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현의 청평산을 찾다 ①

2015. 7. 26. 16:48여행 이야기

 

 

 

 

      

이자현의 청평산을 찾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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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현의 청평산을 찾다 ①

 

추억 속의 청평산

 

   청평산을 처음 찾은 것은 대학교를 졸업하고 한 두 해 지난 겨울이었다. 소양강댐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춘천 시내를 구불구불 돌다가 소양교를 지나서 샘밭으로 달렸다. 한참 도안 더 달린 후 도착한 곳은 소양강댐 밑의 정류장이었다. 거기서 다시 버스를 갈아탔다. 힘이 부친 듯 저속으로 빙글빙글 돌던 버스는 헐떡거리며 댐 정상에 올랐다. 나는 물을 배경삼아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을 뒤로 하고 청평사로 가는 배표를 끊었다. 그러고 보니 25년 전, 102보충대에 잠시 들렀다가 양구의 21사단으로 갈 때도 이곳을 거쳤었다. 그 때는 바깥 풍경이 보이지 않는 군함이었다. 쾌룡호를 타고 휴가를 오간 기억도 스친다. 전역할 때도 군밤과 번데기를 파는 이 곳을 지나쳤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옆의 군대 동기에게 말하곤 서로 피식 웃었던 기억은 또렷하다.

 

   여자 친구와 함께 탄 배는 한참만에 선착장에 닿았다. 바로 청평사로 향했다. 청평사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별로 생각나는 것은 없고, 배 시간에 맞추느라 한참동안 뛴 기억만 생생하다. 이것이 청평산과의 첫 번째 만남이었다. 그 후 첫째 아이와 청평사로 가는 배 안에서 찍은 사진이 앨범에 꽂혀있다. 언젠가 청평산에 갔다 온 친구의 이야기를 얼핏 술자리에서 들은 적이 있었다. 여자 친구와 갔다 왔는데 산이 험해서 손을 실컷 만질 수 있었다나. 청평산은 나에게 관광지의 이미지로만 추억 속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최근에 청평산의 진면목을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우리가 스쳐지나가는 많은 것들도 이러할 것이다. 관심이 없으면 특별한 의미 없이 스쳐지나갈 뿐이다. 오늘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무심히 지나쳤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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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선착장>

 

청평산을 유람한 기록들

   청평산은 지금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나무뿌리는 계단의 역할을 하고 있고, 청평사 입구 상가는 북적거린다. 예전에도 청평산을 찾는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강원도에서 금강산을 제외하고 유산기록을 많이 갖고 있는 곳이 청평산이다.

   청평산과 관련된 유산기는 청평산의 유람만을 다룬 작품과,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청평산을 유람한 내용이 포함된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청평산만의 유람을 기록한 작품으로 김상헌(金尙憲;1570~1652)「청평록(淸平錄)」을 들 수 있다. 박장원(朴長遠;1612~1671) 1651년 8월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를, 그 해 12월「중유청평기(重遊淸平記)」를 지었다. 서종화(徐宗華;1700~1748)「청평산기(淸平山記)」를 남겼고, 안석경(安錫儆;1718~1774)의 작품으로는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가 있으며, 조인영(趙寅永;1782~1850)의 유산기록은 「청평산기(淸平山記)」이다.

 

   다른 유산기나 기록에 청평산 유람의 내용이 포함된 것들도 있다. 양대박(梁大樸;1543~1592)1572년 지은 「금강산기행록(金剛山紀行錄」 속에 청평산을 유람한 내용을 삽입시켰다. 그리고 정시한(丁時翰;1625~1707)「산중일기(山中日記)」김창협(金昌協;1651~1708)1696년 지은 「동정기(東征記)」 안에도 청평산 유람 찾을 수 있다. 한편 윤휴「풍악록(楓嶽錄)」은 직접 청평산을 유람한 것은 아니지만, 청평산에 관하여 들은 이야기를 적고 있다.

 

   이 중 나는 서종화의 작품 손에 들고 산행을 하려고 한다. 다른 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있지만, 서종화「청평산기(淸平山記)」가 가장 자세하게 산의 구석구석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연구된 자료에 의하면 18세기 학자 서종화의 자(字)는 사진(士鎭)이고, 호(號)는 약헌(藥軒)이며, 본관은 달성(達城)이다. 1729년(영조 5) 식년시(式年試)에 급제하였다. 「청평산기」서종화의 문집인 『약헌유집(藥軒遺集)』에 실려 있다.

