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동설화

2015. 5. 11. 00:22우리 역사 바로알기

 

 

 

 

 

       서동설화 설화 / 고전문학

2013/01/03 2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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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동설화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이다. 그 모친이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던 중, 그 곳의 용()과 교통(交通)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명(兒名)을 서동(薯童)이라 하였는데, 그 도량(度量)이 커서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항상 마[서예; 薯蕷]를 캐어 팔아서 생활을 하였으므로, 국인(國人)이 이에 의하여 이름을 지었다.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공주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서동은 머리를 깎고 서울로 갔다. 동네 아이들에게 마를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서 따르게 되었다. 이에 동요(童謠)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였는데, 그 노래에 선화 공주님은 남몰래 얼어 두고 서동방(薯童房)을 밤에 몰래 안고 가다.”라 하였다. 동요가 서울에 퍼져 대궐에까지 알려지니, 백관(百官)이 임금에게 극간(極諫)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 보내게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할 때, 왕후(王后)가 순금 한 말을 노자로 주었다. 공주가 귀양처로 가는데, 서동이 도중에서 나와 맞이하여 시위(侍衛)하여 가고자 하였다. 공주는 그가 어디서 온지는 모르나, 믿고 기뻐하여 그를 따르게 되었다. 그 후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고 동요의 내용이 그대로 맞은 것을 알았다.

   

  백제로 와서 어머니가 준 금을 내어 생계를 꾀하려 하니, 서동이 크게 웃으며 이것이 무엇이냐?” 하였다. 공주가 이것은 황금이니 가히 백 년의 부()를 이룰 것이다.” 하니, 서동은 내가 어려서부터 마를 파던 곳에 흙과 같이 쌓아 놓았다.” 하였다. 공주가 듣고 크게 놀라, “그것은 천하의 지보(至寶), 지금 그 소재(所在)를 알거든 그 보물을 가져다 부모님 궁전(宮殿)에 보내는 것이 어떠하냐?”고 하였다. 서동이 좋다 하여 금을 모아 구릉(丘陵)과 같이 쌓아 놓고 용화산(龍華山) 사자사(獅子寺)의 지명 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금 수송의 방책을 물었다. 법사(法師)내가 신력(神力)으로써 보낼 터이니 금을 가져오라.” 하였다. 공주가 편지를 써서 금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앞에 갖다 놓으니, 법사가 신력으로 하룻밤 사이에 신라 궁중에 갖다 두었다. 진평왕이 그 신비한 변화를 이상히 여겨 더욱 존경하며 항상 편지를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서동이 이로부터 인심을 얻어 왕위에 올랐다.

  하루는 왕이 부인과 함게 사자사에 가다가 용화산 아래의 큰 못가에 이르자, 못 가운데서 미륵 삼존(彌勒三尊)이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경례(敬禮)하였다. 이를 보고 부인은 그 곳에 큰 절을 세우면 좋겠다고 하였다. 왕이 허락하고 지명(知命)에게 가서 못을 메울 것을 물었더니, 신력으로 하룻밤에 산을 무너뜨려 평지를 만들었다. 미륵 삼상(彌勒三象)과 회전(會殿), (),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액호(額號)를 미륵사(彌勒寺)라 하니, 진평왕은 백공(百工)을 보내서 도왔다. 지금까지 그 절이 남아 있다.

   

   

어휘풀이

* (): 원문에 지룡(池龍)’이라고 되어 있는데 지렁이를 그렇게 표기했다고 볼 수도 있음

* 교통(交通): 성행위를 하는 관계를 가짐

* 아명(兒名): 아이 때의 이름

* 서동(薯童): ‘이니 마동또는 마퉁이라고 읽어야 함

* 진평왕(眞平王): 신라 제 26대 왕, 진흥왕의 손자

* 백관(百官): 모든 벼슬아치

* 극간(極諫): 온 힘을 다하여 간함

* 시위(侍衛): 모시어 호위함

* 지보(至寶): 귀중한 보물

* 구릉(丘陵): 언덕

   

   

핵심정리

* 갈래: 사원연기설화

* 연대: 신라 진평왕 때(599년 이전)

