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③

2015. 7. 23. 21:07여행 이야기

 

 

 

 

 

      

화음동정사(華陰洞精舍)를 걷다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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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와, 그리고 제갈공명과 김시습을 기리던 유지당

   "천근석으로부터 인문석을 밟고 수십 걸음이면 삼일정에 이른다. 다시 삼일정으로 부터 조금 위쪽에 방 세 칸을 두고 무명와(無名窩)라 하였다. 동쪽 한 칸에는 단청을 칠하고 제갈무후(諸葛武侯)의 화상을 설치하였다. 또 매월당(梅月堂)의 걸개그림을 두고 유지당(有知堂)이라 이름을 써서 걸었다." (「華陰洞志」)

 

  인문석이 새겨진 바위 위이자 삼일정 위쪽에 무명와가 있었다. 무명와 세 칸 중에 한 칸이 유지당이다. 인문석이 끝나는 곳에 5단의 계단이 있고, 계단이 끝나는 곳에 문이 있었으니, 조모문(朝暮門)이다. 그러나 어유봉이 방문했을 때는 벌써 옛 터의 계단과 주춧돌은 붕괴되어 사라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하곤이 방문했을 때는 제갈공명 매월당 화상이 청몽루에 걸려있었다. 지금은 무심한 잡초만 무성하다. 다만 무명와터 옆 바위에 ‘화음동(華陰洞)’ 세 자만 또렷하게 남아있다. 사실은 아니다. 처음에는 또렷하게 남아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낙엽을 치우고 보니 ‘화(華)’자의 윗 부분이 떨어져나갔다. 이것도 여름과 가을에 몇 차례 왔을 때는 보지 못하였다. 낙엽이 지고 눈이 내린 겨울에 찾아갔을 때 비로소 자신을 보여주었다.  


  김수증곡운정사에 있을 때부터 제갈공명의 초상화를 걸어두며 흠모하였다. 곡운구곡6곡와룡담(臥龍潭)융의연(隆義淵)제갈공명과 관련이 깊으며, 그를 위한 사당인 융의당을 짓고 제갈공명매월당의 초상화를 걸어 두었다. 화음동에 와서도 숭모하는 뜻을 이어간 것이다. 김시습에 대한 존경도 곡운정사 시절부터 있었다. 3곡 신녀협 옆의 정자 이름인 수운대(水雲臺)김시습의 호 벽산청은(碧山淸隱)에서 청은을 따서 청은대(淸隱臺)로 바꿨다. 정사 뒤 계곡 이름은 김시습을 흠모하기 해 채미곡으로 명명하기도 했다.  
  김수증무명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무명와기사(無名窩記事)」에 그의 하루가 고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 한래왕교 북쪽은 인문석이다. 바위를 밟고 수십 보를 가면 5단의 작은 계단이 있다. 조모문(朝暮門)으로 들어가면 무명와에 이르게 된다. 부지암의 부엌으로 남녀하인을 부르면 바로 들린다. 그래도 소리를 크게 지르고 싶지 않으면 경쇠를 울린다. 밥 때에 맞추어 어린 여종이 찬합을 들고 와 개울물을 퍼서 바친다. 간혹 부지암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오기도 한다. 하루 사이에 왕래가 무상하다.
  부지암은 개울 남쪽에 걸터앉아 동북쪽을 향하고 있고, 무명와총계봉을 등지고 서남쪽을 향하고 있어 지세가 통창하다. 햇살과 달빛을 받을 때가 많아 창이 훤하여 편지를 읽거나 글씨를 쓰기에 매우 좋다. 그러나 햇살이 병든 눈에 방해가 되기도 하여 오후에는 지팡이를 끌고 삼일정으로 나가 인문석으로 내려간다. 솔 그늘이 옮겨가는 대로 따라간다. 동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옮기고 서쪽으로 가면 서쪽으로 옮겨간다. 남쪽이나 북쪽으로도 옮겨간다. 혼자 한참을 다녀도 사람을 만나는 일이 없다. 물과 돌이 더욱 맑고 골짜기는 시원하다. 낙엽이 옷에 떨어지고 놀란 다람쥐가 돌 틈으로 달린다. 바위 길을 거닐기도 하고 물가의 나무에 기대기도 한다. 무명와를 돌아 뒤쪽의 소산대(小山臺)에 올랐다가 조모문으로 돌아 내려오기도 한다. 천근석을 지나 삼일정으로 돌아 호석(互石) 사이를 배회하기도 한다. 또 개울을 따라 가서 망향경추진교에서 서성대다가 석문오에 이르러 돌아오기도 한다.