자! 이제, 서종화의 발길을 따라 길을 떠날 시간이다.

 

청평산과 이자현의 인연

    " 수춘(壽春)의 관청으로부터 동쪽으로 40리에 청평산(淸平山)이 있다. 본래의 이름은 경운산(慶雲山)이다. 산이 험하고 깊은데다가 도적과 맹수가 많았으나, 고려 시대 처사 이자현(李資玄)이 와서 머물자 사나운 짐승들은 자취를 감추고 도적은 들어오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청평산(淸平山)이라 불렀다고 한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수춘(壽春)춘천의 옛 이름이다. 청평산에 대한 위치는 기록마다 조금씩 편차를 보인다. 동쪽이 대부분이지만 북쪽에 있다고 적은 곳도 있다. 거리도 40리에서 44리 등 일정치 않다. 청평산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온전히 이자현(李資玄)에 힘입은 바 크다. 젊은 시절의 이자현은 고려 전기 문벌귀족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명문 집안의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흥성시키기 위한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소원대로 과거에 급제하였다. 앞길이 보장되어 있던 이자현은 갑자기 현실세계를 떠나게 된다. 표면적인 이유는 부인의 죽음 때문으로 기술되어 있다. 이자현은 다시는 서울에 들어가지 않으리라 결심한 이후, 두 번이나 임금이 불렀지만 매번 거절하였다. 김부철은 이에 대하여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이황은 ‘이자현은 부귀와 영화를 쉽게 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속세를 떨쳐 버리고 무려 산속에서 37년 동안 긴 세월을 살았다.’고 이자현에 대해 호의적인 평가를 하였다. 현실세계와 단호하게 절연하였으며, 뜻을 굽히지 않고 오랫동안 약속을 지킨 것에 대한 정당한 평가인 것이다. 다른 요인으로 이자현의 병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이자현의 병과 관련된 기록이 있는데, 병에 걸렸다는 것이 임금의 부름을 거절하기 위한 상투적인 표현일 수도 있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임금이 하사한 물품들 중에 약이 포함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자현은 젊은 시절부터 병을 앓고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본다. 신체적 아픔 때문에 이자현은 젊은 시절부터 숨어살 곳을 찾았으며, 상처(喪妻)라는 아픔을 계기로 피세(避世)를 실행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여튼 이자현은 27살의 젊은 나이에 춘천의 청평산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청평산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자현 때문임을 서종화는 문화해설사처럼 알려준다.

 

구성폭포와 용담

  " 청평산의 물이 산의 입구에서 흘러 나와 소양강 상류로 들어간다. 여기서 강을 떠나 계곡으로 들어갔다.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자, 길은 험하고 나무는 빽빽이 들어차 있다. 길은 끝나는 듯 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산은 합쳐진 듯 하다가 다시 열리곤 하는 것이 십 여 리 길, 비로소 구송대(九松臺)에 도착했다. 구송대는 돌을 쌓아 만들었다. 예전엔 구송대 주변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이 중 하나가 작년에 바람에 의해 쓰러졌다. 구송대의 북쪽에 이층(二層) 폭포 있다. 아래 폭포는 위 폭포에 비해 한 길 정도 작다. 산의 눈이 막 녹기 시작해 계곡의 물이 막 불어나니, 폭포의 물은 세차게 부딪치며 물보라를 내뿜는다. 흐르는 물소리는 마치 흰 용이 뛰어오르며 큰 소리로 으르렁거리는 듯하다. 두 폭포 사이에 용담(龍潭)이 있는데, 웅덩이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일찍이 용이 이곳에서 숨어 살았기 때문에 이름 지었다. 앞의 찌를 듯한 돌은 오는 길에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붉은 낭떠러지와 푸른 절벽이 깎아지른 듯 서 있고, 양 옆에는 단풍나무와 향나무, 삼나무와 소나무가 무성하게 빛나고 있다. 이 때 산새 두 세 마리가 나무 사이로 울며 날아다니니, 청평에서 가장 처음 눈에 띄는 곳이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지금은 소양강댐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호수 때문에, 배에서 내린 후 조금만 걸으면 청평사로 들어가는 길목인 부용교를 건널 수 있다. 배를 타지 않고 차를 이용할 경우 춘천에서 쪽으로 가는 46번국도 경유하게 된다. 배후령을 넘어 오음리 방면으로 가다가 간척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된다. 백치고개 넘어 길을 따라 가면 주차장이 나온다. 지금은 접근이 용이해졌으나 댐이 건설되기 전에 청평산이 만들어낸 계곡은 길게 물을 끌고 가다가 소양강과 만났다. 서종화는 물길의 길이가 10여리라고 했으니, 우리는 서종화가 걸어온 길을 배를 타고 온 것이다.

