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기산을 오르다 ①

2015. 7. 28. 17:55여행 이야기

 

 

 

 

 

      

태기산을 오르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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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으로 달리다

   내일부터 긴 장마가 시작된다고 흘러나온다. 잠깐 고민하다가 차를 횡성으로 돌렸다. 톨게이트를 지나면서 산을 보니 검은 구름이 나지막하게 걸려있다. 은근히 걱정이 앞선다. 혹시 도중에 비를 만나 답사를 그르치는 것은 아닐까? 걱정도 잠시 고속도로를 달리자 주변의 신록은 도시의 답답함을 씻어준다.
   횡성톨게이트를 빠져나와 국도를 달리기 시작하니 주변의 풍경들이 자세히 들어온다. 옥수수의 수염은 제법 갈색을 띤다. 조금 있으면 달콤한 맛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엊그제 모내기 한 것 같은데 무릎까지 자란 벼들이 계속 이어진다. 한우의 고장임을 알리듯 여기저기에 횡성 한우를 파는 식당들이 길가에 즐비하다. 한우 모형물은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제일이라고 손짓한다. 이쪽 길은 처음이다. 초등학교 때 소풍가는 기분이다. 새로운 경치를 흘낏흘낏 보며 계속 달리니 멀리 보이던 산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선다. 길은 고개 길로 이어지면서 둔내로 향하는 중이다. 횡성에는 높은 산이 없는 줄 알았다. 이러한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가며 바로 깊숙한 산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둔내를 통과한 후 마암리에서 청일면으로 향하다 오른쪽을 보니 멀리 태기산이 보인다. 완만하게 솟아오른 산은 구름을 바로 머리에 이고 있다. 내가 갈 곳은 태기산 자락에 있는 봉복사이다. 사실 최근까지 봉복사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다. 안석경『삽교집』을 읽다가 「덕고산천진사구유기(德高山天眞寺舊遊記)」를 접하면서 봉복사를 알게 되었다.     

 
   안석경(安錫儆)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1718(숙종 44)에 태어나 1774(영조 50)에 세상을 등졌다. 그는 아버지 안중관의 근무처를 따라 홍천·제천·원주 등지에서 청년기를 보낸다. 당시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과거에 3차례 낙방한 뒤, 1765년 횡성 삽교에서 은거생활을 시작한다. 「덕고산천진사구유기」는 그가 1748년 봉복사에 들렀다가 남긴 글이다.

 

 

 

신대리 3층석탑과 개망초

 

태기산.jpg    고개를 넘어 길을 따라가다 보니 봉덕보건진료소가 나오고, 바로 지나자마자 사거리가 나온다. 우회전하여 계속 가니 신대리가 나온다. 신대리 버스 종점에 도착하면 길이 두 갈래로 나뉘는데 왼쪽 길로 들어서면 신대교가 나온다. 다리를 건너면 왼쪽에 우리마을 쉼터 보인다. 여기서 건물 뒤쪽으로 가면 밭 가운데에 석탑이 자리 잡고 있다. 탑의 공식 명칭은 ‘신대리 3층 석탑’이다. 이 탑은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0호로, 1984년에 복원하였다. 횡성문화원의 소개에 의하면 이 탑은 자장율사(慈藏律師)봉복사창건하면서 선덕여왕 16년에 건립하였다고 한다. 봉복사의 원래 위치는 이곳이었으며, 이 일대가 절터로 추정되고 있다. 인근에는 기와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석탑 남쪽에는 높이 3m의 언덕이 약 400m의 길이로 되어 있어 과거의 석축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처음에는 이정표가 없어서 그냥 지나쳤다. 주의를 기울였으나 찾을 수 없었다. 쉼터 뒤로 가니 개가 먼저 반긴다. 아니 경계의 목소리다. 비닐하우스를 지나자마자 아래로 밭이 펼쳐져있고, 그 가운데에 석탑이 우뚝 서있다. 힘차게 서있는 탑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주변의 황량한 밭이다. 이미 곡식을 수확한 뒤 제초제를 뿌렸는지 말라 비틀어진 풀들이 앙상하다. 한여름 속의 늦가을 풍경이다. 진입로가 달리 없어 염치불구하고 밭으로 들어가자 탑 주변이 보이기 시작한다. 누렇게 마른 밭의 풀과는 달리 검은색 철제 격자틀 안은 한여름이다. 개망초와 쑥이 무성하다.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생각보다 탑이 주변의 풀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으로 보이는 까닭은 제초제로 누렇게 부황이 들린 풀들 때문일까? 탑 주변에 풀마저 없다면 탑은 허허로운 밭 가운데서 지루한 시간을 보내야할 것이다.


