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선동은 어디에 있는가?
김수증의『곡운집(谷雲集)』을 읽다가「칠선동기(七仙洞記)」를 만났다. 칠선동은 도대체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강원도에 칠선동(七仙洞)은 없었다.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지리산에 칠선동(七仙洞)이 있을 따름이다. 김수증이 화천에서 은거하였기 때문에 혹시나 해서 화천문화원 홈페이지로 들어가 사내면의 지명유래를 찾아보았다. 여기저기 찾다가 광덕리를 클릭하여 몇 개의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맹대리(孟垈里)에 대해“광덕리의 옛 지명. 조선시대 때 국난시 임금의 피신을 위해 호위병을 주둔시킨 세 지역 중 하나. 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이 맹(孟)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하여 맹대(孟垈)라 불린다는 설도 있다”고 알려준다. 그리고 칠선동(七仙洞)에 대해“폐교된 보명분교 뒤쪽 골짜기를 일컫는다. 일곱 신선이 내려와 노닐다 쌍선암에서 소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부근에 쌍선암이 있다”라고 적고있다.
조금씩 실마리가 풀렸다. 지도를 펼쳐보니 맹대리는 지금의 광덕2리이고, 칠선동은 현재 유원지로 유명한 광덕계곡의 지류임을 보여준다.
나는 90년대 후반에 이곳을 여러 번 지나치곤 했었다. 그때 아내는 신철원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고, 나는 원주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주말부부였기 때문에 토요일 오후마다 할부로 산지 얼마 안 되는 조그만 차를 끌고 세 시간 정도를 달렸다. 처음에는 춘천을 경유해서 가평을 지나 청평 못 미쳐 우회전하여 현리 쪽으로 핸들을 돌렸다. 운악산을 지나고 일동을 지난 다음 산정호수 입구에 있는 운천을 지나서야 신철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신철원 입구에 있던, 적의 탱크 침입을 막기위해 콘크리트로 거대하게 설치한 터널 같은 구조물이 전방지역임을 피부로 느끼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가평 방향으로 다녔으나 화천 사창리 방향으로 가는 길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종종 사창리 길을 달렸다. 사창리에서 신철원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다. 사창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육단리와 김화가 나오는데, 그곳에서 남서쪽으로 향하면 신철원이다. 사창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면 광덕리 방향이다. 광덕리 헌병초소에서 신분증을 보이고 목적지를 밝히곤 했다. 꼬불꼬불 고개를 돌다가 정상에 다다르면, 강원도와 경기도의 경계이다. 그 당시에도 정상 부근에 등산객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는 춘천에서 사창리로 진입하는 길이 무척이나 꼬불꼬불하였고, 광덕계곡 뿐만 아니라 경기도 쪽 백운계곡도 멀미나도록 굽이쳤다는 기억만이 남아있다. 또 하나 있다. 그래도 계곡의 경치는 아름답다고 얼핏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마음 급한 주말부부는 중간에 내려 경치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내가 알고 있는 광덕계곡에 대한 기억은 이것 뿐이다. 헤어보니 10여 년이 되어간다. 이제야 김수증이 유람한 칠선동이 광덕계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칠선동기(七仙洞記)」를 통하여 다시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이다.
칠선동(七仙洞)을 유람하고 쓴 글이 생각보다 많은 것에 깜짝 놀랐다. 물론 칠선동(七仙洞)만 유람하고 쓴 글은 두 작품이지만, 주변을 유람하다가 칠선동에 발길을 들여 놓은 것을 포함하면 모두 여섯작품이나 된다. 물론 나의 게으름 때문에 미처 접하지 못한글을 포함시킨다면 더 나올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 작품은 김수증(金壽增)의『곡운집(谷雲集)』에 실려 있는「칠선동기(七仙洞記)」이다. 1677년에 지어졌다. 두 번째 작품은 김수증이 1678년에 지은「중유칠선동기(重遊七仙洞記)」이다. 세 번째 작품은 이하곤(李夏坤;1677년~1724년)의 문집『두타초(頭陀草)』에 실린「동유록(東遊錄)」이다. 이하곤은 1714년 3월에 관동을 유람하고 금강산을 다녀온 후「동유록(東遊錄)」을 지었는데,「 동유록」속에 칠선동과 관련된 내용이 들어있다. 김수증의「칠선동기」보다 내용이 더 풍부하다. 네 번째 작품은 어유봉(魚有鳳;1672~1744)이 1715년에 지은「동유기(東遊記)」이다. 어유봉의 문집인『기원집(杞園集)』속에 있다. 다섯 번째는 오원(吳瑗;1700~1740)의『월곡집(月谷集)』에 들어 있다. 오원은 1720년 아버지와 함께 곡운(谷雲)을 방문하여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을 뵙고「곡운행기(谷雲行記)」를 작성하였다. 여섯 번째 작품은『뇌연집(䨓淵集)』의 저자인 남유용(南有容; 1698년~1773년)이 1722년 3월에 부친의 임소인 영평(永平)을 다녀오고 지은「유동음화악기(遊洞陰華嶽記)」이다.
