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다인(茶人)

2015. 5. 29. 05:27차 이야기

 

 

 

고려의 다인(茶人) | 차의 향기

 

 

 

       고려의 다인(茶人)



1. 고려 초기(918-1046)


128년간:태조1년(918)-정종12년(1046)

*다방(茶房):제도 완비
*공덕제(功德祭):진다의식
*예물-하사품. 부의품. 80세이상 국노(國老)-모두 차생활
*공물-거란에 뇌원차 보냄
*다시(茶詩)-없음-전하지 않음
*청자-순청자 시대-청자 완성
*중국-소식(1037-1101):茶詩 지음. 채양(1012-1067):茶錄 저술.

*태조(918-943):팔관회-진다
*광종(950-975):공덕제-헌다
*성종(982-997):차 하사-최지몽. 최승로. 서희.
*목종(997-1009):차 하사-80세 이상 노인.
*정종(1035-1046):차 공물-거란에 차 보냄
*최지몽(최지몽:907-987):부의품-차 200각
*최승로(최승로:927-989):부의품-腦原茶 200角. 大茶 10斤.
*서희(서희:941-998):부의품-腦原茶 200角. 大茶 10斤.

2. 고려 중기(1047-1259)


212년간: 문종1년(1047)-고종46년(1259)

) 중기 전반: 문종1년(1047)-의종24년(1170):123년간

*문반 정치 시대-문물이 급속 발전
*청자-秘色 완성-고려 청자의 신비
*초조 대장경 완성(1087)
*다세(茶稅)제도
*다시(茶詩)-저작 활동 시작-대각국사
*승니제도-아들3명 이상-한명 출가
*삼국사기(1145). 고려도경(1124). 계림유사(1104)저술

*문종(1047-1083):국사.국노에게 뇌원차.하사. 용봉단차(송)
*대각국사(1055-1101):용봉단차. 茶詩.
*선종(1083-1094):대장경 완성(흥왕사), 통도사 국장생표.
*숙종(1095-1105):常慈寺에 행차 제 올림(차.향등)
*예종(1105-1122):양이정. 정원. 茶院. 연등. 팔관회.
*정지상(?-1135):茶詩
*인종(1123-1146):금나라에 차 보냄
*이자현(1061-1125):차 하사-예종,인종-청평사


나)중기 후반: 명종1년(1171)-고종46년(1259):88년간

*무반 정치 시대-정중부의 난. 최씨무단정치(최충헌):100여년간.
*혼란-민란-폭동: 극심
*청자-고려청자의 전성기 -상감청자 시작
*강좌칠현-문인들의 은둔생활
*茶詩-왕성한 저작활동
*대장경-제2차 대장경 완성(1251)
*강화 천도(1232)-몽고군 침입(4차)
*유다(孺茶)-이규보-노규화상
*파한집(1260). 보한집(1254)

*명종(1170-1197):다방제도 개혁-무인 겸직
*이인노(1152-1220):다마(茶磨)시
*임춘(1145-1170):다점(茶店)
*김극기(1148-1209):한송정
*이규보(1168-1241):유다(孺茶)
*진각국사(1178-1234):산거(山居)
*고종(1244-1259):청자 성행 -전성기. 대장경 완성.
*원감국사(1226-1292):다시(茶詩)

3. 고려 후기 (1260-1391)
131년간:원종1년(1260)-공양왕3년(1391)

*무신 정치 봉괴-문신 정치 시작
*삼별초-항몸-원의 내정 간섭
*청자-삼감청자 완성-분청사기 시작
*환도-개경(1292)-관제 고침-원 제도
*다방제도 개선
*다시-풍류놀이
*투다회-이연종-다기 발달
*삼국유사(1285). 제왕운기(1287) 저술

*충렬왕(1247-1308):원에 차. 향을 보냄
*충선왕(1308-1332):다방제도 개선
*이제현(1287-1367):묘련사석지조기
*이곡(1298-1351):다시
*이연종(1250년대-1310년경):명전(茗戰)
*나옹화상(1320-1376):다시
*공민왕(1351-1374):신돈과 차 마심
*이색(1328-1396):다시 69수
*정몽주(1337-1394):석정전다(石鼎煎茶)




