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대승암을 찾아서 - 1

2015. 7. 28. 14:16여행 이야기

 

 

 

 

 

      

치악산 대승암을 찾아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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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대승암을 찾아서

 

    치악산은 원주의 동쪽에 늠름하게 서 있다. 출퇴근할 때 마다 무심히 봐왔던 치악산! 정상부근은 늘 구름을 거느리고 있었고, 늦가을부터 봄까진 눈 속에 있곤 했다. 나는 원주에서 8년을 보냈었다. 그 동안 치악산을 몇 번 간 적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까지 간 적은 없었다. 기껏 구룡사를 지나 세렴폭포까지 간 것과, 금대리에서 영원사까지 간 것이 고작이었다. 행구동황골에서 산 정상을 바라본 적도 여러 번이었으나, 주변 식당을 가기 위해서였지 치악산을 목적으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 원주에서 살면서도 치악산과 직접 인연을 맺지 못한 채, 원주를 떠나야 했다. 그러다가 원주를 떠난 지 10년의 세월이 흘러, 갑자기 치악산을 찾게 되었다. 안석경(安錫儆)의  「유치악산대승암기(遊雉岳大乘菴記)」를 읽으면서 불현듯 치악산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

 

 

치악산과 안석경

 

    " 치악산은 원주에 있다. 봉우리가 험하고 두터우며, 계곡이 맑고 그윽하다. 봉우리마다 대단한 명성이 있지만 제일 높은 봉우리인 비로봉이 여러 산에 비해 더욱 높다. 이름난 사찰로는 남쪽에 상원사, 북쪽에 대승암, 대승암 아래 구룡사가 있다.  " (「유치악대승암기」)

 

    5월 달에 세 번 치악산을 올랐다. 언제나 그러하듯 치악산도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문제는 대승암터였다. 나의 치악산 산행은 대승암터를 찾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결국 세 번째 찾았을 때 비로소 치악산은 나를 허락해주었고, 이 산행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이 글은 안석경의  「유치악산대승암기」를 바탕으로, 그의 발길을 따라가며 구성하였다.
  안석경(1718~1774)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자는 숙화(淑華)·자화(子華)이며, 호는 완양(完陽)·삽교(?矯)다. 그는 1718에 충주(忠州) 기흥(可興)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를 따라 이 곳 저 곳으로 옮겨 다닌다. 그의 나이 27살인 1744년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한다. 이듬해에 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였다. 29살인 1746년에 처음으로 치악산을 찾게 된다. 1749년에 과거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1751년에도 낙방하였다. 35세인 1752년 여름에, 치악산 대승암에서 독서하였다. 이 해에 과시에 응시하였고, 아버지는 원주 원흥(興原)에서 돌아가신다. 1757년에 나이 40이 되어 원주 손곡(蓀谷) 안산리(安山里)에 우거하게 된다. 1761년에 경포대, 설악산 등 관동지방을 유람하고, 이듬해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그 해에 강원도 횡성 삽교(?橋)에 우거하였다. 삽교에서의 한가로운 삶을 즐기던 그에게 처음으로 벼슬을 할 기회가 온다. 1767년 50세 강원도 관찰사 민백홍(閔百興)이 그를 천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임하지 않았고, 유유자적한 삶을 선택했다. 1774년 57살 나이로 가흥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의 저서 『삽교만록(矯漫錄)』은 횡성 삽교에 은거할 당시 완성된 것으로, 손수 농사를 짓는 여가에 사람들과 한 얘기를 기록한 책이다. 그러나 이 책에는 단순히 삽교에 있을 때 들은 얘기만이 아니라, 자신이 부친을 따라 원주, 제천, 홍천 등지를 전전해 살면서 서민들의 생활상을 몸소 느끼고 당시 사회의 문제점을 부각시킨 내용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그밖에 『삽교집』·『삽교예학록(矯藝學錄)』 등의 책을 남긴다.

