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 김수증과 칠선동을 걷다-2

2015. 7. 24. 16:19여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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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폭포가 빚어낸 삼직협과 삼직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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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폭포)

 

   뛰어난 경관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7 포함되지 않은 곳이 삼직(三直)폭포이다. 김수증8 안에 넣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삼직협을 배려해서 7곡까지 언급한 것이 아닐까? ‘삼직협을 포함시키자 칠선동 8 완벽하게 완성되었다! ‘()’이 폭포를 뜻하기 때문에 삼직폭포라고 표기하는 것은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폭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삼직폭포라고 부르도록 한다. 김수증중유칠선동기(重遊七仙洞記)에서 또 그 위쪽으로 삼직협(三直峽)이 있다고 한다. 세속에서는 폭포를 직()이라고 한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남유용(南有容)뇌연집(䨓淵集)에서 나는 발원지까지 가기 위해 폭포 위쪽으로 거슬러 한참을 갔다. 그러나 다만 보이는 것은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뿐이다. 산 아래 상수리나무로 만든 집이 있는데, 노인이 넝쿨로 울타리를 고치고 있었다. 가서 계곡 물의 발원지를 물으니 매우 멀고 험하여 찾을 수 없다고 한다. 잠시 있다 비가 다시 내렸다. 옷이 모두 젖어 허둥대다가 오던 길을 찾아 되돌아왔다.”라고 적고 있다. 남유용은 폭포를 지나 지금의 광덕고개 정상 쪽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 같다. 폭포 주변의 풍경을 자세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쉬움을 해소해주는 기록이 있으니 바로 이하곤의 글이다. 이하곤은 『두타초(頭陀草)에서 다음과 같이 친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 5리를 가서 비로소 삼직(三直)에 이르렀다. 바닥은 한 섬 정도 크기인데 맑은 물이 덮고 있다. 형세를 따라 폭포를 이루고 있는 것이 셋이다. 길이는 각각 6~7()이다. 문득 조그만 연못으로 이어지는데 푸르면서 맑은 것이 수염을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옆에 노송(老松) 서너 그루가 있다. 크기는 모두 열 아름 정도이다. 크고 울창하게 뻗어 펼친 그림자가 연못에 드리우고 있다. 때때로 산바람이 불어와 연못에 비친 빛이 출렁거리니, 또한 하나의 기이한 것이다. 굽어보고 우러러보며 감상하다가 산 속의 해가 이미 지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이하곤폐사지로부터 5리를 더 올라가 삼직폭포에 도착하였다. 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상해교란 다리가 나타난다. 이 곳부터 삼직협(三直峽)이 시작된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마침 편안한 런닝 차림의 아저씨가 계셨다. 주변에 폭포가 있느냐고 물으니 산중턱을 가리킨다. 평상시에는 물이 떨어지는 것을 볼 수 없으나 비가 제법 내리면 폭포의 모습을 보여준다고 한다. 선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폭포가 세 개가 있어야 하는데 아저씨가 말하는 것은 폭포 흔적을 어렴풋이 알 수 있는 높은 산 중턱의 절벽이다. 계곡을 따라 더 올라가며 10여 년 전에 지나면서 얼핏 본 기억을 되살려 보았다. 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보면서 폭포라고 생각할 정도의 규모였다. 이하곤은 폭포의 크기를 각각 6~7()이라고 하였다. 어림대중으로 표현한 것을 감안하고, 또 길이의 단위가 시대마다 달라진 것을 감안한다면 10m 내외에 해당될 것이다. 조금 더 올라가니 규모가 크지는 않지만 우렁찬 소리를 내며 물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예전의 심한 커브 길을 곧게 펴면서 계곡의 모습이 많이 변형되었다고 한다. 폭포도 그 와중에 원래의 모습을 잃어버린 것 같다. 폭포 위로 와폭(臥瀑)이 하나 더 있다. 그리고 광암교를 지나 바로 위에 폭포 하나가 더 있으나 생각보다 규모가 크지 않다. 협곡은 남아있으되, 폭포는 인간들의 편리함 때문에 진면목(眞面目)을 잃어버린 채 콘크리트 옆에서 옛 모습을 조금만 보여줄 뿐이다.