1. 선승편(禪僧編)


1) 대각국사(大覺國師 : 1055~1101)
고려 화엄종(華嚴宗)과 천태종(天台宗)의 시조(始祖)이다. 이름은 후(煦), 자는 의천(義天)이며 대각(大覺)은 시호이다. 문종의 네째아들. 1065년 왕사(王師) 난원(爛圓)에게 출가하여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영통사(靈通寺)에 있으면서 난원으로부터 화엄의 교관(敎觀)을 배웠다. 1084년 송나라로 건너가 계성사(啓聖寺)에서 유성법사(有誠法師)에게 화엄천태 양종의 오의(奧義)를 배운 뒤 혜인선사(慧因禪寺)에 가서 정원법사(淨源法師)에게 화엄경을 배웠다. 그리고 흥국사의 인도승 삼장천길상을 찾아 불법을 닦았다. 1086년 귀국하여 신축된 개경 흥왕사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송나라에서 가져온 많은 경전(經典), 유서(儒書) 등을 교정(校正) 간행했으며 이 때 속장경을 완성했다.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설파하고 화엄종인 규봉(圭峰)의 학설로 고려의 교종을 통일하는 한편 선종의 교리에 입각, 천태종읖 개창(開創)하여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 원효의 중심사상인 일불승(一佛乘) 회삼귀일(會三歸一)의 원리에 입각하여 고려 불교의 융합을 실현, 한국 불교사상 획기적인 업적을 이룩했다. 저서로는 신집원종문류(新集圓宗文類), 해동유본현행록(海東有本見行錄) 등이 있다.

2) 요일선사(寥一禪師:1150년대)
고려 명종(明宗:1170-1197)의 숙부. 출가하여 흥왕사(興王寺)에 머물면서 승통(僧統)이 되었고 시를 잘지었다. 그러나 시문집이 전하지 않아 자세히 알수가 없다.

3) 진각국사(眞覺國師 : 1178~1234)
호는 무의자(無衣子)이고, 법명은 혜신(慧諶)이며, 진각은 시호이다. 1201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뒤에 조계사(曺溪寺)의 지눌(知訥)에게서 중이 되었다. 1210년 지눌이 죽자 왕명으로 수선사(修禪寺)에 들어가 그 뒤를 이어서 조계종의 2세가 되었고 고종이 즉위하자 선사, 뒤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다. 1219년 수선사에 있으면서 단속사(斷俗寺)의 주지를 겸임, 월등사(月燈寺)에서 죽었다. 송광사(松廣寺)에 비가 있다.

4) 석천인(釋天因 : 1205~1248)
20세에 탐진(耽津) 만덕산(萬德山)의 원묘국사(圓妙國師)에게서 출가하였다. 송광사(松廣寺)의 혜심(慧諶)에게서 조계종(曹溪宗)의 요체를 얻고, 만덕산,지리산,비슬산(毘瑟山) 등을 전전하며 수도한 뒤, 다시 원묘국사에게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전해 받았다. 1247년 원나라가 침입하자 난을 피하여 상왕산(象王山) 법화사에 있다가 죽었다.

5) 진정국사(眞靜國師:1206-1294)
법명은 천책(天Ʂ)이며, 진정은 호이다. 자는 몽차(蒙且). 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충선왕 때 만덕산(萬德山) 원묘국사(圓妙國師)에게서 중이 되고 보현도량(普賢道場)에 들어간 뒤 만덕산 백련사(白蓮寺)의 제4대 조사(祖師)가 되었다. 만년에 용혈암에 이거, 용혈대존숙(龍穴大尊宿)이란 존칭을 받았고 詩文으로도 추앙(推仰) 받았다.

