 뒤에는 두 나라는 매우 친밀하게 지냈다 . 삼국사기에는 그러한 말이 없으니 , 그것은 신라가 나중에 고타소랑 ( 古陀炤 娘 ) 의 참혹한 죽음 ( 다음 절 참조 ) 으로 인하여 백제를 몹시 원망하여 백제를 토벌한 다음에 그러한 기록을 모두 태워버려서 신라 왕가의 여자로서 백제에 시집간 자취를 숨겨버린 때문이다 . 그러나 삼국유사에 의하면 서동이 선화공주의 아름다움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 서울에 가서 노래를 지어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했다고 하였다 , 여지승람 ( 輿地勝覽 ) 에는 무강왕 ( 武康王 ) 이 진평왕의 딸 선화 공주에 장가들어 용화산 ( 龍華山 ) 에 미륵사 ( 彌勒寺 ) 를 짓는데 진평왕이 여러 공인 ( 工人 ) 을 보내 도왔다고 하였으며 , 고려사 지리지에는 후조선 ( 後朝鮮 ) 무강왕 기준 ( 箕準 ) 의 능을 세상 사람들이 말통대왕 ( 末通大王 ) 의 능이라 한다고 하고 , 그 주 ( 註 ) 에 백제 무왕 ( 武王 ) 은 소명 ( 小名 ) 을 서동 ( 薯童 ) 이라 한다고 하였다 . 서동이 백제의 왕위를 물려받아 42 년 만에 돌아가서 시호를 무왕이라 하였으니 , 무강왕은 후조선의 기준이 아니 ' 라 무왕의 잘못이요 , 서동과 말통 ( 末通 ) 은 이두로 읽으면 서동의 서 ( 薯 ) 는 뜻을 취하고 동 ( 童 ) 은 음을 취하여 '마동'으로 읽을 것이요 말통 ( 末通 ) 두 글자가 다음으로 '마동'으로 읽을 것이므로 , 말통대왕 릉은 곧 무왕 서동과 선화공주를 합장 ( 合葬 ) 한 능이다 . 그런데 말통대왕이 왕이 된 뒤에 곧 신라와 혈전을 벌이게 되었으니 신라가 그 적국에 대해 백공을 보내서 절 짓는 것을 도왔을 리가 만무하다 . 미륵사의 건축은 대개 서동이 왕손 ( 王孫 ) 으로 있어 원당 ( 願堂 ) 으로 지은 것이 고 , 그 원당을 지을 때에는 신라 · 백제 두 사돈의 나라가 서로 환호하여 고구려에 대한 동맹국이 되었으므로 진평왕 원년 내지 24 년까지 , 곧 백제의 위덕왕 26 년 내지 45 년을 지나 혜왕 ( 惠王 ) 2 년과 법왕 ( 法王 ) 2 년을 거쳐 무왕 2 년까지는 신라와 백제 사이에 한 번도 전쟁이 없었고 , 또 두 나라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여 수 ( 隨 ) 에 사선을 보내서 고구려를 치기를 청하여 수의 문제 ( 文帝 ) · 양제 ( 煬帝 ) 두 대의 침입 ( 제10 편 참고 ) 을 일으키게 하였다 .

 

 

3. 同婚戰爭---龍春의 총애 다툼과 武王의 항전

 

