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현의 청평사를 찾다 ②

2015. 7. 27. 15:58여행 이야기

 

 

 

 

 

      

이자현의 청평사를 찾다

문화통신 조회 수 1238 추천 수 0

 

이자현의 청평사를 찾다

 

서천을 아십니까 ?

 

    " 이곳으로부터 서남쪽으로 70보 떨어진 곳이 서천(西川)이다. 서천의 아래쪽에 절구처럼 생긴 연못이 있다. 연못 위쪽에 대(臺)가 있고, 대의 위쪽에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이를 독송(獨松)이라 부른다. 매월당 김시습이 예전에 이 대 위에 정자를 지어 놓고 거처하였다고 한다. 대개 산골짜기의 물이 합류하여 이곳으로 흘러온다. 바위를 깎고 돌에 부딪칠 때마다 꺾이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빠르게 흐르다 연못에 이르러서 물거품은 둥근 모양을 만들며 잔잔하게 흘러간다. 단풍나무 숲과 버드나무, 괴석과 고목이 양쪽 언덕을 덮으며 가리고 있어 깊고 그윽한 흥취가 있다.

대(臺)의 서쪽에는 이 층의 단(壇)이 있는데, 고을의 수령이 기우제를 지내는 곳이다. 정성스럽게 기원하면 종종 감응이 있다고 한다. "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청평산은 크게 두 가지의 이미지로 그릴 수 있다. 외형적으로 뛰어난 경치가 하나이다. 다른 하나는 뛰어난 인물로 기억되는 청평산이다. 경치는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구체화된다. 김상헌청평산의 계곡 주목하였다. 계곡은 서천(西川)선동(仙洞)을 지칭하는데, 이 곳 천석(泉石)의 아름다움은 대관령(大關嶺) 서쪽에서는 비슷한 곳이 없다고 말한다. 김상헌은 산이 높고 웅장하며 기묘한 것 등에서 청평산의 특징을 찾아낸 것이 아니라, 계곡을 주목하였던 것이다. 서천에 대한 시가 없을 수 없다.


서천의 물과 바위 예로부터 들었는데,
직접 보니 참으로 그윽하고 뛰어나네.
맑은 물 골짝에서 구불구불 흘러가고,
위로는 부용봉이 하늘을 찌르누나.
생각하면 진락공(眞樂公)이 절집에 살 제,
정원 앞에 흐르는 이 물을 아꼈으리.
허나 고인 백골에 이끼가 돋았으니,
깊은 회포 있은들 뉘를 향해 펼쳐보나.
이내 마음 불현듯 떠오르는 동봉자(東峯子),
고사리 캐던 곳이 또한 이 산이네.

 

西川水石聞昔日 我來目擊信幽絶

淸泉出谷流蜿蜒 上有芙蓉峯揷天

尙憶眞樂寄梵宇 愛此朝暮當園圃

古人白骨今生苔 我有幽襟向誰開

 

     令人却憶東峯子 採薇亦曾此山裏

 

 

   대부분 청평사를 찾는 사람들은 구성폭포회전문 등에 관심을 표하면서도, 서천의 존재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또한 산봉우리의 아름다움을 말하는 사람은 있지만 계곡의 아름다움에 주목하는 사람은 찾기 힘들다. 나도 최근에야 서천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이전에 청평사에 왔을 때 청평사 경내를 둘러보고 나오면서 물 한 모금 마시고 청평사 뒷 산을 한번 쳐다보고는 발길을 돌렸었다. 요사채 옆으로 난 길이 있다는 것도, 옆 계곡이 그토록 수많은 선인들이 찬사 속에 시를 남겼던 장소였다는 것도 모른 채 배 시간에 쫓겨 내려가곤 했다.

 

 

