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흥사 천불전 전경. [사진 박동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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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해(梵海·1820~1896)는 초의(草衣) 선사의 다풍(茶風)을 이은 대흥사 승려다. 음다풍(飮茶風)을 드러낸 여러 편의 다시(茶詩)는 대흥사의 음다풍뿐 아니라 그의 음다 모습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그의 생애는 『동사열전(東師列傳)』의 ‘자서전(自序傳)’에 드러난다. 그가 대흥사 한산전으로 출가한 것은 14세 때이며 2년 후인 1836년 호의(縞衣)의 제자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호의뿐 아니라 하의(荷衣)·초의·문암(聞庵)·운거(雲居)·응화(應化) 등에게 참학(參學)하였다.
그의 속성(俗姓)은 최씨다. 신라 명철(明哲) 최치원의 후예라는 자부심이 강했다. 그의 속명(俗名)은 어언(魚堰), 또는 초언(超堰)이라 불렀다. 이는 태몽에서 연유된 것인데 그의 어머니가 방죽에 사는 흰 물고기를 꿈에서 본 후 그를 임신했다는 것이다. 꿈에서 본 흰 물고기와 그와의 인연을 짐작할 수는 실마리는 없다. 다만 그의 양 쪽 사타구니 곁에 희고 긴 (물고기) 문양이 있고 평소 물고기를 먹지 못하는 천성(天性)은 지녔다는 걸 보면 태몽의 징후는 분명했다. 평생을 수행자로 살아야하는 그의 삶은 이처럼 미리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당시 절간에선 수행자가 불경 이외의 다른 외가서(外家書)를 읽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런 상황에서도 유학(儒學)에 심취했던 그는 ‘적옹 이병원에게 유서를 수학했다(受儒書於寂翁李先生炳元)‘고 한다. 그에게 유학을 가르쳐준 적옹이 어떤 인물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적옹에게 수학했던 건 그의 많은 저술에 토양이 되었을 것이리라. 범해는 『통감사기(通鑑私記)』와 『사략기(史略記)』 『동사열전(東師列傳)』 등 역사서뿐 아니라 『경훈기(警訓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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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경기(遺敎經記)』 『동시만선(東詩漫選)』 『사십이장경기(四十二章經記)』 등을 남겼다. 이밖에도 그의 문재를 드러낸 『범해선사유고』를 남겼고, 아직 간행되지 않은 육필본(肉筆本)도 있다.
한편 응송 박영희(1896~1990)가 전해준 이야기에는 범해의 역사서에 대한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흥사 아랫마을의 어떤 선비가 『통감』한질을 가지고 있었다. 이것을 안 범해 노장은 책을 빌려 보기로 작정하고 아랫마을 선비를 찾아간다. 하지만 책이 귀했던 시절이라 책을 빌린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며칠간을 찾아가 간청하니 그의 열의에 감동한 선비가 『통감』을 통째로 빌려주었을 뿐 아니라 머슴을 시켜 대흥사까지 책을 가져다주게 하였다. 이때 범해 노장은 머슴을 앞세우고 대흥사로 돌아가던 길에 머슴의 지게에 가득 담긴 『통감』한 권씩을 읽기 시작했다. 다 읽은 책은 무심히 길에 던져버렸다. 마침 대흥사 입구에 이르자 더 읽을 책이 없었다. 그러자 머슴은 오던 길에 던져진 『통감』을 수습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기억력이 비상했던 그는 한번 읽은 책을 모두 암기했다. 간혹 그를 시험하고자 묻는 이가 있으면 글자 한 자 빠뜨리지 않아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범해의 천재성은 오래도록 대흥사에 회자된 이야기일 터다. 대흥사 아랫마을 선비는 분명 녹우당 윤씨 집안이었을 것이다. 『통감사기』는 그의 역사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한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당시 불교계의 역사인식을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학계에서는 그의 역사관을 17~18세기 불교계의 역사 인식에서 영향 받은 것이라 평가했다. 