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 ②

2015. 7. 25. 02:05여행 이야기

 

 

 

 

 

      

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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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운과 다산, 곡운구곡을 걷다 ②

 

 

다산의 6곡인 벽의만

 

벽의만(碧漪灣)은 내가 지은 이름이다. 백운 아래 1리 되는 곳에 있다. 양쪽 언덕의 큰 소나무들은 암벽 곁에 섰고, 맑고 긴 물줄기는 짙푸른 색깔을 띠며 평평하고 넓찍하다. 아래의 방화계부터 위로 와룡담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평평한 물이 없다. 이 또한 조물주의 기교이다. 반드시 세차게 흐르고 급히 내닫는 여울만이 9곡에 뽑혀 있을 필요는 없다. 여기는 고기잡이도 할 수 있고 배도 띄울 수 있는 곳이므로, 조그마한 배 한 척을 마련해 바람을 쐬고 달놀이 하는데 적합하다. 만약 9곡에서 이것이 없다면 기이한 변화를 이루지 못할 것이다. ( 「산행일기」 )

 

   정녀협에서 출발하여 큰 길을 따라 곧바로 가면 사창리로 가게 된다. 백 여 미터 떨어진 곳에 ‘보병 27사단’을 가리키는 간판이 보인다. 그곳에서 좌회전을 하면 다리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또 좌회전을 해야 한다. 민가를 지나면 사라졌던 계곡이 다시 보인다. 올라가다가 멈춰 왼쪽을 보면 바로 ‘벽의만’이다.

   정약용백운담에서 1리 아래쪽에 벽의만이 있고, 벽의만에서 신녀협까지의 거리는 화살의 사정거리라고 했다. 여기서 유의할 것은 화살의 사정거리이다. 굳이 ‘리(里)’를 쓰지 않은 이유는 리(里)보다 약간 길거나 짧기 때문일 것이다.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화살의 사정거리는 250~270m부터 315~378m 사이로 나타난다. 그러므로 벽의만백운담보다는 신녀협에 더 가까운 곳에 있는 곳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정약용의 표현대로 벽의만은 넓고 평평한 물이 멈춰있는 듯하다. 1곡서부터 지금까지는 바위와 그 틈을 세차게 흐르는 여울들의 연속이었다. 숨 가쁘게 쉼 없이 달려오다가 털썩 앉아 지금까지의 유람을 한번 정리하는 곳이다. 특히나 밤 중에 달놀이하며 바람쐬기에 적당하다고 하니 낮에 감상하는 것은 벽의만의 진수를 반도 맛보지 못한 것이리라.

   되돌아보니 여유롭게 감상하지 못하고 쫒기 듯 달려왔다. 글을 읽고 해당되는 곳을 찾은 후, 다시 글과 대조하고, 사진을 찍자마자 다음 장소로 이동하기에 바빴다. 나의 삶도 이러했다. 조바심을 내며 나 자신을 쉬게 내버려두지 못했다. 어쩌다 쉬어도 불안하였고, 가족을 위해 시간을 내는 것조차도 내색은 안 했지만 아까워했다. 스스로 피로하게 만들고 스트레스를 받았다. 1곡부터 벽의만까지 쉴 사이 없이 온 것처럼. 그러나 이제는 잠시 앉아서 되돌아봐야할 시간이다. 벽의만은 피곤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잠시 멈춰 되돌아보라고 일깨워준다.

 

   정약용은 이렇게 흥얼거렸다.

 

육곡이라, 잔잔한 물결 굽이굽이 푸르른데 ,

혼연한 그 강빛 울타리를 비치네.

나는 여울 급한 폭포 그 무엇 때문인가.

맑고 깊은 물의 한가로움에 미치지 못해서라네.

 

六曲平漪翠一灣 渾如江色映柴關

飛湍急瀑誠何事 不及澄泓自在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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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의만>

 

곡운의 4곡과 다산의 7곡인 백운담, 그리고 열운대

 

○ 한 줄기 계곡 물을 건너 또 1리쯤 올라가서 청람산(靑嵐山) 동남쪽에 이르렀다. 이곳은 주민들 말로 대복삽(大幞揷)이다. 못은 깊게 파였다. 못의 좌우에는 큰 돌이 우뚝하게 뒤섞여 늘어져 있는데, 거북이와 용이 물을 마시는 것 같다. 물이 뿜어 나오면서 부딪치니 수많은 기와를 깨뜨리는 듯하고, 물소리는 산과 골짜기를 진동시킨다. 그것을 보니 위엄이 있다. 물 밑은 모두 돌덩어리다. 언덕 주변에 드러난 돌들은 형세에 따라 들쑥날쑥하다. 너럭바위는 깨끗하고도 반들거리는데, 길이는 무려 수백 보쯤 된다. 봄여름 사이에 마을 사람들은 통발을 설치하거나 그물을 던져 열목어를 잡는다.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설운계(雪雲溪)라고 하였다. 뒤늦게 옛날에 백운담(白雲潭)이라 불렀다는 것을 듣고 다시 옛 명칭대로 하였다. 그 옆에 바위벼랑이 우뚝 솟아있어, 열운대(悅雲臺)라고 하였다.(「곡운기(谷雲記)」)