    백제가 위덕왕 ( 威德王 ) 말년이거나 혜왕 ( 惠王 ) 법왕 ( 法王 ) 연간 , 곧 서동 ( 薯童 ) 이 왕증손 ( 王曾孫 ) 이었던 때이거나 왕손 ( 王孫 ) 또는 태자 ( 太子 ) 였을 때에는 늘 신라와 좋게 지내다가 무왕 ( 武王 ) 3 년 곧 서동이 왕이 된 뒤 3 년 ( 기원 602 년 ) 에 신라와 전쟁이 벌어져서 백제는 신라의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금의 雲峰 ) 을 치고 , 신라는 소타이(小陀 ) · 외석 ( 畏石 ) · 천산 ( 泉山 ) · 옹잠 ( 甕岑 : 지금의 德給山 ) 에 성책을 쌓아 백제를 막았다 . 백제는 좌평 ( 佐平 ) 해수 ( 解수 ) 로 하여금 네 성을 공격 하여 신라의 장군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과 격전을 벌여 이 뒤부터는 지금의 충청북도 충주 ( 忠州 ) · 괴산 ( 槐山 ) · 연풍 ( 延豊 ) · 보은 ( 報恩 ) 등지와 지금의 지 리산 좌우의 무주 ( 茂朱 ) · 용담 ( 龍澹 ) · 금산 ( 金山 ) · 지레 ( 知禮 ) 등지와 지금의 덕유산 동쪽 함양 ( 咸陽 ) · 운봉 ( 雲峰 ) · 안의 ( 安義 ) 등지에서 수없이 많은 생명과 재산을 버려 쇠가 쇠를 먹고 살이 살을 먹는 차극을 연출함에 이르렀다 . 진평왕은 무왕이 사랑하는 아내의 아버지니 속담에 아내에게 엎어지면 처가의 밭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였는데 , 무왕이 어찌하여 자기가 왕이 되어 정치의 세력을 잡자 도리어 그 유일한 애처의 아버지의 나라를 말뚝만큼도 여기지 아니하여 날마다 군사로써 유린하려 하였는가 ?

 

    신라에서 왕위를 박 · 석 · 김 세 성 이 서로 전하는 것은 그 시조 박혁거세 ( 朴赫居世 ) 때부터 확정된 명문 ( 明文 ) 의 헌법이 아니라 , 처음 에는박·석 두성이 서로 혼인하여 두성의 아들이나 사위만 왕이 될 권리를 가지다가 건국 3백 년쯤 후에 미추이사금 ( 味鄒尼師今 ) 이 김씨 로서 점해왕 ( 점解王 ) 의 사위가 돼서 두 성에 끼어들어 세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었으니 , 6백 년 후에 부여씨 ( 扶餘氏) 가 세 성에 끼어 네 성이 서로 전하는 판국이 되는 것이 무엇이 안 될 것인가 ? 백제의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물려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고 , 신라는 원래 아들이나 사위 중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전왕의 뒤를 이었는데 , 하물며 진평왕은 딸만 있고 아들이 없었으며 , 비록 맏딸 선덕 ( 善德 ) 이 있었지마는 그는 출가해서 여승 ( 女增 ) 이 되어 정치에 관여 하지 아니하니 , 선화가 둘째딸이지만 선화의 남편 무왕이 맏사위이므로 무왕이 신라의 왕위를 이어받을 권리가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이 두 가지 조건으로 무왕은 신라의 왕이 될 희망을 가졌었을 것이고 , 진평도 또한 왕위를 무왕에게 전해줄 생각을 가졌었을 것이다 . 만일 그렇게 되었더라면 박·석 · 김 ·부여 네 성이 서로 전해주는 판국이 되어 신라와 백제가 합쳐져서 한 나라가 되어 두 나라 인민의 뜻없는 혈전을 면했을 것이다 .

 

   백제에는 부여씨 아래 진 ( 眞 ) · 국 ( 國 ) · 해 ( 海 ) · 연 ( 燕 ) · 목 ( 木 ) · 백 ( 백 ) · 협 (협) 의 여덟 대가 ( 大家 ) 가 있었으나 , 실상은 부여씨가 정권을 독차지하여 고구려의 벌족공화 ( 關族共和 ) 와 다르고 , 신라는 원래 박 · 석 · 김 세 성의 공화 ( 共和 ) 의 나라였으나 , 이때는 김씨 한 집안이 거의 그 왕위 상속을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는 때였으므로 두 나라의 왕만 마음이 맞으면 양국의 결혼적 연합이 용이하였을 것이다 .