여러 작품을 골고루 참고하되, 첫 번째 작품인 김수증(金壽增)의「칠선동기(七仙洞記)」를 따라 칠선동을 걷는다.
곡운구곡보다 더 뛰어난 곳이 있으랴
" 나는 곡운(谷雲)의 귀운동(歸雲洞)을 차지하여 살았다. 여기서 서쪽으로 10여리 떨어진 곳은 백운산(白雲山)의 동쪽 갈래이다. 수석(水石)이 빼어나다는 말을 듣고 한번 가보고 싶었으나 머뭇거리다가 가지 못했다.
게다가 내가 머무는 곳의 수석도 기이하고 훌륭하여, 그 곳이 여기보다 반드시 뛰어나지 않으리라 여겼다. 그러하니 어찌 가까운 곳을 버려두고 먼 곳을 찾아야만 하겠는가? " (김수증(金壽增),「 칠선동기(七仙洞記)」,『 곡운집(谷雲集)』)
김수증(金壽增)은 현종 11년인 1670년에 지금의 화천군 사내면 용담1리에 땅을 마련하고 집을 짓기 시작했다. 그 후 숙종 1년인 1675년에 남인(南人)이 집권하여 동생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과 송시열(宋時烈)이 유배되자, 벼슬을 그만두고 용담리에 들어와 살게 된다. 그는「곡운기(谷雲記)」에 그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 하였다.“ 내가 골짜기 가운데로 가서 집을 경영(經營)하였다. 경술년(庚戌年;1670년) 가을에 시작하여 몇 년 만에 겨우 일곱 칸의 띠집을 지었다. 을묘년(乙卯年;1675년) 겨울에 온 집안이 와서 살았다. 그 후에 또 초당(草堂) 세 칸을 짓고 편액을 곡운정사(谷雲精舍)라 했다. 또 농수정(籠水亭)을 짓고, 가묘(家廟)를 세웠다. 좌우에 아이들의 방을 짓고 마굿간, 행랑, 부엌 등의 부속 건물을 간략하게 구비했다”이 시기에 김수증은 자신의 호를 곡운(谷雲)이라고 하였고, 이후 지금의 사창리 인근은 곡운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수증이 처음 자리잡은 귀운동(歸雲洞)에 대한 설명은「곡운기(谷雲記)」에 자세하다. 청람산(靑嵐山)의 가운데 지맥이 와룡담(臥龍潭)에 이르러 다한다. 울창한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와 동북쪽을 베고 서남쪽을 향하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동서로 수백 보이고 남북으로 백여 보이다. 물의 형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활을 당긴 형세이다. 그 안은 평탄하고 넓으며 온화하고 그윽하여 농사지으며 살만하다. 화악산의 푸른빛이 책상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 앞에는 용담(龍潭)이 있어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
지금의 용담리 주변을 묘사한 것이다. 주변의 산과 계곡만이 곡운이 은거하였던 당시를 보여줄 뿐, 곡운정사는 사라지고 민가 몇 채와 군부대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춘천에서 사창리로 향하다가 사창리에 거의 다 왔을 때 곡운구곡 중 3곡인 신녀협(神女峽)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큰 길을 따라 곧바로 가면‘보병 27사단’을 알리는 입간판이 보인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쪽으로 좌회전 하면 용담리로 갈 수 있다. 물론 사창리에서도 접근할 수 있다. 가다보면 왼쪽 길가에 하얀색 돌이 세워져 있다. 각각 4곡인 백운담(白雲潭), 5곡인 명옥뢰(鳴玉瀨), 6곡인 와룡담(臥龍潭) 앞에서 곡운구곡 중 하나임을 알려준다. 바로 와룡담 뒤쪽의 마을이 귀운동(歸雲洞)이다. 7곡인 명월계(明月溪), 8곡인 융의연(隆義淵), 9곡인 첩석대(疊石臺)도 용담리에서 걸어서 십여분 안에 있으니, 칠선동에 대해 흥미가 일어나지 않은 것도 이해할 만하다.