 

   부용교를 지나면 관리사무소가 나타난다.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면 청평교이다. 청평교를 건너 계곡 옆의 길을 따라 가다보면 매표소가 나온다. 조금 더 걸어가면 거북바위를 만나게 되고, 주변의 경관을 구경하며 좀 더 가면 구송대(九松臺)가 나타난다. 예전에는 청평사를 오가는 숱한 사람들이 앉아 땀을 식히며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던 명소였으나, 지금은 나무와 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주변에 아홉 그루의 소나무가 있어 구송대라고 불렀으나 서종화가 방문했던 그 당시도 아홉 그루 중에 한 그루는 비바람에 쓰려졌고, 지금은 나머지 소나무도 찾을 길이 없다. 청평산을 방문했던 선인들의 기록에 꼭 등장하던 구송대는 이제 숲속에서 길게 쉬고 있다. 청평사를 향하던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옛길도 이제 계곡 건너편에 새로 생긴 넓은 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기 때문에 구송대와 함께 옛 전적 속에서만 살아있을 뿐이다.

 

   김창협(金昌協;1651~1708)은 구송대에서 불현 듯 이는 흥취를 참을 수 없었다.

 

골짜기로 들며 유람을 시작하느라 말에서 내려 가마를 타네.

스님이 가리키는 오래된 구송대물 흐르는 큰 소나무 밑에 있네.

그늘진 모습 사랑스러워잠시 앉아 있으니 마음은 벌써 트이네.

두 폭포 샘물을 쏟아내자작은 숲나무에 회오리가 이는구나.

비 맞은 이끼에 푸른 벽 촉촉하고 이슬 머금은 청단풍은 깨끗하구나.

 

          入谷幽事始 肩輿卸鞍馬 僧指太古壇 水流長松下

蔭映相爲美 少坐意已寫 噴薄兩疊泉 回風山木亞

雨蘚翠壁滋 露葉靑楓灑

 

   구송대는 두 폭포를 감상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시인과 묵객들은 바로 이곳에서 차 한 잔, 또는 술 한 모금을 마시며 수많은 시를 흥얼거렸다. 여기서 보이는 두 개의 폭포 이름도 다양하다. 서종화이층(二層)폭포라고 말하지만, 지금은 구성폭포로 알려져 있다. 구성폭포의 유래를 자세히 설명한 팻말이 폭포 옆에 세워져 있다. “옛 문헌에 보면 아래 위 폭포를 한데 묶어 이단(이층)폭포, 형제폭포, 쌍폭(상하) 그리고 구송폭포 등으로 불렀다. 다만 다산 정약용은 상폭을 구송정폭포, 하폭을 경운대폭포로 각각 불렀다. 원래 아래 폭포의 반석과 구송대(九松臺) 사이에 아홉 그루 소나무가 자라고 있어 구송(九松)이란 접두어가 붙었다. 그런데 현재에 와서 아홉 가지 소리의 구성(九聲)으로 와전되어 구성폭포(九聲瀑布)라 잘못 부르고 있다.(하략)” 그런데 다시 청평사를 찾았을 때 팻말은 사라져버렸다.

 

 

   연인과 함께 청평사를 찾을 때, 가장 인기 있는 곳은 구성폭포다. 나도 폭포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앨범 어딘가에 꽂혀있을 것이다. 내가 사진을 찍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사진을 찍느라 부산하였고, 옆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겸연쩍게 부탁을 했었다. 그때 온통 구성폭포에 정신을 빼앗겨 아래에 있는 폭포의 존재 자체를 알지 못하였다. 최근에 들어서야 비로소 쌍폭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그 동안의 무심함이란.