 

그러나 천하의 일이 어찌 그렇게 평순하게 진행되랴 ? 두 나라 여러 신하들은 거의 다 이를 반대했겠지마는 그 중에 가장 반대의 의견을 품은 이는 김용춘 ( 金龍春 ) 이었을 것이다 . 김용춘은 누구인가 ? 곧 진평왕의 셋째딸 문명 ( 文明 ) 의 남편이다 . 선화가 멀리 백제로 시집가서 떨어져 있으니 진평왕의 애정이 자연 이 문명에게 쏠리고 , 따라서 첫 째사위 선화의 남편 서동보다 둘째사위 용춘을 더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 용춘은 만일 신라의 왕위가 서동에게 가지 않으면 곧 자기에게 돌아올 필연성을 가졌으니 , 왕위가 서동에게 돌아가는 것을 반대하는 의견을 가지고 이를 저지하였을 것이다 . 그 반대가 성공하여 진평왕은 드디어 서동에게 왕위를 물려줄 생각을 끊고 , 그리고 출가해서 중이 된 맏딸 덕만 ( 德曼 ), 곧 선덕여대왕 ( 善德女大王 ) 을 불러다가 왕태녀 ( 王太女 ) 를 삼았다 . 그리고 왕은 용춘을 중히 써서 장래 명색은 선덕여왕이라도 실권은 용춘에게 있게 하였을 것이다 . 용춘에게 왕위 계승권을 주지 않고 덕만에게 준 것은 물론 서동의 감정을 융화시키려 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 그러나 서동도 총명한 인물이라 어찌 그런 수단에 속으랴 ? 그러므로 그는 즉위 후에 용춘을 죽이려고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였다 . 용춘이 처음에는 뒤에 숨어 진평왕의 참모가 되어 있다가 나중에는 내성사신 ( 內省私臣 ) 으로 대장군을 겸하여 직접 전선에 나타나서 악전고투가 해마다 계속되었으니 , 이것이 이른바 동서전쟁 ( 同壻戰爭 ) 이다 .

 

 

4. 同壻戰爭의 희생자

 

   이 전쟁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두 동서 사이의 신라 왕위의 쟁탈전이었으니 , 두 사람의 비열한 이기주의의 충돌에 지나지 않는 것이 지마는 명의는 국가와 민족의 흥망을 내걸어 피차 그 나라 안의 인심 을 고동 ( 鼓動 ) 하고 명예 와 벼슬로 결사의 군사를 동원하니 , 한편에 비애에 우는 인민이 있음에 불구하고 한편에는 공명에 춤추는 장수와 군사가 적지 아니하였다 . 그러므로 여지승람 ( 與地勝覽 ) 합천 ( 陜川 ) 부자연 ( 父子淵 ) 의 고적에 의하면 신라가 전쟁이 지루하게 오래 가서 민가의 장정들이 전쟁에 가면 몇 번을 돌아올 기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아니했는데 , 어떤 늙은 아버지가 여러 해 만에야 아들이 전장에서 돌아온다는 기별을 듣고 마중나가 이 소 ( 沼 ) 위의 바위 위에서 부자가 서로 껴안고 울며불며 오래 그리던 자애의 정희와 생활의 곤란을 하소연하다 바위 아래로 떨어져서 이 소에 장사지냈으므로 부자연 ( 父子淵 ) 이라 이름하였다고 했고 , 삼국사기 설씨녀전 ( 薛氏女傳 ) 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 설씨녀는 집이 가난하고 일가도 없었으나 얼굴이 아름답고 행실이 정숙하여 보는 사람이 모두 칭찬하고 부러워했지만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 진평왕 때의 그의 늙은 아버지가 먼 곳에 수자리를 가게 되어 그녀는 크게 걱정하고 이웃집 소년 가실 ( 嘉實 ) 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 가실은 자기가 대신 가기를 자청하였다 . 그녀의 아버지가이 말을 듣고크게 기뻐하며 가설과 딸을 결혼시키려고하니 그녀는 가실에게 전장에 가서 3 년이면 돌아올 것이니 돌아와서 결혼하자고 하므로 가실이 허락하고 자기의 말을 그녀에게 주고 , 훗날의 신표 ( 信表 ) 로 거울을 둘로 나누어 두 사람이 한쪽씩 가졌다 . 가실이 수자리를 나가서는 3 년을 곱하여 6 년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으므로 그녀의 아버지가 딸의 일을 민망하게 여겨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려고 하였다 . 그녀는 듣지 않았으나 아버지는 억지로 보내려고 하였다 . 그녀가 도망하려고 가실이 준 말을 타고서 막 떠나려고 하는데 이때 가실이 달려왔다 . 의복이 남루하고 형용이 여위어 알아볼 수 없게 되었다 . 가실이 깨어진 거울을 꺼내서 맞추어보고 서로 얼싸안고 울었다 . 이리하여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