맹대리로 향하다
" 정사년(丁巳年;1677) 9월 25일에 진사(進士)인 이사함(李士涵)과 이자삼(李子三)이 먼 곳으로부터 찾아왔다. 산수(山水)에 대해 평론하다가 대화가 칠선동(七仙洞)에 이르게 되었다. 드디어 함께 말을 몰았는데, 아들과 사위들을 이끌고 갔다. 맹남촌(孟男村)에 이르니 마을은 그윽하고 고요했으며 넓고 한적하여 고요히 골짜기를 찾아드는 정취가 있다. "「( 칠선동기(七仙洞記)」)
1677년 김수증은 손님과 아들, 사위를 데리고 칠선동으로 향했다. 곡운구곡 중 7곡인 명월계에 있는 영당교를 건너자 마자 오른쪽으로 가야한다. 얼마가지 않아 8곡인 융의연과 9곡인 첩석대가 나온다. 계속 앞으로 가다 보면 삼거리가 나온다. 오른쪽은 사창리 방향이고 왼쪽은 서울 방향이다. 왼쪽으로 가다보면 예전처럼 헌병이 삼거리에서 전방을 주시하고 있다. 뒤편에 광덕초등학교가 보인다. 삼거리에서 광덕계곡 방향으로 가다보면 광덕2리다. 바로 여기가 김수증이 언급한 맹남촌(孟男村)이다.
칠선동을 유람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맹남촌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특히 이하곤(李夏坤) 기록이 자세하다.“ 동쪽으로 3리를 가니 산을 등지고 계곡을 끼고 있는 마을이 있다. 그윽한 운치가 있으니 이 마을이 맹남촌(孟男村)이다. 옛날에 맹씨(孟氏) 남자들이 여기에 살았기 때문에 이름 붙였다고 한다” 화천문화원의 홈페이지에 실려있는 맹대리(孟垈里)에 대한 설명 중‘처음 마을을 개척한 사람들이 맹(孟)씨 성을 가진 사람이라 하여 맹대(孟垈)라 불린다’는 것과 일치한다. 맹남촌(孟男村)의 이름이 바뀌어 맹대리(孟垈里)로 되었다가 지금의 광덕2리가 된 것이다.
광덕리로 향하는 길 왼쪽으로 유원지가 계속 보인다. 마을 한가운데를 흐르는 개울은 바위와 소(沼)로 이루어졌다. 광덕2리 마을 입구엔 커다란 장승이 반겨준다. 마을을 수호해주던 1000년 소나무가 폭설에 의해 부러지게 되자 장승을 만들어 마을의 수호신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는 표지판이 옆에 서있다. 주유소 옆에서 토마토농장을 운영하시는 마을 사람에게 맹대리의 유래에 대해 물어보니 잘 모르겠단다. 맹씨(孟氏) 성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많은가 물으니, 맹씨 성을 갖고 있는 사람은 한사람도 없다고 한다. 마을 이곳저곳에 비닐하우스가 많은데 대부분 토마토를 재배하고 있다. 사창리에서 매년 토마토축제가 열린다고 귀뜸해주며 꼭 오라고 하신다. 광덕계곡에 대하여 몇 가지 말씀을 해주시는데, 길을 확장하면서 예전의 아름다웠던 곳이 많이 없어졌다고 안타까워하신다. 토마토를 만원어치 사니 검은 비닐봉지가 제법 묵직하다.
