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과 다산,곡운구곡을 걷다 ①

2015. 7. 24. 20:23여행 이야기

 

 

 

 

 

      

곡운과 다산,곡운구곡을 걷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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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

 

 

물과 돌의 나라

 

   화천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몇 번의 변화가 있었다. 20대에 화천은 국방색으로 다가왔다. 화천 바로 옆인 양구에서 군대생활을 한 경험과, 평화의 댐 혹은 비목으로 각인된 국방색 이미지는 예전에 비해서 많이 탈색되었지만 아직도 남아있다. 그 이후 지방자치시대를 통과하면서 수많은 축제로 인해 알록달록한 낭만의 색으로 차츰 바뀌어갔다. 얼마 전에 매스컴에도 보도된 세계 7대 불가사의라는 산천어축제를 비롯하여 쪽배축제, 토마토축제 등으로 인해 화천에 가면 언제나 축제가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 이미지인가? 쪽배축제를 홍보할 때 사용하는 수식어인 ‘물의 나라’를 패러디 한다면, 화천‘물과 돌의 나라’이다. 그리하여 화천에 대한 이미지는 돌의 하얀색과 물의 파란색으로 변하게 되었다. 물론 알록달록한 낭만적인 색도 또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미지의 변화는 곡운구곡(谷雲九曲)을 알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흐릿하다가 점점 또렷해졌다. 곡운구곡을 알게 된 것은 90년대 중반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 곡운구곡이 있는 사창리를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이기자부대’에 근무하던 전우를 통해서 화천에 사창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사내고등학교에 근무하는 주변 선후배를 통해서, 그 학교가 사창리에 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땐 농담으로 사내들만 다니는 학교냐고 물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사창리를 거쳐 철원으로 자주 다녔던 90년대 중반엔, ‘심하게 꼬불꼬불하다!’라는 생각뿐이었다. 대관령를 지나는 옛 영동고속도로를 화천에서 다시 만나는 기분이었다. 흔히 말하는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바로 여기였다. 몇 번 지나면서 용담샘터에서 목을 축이곤 했다. 그때 물을 뿜어내는 거북이 뒤로 곡운구곡에 대한 안내문을 보면서 곡운구곡과 처음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달리는 차창 너머로 보이던 너럭바위들과 곳곳에 형성된 여울을 보면서 범상치 않은 곳이라고 생각은 했었다. 안내문은 곡운구곡이 아홉 군데의 절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며, 바로 서 있는 곳이 그 구간임을 알려주었다. 그러나 일일이 확인하며 감상할 여유도 지식도 없었다.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차츰 김수증(金壽增)에 대하여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본격적으로 화천 사창리 일대와 깊이 인연을 맺게 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 이미지가 서서히 변하게 된 것이다. 그 이후에 정약용의 발걸음이 곡운구곡에 닿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김수증과 달리 자신의 심미안으로 곡운구곡을 재설정하여 곡운구곡을 더 풍성하게 하였다.

그간의 무심함을 조금이라도 덜어볼 요량으로 김수증의 「곡운기(谷雲記)」와 정약용의 「산행일기」를 따라 곡운구곡을 걸어보고자 한다. 곡운(谷雲)의 발과 눈을 따르되, 다산(茶山)의 이야기도 경청하면서 여행을 시작한다.

 

 

곡운에 대한 오리엔테이션

 

   " 곡운(谷雲)은 화악산(華嶽山)의 북쪽, 춘천부(春川府)의 서북쪽 80리에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사탄(史呑)이라고 칭했다. 나는 우리말을 고쳐 곡운(谷雲)이라 불렀다.

대개 평강(平康)의 분수령(分水嶺)으로부터 백 여리를 달려오다 굽어지면서 김화(金化)의 대성산(大聖山)이 된다. 또 20 여리를 달려 수리산(守里山)이 된다. 그리고 한 갈래가 구불구불 남쪽으로 5리 쯤 가다가 큰 시내에 닿아 우뚝하게 멈춘다. 속명(俗名)이 우아하지 않아서 지금 청람산(靑嵐山)으로 고친다. 또 대성산(大聖山)의 한 갈래가 서쪽으로 가서 복자산(福子山)이 되고, 굽어지면서 하현(霞峴)이 되며, 남쪽으로 가서 묘봉(妙峯)이 된다. 또 굽어지면서 대다라치(大多羅峙)가 되는데, 산자락이 높게 끊어졌다. 또 묘봉(妙峯)으로부터 서쪽으로 가서 소다라치(小多羅峙)가 되고, 굽어지면서 백운산(白雲山)이 된다. 이곳으로부터 동남쪽으로 가서 화악산(華嶽山)이 되는데, 곡운(谷雲)의 남쪽에 웅장하게 자리잡고 있다. 또 수리산(守里山)으로부터 동으로 내달려서 10여리를 지나면 거듭 포개진 산과 봉우리들이 화악산의 동쪽 갈래와 함께 곡운의 동쪽을 첩첩이 가린다. 한참을 돌고 돌아야 오리곡(梧里谷)에 이르니 바깥입구가 된다. 지금 곡운에 살면서 자세히 보니, 큰 산은 밖을 둘러싸고 작은 산은 안에 섞여서 사방을 둘러싸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놓고 있다. 산골사람의 집은 수 백 채인데, 산과 골짜기 곳곳에 의지하고 산다.