 

 

비로봉에 오르다

 

    "병인년(1746) 봄, 나는 구룡사대승암을 유람하고 마침내 비로봉에 올랐다. 온 나라의 산과 바다로서 오대산과 태백산, 소백산에 가려지지 않은 것은 다 볼 수가 있었다. 다만 급하게 돌아와야 하였기에 대승암에 오래 머물 수가 없었던 것이 한스러웠다. " (「유치악대승암기」)

 

    안석경치악산과 인연을 맺은 1746년은 그의 나이 29살 때이다. 이때 대승암을 거쳐 치악산 정상인 비로봉에 오른다. 대승암에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한 것을 아쉬워한 대목을 통해 그의 치악산 방문은 대승암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일 다시 치악산을 찾았을 때는 대승암에서 10일 동안 독서를 하게 된다. 이 독서는 아마도 과거공부가 주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젊은 시절을 과거공부를 하면서 보냈던 것이다. 


   젊은 시절 안석경은 자신감이 넘쳤던 것 같다. 그는 두미협(斗尾峽)을 지나면서 시를 한 수 짓는다.
 


아침에 두미협(斗尾峽)을 지나
거리낌 없이 서울을 바라보네.
삼각산은 하늘을 밀칠 듯이 솟아 있고
한강은 바다에 이르도록 맑구나.
바람과 구름은 천고의 모습이며
꽃과 버들은 늦봄의 정이로구나.
배의 노 아닌 것이 절로 부끄러우니
어떻게 임금의 밝은 지혜 도울 것인가?


朝來斗尾峽。豁達見王城。
華嶽排天秀。長江抵海淸。
風雲千古色。花柳暮春情。
自愧非舟楫。何由佐聖明。

 

    지금의 팔당댐 부근에 있는 두미협은 한강을 통해 서울로 가는 배가 지나야하는 협곡이다. 두미협을 지나면 이내 서울이다. 아마도 과거를 보기 위해서 배를 타고 두미협을 지나 서울에 당도하면서 지은 것 같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의 안석경은 작은 것에 구애되지 않는 대인배의 기상을 보여준다. 서울의 모습은 활기찬 모습으로 다가선다. 우뚝 솟은 삼각산과 유장하게 흐르는 한강은 자신의 기상을 은유한다. 그 속에서 안석경은 배를 움직이는 노처럼 나라의 관리가 되어 자신의 갈고 닦은 실력을 발휘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본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일은 계속 어긋난다. 과거에 계속 떨어지곤 했다. 그는 고배를 마신 후 귀향하면서 시를 읊조린다.

 

 

서쪽에서 며칠 노닐다 동쪽으로 돌아가나니
서울에서 하룻밤도 편안하기 어려웠네.
세상사 무슨 곡절인지 알지 못하겠고
인생사 가는 곳마다 어렵지 않은 곳이 없구나.
강 가 나무들 봄날 저무는 것 어여삐 여기고
외로운 배 속의 나그네 차가운 빗소리 듣는다.
문정(文正)의 남겨진 풍모 참으로 우러러볼만하여
높다란 도봉산(道峰山) 돛대에 기대 바라보네.  


西遊幾日又東還。城市難爲一夕安。
世路未知何曲折。人生無處不艱難。
江邊雜樹憐春暮。客裏孤舟聽雨寒。
文正遺風眞可仰。道峰千?倚檣看

 

    과거시험 때문에 서울에서 며칠을 보낸 안석경. 하루도 편안 적이 없었다는 고백은 당락 여부를 떠나서 극심한 스트레스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활달한 기개는 서울 생활 며칠 동안에 사라져버린다. 세상사 알지 못하겠다고, 인생사 도처에 어려움만 있다고 실토한다. 가슴이 시려온다. 아마도 몇 번의 실패 후에 지은 듯싶다. 나 스스로도 인정하기 어려운데 누가 나를 이해해줄 것인가? 온전히 나의 몫으로 남은 실패는 그래서 더 외롭다. 안석경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을까?
  나도 대학입시에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날 서울서 내려오는 기차 안에서 대취하였다. 이후 봄이 지나갈 때까지 응어리진 가슴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한 번의 대입 실패에도 그러했는데, 과거시험에서의 실패는 아마도 더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그러나 안석경은 마지막 연에서 이성을 되찾고 후일을 도모하고자 마음을 다잡는다. 도봉산을 바라보며 다시 서울로 올 것을 기약한다.    
  이후 여러 차례 걸친 실패는 이상과 현실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주었던 것 같다. '과거시험에서 요구하는 것이 자신의 학문적 성향과 맞지 않는다’는 말로 보아 과거시험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방향으로 공부하게 된다.