칠선동 유람을 시작하다
" 서쪽으로 수백 보를 돌아 계곡 어귀로 들어갔다. 흰 돌은 올망졸망하고 두 시내가 합쳐진다. 하나는 북쪽에서 흘러오고, 다른 하나는 서쪽에서 흘러온다. 드디어 서쪽으로 갔다. 몇 리를 가서 멈춰서니 맑은 물이 고였다가 쏟아져 내리는 것이 모두 7곡(曲)이다. 기이하면서 규모가 큰 것은 백운담(白雲潭)보다 못하지만 온화하며 고상한 것은 오히려 백운담을 능가한다. 시내의 돌 위에 나란히 앉아 산에 열려있는 열매를 따서 갈증을 해소하였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으며 소나무와 삼나무가 울창하고 노을은 고개 마루에 걸려 있다. 이 모든 것이 즐겁게 하여 돌아가는 것을 잊게 하지만 오래도록 머무를 수 없었다. " (「칠선동기(七仙洞記)」)
광덕리의 시내는 길을 따라 흐른다. 주유소를 지나 조금 더 가면 다리가 나온다. 자세히 보니 다리 이름이 맹대교이다. 맹대교는 바로 칠선동의 시작점이다.
북쪽에서 흐르는 계곡물과 서쪽에서 흐르는 계곡물이 합쳐지는 이곳이 1곡인 쌍계협(雙溪峽)이다. 김수증은「칠선동기(七仙洞記)」에서 구체적으로 7곡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1678년에 칠선동을 다시 찾은 후 남긴「중유칠선동기(重遊七仙洞記)」는 다르다. "다시 칠선동을 유람하고, 굽이마다 품평하고 이름을 붙였다. 1곡은 쌍계협(雙溪峽), 2곡은 백석뢰(白石瀨), 3곡은 탁영계(濯纓溪), 4곡은 회승대(會勝臺), 5곡은 옥렴천(玉簾泉), 6곡은 공심담(空心潭), 7곡은 심진원(尋眞源)이다. 7곡 중에서 제4곡과 제5곡은 더욱 기이(奇異)하여 형언할 수 조차 없다.”라고 7곡의 명칭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고민은 시작된다. 김수증이 말한 7곡을 찾는 고단한 여정이 앞에 놓여있을 뿐이다.
1곡:두계곡물이 만나는 쌍계협
나는 지금 칠선동이 시작되는 쌍계협에 서 있다. 한참 동안 이곳저곳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아스팔트길 확장공사 때문에 계곡은 시뻘건 속살을 드러내놓고 있다. 시멘트로 조성된 회색빛 축대는 견고하게 서있다. 인공물들은 김수증이 유람하던 계곡을 많이 망가뜨렸지만, 입구의 바위돌과 하얗게 부서지는 계곡물은 험한 세월을 관통하여 예전의 모습을 보여주는 듯 하다.
김수증의 글에는 없지만, 이 부근에 정자가 있었다. 어유봉은『기원집(杞園集)』에서 “수십 보를 가니 계곡물이 하나는 서북쪽에서 흘러오고, 하나는 동북쪽에서 흘러와서 합류한다. 이곳이 곡운(谷雲) 선생이 이름붙인 쌍계협(雙溪峽)이다. 서쪽 절벽 높은 곳에 새로 모정(茅亭)을 지었으니, 지은 사람은 성규헌(成揆憲)이라 한다. 계곡을 건너 위로 올라가 내려다보니 수석(水石)은 매우 청량하다. 강가에 있는 정자의 뛰어남과 같은 것이 있다.”라고 언급하고있다.『 뇌연집(䨓淵集)』의 저자인 남유용(南有容)도 “성씨(成氏)의 정자에 오르니 함께 유람하던 사람들은 모두 비를 피해 올라와 쉬고 있었다. 정자는 폭포에서 동쪽으로 열 발자욱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 자못 사람의 마음을 상쾌하게 하고 트이게 해준다.”라고 꼼꼼하게 기록하고 있다. 쌍계협을 관망할 수 있는 곳에 세워진 정자는, 칠선동을 찾은 탐승객들에게 휴식의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쌍계협에서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와룡암(臥龍巖)과 와룡소(臥龍沼)이다. 이하곤(李夏坤)은 다른 탐방객들이 놓친 쌍계협을 눈썰미 있게 포착한 후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긴다. “ 너럭바위 위를 흘러 아래에 조그만 연못을 이룬다. 돌에는 주름이 있는데 꿈틀거리는 것이 용과 같다. 발톱과 뿔이 모두 있어서 와룡암(臥龍巖)이라 하였다. 돌 위를 걸으며 물고기를 보고, 흐르는 물로 가서 발을 담그니 매우 마음에 맞는다.” 