골짜기의 물 중에 큰 것이 대여섯 갈래이다. 모두 서북쪽의 수 십리 안에서 발원하여 청람산 서쪽 치우친 곳에 이르러서 합류한다. 또 하나의 시내는 남쪽으로부터 북쪽으로 흐르다가 그 아래로 흘러 들어간다. 이 시내는 화악산에서 나온 것이다. 골짜기 물이 흐르다가 합쳐져 큰 시내가 된다. 30여리를 흘러가 오리곡(梧里谷)과 서오지촌(鋤五芝村)을 돌아 지나가서 모진강(母津江)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40리를 흘러가서 소양강(昭陽江)과 합쳐진다.

곡운으로 들어가는 길은 다섯이다. 하나는 김화(金化)로부터 시라현(時羅峴)을 경유해서 남쪽에서 들어간다. 또 하현(霞峴)으로부터 들어간다. 하나는 영평(永平)의 백운산(白雲山) 남쪽 줄기로부터 서쪽에서 들어간다. 지역 사람들은 도마치(倒馬峙)라고 한다. 또 백운사(白雲寺) 북쪽으로 들어가는데, 이곳이 다라치(多羅峙)이다. 하나는 낭천(狼川)과 춘천 경계 동쪽에서 들어간다. 이곳이 오리곡(梧里谷)이다. 길은 모두 깊고 험하다. 또 중간에 좁은 길이 있어 사람과 말이 편히 통행하지 못한다. "  (김수증(金壽增), 「곡운기(谷雲記)」, 『곡운집(谷雲集)』)

 

   사창리의 한자어 옛 이름은 김수증의 말대로 사탄(社)이다. 그러면 우리 고유의 지명은 무엇일까? 화천문화원의 지명의 유래를 검색해 보니 ‘시룬’ 또는 ‘실운(實雲)’으로 불렸다고 한다. 김구(金構;1649~1704)의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에는 ‘실온(實溫)’ 이란 명칭으로 기록되어 있다. 아마도 시룬, 실운, 실온 등과 유사한 발음의 지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김수증이 지금의 용담리에 은거하면서 지명을 곡운(谷雲)이라 바꾸었고, 이후 옛 전적에 곡운(谷雲)이 많이 쓰이게 되었다.

   현종 11년 1670년 김수증(金壽增)은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터를 잡고 은거하던 곳의 뒷산이 청람산(靑嵐山)이다. 청람산도 고유의 이름이 있었으나 김수증에 의해 개명되었다. 수리산(守里山)의 한 갈래가 남쪽으로 5리쯤 내려와 청람산이 되었다고 했는데, 수리산은 현재의 두류산을 가리키는 것 같다. 조세걸곡운구곡도에도 지금과 똑같은 실경을 보여준다.

   곡운구곡을 통과하는 물은 흘러흘러 오리곡서오지촌을 거쳐 모진강으로 간다고 했는데, 오리곡은 지금의 오탄리를, 서오지촌서오지리를 가리킨다. 모진강북한강에서 일부 구간 지칭하는 옛 이름인데, 춘천과 화천 경계에서 소양강과 만나는 지점까지를 일컫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사창리로 가는 길은 비슷하다. 김화에서 시라현(時羅峴)을 거치는 길이 있다고 했는데, 시라현(時羅峴)은 지금의 화천 명월리와 다목리 사이에 있는 실내고개를 말한다. 하현(霞峴)화천군 사내면 광덕리와 철원군 근남면 잠곡리 사이에 있는 하오재이다. 지금은 하오터널이 뚫렸다. 백운산(白雲山) 남쪽의 도마치(倒馬峙)를 통하는 길은 지금의 광덕리와 경기도 가평군을 잇는 도마치재를 말한다. 백운사(白雲寺) 북쪽의 다라치(多羅峙)를 경유하는 길은 지금의 광덕고개이다. 마지막으로 낭천(狼川)춘천 경계 동쪽에서 들어가는 코스이다. 낭천(狼川)화천의 옛 이름이다. 춘천에서 화천으로 향해 가다가 춘천시 사북면 지촌리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사창리로 가는 코스이다. 지금 내가 경유하는 길이며, 곡운구곡을 걷기 위해서 제일 적합한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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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리 뒤에 보이는 청람산>

 

 

곡운으로 들어가다

 

   " 내가 일찍이 평강(平康) 현감에 임명되어 공적인 일 때문에 서오지촌(鋤五芝村)을 지났다. 곡운과의 거리가 삼십 리에 불과했다. 그 경치가 뛰어나다는 것을 들었으나 찾지는 못했다.

경술년(庚戌年;1670년) 3월. 서울서부터 오리곡을 경유하여 학현(鶴峴)을 넘고 대천(大川)을 건넜다. 지역 사람들은 탄기(灘岐)라 하는데, 곡운의 하류이다. 또 산현(蒜峴)을 넘었다. 산이 점점 높아지고 골짜기는 점점 깊어져서 인적이 끊어졌다."   (「곡운기(谷雲記)」)

 

   김수증(金壽增)은 어떤 사람인가? 그가 죽었을 때 사관(史官)이 그의 행적을 기록한 그의 졸기는 그의 사람됨을 간명하게 알려준다. “사람됨이 맑고 빼어나니 한 점의 티끌도 없었다. 송시열(宋時烈)을 스승처럼 벗하여 학식과 취향이 깊고 아름다워 시문(詩文)을 하는 데 담박하고 우아함이 그 사람과 같았다. 더욱이 전서(篆書)·주서(籒書)·팔분(八分)을 잘하여 공사간(公私間)의 금석문을 많이 썼다. 일찍이 과거를 포기하고 간간이 나와서 수령(守令)을 지냈으나, 또한 얽매여 있을 생각이 없었다. 만년에 춘천(春川) 곡운(谷雲)의 산 속에 자리 잡고 살았다. 산수가 깊숙하고 그윽함을 사랑하여 마침내 여기에서 늙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모두 그를 고상하게 여겼다.”