백운담(白雲潭)9곡 중 첫 번 째의 기이한 경관으로 삼아야만 한다. 반석이 넓게 깔려 천여 명이 앉을 수 있고, 바위 빛깔은 티 없이 푸르고 깨끗하다. 구렁으로 쏟아져 흐르는 물은 매우 기괴하고 무척이나 옥같이 희다. 소용돌이치고 내려찍고 끌어오르다가 튀어오르는 기상은 언제나 흰 구름 같다. 북쪽 암벽의 표면에 ‘백운담(白雲潭)’이란 세 자를 새겼는데 초서체이다. 역시 귀인(貴人)들이 이름을 새긴 것이 많다. (「산행일기」)

 

 

    백운담벽의만에서 가깝다. 길옆에 표지석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다. 길 오른쪽에는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차량은 백운담 도착 전 오른쪽 갓길에 주차해야한다. 백운담 근처에 주차할 경우 보초병이 신속하게 다가선다.

도로에서 내려가면 먼저 만나는 곳이 열운대이다. 군부대 앞이라, 면회 온 사람들을 위해 의자와 탁자가 설치되어 있다. 그늘막도 설치해서 면회객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여름에는 설치되었는데 겨울에 가보니 모두 철거되었다. 정약용이 북쪽 암벽에 초서체로 글씨 새겨놓았다고 해서 갈때마다 살펴보았으나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열운대에서 보이는 백운담의 이미지는 기이함이다. 넓은 너럭바위의 가운데가 갑자기 꺼지면서 폭포를 만들어 하얀 물보라를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다. 중저음의 물소리는 귀에서 계속 웅웅거린다. 가까이 갈수록 더욱더 기이하다. 폭포 주변의 바위들은 보는 사람의 시선에 따라 온갖 동물의 모양으로 보인다. 거북이 같기도 하고, 용 같기도 하다. 뱀 같기도 하고, 입을 벌리고 포효하는 호랑이 같기도 하다. 온갖 짐승들이 우는 듯한 환상 속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한차례 돋는다.

   바위 이 곳 저 곳은 오랜 시간 동안 물이 휘돌아 흘러가며 대야 같은 홈을 만들어 놓았다. 파이지 않은 곳은 비누처럼 반들반들하다. 그 위에 새겨진 글자들도 마모되어 흐릿하다. 몇 군데서 글자를 볼 수 있으나 마모가 심하여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많다.

   정약용은 천변만화(千變萬化)하는 물의 모습을 흰구름과 같다고 했다. 여름날 하늘에서 자유자재로 자신의 모습을 바꾸는 흰구름! 고려시대 유명한 문인인 이규보얽매임 없는 자유로움을 갈망하여 한때 자신의 호를 백운(白雲)으로 삼았다. 나는 백운담의 모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차라리 몇 자 긁적이는 것보다 먼저 이곳을 다녀간 선인들의 글을 읽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김구(金構;1649~1704)의 글을 먼저 보도록 한다. 김구는 그의 문집인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에 남긴 「동행일기(東行日記)」 에서 백운담과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문 밖의 큰 시내는 보살피천(菩薩陂川)이라 부른다. 피연(皮硯)은 어제 물 따라가며 건너던 곳으로 바로 이 물이다. 스님은 물을 따라 백여 보를 올라가면 백운담(白雲潭)이라 불리는 것이 있는데, 평강(平康) 군수 김수증(金壽增)이 명명했으며 볼만하다고 한다. 나는 드디어 스님과 함께 갔다. 백운담은 모두 흰 돌이 흐르는 물을 끼고 있다. 조그만 돌은 거북이나 자라 같고, 큰 돌은 사자와 코끼리 같다. 밥상처럼 평평하고 넓은 것은 앉아서 바둑을 둘 수 있고, 섬처럼 우뚝 솟은 것은 내려다보며 낚시를 할 수 있다. 돌이 많아 물은 세차게 흐른다. 좁은 곳에서 뿜어져 나와 우묵한 곳에 부딪혀 솟구치고, 이미 나와서 흩어진다. 떨어진 것은 맑은 못이 되고, 날아간 거품은 눈이 된다. 잔잔히 흐르는 것은 비단을 펴놓은 듯하다. 물빛은 옥처럼 맑으며 짙은 초록을 띠고 있다. 햇볕이 아래까지 비춰 머리카락도 셀 정도이다. 마주하고 있는 기슭의 푸른 절벽이 우뚝 솟아있다. 산에는 잡목과 단풍나무들이 많고 소나무 잣나무 종류가 적다. 매번 봄과 가을 두 계절에 이름 모를 잡다한 꽃이 나무 사이에서 피는데, 떨어진 꽃잎이 어지럽다. 단풍잎이 언덕을 뒤덮고 그림자는 맑은 못에 거꾸로 비춘다. 경치가 가장 기이하고 뛰어나다고 한다. "

 

   다양한 형상을 한 채 제각기 서 있는 돌들과, 그 사이를 흐르는 물의 과정과, 통과한 후의 물의 모습. 그리고 주변의 나무와 꽃들을 비디오로 담 듯 낱낱이 기록하고 있다.

 

   1714년 이하곤(李夏坤;1677년~1724년)백운담에 대한 기록을 그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동유록(東遊錄)」으로 남긴다.