 

   정시한(丁時翰;1625~1707)「산중일기(山中日記)」에서 “다시 구송정에서 내려가 위 아래의 폭포와 너럭바위를 감상했다. 무척이나 맑은 기이한 경관으로 산중의 가장 큰 보물이다”라고 하였다. 안석경(安錫儆;1718~1774)은 「유청평산기(遊淸平山記)」에서 “구송대로부터 골짜기에 있는 너럭바위로 옮겨 앉았다가, 한참 지난 후 일어났다”라고 했으니, 선인들에게 쌍폭과 밑에 형성된 너럭바위는 의미 있는 공간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예전의 나처럼 아래 폭포에 관심을 갖는 사람도 없을 뿐더러, 그 밑에 형성된 너럭바위를 찾지도 않는다. 너럭바위에서 바라볼 때 쌍폭의 진몀목을 볼 수 있다. 규모로 폭포를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여행객들은 구성폭포 밑에서만 배회하며 사진찍기에 여념이 없다.

 

   구성폭포 밑에 형성된 물웅덩이를 용담(龍潭)이라고 한다. 김창협정시한 뿐만 아니라 안석경의 기록에도 용담으로 기록되어 있다. 폭포 아래에 시퍼런 물감을 풀어놓은 듯 짙은 색감을 머금고 있어 진짜 용이 살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맑은 아이들은 조약돌을 던지며 물수제비를 만들곤 하는데, 용도 아이들의 장난에 적응이 됐을까. 폭포소리만 들릴 뿐이다. 폭포 옆에 공주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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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폭포 반석에서 바라본 두 개의 폭포>

 

환희령과 공주탑

   " 북쪽으로 돌 비탈길을 오르면 바로 환희령(歡喜嶺)이다. 고개 오른쪽 작은 언덕에 층석탑이 있다. 또 그곳으로부터 수십 보 거리에 성향원(盛香院)의 옛 터 있다."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송대가 잊혀진 쉼터이 듯 환희령(歡喜嶺)도 잊혀진 고개길이다. 계곡 건너편 길이 시원하게 뚫리기 전에 오가는 사람들이 흘리던 땀은 삼층석탑을 찾는 몇몇의 사람들의 이마에서만 볼 수 있다. 탑은 무심히 지나는 탐방객들의 눈에서 벗어난 지 오래되었다. 지금은 공주탑이라 부르고 있다. 공주탑 주변의 바위에 많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자신이 왔다갔음을 기념하고자 이름을 새기기도 하였고, 자신의 비원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 숱한 소망들은 성취되었을까? 글자를 새기지 못한 사람들은 정성스럽게 돌탑을 쌓았다. 나도 돌 한 개를 주워 조심스레 얹어놓았다.

 

  나무 사이에 말없이 서 있는 탑으로 접근하는 길은 무척이나 어렵다. 급경사인데다가 계단이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드러난 나무뿌리를 잡고 올라가야했다. 긴 세월을 묵묵히 이겨낸 탑은 검버섯 같은 이끼가 듬성듬성 있고, 이 곳 저 곳 떨어져나갔다. 그런데 이러한 모습이 묘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탑을 보호하느라 세운 철구조물의 뻘건 녹과 퇴색한 푸른 페인트색이 탑과 묘하게 어울리며 고려시대로 이끌고 간다.

   공주탑에서 청평사쪽으로 가다보면 돌을 쌓아 만든 축대가 보인다. 이곳이 성향원(盛香院) 터이다. 서종화가 방문했을 때도 터만 남아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풀과 나무만이 축대와 벗하고 있다.

