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정사(谷雲精舍)를 찾아서③

2015. 7. 22. 16:11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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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연명을 꿈꾸던 와운암(臥雲菴)

 

   곡운정사의 여러 건물 중에 와운암(臥雲菴)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와운암에 대한 자료는 단지 시 한 수밖에 없다. 곡운제영(谷雲諸詠) 가운데 와운암을 소재로 한 시는 다음과 같다.

 

 

마음이 외물에 흔들리지 않아,
몸은 소나무와 구름 속에 있네.
창문에 바람 불어오니 도연명 같아,
은자처럼 안석에 기대어 있네.


心無外物侵。身在松雲裡
陶然北窓風。聊憑南郭几


 

   중국 진(晉)나라의  도연명(陶淵明)이 자기 아들들에게 보낸 글에 “오뉴월 북창 아래 누워 있을 때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면 내 자신이 곧 복희씨 세상에 사는 사람처럼 잡념이 사라졌다.” 라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장자(莊子)』자유(子游)가 안석에 기대고 멍하니 앉아 있는 남곽자기(南郭子綦)에게 왜 그러느냐고 묻자, 지상의 크고 작은 온갖 바람소리를 예로 든다. 그러면서 그 다양한 소리들이 나름대로의 의미를 각기 지니고는 있지만 조물주의 시각으로 보면 다 같은 것이라고 한다. 인간의 생활 속에 일어나는 시시비비의 논쟁도 큰 관점에서 보면 서로 다를 것이 없다고 대답한 고사를 인용한 것이다. 온갖 잡념을 잊거나, 시비 논쟁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김수증의 마음이 반영된 당호(堂號)가 와운암인 셈이다. 
  영당터로 가기 위해 직선거리로 가다보니 밭이 나타나면서 길이 없어진다. 바로 옆집 앞에서 겨울 햇볕을 쬐는 할머니가 계신다. 밭을 통과해서 가도 괜찮냐고 물으니 빙그레 웃으시며 소리없이 머리만 끄떡이신다. 그리고 이내 햇볕을 쬐시며 조용히 앉아 계신다. 속세의 번잡함에서 벗어난 듯 편안한 얼굴의 할머니에게서 도연명의 얼굴이 겹쳐진다. 

 

 

곡운선생을 기리는 곡운영당

 

곡운영당터 원경.gif

<곡운영당터 원경>


 

    현재 곡운정사가 있던 곳에 남아있는 것은 곡운영당터이다. 근래에 세워진 김수증선생 추모비 앞에 위치하고 있다. 주춧돌은 풀 사이에서 일정한 간격으로 몇 개 박혀있다. 그리고 그 앞에 흥학비가 세워져있다. 하나의 돌로 비갓과 비신을 만들었는데 앞면에 ‘부사이공용은흥○비(府使李公容殷興△碑)’라고 새겨져 있다. 뒷면은 판독이 불가능하다. 이용은 철종 1년(1850)에 증광시 을과에 합격하여 춘천부사, 대사정, 이조참판 등을 지냈는데 1856~1957년 춘천부사로 재직하였다. 


    영정 모셔 둔 사당이 영당이다. 그러므로 곡운영당은 곡운 사후에 붙여진 이름일 것이다. 오원(吳瑗:1700~1740)「행곡운기(行谷雲記)」속에서 오후에 곡운선생의 영당에 가서 배알하였다고 적고 있다. 어유봉「동유기(東遊記)」에서 숲 있는 기슭에 얌전하게 붉은 칠한 곳을 돌아보니 곡운선생의 영당이었다고 기록하였다. 남용익「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에서  곡운 선생의 사당 찾아 초상에 배알했다고 적어놓았다. 곡운선생의 영당과 곡운선생의 사당은 동일한 건물을 말하며, 곡운선생의 초상이 걸려있음을 보여준다. 조인영(1782~1850)은 이곳에 들려 제갈공명과 김시습, 김수증, 김창흡 대한 시를 남겼으니, 네 사람의 영정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전의 기록들은 곡운영당이나 사당이라 적고 있는데, 정약용곡운서원(谷雲書院)이라 적고 있다. 세월이 흐르면서 영당 주변에 서원을 세웠던 것 같다. 영당터에 세워진 흥학비가 이를 말해준다. 정약용의 기록은 사진을 찍듯 자세하다. 

 

  " 22일. 약간 흐렸다가 오정이 지나서야 개었다. 일찍 출발하여 서원에 도착하여 여러분들의 화상을 본 다음 차례로 구곡을 보았다. 제1곡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저녁 때 두 고개를 넘어 외창(外倉)으로 돌아와 잤다. 서원은 사액(賜額)되지 않은 곳으로, 곡운 가운데에, 삼연이 왼쪽에, 명탄(明灘)이 오른쪽에 앉았다. 또 그 왼편 재실에 두 분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곡운과 삼연 두 분의 진영(眞影)이다. 오른편 재실에 또 두 본의 화상을 봉안하였는데 곧 제갈무후매월당의 진영이다. 또 궤 속에 두 분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우암(尤菴)과 곡운의 아들 성천공(成川公)의 진영이다. 서루(書樓)에 또 공자의 화상을 간직하였는데, 한지에 먹으로 그린 것으로서 마치 어린아이들의 붓장난 같아 머리를 말[斗]보다 크게 그렸으니 이는 곧 현인의 모양을 형상한 것이나,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된다. 그 나머지의 모든 화상을 약암(約菴)이 배알할 때 같이 따라 들어가 상세히 보았다. 매월당은 머리는 깎고 수염만 있으며 쓴 것은 조그마한 삿갓으로서 겨우 이마를 가릴 정도였고 갓끈은 염주 같았다. 곡운은 우아하고 진중한 체구에 사모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어 조정 대신의 기상이 있었다. 우암(尤菴)은 74세 때의 진영으로서 수염과 머리털이 모두 희고 아랫입술은 선명하게 붉었으며 치아가 없으므로 턱은 짧았고 눈빛은 광채가 나서 1천 명을 제압할 만한 기상이 있었다. 삼연은 맑고 부드러우며 정숙한데다가 복건에 검은 띠를 띠고 있어 산림처사(山林處士)의 기상이 있었다. 제갈 무후(諸葛武侯)는 삼각 수염에 이마는 뾰족하고 빰은 활등같이 그려 마치 불화(佛畫)의 명부상(冥府像) 과 같았다. 이것은 당장 없애 버려야지 그대로 둘 것이 못 된다. 이곳에 와룡담이 있다 해서 무후의 진영을 걸어 놓았으나 아무런 의의도 없다. 이는 모두가 비천한 습속으로서 과감히 없애야 한다. "