   요사채 옆의 계곡으로 향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다. 너럭바위로 이루어진 계곡은 위압감을 주지 않고, 아무런 부담감 없이 바로 눈으로 마음으로 들어온다. 조그마한 폭포와 폭포 밑에 물웅덩이. 물의 흐름을 완상할 수 있는 넓은 너럭바위. 주변에 청량한 기운을 민들어주는 나무들. 서종화는 폭포 밑의 웅덩이를 절구처럼 생긴 연못이라고 했다. 지금은 입구에 세워진 알림판이 공주탕이며, 공주가 목욕재계하던 곳이라고 알려준다. 매월당 김시습 거처하였다는 정자는 찾을 길 없고, 텐트를 치기 적당한 평평한 땅만이 김시습의 자취를 보여준다. 서천의 계곡 물은 김시습의 고독함을 조금이라도 씻어 보냈을까. 고독감을 없애지는 못했을지라도 물소리는 외로운 김시습의 친구 역할을 했을 것이다. 한참 동안 김시습처럼 바위 위에 앉아 흐르는 물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서천의 특징 중의 하나는 기우제를 지내던 단 있다는 점이다. 기우제를 지내는 양상은 다양하다. 무당들에 의한 기우 굿있는가 하면, 사찰에서 승려들이 주관하는 기우제가 있고, 조정이나 지방관청에서 왕 또는 기관장 참여하는 유교식 기우제 등이 있다. 자료에 의하면 고을의 수령이 기우제를 지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유교식 제의 절차는 기우 축문을 읽으면 되지만, 서천에 있는 절구처럼 생긴 연못에 기우 주술 행위를 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천청평사란 사찰의 영역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을의 수령이 기우제를 지낸 독특한 곳으로, 불교와 유교가 조화를 이루던 공간인 셈이다.

 

IMG_9748.jpg

                                IMG_9758.jpg

 

              <서천>                                                      <매월당이 거처했던 정자터> 

 

 

두 기의 부도

 

 

   " 이곳에서 꺾어져서 북쪽으로 수 백 계단을 가면 두 개의 부도가 있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서천에서 선동(仙洞)쪽으로 조금 걷다가 등산길 오른쪽을 보면 두 개의 부도가 숲 속에 앉아있다. 자료에 의하면 하나는 환적당(幻寂堂) 부도이고, 다른 하나는 설화당(雪和堂) 부도이다. 환적당(1603~1690)은 1650부터 3년 동안 수행하였고, 1657년 청평사 양신암에서 여름 수행을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설화당에 대한 기록은 아직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우리 같은 속인들에게나 누구의 부도이며 조성된 연대가 궁금하겠지만, 당사자들은 아무 관심이 없을 것이다. 며칠 전에 벌초를 했는지 풀 한포기 없다. 언듯 보기에 똑같이 보이는 부도는 자세히 보면 부도의 양식에 조금 차이가 있다. 두 부도 사이에 그만큼의 세월의 간극이 있을 것이다. 등산로 옆의 두 부도는 오랜 세월 서로 도반(道伴)이 되어 의지하며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대화를 나누고 있다.

 

 

IMG_9783.jpg

<환적당 부도와 설화당 부도>

 

 

 

해탈문과 청평선동 입구

 

   부도에 합장한 후 다시 길을 나섰다. 위로 올라가다보면 해탈문(解脫門)이 갑자기 나타난다. 이곳을 통과하면 해탈할 수 있을까. 해탈할 수 있기를 염원하며 다시 앞으로 나갔다. 앞에 두 계곡이 만나는 합수지점이 나타난다. 알림판에 촘촘이 새겨진 글자 옆에 화살표는 모두 오른쪽을 가리키고 있다. 오른쪽 계곡으로 접어들자마자 와폭(臥瀑)이 반긴다. 수량이 부족하여 좁다란 바위틈 사이로 물이 졸졸 흐르며 큰 물이 지나가길 기다란다.

 

   폭포 오른쪽 석벽을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전에 무심히 지나쳐서 ‘청평선동(淸平仙洞)’이라 새겨진 암각자를 발견하지 못했던 적이 있었다. 가파른 등산로 옆의 바위에 새겨졌기 때문에 정면에서 글씨를 볼 수 없다. 주변엔 푸른 이끼가 듬성듬성 나 있다. 바위와 같이 검은회색의 각자는 오랜 세월 비바람을 온몸으로 견뎌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바위와 한 몸이 되어 버렸다. 이 글씨는 이자현이 썼다고 알려져 온다. 박장원「遊淸平山記」에서 “길 옆 돌표면에 또 청평선동(淸平仙洞)이라고 새진 네 글자가 있는데, 자체(字體)선동식암(仙洞息菴)의 글자와 같았다.”고 적고 있다. 여하튼 본격적으로 선동(仙洞) 구역임을 알려주는 문패다.