 

 

독서의 즐거움

 

   " 올해(1752년) 이 산 북쪽 고을에 일이 있었다. 잠시 틈이 나서 대승암에 들어가 책을 읽으려고 하였다. 벗들이 모두 말하였다. "부디 가지 마시게. 치악산에 큰 범이 있어서 근년에 대승암 사람을 잡아먹었다네. 대승암에 갈 수 있겠는가?" 내가 말하였다. "범은 사람을 먹을 수 없다네. 사람이 범에게 잡아먹히는 것은 반드시 사람의 도리를 잃었기 때문일세. 사람이 범을 만나더라도 그 심지가 굳어서 흔들리지 않아. 위로 하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래로 땅이 있다는 것을 알며, 그 가운데 우리가 있다는 것을 안다면 짐승이 사람에게 가까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네. 그러니 범이 비록 사납다 해도 반드시 움츠리며 감히 움직일 수 없을 것이라네."  (「유치악대승암기」)

 

    35살 되던 해에 안석경은 다시 치악산을 찾는다. 첫 번째 방문의 목적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두 번째 방문은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대승암에서 책읽기가 그것이다. 그 당시에 치악산엔 호랑이가 출몰하곤 했었다. 대승암으로 가려던 안석경을 주변 친구들이 극구 말린다. 그러나 호랑이가 그의 의지를 꺾진 못했다. 그의 기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그에게 책읽기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던가. 대승암에서 머무르며 지은 「치악대승암시서(雉嶽大乘菴詩序)」를 살펴본다.

 

    " 옛사람 가운데 권세에서 소름끼쳐 하고 이익에서 두려움을 느낀 사람이 있다. 권세에서 남을 이김을 제멋대로 함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불쾌해지고, 욕망을 함부로 부림이 심하면 심할수록 더욱 부족해지기 때문이다. 만일 9년 동안 중서부에서 권력을 멋대로 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은 내가 알 바가 아니다. 대개 국가 권력을 쥐고 9년 동안의 치적을 이룬다고 하여도, 9일 동안 산에 있는 즐거움과 바꿀 수는 없다. 하물며 고요하게 독서하고 한가하게 음송하여 깊은 이치를 천천히 찾아 나가고 깊은 맛을 상세히 맛봄으로써 책의 정수와 속뜻을 얻을 수 있는데다가, 높은 곳은 높이고 깊이 들어간 곳은 깊게 한 것을 보고 푸근히 감싸서 길러주어 태어나게 하고 펴나가게 하는 것을 살펴서 사람의 정신과 뜻에 보탬을 줌에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아!, 사람의 정신과 뜻에 보탬을 주는데다가, 책의 정수와 속뜻을 얻을 수 있다면, 산속의 즐거움이 어찌 아니 크겠는가? 그렇기에 인간세상의 부귀와 구차하게 비교하고 따질 것도 없다는 사실이 분명하다. 장차 돌아가려 하매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 시 한수를 지어 남긴다. " ( 「치악대승암시서」)

 

    과거시험에 합격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자신의 경륜을 펼쳐 백성들에게 이로움을 주고자 한다는 명분을 내세운다고 하더라도, 그것에 수반되는 여러 결과물은 세속적인 명예와 권력과 돈이다. 과거시험이란 장치는 결코 여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과거시험의 틀 안에 있던 안석경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물론 안석경대승암에서 머물며 책을 읽었던 그 해에 과거를 보았다. 청년시절 과거에 몰두했던 그의 세속적 욕망은, 대승암에서 머무를 때 미묘한 변화가 시작되었음을 간취할 수 있다. 이후 과거를 보았다는 기록은 보이질 않는다. 