   더 가까이 다가서니 탑의 규모가 점점 커진다. 5m 높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5층탑이었다고 하나 현재는 3층 남아 있다고 하니, 본래의 모습은 더 장대하였을 것이다. 불국사에 있는 석가탑의 높이가 8.2m이니까, 5층탑이었으면 석가탑 정도의 크기였을 것 같다. 탑신을 자세히 보니 두 곳이 움푹 파여 있다. 아마도 전쟁의 상흔일 것이다. 탑 앞에 있는 알림판은 전문적인 용어로 석탑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탑을 보는 전문적인 눈을 갖고 있지 못한 나로서는 신대리 3층석탑을 미학적인 시각으로 평할 수 없다. 다만 화려하지 않으나 남성적인 힘을 느낄 수 있다. 주위에 있는 봉복산과 덕고산, 그리고 태기산을 배경으로 하여 석탑은 개망초와 쑥 속에서 우뚝 솟아있다.

 

 

 

소나무 숲 속의 부도

 

태기산2.jpg    석탑을 뒤로 하고 봉복사로 향한다. 그리 넓지 않은 길은 주위의 나무 때문에 한여름에도 그늘을 드리워 시원하다. 봉복사 입구임을 알려주는 돌표지석을 지나니 수령이 오래된 소나무들이 즐비하다. 그 사이에 부도들이 나란히 일렬 횡대로 서있다. 최근에 세운 부도를 포함해서 모두 7개 비석 하나이다. 무성한 풀숲에 오랜 세월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듯 검은 회색을 띠고 있다. 부도들이 처음부터 이곳에 있지는 않았다고 한다. 3층석탑에서 봉복사 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3기 있었고, 봉복사에서 덕고산 쪽으로 한참 들어간 곳에 3기 있었다고 한다. 두 곳에 있던 부도들을 이전한 곳이 지금 이 자리이다.
   부도는 두 가지 형태이다. 간략한 원당형 부도3기이고, 석종형 부도5기이다. 부도들은 3층석탑처럼 화려한 기교를 보여주진 않는다. 강원도 사람처럼 투박하면서도 진솔함을 보여주는 부도는 그래서 더 정겹다. 석종형부도도 조금씩 모양을 달리하지만 유별나게 치장하지 않았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위압감을 주지 않을 정도로 아담하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주변의 소나무들은 더 커 보인다.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주변을 더 돋보이게 하는 겸양의 미덕을 부도들은 지니고 있다.     


    각각의 부도들은 누구를 기리기 위한 것인지 밝혀진 것도 있고, 알려지지 않은 것도 있다. 그러나 나에겐 중요하지 않다. 똑같이 도를 얻기 위해 치열하게 살다간 선인으로 보일 뿐이다. 비록 부도에 자신의 사리를 안치한 스님도 있겠지만 본인들은 원치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명예를 추구하였더라면 속세에서 부귀영화를 위해 자신의 삶을 허비했을 것이다. 아마도 이 가운데 정륜(晶倫) 스님 부도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안석경의 글 중 일부분은 이러하다.

 

   " 임신년(壬申年;1751)에 혼자 덕고산에 놀러가서 백화당(白華堂)에서 잤다. 정륜(晶倫) 스님 계시냐고 물었다. 대답하길 돌아가셨다고 한다. 화장하여 사리 몇 알을 얻었기 때문에 부도를 세우고 불조(佛祖)로 섬긴다고 한다."  (「덕고산천진사구유기」 중)

 

   안석경의 글을 보면 정륜 스님 평소에도 부처가 되기를 원하지 않았던 스님이었다. 그래서 주변의 스님들은 그를 평범한 스님으로 생각했을 뿐이다. 그런데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오지 않는가! 그래서 부랴부랴 부도를 세웠다고 한다. 정륜 스님이야말로 우리들이 욕망하는 모든 것에서 벗어난 스님이었던 것 같다. 그러하니 남이 봐도 모를 정도의 조그마하고 투박한 부도가 제격일 것 같다. 부도 중에 제일 조그맣고 투박한 부도 앞에서 정륜 스님을 기렸다.    