 

 

 

 

IMG_9787.jpg 

 

                           <해탈문>

                IMG_9796.jpg

                                                   <암각자 옆 폭포>                                  

 

 

                                                 IMG_9797.jpg

                              <청평선동 각자>

 

 

 

 

 

 

 

 

청평선동과 식암

 

   " 또 다시 북쪽으로 몇 리 가면 암자가 있는데, 날아갈 듯이 절벽 위에 있다. 암자의 오른쪽에 큰 바위가 있는데, 그곳에 ‘청평식암(淸平息庵)’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바위 위에는 잣나무 두 그루와 소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뿌리가 서리고 얽혀져 구불구불하니 괴이하다. 바위 옆에는 이층폭포가 있다. 물이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리는 것이 마치 백학이 날개짓 하는 것과 같다. 그 옆에는 선동암(仙洞庵)의 옛 터가 있는데, 진락공(眞樂公)이 지팡이를 걸어두었던 곳이 뜨락 앞의 오래된 두 그루 배나무이다. 이것이 참으로 진락공이 심은 것일까?

   그 위쪽이 바로 나한전(羅漢殿)이다. 그 가운데에 토불(土佛)이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많이 떨어져 나갔다. 나한전의 계단 아래에는 반석이 평평하게 깔려져 있다. 산골짜기의 물이 졸졸 흘러내리면서 돌을 움푹하게 파서, 위 아래에 탕(湯)을 만들어 놓았다. 진락공이 예불할 때 목욕을 하던 곳이다. 골짜기 옆에는 석함(石函)이 있다. 바깥 면에 팔괘(八卦)가 새겨져 있고, 가운데에 질항아리가 안치되어 있는데, 진락공의 유골 담겨져 있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계곡을 따라 오르다가 옆의 등산로로 몇 발자국 옮기는 순간 오른쪽 계곡에서 물소리가 계곡을 울린다. 다시 내려가 계곡을 따라 몇 걸음 옮기니 폭포가 보인다. 규모로는 이 계곡에서 제일 크다. 서종화는 올라갈 때 미처 보지 못하였는지, 하산길에 이 폭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바로 위에 폭포가 더 있다. 폭포 옆에 척번대를 해설한 알림판이 있다. 위를 쳐다보니 솜씨 좋은 사람이 돌을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 쌓은 듯한 바위가 보인다. 여기에 앉아 참선을 하면 번뇌와 망상이 사라진다고 했지만, 주변이 온통 이자현과 관련된 유적들이라 마음만 급하다.

 

   척번대에서 조금 올라가자 폭포가 다시 보인다. 알림판이 식암폭포라고 알려준다. 수량이 적어 가느다란 물줄기는 옆의 다래넝쿨의 굵기와 비슷하다. 폭포 위로 석축이 보이는데, 선동암터이다. 선동암터 위쪽에 폭포가 또 하나 있다. 이 폭포를 식암상폭이라 하고 선동암 아래에 있는 것을 식암하폭이라 한다.

 

   계곡 오른쪽으로 올려다보면 적멸보궁이 바위절벽 위에 숨어 있듯이 앉아 있다. 산 정상만을 생각하며 부지런히 걷는 사람은 지나칠 수도 있을 정도로 조용히 있다. 아! 저렇게 있을 수도 있구나! 속으로 감탄하며 올라가보니 생각보다 퇴락했고, 문은 자물쇠로 잠겨 있다. 두 세 사람이 들어가 앉아 있으면 비좁을 것 같은 크기이다. 김상헌 식암은 둥글기가 고니의 알과 같아서 겨우 두 무릎을 구부려야 앉을 수가 있는데, 그 속에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몇 달 동안 나오지 않았다.”라고 옛 전적을 인용하면서, 지금의 작은 암자는 바로 후대 사람들이 세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상현이 찾을 당시에 이자현이 거처하던 형태는 사라지고, 새롭게 지은 암자가 탐방객을 맞이하였다. 그 후 다시 식암(息庵)이 있던 터에 새롭게 복원된 것이 지금의 적멸보궁이다. 이자현 여기서 수도하였다니 거의 천 년의 시간이 흘렸으나 직접 뵙는 듯 가슴이 두근거린다. 흥분은 잠시 후에 부끄러움으로 변했다. 이자현은 자신에게 주어진 전도양양한 길을 버리고 깊은 산 속 후미진 바위절벽 위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용맹정진하였는데, 나는 과연 무엇을 얻기 위하여 이렇게 바삐 살고 있는가. 미망 속에서 일희일비하는 나는 과연 제대로 된 삶을 사는 것일까. 10대와 20대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늘 떠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열심히 살고자 노력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를 소진하고 있지 않은가. 적멸보궁 앞에서 한참 동안 참회를 해야만했다.

