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6. 19. 10:51ㆍ詩
- 세상이 달라졌다
-정희성(1945.2.21. ~ ) 전 중고등학교 교사
세상이 달라졌다
저항은 영원히 우리들의 몫인 줄 알았는데 ...- 이제는 가진 자들이 저항을 하고 있다 .
세상이 많이 달라져서
저항은 어떤 이들에겐 밥이 되었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권력이 되었지만
우리 같은 얼간이들은 저항마저 빼앗겼다 .
세상은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벗들도 말수가 적어졌고
개들이 뼈다귀를 물고 나무 그늘로 사라진
뜨거운 여름날의 한 때처럼
세상은 한결 고요해졌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정희성 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 가는 강을 보며
쭈구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 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 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길/ 정희성
대구문학신문에서
아버지는 내가 법관이 되기를 원하셨고
가난으로 평생을 찌드신 어머니는
아들이 돈을 잘 벌기를 바라셨다.
그러나 어쩌다 시에 눈이 뜨고
애들에게 국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어
나는 부모의 뜻과는 먼 길을 걸어왔다.
나이 사십에도 궁티를 못 벗은 나를
살 붙이고 살아온 당신마저 비웃지만
서러운 것은 가난만이 아니다.
우리들의 시대는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지 않는다
세상사는 일에 길들지 않은
나에게는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내 사람아, 울지 말고 고개 들어 하늘을 보아라
평생에 죄나 짓지 않고 살면 좋으련만
그렇게 살기가 죽기보다 어렵구나.
어쩌랴, 바람이 딴 데서 불어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한치도 얼굴을 돌리지 말아야지.
- 시집『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창작과비평사,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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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시인 자신의 인생 역정을 소재로 하여 세속적 가치가 아닌 진정한 삶의 가치를 추구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작품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특히 시인이 성장했던 시기엔 어느 집안이나 비슷한 분위기여서 부모님들은 권력이나 명예, 부를 얻을 수 있는 직업을 갖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시인은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국어교사가 되어 가난한 시인으로 살다 몇년 전 정년을 맞았다. 그가 바라는 삶은 스스로 자족하며 선하게 사는 것인데 그마저도 세상은 돕지 않는다. 세속화된 가치관이 팽배한 사회에서는 가난하지만 의롭고 선하게 산다는 것이 오히려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그것이 그렇게도 노엽다'
‘없는 사람이 없는 대로 맘 편하게 살도록 가만두’는 세상이야말로 99%의 서민과 중산층이 주인되는 자유민주주의 세상이다. 그런데 여전히 '우리들의 시대'는 사회의 구조적 문제와 정치의 낙후로 그런 세상을 맞이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께 김근태 전 의원 장례 때 그의 친구 정희성 시인이 낭독한 조시에서 “그대가 몸 바쳐 그토록 열망하던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눈물겨운 꿈의 세포는 살아서 이 시대를 견디고 있는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2012년 새해 아침을 탈환하리”라며 희망을 선포했다. 세상의 어떤 유혹이 닥쳐와도 '마음 단단히 먹고' 의롭고 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과 결의가 우리 모두에게 소중한 때다. 필요하다면 스스로에 대한 준열한 꾸짖음도 마다하지 않아야할 것이다.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 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입이 다물어졌다
내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풀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정희성시인이
시 낭송회를 하면 언제나 이 시만 낭송을 하는,
작자가 무척 아끼는 詩입니다. 만해축전에서도
어김없이 이 꽃의 시를 낭송했습니다.
세상의 모두가 맑고 풀들마져 아름답고 소중한 꽃으로 보인
민지의 눈 앞에서,
덩달아 마음의 티끌을 걷어냅니다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정희성
어느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 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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