 

위의 두 가지 기록이 비록 당시 전국시대의 정황 ( 情況 ) 의 만분의 일에 지나지 아니하나 또한 그때 인민들의 근심과 괴로움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하겠다 . 그러나 무사 ( 武士 ) 의 사회는 이와 전혀 다르니 아래 에 그 몇 가지를 기록하려고 한다 .

 

1) 귀산 ( 貴山 ) 은 파진간 ( 波珍干 ) 무은 ( 武殷 ) 의 아들이요 ,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었다 . 어릴 때 추항 ( 추項 ) 과 친하게 지내 함께 원광법사 ( 圓光法師 ) 에게 나아가서 가르침을 청하니 , 법사가 말하기를 “불교에 열 가지 계행 ( 戒行 ) 이 있는데 , 너희들은 남은 신하로서 그것을 받들어 행하지 못하려니와 화랑 ( 花郞 ) 의 다섯 가지 계행에 있어 임금을 충성으로 섬기며 아버지를 효도로 섬기며 벗을 믿음으로 사귀며 싸움에는 용감하게 나아가며 생물을 살상함에는 가려서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 너희는 이것을 받들어 행하여라 .” 하였다·진평대왕 ( 眞平大王 ) 건복 ( 建福 ) 19 년 ( 기원 602 년 ) 에 백제가 침노하여 아모산성 ( 阿母山城 : 지 금의 雲峰 ) 을 포위하고 공격 하므로 왕이 파진간 ( 波珍干 ) 건품 ( 乾品 ) · 무은 ( 武殷 ) 등을 보내서 방어하게 하였는데 귀산과 추항도 따라갔다 . 그런데 백제가 거짓 패하여 천산 ( 泉山 : 지금의 咸陽 ) 으로 퇴각하여 복병으로 신라의 추격하는 군사를 격파하고 쇠갈구리로 무은 ( 武殷 ) 을 얽어매어 사로잡으려 하였다 . 귀산이 “우리 스승이 나에게 가르치시기를 싸움에 용감하게 나아가라고 하셨으니 어찌 감히 물러나랴 .” 하고 추장과 함께 창을 들어 죽기로 싸워서 적 수십 명을 죽이고 , 아버지 무은을 구원하였는데금창 ( 金瘡 : 갈이나 창에 찔려서 난 상처 ) 이 온몸에 가득하여 중도에서 죽었다 .

 

2) 찬덕 ( 讚德 ) 은 모량부 ( 牟梁部 ) 사람이었는데 용기 와 절개가 있 었다 . 진평왕 건복 ( 建福 ) 27 년에 가잠성주 ( 가岑城主 ) 가 되었는데 , 이듬해 10 월에 백제가 공격해와서 포위당한 지 백여 일이 되었다 . 왕이 상주 ( 上州 ) · 하주 ( 下州 ) · 신주 ( 新州 ) 의 군사 5 만 명을 내어 가서 구원하게 하였으나 패하고 돌아갔다 . 찬덕이 분개하여 군사들에게 “세 주(州)의 군사가 적이 강함을 보고 진격하지 못하고 , 성이 위태로움을 보고도 구원하지 못하니 그것은 의 ( 義 ) 가 없는 것이다 . 의가 없이 사는 것은 의가 있게 죽는 것만 못하다 .” 하고 양식이 떨어지고 물이 없어 시체를 먹고 오줌을 마시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이듬해 정월에 다시 더 버틸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머리로 괴목 ( 塊木 ) 을 들이받아 골이 깨져서 죽었다 . 가잠성은 지금의 괴산 ( 槐山 ) 이니 , 괴산은 찬덕이 머리로 괴목을 받은 까닭으로 하여 생긴 이름이다 .