가드레일이 설치되어 있어서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도 선인의 자취를 찾는 것 만큼 어렵다. 맹대교 입구 왼편에 자그마한 공터가 있다. 공터에서 맹대리쪽으로 조금 내려가다가 가드레일을 넘어 계곡으로 내려갔다. 바로 쌍계협의 전경이 보인다. 와룡암과 모정을 확인하기 위해 신발을 신은 채로 물을 건넜다. 먼저 모정(茅亭)을 찾기 위해 산으로 향했다.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만든 콘크리트로 만든 용수로를 통과해 조금 올라가니 군사용 참호가 맞이한다. 군용 전화선은 어지러이 엉켜있다. 풀과 나무를 손으로 헤쳐가며 정자터를 찾으니, 주변에 와편(瓦片) 몇 개가 풀숲에 숨어 있다. 답사를 하는 사람들은 알리라.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기록상에 있던 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을. 그러나 기쁨은 잠시, 흔적도 없이 마구 파헤쳐진 정자터 때문에 아쉬움으로 변해버렸다. 나무는 울창하여 가지 사이로 간신히 쌍계협이 보인다. 정자터에 앉아 한참 동안 옛 기록을 다시 읽으며 선인들의 답사를 상상하였다.
계곡으로 내려와 와룡암을 찾았다. 너럭바위와 그 밑에 조그마한 물웅덩이인 와룡소는 아직도 남아 있으나 용의 발톱과 뿔을 찾을 수 없다. 나의 상상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면 승천을 해서 볼 수 없는 것일까? 발을 담그고 이리저리 헤엄치는 물고기 만을 바라보며 아쉬움을 달랠 수밖에 없었다. 위쪽에는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하던 몇몇이 자전거를 팽겨치고 계곡물에 온몸을 맡긴 채 물장난을 치고있다.
2곡:눈처럼 하얀 백석뢰
맹대교를 지나자마자 길이 갈라진다. 오른쪽으로 가면 철원이 나오고, 왼쪽으로 가면 서울과 이동으로 갈 수 있다고 이정표는 화살표로 알려준다. 서울 방향은 광덕계곡을 통과해야만 한다. 한 구비 도니 장수유원지가 보인다.
계곡으로 내려가자 빨간색과 파란색의 그늘막이 계곡의 양쪽을 먼저 차지하고 있다. 계곡의 도로 쪽은 커다란 바위돌을 이용해 제방을 쌓아서 선인들이 남긴 글속의 정취를 온전하게볼 수 없다. 이하곤은 “점점 앞으로 수백 보를 가자 갑자기 푸른 숲 가운데 눈처럼 하얀 것이 보여 시선을 빼앗는다. 급하게 가서 보니 돌 색깔은 산뜻하고 깨끗하다. 온 시내가 밝아 사람의 혼을 흔들어 놓는다. 나는 곧바로 그 위에 다리를 뻗고 앉았다.”라고 기술하였다. 오원은 “거슬러 수십 보를 올라가니 너럭바위는 하얗고 책상처럼 평평하여 수많은 사람이 앉을 만하다. 이것이 진실로 기이한 경관이지만 시골사람은 감탄할 만한 뛰어난 경치임을 알지 못한다.”라고 적고 있으니, 백석뢰(白石瀨)를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김수증은 7곡의 이름만 알려주었을 뿐이다. 7곡의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지 않은 것은 왜일까? 탐승객들에게 선입견을 주어서 각자의 심미안을 훼방할까 꺼려서 일까? 김수증의 배려심은 심미안을 갖고 있지 못한 평범한 여행자의 눈을 시험한다. 그래서 인지 후대의 탐방객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였다. 어유봉은 “이름을 헤아려 뛰어난 경치를 증험하여 선생님이 그 당시 이름붙인 뜻을 알려고 했다. 어떤 것은 의심나고 애매하다.”라고 고충을 토로하였다. 김수증의 심미안과 흥취를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느끼고 싶지만, 초보자인 나도 어유봉처럼 의심스럽고 애매하기만 하다. 현재 정확하게 7곡의 위치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유준영이 추정한 지도 속의 위치가 책 한편에 실려있을 뿐이다.