   그는 곡운으로 들어오기 직전에 평강(平康) 현감(縣監)에 임명되어 평강으로 가던 중, 곡운이 아름답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리고 현종 11년인 1670년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 1670년 3월달에 있었던 김수증의 발걸음을 따라 곡운으로 가는 것이다.

   오리곡을 경유한 김수증학현(鶴峴)을 넘는다. 학현은 정약용도 넘은 화우령(畵牛嶺)으로 지금의 하우고개이다. 오탄리에 있는 오탄슈퍼 옆에 장승이 서 있는데, 장승은 ‘하우고개길’이란 글씨를 몸에 새기고 길 가에 서 있다. 고개 입구에서 좀 떨어진 곳에 오탄교회가 보인다. 정약용화우령을 넘으며 시를 한 수 남긴다.

 

숲과 풀 어우러져 분별할 수 없는데,

     지팡이 위 고개에 또 구름 비껴있네.

문득 도홍경을 생각케 하니,

새장보다 무성한 풀을 좋아한 줄 알겠네.

 

疊綠稠靑漭不分 杖頭一嶺又橫雲

令人却憶陶弘景 豐草金籠識所欣

 

   풀 무성한 고개 길을 오르던 정약용은 한숨 돌리다가 자신이 짚고 있는 지팡이 위로 고개마루에 걸린 구름을 보았다. 구름 사이로 중국 남조 시기의 도홍경을 떠올린다. 그는 산속에 무엇이 있길래 조정으로 오지 않느냐는 임금의 부름에 이렇게 대답한다. ‘고개마루에 흰구름이 많아서’라고. 고개마루의 흰구름은 도홍경을, 도홍경은 김수증을 이어준다. 하우고개에 걸린 구름을 보고서야 정약용은 금빛 도금한 새장과 같은 서울보다 잡초 무성한 산속이 좋다던 도홍경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아마 김수증도홍경과 같은 심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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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우고개 길 입구>

 

   고개를 넘자마자 큰 여울이 앞을 가로막는다. 대천(大川)이라고도 하고, 탄기(灘岐)라고도 하였지만 이름과 정확한 위치를 아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물을 건넌 후 길을 따라 완만한 고개를 따라 가다보면 산현(蒜峴)이다. 정약용산령(蒜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마늘고개 혹은 만월고개라 부른다. 이 고개를 내려가다 보면 계곡이 깊숙하게 파여있다. 곡운계곡의 하류이다. 조금만 더 가면 본격적으로 곡운구곡이 열리기 시작한다.

 

곡운의 1곡인 방화계와 다산의 1곡인 망화계

 

○    " 10여리를 가서 아름다운 곳을 만나니 지역 주민은 소복삽(小幞揷)이라 한다. 골짜기는 그윽하고 깨끗하며 기상(氣象)은 깊고 그윽하다. 부딪혀 흐르는 여울과 층층이 솟은 바위로 이루어졌는데, 바위에 핀 꽃은 셀 수가 없다. 드디어 이름을 바꿔 방화계(傍花溪)라 했다. 시내를 따라 돌과 숲 속을 뚫고 가니 크고 작은 돌은 울묵줄묵하고, 이어진 봉우리가 하늘을 가린다. 길은 다한듯하다가 다시 통한다. " (「곡운기(谷雲記))

○    " 방화계(傍花溪)영귀연 아래 서너 구비 지나 있다. 이는 곧 이를테면 악곡(樂曲)을 끝맺는 마지막 연주처인데, 저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은 악곡의 처음을 삼을 것이다. 북쪽 언덕에 큰 반석이 넓게 깔려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아래층에 또 하나의 큰 반석이 있어 색깔은 희고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남쪽 기슭은 눈처럼 희다. 북쪽이나 남쪽이나 모두 단풍숲이 들어섰고 암벽이 둘러 있다. 시냇물은 돌 위에서부터 흘러내려 절벽으로 달린다. 그러므로 천둥소리가 일어나고 허연 물이 용솟음쳐 공포를 느끼게 하고 탄성을 발하게 하니, 이곳은 곧 백운담과 비슷하다. 그 위는 맑은 못을 이루어 몹시 깊다. 또 하나의 와폭(臥瀑)이 천둥소리를 내면서 이 못으로 달린다. 그 위에 또 하나의 급한 여울이 쏟아져 흐른다. 바로 세 굽이를 합쳐 1곡으로 삼는다. " (「산행일기」)

 

   만월고개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산과 산이다. 그 틈새로 계곡만이 보일 뿐이다. 고개를 다 내려오면 계곡을 옆에 끼고 계속 길이 이어진다. 왼쪽으로 크게 돈 후, 다시 오른쪽으로 더 크게 돌면 방화계에 이르게 된다. 여기까지 두 채의 집만이 보인다. 지금은 곡운구곡 1곡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길가에 있어서 쉽게 알 수 있다.

   정약용 사창리에서 출발하여 이곳으로 왔기 때문에 이곳이 종착역이었다. 그래서 악곡을 끝맺는 곳이라고 했던 것이다. 물론 정약용의 원래 글은 9곡부터 시작해서 1곡에서 끝난다. 편의상 1곡부터 순서대로 편집했다.