 

    " 계곡을 거슬러 가자 계속해서 아름다운 곳이 나온다. 계곡물은 종종 긴 못을 만든다. 연못의 물결은 넓고 그득하여 강과 호수와 같다. 차츰 앞으로 1리쯤 가자 대보삽(大洑揷)에 이르렀다. 평평하게 널려있는 돌은 커다란 연회석 같고, 흰 색깔은 칼로 벤 비계와 같다. 물은 돌 가운데로 흐르다 세찬 여울이 되어 아래로 떨어지고, 돌이 턱처럼 물을 받아낸다. 물은 소용돌이치며 화를 내듯 물보라를 뿜어내니 수많은 눈꽃과 같다. 날아가며 춤추고 흩어지며 올라가니 대단히 괴이하고 장엄하다. 옆에 커다란 돌 세 네 개가 갈라져 나갔는데 형태가 대단히 기괴하여 거북이와 용이 숙이고 물을 마신 후 떨어져서 숙이고 있는 것 같다. 계곡 속의 물고기를 셀 수 있을 정도이나 소나무의 그늘이 없어서 한스럽다. "

 

   이하곤은 특히 물의 변화를 세밀하게 포착하였다. 돌의 형상한 것은 덤이다. 다만 주변에 소나무가 없는 것을 옥의 티로 여겼다.

 

   오원(吳瑗;1700~1740)백운담에서 받은 충격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 여기서 백 여 보 떨어진 곳은 규모가 여기와 비슷하다. 4곡 백운담(白雲潭)에 이르면 명옥뢰의 크고 험하며 울퉁불퉁한 돌들보다 더욱 괴이하며 웅장하다. 소와 말이 무리지어 마시는 듯, 거북과 자라가 햇볕을 쬐는 듯, 이빨이 어긋난 듯. 물은 그 사이를 내달리니 쏟아지는 것은 폭포가 되고, 떨어진 것은 연못이 된다. 치솟으며 섞이고 뿜어 나오며 솟아오르는 것이 눈과 서리가 흩어지는 것 같다. 층층이 쌓여 펼쳐져 있는 주변의 너럭바위는 구슬처럼 밝고 깨끗하여 모두 쉴만하다. 비로소 계곡 서쪽의 바위에 앉아 술을 마시니 약간 취한다. 머루를 따서 먹었다. 다시 계곡 동쪽으로 가서 폭포와 연못을 보니 더욱 괴이하다. 이곳은 9곡 중에 가장 뛰어난 곳이다. 지금은 메말라 고인 물이 말랐는데도 물의 기세가 성한 것이 이와 같으니 평상시의 모습을 상상할 만하다. 돌을 밟고 물장구를 치며 물길을 따라 오르내리고 배회하다가 해가 지는 줄을 몰랐다. 물길을 따라 내려가니 아름다운 경치와 멋진 곳이 끝이 없다. "

 

   바위들의 모습을 이보다 더 실감 있게 묘사할 수 있을까? 쏟아지는 물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을 이 이상 그릴 수 없을 것이다. 오원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백운담에 머물러 있었다.

 

   김수증정약용의 글 이외에 세 편의 작품을 더 읽어보았다. 다른 듯 비슷한 각각의 글들은 백운담의 모습과, 감동을 적은 것이다. 사람마다 다를 것 같지만 뛰어난 경치 앞에서 느끼는 감정은 비슷한 것 같다. 나의 감정도 선인들의 작품에 묘사된 감동과 다르지 않다. 다시 읽어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뒤에 백운담을 방문한 분은 그때의 감동을 글로 써보시길 바란다. 선인들의 글과 큰 차이가 나지 않을 것이다.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협(金昌協)의 감흥은 어떠했을까?

 

사곡이라 푸른 바위 기대 시내를 바라보니,

주변의 소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치달리며 뿜는 거품 쉴 사이 없어,

언제나 물안개 못 위에 넘실대네.

 

四曲川觀倚翠巖 近人松影落毿毿

奔潨濺沫無時歇 雲氣尋常漲一潭

 

   백운담으로 쏟아지는 물의 장쾌함에, 기기묘묘한 바위들의 모습에 정신이 혼미하여 놓치기 일쑤인 것이 백운담 바로 위의 바위들이다. 거대한 바위들은 백운담과는 다른 파노라마를 연출하고 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명옥뢰라 여긴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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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운담>                               <열운대>                                                <바위에 새겨진 글자>

 

 

곡운의 5곡과 다산의 8곡인 명옥뢰(鳴玉瀨)

 

○ 여기서부터 수백 여 보를 올라가면 또 뛰어난 곳을 만난다. 기이하고 장엄함은 백운담(白雲潭)보다 덜하지만 맑고 평온함은 백운담보다 낫다. 그래서 명옥뢰(鳴玉瀨)라 하였다. ( 「곡운기(谷雲記)」)

명옥뢰(鳴玉瀨)와룡담의 물이 쏟아져 내리는 곳이다. 반석이 넓게 깔리고 잔잔한 물결이 구렁으로 내달려 흰 옥과 눈이 함께 일어나고 바람과 우뢰가 서로 부딪혀 진동한다. 여울물로서는 극히 아름다운 경관이다. ( 「산행일기」)

 