마침 여기저기 사진을 찍는 나를 보고 의심어린 눈으로 다가오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행정기관에서 나온 사람으로 보는 눈치다. 이런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답사를 하면서 사진을 찍으면 뜨악한 눈으로 보다가 왜 찍느냐고 날선 질문을 한다. 먼저 인사를 하고 찾은 이유를 말하자 이내 경계를 풀었다. 계곡 이름을 물어보니 광덕계곡이라고 한다.
혹시 칠선동이란 이름을 들어보았느냐고 물으니, 다시 무엇에 대해 물어보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여기서 장사를 한 지 10여년 밖에 되지 않아서 잘모르겠다고 한다. 그래도 이 계곡에서 장사를 하는 사람 중에 본인이 최고 고참이라는 말과 함께.
장수 유원지에서 다시 쌍계협 쪽으로 내려가다가 가드레일 넘어 내려갈 만한 곳을 찾아 계곡으로 내려갔다. 몇몇 곳을 빼면 계곡으로 내려가는 것 자체가 힘들다. 그저 도로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어림짐작으로 쌍계협에서 수십 보 또는 수백 보 될 만한 곳을 오르락내리락 하였다. 물에 빠지고 넘어지며 유심히 살펴보니 이하곤이 묘사한 곳과 일치하는 곳이 보인다. 쌍계협과의 거리는 수백 미터 정도이고, 흰바위틈 사이로 여울이 세차게 흐른다.
3곡:갓끈을 씻을 만한 탁영계
탁영계(濯纓溪)의 정확한 위치와 경관을 알려주는 자료도 없다. 그러나 탁영(濯纓)이란 이름이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을까? 탁영(濯纓)은 굴원(屈原)과 관련이 있을 듯싶다. 굴원은 춘추전국시대에 초나라의 왕족으로 태어나, 20대에 중책을 맡게 된다. 그러나 시기하는 사람의 중상모략으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유배되었을 때 그 유명한「이소(離騷)」를 써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고, 이 작품은 나중에 이소경(離騷經)이라 불리게 된다. 이 시기에 지어진 작품이「어부사(漁父辭)」이다. 귀양 시절에 만난 어부에게 혼탁한 세상과 함께 흐리게 살 수 없어 홀로 깨끗함을 누리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러자 어부가 “창랑(滄浪)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滄浪)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라고 말한 후 떠난다. 가이탁오영(可以濯吾纓) 중 ‘탁(濯)’과‘영(纓)’을 빌려온 것이 아닐까? 탁영은 갓끈을 씻는다는 것이다. 칠선동의 계곡물이 나의 갓끈을 씻을만큼 깨끗하였기 때문에 탁영계(濯纓溪)라고 이름 붙였을 것이라 추측해 본다.갓끈을 씻을 만한 곳이 어딜까? 백석뢰를 떠나 계곡을 따라 오르기 시작했다. 계속 이어지는 올망졸망한 돌들과 커다란 바위들. 어제 내린 비 때문에 1차 답사 때와는 달리 탁류지만, 계곡을 울리는 물소리는 여전하다. 나의 경우라면 어디에서 편히 앉아 갓끈을 씻겠는가? 시냇가에 즐비한 돌과 흐르는 물어디나 씻을 만한 곳이다. 그래서 적당한 곳을 찾는 것은 더 어려웠다. 조금 올라가니 김수증이 앉아서 갓끈을 씻었을 만한 너럭바위가 보인다. 아마 이곳이 3곡인 탁영계(濯纓溪)이리라. 탁영계에 앉아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씻으며 한참 동안 굴원과 김수증을 생각 하였다.
