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악산 대승암을 찾아서 - 2

2015. 7. 28. 15:43여행 이야기

 

 

 

 

 

      

치악산 대승암을 찾아서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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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악산 대승암을 찾아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으며 대승암으로 향하다

 

   " 이튿날 용담을 보았다. 바위 벼랑이 입을 벌리고 있는데 푸른 물이 넓고 깊다. 스님 한분과 대승암에 올랐다. 가는 길에 호랑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그 소리가 맑고 커서 온 산이 진동하였다. 가다가 약초를 캐고 꽃을 땄다."  (「유치악대승암기」)

 

  구룡사에서 하룻밤을 보낸 안석경은 대승암으로 향한다. 구룡사에서 출발하자마자 커다란 못과 폭포가 기다린다. 구룡소와 구룡폭포다. 구룡소도 전설을 말해준다. 의상대사가 절을 창건할 때 아홉 마리 용 중 여덟 마리는 도망가고, 나머지 한 마리가 미처 도망치지 못하고 숨어든 곳이 바로 구룡사 앞 계곡에 있는 구룡소라 한다. 그 용은 이곳에 살다가 나중에 승천했다고 한다. 승천했다고 하니 안심이 된다. 언제부터인가 소설이든 전설이든, TV속 드라마든 비극적인 결말은 가슴이 아프다. 비록 완성도 측면에서 부족하더라도 해피엔딩이 좋다. 나이가 들어가는 징조인가?


  안석경구룡소를 지나서 대승암으로 향한다. 문제는 이제부터다. 대승암의 위치에 관련된 자료를 찾다가 구룡사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으신 분이 구룡사의 문화를 해설하시는 목익상 선생님소개시켜주신다. 통화를 하니 대성암에 대해서 잘 모르겠지만, 유산기에 묘사된 것을 보니 도실암 쪽에서 바라본 것 같다고 하신다.

  첫 번째 치악산을 찾았을 때는 무작정 도실암으로 가다보면 해결책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과감히 산행을 시작했던 것이다. 치악산약초원이 있던 곳은 산수유나무가 꽃을 노랗게 피우고 있었다. 그 사이로 걷다가 마을 주민을 만났다. 아주머니 두 분이었는데, 대승암의 위치를 물어보니 ‘대성절터 곳이 있다고 알려주신다. 마을 어느 분이 치성을 드려서 아들을 얻고, 아들의 이름을 대성이라고 지었다는 말과 함께. 


  오래전에 폐쇄되어 길은 토끼길이다. 보이는가 싶더니 이내 울창한 숲 속으로 사라지곤 한다. 자연적으로 쓰러진 나무들과 넝쿨들, 그리고 수북한 낙엽은 원시림의 모습이다. 아주머니께서 도실암재 근처 헬기장에서 바라보면 건너편으로 움푹 패인 곳이 보이고, 그곳을 찾아가면 된다고 했지만, 헬기장은 보이질 않고 나의 발길은 계속 산 정상으로 향했다. 길을 잃은 것이다. 산을 넘고 계곡을 건너면서 절터 찾기를 단념하고 안석경이 올랐던 치악산 정상으로 향했다. 


  계곡을 따라 무작정 올라가다보니 쥐넘이고개부근이다. 북서쪽으로 연이은 삼봉투구봉의 암벽을 보고, 절터가 그 밑 어느 곳일 거라고 추측하면서 비로봉으로 향했다. 비로봉에 오르니 돌탑이 반긴다. 남쪽의 남대봉부터 동북쪽의 천지매화산이 아스라이 펼쳐져 있다. 한참을 넋 놓고 있다가 사다리병창 코스로 내려갔다. 등산할 때 힘을 너무 쏟아서인지 계속 이어진 계단이 야속하기만 하다. 겨우 세렴폭포에 이르러 폭포의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첫번째 산행은 이렇게 해서 비로봉을 등반하고 사다리병창과 세렴폭포를 확인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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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병창>                                                                                    <세렴폭포>