방화계는 멀리서 보더라도 굉장히 커다란 바위와 그 밑에 펼쳐진 여울이 뛰어난 곳임을 알수 있다. 표지석 옆에는 좁고 약간 긴 공터가 있다.

 

   이하곤(李夏坤;1677년~1724년)은 『두타초(頭陀草)』에서 “몇 리를 가니 수석(水石)이 점점 아름답다. 철쭉은 계곡이 시작하는 곳부터 끝나는 곳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붉은 비단으로 병풍을 친 것 같다.”고 묘사한 바 있다. 한여름의 방문이라서 바위 위에 흐드러지게 핀 철쭉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대신 녹음과 어우러진 거대한 바위덩어리가 장엄함을 보여준다. 도로에서 바라보다가 직접 내려가 자세하게 살펴보려고 하니 길이 마땅하지 않다. 방화계 뿐만 아니라 곡운구곡이 있는 장소들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안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통로와 도로변에 여유 있는 공간의 설치는 앞으로 해결해야할 문제이다.

   어렵게 계곡으로 내려갔다. 바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찾았다. 이전의 연구자에 의하면 이 글씨는 1856년 9월부터 1857년 11월까지 춘천부사로 있던 이용은(李容殷)이 새긴 ‘방화계(傍花溪)’와 ‘이용은(李容殷)’ 이란 글자에서 일부가 파손되고 남은 형태라고 한다.

 

   김수증방화계를 다음과 같이 시로 표현했다.

 

일곡이라 계곡에 배 들이기도 어려운데,

구름 자욱한 시내 저쪽 복사꽃 피고지네.

숲 깊고 길 끊겨 찾는 이 드문데,

어디에 신선 있나? 개는 짖고 연기 오르네.

 

一曲難容入洞船 桃花開落隔雲川

林深路絶來人少 何處仙家有吠煙

 

   김수증의 이 시를 아무도 찾지 않는 도맥(道脈)을 애써 찾아간다는 뜻이 있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그러나 첩첩 산중이어서 사람들이 찾지 않지만, 그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라고 생각하고 찾아가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을 것 같다.

   정약용1823년 춘천 여행 하였다. 그 동안의 체험을 기록한 것이 「산행일기(汕行日記)」이다. 춘천 주변의 산수자연과 곡운구곡에 대한 것이 주요한 내용이다. 곡운구곡의 여행은 4월 21일과 22일 이틀간에 이루어졌다. 정약용방화계도원동(桃源洞)의 어귀 같으므로 방화계의 ‘방(傍)’자를 ‘망(網)’자로 고쳐 망화계라 하였다. 「산행일기(汕行日記)」 속에 표현된 망화계의 모습은 김수증의 기록보다 자세하다.

 

    처음 방화계를 찾았을 때 시선을 뺏은 것은 산더미 같은 바위였다. 수십 차례 지나쳤지만 매번 바위가 먼저 보였다. 그러나 바위만 보는 것은 초보자의 심미안이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김수증정약용은 세 가지에 주목하였다. 바로 바위와 여울과 꽃이다. 예전엔 바위틈에서도 진달래와 철쭉꽃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많이 사라졌다고 하는데, 사실 나는 봄에 방화계를 본 적이 없다. 올 봄에는 만사를 제쳐놓고 진달래 흐드러지게 피는 시절에 옛 선인들의 흥취를 느껴보려고 한다. 그동안 간과하였던 것이 여울이었다. 여울의 모습은 정약용의 표현이 세밀하다. 세 개의 여울과 두 개의 못으로 이루어진 방화계의 진면목은 김수증정약용의 시선을 빌리자 이제야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 진나라 도연명이 지은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우리들의 유토피아를 그린 작품으로 유명하다. 노자(老子)의 소국과민(小國寡民) 사상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후 문학·예술 등에 큰 영향을 주었다. 김수증 이후 곡운을 찾는 사람들은 곡운도연명도화원에 비유하곤 했다. 정약용「도화원기」의 앞부분인 “개울을 따라 가다가, 길을 잃어 멀고 가까움을 모르게 되었다. 그런데 홀연히 복사꽃 핀 숲을 만났다. 양쪽 언덕을 끼고 수백 보를 나아가도 그 곳에는 다른 나무는 하나 없이 향기 나는 풀들만이 고운데, 아름다운 꽃잎들이 떨어져 흩날리고 있었다.”란 표현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온통 복사꽃으로 어우러진 마을 입구와 꽃들로 흐드러진 방화계를 동일시 한 것이 아닐까? 그물처럼 촘촘하게 꽃이 핀 것을 보고 ‘망화(網花)’라고 표현한 것 같다. 그의 망화계시(網花溪詩)는 다음과 같다.

 

 

일곡이라, 시냇가에 배를 매지 마라.

흐드러지게 꽃 핀데서 힘차게 내달릴 수 있네.

누가 알랴, 겹치고 겹친 신령스런 근원 속에,

산기슭 곳곳에 푸른 연기가 날 줄을.