4곡:기이한 풍광의 회승대
김수증은 “제4곡과 제5곡은 더욱 기이(奇異)하여 형언할 수조차 없다.”라고 평한 바 있다. 회승(會勝)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회(會)를‘모으다’로 볼 수 도 있고,‘ 깨닫다’로 볼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승경(勝景)을 모으다’와 ‘승경(勝景)을 깨닫다’로 이해할 수 있다. 대(臺)는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높은 곳을 뜻한다.
장수유원지 부근의 위와 아래를 여러 차례 거닐었다. 계곡 이쪽과 저쪽을 건너다녔다. 주인 아저씨는 위를 가리키며 예전에 무당소가 있었으나 도로 확장과 홍수로 지금은 매몰되었다고 아쉬워한다.
여기 뿐만 아니라 예전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는 곳은 없다. 특히 도로 쪽은 인공으로 쌓은 돌들로 인해 볼썽사나운 모습을 하고 있다. 인공 석축물 밑에 하얀 너럭바위와 도로 오른쪽에 깎여나간 절벽이 옛 모습을 살짝 보여준다. 비록 계곡 오른쪽은 많이 변했지만, 왼쪽은 최고의 승경을 모은 듯 아름다운 풍광을 연출해 내고있다.
이따금 지나가는 비를 피해 유원지에 들러 감자전을 주문했다. 산속에 살아서 사람이 그리운지 주인집 개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감자전 몇 조각을 주고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어도 가만히 감자전을 먹는다.
5곡:구슬을 매달은 옥렴천
김수증은 옥렴천(玉簾泉)에 대해서도 기이(奇異)하여 형언할 수조차 없을 정도라고 말하며 4곡인 회승대와 나란히 극찬한 바 있다. 어유봉(魚有鳳)은『기원집(杞園集)』에서 옥렴천(玉簾泉)이 가장 기이하며 아름답다고 상찬하였다. 옥렴(玉簾)을 글자 그대로 해석한다면 옥으로 만든 주렴(珠簾)이다. 비유적으로 쓰여 ‘맑은물’‘, 폭포물’‘, 시냇물’ 등의 뜻을 지니기도 한다.
김수증과 어유봉이 말한 옥렴천은 어디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이하곤의 글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이하곤의 글을 잠시 보면,
" 절터에 이르러 비로소 말을 타고 갔다. 날은 저물고 배고픔은 심하였다. 시골집에 들어가니 주인 할머니가 조밥과 푸성귀를 바쳤다. 맛이 매우 좋았다. 또 1리를 가서 옥렴천(玉簾泉)에 도착하여 잠시 앉았다. 온통 계곡의 돌 들은 밝고 매끌매끌한 것이 옥을 쪼아서 만든 것 같다. 또 연못과 여울이 많은데 푸른색으로 맑다. 암벽(巖壁)은 기이하고도 가팔라 누런색과 푸른색이 서로 빛난다. 땅은 기름지고 넓으니 농사짓고 살만하다. "
라고 기록하였다.
회승대를 출발하여 올라갔다. 바위와 물이 고여있는 곳마다 유원지가 자리잡고 있다. 평상과 그늘막, 그리고 그늘막을 지탱하고 있는 줄은 계곡을 수 없이 갈라놓는다. 칠선동의 아름다움과 제일 동떨어진 것은 형형색색의 그늘막이다. 계곡의 물을 막아 물놀이할 수 있도록 만든 돌무더기들도 자연스럽지 못하긴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칠선동의 아름다움을 모두 가리진 못했다. 이하곤이 묘사한 곳을 찾아 계속 상류로 올라갔다. 변암산 휴게소와 덕골농원 앞의 계곡에 이르렀다. 이곳은 계곡 중에서 제법 넓은 곳이다. 농사짓고 살 만하다는 기록에 부합된다. 예전엔 이곳에 분교가 있을 정도로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계곡의 한쪽 면은 회승대처럼 온전한 모습을 찾기 어렵다. 그러나 산 쪽 바위들은 푸르스름한 빛을 어렴풋이 띠며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밑으로 맑은 물이 내달린다. 옥렴천에 걸맞는 곳이다.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곳에 어김없이 유원지가 자리 잡고 있는데, 여기도 어김없이 옥렴천을 따라 그늘막이 길게 늘어서 있다.