     낙심하여 주차장 옆 부흥상회에 들려서 주인아저씨께 절터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저씨께선 절터에 대해서 알고 계셨다. 그런데 그곳은 오늘 내가 갔던 곳이 아니라 사다리병창 계곡 가야한다는 것이다! 날은 저물고 다리에 힘이 풀려서 도저히 다시 갈 수는 없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20130515_150558.jpg일주일 뒤 다시 찾았다. 아저씨를 찾아 자세하게 물어보니, 주변에 계시던 분께서 더 상세하게 알려주신다. 지도를 펼치니 위치를 가리켜주는데, 선녀탕 옆에 있는 계곡으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민들은 이 계곡을 은선암 계곡이라 불렀다. 수량이 제법 많은 계곡은 도처에 자그마한 폭포를 품고 있다. 모두 세어 보니 다섯 개다. 2~4미터 정도이지만 다양한 폭포를 구경하다보니 어느새 발길은 깊은 곳까지 이르렀다. 나중에 물어보니 맨 위에 있는 폭포를 주민들은 ‘은선폭포’ 부른다고 한다. 은선폭포에서 왼쪽 산등성이를

                      <은선폭포>

따라 계속 오르다 보니 경사가 졌지만 평평한 곳이 펼쳐진다. 몇 군데엔 석축이 물이 나오는 곳도 있다. 이곳이 절터라 생각하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확인을 하였다. 안석경의 글에 묘사한 곳 같기도 했다.    


   하산하여 부흥상회에 들르니 아저씨는 출타 중이시다. 아주머니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니 마을 분을 소개시켜주신다. 그 분이라면 사진을 보고 그곳이 절터인지를 알 수 있다고 하신다. 밭에서 일하고 계시는 아저씨를 만나 사진을 보여주며 답사한 곳에 대해 이야기 하니 고개를 갸웃거리신다. 폭포에서 한참 올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사진 속의 석축은 화전민들의 집터인 것 같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하신다. 두 번의 산행으로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하진 않았지만, 너무 실망스러웠다. 이틀 후 현장 답사를 함께 하기로 약속하고 쓸쓸히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현달하지 못한 선비를 가볍게 보지 말라

 

   " 암자에 이르니, 목조건물 몇 칸인데 배꽃은 흐드러지게 피고 우물물이 맑고 투명하다. 스님 몇 분이 세상 일에 초탈한 듯 하안거에 들어 있다. 나도 끼어 악기(樂記)를 펼쳐 놓고,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 머리를 빗고 몸을 씻고 책을 읽었다. " (「유치악대승암기」)

 

  석가탄신일날 다시 치악산을 찾았다. 쌍다리 민박집으로 찾아가니 엊그저께 만났던 아저씨가 산행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신다. 아저씨의 이름은 전순봉씨이다. 다리가 조금 불편하시다면서도 앞장을 서신다. 도실암 길로 접어들었다. 처음 산행할 때의 길로 가는가 싶더니 이내 다른 길로 가신다. 그러자 귀신같이 아주머니가 가르쳐주던 헬기장이 바로 나타난다. 헬기장 바로 위는 도실암재다. 고개를 내려가니 엊그제 왔던 계곡이다. 계곡을 건너 화전민집터를 지나자마자 동쪽 산등성이를 넘었다. 여기서부터 산을 하나 더 넘었으나 절터는 보이지 않는다. 아저씨는 15년 전에 왔던 길이라 찾기가 어렵다면서 계속 앞으로 나가신다. 정상을 향해 한참 올라갔는데도 보이질 않는다. 머리를 갸웃거리시더니, 다시 능선을 따라 계속 올라갔다. 한참을 가다가 사다리병창 쪽으로 조금 내려가니 평평한 땅이 저 아래로 보인다. 가까이 가 보니 우엉과 여러 풀들이 무성하다. 바로 이곳이 절터라고 하신다. 아! 드디어 절터를 찾은 것이다. 주변은 아늑하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려쬔다. 왼쪽의 바위에는 언제 쌓았는지 돌탑이 두 개 보인다. 스님들이 기원이 서려있는 곳일까? 아니면 이곳을 찾은 신도들의 염원이 서려있는 것일까? 오른쪽에는 물이 흐르고 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주변을 답사했다. 그러나 암자 앞에 있다던 거북바위보이질 않는다. 왼쪽에 있는 돌탑의 바위가 거북바위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왼쪽으로 치우쳐있다. 주변을 다시 한 번 돌아보니 울창한 나무들뿐이다. 안석경 대승암에 있었을 때도 울창한 숲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나무를 모티브 삼아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산중잡설(山中雜說)」이란 이야기다.