 

 

   적별보궁 옆 바위를 바라보니 청평식암(淸平息庵)이라 새겨진 글자가 천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또렷하다. 아마도 이자현은 바위에 글자를 새기며 식암을 지키겠노라고 다짐을 하였을 것이다. 이자현이라고 해서 유혹이 없었겠는가. 정갈하며 힘 있는 해서체의 자획은 굳은 이자현의 의지를 보는 듯하다. 적멸보궁의 지붕은 바위와 연결되어 있으니, 적멸보궁과 바위는 서로를 의지하며 세월을 뛰어넘어왔던 것이다.

 

   적멸보궁 뒤쪽으로 올라가니 지붕이 발 높이에 있다. 바위와 나무가 다정히 있으니 앉아서 명상하기에 적절하다. 선인들이 언급하던 송단(松壇)이다. 다시 계곡으로 내려가서 남겨진 발자취를 찾았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이 너럭바위에 만들어진 네모꼴의 세숫대야다. 진락공이 손을 씻던 곳이라고 한다. 잠시 모자를 벗고 앉았다. 쉼 없이 계속 걸어오며 유적을 살피느라 얼굴과 등은 온통 땀으로 홍건했다. 이자현은 차분한 마음으로 이 자리에 앉아서 예불 전에 목욕재계하였으나, 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뒤로 누웠다.

 

   이 석대의 북쪽 바위 사이에는 이자현를 묻었던 돌상자가 있었다고 하나 찾을 길이 없다. 옆으로 평평한 터에 잡초가 무성하고 그 사이사이에 푹신한 낙엽이 밟힌다. 나한전(羅漢殿)터이다.

   계곡 위쪽에서 커다란 물소리가 들려 올라갔다. 서종화의 기록에 없는 폭포다. 다른 전적을 살펴보아도 이 폭포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규모가 작아서일까? 앙증맞게 한줄기로 떨어지는 폭포선동 계곡 제일 위에서 쉼 없이 떨어지고 있다.

   

       IMG_9807.jpg

 

                  <척번대 옆 아래 폭포>

       IMG_9817.jpg

 

                                <척번대>

     IMG_9826.jpg

                              <적멸보궁>

       IMG_9838.jpg

 

             <이지현이 목욕재계하던 곳>

  

 

 

 

견성암을 찾아서

 

   " 동쪽으로 언덕을 오르고 계곡을 지나 몇 리 가서 견성암(見性庵)에 이르렀다. 일찍이 영지에 거꾸로 비춘다고 한 곳이다. 견성암선동의 사이에 천단(天壇)이 있는데, 스님들이 기도하는 곳이다. 단으로부터 조금 북쪽으로 가면 암벽이 깎아지른 듯이 부용봉을 에워싸고 있다. 부용봉 허리 아래는 푸르며 괴이한데 아름다운 치마처럼 주름졌다. 이러한 까닭에 상암(裳巖)이라고 한다. 견성암은 빈 터에 지어져 있어 아득히 속세와 떨어져 있다. 돌을 뚫어 잔교를 만들었고, 에워싸고 있는 바위가 병풍처럼 있다. 뒤로 흰 구름이 어렴풋이 비추며 울타리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연못이 거울처럼 맑기만 하다. 난간에 기대 한번 보니 마음은 편안해지나 뛰어난 경치는 놀랍다. 홀연히 회오리바람에 위로 올라가 하늘에 이른 듯 하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적멸보궁에서 산등성이를 따라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최근에 세워진 5층 석탑 만날 수 있다. 알림판에 의하면 1978년 세워졌다고 한다. 다시 내려와 적멸보궁에서 오른쪽 산기슭으로 올라가니 자그마한 부도가 숲속에 숨어 있다. 어떠한 설명도 없는 부도는 기단부가 정교하지 않아서인지 전체적으로 엉성해 보인다. 큰 스님의 부도가 아니기 때문일까. 규모가 작아서 숲의 일부가 되어버린 부도는, 그래서 더 정겹다.

 

IMG_9853.jpgIMG_9855.jpg

 

 

 

 

              <오층석탑>                                        <부도>

 

 

   서종화 부도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계속 가서 견성암에 이른듯하다. 부도가 있는 곳에서 동쪽으로 시선을 돌리니 견성암이 있던 산봉우리가 가까이 보인다. 그런데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다. 김상현은  ‘산허리를 경유하여 갔는데, 길이 좁아서 겨우 한 사람만이 갈 수가 있었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예전에 길이 있었던 것 같다. 용기를 내어 무작정 동쪽으로 향했지만, 무성한 풀과 나무들이 앞길을 막는다. 더 결정적인 것은 경사가 급한 골짜기가 입을 벌리고 있어 뒷걸음치지 않을 수 없었다. 