 
  안석경은 권력과 이익에 대해 점차 초연해진다. 속세 사람들은 과거를 통해 한순간에 인생역전을 꿈꿨을 것이다. 과거를 통한 입신양명과 그 과정에서의 부귀영화는 너무도 달콤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그는 부귀를 위한 책읽기에서 책 속의 이치를 깨닫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었다. 그러한 책읽기라면 호랑이라도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 

 

 

철쭉꽃이 반겨주다

 

   치악산을 찾기 전에 대승암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봤다. 이것저것 뒤져서 찾은 것은 김시양(金時讓;1581∼1643)이 쓴 『자해필담(紫海筆談)』이다. “아버지를 따라 임진난을 피하여 치악산 대승암으로 갔다”는 구절이 유일하다. 이 기록은 그만큼 대승암이 있던 곳이 깊숙한 곳이라는 것을 방증해준다.
  부족한 자료 때문에 난감했지만 현장에서 부딪쳐보면 일이 해결되리라는 막연한 생각이 굳은 결심으로 바뀌면서 아침을 먹자마자 치악산으로 향했다. 달랑 안석경「유치악산대승암기」만 들고 무작정 나섰으니 용감하다고 할까?
  치악산을 다시 검색해 보았다. 치악산동악명산, 적악산으로 불렸었다. 그러다가 상원사꿩의 보은전설 연유하여 꿩치(雉)자를 써서 치악산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치악산은 1,000m 이상의 높은 봉우리들이 14㎞나 이어져 있어 산세가 웅장하며, 주요 봉우리는 주봉인 비로봉(1,288m), 남대봉(1,181m), 향로봉(1,043m) 등이라고 알려준다.

 

   " 마침내 떠났다. 걸어서 20리를 갔는데, 날이 이미 저물었다. 푸른 잔디와 흰 바위가 깔려 있고, 봄 물결이 사람에게 불어온다. 혼자 길을 가서 개울물을 따라가는데, 물가에는 철쭉꽃이 많이 피어 있다.  " (「유치악대승암기」)

 

  횡성읍을 지나 새말 쪽으로 향하면서 치악산을 보니 구름 밑으로 우뚝 솟은 산이 보인다. 묘한 설레임이 인다. 대학시절 미팅을 나갈 때의 심정이 이랬던 것 같다. 학곡리에 들어서자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은 온통 연두 빛이다. 잘 정돈된 가로수들은 구룡사입구 주차장까지 계속 이어진다. 안석경은 횡성에서 걸어서 구룡사를 찾았다. 그가 이곳을 찾은 시기는 음력으로 4월 달이었으니, 오늘 산행의 시기와 우연하게 일치한다.   
  구룡사 매표소통과하자마자 황장금표(黃腸禁標)를 확인했다. 예전에도 본 적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매표소에서 조금 떨어진 길 왼쪽에 있다.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어 황장금표에 대해 설명해준다. 
  황장금표는 황장목(黃腸木)의 보호를 위하여 일반인의 벌목을 금지하는 표시이다. 황장목은 나무의 안쪽색깔이 누렇고 몸이 단단한 질이 좋은 소나무를 말한다. 치악산은 황장목이 많을 뿐 아니라, 한강의 상류에 있어서 뗏목으로 서울까지 운반하기 쉬워서 전국의 황장목 가운데에도 이름난 곳의 하나였다고 한다. 


    두 개의 작은 바위가 다정하게 누워있는데, 위에 있는 바위에 한자로 새겨져 있다. 마침 지나가는 관리소 직원에게 황장금표가 하나 더 있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가르쳐달라고 하자 친절하게 알려준다. 주차장에서 내려가다가 마을로 들어가는 길을 따라 가면 표지판이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 찾아가니 도로가에 안내판과 함께 풀 속에 있다. 이 황장금표는 ‘금표’의 글귀 윗부분에 ‘외(外)’자가 있어서 ‘황장외금표’라고 한다. 황장외금표는 황장금표가 있는 지역을 알리기 위해 행인의 왕래가 많은 곳에 설치해서 출입을 못하도록 경고를 하는 표석이라고 한다.
  황장금표 때문일까 매표소 전부터 가지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거대한 소나무들이 범상치 않게 보인다. 모두 황장목의 후예들인 것이다. 매표소를 지나자마자 산책로 가운데에도 아름드리 황장목이 탐방객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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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장금표>                                                                                        <황장외금표>