 

   " 나무 중에 마룻대와 처마에 쓸 만한 것이 있고, 배와 돛대에 쓸 만한 것이 있다. 깊은 산과 골짜기에 모여 떼지어 있으면서 구름 사이에서  무성하게 늙어가다가 바람에 넘어지고 물에 엎어지며 불에 상처를 입어 끝내 목수에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 많다. 하늘로 오를듯한 집과 바다를 달리는 배는 재목을 구하는데 급하여 늘 쓸 만한 것이 없음을 걱정하니 왜일까? 집에서 정신과 사람을 보호하여 편안하게 할 방법이 없고, 배에선 백성과 만물을 온전하게 건너게 할 방법이 없다. 크고 바르며 집에 마땅하고 배에 적절한 나무가 단지 산과 계곡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니 애석하도다.
  아! 나무는 스스로 드러낼 수 없는데, 나무를 구하는 자는 일찍이 오지 않았다. 선비는 스스로 말할 수 없는데, 선비를 구하는 자는 능히 알지 못한다. 그러하니 산의 나무와 세상의 선비가 나가서 당대의 쓰임이 되어 재주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천만 중에 겨우 한 둘일 뿐이다. 아! 삼가 말라 떨어지는 나무와 현달하지 못한 선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  ( 「산중잡설」)

 

   마치 한유「잡설」을 보는 듯하다. 작품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세상에 백락(伯樂)이 있은 뒤라야 천리마가 있는 법이니, 천리마는 언제나 존재하지만, 백락은 늘 있는 것이 아니다.” 백락은 천리마의 감정에 조예가 깊었던 전설상의 인물이다. 지나가다가 돌아서서 잠깐 눈길만 주어도 말 값이 순식간에 몇 배로 뛰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였다. 한유는 그런 백락 같은 이를 만나지 못한다면 아무리 천리마라도 그저 평범하게 부려지다가 죽어갈 뿐이라고 탄식하면서 말미에 반문했다. “정말 천리마가 없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 천리마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인가.”
  여기서 안석경은 깊은 산 속에서 쓰러져가는 나무를 보며 자신을 오버랩한다. 나무가 목수를 만났으면 훌륭한 재목이 되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비바람 속에서 사라져 간다. 동병상련인가. 재주를 갖고 있으나 발휘할 수 없는 당대의 구조적인 모순은 그를 절망케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속에서도 기개 있는 선비의 모습을 유지한다. ‘현달하지 못한 선비를 가볍게 여기지 말라’ 이 말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어떤 것에도 굴하지 말라고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으로도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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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자터>

 

대성암터를 만나다
         
  " 암자 뒤에는 바위 봉우리가 우뚝 솟았는데 구름 덮인 나무가 어두침침하고 가물가물하다. 암자 앞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우뚝하게 절벽에 임해 있다. 소나무와 젓나무가 빽빽하게 서 있고 진달래가 빙 둘러 피어 사람을 환하게 비춘다. 암자를 대하고 있는 여러 봉우리들은 어느 하나도 나무들이 울창하지 않은 곳이 없는데, 아래쪽은 이미 짙푸른 초록빛을 띠었지만 위쪽은 아직 연한 푸른빛이다. 아침에 남기가 끼고 저녁에 부슬비가 내릴 때마다 어릿어릿하게 비치니 사랑스러워 조금도 흠 잡을 바가 없다. 동북쪽은 멀리 서너 고을의 산들이 흰 구름 속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가까이 있는 벼랑에는 사슴이 있어 때때로 멈추어 서서는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울음소리는 어리숙하고 그 뿔은 높다. 새 울음소리도 여러 종류인데 제각기 특이하다. 이곳이 으쓱하고 깊은 곳임을 알 수 있다. " (「유치악대승암기」)

 

