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화이야기] 수월관음도 (춘천 삼운사 대불보전)|

2015. 6. 10. 15:41美學 이야기

 

 

 

 

 

       [벽화이야기] 수월관음도 (춘천 삼운사 대불보전)| 불교▒미술

초 심 | 조회 34 |추천 1 | 2014.10.12. 00:35

 

 

 

 

 

 

   이 벽화의 구성을 보면, 가운데 계신 분이 백의관세음보살님이시고, 왼쪽 아래에 선재동자, 오른쪽 아래에 해상용왕이 그려져 있으며, 오른쪽 윗부분에는 수정염주를 물고 오는 관음조, 그리고 왼쪽 위에는 대나무가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단독으로 모셔진 관음도 대부분은 화엄경 계통<수월관음도>인데 특히 고려 불화의 수월관음도가 유명하다. 우리만이 간직하고 있는 수월관음도의 특징을 들라면, 한결같이 선재동자가 등장하여 관세음보살에게 보리(깨달음)의 가르침을 구한다는 점, 관음 옆에 버드나무 가지가 꽂힌 정병이 놓여 있다는 점(돈황의 수월관음상은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다), 파랑새(관음조 또는 극락조)가 날며 염주가 등장한다는 점 등이다. 또 관음의 등 뒤에는 쌍죽이 그려지기도 한다. (이 벽화에도 대나무들이 그려져 있음)

 

   본존인 관세음보살에 비해 양협시인 선재동자(또는 남순동자)해상용왕(海上龍王)은 작게 그려져 관세음보살님의 위의가 한껏 강조되어 있다. 해안 고절처에 기암괴석과 반석을 배경으로 왼쪽 무릎을 세우고 백의(白衣)를 걸친 관세음보살의 머리에 쓴 보관(寶冠)에는 부처님의 모습이 그려져 있는데 이 부처님은 관세음보살이 본사(本師)로 삼고 항상 모신다고 하는 아미타 부처님이다. 백의는 대비(大悲)의 공덕을 모두 갖추고 널리 중생을 교화함을 상징한다.


   왼쪽 아래에 합장하고 서 있는 선재동자는 『화엄경』의 입법계품근거하여 묘사한 것이며, 오른쪽에 시립해 있는 해상용왕은 관세음보살의 자비심바다와 같이 깊고 넓음을 증명하고 있다. 정병(淨甁)에는 불사(不死)의 감로수가 들어 있고, 버들가지어리석음과 번뇌, 미망(迷妄)을 제거하고 중생의 마음에 뿌린 보리심의 종자가 지닌 각종의 공덕을 상징한다. 그리고 청죽(靑竹)은 화엄 초조 의상대사에서 연유한다. 따라서 청죽의 표현은 다른 나라의 관음탱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우리만의 모습이기도 하다. 관세음보살의 우측상단에는 채운(彩雲 오색구름)과 함께 관음조(觀音鳥)가 날고 있으며 바다로부터 솟아오른 기암 고절처는 산수화의 형태로 표현되어 전체적으로 회화적 분위기가 흐르고 있다.

 

 

 

 


   관음탱화는 이와 같은 도상형식을 통하여 대비삼매에 머무르며 천수천안(千手千眼)으로 중생의 고통을 살피고 자비의 손길로 인도하시는 관세음보살님의 서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려면 낙산사 창건설화를 살펴보면 도움이 된다.

낙산사는 신라의 고승 의상(義相)이 창건했다. 중국 당나라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을 공부한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0년(670)이었다. 그 후 어느 해에 의상은 낙산의 관음굴(觀音窟)을 찾았다. 그는 지심으로 기도하여 관음보살을 친견했고, 그리고는 낙산사를 창건했다.

 

 


▒ 삼국유사


   예전에 의상법사가 처음 당나라에서 돌아와서 대비진신(大悲眞身)이 이 해변의 굴속에 계시기 때문에 낙산(洛山)이라고 했다는 말을 들었다. 대개 서역에 보타낙가산(寶陀洛伽山)이 있는데, 여기서는 소백화(小白華)라고 하고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 머무는 곳이기에 이를 빌려서 이름한 것이다.


   의상은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좌구(座具)를 물위에 띄웠는데, 천룡팔부(天龍八部)의 시종이 그를 굴속으로 인도하여 들어가서 참례함에 공중에서 수정염주(水精念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동해룡(東海龍)이 또한 여의보주(如意寶珠) 한 벌을 주기에 의상은 이를 받아서 물러 나왔다. 다시 7일 동안 재계하고서 이에 진용(眞容)을 뵈니, "이 자리 위의 꼭대기에 대나무가 쌍(雙)으로 돋아날 것이니, 그곳에 불전(佛殿)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땅에서 대나무가 솟아났다. 이에 금당을 짓고 소상(塑像)을 봉안하니, 그 원만한 모습과 아름다운 자질이 엄연히 하늘에서 난 듯했다.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으므로 바로 진신이 거주함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서 법사는 그가 받은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나갔다.

 

※ 대나무: 신라인들은 대나무를 아주 신성한 나무로 생각했는데 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예: 만파식적)

 

만파식적(萬波息笛) 
   신라 천존고에 보관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는 적(笛)을 말한다. 삼국사기에 만파식적에 관한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라 신문왕때 동해바다 한가운데 조그만 산이 나타나서 가까이 가보니 거기에 대나무가 있는데 낮에는 두 그루, 밤이면 합쳐져서 한그루가 되는 것이었다. 이것을 천관에게 물으니 이 대나무가 하나가 되었을 때 베어 피리를 만들면 나라에 좋게 쓰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왕이 이것을 베어 적을 만들었다. 이 적을 불면 가뭄에 비가 오고, 홍수에 비가 그치고, 병이 낫고, 파도가 가라앉고, 바람이 그치고, 적병이 물러가는 신기한 것인지라 많은 근심거리를 없애는 것이라 해서 만파식적이라 불렀다.