   적멸보궁쪽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등산로에 세워진 알림판은 소요대천단으로 가는 길이 북쪽이라고 화살표로 알려주고 있다. 등산로를 따라 올라갔다. 경사가 급해서 멈추고 위를 쳐다보길 몇 번. 땀은 비오듯 하고 숨이 차서 가슴에 통증이 왔다. 다리는 더 이상 가기 힘들다는 신호를 보낸 지 한참 후에 철계단이 보였다. 계단에 오르니 시야가 틔였다. 서종화의 코스는 견성암에 들른 후 천단소요대를 지났으나, 나는 서종화와 반대로 소요대와 천단을 거쳐 견성암에 도착했다. 비록 반대 방향이긴 하지만 견성암에서 부터 서종화와 같은 방향으로 다시 되돌아왔기 때문에 서종화의 발길을 따라 가기로 한다.

 

   견성암이 있는 곳은 청평사 뒤로 보이는 산봉우리이다. 영지에 비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견성암에서 밑을 내려다 보니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소양호수이다. 호수 밑으로 청평사가 보인다. 녹색으로 그림을 그리다가 덜 칠해 바탕이 드러나 보이는 것처럼 하얗게 보인다. 그 위쪽에 영지가 있을 테지만 짙은 녹색 속에 묻혀서 찾을 수 없다. 바위 아래 부분의 평평한 터가 견성암이 있던 자리인 것 같은데, 흔적을 찾을 수 없고 터만이 바람 속에 있을 뿐이다. 지형을 보건데 협소한 암자였을 것이다. 견성암터 아래는 청평사로 내려가는 암릉구간이다. 등산객들이 길게 늘어서 뒤로 내려가느라 왁자지껄하다.

 

   견성암에서 바위를 잡고 조금 올라가면 바로 천단이다. 천단 주변에는 기묘한 바위들이 여기저기에 있다. 천단은 스님들이 기도하던 곳이라 했지만, 남성 성기와 같은 모양을 해서인지 지나는 등산객들이 쳐다보며 웃고 지나간다.

 

 IMG_9878.jpg

 

             

 

 

 

 

   

 

<견성암>     

 

          

IMG_9884.jpg

  <견성암에서 바라본 청평사>

 

 

 

 

소요대에서 노닐다

 

   " 계단 아래에 백 길이나 되는 전나무가 있다. 뒤쪽으로 가서 북쪽으로 돌아들고, 또 꺾어져서 서쪽으로 백여 층계를 지나 소요대(逍遙臺)에 이르렀다. 산기슭의 머리 부분이 잘라져 돌이 드러나면서 대가 된 것인데, 그 위에 너 댓 사람이 앉을 만하다. 깎아 세운 듯한 골짜기가 내려다보이는데 수천 길이나 된다. 이곳에서 남쪽으로 바라보면 층층이 쌓여 있는 봉우리가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다. 뛰어올라 솟아나온 듯한 대단한 산의 기세를 모두 보여주는데, 기이한 형태와 자태를 모두 다 표현할 수 없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산의 푸르른 기운은 아래로 퍼지고 상쾌한 기운은 옷소매를 가득 채운다. 마침 노스님 천호(天浩)가 따라와 반나절 동안 얘기를 나누었다. 이야기가 맑고 깨끗하여 들을 만 한 하니 마치 신선인 홍애(洪厓) 선문(羨門)과 함께 세상 끝 아득히 먼 곳에서 같이 있는 듯 하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천단에서 위로 더 올라가면 소요대이다. 서종화가 말한대로 평평한 바위는 몇 사람이 앉을 수 있다. 소양호수를 뒷배경으로 한 천단견성암이 바로 앞에 있어 만질 수 있을 것만 같다. 그 옆에 청평사 경내도 조그맣게 보인다. 마침 등산하던 사람들이 앉아서 물을 마시고 있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는 가슴을 시원하게 한다. 서종화도 한참이나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던 곳이다. 홍애(洪厓)선문(羨門)은 예전 중국에 살았던 신선의 이름이다. 소요대에서 서종화가 신선이 됐듯, 나도 조금이나마 신선의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IMG_9864.jpg

 

       <소요대에서 바라본 천단, 견성암, 소양호>

 

 

정상에 오르다

 

 

   " 부용봉소요대의 북쪽에 있다. 극락전 서쪽의 산기슭으로부터 북쪽으로 몇 리를 가면 동쪽으로 부용봉의 자락에 이르게 된다. 석벽이 우뚝 솟아있어 곧바로 올라갈 수 없고, 돌길을 따라 구불구불 올라가면 꼭대기에는 입암(立巖)이 있다. 바위 남쪽의 돌은 거북 모양으로 튀어나와 귀암(龜巖)이라고 부른다. 그 북쪽에 향로봉(香爐峰)이 있는데, 높이가 부용봉과 같다. 그 서북쪽에 경운봉(慶雲峰)이 있는데, 양 봉우리 사이가 깎아지른 듯 험하여 새들만이 길을 통하여 갈 수 있을 정도이다.