   절터 오른쪽은 너덜지대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바위를 건너고 뛰어넘었다. 갑자기 앞에 커다란 암벽이 나타난다. 그 위를 보니 평평한 공터가 있는 듯하다. 올라가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소리를 지를 뻔 했다. 그토록 찾던 ‘대성절터’, 아니 ‘대승암터’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절터엔 주춧돌로 추정되는 돌들이 여기저기 보인다. 더군다나 암자 앞에 거북이처럼 바위가 엎드려 있다! 바위를 확인하러 가니 거북바위에도 돌탑이 쌓여있다.
  옆 절터로 가서 아저씨에게 알리니 놀라시는 표정이다. 절터를 찬찬히 살펴보니 깨진 그릇조각들이 여기저기에 보인다. 옆엔 우물터 추정되는 곳도 있다. 숲이 울창하여 자세히 보이진 않으나 거북바위 앞은 벼랑이고, 주변의 산들이 좌우로 둘러싸고 있으며 동북쪽으로 천지봉이 보인다. 바로 안석경 묘사한 대승암인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에 답사를 와서일까?  그토록 찾던 대승암터를 찾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승암터에서 조금 떨어진 곳의 절터는 어떻게 설명해야하는가? 우엉이 아직도 무성한 것으로 보아 절에 딸린 채마밭이었을까? 아니면 요사채가 있던 자리였을까?


  안석경은 이곳에서 10일을 머무르며 「악기(樂記)」를 읽었다. 물론 다른 책도 읽었겠지만, 「악기」만을 특별히 언급한 것은 이유가 있을 것 같다.  『예기(禮記)』 중의 한 편인 「악기」는 시와 노래와 춤에 대한 책이다. 때문에 이것을 읽지 않고는 시가무(詩歌舞)를 논할 수 없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책장에서  『예기』 꺼내 읽었다. 음악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물론 이것을 시에 대입하여 읽을 수도 있다. 과거공부를 위해 산에 들어와 독서를 하는 그의 시선은 주로 시를 어떻게 지을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마음 수양과 관련된 글들이 또렷하게 보인다.

 

·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마음 속에서 절제됨이 없고 지각이 외물(外物)에 끌려 자신으로 돌아가지 못하면 천리(天理)가 없어진다. 대체로 물(物)이 사람을 감응시키는 것이 끝이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절제가 없으면, 이는 물(物)이 이름에 사람이 물에 동화되는 것이다. 사람이 물에 동화된다는 것은 천리를 없애고 욕심을 할대로 다 하는 것이다.

· 도(道)로써 욕망을 제어하면 즐거워해도 혼란하지 않고, 욕망으로써 도를 잊으면 미혹되어서 즐겁지 않다.

· 예악(禮樂)은 잠시도 몸에서 떼면 안 된다. (중략) 예(禮)를 지극하게 하여 몸을 다스리면 가지런하고 공경하게 되고, 가지런하고 공경하면 엄숙하고 위엄있게 된다. 마음 속이 잠시라도 화락하지 않으면 비루하고 속이는 마음이 들어가고 외모가 잠시라도 가지런하고 공경하지 않으면 경솔하고 거만한 마음이 들어간다."

 

  나는 안석경도 이 문장에 주목하였을 것 같다는 생각이 진하게 든다. 외물(外物)에 제어당하지 않기. 욕망을 제어하기. 우리는, 아니 나는 얼마나 많은 외물에 의해 좌지우지되어 살아오고 있는가? 부와 명예로 대표되는 무수한 바깥 사물에 의해 나를 잊고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줄 알지 못하고 있다. 적어도 나는 그러한 것 같다. 가끔은 아주 가끔은 이러한 나를 질책하곤 하지만, 곧바로 잊고서 바깥으로 내달린다. 결국은 욕망의 조종에 휘둘리는 것이다. 모든 욕망이 다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를 좋은 쪽으로 인도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반대쪽으로 끌고 가곤 한다. 안석경도 공부하다가 가끔 이러한 생각에 잠겼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다음의 글이 나왔을 것이다.
 