6) 원감국사(圓鑑國師 : 1226~1292)
호는 법환(法桓), 충지(沖止), 밀암(密庵). 법명은 원개(元凱)이며, 원감은 시호다. 1244년에 19세 때 문과에 장원, 벼슬이 한림(翰林)에 이르렀으며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뒤에 선원사(禪源寺)의 원오국사(圓悟國師)에게 승(僧)이 되어 구족계(具足戒)를 받았고, 1266년 김해현(金海縣) 감로사(甘露寺)의 주지로 있다가 원오국사가 입적하자 그 뒤를 이어 조계(曹溪)의 제6세(世)가 되었다. 원나라 세조의 요청으로 연경(燕京)에 가서 세조의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금란가사, 벽수장삼, 백불(白佛) 등을 선사받고 돌아왔다. 시문(詩文)에도 능하여 동문선(東文選)에 그의 작품이 실려있다. 저서로는 원감국사가송(圓鑑國師歌頌)이 있다.

7) 백운선사(白雲禪師:1299-1375)
고려 말기의 승려.이름은 경한(景閑), 1351년(고려 충정왕3년) 원나라 절강 호주(湖州)에 건너가서 석옥청공(石屋淸珙)에게 법을 묻고 공민왕2년 1월에 도를 크게 깨쳤다고 한다. 1360년 해주 신광사에서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렸으며, 고려 우왕1년 천녕(川寧) 취암사(鷲岩寺)에서 입적했다.

8) 태고선사(太古禪師:1301-1382)
고려 말기의 승려. 호는 태고(太古)이고, 이름은 보허(普虛)로서 속성은 홍씨이다. 홍주 사람으로 13세에 양주 회암사에서 광지에게 의지해 승려가 되어 가지산 하총림(下叢林)에서 도를 닦았다. 26세에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하고 용문산 상원암 성서(城西)의 감로사에서 고행 정진하였다. 1337년(충숙왕 복위6년) 송도 전단원(栴檀園)에서 참선하다가 다음 해 정월에 크게 깨달았다. 삼각산 중흥사 동쪽에 태고암을 짓고 있으면서 태고라 이름하고 태고암가를 지었다. 1346년(충목왕2년)에 중국에 가서 호주 하무산 석옥청공(石屋淸珙)의 법을 잇고 동국 임제종의 초조가 되었다. 다음 해 본국에 돌아와 용문산 소설암에 있었다. 공민왕이 사신을 보내어 법을 묻고, 왕사를 삼아 광명사에 원융부(圓融府)를 두고, 9산선문을 통합하여 1종(一宗)을 만들게 하였으나 뒤에 사퇴하고 소설암으로 옮기었다. 신돈(辛旽)의 투기로 속리산에 금고(禁錮) 당하였다. 신돈이 죽은 뒤에 국사가 되었다가 우왕8년 12월 24일 소설암에서 입적하였다. 나이는 82세, 법랍은 69세. 시호는 원증(圓證). 탑호는 보월승공(寶月昇空)이다. 탑비는 삼각산 태고사 터에 있다.

9) 나옹화상(懶翁和尙 : 1320~1376)
휘는 혜근(慧勤). 초명은 원혜(元慧)이며 나옹은 그의 호다. 1340년 공덕산(功德山) 묘적암(妙寂庵 :문경)의 요연(了然)에게서 중이 되어 전국의 명산대찰을 편력, 1344년 회암사에서 4년간 좌선(坐禪)하여 개오(開悟)했다. 1347년 원나라 연경(燕京) 법원사(法源寺)에서 인도(印度)의 중 지공(指空)에게 2년간 배운 뒤 元나라 호남지방을 편력하며 처림, 천암등에게 사사(師事)한 뒤 다시 지공에게 돌아가 그 법을 이어받았다. 1358년 귀국, 2년 뒤 오대산 상두암에 머물렀으며 1361년 왕명으로 상경하여 내전(內殿)에서 설법하고 신광사(神光寺) 주지가 되었다. 1365년 용문산(龍門山), 원적산(圓寂山), 금강산 등지를 순력한 뒤 다시 회암사의 주지가 되었다. 보우와 함께 고려 말 선종(禪宗)의 고승으로서 조선불교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으며 저서로는 나옹집(懶翁集)이 있다.

