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왕 대조영

2015. 5. 5. 10:35우리 역사 바로알기

 

 

 

 

고왕 대조영 | 역사에 관하여

 

대연림 2014.12.09 13:34

 

      

1. 당과 돌궐의 대립


   698년 6월 천문령에서 이해고의 당군을 전멸시키고 대조영은 대진국 건국을 선포했다.(이후 국호를 발해로 바꾸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당이 동방에 고구려의 자식들이 나라를 유지하는 것을 용납할리 없다는 사실을 대조영은 잘 알고 있었다. 당의 추가 침입을 막을 방책을 강구해야 했다. 그런데 뜻밖에 소식이 들려왔다. 돌궐이 당을 공격한 것이다.


   거란의 꿈을 짓밟는데 힘을 함쳤던 두 대국은 왜 충돌을 했을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카파간 카간이 측천무후에게 보낸 선전문에 언급되어 있다.

 

   우리에게 삶은 곡식 종자를 주어서 심어도 싹이 트지 않았으니 첫째 이유다.

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은 모두 거리에 넘쳐나는 것으로 진귀한 물건이 아니니 둘째 이유다.

내가 당의 사신에게 준 붉은 자색 옷을 모두 빼앗았으니 셋째 이유다.

너희가 보낸 명주와 비단이 모두 거칠고 품질이 나쁘니 넷째 이유다.

나 카간의 딸은 마땅히 천자의 아들에게 출가해야 하는데, 무씨는 소성으로 우리 가문의 짝이 될 수 없는데도 속여 혼인하려 했으니 다섯째 이유다.

나는 이러한 이유로 군사를 일으켜 하북을 빼앗고자 할 뿐이다.


 

    카파간 카간이 분노한 이유는 당이 불량한 물자를 돌궐에 제공했기 때문이었다. 697년 3월에 돌궐은 군대를 당에 제공하는 대가로 막대한 생활물자를 요구했다. 이에 따라 제공된 물자가 불량이었던 것이다. 능멸당했다고 생각한 카파간 카간은 분노했고, 측천무후는 당황했다. 측천무후는 무중규를 천변중도 대총관으로, 사타충의를 천병서도 총관으로 삼아 30만을 동원하여 돌궐을 방어하게 했다.


   그러나 698년 8월 28일 돌궐은 정주를 함락하여 정주자사 손언고를 비롯한 관리 수천을 살해했고, 9월 11일에는 조주를 점령해 조주자사 고예를 죽였다. 돌궐의 파상 공세에 측천무후는 자신이 폐위했던 아들 중종을 황태자로 삼고 하북도행군 원수에 임명해 돌궐을 토벌토록 했다.


   그러나 당군은 돌궐군을 두려워 하고 있었다. 점령 지역에서 약탈을 마치고 철수하는 카파간 카간의 돌궐 군대를 보고도 적인걸과 사타충의는 감히 접근을 하지 못했고, 당이 하북도는 폐허가 되었다.


   돌궐의 공세는 당으로 하여금 발해에 신경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발해에게는 호재였다. 대조영은 이 귀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


 

 

2. 발해의 성장


   당이 동방에 신경을 못쓰는 지금이 발해의 힘을 키울 시간이었다. 당이 어쩌지 못할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갖춰야 한다. 대조영은 이렇게 판단했다. 대조영은 먼저 돌궐과 외교관계를 맺었다. 당과 필적할 수있는 대국인 돌궐을 이용해 당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어 대조영은 빠른 속도로 고구려의 고토를 수복했다. 발해고는 대조영이 부여, 옥저, 고조선, 변한 등 바다 북쪽의 10여국을 정복해 나라 땅은 사방 5천리에 달하고 정예 병사가 수만 명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런 발해의 성장세는 돌궐의 공세로 곤란을 겪고 있던 당으로 하여금 발해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다. 702년 소그드족이 돌궐에 복속되면서 실크로드의 교역로가 위협받은 당은 704년 사사충의 8만 군대 마저 격파당하자, 위기감이 더욱 증폭되었다. 결국 측천무후 실각 후 재위에 오른 중종은 발해의 존재를 인정하고 회유하는 자세를 취했다. 발해를 이용해 돌궐을 견제하려는 생각에서 였다. 705년 당의 사신이 발해에 도착했다. 대조영은 둘째 아들인 대문예를 당에 보내 이에 응했다.