더구나 그가 여러 편의 사기(私記) 류를 저술할 수 있는 토대는 연담(蓮潭·1720~1799)의 학풍에서 연원된 듯하다. 연담은 일찍이 수편의 사기를 썼는데 이는 경전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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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범해의 다풍은 초의와 호의에게 영향 받았다. 그러나 그는 초의가 이룩한 차문화의 중흥을 이어갈 구심점을 만들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이러한 결과는 그의 차에 대한 열망이나 노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근대로 이어지는 격변기 속에서 음다층을 확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초의 제자들은 시대의 어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셈이다. 이런 열악한 상황에서도 차를 즐긴 정황을 노래한 그의 다시(茶詩)는 근대 대흥사의 음다풍을 살펴 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다. 특히 그의 다시 중 자신이 차를 통해 병고를 치료하는 과정을 그린 ‘다약설(茶藥說)’은 그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기에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1852년 가을에 쓴 이 시는 이미 병이 나은 후 쓴 것이다. 당시 그는 남암에 있었다. 이질에 걸려 달포 이상 끼니 때가 지난 것조차 느끼지 못했는데, 이를 알게 된 무위(無爲)가 차를 달여 마실 것을 권한다. 마침 그의 아우 부인(富仁)은 자신이 보관해 둔 차를 기꺼이 내준다. 특히 무위는 맑은 차로 어머니 병을 치료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범해는 무위의 권유에 따라 급히 차를 끓여 마신 후 자신의 몸 상태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첫 잔을 마시니 뱃속이 조금 편안해지고
(一椀腹心小安)
둘째 잔을 마시니 정신이 또렷해지네
(二椀精神爽塏)
서너 잔을 마시고 나니 온몸에 땀이 흐르고
(三四椀渾身流汗)
맑은 바람이 뼈에서 일어나는 듯하더니
(淸風吹骨)
상쾌하여 비로소 병이 없었던 듯.
(快然若未始有病者也)
『범해선사유고(梵海禪師遺稿)』
‘다약설(茶藥說)’
범해가 이질에 걸려 달포를 누어있다 완쾌해 어머니 기제사에 다녀온 때가 7월 26일이다. 그의 증언을 이리 저리 맞추어 보니 그가 병이 난 것은 대략 6월경으로 짐작된다. 실제 그가 어떤 연유로 병이 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해 6월 11일(음력) 하의(荷衣)가 열반한 일 역시 그의 병인(病因)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듯하다. 음력 6월 11일은 여름이 끝나가는 절기다. 하의의 열반 의식이 다 마무리된 후 과적된 피로는 그의 건강을 위협했던 듯하고, 범해의 작은 부주의가 달포씩이나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초래했던 것이다. 어려운 상황을 구원해 준 이는 무위와 부인(富仁) 같은 형제들이었다. 평소 차를 좋아했던 범해였지만 그 역시 위급할 때 쓸 차를 갈무리해 놓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부인이 위급할 때 쓸 요량으로 보관해 둔 차를 사용했던 것이다. 이런 전후 사정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대흥사에서는 차를 소량 생산했던 듯하다. 초의차(草衣茶)의 명성이야 이미 경향(京鄕)에 널리 회자(膾炙)되었다 하더라도 사중(寺中)의 경제적인 여력은 열악했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다약설(茶藥說)’은 분명 그가 체험한 차의 효능을 상세히 드러낸 것으로, 차를 마신 후 나타난 몸의 변화를 기록한 것이다. 그의 공은 당나라 노동의 ‘칠완다가(七椀茶歌)’에 버금가는 것이라 하겠다.