   경운봉의 아래쪽에 혈암(穴巖)이 있는데, 겨우 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혈암의 좌우는 모두 절벽으로 되어 있어 발을 디딜만한 곳이 없다. 혈암으로부터 위로 올라가면, 마침내 앞에 봉우리의 정상에 이르게 된다. 앞의 두 봉우리보다 더 높아 시야가 더욱 넓어진다. 동쪽으로 보니 사방이 환히 보이고, 서쪽으로 용화산(龍華山)을 마주 대하고 있다. 북쪽으로 낭천(狼川)에 임하여 있고, 남쪽으로 천전리(泉田里)가 보인다. 그러나 중첩된 산봉우리와 높이 솟은 고개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어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 불과 100여리에 지나지 않는다.

 

   세 봉우리의 위와 아래에 기이한 돌과 바위가 빽빽이 늘어서 있다. 마치 사람이 서 있는 듯. 짐승이 쪼그리고 있는 듯하다. 어떤 것은 대(臺)를 이루고, 어떤 것은 병풍을 이루고 있다. 동굴은 깊이 패여 있고, 각 봉우리가 들쑥날쑥한 것이 기이한 형상 아닌 것이 없다.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소요대에서 발길을 옮긴 곳은 부용봉이다. 여기서 나는 한참 동안 갸웃거렸다. 지도상으로 부용봉은 백치고개 오른편에 위치한 산이다. 천단에서 바로 지금의 부용봉으로 갔을리는 없고, 아마도 예전과 지금의 명칭이 다르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이리라. 지금의 부용봉서종화향로봉(香爐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다. 향로봉에 대한 언급은 조금 뒤에 나온다.

 

   경운봉(慶雲峰)에 대한 언급도 착오가 있는 듯하다. 지도상으로 경운봉은 배후령에서 올라오다가 갈림길에서 오른쪽에 위치한 곳을 가리킨다. 그러나 서종화가 말하고 있는 경운봉은 지금의 오봉산 정상 가리키는 것 같다.

   그렇다면 서종화가 오른 부용봉은 어디일까. 아마 지금의 오봉산 정상을 가기 전에 있는 봉우리 말하는 것 같다. 정상에 올라 주변의 경관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오봉산 정상이다. 779미터라고 표시된 비석이 보인다. 북쪽으로 오음리가 보이고 서쪽으로 용화산이 바로 앞에 다가선다. 동쪽으로 지금의 부용봉이 우뚝하고 남쪽과 남쪽으로 소양강 물이 햇빛에 반짝인다.

 

 

IMG_9895.jpg

    <혈암>

IMG_9902.jpg 

         <정상에서 바라본 오음리>

 

IMG_9912.jpg

 

 

 

 

 

 

 

<경운산>

 

 

IMG_9904.jpg 

 

   <부용봉>

 

 

 

하산길, 다시 식암으로

 

   " 경운산으로부터 서쪽 아래로 2리 쯤 가면 식암(息庵)에서 시작된 길이 있다. 수승(首僧) 행균(行均)이 조(粟)를 조리하여 대접하였다. 이곳에서 잠시 쉰 후 다시 선동암 옛 터를 보았다. 시내를 따라 수십 걸음 내려가니 이층 폭포보였다. 서쪽에 7층의 석대(石臺)가 있는데, 처음엔 누가 이렇게 기교스러운 것을 만들었을까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정상에서 다시 왔던 길로 내려왔다. 등산보다 하산이 어렵다는 말이 실감이 난다. 부실한 다리는 내 마음과 상관없이 흔들린다. 그래도 오를 때와는 달리 하산 길은 짧게 느껴진다. 허기와 갈증을 느낄 때 적멸보궁에 도착했다. 이자현이 목욕재계하던 곳에 앉아 갈증을 해소하고 누워서 휴식을 취했다. 아까 언급하지 않았던 7층 석대 척번대를 가리킨다. 바로 옆에 있는 폭포도 등산길에 언급하지 않았던 폭포다.