 ***** 원문 사진누락 2매
<절터>                               <절터에서 찾아낸 그릇 파편>

 

보면 볼수록 시간이 부족하구나

 

   " 불당의 등이 밤새도록 켜 있고 향 연기가 방에 가득하다. 밤새 천둥이 크게 치다가 새벽녘이 되어서야 비로소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빗속의 풍경이 흐릿하여 읊조릴 만하다. 비가 그치자 사방의 모습이 선명하다. 높고 낮고 멀고 가까운 곳이 모습은 다르지만 사람을 즐겁게 하기는 마찬가지다. 아침과 저녁, 비가오거나 개거나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람의 마음과 맞는 것은 마찬가지다. 나무와 돌과 새와 짐승들이 모습은 저마다 다르지만 사람에게 가까이 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움직이거나 가만히 있거나 말을 하거나 입을 다물거나 흥취는 저마다 다르지만 뜻에 맞는 것은 마찬가지다. 대개 오래 있을수록 더욱 기쁘고, 보면 볼수록 시간이 부족하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것과 바꿀 것이 있겠는가? 이 산이 이미 깊고 험한데 이 암자는 높고 또 고요하여 옛 책을 읽기에 적당하다. 내가 만약 항상 거처할 곳을 얻는다면 10년이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지만, 장차 열흘이 차지 않았어도 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산을 올려다보고 골짜기를 내려다보니, 화창한 봄날의 사물들이 모두 유유자득(悠悠自得)하다. 내 어찌 깊이 사랑하여 돌아보며 서글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임신년(1752) 4월 4일 대승암에서 쓰다. " (「유치악대승암기」)
 
  10일 동안의 책읽기는 끝났다. 이제는 산을 내려가야만 한다. 천둥소리가 아니었더라도 밤새도록 잠을 청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밤을 이루지 못하자 이 글을 지었을까? 「대승암을 떠나기에 임하여 지은 시의 서문(臨去大乘庵詩序)」은 그래서 더욱 마음에 와 닿는다. 안석경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기 때문에 길지만 인용한다.

 

   " 산은 높고 계곡은 깊으며, 꽃과 나무가 눈에 가득하여 그 의취(意趣)가 날로 더하다. 오늘 장차 떠나려 하니 밤새도록 말똥말똥해서 잠을 잘 수 없다. 솔바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 바라보니, 바람 부는 새벽에 잔월이 걸려 있고 바위 골짜기는 애처로워서 또한 사람을 서글프게 하여 견딜 수가 없다. 읊조리며 방황한지 오래되어 마침 시 한편을 완성하였으니, 떠나지 않을 수 없지만 실로 차마 떠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아! 이 산은 높고 두터우며 푸르고 무성한 것이 있다. 그러나 따로 수석(水石)이 뛰어나고 매우 기이한 볼거리는 없다. 이 암자는 맑고 그윽하며 높고도 먼 것이 있다. 그러나 강과 바다의 아득하게 이어지는 정취를 더할 수 없으니 한 번 보고 떠나는 것은 괜찮다. 그런데 10일의 낮과 9일의 밤을 돌아보건데, 더욱 즐겼으면서도 더욱 만족을 모르는 것은 왜일까? 아마도 욕심이 움직이고 감정이 격해지면 바름을 얻지 못하는 것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일찍이 성인의 욕망을 막는 가르침을 애쓰며 힘을 다해가며 좇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매번 잡서(雜書)를 좋아했으니, 넓은 것은 더욱 넓게 해 주어야 이를 꺾을 수 있고, 강한 것은 더욱 강하게 해 주어야 이를 꺾을 수 있다는 것은 사람이 욕심을 없애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지금 산수(山水)에 대한 욕심으로 말한다면, 9일 동안 머물렀으나 오히려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예전에 하루 묵었는데도 만족한 것을 보건데 과연 어떠한가? 대개 감정이 다하기를 기다려 스스로 없어지려고 하는 것은 이치가 아니다. 반드시 처음 싹틀 때 꺾어야하고, 처음 열릴 때 막아야만 한다. 그러한 후에 도끼를 사용하는 수고로움과 뚝으로 막는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에 부귀와 사치, 화려함을 탐하는 자는 오랠수록 펼치지 못하고, 여색을 좋아하여  방탕함을 좋아하는 자는 깊을수록 만족하지 못한 한이 있다. 대개 일찍이 이것을 보고 탄식하며 괴이하게 여겼다.
  지금 대승암의 일로써 보니 사람의 뜻과 같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아! 사람의 감정과 욕심은 끝이 없고, 천하의 물건은 무한하다. 무한한 것으로 끝없는 것을 만족시키려한다면 어찌 만족을 싫어할 때가 있겠는가? 스스로 부족한 것을 근심하여 편안함을 망치니 슬프지 않은가? 나는 대승암에서 욕심을 막는 방법을 깨달았다. " ( 「대승암을 떠나기에 임하여 지은 시의 서문(臨去大乘庵詩序)」 
 