 

최고(最古)의 정원인 영지

   " 서북쪽으로 40보쯤 가서 첫 번째 다리를 건넜다. 길가에 산죽(山竹)이 빽빽이 우거져 있어 볼만하다. 비스듬히 올라가서 영지(影池)에 도착했다. 연못은 사방이 5묘(畝) 가량 되는데, 무늬 있는 돌로 계단을 만들었다. 계단 위에는 잎갈나무 네 그루가 빙 둘러 서 있는데 나옹(懶翁)이 심은 것이다. 크기가 모두 수 십 둘레나 되며, 몸체가 구불구불하게 틀어져 있고, 가지와 잎이 매우 기이하다. 북쪽으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부용봉(芙蓉峰)인데, 몇 리 쯤 멀리 보인다. 떨어질 듯이 높이 솟은 산의 모습이 연못에 비치는 것을 보니 견성암의 창문과 소요대 바위의 위아래가 모두 역력히 보인다. 얼마 후 바람이 잔잔한 곳에 불어와 물결이 일렁이자 봉우리와 초목이 모두 움직인다. 그 광경은 황홀하여 도저히 표현해낼 수 없을 정도이다."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영지청평사에 은거하면서 평생을 보낸 이자현이 만든 정원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정원은 구성폭포에서 식암에 이르는 방대한 규모로 구성되었으면서도 자연경관을 최대한 살리고 있기 때문에 정원문화의 전형을 보여준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영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 정원의 흔적이 있는, 인공으로 조성된 연못이기도 하다. 사다리꼴 모양의 못 안에는 세 개의 큰 돌을 배치하여 단순하면서도 입체적인 변화감을 더하여 주고 있다. 이러한 정원은 일본 고산수식정원 보다 200년 앞선다고 알려져 왔다.

 

 

고인 물은 천 년 동안 한 빛깔로 맑았거니,

절에 칠한 고운 단청 고요한 물에 거꾸로 비치네.

찾아온 나그네 허연 머리 비치는 게 부끄러워,

오라지 연못가에 가서 갓끈 씻어 보네.

 

止水千年一色淸 上方金碧倒空明

客來羞照星星鬢 聊就池邊試濯纓

 

 

    김상헌영지를 위와 같이 읊었다. 천년 동안 맑은 연못 물은 이자현의 변치 않는 고결한 정신을 말한다. 영지에 비치는 주변의 산과 암자를 형상화한 것은 청평사를 둘러싼 경개가 모두 고결한 곳임을 말한다. 그 속으로 들어가는 작자는 속세에 찌든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 영지에서 몸과 마음을 청결히 하고 있다. 청평사에 도착하기 전에 만나는 영지는 청평사를 찾는 외부인들의 마음을 씻는 정화수 역할을 하였다. 김상헌 뿐만 아니라 청평사를 찾는 사람들은 빠짐없이 영지에 대하여 언급하였고, 청평사 뿐만 아니라 청평산을 대표하는 장소 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영지가 이름을 얻게 된 이유도 부용봉과 그 곳에 있는 견성암이 연못에 비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진짜일까? 영지를 둘러싼 울창한 나무 위로 저 멀리 바위산이 보인다.

 

   나옹(懶翁;1320~1376)은 1367년부터 1369년까지 청평사에서 주석하였다. 고려말 불교계를 이끈 선승으로 중・고등학교시절 국사시간에 배운 기억이 어렴풋이 난다. 스님이 영지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찾을 길이 없다. 다만 제법 큰 나무들이 울창하게 영지를 에워싸고 있다. 그 그늘 밑에 의자가 군데군데 있어 탐방객들을 부르고 있다.

영지 앞에 커다란 바위가 덩그러니 앉아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으나, 사람들의 눈길은 저 아래부터 영지에 쏠려있다. 바위에 암각문이 새겨져 있다고 하여 한 바퀴 돌며 찾아보았으나 찾을 수 없다. 혹시나 하여 바위 위로 올라가보니 노란 나뭇잎 사이로 희미하게 글씨가 보인다. 연구된 바에 의하면 암각문은 다음과 같다.

 

욕심이 나타날 때 욕심에 물든 대상은 나타나며

욕심이 사라질 때 욕심에 물든 대상은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모두 멸하고 나면

어느 곳이나 안락국(安樂國)이니라.