  부지암으로 돌아와 쉬었다가 다시 무명와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묵묵히 앉아 있는다. 침소로 가서 잠시 졸다가 깨어나 문을 열면 개울 빛과 나무 그림자가 창의 난간과 궤석 사이에서 요동치고 석양이 산에 걸린다. 오늘도 이렇게 하고 내일도 이렇게 하면서 몸과 마음이 피로한 줄도 알지 못한다.


  무명와 앞에는 누런 국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함청문만향경에 심어둔 것도 개울 너머에 줄지어 어리비친다. 개울가의 단풍 빛은 짙어졌다 옅어지며 각기 자태를 뽐낸다. 아침 안개와 저녁 노을이 산기슭과 마을 사이에 가로로 낀다. 낙낙장송 예닐곱 그루가 개울에 그늘을 드리워 마치 삼일정무명와를 모시고 호위하는 듯하다. 석문쌍계 사이나 마을사람과 산사의 승려가 오가는 솔숲 너머를 바라다보면 그림처럼 아름답다. 인적 없는 산은 조용하다. 종일 우두커니 물이 떨어지는 용운대를 바라볼 뿐이다. "

 

  나른한 오후에 혼자 거닐다가, 잠시 나무에 기대어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가 달콤한 잠을 자기도 한다. 나의 의지를 최소한으로 줄이고 시간에 내 몸을 맡긴 채 유연하게 흘러가는 모습만이 보인다. 각박한 인간세상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화음동의 생활과 경치는 김수증이 갈망했던 경지일 것이다. 모든 것을 잊고 자연의 변화 속에 몸을 던진 채 함께 유영하는 김수증은 도를 깨친 자의 모습이다. 속세의 시선으로 봤을 때 팽팽한 끈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보이겠으나, 그는 그 속에서 한없이 편안해 보인다.

 

 

 

크기변환_삼일정 뒤 무명와 터.jpg    크기변환_무명와터 옆 화음동 각자 원경.jpg

 

 

화음동정사의 앞 산 총계봉

 

    " 유지당 뒤로는 바위의 형세가 힘차고 장대하다. 무명와 동쪽으로 돌아들며 병풍처럼 가로막아 장운병(張雲屛)이라 하였다. 장운병 아래로 세 층을 이룬 곳이 있는데, 총계봉 밑에 있어서 소산대(小山臺)라 하였다. 또 그 위에 커다란 바위가 뒤섞여있는데, 마을 사람들이 벌통을 설치해 꿀벌을 치기 때문에 산봉암(山蜂巖)이라 하였다. " (「華陰洞志」)

 

 

  크기변환_부지암에서 바라본 총계봉.jpg총계봉은 야트막하다. 조그마한 산 때문에 송풍정과 삼일정이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무명와와 유지당도 푸근한 총계산 품에 안겨 있었다. 김수증 이전에는 그냥 ‘앞 산’ 정도로 불렸을 것이나, 김수증에 의하여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산 뿐만 아니라 산이 품고 있는 바위들도 이름을 갖게 되었다.
  나무숲 사이에 늠름한 바위들은 장운병(張雲屛)이란 이름을 얻었고, 그 밑에 세 층으로 이루어진 바위는 소산대(小山臺)라 불리게 되었다. 소산대에서 위쪽 마을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바위 사이사이로 벌통들이 대여섯 개 설치되어 있다. 벌통을 설치하여 꿀을 채취하던 예전 시골 생활 방식이 아직도 내려오고 있다. 산봉암 뿐만 아니라 비를 피할 수 있는 바위는 대부분 벌통을 하나씩 품고 있다. 산봉암(山蜂巖) 옆에는 현대식 펜션이 자리 잡고 있다.  