* 성격: 주술적, 예언적, 신화적

* 주제: 민중적 영웅의 참요(讖謠)를 통해 욕구의 실현과 왕으로의 등극

* 출전: <삼국유사> 2, 무왕(武王)

* 의의: 향가 서동요의 배경 설화, 영웅 설화의 원형을 지니고 있는 설화

   

   

   

소재의 상징성

   이 설화에서 나타나는 금()은 비범한 인물을 나타내는 표지이며, 나아가 신성한 지위나 왕권과 관련되었음을 보여준다. 또 경제적인 부를 가리킨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금은 태양, , 천국, 여원, 영생, 신성, 명예, 위엄, 횡재 등을 의미하고 있었다. 이 설화에서 우리는 보화를 대표하는 금의 획득이 한 인물의 현실적인 지위의 상승이나 명예의 획득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예를 이성계의 등극과 관련된 이야기에서 이성계가 금척(金尺)을 받는데서도 볼 수 있다.

   

해설 1

   이 설화도 사실은 노래 [서동요]의 배경설화로 더 알려져 있다. [서동요]는 당시 신라와 백제의 관계로 보아 백제왕인 무왕의 작품이라기보다는 민요라는 해석이 뒤따르지만 동요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 당시 어린이들의 동요가 이렇게 성숙한 내용과 동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7세기 신라문학이 이미 원숙해 있다는 것을 설명해 주는 것이다.

   

   서동은 그의 어머니와 못의 용()이 정을 통하여 낳았다. 여기에서 용과의 사이에서 낳은 것은 비범한 영웅의 탄생을 위한 설화적 윤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영웅은 평범한 인물처럼 인간들 사이에서 태어날 수 없다는 인식이 이러한 구성을 하게 한 것이다. 이를 이물 교접 설화(異物交接說話)라고 한다. 또 서동의 탄생은 소위 야래자(夜來者)형 설화'하고도 일치한다. 야래자(夜來者)형 설화'에 대하여는 본서에 실린 내용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후백제의 견훤도 실은 사람과 지렁이의 교혼(交婚)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선조도 용과의 교혼(交婚)에서 태어났다. 따라서 이렇게 탄생한 서동은 평범할 수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미리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의 현대적 표현이 이른바 태몽이 될 것이다.

   

   비범한 인물로서의 서동이 맨 처음 착수한 것으로 나타난 것은 가정을 만드는 일이었다. 그는 당시 신라에서 가장 미모의 여인인 선화 공주(善化公主)를 아내로 삼기 위하여 동요를 지어 퍼뜨렸다. 이것이 [서동요]이다. [서동요]에서 고유 명사를 빼놓고 본다면 여자가 남자와 남몰래 사랑을 맺어 두고, 밤이면 남자에게 안겨 간다는 말로 되어 있다. 공연한 말이라도 소문으로 굳어지면 결과가 그렇게 되게 마련이라는 점을 노린 노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자는 지체가 높은 공주이고, 상대편인 남자는 미천한 신분의 서동이다. 허용될 수 없는 관계의 남녀가 결합하는 기본 인식은 굳어진 신분 체계의 장벽을 허물어뜨리고자 하는 발상에서라고 할 수 있다.

   

   공주와 결혼한 서동은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금()을 지명법사의 신력을 빌어 진평왕에게 보내고, 부부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받는다. 여기에서 금()을 보내는 것은 웃사람을 받들 줄 아는 예절을 지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화 공주를 맞이하기만 하면 된다는 이기적 사고에서 주위와의 관계를 인식하는 사회적 인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것이다. 이 변모에의 바탕 위에서 서동은 왕위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이 변모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선화 공주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선화 공주는 깨닫지 못한 중생을 선화하는 보살의 이미지를 가진 인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설화의 후반은 미륵사 창건의 연기 설화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 설화가 <삼국유사>에 기록될 수 있었던 까닭도 불사(佛寺)와의 연관을 맺는 후반부의 이야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앞 부분에서 개인적 시각에서 사회적인 것으로 시야를 넓힌 서동은 이 단락에 이르러 중생을 제도하는 차원 높은 종교적 세계로 개안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서동 설화는 한 인간이 보다 차원 높은 세계로 성숙해 가는 모습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설화는 철저하게 민중적이다. 이 설화에는 영웅의 힘을 발휘하게 하는 고난이나 불행 이야기가 없다. 따라서 영웅담에 입각한 귀족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서동이 어려서 마를 캐어 팔아 생활하는 것은 민중의 고난에 찬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설화는 민중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려서의 고난을 '영웅의 시련'이라고 본다면 이 설화도 영웅의 일생'을 밟는 설화라고 할 수 있다.