10) 야운선사(野雲禪師:1350년대)
고려 말기의 고승으로 생몰년대는 알 수 없고, 나옹화상(懶翁和尙 : 1320~1376)의 제자로서, 함허득통(涵虛得通 : 1376~1433) 선사와 동시대 인물이다. 법휘는 각우(覺牛)이고, 야운(野雲)은 그의 법호이다.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을 지었다.



2. 유생편(儒生編)

1) 정지상(鄭知常 : ?-1135)
고려 인종때의 시인. 문신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 서경 출신 1114년(예종9) 문과에 급제하여 좌정언(左正言)으로서 척준경(拓俊京)을 탄핵 유배케 했으며, 1129년 좌사간(左司諫)으로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올렸다.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의 음양비술을 깊이 믿어 한때 묘청 백수한 등과 함께 삼성(三聖)이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서울을 서경(西京)에 옮길 것과 북쪽의 금나라를 정벌하고 고려 왕도 황제로 칭할 것을 주장하였다. 1130년 지제고(知制誥)로서 왕명을 받아 곽여(郭輿)를 위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지었으며, 그 후 기거랑(起居郞)이 되었다. 1135년(인종13)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이에 관련된 혐의로 김안(金安). 백수한과 함께 김부식에게 참살(斬殺)되었다. 시에 뛰어나 고려 12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다. 역학(易學)과 불전(佛典)에도 정통하고 그림 글씨에도 능했다. 저서로는 정사간집(鄭司諫集)이 있다.


2) 임춘(林椿 : 1145-1170)
고려 인종(1109~1146) 때의 문인.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서하(西河) 출신. 여러번 과거에 실패했다. 1170년(의종4년)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간신히 목숨은 건졌으며,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시와 술로 세월을 보냈다. 한문과 당시(唐詩)에 뛰어났으며, 이인로가 그 유고(遺稿)를 모아 6권을 만들어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라 했다. 그의 시문은 삼한시귀감에 기록되어 있고, 그밖에 두편의 가전체(假傳體) 소설이 전한다.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국순전(麴醇傳)과 공방전(孔方傳)이 있다.

3) 김극기(김극기 : 1148-1209)
호는 노봉(老峰). 어려서부터 문명(文名)이 높았고 문과(文科)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초야에서 시(詩)를 즐겼다. 명종 때 학행(學行)으로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었으나 얼마후 죽었다. 고려 말엽에 간행된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의하면 그의 문집이 150권이나 된다고 했다. 저서로는 김거사집(金居士集)이 있다.

4) 이인로(李仁老 : 1152~1220)
초명은 득옥(得玉). 자는 미수(眉叟)이며 호는 쌍명재(雙明齋)이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요일선사(寥一禪師)가 데려다 길렀다. 1170년 정중부가 난을 일으키자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가 후에 환속하여, 1180년(명종10년)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계양관기(桂陽管記)에 보직된 후 이어 직사관(直史館)이 되었으며, 이후 14년간 사국(史局)과 한림원(翰林院)에 재직하였다. 고려의 대표적인 문인의 한 사람으로 문장이 뛰어나 한유(韓愈)의 고문(古文)을 능가했고, 시에 있어서는 소식(蘇軾)을 벗하였으며 글씨에도 능해 초서(草書),예서(隸書)가 특출했다. 저서로는 쌍명재집(雙明齋集), 파한집(破閑集) 등이 있다.

5) 이규보(李奎報 : 1168~1241)
초명은 인저(仁氐) 자는 춘경(春卿)이며 호는 백운거사(白雲居士)․지헌(止軒)․삼혹호 선생(三酷好先生)이다. 1189년 사마시(司馬試)에, 이듬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1207년 최충헌에 의해 권보직한림(權補直翰林)으로 발탁되었다. 1232년 판비서성사․보문각학사․경성부 우첨사․지제고에 오르고 1237년 금자광록대부․수대보문하시랑 평장사․수문전 대학사․감수국사․판예부사 한림원사․태자대보(金紫光祿大夫守大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로 벼슬에서 은퇴하였다. 걸출한 시호(詩豪)로서 호탕 활달한 詩風으로 당대를 풍미했으며 특히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그 감상을 읊은 즉흥시(卽興詩)로 유명했다. 처음에는 도연명의 영향을 받았으나, 개성을 살려 독자적인 시격(詩格)을 이룩했고 몽고군의 침입을 진정표(陳情表)로써 격퇴한 명문장가였다. 시․술․거문고를 즐겨 삼혹호 선생이라 자칭했다. 저서로는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동명왕편(東明王篇) 백운소설(白雲小說) 등이 있다.