  치악산에 대한 안석경의 평가를 먼저 살펴본다. 그는 치악산을 ‘높고 두터우며 푸르고 무성한 것이 있으나, 따로 수석(水石)이 뛰어나고 매우 기이한 볼거리는 없다.’고 묘사하고 있다. 결국 그는 높고 두터우며 푸르고 무성하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등산객들이 동의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웅장하다는 평을 추가하고 싶다. 남북으로 길게 형성된 치악산은 단단한 뿌리를 박고 넓고 크게 서 있다. 비록 기기묘묘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현혹시키진 않지만, 무뚝뚝한 남성과 같은 체취를 갖고 있는 것이 치악산이라 본다. 이러한 미를 갖고 있기에 공부하는 학인(學人)들에게 적당한 장소일 수도 있고, 안석경도 찾아왔을 것이다.   
  단조로운 것 같으면서도 웅장한 산 속에서 그는 책읽기를 끝내고 하산하려고 한다. 떠나기 전에 자신의 마음을 깊은 밤에 적어냈다. 입산 전의 마음과 지금의 변화된 마음을 담담히 펼쳐 보인다. 처음엔  ‘넓은 것은 더욱 넓게 해 주어야 이를 꺾을 수 있고, 강한 것은 더욱 강하게 해 주어야 이를 꺾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사람의 욕심도 이렇게 해야만 없앨 수 있다고 여겼다. 욕망을 누르지 않고 마음껏 발산해야만 미련이 없어서 결국은 없앨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그러나 그는 치악산에 있는 동안 자신의 시각을 교정하게 된다. ‘처음 싹틀 때 꺾어야하고, 처음 열릴 때 막아야만 한다.고 깨달은 것이다. 성인들의 가르침보다는, 제자백가의 자유분방함을 쫓던 그는, 그간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시인한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을 현혹시켜왔던 부귀와 명예, 여색은 추구할수록 갈증과 허기를 느끼게 하는  외물(外物)임을 깨달은 것이다. 앞으로 그가 이렇게 살아갔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 한 번의 과거 응시 후 과거공부를 포기한 것으로 보아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귀로

 

   대승암터를 출발했다. 왔던 길을 버리고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 계속되는 너덜지역을 따라 물이 흐른다. 울창한 숲답게 다래 넝쿨이 여기저기 길게 드리워져 있다. 한참을 내려오니 등산객들의 소리가 계곡을 타고 올라온다. 사다리병창 계곡 길로 산행을 하는 사람들이다. 안석경이 어느 곳으로 대승암에 왔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개의 길 중 하나일 것이다. 절터를 찾을 때 길을 잃기는 했지만, 화전민터에서 조금 더 계곡을 따라 올라오다가 산능선을 넘으면 쉽게 도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는 길에 약초를 캐고 꽃을 땄다면 도실암 코스나 은선계곡 코스일 가능성이 높다.
  산행기를 찾다가 안석경을 만났다. 몇년 전에  「청평산기를 통해 일면식이 있었고, 치악산을 통해 다시 만나게 되었다. 두 번째 만남에서 그의 고뇌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었고, 그를 통해 나의 고뇌도 조금은 치유된 듯하다. 그리고 생각지도 않았던 욕망을 없애는 비결을 전수받았다. 앞으로의 실천만 남아있다.
  인연은 이렇게 이어지는가? 그는 설악산을 다녀온 후 「설악기」를 남겼고, 요즘 그의 발자취를 따르는 재미에 빠져 있다. 조금 더 그를 알고 싶다.   

 

《참고문헌》


『삽교집』
『삽교만록』
심경호, 『산문기행』, 이가서, 2007.
이종묵, 『조선의 문화공간』, 휴머니스트, 2006.
조남권, 김종수 공역, 『동양의 음악사상 악기』, 민속원, 2001.

 

 

글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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