 

 

물소리를 들으며 백련당에서 자다

 

    " 저녁에 구룡사로 들어갔다. 골짜기 입구의 큰 소나무가 길을 덮고 있다. 새들은 서로 노래 부르는데, 인적이 없어 고요하다. 물이 우는 소리가 또한 비장하여, 사람의 마음을 깨끗이 씻어 바꾸어준다. 이와 같이 하기를 7~8리 간 후, 천주봉 앞에 이르렀다. 보광루에 올라 백련당에서 잠을 잤다. 밤새 절구질하듯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었다. " (「유치악대승암기」)

 

  20130509_092612.jpg 황장금표를 지나자 바로 다리가 보인다. 다리 입구엔 용이 여의주를 물고 반긴다. 구룡사가 가까이 있음을 직감할 수 있다. 다리 중간엔 거북이도 있다. 안석경이 방문했을 때도 지금처럼 커다란 금강송이 울창하였던 것 같다. 평일날이어서 탐방객들을 쉽게 찾을 수 없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새로 만들어진 산책로가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니 계곡물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그런데 안석경에게 계곡물소리는 비장하게 들렸다. 왜 그랬을까? 자신의 계획과는 달리, 여러 차례의 과거시험에 낙방한 것 때문일까?
  일주문을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부도들이 서 있다. 이끼 낀 부도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음을 보여준다. 빼어난 조형미를 보여주진 못하지만 소박한 부도는 용맹정진하며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이들에게 바치는 소박한 헌사다. 잠시 그들을 추모하였다. 주변의 금강송들도 비스듬히 구부리고 인사를 하고 있다.

 

 


  저 멀리 구룡사가 보이는 지점에 커다란 바위가 있다. 처음에는 모르고 지나쳤다. 두 번째 찾았을 때 구룡사에서 문화해설을 담당하시는 분께서 바위에 ‘구룡동천(龜龍洞天)’이 새겨져 있다고 알려주신다. ‘동천’이란 경치가 빼어나 신선이 노닐 만큼 풍광이 좋은 곳을 말한다. 그만큼 구룡사 계곡의 경치가 뛰어난 곳임을 단적으로 말해주는 자료다. 
   구룡사신라 문무왕 8년(668년)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지금의 대웅전 터에는 용 아홉 마리가 살고 있는 큰 연못이 있었는데, 의상대사가 용을 쫓아내고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다고 한다. 아홉 마리의 용이 살았다고 해서 구룡사(九龍寺)라고 불렀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찰이 쇠퇴하자 '절 입구에 있는 거북바위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고, 바위를 부쉈더니 오히려 신도가 더 줄어들었다. 급기야 절이 문을 닫을 지경에 이르렀을 때 도승 한 분이 나타나 절의 운을 지켜주는 거북바위 혈맥을 다시 이으라고 해서, 절 이름에 아홉 '구(九)'자 대신 거북을 뜻하는 '구(龜)’자를 써서 구룡사(龜龍寺)로 바꾸었다고 한다. 원래 거북을 뜻할 때는 ‘귀’라고 읽어야 하는데, ‘구’라고 읽는 것은, 기존의 명칭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거북의 뜻을 담으려는 배려 때문인 것 같다.
    사천왕문을 통과해 가파른 계단으로 올라간다. 건물 아래를 통과한 후 돌아보니 보광루다. 안석경도 이곳을 통과했을 것이다. 보광루 마루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멍석이 깔려 있었다고 한다. 보광루에 오르니 맞은편 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안석경이 말한 천주봉이다. 요즘은 천지봉이라고 부르고 있다. 천지봉도 전설을 들려준다. 의상대사가 용들을 쫓아낸 뒤 연못을 메워 절을 지었을 때, 여덟 마리 용은 천지봉 쪽으로 도망쳤는데, 용이 도망을 친 앞산이 바로 천지봉이라고 한다. 천지봉에서 구룡사 방향으로 뻗어 내린 여덟 개의 크고 작은 골짜기가  그때 형성되었다고 한다.