6) 김지대(金之岱 : 1190~1266)
고려시대 무신. 청도 김씨(淸道金氏)의 시조. 초명은 중룡(仲龍)이다. 1217년에 거란이 침입하자 아버지를 대신해서 종군, 이듬해 文科에 급제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 보문각 교감. 전라도 안찰사를 역임했다. 1258년 몽고가 북변을 침범하자 첨서추밀원사로 승진하여 북계 지병마사(北界知兵馬使)를 겸직하여 적을 방어하고 민심을 무마하여 서북 40여 성을 편안케 했다. 원종 초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가 되고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傳中書侍郞平章事)가 되어 은퇴하였다.

7) 백문절(白文節 : ?~1282)
자는 빈연(彬然). 고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림원(翰林院)에 보직되고, 중서사인(中書舍人)․이부시랑(吏部侍郞)․국자좨주(國子祭酒)를 지냈다. 1269년에 복위한 원종이 원나라에 들어갈 때 폐립(廢立) 사실을 감출 목적으로 그에게 전왕이 병으로 물러났다고 거짓표를 쓰게 했다. 그러나 눈물로 간(諫)하자 왕도 감동하여 사실대로 원나라 황제에게 알렸다. 충렬왕 때 사의대부(司議大夫)에 임명되었으며 그후 국학 대사성(國學大司成)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에 이르렀다. 문장에 뛰어났다.

8) 이승휴(李承休:1224-1300)
자는 휴휴(休休) 호는 동안거사(動安居士)이며 가리 이씨(加利李氏)의 시조이다. 고종때 문과에 급제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두타산(頭陀山) 구릉에서 학문을 닦았다. 그후 안집사(安集使) 이심돈(李深敦)의 권유로 상경, 이장용(李藏用) 유경(柳璥)의 천거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나라에 가서 위려(偉麗)한 문장으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돌아와 우사간(右司諫)을 거쳐 전중어사(殿中御史)가 되었으나 한동안 벼슬을 떠나 구동의 용안당(容安堂)에서 제왕운기(帝王韻紀) 내전록(內典錄)을 저술했다 저서로는 동안거사집(動安居士集)이 있다.

9) 김서(金㥠 : 1240년대)
1271년 세자(世子 : 忠烈王)가 원나라에 볼모로 갈 때 호부낭중(戶部郎中)으로 시종했다. 충렬왕이 즉위 귀국하자 사의대부(司議大夫)가 되어 왕의 인사관리에 반대하여 한때 파면된 후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거쳐 전법판서(典法判書)가 되었다. 진정국사를 따라 배웠으며 후에 국사가 주도하는 백련결사 모임에 참여하였다. 국사는 김서의 아버지와 함께 등과 하였다.

10) 이연종(李衍宗:1250년경-1310년경)
이숭휴(李承休)의 아들.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규정(司憲糾正)을 거쳐 충정왕 때 감찰대부(監察大夫)가 되었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밀직사(密直使)를 거쳐 감찰대부를 겸했고 공민왕이 원나라 제도에 따라 변발(辯髮)․호복(胡服)하는 것을 금하게 했다. 1352년 조일신(趙日新)이 탄핵되자 화가 두려워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11) 홍규(洪奎 : ?~1316)
초명은 문계(文系)이며 충숙왕의 장인이다. 원종대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으며 세자를 따라 원나라에 가서 원제의 명으로 고려 본국의 일품직에 올라 좌부승선(左副承宣)이 되었으나, 국정이 문란하므로 사직, 다시 추밀원부사에 승진되었으나 또한 사퇴했다. 충선왕 때 익산군에 봉해지고, 상의첨의도감사(商議僉議都監事)에 이르러 죽었다.