 

  

       
 

   석문오와 짝을 이루는 명서오

 

   " 다시 삼일정으로부터 시내를 따라 서쪽으로 가면 너비가 수십 척인 평평하고 넓은 바위가 있다. 천관석의 북쪽 물가에 있고 생김새가 대체로 같기 때문에 호석(互石)이라 한다. 호석의 동쪽과 장운병의 서쪽을 합하여 명서오(冥棲塢)라 하였다. 호석으로부터 조금 내려와 시내를 건너면 석문오이다."  (「華陰洞志」)

 

 크기변환_명서오.jpg  다시 발길은 송풍정과 인문석을 거쳐 개울 하류로 향한다. 넓직한 너럭바위는 하얗게 빛난다. 옆에 조그만 폭포를 만든 바위는 천관석을 마주하고 있다. 여름에 물놀이하다가 지친 아이들이 햇볕에서 뒹굴기에 적합한 곳이다. 김수증은 이곳에서 열목어를 잡곤 했었다. 바위 뒷부분이 명서오(冥棲塢)다.  
  호석은 건너편 천관석과 비슷한 모양과 크기이다. 색깔마저 똑같다. 김수증은 하얀 요 같다고 묘사했다. 피서객들은 호석에서부터 물이 고여 있는 하류 쪽에서 주로 물놀이를 한다. 개울 양쪽으로 빼곡한 그늘막과 평상이 계곡을 가득 차지하고 있다. 
  석문오부터 출발하여 호석명서오에서 화음동정사의 답사는 끝난다. 시계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 돌면서 김수증의 생활 공간을 살펴보았다. 김수증은 이 공간에서 한가하게 소요하였다. 「무명와기사」에서 김수증이 말한 것처럼 겉으로는 평온해 보였지만 속마음도 그러했을까? 이러한 의문도 부질없을 것이다. 이곳에서 자연과 벗하며 생활하다보면 시대에 대한 울분도 다 사그러들었을 것이다.

 

 

 


   부지암의 바깥채인 반수암

 

    " 내가 일찍이 교주(交州)에서 벼슬할 때 풍악산(楓嶽山)에 홍눌(弘訥)이란 중이 있었는데, 나를 따라 화음동에 왔다. 내가 쌍계동 위에 작은 암자를 짓게 하고, 그 이름을 반수암(伴睡菴)이라 하였다. 숲과 계곡의 수석(水石)이 뛰어나서 내가 항상 가서 놀기도 하고 더러는 묵기도 하면서, 바깥채처럼 여겼다. 반수암은 화음동 가운데 빼어난 곳 중의 하나이다. "  (「華陰洞志」)

 

    화음동정사를 출발하여 반수암으로 향한다. 도로를 따라 화악산 쪽으로 가면 바로 다리가 나타난다. 다리는 두 계곡이 만나는 곳 바로 아래에 있다. 다리 입구에 ‘법장사’를 가리키는   표지석이 세워져있다. 법장사 가는 길은 오른쪽 계곡과 나란히 조화를 이룬다. 계곡물소리를 들으면 조금 올라가다 보면 법장사가 있다. 법장사는 예전의 반수암이 있던 자리에 새로 들어선 절이다.
  주차장에 들어서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 중턱에 있는 바위들과, 바위 옆으로 까마득히 걸려 있는 철계단이다. 주변에 연등이 걸려 있어서 절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절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계단을 다 오르면 그제서야 건물들이 보인다. 산세에 따라 여기 저기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모두 새로 지어져서 반수암의 자취를 찾기 힘들다.
  김수증을 따라 금강산에서 온 홍눌선사의 부도는 뜨락 아래 잔디밭에 있다. 자연석 위에 좌선하듯 앉아있는 부도는 돌로 만든 종과 같다. 세월을 그대로 통과해온 부도는 이끼를 여기저기 부치고 자연의 일부가 되었다. 누가 기도를 올렸는지 건빵과 사탕이 놓여 있다. 석종형(石鐘型) 부도 앞에는 조그만 채소밭이 펼쳐져 있다. 김수증의 의하면 암자 오른쪽에 홍눌선사의 부도가 있다고 했으나, 반수암의 터를 찾기 힘들다.  
  반수암에 대한 설명은 김수증에게 맡기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다. 김수증은 「화음동지(華陰洞志)」에서 이렇게 말한다.