 

  다리 밑으로 내려갔다. 예상대로 계곡의 바위들은 오랜 세월을 견뎌낸 자연스런 형태가 아니었다. 발파 작업을 위해 뚫은 구멍들이 군데군데 보이고, 바위들은 인위적으로 깨어져 생살을 보이며 누워있다. 길을 넓히고 다리를 놓는 과정에서 훼손된 모습이 너무도 적나라하였다. 비슷한 크기의 세 개 폭포는 처참하게 평탄화 되었고, 이제는 옛 글 속에서만 웅장한 모습을 간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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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폭포)                                                                                             ( 제3폭포)

 

 

 

칠선동아 미안하다

 

 

   "! 내가 산에 들어와서 산지도 오래되었다. 사는 곳 마다 제각기 우열과 고하를 품평하였으나, 유독 이곳만 처음부터 이름이 없어서, 일찍 와 유람하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긴다. 속세를 벗어난 맑고 그윽한 경계가 여기만한 곳이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나와 같이 산수를 탐하는 사람도 오히려 얄팍한 이목(耳目)에 한정되어 이곳을 놓칠 뻔하였으니, 또 다시 이곳보다 훨씬 뛰어난 곳이 있음을 어찌 알겠는가? 첩첩 산봉우리 속에 깊숙이 감추어져 살펴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  ( 칠선동기(七仙洞記))

 

   김수증이 산수를 향유하는 방법 중의 하나는 뛰어난 감식안으로 풍경의 우열과 고하를 품평하거나, 새롭게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곡운구곡(谷雲九曲) 뿐만 아니라 사창리 일대에 김수증이 새로 명명(命名)한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산수에 대해 뛰어난 감식안을 갖고 있던 그러한 그가 칠선동에 대해 선입견에 사로잡혔었노라고 고백하고 있다. 자신이 은거하는 곡운 부근에 곡운구곡(谷雲九曲)만한 것이 없다고 여겼었노라며, 이목(耳目)에 얽매이는 인간의 속성을 토로한다. 동시에 늦게야 칠선동을 방문한 것에 미안함을 표하고 있다.

 

   김수증칠선동의 경계를 한마디로 속세를 벗어난 맑고 그윽한 경계로 요약했다. 그러나 지금은 승경(勝景)을 찾는 피서객과, 피서객을 기다리는 사람과 알록달록한 그늘막과 평상 등으로 맑고 그윽한 경계를 맛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실망하긴 이르다. 눈을 지그시 감고 너럭바위에 앉아 흐르는 계곡물에 발을 담그고 있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300여 년 전의 맑고 그윽한 경계로 바로 돌아갈 수 있다.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협칠선동에 대한 자신의 심미안을 이하곤에게 말한 적이 있었다. 칠선동(七仙洞) 수석(水石)의 뛰어남이 화음(華陰) 계곡의 시원한 바람보다 낫다면서, 다음에 한번 가보면 이렇게 말한 것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이하곤은 직접 와 보고 선생님의 평이 과연 맞다고 인정하며 장편의 시를 남긴다.

 

 

아름다운 산수(山水) 있단 말 들으면, 굶주린 사람 음식을 구하듯.

하물며 칠선동(七仙洞)은 예전부터 명성을 들었네.

일찍이 농암(農巖) 선생 평하시길, 이곳은 쉽게 얻을 수 없다고.

내 화음(華陰)에서 젊은 사람 구해 꺼림 없이 탐승하네.

맹남촌(孟男村)서 말에서 내려 와룡석(卧龍石)에서 거니니

갑자기 푸른 숲 사이로 눈처럼 하얀색이 보이자,

놀라 소리치며 갈 줄 모르고 발걸음을 잊었네.

조물주도 사치 심해 땅에다 온통 백옥을 깔아놓았구나.

긴 것은 명주 같고 넓은 것은 돗자리 같네.

맑은 물로 물길 만드느라 오랜 세월 갈고 닦았으리.

옥 주렴 드리웠다가 느닷없이 바퀴를 굴리자

세차게 흐를 땐 천둥소리, 천천히 흐를 땐 거문고 소리

수석(水石)은 저마다 모습을 드러내어 눈을 즐겁게 하는구나.

걸음걸음 더욱 기이하며 뛰어나고, 가고 갈수록 깊고 후미지네.

푸른 산 잇달아 맞이했다 보내고 푸른 못에서 씻고 양치질하네.

초조한 마음 없으니 삼첩(三疊) 폭포 때문일세.

() 임금의 음악 듣는 듯해 나의 마음 흡족케 하네.

거의 화양(華陽)과 짝할 만하니 나머지는 아랫사람에 맡기네.

비로소 농암(農巖)의 평 믿으니, 탁월하게 뛰어난 안목 지니셨네.

고견(高見)은 아직 귀에 쟁쟁하나, 돌아보니 옛날 일이로구나.

스승님 모시긴 어려우니, 무덤의 풀 벌써 일 년이 됐구나.

머리 들어 백운산(白雲山) 바라보니, 흐르는 눈물 마음을 적시네.