 

一曲溪頭莫繁船 網花纔肯放奔川

誰知百疊靈源內 靑起山根處處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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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운구곡도 중 방화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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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화계>                                                                                              <바위에 새겨진 글자>

 

 

거북바위가 만든 영귀연

 

○   " 잔잔이 흐르는 물속에는 거북처럼 생긴 돌이 있다. 남쪽으로 머리를 두고 북쪽으로 꼬리를 두었으며, 물가에 흰 돌이 넓게 깔려 있어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다. 내가 또 그것을 이름하여 영귀연(靈龜淵)이라 하였다." (「산행일기」)

   다산 곡운구곡을 여행할 때 동행했던 이재의(李載毅;1772~1839)는 다산이 3곡으로 정한 ‘망단기’를 취하지 않고 2곡을 ‘영귀연(靈龜淵)’으로, 다산2곡으로 정한 ‘설벽와(雪壁渦)’를 3곡으로 정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영귀연은 어디를 말함인가? 다산방화계(傍花溪)의 위치가 영귀연(靈龜淵) 아래 서너 구비 지나 있다고 하였다. 반대로 방화계에서 서너 구비 위쪽에 위치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방화계에서 출발하여 왼쪽으로 한 번, 오른쪽으로 한 번 크게 돌면 ‘용정쉼터’ 나온다. 마침 옥수수를 파시는 주인 아주머니께 영귀연에 대해서 아시냐고 물어보니 모르신다고 한다. 도로에서 계곡 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내려가 봤다. 계곡 옆에 그늘막이 설치되어 있고 앞으론 계곡물이 흐르고 있다. 여기저기를 돌아보다가 물 속에 잠긴 커다란 바위를 하나 발견할 수 있었다.

   물 건너편 산기슭에 깊게 뿌리박은 바위는 물 가운데까지 차지하고 있다. 물을 건너던 거북이의 몸의 일부는 산기슭에 있고 꼬리는 물 속에 잠긴 형상이다. 물은 꼬리 부분에서 여울을 만들며 급히 흐른다. 그러나 다른 여울에 비한다면 여울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이다. 거북바위 때문에 바위 아래쪽은 깊은 연못이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영귀이란 이름을 얻게 되었다.

이재의는 그의 문집인 『문산집(文山集)』에서 영귀연을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이곡이라 거북머리 푸른 산을 베고 있고,

여울은 급히 쏟아지지 않아 조용하구나.

천 년 동안 정령의 기를 모두 마시면서,

첩첩 골짜기서 휘감아 도는 물 맡고 있구나.

 

二曲龜頭枕碧峰 湍無激瀉極從容

千年吸盡精靈氣 管領縈回峽數重

 

   영귀연에서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크게 구비치며 휘어진다. 바로 그 부분에서 산을 바라보면 산 중간에 폭포가 있다. 갈수기에는 보기 힘들지만 조금이라도 비가 내리면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다. 선인들의 기록에는 찾을 수 없다. 개울이 너무 아름다워 눈을 뗄 수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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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귀연                                                                                                                           

                                                                                                                 <영귀연 상류에 있는 폭포>

 

 

다산의 2곡인 설벽와

 

○   " 설벽와(雪壁渦)는 내가 지은 이름이다. 망단기를 따라 동쪽으로 가다가 다시 산 하나를 돌면 바람을 일으

키는 급류가 허연 물거품을 이루어 놀랍고도 즐길 만하다. 북쪽 언덕의 병풍처럼 두른 석벽은 옥설(玉雪)처럼 희고 움푹 들어간 바위는 마치 절구통 같다. 그래서 설구와(雪臼渦)라 이름할 수도 있고, 또 설벽와(雪璧渦)라 이름할 수도 있다. 다시 그 밑으로 한 굽이를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물이 허연 물거품을 이루어 아끼며 즐길 만하다.  " ( 「산행일기」 )

 

  용정쉼터’에서 한 구비를 돌면 왼쪽으로 여울이 나타난다. 도로에서 자세히 볼 수 없어 내려가고자 했으나, 모두 가드레일로 완벽하게 막아서 접근을 할 수가 없다. 무리를 해서 제일 만만한 곳을 넘다가 사타구니에 통증을 느낄 정도의 부상을 입었다. 물론 차를 이용하다가 설벽와를 감상하려는 사람은 비상 주차할 곳마저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만 한다.

   겨우 내려가 보니 다른 곳의 바위들과 다른 모습이다. 곡운구곡 대부분의 돌들은 동그랗고 반들반들하며, 하얀색과 회색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곳의 돌들은 각이 져있어 예리하며 검은색과 고동색을 띠고 있다. 정약용은 북쪽 언덕의 석벽이 옥설처럼 희다고 했으나 무성한 나무들이 가리고 있어 속살을 보기 어렵다. 그러나 살짝 드러난 석벽의 밑 부분은 흰색보다는 짙은 고동색에 가깝다. 그 사이에 색이 변한 것일까? 아니면 속살을 보지 못해서일까? 또 그것이 아니라면 내가 설벽와의 위치를 잘못 알고 있는 것일까?

   매번 지나칠 때마다 이곳 저곳에서 설벽와를 찾았다. 500여미터 구간을 오르락 내리락 하였으나 옥설처럼 흰 석벽과 움푹 들어간 바위는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어느날 상류쪽 물가를 거닐다 고동색 바위틈 사이로 흰색의 너럭바위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록 석벽이라고 할 수 없지만 물가에 길게 형성된 흰 너럭바위는 길을 뚫기 위해 발파한 돌들이 대부분 뒤덮고 있었다. 석벽이란 말에 너무 집착해 산만 바라보아서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것이다. 돌더미를 치우면 흰 속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움푹 들어간 바위는 찾을 수 없었지만, 망단기에서 산 하나를 돌면서 형성된 급류는 이곳밖에 없다. 특히 이곳 바위는 옥돌이 길게 직선으로 박혀 있어 이채롭다.