   김수증이 수 백여 보라고 하였듯 백운담에서 가까운 곳에 명옥뢰가 있다. 표지석이 길가에 세워져 있다. 표지석 너머 개울 건너편에 있는 제법 큰 마을은 큰방단리이다. 여기서부터는 첩첩 산중을 벗어나 마을 속에 구곡이 자리 잡고 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곡운구곡의 위치를 확정할 때 마지막까지 논란에 쌓였던 곳이 명옥뢰라고 한다. 곡운구곡도에 그려진 명옥뢰모습은 한창 근대화 바람이 불 때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몰지각한 사람들이 곡운구곡에 있는 바위들을 반출하여 석벽을 쌓거나 주택가 축대를 만드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시기의 일이다. 지금도 곡운구곡을 개발하려는 사람들은 원형을 훼손시켜서라도 관광객을 끌어들이려 한다고 동행한 길화백님은 혀를 찬다. 왜 이러한 일이 아직도 일어날까? 무조건 개발을 능사로 여기는 개발만능주의와 문화보다는 돈을 쫓는 물신풍조가 주범일 것이다. 곡운구곡에 올 때마다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백운담을 보고 충격에 빠졌던 나는 명옥뢰에 이르러서 맥이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백운담에 비해 너무 왜소해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김수증의 말대로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지 않는가? 백운담이 기이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면, 명옥뢰는 맑고 평온한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절대화될 수 없다.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을 뿐이다. 나와 다른 기준, 입장 등을 인정하는 것을 명옥뢰는 가르켜주고 있다.

   또한 명옥뢰는 눈으로 보는 곳이 아닌, 눈을 감고 여울 소리를 듣는, 그래서 귀로 감상하는 곳임을 이름으로 알려준다. 특히 밤중에.

 

   김수증의 조카인 김창흡(金昌翕)은 이렇게 시로 노래했다.

 

오곡이라 시내 소리 깊은 밤에 더 좋아,

옥 장신구 소리 먼 숲까지 울리네.

솔문 나서니 하얀 언덕 고요한데,

둥근달 외로운 거문고 세상 밖의 심경일세.

 

五曲溪聲宜夜深 鏘然玉佩響遙林

松門步出霜厓靜 圓月孤琴世外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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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림석에서 바라본 명옥뢰 >

 

곡운의 6곡과 다산의 9곡인 와룡담

 

○ 하나의 바위벼랑을 돌아드니 고여있는 물이 맑고 깊어 깊이를 헤아릴 수 없다. 세간에서 용연(龍淵)이라 부르는데, 가물면 마을 사람들이 제사지내며 빈다. 그래서 와룡담(臥龍潭)이라 하였다. 청람산(靑嵐山)의 중맥(中脈)이 여기에 이르러 다한다. 울창한 산기슭이 구불구불 내려와 동북쪽을 베고 서남쪽을 향하며 사방을 둘러싸고 있으니, 동서로 수 백 보이고 남북으로 백 여 보이다. 물의 형세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것이 활을 당긴 형세이다. 그 안은 평탄하고 넓으며 온화하고 그윽하여 농사지으며 살만하다. 화악산의 푸른빛이 책상을 마주하는 듯하다. 그 앞에 와용담(臥龍潭)이 있어 귀운동(歸雲洞)이라 하였다. 뒤늦게 마을사람들이 옛날부터 석실(石室)이라 부른다는 것을 들었다. 이곳이 도산석실(陶山石室)과 부합함이 있어 매우 기이하였다. 그래서 신석실(新石室)로 불렀다. 남쪽 물가의 소나무 숲이 푸르고 울창하여 정자를 둘만하였다. 최고운(崔孤雲)의 시어(詩語)를 취하여 농수정(籠水亭)이라고 하였다. (「곡운기(谷雲記)」)

와룡담(臥龍潭)은 정자 터의 남쪽에 있는데, 언덕 아래 석벽(石壁)과 푸른 병풍 같은 나무가 없다. 그 주위는 1백 보에 불과하고 그 깊이도 두려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 검지 않다. 그러나 역시 아름답기는 하다. ( 「산행일기」)

 

   명옥뢰에서 와룡담까지의 거리는 백운에서 명옥뢰까지의 거리와 비슷하다. 와룡담에 도달하기 전에 김수증이 처음 은거하던 곳인 용담리의 전경이 펼쳐진다. 군부대와 민가가 어우러져 마을을 이루고 있다. 예전에 답사왔을 때, 군부대 옆에 서 있던 김수증 기념비 아직도 그대로 홀로 서 있다. 그동안 학회도 개최되는 등 활발한 활동이 있어 변화가 있었을 거라고 예상했으나 요지부동이다.

 

   안동의 하회마을의 축소판이 용담리이고, 그 앞에 와룡담이 있다. 마침 답사를 갔을 때, 아저씨 한 분이 텐트를 치고 낚시를 하고 계셨다. 가뭄이 심하면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지만 골이 깊고 수량이 풍부해서 이곳은 가뭄 걱정이 없을 것 같다. 물 건너편은 모두 커다란 바위들이다. 바위와 물이 만나는 곳은 물색이 시퍼렇다. 곡운구곡의 다른 곳과 달리 이곳은 와룡담 앞에 모래가 넓게 펼쳐져 있다. 예전에는 모래를 찾기 힘들었는데 농지개발 등으로 모래가 많이 쌓였다고 길화백님이 일려준다.