 

   바위는 영지 앞에서 지나는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들어보라고 말을 걸고 있지만, 대부분 그냥 지나쳐 간다. 욕심을 버리면 평안이 찾아온다는 지혜를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실천의 문제인데, 나도 서종화의 발길을 확인하고 싶은 욕심에 바로 자리를 떠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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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와 그 위로 보이는 청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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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지 앞 바위>

드디어 청평사, 문수원비와 회전문

    " 두 번째 다리를 따라 가다가 꺾어지면 동북쪽에 큰 절이 있다. 산은 열려 있고 물은 에워싸 흐르며 사방의 신(神)이 주위에서 호위하는 듯한 것이 참으로 뛰어난 사찰의 터다. 처음 이름은 백암(白巖)이며, 보현(普賢)이라고도 하였다. 당나라 스님 영현(永玄)이 지었는데, 진락공(眞樂公)이 중수하고 이름을 고쳐 문수(文殊)라고 하였다. 이에 관한 전말이 고려의 보문각(寶文閣) 학사(學士) 김부철(金富轍)이 찬한 비석에 기록되어 있다. 비는 회전문(回轉門) 밖 정원의 서쪽 뜨락에 있다. 또한 정원의 동쪽에 파손되어 읽을 수 없는 비가 있다. 두 비 사이에 제석단(帝釋壇)이 있다. 제석단의 아래에는 참죽나무 두 그루와 전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모두 수십 아름이 된다. 노송나무의 색깔은 앞 봉우리와 서로 섞여 푸르게 보인다."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삼국사기로 유명한 김부식동생김부철(金富轍)이다. 그 「청평산문수원기(淸平山文殊院記)」에 청평사의 역사가 자세하다. 앞부분은 다음과 같다. 춘주(春州)청평산(淸平山)은 옛날의 경운산(慶雲山)이다. 문수원(文殊院)은 옛날의 보현원(普賢院)이다. 처음에 선사(禪師) 영현(永賢)이 당나라에서 신라국(新羅國)에 왔었는데, 태조(太祖)께서 즉위하신 지 후 18년 되는 을미년(乙末年;935)에 신라의 경순왕(敬順王)이 영토를 우리 나라에 바쳤으니, 이 때는 후당(後唐)의 청태(淸泰) 2년이었다. 광종(光宗) 24년(973)에 선사가 처음 경운산에 이르러 절을 창건하고, ‘백암선원(白巖禪院)’이라 하였다. 이때는 송나라의 개보(開寶) 6년이었다. 문종(文宗) 23년(1068) 무신(戊申)에 전(前) 좌산기상시지추밀원사(左散騎常侍知樞密院事)인 이공(李公) 의(顗)가 춘주도감창사(春州道監倉使)가 되어서 왔다가, 경운산의 좋은 경치를 사랑하여 백암선원의 옛터에다 절을 짓고 ‘보현원(普賢院)’이라 하였는데, 이 때는 희령(熙寧) 원년이었다. 그 뒤에 희이자(希夷子)가 벼슬을 버리고, 여기에 숨어서 지내면서부터 도둑도 없어지고 호랑이도 종적을 감추었다. 마침내 산 이름을 ‘청평산(淸平山)’이라 고쳤다. 또한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나타난 것을 두 번 이나 보고, 불법의 요의(要義)를 마땅히 자문하여 결정해야 된다고 하여, 마침내 원(院)의 이름을 ‘문수(文殊)’로 바꾸고 인하여 다시 수리하였다.”

 

  지금의 청평사백암선원(白巖禪院)에서 보현원(普賢院)으로, 다시 문수원(文殊院)을 거쳐 현재의 이름을 갖게 된 것으로 나타난다. 문수원기는 1130년에 세워져 오랫동안 탐방객들애게 청평사와 이자현의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서종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을 견뎌오다가 전쟁 때 폭격으로 청평사가 전소되면서 비도 파괴되어 사라졌고 받침돌만 남게 되었다. 그러다가 최근에 복원되어 다시 옛 이야기를 전해준다.