   대문예는 이때부터 한동안 숙위로써 당에 머물렀다. 숙위란 당 황제를 호위하기 위해 머무르는 외국 귀족으로 인질과 다름이 없었다. 왜 대조영은 둘째 아들 대문예를 당에 보냈을까? 705년 당시 발해의 국력은 아직은 미약했다. 건국 이후 꾸준히 영토를 확대하고 정력적으로 부국강병에 매달리고 있던 상황이었지만 아직은 당에 날을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또한 발해가 돌궐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돌궐 역시 믿을 수 있는 상대는 아니었다. 거란족을 짓밟은 것이 바로 돌궐이 아니었던가. 대조영은 당과의 충돌도 방지하고, 돌궐도 견할 목적으로 둘째아들 대문예를 당에 보낸 것이었다. 또한 숙위는 상대국의 정세를 파악하는 정보원의 역할도 할 수 있다. 대조영은 이런 이유들로 당과 외교관계를 맺은 것이다.

 


 

3. 카파간 카간과 대조영의 죽음


   당 중종은 카파간 카간의 공세에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카파간을 제거하는 자를 왕으로 책봉하고 2천필의 비단을 상으로 주겠다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돌궐의 공세는 위력적이었고 당은 수세에 몰려 있었다.


   돌궐을 위기에 빠트린 것은 내분이었다. 카파간 카간의 철권 통치에 반발한 복속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711년 투르기스, 카를룩 부족 등이 반란을 일으켰고, 713년 무렵에야 진압에 성공했다. 돌궐의 혼란은 당에게는 기회였다. 당 현종은 712년 돌궐에 복속되어 있던 해족을 공격했다. 요서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세우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군은 냉형에서 전멸하는 대패를 당했다. 


   이에 당은 돌궐, 거란, 해족 등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발해에 손을 뻗었다. 713년 발해에 낭장 최흔을 파견해 대조영을 <발해군왕 겸 홀한주도독>에 임명했다. 당이 발해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이에 대해 북한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에서 편찬한 발해사는 이렇게 평가한다.

 

    당나라 통치배들이 당당한 동방의 독립국가인 발해의 국왕에게 무슨 <발해국왕> 이니 <홀한주도독>이니 하는 따위의 칭호를 주었다는 사실은 매우 거만하고 주제넘는 행위였다. 그것은 대국으로 자처한 당나라 임금들이 주변 나라들에 대하여 써온 상투적인 수법이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통하여 곤경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이전에는 적대시하던 다른 나라들에 도리어 지원을 애걸하는 그들의 가련한 몰골을 찾아볼 수 있었다.


   북한학계의 평처럼 당의 조치는 거만하고 주제넘었다. 713년 자신을 발해군왕에 봉한다는 국서를 읊어대는 당나라 사신을 바라보는 대조영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동시에 대조영은 당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당시 돌궐과 당은 전쟁 중이었고, 해와 거란족이 모두 돌궐의 편에 서 있어 당에서 발해로 오는 길인 영주길은 사실망 막혀 있었다. 즉 당의 사신은 바닷길을 선택해 산동반도 등주 지방을 출발한 후, 요동반도 포구를 거쳐, 압록강으로 해서 발해로 와야 했다. 이 길 자체는 험난하고 위험했다. 이런 고생을 하며 당의 사신이 발해에 온 이유는 단순한 군왕책봉 때문이 아니었다.