   김수증곡운으로 오기 전에 거처하였던 곳은 지금의 남양주 부근이다. 그곳의 지명이 석실(石室)이었는데, 김수증이 새로 거처를 마련하고 ‘곡운’이라 이름 붙인 곳을 마을 사람들은 석실(石室)이라고 불러왔던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보단 운명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김수증은 ‘신석실’이라 하였다.

   김수증은 소나무 울창한 물가에 정자를 세웠다. 농수정(籠水亭)이란 이름은 본인이 밝혔듯이 최치원의 시어(詩語)에서 따온 것이다.

 

바위 사이 세차게 흐르며 봉우리 울리는 물소리에,

사람의 말소리 지척 간에도 분간키 어렵네.

옳다 그르다 시비하는 소리 귀에 들릴까 염려하여,

짐짓 흐르는 물로 온 산을 다 감싸게 했네.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최치원 당나라에서 활동하다가 귀국하여 자신의 경세관을 펼치려했다. 그러나 부패하고 견고한 벽에 부딪혀 자신의 꿈을 접어야했다. 마지막으로 선택한 것은 가야산으로 들어가는 것이었고, 가야산 홍류동 계곡 남긴 시가 바로 이 시인 것이다. 세상과 절연할 수 밖에 없었던 절망적인 심사를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김수증최치원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시비의 소리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곡운구곡의 물로 곡운을 감싸고 싶었던 듯 하다.

 

   김수증의 아들인 창직(昌直)의 시를 읽어본다.

 

육곡이라 그윽한 집 푸른 물굽이 베개 삼으니,

천 길 깊은 못 그림자 사립문 사이로 비치네.

숨은 용 세상의 일 관여하지 않고,

물결 속에 오래 누워 홀로 한가롭구나.

 

六曲幽居枕綠灣 深潭千尺映松關

潛龍不管風雲事 長臥波心自在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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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룡담>

 

곡운의 7곡인 명월계

 

○ 서북쪽 모퉁이로 나가 수백 보를 가면 너럭바위가 있어 이리저리 거닐만하다. 그래서 명월계(明月溪)라 이름하였다. (「곡운기(谷雲記)」)

 

   와룡담을 떠나 조금 가다보면 다리가 있고, 그 옆에 서 있는 표지석을 만나게 된다. 와룡담이 마을의 남쪽이라면, 명월계는 마을의 서쪽이다. 명월계영당교의 윗부분에 해당되는데, 김수증이 말한 너럭바위는 쉽게 찾을 수 없다. 풀숲 사이로 바위가 몇 개 있을 뿐이고, 그 뒤에 일렬 횡대로 잣나무가 비슷한 크기로 늘어서 있다. 아까시아 나무가 그 사이에 듬성듬성 끼어 있다. 곡운구곡도그려진 늠름한 노송들은 다 사라지고 바위들도 이빨 빠지듯 성글게 있다. 그러나 명월계만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에 9곡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으련만 범상한 눈을 가진 나는 쉽게 명월계의 아름다움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일까? 정약용“소와 말, 개와 돼지가 건너다니고, 먼지와 재, 쭉정이와 겨가 뒤섞여 어지러움과 더러움을 견딜 수 없으며, 큰 다리가 걸쳐 있음으로써 물길은 시끄럽고 돌은 더럽다. 이곳 역시 구곡에 넣을 수 없다.”고 하였다.

 

   다리를 건너 맞은편으로 갔다. 나무 사이로 통과하니 돌을 쌓은 제방이 제법 높아 개울로 진입할 수 없다. 한군데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내려가 보니 건너편에서 본 것과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조그맣게 보이던 돌들은 하마나 코끼리 등만큼 큼직큼직 하다. 커다란 것은 고래 등만 하다. 단지 모래가 쌓여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있을 따름이다. 게다가 바위 사이에 갈대와 쑥 등이 무성하게 자라 있어 사야를 가리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제거되고 뒷 편에 노송들이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면 이렇게 무시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정약용이 자신의 심미안으로 벽의만을 자신의 곡운구곡에 넣었듯, 명월계김수증의 독특한 심미안이 투영된 곳인 것 같다. 곡운구곡의 대부분은 기암괴석과 여울로 이루어진 승경처이다. 한낮의 태양 아래 자신의 모습을 맘껏 뽐내는 장소들이다. 그러나 명월계는 한밤중이 되어서야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곳이다. 외로운 밤, 잠 못 이루는 밤에 김수증명월계에서 서성거렸을 것이다. 달빛 아래 피라미처럼 소리 없이 반짝이는 물결은,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기에 충분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7곡 되지 않았을까?

 

   김수증의 이러한 아름다움에 주목하였는지, 김창업(金昌業)의 시는 명월계의 미학 이렇게 표현했다.

 

칠곡이라 얕은 여울 잇닿은 잔잔한 못.

맑게 이는 잔물결 달빛 아래 볼 만하네.

텅 빈 산 고요한 밤 지나는 사람 없고,

큰 소나무 그림자만 찬 물에 그림자 드리우네.

 

七曲平潭連淺灘 淸連堪向月中看

山空夜靜無人度 唯有長松倒影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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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월계>

 

곡운의 8곡인 융의연

 

또한 융의연(隆義淵)이라고 불리는 것이 그 위에 있다. 여기는 예전의 이름을 따랐다.(「곡운기(谷雲記)」)

 

   융의연으로 가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제방 옆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갈릴리가든이 나온다. 바로 앞에 융의연있다. 다리를 건너는 방법도 있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우회전을 한 후, 조금 올라가면 이기자부대 사단사령부가 나온다. 그곳을 지나면서 정신을 차려야한다. 융의연으로 가려면 민가 사이에 난 길을 따라 개울로 향해야 하는데, 몇 번이나 지나치곤 했었다. 융의연으로 가는 길이란 입구 표시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향기나라 사랑이 펜션’이라 표시된 곳으로 들어가서 길을 따라 개울 쪽으로 가면된다.