그럼 범해는 당시 어떤 다구를 사용했을까. 범해의 ‘다구명(茶具銘)’은 그의 다구 규모를 어느 정도 짐작하게 한다. 초의는 동철(銅鐵)이나 납소(鑞小)로 만든 다관을 사용하는 한편 옹기 다관을 함께 사용했다. 이외에 백자 다기와 청에서 수입한 찻잔도 사용하였는데 이는 추사의 영향 때문인 듯하다. 추사가 청나라에서 유행하던 채색 찻종을 사용한 흔적은 허 소치가 그린 ‘추사난화도(秋史蘭畵圖)’에서도 확인된다. 경향의 영향력 있는 인사들과의 교유가 뜸했던 범해의 다구는 초의보다 질박해 주로 질그릇을 사용했다. 그의 ‘다구명(茶具銘)’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맑고 한가한 삶은(生涯淸閑)
차 몇 말뿐이라(數斗茶芽)
찌그러진 질화로를 준비하여(設苦窳爐)
약하고 강한 불을 담았지(載文武火)
질 다관은 오른 쪽에(瓦罐列右)
오지 찻잔은 왼 쪽에 두었네(瓷盌在左)
오직 차에만 힘쓸 뿐이니(惟茶是務)
무엇이 나를 유혹하랴(何物誘我)
범해의 다구는 찌그러진 질화로와 질 다관이었다. 이는 당시 열악한 경제 환경에서 질박한 음다풍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특히 범해의 담백한 차의 격조는 ‘오직 차에만 힘쓸 뿐이니(惟茶是務)/ 무엇이 나를 유혹하랴(何物誘我)’고 한 대목에서 드러난다. ‘질 다관은 오른 쪽에(瓦罐列右)/ 오지 찻잔은 왼 쪽에 두었네(瓷盌在左)’라고 하여 그가 어떻게 다구를 배치했는지를 짐작케 한다. 찌그러진 질화로에 약하고 강한 불을 다룰 수 있었던 범해 차의 품격은 이미 차의 원리에도 해박했던 다승(茶僧)이었음을 나타낸다. 오직 차에만 힘쓴다는 그의 말은 선가의 담박한 다풍이 어떤 풍모를 갖추어야 하는지를 밝힌 것이라 하겠다. 무엇보다 그의 스승 초의 제다법의 순차와 원리를 ‘초의차(草衣茶)’를 통해 밝혔다는 점이 주목된다. 실제 이 시는 초의가 열반한 지 10여년 후인 1878년에 지었다. 그가 증언한 셈인 초의의 제다법은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곡우에(穀雨初晴日)/ 아직 황아 차 잎은 피지도 않았네(黃芽葉未開)/ 깨끗한 솥에서 정성을 다해 덖어내(空鐺精炒出)/ 밀실에서 잘 말리네(密室好乾來)’라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분명 초의가 만든 차는 덖음차이다. 떡차가 아닌 산차(散茶)였다. 아울러 초의가 한국의 생활환경을 그대로 응용했음을 드러낸 공정은 바로 밀실에 말리는 방법이다. 이러한 초의의 제다 공정은 그의 후손 응송 박영희의 제다법에도 공존한다. 다시 말해 응송의 제다법에서 마지막으로 뜨거운 온돌방에서 하루를 재우는 것은 바로 범해가 밝힌 ‘밀실에서 잘 말리네(密室好乾來)’라는 공정 과정이다. 따라서 초의차의 제다법은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또한 초의차를 보관법은 바로 ‘측백나무 모나고 둥글게 찍어서(栢斗方圓인)/ 죽순 껍질로 잘 포장했지(竹皮苞裹裁)’라고 한 사실에서 확인된다. 따라서 초의차는 간수를 잘했기에 ‘찻잔에 가득히 향이 뜨는 차’였다. 이런 차의 규범을 이어 준 범해는 그 자신이 체험했던 차의 가치를 우리에게 일러 주었던 초의의 믿음직한 제자였다.
박동춘 철학박사. 동아시아차문화연구소장. 성균관대 겸임교수. 저서로는 『초의선사의 차문화 연구』 『맑은 차 적멸을 깨우네』 『우리시대 동사송』 『추사와 초의』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