 

   " 반수암은 내 거처와 떨어진 것이 1리 남짓되어 항상 걸어서 가거나 소를 타기도 한다. 언덕 하나를 돌아 남쪽으로 가다가 산골물을 따라 나무 무성한 산기슭 가운데로 가면 바윗돌은 널찍하고 맑은 물은 돌아 흐른다. 십여 걸음쯤 올라가면 중들이 물레방아를 놓았다. 이곳을 지나 서쪽으로 꺾어져 수십 걸음 가면 길 좌우에 소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고 있다. 암자에 이르니 지세가 꽤나 높고 상쾌하다. 서쪽에 앉아 동쪽을 대하니 화악산의 여러 봉우리들이 은은히 눈에 비친다. 암자는 겨우 10여 칸이다. 감실(龕室) 안에는 작은 금부처 한 좌를 모셨고, 암자 오른쪽에는 부도 하나가 있다. 홍눌 스님의 사리가 모셔진 곳이다. 그 아래 돌우물은 맑고 차다. 우물 아래에 미나리를 심었고, 계단 아래에 푸성귀를 심었다. 암자 뒤에서 가느다란 샘물이 나온다. 나무를 파서 샘물을 끌어다가 부엌문에 나무 물통을 두고 물을 설치하고, 물 긷는 걱정이 없다. 뜰에는 해당화와 작약(芍藥), 황국(黃菊), 접시꽃, 오얏나무와 배나무가 있고 커다란 은행나무 서너 그루가 왼쪽에 있다. 꽃피는 계절이면 골짜기를 환히 비추니 또한 아름다워 즐길만한 것 중의 하나이다. " (「화음동지」)

 

 

 

   크기변환_법장사 무량수전.jpg    크기변환_반수암터에서 바라본 화악산.jpg
 

 

에필로그

 

   " 종합하면 석문오로부터 쌍계동까지는 계곡 남쪽 기슭에 있고, 호석부터 소산대까지는 북쪽 기슭에 있다. 이것은 망천장(輞川莊)의 남북 언덕과 같다. 한래왕교가 남북 사이에 놓여있어 경치를 보는 것이 밝고 상쾌하다. 화음동 전체와 산과 시내의 뛰어난 아름다움이 모두 눈 아래 모여드는데, 북쪽 언덕이 남쪽 언덕보다 더욱 아름답다고 하겠다. " (「華陰洞志」)

 

    화음동정사의 방문은 반수암에서 화악산을 바라보며 끝난다. 화악산은 저 멀리 장엄하게 있다. 화악산 자락에서 김수증은 노년을 보냈다. 화음동에 정사를 짓고, 이곳에서 주로 생활하였다. 지금까지 답사한 공간을 김수증은 걷거나 소를 타고 소요했다. 몇 번의 답사에도 불구하고  「화음동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장소에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해선 관심을 크게 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단편적인 몇 가지 기록은 드러내지 않은 분노와 한(恨) 등을 자연과 벗하는 것으로, 또는 역(易)의 철학으로 치유해 나간 것 같다.
  세상사에 대해, 혹은 자신에 대해 실망을 느낀다면 화음동정사를 거닐며 김수증을 생각해 보는 것도 괜찮으리라.

 

 

《참고문헌》


어유봉,  『기원집(杞園集)』
오원,  『월곡집(月谷集)』
남유용,  『뇌연집(䨓淵集)』.
김창흡, 『삼연집(三淵集)』
홍석주,  『연천선생문집(淵泉先生文集)』
『조선왕조실록』

 

 

 권혁진 : 강원대 강사(한문학), 강원한문고전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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