 

 

서천계곡의 아름다움

 

 

   " 식암으로부터 서천(西川)까지 몇 리쯤 된다. 골짜기는 좁았다가 넓어지고 기이한 바위와 푸른 절벽은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 그 아래는 모두 반석이다. 돌이 솟아 있으면 물이 튀어 올라 하얗고, 돌이 평평하거나 우묵하게 되어있으면 물이 모여서 푸르다. 물이 합해졌다가 흩어지고, 갈려졌다가 모인다. 콸콸 흐르기도 하고, 졸졸 흐르기도 한다. 거문고가 소리를 내는 것 같고, 구슬을 토해내는 것 같다. 깊은 골짜기가 조용하고 그윽하며, 한가로운 흥취가 맑고 깨끗하다. 고즈넉이 한참 시를 읊으며 머뭇머뭇 돌아가는 것을 잊었다.

   유종원이 말한 맑은 경치는 눈과 대화하고, 졸졸 물 소리는 귀와 대화하고, 고즈넉이 빈 것은 정신과 대화하고, 깊숙이 고요한 것은 마음과 대화한다는 것은 이러한 아취를 먼저 그려낸 것이다. 아! 진실로 선동(仙洞)이다. 그러므로 나는 청평(淸平)의 뛰어난 경치를 말할 때 뚜렷한 것으로 여섯 가지를 든다. 구송대(九松臺), 서천(西川), 영지(影池), 선동(仙洞), 소요대(逍遙臺), 부용봉(芙蓉峰)이 그것이다. 이 중 오직 저 선동이 제일이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다시 하산 길. 서종화의 자세한 묘사가 두드러지는 곳이다. 산행에 지친 범상한 나의 눈에 계곡은 계곡일 뿐이고, 물은 물일 뿐이다. 물의 다양한 색깔과 물소리의 차이를 서종화는 절대음감으로 구별하여 감상하고 있다. 선인들 중 이렇게 생동감 있게 묘사한 작품을 찾기 어렵다.

   서종화가 언급한 당나라 사람 유종원「고모담서소구기(鈷鉧潭西小丘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략)  " 곧 도구를 써서 잡초와 잡목을 베고 그것을 불로 태웠다. 보기 좋은 나무가 우뚝 서고 아름다운 대나무가 드러났으며 기이한 돌이 나타났다. 그 속에서 바라보니 산은 높고 구름은 떠 있다. 시내는 흐르며 조수(鳥獸)와 물고기가 맘대로 노닌다. 모두 쾌활하게 저마다의 기교를 보였으니 그것들은 그 언덕 아래에서 벌어졌다. 자리를 깔고 베개를 놓고 누우니 청량한 모습이 눈과 교감하고 졸졸대는 물소리는 귀와 교감하였으며, 유유하고 허허로운 경계는 나의 정신과, 그윽하고 고요한 경계는 나의 마음과 교감하였다. 열흘도 안 되어 기이한 곳을 두 군데나 찾았으니 비록 옛적에 산수를 좋아하는 선비도 아마 이에 미칠 수 없을 것이다. 아! 이 언덕의 경치를 풍(灃), 호(鎬), 호(鄠), 두(杜) 지방 두면 고귀한 선비들이 다투어 사서 매일 천금을 올려도 얻기 힘들 것이다. 지금 이 영주땅에 버려져 농부나 어부가 지나며 비천히 여기고 사백 냥으로도 몇 해간 팔리지 않았는데 나와 심원(深源), 극기(克己)만 이것을 얻고 즐거워하니 이것은 정말 시운이 있는 것일까? 이 글을 돌에 적어 이 언덕의 시운을 축하한다.  "

 

 

   서종화는 자신이 표현하고자 한 경치를 유종원이 먼저 묘사하였다고 아쉬워한다. 그러면서 청평산에서 뛰어난 경치로 구송대(九松臺), 서천(西川), 영지(影池), 선동(仙洞), 소요대(逍遙臺), 부용봉(芙蓉峰)을 꼽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제일 백미로 선동(仙洞)을 든다. 앞에서도 실토한 바 있지만, 구송대(九松臺), 서천(西川), 선동(仙洞)에 대하여 관심을 갖은 적이 없었다. 구성폭포청평사, 그리고 청평산만을 이야기했었다. 청평산을 바라보는 시각이 교정되어 또 다른 절경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온전히 서종화 덕택이다. 경치뿐만 아니라 곳곳에 새겨진 선인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게 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청평산이 품고 있는 암자들

 