 

천년 고찰 봉복사

태기산3.jpg   부도에서 조금 올라가니 덕고이 멀리 보이기 시작한다. 아침에 회색빛을 띠며 나지막하게 내려앉았던 구름은 흰색으로 변하여 둥실 떠 있다. 녹음으로 짙은 덕고산과 그 위의 하얀 구름은 이곳이 한여름의 깊은 계곡임을 보여준다. 이 계곡 끝자락에 봉복사가 편안하게 자리하고 있다. 봉복산태기산은 야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다.

   안석경봉복사에 두 번 들렸다.  

 

  " ·무진년(戊辰年:1748) 가을에 나는 권실보(權實甫)와 덕고산(德高山) 봉복사(鳳腹寺)에 놀러갔다. 그러나 비가 내려 올라가 바라볼 수 없었다.

·임신년(壬申年;1751)에 혼자 덕고산에 놀러가서 백화당(白華堂)에서 잤다. "  (「덕고산천진사구유기」 중)

 

   봉복사횡성군에 있는 현존 사찰 중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사찰이다. 입구에 있는 안내판에 절의 역사가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절은 647년(신라 선덕여왕 16년)자장율사가 창건하고, 화재로 소실된 것을 671년(문무왕 11년)원효대사가 중건하고, 이후 1747년(조선영조 23년)서곡선사(瑞谷禪師)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한때 승려가 100명을 넘었으며 낙수대ㆍ천진암ㆍ반야암ㆍ해운암 등 암자만 9개나 될 정도로 큰 절이었다. 


   그러나 현재 봉복사는 전통 깊은 역사와 큰 규모였던 것과는 달리 고즈넉하다. 대웅전 앞에 새로 세워진 탑과 석등은 절 뒷산에 떠 있는 구름보다 하얀 대리석이다. 신대리 3층 석탑이 온갖 풍상을 이겨낸 후 얻은 고색창연함과 대비된다. 대웅전에 들려 예불을 하고 주변을 둘러봤으나 인기척이 없다. 요사채로 가니 공양을 준비하시는 보살님이 반기신다. 사찰에 대해 이것저것 물으니 먼저 점심공양이나 하고 물어 보라고 하신다. 이른 점심이지만 산채 반찬으로 한 그릇 뚝딱 먹고 냉수를 들이키니 바깥의 무더위도 어느덧 사라진다. 마침 주지 스님도 들어오셔서 공양을 하시길래 차를 마시면서 봉복사에 대해 물으니 이것저것 말씀해주신다. 일제 강점기 때 봉복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자세히 알려주신다. 

 


   일제 강점기 당시 봉복사는 횡성지역 의병부대의 주둔지 역할을 수행했다고 한다. 밖에서 봤을 때 골짜기가 많아 찾기 힘들었고, 골짜기가 깊어 숨기도 용이했을 거라고 한다. 당시 민긍호의병부대가 근거지로 삼았으며, 이를 토대로 주요 의병장들이 연합하여 제천, 충주 등지로 활동이 확산되는 계기가 되는 등 국내 의병운동이 의병전쟁으로 발전하는 발판을 마련한 중요한 곳임을 힘주어 말한다.


   사찰과 관련된 설화도 곁들인다. 원래 봉복사는 3층석탑이 위치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화재로 소실되자, 원효스님이 중창을 하기 위해 재목을 마련해 마당에 쌓아두었다. 불사가 시작되기 전날, 덕고산 산신령 꿈에 나타나 “사찰의 자리가 이곳이 아니라”고 일렀다.


   스님이 꿈에서 깨어보니 산더미 같던 나무들은 현재 자리에 옮겨져 있었고, 그래서 이곳에  중창했다고 한다.
이 설화는 아마도 절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 같다. 나중에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설화는 절의 명칭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을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을 비롯한 여러 옛 전적들은 봉복사‘봉복사(奉福寺)’ 표기하고 있다. 3층석탑 주변에 있을 때의 명칭이었던 것 같다. 주지스님의 말에 의하면 3층석탑의 위치는 봉황의 머리 부분에 해당된다고 한다. 봉복산 덕고산 줄기가 날개처럼 좌우로 펼쳐지면서 절터를 에워싸고 있고, 또 하나의 줄기가 가운데로 내려오다가 멈춘 자리는 봉황의 머리 부분이다. 그런데 현재의 절터는 머리 부분에서  봉황의 몸 쪽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봉황새의 배’ 부분에 있다는 의미로 ‘봉복(鳳腹)’을 쓴 것이 아닐까?