 

   정약용설벽와에 대해서 한 편의 시를 남긴다.

 

이곡이라, 하늘을 나는 듯 아련한 봉우리,

바람 일으키는 여울이 다투어 씻겨주네.

옥 병풍 옥 벼랑은 신선이 노닐던 곳,

구름다리 건너면 더욱 더 멀어지네.

 

二曲天飛縹緲峯 風湍上下競修容

瑤屛玉壁仙游處 已道雲梯隔一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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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벽와 이곳저곳>

 

 

 

다산의 3곡인 망단기, 그리고 벽력암

 

망단기(望斷碕)는 내가 선정한 곳이다. 청옥담 밑으로 산모퉁이를 끼고 한 굽이 돌면 바람을 일으키는 여울과 눈처럼 허옇게 일어나는 물이 있어 참으로 즐길 만하다. 반석 전부가 펑퍼짐하게 깔려있어 수백 명이 앉을 만하다. 그 위에 벽력암(霹靂巖)이 있는데, 높고 기이하여 놀랄만하다. 이곳의 본래 이름이 망단기(望斷碕)이다. 돌로 이루어진 길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험하여 앞으로 나아갈 엄두가 끊김을 이른 말이다. 나는 약암(約菴) 및 여러 사람과 이곳에서 발을 씻었다. ( 「산행일기」 )

 

   설벽와에서 바로 한 굽이를 돌아 계속 가다보면 오른쪽으로 주차할 공간과 간이 판매대가 설치된 쉼터가 나타난다. 여기가 용담샘터다. 이 곳을 지날때마다 물 한 모금 마시고, 전병으로 요기를 하곤 했다. 사창리에 사시는 아주머니들은 기름, 산나물, 약용 나무, 곡식 등을 정성스레 쌓아놓고 오고가는 길손들에게 팔고 있다. 한편에선 솥뚜껑에 전을 부친다. 인근 주민들은 큰 물통을 몇 개씩 가져와 물을 담아가는 곳이기도 하다. 어제 비가 내려서인지 거북이는 입에서 물을 세차게 뿜어낸다.

  

   이곳에서 100여 미터 가면 길가에 세워진 커다란 바위에 ‘곡운구곡의 고장 화천군 사내면’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다. 뒤편에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어 내려가자 벽력암이 떠억하니 버티고 서 있다. 샘터에서도 보일 정도여서 짐작은 했지만 막상 앞에 서니 장대하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벼락이 쳐서 만들어진 암벽이어서 일까? 의지 약한 사람들에게 벼락같은 호통을 쳐서 정신을 차리게 만드는 곳이어서 일까? 나는 후자가 더 마음에 든다. 물론 정약용벽력암이란 이름의 유래를 밝히지 않았다. 그만큼 자유롭게 상상할 수 있는 곳이다.

바로 위쪽은 하얀 물거품을 일으키는 여울이다. 굉장히 심한 여울이라 계곡을 따라 사창리로 향하던 옛 사람들은 낙담과 허탈감이 절로 생겼으리라. 의지가 약한 사람들은 곡운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되돌리기도 했을 것이다. 지금이야 무지막지하게 계곡의 한쪽을 깎아 큰 길을 냈지만, 예전의 길은 오죽했겠는가?

   이곳을 우리네 인생과 비유한다면 견강부회일까? 망단기는 혈기 왕성한 젊은 시절 수많은 좌절과 실패를 의미한다고 해석하고 싶다. 여기서 좌절하고 포기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끝났을 것만 같은 절망을 딛고 일어나야 다음 단계의 곡운구곡인 희망으로 나갈 수 있음을 망단기는 보여준다.

 

정약용은 이러한 심정을 이렇게 시로 풀어냈다.

 

 

삼곡이라, 구당협 같아 배 물리려 하니,

봉산과 약수 도리어 아득해지네.

돌길 바라보며 몇 사람이나 포기했나,

긁적이며 주저하니 가련하구나.

三曲瞿唐欲退船 蓬山弱水轉茫然

幾人望斷碕頭路 搔首踟蹰也可憐

 

 

   구당협은 중국 사천성 동쪽 끝에 있는 양자강 삼협 중의 하나이다. 그 중 가장 짧고 험한 곳으로 유명하다. 봉산(蓬山)봉래산으로 신선들이 산다는 영험한 산이며, 약수(弱水)는 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에 있는 전설 속의 강이다. 여기서 구당협망단기로, 봉산약수는 이상향인 곡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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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력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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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단기>

 

곡운의 2곡인 청옥협과 다산의 4곡인 청옥담

 

○ 또 10여 리를 가니 돌잔교가 물에 닿아있는데, 점점 탁 트여 참으로 옛 사람이 말한 ‘빛이 있는 것처럼 환하게 보인다’는 것과 같다. 드디어 이름을 지어 청옥협(靑玉峽)이라 했다. (「곡운기(谷雲記)」)

청옥담(靑玉潭)(다른 본에는 협(峽)으로 되었다.)은 신녀협 밑에 있다. 맑은 못의 검푸른 물빛이 마치 청옥과 같다. 북쪽 언덕의 넓다란 반석은 노닐 만하다. 물이 깊은 것은 마땅히 9곡 중에 첫째가 될 것이며, 또한 배를 띄울 만하다. ( 「산행일기」 )

   벽력암망단기를 지나서 조금 가다보면 도로 옆에 2곡임을 알려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은 물길이 휘돌아가는 곳에 있다. 이곳은 위에서 흘러오는 물과 아래로 흘러가는 물이 다 보인다. 아마도 김수증이 명명한 청옥협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계곡임에 틀림없다. 그렇기 때문에 명칭에도 계곡을 뜻하는 ‘협(峽)’이 들어간 것이다. 김수증계곡을 강조했다면, 정약용은 ‘못’에 주목하였다. 그래서 이름에 ‘담(潭)’이 들어갔다.