   맞은편에 또 하나의 비가 있었다. 청평사를 소개하는 글에 따르면, 충숙왕 14년(1327) 원나라 황제 진종(晉宗)의 황후 불경과 함께 돈 1만 꾸러미를 시주하면서 황태자와 왕자들의 복을 빌고 그 내력을 기록한 비를 세웠다고 하는데, 바로 이 비를 말한다. 김상헌1635년에 지은 「청평록(淸平錄)」에서 “절 앞에는 두 개의 연못과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서쪽에 있는 것은 (宋)나라 건염(建炎) 4년 김부철(金富轍)이자현의 사실을 기술한 것을 승 탄연(坦然)이 쓴 것이고, 동쪽에 있는 비석은 원(元)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태자를 위하여 이곳에 불경을 보관해 복리(福利)를 구한 사실을 이제현이 찬하고 이암(李嵒)이 쓴 것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김창협진락(眞樂)의 비문을 읽는데 돌 빛은 맑고 깨끗했으며 자획은 조금도 닳은 데가 없었다. 다만 윗면의 서너 뼘 정도가 겨울철에 크게 손상을 입고, 염천에 벗겨지고 균열이 생긴 것이 안타까웠다.”고 적고 있다. 이때부터 조금씩 손상을 입은 것 같다. 박장원조인영의 글도 이 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박장원1651년 유산기에서 “비석은 원해문(圓解門) 앞 쪽에 동서로 마주하고 있었다. 하나는 검은색이고 하나는 흰색이다. 흰 비석은 품격이 검은 비석에 미치지 못하였다. 검은 비석은 광택이 흘러 아직도 이끼가 끼거나 깨진 곳이 없으니 참으로 기이하다. 검은 비석은 건염(建炎) 연간에 세워진 것으로 스님 탄연(坦然)의 필적이 있다. 흰 비석은 원(元) 나라 태정황후(泰定皇后)가 세운 것으로 모관(某官) 이군해(李君侅)가 전서체(篆書體) 글자를 썼고 수서(首書)는 모관(某官) 이제현(李齊賢)이 찬하였다. 문지르기도 하고 매만지기도 했지만 바빠서 전부 읽어보지 못했으니, 잘못한 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서종화는 자신이 방문했을 당시 파손되어 읽을 수 없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이후 조인영(1782~1850) “원나라 사람이 불교를 숭상하여 절에 불경을 수장해 두고 비에 새겼으니, 익재(益齋)의 문장이요 행촌(杏村)의 글씨이다”라고 적고 있는데, 그 당시도 비석의 존재여부를 떠나 비석에 대한 정보를 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비석을 세울 때 받침돌로 썼던 비좌(碑座)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비좌의 홈에 어제 내린 빗물이 하늘을 머금고 있다. 비록 설명하는 간판이 있으나 탐방객들은 청평사를 배경으로 사진찍기에 열심일 뿐이다. 홍성익에 의해 원문에 대한 연구가 있으니 조만간 복원되어 옛날의 모습을 찾길 바랄뿐이다. 두 개의 비석 사이에 제석단이 있었다고 하나, 오랜 세월의 풍파에 사라지고 낣은 마당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청평사를 상징하는 건축물은 회전문이다. 박장원이 말한 원해문(圓解門)이 지금의 회전문 가리키는 것이라면, 회전문의 원래 이름은 원해문(圓解門)이다. 청평사를 설명하는 사이트에 들어가니 전문적으로 알려준다. 회전문은 절에 들어설 때 만나게 되는 두번째 문인 사천왕문을 대신하는 것이며, 중생들에게 윤회전생을 깨우치려는 의미의 문이라고 한다. 건축물의 특성에 대하여 전문용어를 써서 특징을 설명한 후, 16세기 중엽 건축 양식 변화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는 건축물이라고 힘주어 말한다. 보물 제164호라 하니 건축에 대해 문외한인 나도 절로 다시 쳐다보지만, 다른 절의 문보다 수수하다는 인상만이 아직도 남아 있을 뿐이다.

   또한 회전문은 상사뱀 설화가 얽혀있다. 중국의 어느 공주에게 상사뱀이 붙어 청평사에 와서 이를 치유했다는 이야기는 일찍이 『유점사본말사지(楡岾寺本末寺誌)』에 실린 이래 다양한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 설화가 언제부터 전해졌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청평사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 더 풍성해진 것만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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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전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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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사 근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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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평사 근경3>