 

   융의연은 물놀이하기에 적합할 정도의 수량과 깊이이다. 답사를 갔을 때도 물놀이 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개울 한편에 길게 누워있는 바위들은 바다에서 헤엄치는 고래의 등같다. 한 마리도 아니고 여러 마리들이 떼를 지어 헤엄치는 모습은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개울가에 쌓은 축대의 모습은 생뚱맞기 그지없다. 네모난 대리석으로 차곡차곡 쌓은 현대의 건설기법은 인공미를 너무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인공미이지 미감을 전혀 고려하고 않아서 오히려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으니....정약용은 이러한 일을 예견했던 것일까? 그는 융의연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융의연(隆義淵) 위에는 화전(火田)이 있고 곁에는 보리밭이 둘러 있어 아쉽다. 기괴한 암석도 없고 그늘을 이룰 만한 나무도 없다. 다만 시냇물이 모여 고인 곳일 뿐이다. 무엇 때문에 구곡(九曲)에 넣어주었는지 알 수가 없다.”

 

   융의연에서 기억해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김시습제갈공명이다. 두 분 다 의리와 절개로 상징되는데, 김수증은 거처하는 곳마다 두 분의 그림을 걸어놓고 숭모하였다. 애초에는 융의연 주변에 ‘융의당’을 세우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었는지 건물을 짓지 못하였고 화음동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에야 ‘유지당’이란 건물을 짓고 두 분을 모시게 되었다. 미완의 융의당 송시열의 글 속에서 완성되었다. 아마도 김수증의 계획을 접한 송시열이 미리 글을 지어주었던 것 같다. 그 일부분을 보자.

 

   [ 김연지(金延之)가 이미 곡운동(谷雲洞)에서 살기를 정했다. 남쪽에는 와룡담(臥龍潭)이 있고, 서쪽에는 매월당의 옛 터가 있다. 그리고 따로 융의연(隆義淵) 있다. 그래서 융의연 가에 다시 집을 짓고 가운데 제갈공명의 화상을 놓고 곁에 매월당의 초상을 걸으니 가운데 같은 위치에 있어서 우러러 사모하는 뜻을 보였다.

(중략)

   지금 와룡담(臥龍潭)매월당의 옛 터 바로 여기 산에 있고, 융의(隆意)의 이름이 이것과 은연중에 맞는다. 이것은 연지(延之;김수증)가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런데 두 공의 의리를 누가 높이는 것을 모르겠는가? 연지(延之)는 진실로 문정공(文正公) 김상헌(金尙憲)의 손자이니 마음에 끌려 사모하고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다른 사람과 다름이 없겠는가? 문정공이 보존하신 것은 두 공의 의리이다.

아! 또 어찌 쇠망한 시대의 뜻이 아니겠는가? 옛날 주자가 누대에 병들어 누웠을 때 길게 묘백행(廟柏行)을 길게 읊조리길 ‘다시 중원을 회복하는 것을 보지 못 한다’고 하고, 여산(廬山)와룡암(臥龍菴)제갈공명을 그려 걸고 말하길, “후세에 나의 뜻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 연지(延之)는 아마도 거의 이것을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김수증의 조카 김창즙(金昌緝)은 융의연을 어떻게 노래했을까?

 

팔곡이라 맑은 못 아득히 펼쳐지니,

이따금 구름 그림자만 물 따라 오르내리네.

참된 근원 가까워 유달리 맑고 밝아,

오고가는 피라미 앉아서 바라보네.

 

八谷淸淵漠漠開 時將雲影獨沿洄

眞源咫尺澄明別 座見儵魚自往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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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의연 >

 

곡운의 9곡인 첩석대

 

비스듬히 서쪽으로 점점 나아가니 기이한 바위가 뒤섞여 널려 있다. 물이 그 사이에서 쏟아져 나와 첩석대(疊石臺)라 이름하였다. 수석(水石)의 뛰어난 경치가 여기에 이르러 끝난다. (「곡운기(谷雲記))

 

   첩석대로 가는 방법도 두 가지다. 갈릴리가든에서 융의연을 본 사람은 개울 옆 길을 따라 상류로 향하면 된다. 이 길에는 표지석이 없기 때문에 유의해야한다. 영당교를 건너 융의연을 찾았을 경우, 다시 큰 길로 나와서 직진하면 잠시 후에 표지석첩석대임을 알려준다.

   길가에서 바라보았을 때, 대부분 실망을 하게 된다. 나도 첩석대를 잘못 찾은 것은 아닐까하며 몇 번이고 오르내렸다. 의심스러워 개울로 직접 내려갔다. 가까이서 본 첩석대는 멀리서 보았을 때 보다 입체감이 있다. 그러나 그림 속의 첩석대는 많은 변화를 겪었음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동행한 길화백님은 예전 어렸을 때의 모습과 첩석대에서 물놀이를 말해준다. 그때만 해도 거의 원형 그대로였는데 제방 공사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고 한다. 홍수가 날 때를 걱정하여 우뚝 솟은 바위를 깨었다는 대목에선 혀를 찰 수 없었다. 그림 속 김수증이 앉아 있던 바위에 나란히 앉아 말없이 첩석대를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지켜주지 못해서’라고 되뇌이면서....