 

   정약용이 명명한 청옥담은 표지석 근처에서 찾을 수 없다. 청옥담을 찾아 오던 길을 다시 내려갔다. 직각으로 만들어진 콘크리트 옹벽이 끝나는 곳에서 계곡으로 내려갔다. 몇 발자국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표지석에서는 잘 보이지 않던 넓은 바위가 계곡 한쪽을 온통 차지하고 있다. 너럭바위란 것이 이런 거구나 라는 경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넓은 바위다! 바위는 바로 옆에 깊은 물을 끼고 있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의 검푸른 물색은 두려움마저 들게 한다. 정약용이 말한 청옥같은 물빛과 넓은 바위, 배를 띄울만한 수량이 바로 눈앞에 펼쳐져있다. 표지석에서 계곡만 바라보고 간다면 청옥담의 절경은 끝내 보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2곡에서는 계곡과 함께 못과 그 옆의 너럭바위를 감상해야만 한다.

이하곤청옥협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5리를 가니 흰 돌이 울퉁불퉁하고 맑은 물이 쏟아져 나와 아래에 조그만 웅덩이를 만든다. 좌우로 봉우리와 절벽이 천 길이나 깎은 듯 서 있다. 마을 사람에게 물으니 소보삽(小洑揷)이라 한다. 곡운(谷雲)구곡(九曲) 중에 청옥협(靑玉峽)이다.”

   이하곤의 시선은 김수증정약용의 것을 합쳐놓은 것 같다. 그러나 청옥담을 조그만 웅덩이라고 표현한 것에 대해선 동의할 수 없다. 어쩌면 이하곤이 유람하던 당시에는 수량이 적어서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었으리라. 그런대 마을 사람들이 이곳을 ‘소보삽’이라 부른다고 기록한 것 때문에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김수증1곡 방화계를 마을 사람들이 ‘소복삽’이라 부른다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이하곤이 알고 있던 청옥협은 방화계가 아닐까? 자세한 주변 묘사가 부족한 것이 못내 아쉽다.

 

   김수증의 아들인 창국(昌國)은 표지석에 자신의 시를 이렇게 남겼다.

 

이곡이라 옥으로 깎은 우뚝한 봉우리에,

흰 구름 누른 잎 가을 모습 띠고 있네.

돌다리 가고 가서 신선세계 가까울수록,

시끄런 속세 아득히 벗어남을 알겠네.

 

二曲峻嶒玉作峯 白雲黃葉映秋容

行行石棧仙居近 已覺塵喧隔萬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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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옥담>

 

 

곡운의 3곡인 정녀협과 다산의 5곡인 신녀회

 

○ 1리쯤 가니 여기정(女妓亭)이 있다. 신녀협(神女峽)으로 고쳤다가 또 정녀협(貞女峽)으로 이름 붙였다. 소나무 있는 벼랑은 높고 시원해 수석(水石)을 굽어보니 매우 맑으며 밝다. 그곳에 이름붙이길 수운대(水雲臺)라고 하였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전하길 이곳은 매월당(梅月堂)이 머물며 감상한 곳이라고 해서, 후에 청은대(淸隱臺)로 고쳤다.(「곡운기(谷雲記)」)

신녀협(神女峽)벽의만(碧漪灣) 동쪽 한 화살 사정거리에 있다. 상ㆍ하 두 소용돌이를 이루는데, 위에 있는 소용돌이는 명옥뢰(鳴玉瀨)와 견줄 만하고, 아래 있는 소용돌이는 너무나 기괴하여 형언할 수 없다. 양쪽의 언덕이 깎아지른 벼랑처럼 서있는 협곡이 아닌데도 협(峽)이라고 이른 것은, 대개 그 웅덩이의 형태가 마치 두 언덕이 협곡을 이룬 것 같기 때문이다. 우뢰소리가 나고 눈처럼 흰 물결이 용솟음치며 돌 색깔 또한 빛나 반들반들하다. 과연 절묘한 구경거리이다. ( 「산행일기」)

   청옥협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김수증이 말한 대로 탁 트여 빛이 있는 것처럼 환히 보인다. 봉우리들 사이의 계곡만 보이다가 비로소 인가가 보이는 넓직한 들판이 조금씩 보인다. 마치 「도화원기」에서 개울을 따라가다가 복사꽃 만발한 도화원이 나타나듯, 그렇게 갑자기 나타난다. 조금 가면 왼편으로 물안교가 보인다. 물안교 건너편으로 논과 밭이 보이고 그 사이에 농가가 군데군데 있다. 조금 더 가면 정자가 보인다. 정자 앞의 표지석은 이곳이 3곡임을 알려준다. 그런데 표지석에는 신녀협으로 되어있다. 김수증은 처음에 신녀협으로 했다가, 나중에 정녀협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처음에 정자의 이름은 수운라고 했다가 뒤에 청은대라고 고친 것을 따라 현재 새롭게 지어진 정자의 이름을 청은대라고 하면서, 3곡의 명칭은 예전의 이름대로 기재한 이유는 무엇일까?