청평사 경내, 수많은 건물들

   [ 정원 위에 두 개의 연못이 있는데 모두 막혀 말랐다. 연못의 주변에 주목이 두 세 그루 줄지어 심어져 있는데, 달빛 아래 그림자가 너울대는 것이 즐길 만하다. 회전문으로 들어가면, 원해문(圓解門)이 있고, 문 위는 강선루(降仙樓)이다. 강선루의 기둥은 열 개이며 넓어서 수백 사람 정도가 앉을 수 있다. 이환문(離幻門)을 지나면 비로소 불전(佛殿)에 이르게 된다. 불전의 이름은 능인전(能仁殿)이다. 능인전과 강선루가 마주하고 있는데, 단청은 밝게 빛나고 규모는 크고 화려하며 두공(斗拱)이 교묘하고도 화려하여 예전에 보지 못했던 광경이다. 가운데에 세 좌의 금부처가 있다. 불전의 서쪽은 향적당(香積堂)이고, 동쪽은 사성전(四聖殿)구광전(九光殿)이다. 구광전에는 일월칠성(日月七星)과 여러 부처 그림이 걸려 있다. 그림이 비록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더럽혀지거나 흐려지지 않아서 마치 정기가 살아 있는 것 같다. 스님들이 “오도자(吳道子)가 직접 그린 것이다”라고 하니, 대체로 신라 이후의 작품은 아닐 것이다. 향적당(香積堂)의 수좌(首座) 묘영(妙映)이 앉아 있다가 쇠지팡이를 꺼내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태조가 도읍을 세울 때 나옹(懶翁)화상이 가지고 다니면서 성터를 획정하던 것입니다.”라고 했다.

불전의 아래에 두 개의 곁채가 좌우로 있는데, 좌측에 있는 것은 제하(齊霞)이고, 우측에 있는 것은 연적(宴寂)이다. 그 아래쪽에 동남쪽으로 요사채가 있다. 회전문을 끼고서 좌우에 회랑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승려들이 거처한다. 그 남쪽에서 북쪽으로 창고가 있는데 삼보(三寶)라고 한다. 절 안에 전해져 오는 집기와 물건이 모두 이곳에 수장되어 있다. 나옹의 돌거울 또한 그 안에 있다. 향적당의 뒤쪽에는 감로천(甘露泉)이 있고, 서쪽으로 꺾어서 가면 북쪽에 극락전이 있다. 극락전의 기이하고 교묘함과 영롱히 빛나는 것은 능인전과 비교하면 더욱 정채롭고 화려하다. 서랑(西廊)의 서쪽에 샘물을 끌어들여 우물을 만들었다. 계속 따라가면 서쪽은 시왕전(十王殿)이고, 전의 아래쪽은 자음각(慈蔭閣)이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서종화가 목격한 18세기의 청평사 경내는 지금보다 더 많은 건물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후 동일한 건물이어도 이름이 바뀌기도 한 것 같다. 이후 복원의 과정을 거치면서 모습이 달라졌으리라. 그러나 달라졌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회전문을 거치면서 삶의 본질을 깨닫고, 경내에서 교만한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욕심을 비우면 최선의 탐방이 아닐까. 불당에서 108배를 하고 나니 이마에 땀이 맺히고, 등에서 땀이 세 줄기 흐르는 것을 느끼며 마지막 합장을 하였다. 다시 도시로 나가면 욕망의 바다이겠지만 지금 만큼은 이자현이 된 마냥 허허롭기만 하다.

 

   대웅전을 나와 뒤쪽으로 향하니 극락보전이다. 대웅전의 커다란 건물에 가려졌던 청평산극락보전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청평사 입구 계단에서 보았던 산이 다시 보이기 시작하는 곳이 극락보전 앞이다. 건물 옆엔 오래된 주목나무가 보호수로 보호받고 있다. 건물 뒤편으론 등산로가 있어 주말을 맞은 등산객들이 형형색색으로 내려온다.

   요사채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리자 작은 밭에 정갈하게 줄지어선 배추가 파릇파릇하다. 그 옆엔 커다란 나무 잠자리가 나무에 앉아있다. 솜씨 좋은 스님의 작품일까. 나도 모르게 미소가 배어나왔다.

 

   한편 건물의 화려함을 비판한 기록이 있어 흥미롭다. 박장원은 극락전을 화려하게 증축한 보우(普雨)를 비판하였다. 목민관의 입장에서 과소비를 지적한 것 같다. “경내 건축물의 기둥과 주춧돌은 갖은 기교를 부린 것으로 처음 보는 것이다. 극락전은 사치스럽고도 화려했는데, 노란색과 푸른색, 붉은 옻으로 칠하여 막대한 재력을 들였다. 보우를 죽였다고 해서 어찌 흡족하겠는가? 당시의 불사가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것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거대하면서도 화려한 불사중창이 비판받는 것은 고금의 진리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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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평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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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선루>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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