12) 박충좌(朴忠佐 :1287-1349)
고려 충렬왕때의 문신. 자는 자화(子華), 호는 치암(恥菴). 문과에 급제, 전라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을 때 무고로 유배, 후에 밀직제학(密直提學). 개성 부윤 등을 거쳐 충목왕 때 찬성사(贊成事)가 되어 왕에게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시강(侍講)했다.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고, 함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시호는 문제공(文齊公)이다.


13) 홍간(洪侃 : ?~1304)
자는 평보(平甫)․운부(雲夫)이며, 호는 홍애(洪厓)이다.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 있다가 동래현령(東萊縣令)으로 좌천, 재직 중에 죽었다. 詩文에 능하고 詩風이 청려(淸麗)했다. 그의 시는 삼한시귀감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홍애집(洪厓集)이 있다.

14) 권한공(權漢功 : ?~1349)
호는 일재(一齋) 충열왕때 문과에 급제 직사관(直史館)을 지내고 1294년 성절사(聖節使)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충숙왕 초 삼사사(三司使) 찬성사(贊成事)를 지내고 충선왕이 양위 후 원나라에 가서 만권당(萬卷堂)에서 이제현과 함께 독서하며 문명을 펼치기도 하였다. 후에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에 이르렀으며 예천 부원군(醴泉府院君)에 봉해졌다. 저서로는 일재집(一齋集)이 있다.

15) 이제현(李齊賢 : 1287~1367)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실재(實齋)․역옹(櫟翁)이다. 1301년 성균시(成均試)에 장원,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1314년 백이정의 문하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공부, 이 해 원나라 학자 요수염조맹부등과 함께 고전을 연구하기도 했다. 1362년 홍건적의 침입때 왕을 청주에 호종, 이해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에 봉해졌다. 당대의 명문장가로 외교문서에 뛰어났고 정주학의 기초를 확립했으며 원나라 조맹부의 서체(書體)를 고려에 도입하여 널리 유행시켰다. 익재난고(益齋亂稿) 소악부(小樂府)에 17수의 고려 민간 가요를 한시(漢詩) 칠언절구로 번역하여 이것이 고려가요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저서로는 익재난고, 효행록(孝行錄), 서정록(西征錄)등이 있다.

16) 안축(安軸 : 1287~1348)
자는 당지(當之)이며, 호는 근재(謹齋)이다. 문과(文科)에 급제, 금주사록(金州司錄) 사헌규정(司憲糾正)을 지내고 1324년 원(元)나라 제과(制科)에 급제, 그곳 요양로 개주판관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고려에 돌아와서 성균학정(成均學正)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를 거쳐 충혜왕 때 강릉도(江陵道)를 존무(존무)했으며 이때 관동와주(關東瓦注)라는 문집을 남겼다. 뒤에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가 되어 민지(閔漬)가 지은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이제현등과 개찬(改撰)했다. 경기체가(景幾體歌)인 관동별곡(關東別曲), 죽계별곡(竹溪別曲)을 남겨 문명(文名)이 높았다. 저서로는 근재집(謹齋集)이 있다.

17) 이곡(李穀 : 1298~1351)
초명은 운백(芸白). 자는 중부(仲父)이고 호는 가정(稼亭)이며, 색(穡)의 아버지이다.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의 서리(胥吏)로서 1320년 문과(文科)에 급제, 1333년 원나라 제과(제과)에 제이갑(第二甲)으로 급제, 정동행쭝서성좌우사 원외랑(征東行中書省左右司圓外郞)이 되어 원제(元帝)에게 건의하여 고려에서의 처녀징발을 중지케 했다. 1344년 충목왕이 즉위하자 귀국하여 이듬해 연복사종(演福寺鐘)의 명문(銘文)을 짓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을 거쳐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에 이르러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졌다. 문장에 능하며 이제현과 함께 편년강목(編年綱目)을 증수(增修)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 3조(朝)의 실록(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여대(麗代) 가전체(假傳體)작품 죽부인전(竹夫人傳)이 동문선(東文選)에 전하며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저서로 가정집(稼亭集)이 있다.