 

   청은대 위에는 멀리서 온 부모와 외출 나온 군인이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다. 사창리에 군부대가 많다는 말이 실감난다. 청은대에 오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뭉게 구름 아래 늠름한 화악산 자락이다. 정녀협은 정자 밑으로 바로 내려다보인다. 무성한 나뭇가지 때문에 자세하게 보이진 않지만 흰색의 바위와 그 사이의 푸른 물이 범상치 않다. 화악산을 배경으로 청은대를 찍었다. 청은대 뒤편의 길을 따라 내려가니 파라솔 아래 앉아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들이 먼저 다가온다. 절대 물로 들어가면 안 된다고 몇 번이고 주지시킨다. 매년 물놀이 사고가 일어나는 위험한 곳이라는 엄포도 잊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위험을 알리는 현수막이 주변 곳곳에 걸려 있다.

 

   제일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은 하얀색의 바위다. 속살처럼 하얀 바위는 청옥담의 바위처럼 하나로 이루어졌다. 물 건너의 바위는 용암이 흐르다 굳은 것과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더욱 기이하다. 양쪽의 하얀 바위 사이를 흐르는 파란 물은 원색이다.

나만 이런가? 많은 답사에도 불구하고 나의 이목을 끌은 것은 하얀색의 바위였다. 청은대 옆에 설치된 안내판에도 바위에 대한 해설만이 자세하다. “곡운구곡 일대는 화강암이 노출되어 있어 비경을 이루고 있는데, 특히 화강암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편상절리 구조를 볼 수 있다. 편상절리는 지하 깊은 곳에서 만들어진 화강암이 지표로 드러날 때, 암석을 누르던 압력이 제거되어 팽창하는 과정에서 암석에 수평방향의 결이 발달한 것이다. 곡운구곡의 제3곡 신녀협과 제4곡 백운담 일대에서는 편상절 리가 발달한 넓고 평평한 화강암 반석을 잘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정약용은 소용돌이치며 흘러가는 물에 시선을 던졌다. 정녀협 위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은 명옥뢰 견줄 만 하고,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물은 기괴하여 형언하기 어렵다고 묘사했다. 그래서 ‘신녀회(神女滙)’라고 했던 것이다. 정약용의 눈을 쫓아 보니 과연 그러하다. 수많은 답사 이후에야 화강암의 반석과 그 사이의 푸른 물 뿐만 아니라, 위와 아래의 소용돌이치는 여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기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김시습의 발자취이다. 지금 청은대가 서 있는 곳은 김시습이 머물며 감상하던 자리이다. 김수증은 이곳을 수은대라고 이름을 붙였다가, 김시습이 머물던 곳이라는 것을 알고 청은대로 바꿨다.

김시습은 여기서 하염없이 바위와 물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자신의 울분과 고독을 바위처럼 하얗게 탈색시키고 싶었을까? 물처럼 맑게 자신을 정화시키고자 했을까? 한참 동안 바라보니 조금이나마 속세의 때가 벗겨진 것 같다.

 

그러나 조선 영조대 오원(吳瑗:1700~1740)매월당을 생각하며 시름에 잠겼다.

  " 1리쯤 내려가 3곡인 신녀협(神女峽)을 만났다. 기슭은 점점 높아지고 계곡은 점점 넓어진다. 평평한 바위는 손바닥 같은데 점점 기울어지고 깎여지면서 밑으로 내려가니 흐르는 물은 더욱 내달린다. 서쪽은 매월당(梅月堂)의 터인데 청은대(淸隱臺)라 부른다. 차가운 물에 씻고 오래된 나무를 어루만지며 이리저리 걸으니 슬픔이 일어나 떠날 수 없다. 언덕에 올라 바라보니 시원하게 열렸다. 소나무 그늘 짙은데 서늘한 회오리바람이 나무를 흔든다. 마음은 슬프고 텅 빈 듯 쓸쓸하다. 서쪽을 돌아보니 해가 막 지려고 한다. "  (「곡운행기」, 『월곡집』)

   오원은 21세에 아버지와 함께 곡운에 와서 삼연 김창흡 만났다. 이때의 기록이 「곡운행기(谷雲行記)」이다. 그는 1723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728년 정시문과에 장원하여 문명을 떨치게 된다. 영조가 탕평책을 펼쳤을 때 오원은 사간원 정언으로 의리를 앞세워 반대하다가 삭직되기도 했다. 이후 유배를 가게 된 민형수를 구원하려다가 다시 삭직되었다. 그는 권력에 굴하지 않고 직언하여 당시 사림들의 신망을 받았다. 대쪽 같은 그의 성품은 매월당의 터를 보면서 불의에 굴하지 않았던 그를 생각하고 가슴아파했던 것 같다.

 

   김수증의 조카인 창집(昌集)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겨 지나는 사람들이 읊조리고 있다.

 

삼곡이라 신녀 자취 밤배에 묘연한데,

텅 빈 누대 소나무와 달만이 천 년을 지켜왔네.

청한자(淸寒子)의 아취 초연히 깨쳤나니,

흰 돌에 솟구치는 여울 너무도 아름답네.

 

三曲仙蹤杳夜船 空臺松月自千年

超然會得淸寒趣 素石飛湍絶可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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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구곡도 중 신녀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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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은대>

<정녀협>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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