 

聞有佳山水如飢者求食况玆七仙洞聞名自宿昔

農岩甞品題謂此不易得我自華陰來賈勇恣探歷

下馬孟男村徘徊卧龍石忽見靑林間皓然來雪色

驚呼不覺前我乃忘我脚天公亦太奢布地盡白玉

或長如匹練或廣如筵席淸泉此爲道萬古相磨琢

瓊簾方下垂忽復轉轂軸怒者轟雷皷舒者韵琴筑

水石各逞態聊以娛我目步步益奇絶行行轉深僻

靑峰迭迎送綠潭供漱濯頭臚不草草爲此三疊瀑

如聞九韶音令我意已足庶可配華陽餘者堪奴僕

始信農巖評超絶具眼隻淸言尙留耳轉頭便陳迹

杖屨難追陪墓艸今已宿矯首白雲岑感淚沾我臆

 

 

 

 

칠선동이라 이름짓다

 

 

   " 이번에 유람한 사람은 일곱 사람이다. 그래서 새로이 이름을 지어 칠선동이라 한다.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신선으로 부르게 하고, 또 칠선동이 나 때문에 드러날지를 알 수 없으니, 또한 웃음에 부칠 일이다. 시 한 수를 짓고, 유람한 것을 기록하여 산 속의 옛 일을 짓는다. " ( 칠선동기(七仙洞記))

 

   칠선동의 유래 대해서 다양한 설이 있다. 화천문화원 홈페이지는 칠선동의 지명 유래에 대해 일곱 신선이 내려와 노닐다 쌍선암에서 소나무로 변했다는 전설이 남아있다. 부근에 쌍선암이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곳은 7 심진원의 왼쪽에 있는 계곡을 가리킨다. 이 계곡을 따라가면 도마치고와 만난다. 이 전설에 의하면 칠선동광덕계곡의 지류이다.

   김수증 함께 유람한 사람이 7이기 때문에 칠선동이라 이름 짓는다고 밝히고 있다. 한편 이하곤은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협의 말을 빌어 계곡은 옛날에 묘봉(妙峰)이라 불렀으나 곡운(谷雲)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고 적고 있다. 김창협김수증1678 함께 유람하였던 7 중의 한사람이었다.

    남유용스님 승천(勝天)이 자신에게 말해준 칠선동의 유래 적고 있다. 스님은 산이 고요하고 달이 밝은 밤에 일곱 명의 노인이 흰 사슴과 흰 나귀를 타고 와서 놀기 때문에 이름 붙였다고 남유용에게 설명해주었다.

 

   다양한 이름과 유래를 품고 있는 칠선동은 현재의 광덕계곡이다. 지금은 칠선동이란 이름 대신 광덕계곡이란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진지 오래이다. 지금도 수려한 계곡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으나, 김수증이 예언한대로 본인의 작품으로 인해 더 명성을 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신선이 되다

 

 

   광덕계곡을 걸으며 7명의 신선 중 한 명의 신선이라도 만난 사람이 있을까? 만나지 못하더라도 계곡의 수석(水石)을 보고 만지며 마음의 때를 조금이나마 벗긴 사람은, 하산할 때쯤 자신이 신선이 되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흡도 신선이 된 경지를 시로 남겼다.

 

 

곡운(谷雲) 서쪽에 계곡이 있으니 칠선동(七仙洞)이라 하네.

길 찾아 여럿이 유람을 떠나니, 봄옷은 이따금 나풀거리네.

가는 곳마다 긴 칡넝쿨 잡고, 맑고 차가운 못 찾아가네.

기이한 새는 길 가에서 울고, 꽃과 나무는 환하게 이어지네.

앞 사람 숲 속을 밟고, 나보다 먼저 발원지로 나아가네.

구름과 노을로 그윽하고 아름다워, 흥이 나자 자연과 하나가 되네.

주위를 돌아보고 놀라면서 다시 앞으로 가기 어렵다 하네.

되돌아와 삽주 뿌리 캐니, 얼굴색 곱게 할 수 있네.

어찌 적송자(赤松子) 만난 이후에야 목숨 늘일 수 있으리.

 

所謂谷雲西有洞名七仙取道羣行遊春服往翩翩

去去攬長葛遵彼淸泠淵奇禽夾道鳴花樹粲相連

前人履中林先我卽源泉窈窕雲與霞興沒合自然

四顧若驚疑各言復難前還返採靈朮可令顔色鮮

何必謁赤松然後得延年

 

   광덕계곡 아니 칠선동의 답사는 계속 안개 속이었다. 정확한 것은 쌍계협삼직폭포만이었다. 이후 또 다른 자료가 발굴되어 7 정확한 위치가 정해지길 바랄 뿐이다. 곡운구곡에 가려서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칠선동이 맑고 그윽한 아름다움을 지닌 곳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바란다. 난개발로 많이 훼손되고 어지러워졌지만 심미안을 갖고 있는 사람은 맑고 그윽한 경계를 볼 수 있으리라. 그리고 덤으로 신선이 될 수 있으리라.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참고문헌

 

김수증, 곡운집(谷雲集)

김창협, 농암집(農巖集)

김창흡, 삼연집(三淵集)

남유용, 뇌연집(䨓淵集)

어유봉, 기원집(杞園集)

오원, 월곡집(月谷集)

이하곤, 두타초(頭陀草)

유준영외 2, 권력과 은둔, 북코리아, 2010.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3, 휴머니스트, 2006.

춘천시, 춘천지리지 역주,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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