6곡:욕심을 비워주는 공심담
이하곤은 유람 도중 폐사지(廢寺址)를 경유하였다. 옥렴천(玉簾泉) 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잠깐 걷기도 하고 잠깐 말을 타기도 하면서 2리쯤 가니 시골집이 있다. 물가에 새로 지었다. 띠로 집을 짓고 소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었는데 매우 깊고도 고요하다. 마을 뒤로부터 북쪽으로 3리를 가니 폐사지(廢寺址)가있다. 말을 두고 지팡이를 짚고 계곡과 나란히 갔다." 다른 어떤 사람도 언급하지 않았던 폐사지(廢寺址)가 6곡인 공심담(空心潭)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않을까?
공심(空心)은 ‘텅 빈 마음’, 혹은 ‘마음을 텅 비게함’ 정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담(潭)은 ‘못’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면 ‘마음을 텅 비게 하는 못’ 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한참을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했다. 주변의 상인들에게 물어봐도 머리를 갸웃거릴 뿐이다. 혹 절터를 아시느냐 물어도 장사한 지 얼마 안 되어 잘 모르겠다는 답변 뿐이다. 공심담이 절터와 관련 있는지, 관련이 있다면 절터가 어디에 위치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쌍계협 바로 위에 위치한 백석뢰에서 삼직폭포까지 8~9리라 했고, 폐사지 부근의 공심담에서 5리를 가서 삼직폭포에 도착했다는 이하곤의 기록에 따른다면 절터는 삼직(三直)과 쌍계협의 중간 정도에 위치해야 한다. 따라서 지금의 파인밸리 펜션 위에 있는 너럭바위와 그 앞에 있는 물웅덩이가 공심담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마침 물놀이를 하는 한 가족이 보인다. 아이들은 물 속에서 계속 웃고, 부모는 그늘진 바위에 앉아 마냥 웃고 있다. 지금 이 순간만은 온갖 근심 걱정없는 마음이리라. 이것도 일종의 공심(空心)이 아닐까? 공심담에 발을 담그고 바위 그늘에서 땀을 식혔다.
7곡:참됨을 찾게 하는 심진원
어유봉(魚有鳳)은『기원집(杞園集)』에서 “심진원(尋眞源)은 더욱 더 맑고 그윽하다〔尋眞益淸幽〕”고 품평하였다. 심진(尋眞)은 ‘참됨을 찾다’혹은 ‘진리를 찾다’정도로 풀이할 수 있다. 원(源)은 근원이라는 뜻이다. 그러면‘진리를 찾는 물의 근원’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진원(眞源)을 참된 근원으로 보고 ‘참된 근원을 찾는 곳’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이와 같은 의미에 부합되는 장소가 어디일까? 머리를 부여잡고 왔다 갔다 하였으나 도무지 알 길이없다. 혹시 김수증의“또 그 위쪽으로 삼직협(三直峽)이 있다고 한다. 세속에서는 폭포를 ‘직(直)’이라고 한다. 폭포의 근원까지 다다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고 계곡 입구로 되돌아 나와 집으로 돌아왔다”라는 기록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유준영이 추정한 지도 속의 공심담과 심진원은 삼직폭포 가까운 곳에 표시되어 있다. 그런데 만일 7곡인 심진원이 삼직폭포와 가깝다고 한다면, 김수증이 폭포를 지척에 두고 발길을 되돌리지 않았을 것이다. 7곡인 심진원에서부터 삼직폭포까지의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폭포까지 가지 못하고 되돌아 갔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따라서 심진원(尋眞源)은 삼직폭포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공심담(空心潭)에서 상류로 올라가면 두 계곡이 만나는 부분이 있다. 왼쪽은 임도로 도마치 고개와 만나게 된다. 두 계곡이 만나는 곳 바로 밑에 커다란 소(沼) 가 있다. 이곳이 심진원이 아닐까?
가드레일을 넘어 계곡으로 내려갔다. 두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합쳐지면서 깊은 못을 만들었다. 한쪽의 바위는 물에 마모되어 반들반들하다. 다른 한쪽은 흰 색의 커다란 돌들이 여기저기 자연스럽게 자리잡고 있다. <계속>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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