 

3) 해론 ( 奚論 ) 은 찬덕 ( 讚德 ) 의 아들이다 . 진평왕 건복 35 년에 금산당주 ( 金山幢主 ) 로서 한산주 ( 漢山州 ) 도독 ( 都督 ) 변품 ( 邊品 ) 과 함께 가잠성 ( 가岑城 ) 을 회복하려고 하였고 , 싸움이 시작되자 해론은 “여기는 우리 아버지가 전사하신 곳이다 .” 하고 단병 ( 短兵 ) 으로 달려나가서 적 몇 사람을 죽이고 죽었다-시인들이 장가 ( 長歌 ) 를 지어 그를 조상하였다 .

 

4) 눌최 ( 訥催 ) 는 사량부 ( 沙梁部 ) 사람이다.-진평왕 건복 41 년( 기원 614 년 ) 에 백제의 대군이 침입하여 속함 ( 速含 ) · 앵잠 ( 櫻岑 ) · 기잠 ( 岐岑 ) · 봉잠 ( 峰岑 ) · 기현 ( 旗縣 ) · 용책 ( 冗柵 ) 등 여섯 성을 공격하므로 왕이 상주 · 하주 · 귀당 ( 貴幢 ) · 법당 ( 法幢 ) · 서당 ( 誓幢 ) 의 다섯 군사에 명하여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 다섯 장군은 백제의 진영이 당당함을 보고 감히 나아가지 못하였는데 그 중의 한 장군이 말했다 . “대왕께서 오군 ( 五軍 ) 을 우리 여러 장군에게 맡기시어 나라의 존망 ( 存亡 ) 이 이 싸움에 달려 있지마는 가하면 나아가고 어려우면 물러나라는 것이 병가 ( 兵家 ) 에서 이르는 말입니다 . 이제 적의 형세가 저렇듯 강성하니 만일 나아갔다가 패하면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 ”모두들 그 말이 옳다하여 돌아가기로하였는데 너무 면목이 없어서 노진성 ( 奴珍城 ) 을 쌓고 돌아갔다 . 이에 백제는 더욱 급히 공격하여 속함·기잠·용책 세 성을 함락시켰다 . 눌최는 앵잠·봉잠·기현 세 성을 굳게 지키다가 다섯 장군이 다 돌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분개 하여 군사들을 돌아보고 “봄이 되면 초목이 다 무성해지지마는 겨울이 되면 소나무 잣나무만이 홀로 푸르다 . 이제 구원병은 없고 세 성이 심히 위태로우니 , 이는 지사 ( 志士 ) 와 의부 ( 義夫 ) 가 절개를 세울 때이다 . 너희들은 어찌하려느냐 ? ” 사졸들이 다 눈물을 뿌리며 함께 죽기를 맹세하였다 . 성이 함락되고 살아남은 사람이 몇 못 되었지만 끝까지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

 

    이상 네 전쟁은 곧 신라의 파진간이며 도독이며 다섯 장군들이 출동한 동서전쟁에 관한 충신 의사의 약사 ( 略史 ) 이다 . 백제에 있어서는 큰 전쟁이었으므로 역사에 특기한 것이고 , 이 밖에도 자질구레한 싸움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 백제사 ( 百濟史 ) 는 거의 다 없어져서 알 수 없게 되었으나 백제가 신라보다 강하고 사나운 호전국 ( 好戰國 ) 이었으니 그 희생된 충신 의사도 신라보다 많았을 것이다 . 그러나 두 동서 , 곧 두 개인의 이기주의를 성취하기 위하여 수많은 인민을 죽이는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이니 이 시대의 충신 의사도 또한 가치없는 충신 의사들이라 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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