   " 영지에는 지장암(至莊庵)이 있는데 우파새(優婆塞)가 거처한다. 암자는 경운산향로봉, 부용봉 마주하고 있는데 멀리 환하게 보인다. 동쪽으로 석벽을 보면 깎아지른 듯 우뚝 솟아 높이가 천 길 쯤 된다. 일찍이 학이 찾아와 그 꼭대기에서 놀아 학암(鶴巖)이라고 부른다. 선동의 서쪽에는 폭포가 가로질러 몇 길이나 걸려 있고, 나무가 빼곡하니 들어서 있어 앉아 쉴만하다. 그 북쪽에는 원통암(圓通庵)의 옛 터가 있다. 또 그 북쪽에는 상암(上庵)이 있다. 경운산 자락에는 경운암이 있다. 양신암(養神庵)은 견성암(見性庵)의 동남쪽에 있다. 00암 구송대의 서남쪽에 있고, 그 남쪽에 또 수도량(修道場)이 있다. 모두 볼만하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청평산이 수도하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은 서종화가 언급한 수많은 암자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많은 암자를 품고 있는 산이 또 있을까. 도저히 절터를 확인할 수 없다. 영지 옆에 지장암 있었으나, 지금은 템플스테이를 위해 새로운 건물이 깔끔하게 들어서 있다. 차향기에 눈을 돌리니 옆의 세향다원에서 흘러나온다. 예전에 김시습이 이 부근 세향원에서 거처한 적이 있었다.

조금 더 내려오니 길 옆에서 할머니가 전과 동동주를 파신다. 계곡 쪽에 설치된 자리를 차지하고 한 숨 돌리면서 땀을 식혔다.

 

 

 

 

에필로그

 

   " 아! 나의 삶은 잠깐인데 산의 우뚝 솟음과 물의 흐름은 무궁하다. 잠깐의 삶으로 무궁한 사이에서 노니니, 어찌 하루살이가 태허(太虛)를 지나감과 다르겠는가? 나보다 앞서 이곳에서 노닌 사람이 몇 사람이었고, 나보다 뒤에 이곳에서 노닐 사람이 또한 다시 몇 사람일 터인데, 장차 모두 종적없이 사라질 것이니 진실로 슬프다! 또 내가 늦게 태어나 진락(眞樂), 나옹(懶翁)의 무리들과 함께 하지 못함을 괴롭게 생각한다. 용담(龍潭)에 갓끈을 씻고, 부용봉에서 옷을 떨치고, 선동구송대 사이에서 노닐며 홀로 큰 뜻을 가지고 남은 자취를 어루만지다가 감회가 일어, 언덕에 올라 걱정스레 머리를 긁적인다.  " (서종화, 「청평산기(淸平山記)」, 『약헌유집(藥軒遺集)』) 

 

   서종화 발길은 멈췄으나 그의 감회는 끝이 없다. 그의 서글픈 감정이 어디서 연유했는지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청평산 산행 도중에, 유람기를 적는 과정 속에서 어느 정도 치유되지 않았을까? 시름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무게를 지녔다면 「청평산기(淸平山記)」를 기록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가벼워져서 담담히 자신의 발자취를 남긴 것이다.

   나는 어떤가. 산행 동안 계곡물 소리는 나의 귀를 씻어주었고, 계곡물은 몸을 정갈하게 해주었다. 서종화의 발걸음을 쫓으며 눈과 귀가 호강을 해서인지 뿌듯해진다. 일상 속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지지만, 영지 앞 암각문이 내게 건넨 말이 계속 귀에 맴돌며 마음을 가볍게 한다. 

 

  “욕심이 나타날 때 욕심에 물든 대상은 나타나며, 욕심이 사라질 때 욕심에 물든 대상은 사라진다. 이와 같이 모두 멸하고 나면, 어느 곳이나 안락국(安樂國)이니라.”

 

 

 

《참고문헌》

 

 

     김상헌, 『청음집』

김창협, 『농암집』

박장원, 『구당집』

서종화, 『약헌유집』

안석경, 『삽교집』

양대박, 『청계집』

윤휴, 『백호전집』

정시한, 『산중일기』

조인영, 『운석유고』

윤영활, 『청평사』, 대원사, 2009.

춘천시, 『춘천지리지』, 1997.

 

홍성익, 『청평사와 한국불교』, 경인문화사, 2009.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문화통신은 문화커뮤니티 금토에서 발간하는 온라인 문화정보지입니다.
주소 : 200-120 강원도 춘천시 중앙로67번길 56(약사동) | 전화 033-251-9363 | E-mail : geumto@hanmail.net
Copyright © 2000 munhwatongsin.co.kr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