  안석경은 지금은 사라진 백련당에서 하룻밤을 지내며 「백련당에서 자면서 취한(就閒)에게 보여주다」란 시를 읊는다.

 

 

하룻밤 자도 속세의 어수선함 멀게 하니
백련당 높은 누각 맑아서 삿된 기운 없네.
산초 등불 초롱초롱 밝게 비추는데
삽추술에 훈훈하여 반쯤 취해 기대고 있네
밤에 누워 물소리 황새소리 듣고
일어나 산색을 보니 아침구름 두르고 있네.
언제나 평상에 앉아 한가한 노인 이웃하여
천주봉 앞에서 옛 글 읽을 수 있을까?


一宿猶宜遠世紛。白蓮高閣?無?。
椒燈炯炯有餘照。朮酒溫溫倚半。
?聽水聲兼夜?。起看山色帶朝雲。
何時穿榻隣閒老。天柱峰前讀古文

 

 

   치악산과 관련된 유일한 시이다. 백련당에서 하룻밤을 보내는 안석경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몇 번의 실패를 경험한 그는 다시 과거시험 공부를 위해 산을 찾는다. 기대와 두려움이 교차했을 그는 아마도 밤늦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 같다. 술 한 잔에 불콰하여 바로 잠을 이룰 법도 하건만, 더욱 또렷이 들리는 계곡물소리와 새소리는 기약하기 힘든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이었을 것이다. 차라리 틀에 박힌 과거공부를 그만두고 자신이 좋아하는 시 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비로봉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후한 때 고사(高士)인  관영(管寧)을 생각한다. 그는 속세를 피하여 요동에 우거하였는데, 50여 년 동안 하나의 나무 평상에서 지냈으므로 무릎 닿은 부분이 깊숙이 파였다고 한다. 안석경은 관영처럼 살고 싶었을 것이다.
  구룡사와 관련된 기록 중에 「구룡사백련당기(龜龍寺白蓮堂記)」가 있다. 지금은 사라진 백련당을 위해 바친 글이다.

 

   " 치악의 여러 봉우리 중에 으뜸인 것은 비로봉(毘盧峯)이다. 비로봉의 북쪽으로 뻗은 것은 산등성이가 제법 길고 크다. 산등성이에 기대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첫 번째가 대승암(大乘庵)이고, 두 번째가 월봉암(月峰庵)이다. 모두 선승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세 번째는 구룡사(龜龍寺)다. 늘 스님 백여 명이 거주한다. 절은 모두 여섯 개의 건물이 있는데, 백련당(白蓮堂)이 제일 높고 깊으며 고요하다. 동쪽으로 천주봉(天柱峰)의 두 봉우리를 마주하고, 남쪽으로 비로봉을 바라보고 있다. 꽃과 대나무가 사방에 모여 있고 소나무와 젓나무는 푸르다. 늘 물은 흐르며 구슬피 울고, 겨울에 따뜻하며 여름엔 서늘하다. 참으로 살만한 곳이다. 
  가난한 선비가 책 읽을 곳이 없어 책상을 들고 산에 오르는 자가 많다. 대승암월봉암은 선승들이 모두 독서하는 사람을 기피하므로 갈 수 없다. 구룡사는 스님이 늘 선비에게 베풀어주는 사람을 정하기 때문에 독서하는 선비들이 많이 모인다. 나는 치악산의 봉우리가 높은 것과 계곡이 깊은 것을 사랑하여 백련당에서 책을 읽으려 한다. 이 때문에 자세하게 기록한다. " ( 「구룡사백련당기」)

 

  지금은 이름조차 사라진 백련당. 백련당은 그 당시 가난한 과거준비생들에게 공부할 장소를 제공해주었다. 안석경도 그 틈에 끼어 책을 읽었으니, 요즘으로 말한다면 고시원 역할도 담당한 셈이다. 이른바 출세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과, 출세를 거부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사람들의 기묘한 동거 장소이기도 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할 것인가는 개인의 취향이겠으나, 상대의 의견을 인정해주던 구룡사의 넉넉함을 보여준다. 이 기문치악산 북쪽 자락에 대승암 뿐만 아니라 월봉도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러나 월봉암에 대한 기록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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