18) 정사도(鄭思道 : 1318~1379)
초명은 양필(良弼). 1336년 文科에 급제하였으며 1341년 권지전교교감(權知典校校勘)이 되었고 후에 직제학(直提學)에 올랐다. 모친상을 당하여 삼년간 묘를 지켜 이를 가상히 여긴 공민왕으로부터 일성군(日城君)에 봉해지고 밀직부사(密直副使)에 임명되었다.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서 합포(合浦)를 지킬 때 군사(軍事)․민정(民政)에 모두 업적을 남겼다. 그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정당문학 지서연사(政堂文學知書筵事) 평리상의(評理商議)를 역임하고 오천군(烏川君)에 개봉(改封)되고 공신(功臣)이 되었다.

19) 이무방(李茂芳 : 1319~1398)
자는 석지(釋之). 광양 이씨(光陽李氏)의 시조이다. 충목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 전교교감(典校校勘)이 되고 공민왕 때 민부상서(民部尙書) 대사헌을 역임 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라 추충좌명공신(推忠佐命功臣)이 되었다. 1374년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지공거(知貢擧)를 겸임. 우왕 초 서연관(書筵官)을 거쳐 문하평리(門下評理)가 되었다. 1388년 창당이 즉위하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이 되고, 공양왕 때 추충여절찬화공신(推忠礪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다. 1392년 조선이 개국하자 문인(門人) 조준(趙浚)의 천거로 다시 검교문하시중이 되고 광양부원군(光陽府院君)에 봉해졌다.

20) 이색(李穡 : 1328~1396)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이며 곡의 아들이다. 1341년 進士가 되고 1348년 元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했다. 1351년 부친상(父親喪)으로 귀국하여 1352년 전제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金九容 정몽주 이숭인등을 학관으로 채용하여 성리학의 발전에 공헌했다. 1389년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曹敏修)와 함께 창(昌)을 옹립 즉위케 하고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하여 이성계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했다. 1395년 한산백에 봉해졌으며,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 죽었다. 저서로는 목은시고(牧隱詩藁) 목은문고(牧隱文藁)가 있다.

21) 정몽주(鄭夢周 : 1337~1392)
초명은 몽란(夢蘭)․몽룡(夢龍). 자는 달가(達可)이며, 호는 포은(圃隱)이다. 1357년 감시(監試)에 합격한 뒤 1360년 文科에 장원하였으며 예문 검열(藝文檢閱)․수찬(修撰)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 문하 찬성사등을 역임하였다. 지방관의 비행을 근절시키고 의창(義倉)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였다. 성리학에 뛰어나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시조로 추앙되었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조 단심가(丹心歌)이외에 많은 한시(漢詩)가 전하며 서화(書畵)에도 뛰어났다. 고려 3은(隱)의 한 사람으로 1401년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저서로는 포은집(圃隱集)이 있다.

22) 이숭인(李崇仁 : 1349~1392)
자는 자안(子安)이며, 호는 도은(陶隱)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 숙옹부승(肅雍府丞)이 되고 이어 장흥고사(長興庫使)로 진덕박사(進德博士)를 겸하였다.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고려의 문사(文士)를 뽑을 때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25세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나가지 못했다. 공민왕이 성균관을 개창(改創)한 뒤 정몽주․김구용․박의중(朴宜中) 등과 함께 학관(學官)을 겸했다. 1392년 정몽주가 살해된 뒤 그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 조선이 개국되자 정도전이 보낸 그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게 배소(配所)에서 살해되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도은선생시집(陶隱先生詩集)이 있다.

23) 원천석(元天錫:?-?)
고려 말기의 은사(隱士). 자는 자정(子正), 호는 운곡(耘谷). 고려의 정계가 문란함을 보고 치악산에 들어가서 농사를 자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한편, 이색 등과 교유하면서 시사(時事)를 개탄했다. 일찍이 방원(芳遠:태종)을 가르친 바 있어 조선 건국 후인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작품으로 망국 고려를 회고한 시조 1수가 전하며 야사(野史) 6권을 저술했으나 증손 때에 이르러 극사와 저촉되는 점이 많아 화가 두려워 불살랐다고 한다. 원주의 칠봉서원(七峰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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