   당이 원하는 것은 거란과 해족등을 공격할 때 발해의 원조였다. 그러나 대조영은 이들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714년 난수에서 설눌이 이끄는 당군이 거란군의 매복에 걸려 전멸에 가까운 참패를 당할 때 대조영은 개입하지 않고 내치에 힘썼다.


   발해는 움직이지 않고, 돌궐의 공세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 당 현종의 위기감은 극에 달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돌궐의 내분이 당을 구했다. 715년 오구즈족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오구즈족은 돌궐제국 재건에 중심역할을 했던 민족이라는 점에서 돌궐제국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결국 오구즈족의 반란으로 카파간은 716년 살해당하고 말았다. 카파간 사후 돌궐은 내전에 휩싸였고, 자연스럽게 돌궐과의 대립은 정리되었다.


   돌궐이 혼란에 빠지자 복속되어 있던 거란족은 당에 귀부했다. 이에 당은 716년 송막도독부를 부활시키고 이실활을 송막군왕 겸 송막도독에 임명했다. 이제 남은 것은 발해였다. 717년 당 현종은 영주 유성현에 영주도독부를 다시 설치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간단했다. 당의 다음 목표는 바로 발해라는 것이었다.


   대조영은 이제 올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당은 결코 동방에 고구려의 자식들이 나라를 세우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이날을 대비해 지금까지 힘을 길러왔다. 그러나 대조영은 불안했다. 과연 당을 감당할 수 있을까? 이 위기만 넘긴다면 발해는 고구려의 옛 땅을 호령하며 대국으로 발돋움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패한다면... 그것은 정말 상상하기 싫었다.


   고뇌와 번민에 휩싸였던 대조영은 719년 눈을 감았다. 아들 대무예에게 당의 거센 도전을 막아야 한다는 어려운 유산을 남기고


천통 21년 봄 대안전에서 돌아가시니 묘호를 태조라 하고 시호를 성무고황제라 하였다.

- 환단고기 태백일사 대진국 본기 - 


 

 

4. 카파간 카간과 대조영에 대한 단상


   카파간 카간. 중국 사서에는 묵철 가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691년 일테리쉬 카간이 죽고 즉위한 그는 즉위 기간 내내 당에 맹공을 펼치며, 돌궐의 위세를 떨쳤다.


   대조영의 일생에서 카파간 카간은 어떤 존재일까? 그와 돌궐제국이 당에 맹공을 펼쳤기에, 대조영의 고구려 부흥운동은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그러나 카파간 카간이 대조영의 동업자였던 거란족을 공격하면서, 대조영은 위기에 빠졌다. 하지만 카파간 카간이 당에 대해 분노에 찬 공격을 했기에 신생국가 발해는 자리를 잡을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건국 직후 당의 추가 공세가 예상되던 상황에서 대조영이 도움을 바랄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돌궐의 카파간 카간 뿐이었다.


   716년 카파간 카간이 오구즈족의 일파인 바이르쿠 족의 계략에 빠져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대조영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자신과 동시대를 살았고, 비슷한 연배일 수도 있는, 천하를 호령했던 한 남자의 죽음에 비통함을 느끼지 않았을까. 그리고 자신의 시대도 저물고 있음을 깨닫지 않았을까.


   그러나 발해를 세운 고왕 대조영은 그런 비통함을 넘어서는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때마침 거란족이 당에 귀부하자, 이제 당의 압박이 본격화 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발해에 진정한 위기가 찾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번 위기는 대조영의 몫이 아니었다. 그 위기를 감당하고 극복해야 하는 운명은 대조영의 큰아들 대무예의 몫이었다. 대조영은 아들에게 어렵고 위험한 유산을 남긴채 719년 대안전에서 숨을 거두었다. 폐허의 땅에서 고구려의 자식들을 위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운 영웅의 죽음이었다.

 

ㅡ 다음 블로그 <연림잡필>  대연림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http://blog.daum.net/daeyunrim/7020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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