   

   

해설 2

   서동 설화는, 내용상으로는 한 미천한 소년이 일종의 참요(讖謠)를 사용하여 공주와 사랑을 이룬다는 동화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영웅 설화의 원형을 짐작할 수 있다. , 서동은 용()의 아들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백제 지역에 전해지는 설화와 신라 지역의 노래가 합쳐진 것으로 보여지는 이 설화는 설화 자체보다는 서동요라는 4구체 향가의 배경 설화로 더 알려져 있다. 그러나 서동요의 유래담으로 보기에는 지나치게 설화가 완결되어 있는 노래와 설화가 결합된 것으로 보는 견해가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애초에 남녀 결합을 핵심으로 하는 민담이 점차 역사의 특정 인물, 무강왕(武康王), 무왕(武王), 선화공주(善化公主), 진평왕결부되고 그러면서 사적[남지(南池), 미륵사(彌勒寺)] 등 증거물을 확보해 가면서 전설화되었고, 이것이 사실화되어 기록에는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설화는 크게 서동의 출생담, 서동의 결연담, 서동의 등극담, 사찰 연기담의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들 요소의 강조에 따라 민중적 영웅의 일생담, 사찰 연기 설화, 양자가 복합된 설화로 분류되고 있다. 한편 신화 제의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마한계의 수부지모형(水父地母型) 신화로 보는 견해와 성년식의 통과제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서동의 역사적 정체는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아 백제 무녕왕설, 동성왕설, 원효설 등이 제시되고 있다.

   

   서동 설화는 용자(龍子)로 태어나서 고난을 극복하고 왕위에 오른다는 영웅 설화의 공식적인 과정을 밟는다. 삽입된 서동요는 이러한 성공의 열쇠 구실을 한다. 또한 서동요는 내용상으로 재기 발랄하고 야심 많은 젊은이가 몽환적(夢幻的) 사랑을 재치와 기지로 현실화시키는, 한 영웅의 일대기 가운데에서 차지하는 에피소드로 이해할 수도 있다. 이 설화에서 우리는 영웅 설화의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무왕(武王, ?-641)

   백제 제 30대 왕. 재위 600-641. 이름은 장().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략했고, 고구려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수와 그 다음의 당에 조공(朝貢)하였으며 만년에는 궁성 남쪽에 연못을 파고 유흥지로 삼는 등 사치와 유흥을 일삼았다.

   

백제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말자(末子, 막둥)"였다. 무왕을 말통대왕(末通大王)"이라고 한 근거도 그의 아명이 막둥(맛둥)"이었기 때문이다.

   

   

이물 교혼담(異物交婚談)

   사람이 동식물과 교구(交媾) 한다는 내용의 설화. 이류 교혼담(異類 交婚談)이라고도 한다. 식물이 남성 구실을 한 이야기로는 <동삼(童參)>, <차천의 오이> 등이 있고, 동물이 여성 구실한 한 이야기로는 <곰나루 전설>, <구렁이와 지네의 승천 다툼> 등이 있으며 대부분의 이물 교수 설화는 동물이 남자 구실을 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런 류의 설화를 야래자(夜來者) 설화라고도 하며 이들 설화에는 <서동 설화>, <최치원 설화>, <창녕 조씨 시조 설화> 등이 있다. 변한 남자의 정체는 용, 구렁이, 거북 등 물과 관련성 있는 동물이 대부분이고 여자의 몸에서 태어나 아이는 성씨의 시조나 국조가 되는 시조의 탄생을 보여 준다.

 

 

 

ㅡ 네이버 블로그< 뚜기네> 자료 중에서 ......

[출처] 서동설화|작성자 뚜기

http://blog.naver.com/othugi/70155216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