 

   겸재 정선(1676~1759)은 서화집인 해악전신첩(海岳傳神帖)첩석대를 그림으로 남겼었다. 이병연(李秉淵;1671∼1751)이 겸재의 그림을 모아 화첩을 만들고 김창흡에게 보여주자, 김창흡은 ‘이일원의 해악도 뒤에 쓰다[題李一源海嶽圖後]’란 글을 지어 주었다. 그 중 첩석대에 대하여 곡운구곡첩석대를 근원으로 삼는다. 물소리는 쟁글쟁글 하고, 돌은 옥을 겹친 것 같다. 방화계부터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 십여 리인데, 선생의 발걸음이 피로한 적이 없었다.”라고 기록하였다. 정선곡운구곡첩석대를 그린 이유에 대해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정선의 심미안에 포착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첩석대의 뛰어난 경관을 말하여주는 것이 아닐까? 다만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정약용첩석대김수증보다 더 자세하게 묘사하였다. “물 속에 서너 개의 선돌이 있다. 크기가 마치 비석과 탑 만하다. 옆줄 무늬가 여러 겹 있다. 위에는 사람이 앉을 수가 없다. 좌우는 편편한 밭과 큰 길이고, 그늘을 이룰 만한 수목이 없다. 이곳은 아마도 은사(隱士)를 수용하지 못할 것 같다.” 시니컬하게 비판한 정약용의 품평은 그 나름대로의 감식안으로 평가를 한 것이니, 참고할 만하다. 무작정 무시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닐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입장일 수는 없지 않은가. 이러한 의미에서 곡운구곡의 답사는 자신과 다른 의견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경치로 보여준다.

 

   김수증 외손홍유인(洪有人)은 마지막 구곡첩석대를 읊조려 후대에 남기는 영광을 차지했다.

 

구곡이라 더욱 우뚝한 층층바위.

겹친 암벽 대(臺)를 이뤄 맑은 물에 비치네.

저물녘 세찬 여울 솔바람과 급하니,

좌락좌락 신령스런 소리 계곡에 가득하누나.

 

九曲層巖更嶄然 臺成重壁映淸川

飛湍暮與松風急 靈籟嘈嘈滿洞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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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곡운구곡도 중 첩석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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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첩석대>

 

사창리로 향하다

 

   여기서 1리 쯤 가면 관아의 창고가 있어 마을사람들에게 쌀을 꾸어주고 받는다. 서쪽에 폐허가 된 터가 있는데 오세동자(五歲童子)의 터라고 전해진다. 김시습은 어렸을 때의 총명함 때문에 온 세상이 오세(五歲)로 불렸고, 강원도 지역에 발자취가 두루 있다. 신녀협(神女峽)에 옛 발자취가 있으니, 이곳이 오세동자의 남겨진 터라는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곡운기(谷雲記)」)

 

   곡운구곡의 마지막 여행지인 첩석대에서 김수증의 발걸음은 사창리로 향한다. 첩석대에서 상류로 조금 올라가다보면 다리를 지나게 된다. 개울의 왼쪽길은 일광교를, 개울의 오른쪽은 고삽교를 건너게 되는데, 다리를 건너자마자 길은 합쳐진다. 직진을 하다가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창리이다.

   여기서 잠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할까 한다. 곡운구곡을 찾은 사람들은 위치를 잘못 파악하기도 했다. 1714년 방문한 오원의 경우도 그렇다. 그는 첨석대 위에 있는 고삽교 옆 절벽 주변을 융의연으로 잘못 생각하고서 「행곡운기(行谷雲記)」를 남긴다.

 

   " 또(첩석대에서) 수 백보를 가니 기이한 산등성이가 띠를 이루어 늘어선 것이 병풍이 앞을 가로막는 것 같았다. 모두 석벽인데 깎아지른 듯 험하다. 물은 그 아래에 멈춰 깊은 못을 이룬다. 넓이는 여러 발자욱이 된다. 푸르고 맑으며 물이 괴어 깊다. 깊이는 여러 장(丈)이다. 오래된 탑이 못가에 있다. "

 

   어찌되었건 그의 기록은 곡운구곡을 다채롭게 하는데 한 몫 하였다.