 


▒ 낙산사기

 

   양주(襄州) 동쪽 강선역(降仙驛) 남쪽 동리에 낙산사가 있다. 절 동쪽 몇 리쯤의 바닷가에 굴이 있는데, 높이는 백 척 가량이고 크기는 곡식 만 섬을 실은 배라도 드나들 만하다. 그 밑에는 항상 바닷물이 드나들어서 측량할 수 없는 구멍이 되었는데, 세상에서는 관음대사(觀音大師)가 머무는 곳이라고 한다. 굴 앞의 50보쯤 되는 바다 가운데에 돌이 있고, 돌 위에는 자리 하나를 펼 만한데, 수면에 나왔다 잠겼다 한다.


   옛적에 신라 의상대사가 친히 성용(聖龍)을 뵙고자 하여 돌 위에서 자리를 펴고 예배했다. 14일이나 정성을 다했지만 볼 수가 없었으므로 바다에 몸을 던졌더니, 바다 속의 동해용이 붙들어 돌 위에 올려놓았다. 대성(大聖)이 굴속에서 팔을 내밀어 수정염주를 주면서, "내 몸은 직접 볼 수가 없다. 다만 굴 위의 두 대나무가 솟아난 곳이 나의 이마 위다. 거기에 불전을 짓고 상을 봉안하라."라고 했다. 용도 또한 여의주와 옥을 바쳤다. 법사가 여의주를 받고 그 말과 같이 가서보니,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있었다. 그곳에 불전을 짓고 용이 준 옥으로 상을 조성해서 봉안하니 바로 이 절이다.


<내용출처 : www.uisang.or.kr>

 

※ 그 후, 수정염주와 여의보주는 낙산사 칠층석탑에 봉안했다고 하며,

    세상에 전해오기를 굴 앞에 와서 지성으로 예배를 드리면 파랑새(관음의 화현)가 나타난다고 한다.

 

 

 낙산사 홍련암 벽화                                                                               http://quantastic.kr/150125355674

 

 

▒ 관음조(파랑새)

 

   <함라산 숭림사> 때는 1345년 고려 충목왕 때의 일이다. 왕궁에서는 충목왕의 왕비 몸에 난 등창으로 근심이 가득하였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여러 의원들이 병을 고치려 했으나, 등창은 갈수록 심해지고 왕비의 몸은 점점 야위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왕비는 지난날의 일들을 회상하며 관세음보살을 부르다가 잠이 들어 꿈을 꾸게 되었다.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자신이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었고, 꿈에서 깨어난 왕비는 그 사찰의 모습과 산세를 일러주며 절을 찾게 하였다. 마침내 찾게 된 절은 지금의 숭림사(전라북도 익산 함라산)였으며, 왕비는 숭림사에서 자신의 몸을 바쳐 관음보살에게 일주일간 기도를 드렸다.

 

   마지막 기도를 드리던 날, 기도 중 향긋한 향기에 취해 잠시 잠에 빠져든 왕비는 꿈속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날아와서 자신의 몸에 난 등창을 핥아주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잠에서 깬 왕비는 몸이 날듯이 가벼워졌음을 느끼고 등창을 살펴보니 깨끗이 나은 채 미묘한 향내음이 풍기는 것이었다. 이에 왕비는 관음보살께 눈물로 기도를 드렸으며, 병이 완치되어 궁궐로 돌아간 왕비는 그 이후 숭림사에 전답을 하사하고 왕실의 원찰로 삼아 관음기도의 도량으로 삼게 되었다.

 

   <능가산 내소사> 청민선사 이 절을 중건할 때에, 어느 날 한 화공이 찾아와 단청을 해주겠다고 선사에게 이야기하면서 조건을 달았다. 100일 동안 누구도 건물 안을 들여다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 선사와 목수는 교대로 그 건물 앞에서 누구도 얼씬 못하게 지켰다. 99일이 지나도록 인기척도 없고 먹을 것도 안 들어가니 사미승이 얼마나 궁금했겠는가. 사미승은 주지 스님이 부른다고 거짓말을 하고 기어이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하얀색 새가 입에 붓을 물고 날갯짓에서는 화려한 물감을 만들어내면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은가. 이에 너무 놀란 사미승이 자세히 보고자 문을 살짝 열었다. 그러자 삐걱하는 소리가 나고 놀란 새는 그만 날아가버리고 말았다. 단청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대웅전 안에 좌우 한 쌍으로 그려져야 할 그림이 좌측 창방 위는 바탕면만 그려져 있고 내용은 그려져 있지 않다. 그 새를 사찰에서는 관음조라고 한다.

 

   <성흥산 대조사> 한 스님이 큰 바위 아래서 수도중에 관음조(觀音鳥) 한 마리가 날아와 그 바위 위에 앉자 놀라 잠을 깨니, 바위가 미륵보살상으로 변해서 절 이름을 대조사라 했다는 전설이내려오는 전통사찰이다.

 

   - 다음 카페 <해실한 미소> 초심 님의 글 중에서  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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