 

  곡운서원 언제 폐허가 됐는지 알 수 없다. 아마 대원군이 서원을 철폐 때 사라진 것 같다. 대원군은 1868년 서원에 나누어준 토지도 세금을 내고, 서원의 장은 지방 수령이 맡아 서원을 주관하는 조처를 시행했다. 1870년에는 1868년의 명령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없애라 하고, 1871년에 "사액서원이라도 한 사람은 한 서원에 배향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거듭 설치한 것은 모두 철폐하라"고 하면서 서원철폐를 단행했다. 이 조처로 전국에 47개소의 서원만 남기고 나머지 서원·사묘(祠廟) 등이 모두 철폐되었다.
  곡운서원은 서원의 기능을 상실한 후, 영당의 기능을 다시 담당하였다. 조선 말기의 위정척사론자이자 의병장인 유인석(柳麟錫;1842~1915)1905년 곡운영당에서 제사를 지내고 강연을 하였다. 「곡운강회에서 ‘연(筵)’자를 얻어서」란 시에 시를 짓게 된 까닭이 자세하다.

 

   "을사(乙巳)년 3월 7일. (중략) 일찍 금계(錦溪)․항와(恒窩)와 함께 곡운(谷雲)에서 강회를 열기로 약속하였기에, 이 달 15일에 곡운으로 달려갔다. 강회에 온 사람이 백 사오십 명이 되었다. 그 날에 다섯 현인을 단에 모시고 향례를 지냈다. 그 다섯 현인은 제갈무후(諸葛武候), 김매월당(金梅月堂), 김곡운(金谷雲), 삼연(三淵), 성명탄(成明灘)이었다. 원래 영당이 있어 삼구월(三九月) 보름에 제사를 지냈는데, 조정의 명령으로 그만두게 되었다. 최면암(崔勉庵)이 그 자리에다 다시 제단을 쌓고 제사를 지냈다. 제사를 마친 후 강연을 시작했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강연을 하는 것은 모두 시국의 재앙이 지극하기에 혹시나 대방을 어렵게 하고 우리는 강대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이유 때문이다.

 

 

꽃피는 제방뚝에서 강회하나니
달 비친 구름 속의 좌석이어라
나이 따라 줄지어 경서 읽나니
경건하게 오현을 모셨어라
풍류를 흥미로 함이 아니라

심하여 화양지맥 이어가려네
무궁한 의미를 보아서인지
샘물이 콸콸 솟아난다네.


綻花堤上會 滿月雲中筵
列齒誦羣聖 薦毛虔五賢
風流非興尙 陽脉苦心牽
看到無窮意 來來有活泉

 

 

 

    1940년에 제작 강원도지(江原道誌)』곡운영당‘춘수영당(春睡影堂)’ 이라 적고 자세하게 설명한다. “사내면 용담리에 있다. 숙종 갑신년(1704) 건립되었다. 제갈량(諸葛亮), 김시습(金時習), 김수증(金壽增), 김창흡(金昌翕), 성규헌(成揆憲)을 배향하였다. 중간에 철폐되었는데 기해년에 제단을 설립하였다.”
 지금도 매년 곡운선생을 기리는 추모제가 화천군 사내면 유도회 주관으로 용담리 곡운영당에서 열린다.
 
 

김수증추모비와 앞 주춧돌.gif

곡운정사터 원경.gif

<김수증추모비와 앞 주춧돌>

<곡운정사터 원경>

 

 

 

 


잊혀진 곡운정사지(谷雲精舍址)를 위하여

   
남아 있어 볼 수 있는 것은 두 점의 그림과 주춧돌 몇 개, 그리고 흥학비이다. 이 자료들을 통해 곡운정사의 모습을 그릴 수 있고, 정사의 주인인 김수증도 이해할 수 있다. 이뿐만 아니라 전적에 남아 있는 자료들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충해 준다.
 차를 타고 순식간에 스쳐 지나갔던 곡운정사는 이제 새로운 의미로 다가선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나 진입의 어려움뿐만 아니라, 곡운정사였다는 것을 알려주는 최소한의 표지판 조차 없는 것이 내내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성현들을 추모하는 영당의 기능, 후학들의 면학의 장소, 한말 우국지사들의 강연의 장소로 꾾임없이 변화해 가며 그 시대의 역할에 충실했던 곡운정사. 지금 이 시대에 무슨 역할을 해야할 지 곰곰이 생각할 때이다.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참고문헌≫
『곡운집』『기원집』『뇌연집』『의암집』『월곡집』 『문곡집』『주자대전』『삼연집』『운석유고(雲石遺稿)』『강원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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