다시 사창리로 이야기를 돌린다. 마을 사람들에게 예전 관아의 창고 터와 김시습이 거처하던 집터를 물어보아도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사람들이 없다. 문화원 홈페이지 검색해보니 사창리사창터가 있을 뿐, 김시습의 집터 대한 자료를 찾을 수 없다. 면사무소에 들르니 직원들이 반갑게 맞이하며 이것저것 말씀해 주시고, 사창리에 대해 잘 아시는 분도 소개시켜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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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삽교 주변의 절벽>

 

곡운구곡에 대한 선인들의 총평

 

   대개 방화계(傍花溪)부터 여기까지 10여리 사이는 잇달아 서 있는 봉우리와 묶인 듯 좁은 골짜기로 이루어졌다. 구름 낀 나무숲은 무성하여 어둡고, 흰 돌과 이끼 낀 바위는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다. 물소리는 어지럽게 부딪치고 사람소리는 적막하다. 큰 소나무는 위엄있게 서있고 철쭉은 밝게 비치니 사람의 마음과 눈을 깨어나게 한다. 내가 가장 뛰어난 경치를 정해서 구곡(九曲)이라 했다. 구곡(九曲) 외에 유람하고 볼만한 곳을 다 기록할 수 없다.(「곡운기(谷雲記)」)

 

   일단 곡운구곡의 여행은 여기서 끝난다. 물론 바로 앞에 사창리에 대한 설명이 있기는 하다. 방화계부터 시작하여 김수증의 심미안에 포착된 뛰어난 경치는 각각 이름을 얻고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김수증도 시인하고 있듯이 볼만한 곳을 모두 거론하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아쉬움을 정약용이 메꿔준 것이 아닐까? 만약 김수증과 정약용의 의견에 동조할 수 없다면, 다시 나만의 곡운구곡을 정할 수도 있으리라.

 

   오원 곡운구곡을 어떻게 감상했을까? 그의 기록을 잠시 살펴본다.

 

   " 체로 농수정부터 이곳까지는 몇 리이다. 계곡은 모두 하나의 돌로 바닥을 이루고 있고 넓이는 수 백 평 남짓하다. 돌은 모두 흰 색이며 물은 모두 맑고 차갑다. 무릇 이름이 있는 것 외에 여울과 폭포와 연못과 시내가 된 것들은 걸음마다 괴이하고 뛰어나서 앉아서 감상하지 않을 수 없다. 때때로 기이한 산과 깎아지른 절벽, 오래된 소나무와 아름다운 나무들이 서로 비추고 어울린다. 산 전체는 철쭉과 진달래가 뒤덮고 있다. 봄에는 더욱 더 흐드러지게 필 것이다. 끝까지 가보지 못한 곳은 청옥협(靑玉峽)방화계(傍花溪)이다. 여기서 떨어진 것이 다시 10여리이다. 날은 이미 저물고 승경은 상류에 미치지 못한다고 들어서 말고삐를 돌려 돌아왔다. "

 

   앞에서 정약용곡운구곡을 살펴보았지만, 아직 그가 김수증구곡을 굳이 바꾼 이유에 대해서 들어볼 기회가 없었다. 정약용의 변 마지막으로 들어본다.

 

   " 대개 방화계로부터 위로 청옥협에 이르기까지 6~7리 사이는 굽이마다 기이하고 절묘한데도 모두 빼놓고 하나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운담(白雲潭) 이상은 인가가 가까와 소 울음이 들리는 곳인데도 3ㆍ4ㆍ5ㆍ6곡이 속속 이어져 있다. 그리고 7ㆍ8ㆍ9곡으로 말하면 외람되이 화려한 선택에 끼게 된 것이다. 마치 재덕을 갖추지 못한 친척과 가까운 신하가 함부로 공경(公卿)의 자리를 차지하고, 초야에 묻혀 있는 자는 훌륭한 포부를 품고도 늙어죽도록 버림을 받는 것과 같아 결코 순리가 아니다. 그리하여 삼가 고쳐보기를 이와 같이 하였다. 비록 경솔한 처사로서 두렵기 하지만 공적인 논의로 용서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

 

 

에필로그

 

   김수증「곡운기(谷雲記)」는 계속 이어진다. 앞부분에서 언급했던 주변의 고갯길에 대한 설명이 있고, 경기도 포천 속한 계곡의 승경이 뒤를 잇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의 처음 거주지인 귀운동과 두 번째 거주지인 화음동에 살게 된 내력을 간단히 설명하면서 글을 맺고 있다. 이 글은 곡운구곡을 중심으로 진행되기 때문에 주제와 벗어난 부분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증은 은거하기 위하여 곡운으로 들어왔다. 몇 번 밖으로 출입을 하였지만 최치원의 시에서 빌려와 정자에 붙인 이름인 농수(籠水)는 세상과 거리를 두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준다. 은거하며 여러 편의 기행문을 남겼는데, 그 중 곡운구곡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 「곡운기」이다. 그래서 「곡운기」에 기록된 김수증의 발길 따라 지금까지 걷고 또 걸었다.

 

   지금은 뻥 뚫린 도로 덕분에 곡운구곡을 찾는 길이 쉬워졌지만, 결국 계곡 한쪽을 편리함에 내주고 말았다. 김수증의 혀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그가 혀를 차는 이유가 또 하나 있을 것 같다. 세상과 떨어져 자연과 더불어 살고자 했던 그의 의도와는 달리, 세상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면서 자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도 마뜩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본인을 따라 답사한 속세 사람들 중에 곡운구곡에서 눈과 귀와 마음을 씻고 욕심을 조금 덜어낸다면 조금이나마 이해해주지 않을까?

 

 

≪참고문헌≫

 

김구, 『관복재유고(觀復齋遺稿)』

김수증, 『곡운집(谷雲集)』

오원, 『월곡집(月谷集)』

이재의, 『문산집(文山集)』

이하곤, 『두타초(頭陀草)』

정약용, 『여유당전서』

심경호, 『다산과 춘천』, 강원대학교출판부

유준영 외2인, 『권력과 은둔』, 북코리아, 2010.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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