   안석경은 ‘봉복사(鳳腹寺)’란 명칭을 사용할 때 이곳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시를 한 수 남긴다. ‘봉복사에서 천하지도를 베끼려할 때 느낌이 있어 읊조리다(鳳腹寺 將模天下地圖感詠)’란 시이다.

 

봉복산 산 속 여름밤은 길기만 한데
한 줄기 시냇물 소리 어디로 달리나
임금님 배는 바다에 머물며 소식이 없는데
오랑캐 천막은 하늘에 이어져 오히려 주장하네
중원의 영웅 중 누가 떨쳐 일어날까
우리나라의 의로운 이는 어둠 속에 스러지네
새벽녘에 잠자는 스님 깨워 이야기하고
지도에 글을 적자 한 낮으로 치달리네.


鳳腹山中夏夜長。溪聲一道走何方。
龍舟落海無消息。幕連天尙主張。
五岳英雄誰奮發。三韓義烈暗凋傷。
向晨蹴起眠僧語。且筆輿圖日光。

 

 

 

천진암을 찾아서

태기산4.jpg   『삽교집』에 실린  「덕고산천진사구유기(德高山天眞寺舊遊記)」는 제목에 ‘천진사’라 적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천진암’에서 잤다고 기록하고 있다. 안석경은 천진암과 천진사를 구분 없이 함께 사용하고 있다는. 봉복사를 설명하는 안내판에서 적혀있듯 천진암은 봉복사에 딸린 9개의 암자 중 하나이다. 주지스님께 물어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천진암은 이름만 남긴 채 위치는 오리무중이었는데 우연하게 정보를 듣게 되었다.


   봉복사에서 태기산으로 가기 위해 다시 버스 종점쪽으로 나오다가 ‘혜원네 민박’ 들렸다. 개울가에서 민박을 하시는 주인아저씨는 신대리와 관련된 여러 가지를 알려주신다. 그 중 눈에 띨만한 것이 천진암에 대한 것이다. 봉복사가 위치한 곳에서 계곡으로 더 들어가면서 여러 절이 있었으며, 천진암터봉복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개울가 그늘막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함께 천진암터로 향했다. 봉복사를 지나면서 오른쪽으로 몇 백 미터 들어서니 인삼밭이 나타난다. 바로 인삼밭 끝부분이 천진암터라고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예전에 밭은 절의 소유였었는데, 어떤 주지스님이 개인에게 팔았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리고 천진암터에서 기와파편 등을 몇 개 주운 기억도 있다고 한다. 절터로 직접 가서 현장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인삼밭의 경비가 엄격한지라 사진만 찍고 아쉬움을 뒤로 할 수밖에 없었다. 머리를 돌리니 봉복사 경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귀가하여 지도를 검색해보니 ‘천진암골’이란 지명이 반겨준다. 

 

 

 

산양바위라 불리는 태을단

태기산5.jpg    안석경의 글에 “천진암(天眞菴)에서 잤는데, 천진암은 깊고 험한 골짜기에 임해 있다. 앞에 높은 바위가 있는데 태을단(太乙壇)이라 한다. 태을단에는 큰 소나무가 있다.”라는 대목이 있다. 태을단은 어디에 있을까? 태을단에 대해서도 민박집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서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천진암 주변에 있을 거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아저씨는 천진암에서 계곡을 따라 야산에 올라가서 태기산 쪽을 바라보면 커다란 바위가 보인다고 한다. 이 주변에 커다란 바위는 그곳 밖에 없기 때문에 그 바위를 지칭하는 것일 거라고 한다. 처음엔 의아해 했으나, 태을단에 큰 소나무가 있다는 대목을 다시 읽고, 생각보다 바위의 규모가 큰 것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골계곡으로 향했다. 산성이 있기 때문에 성골이라고 한다. 한계산성이 있는 설악산의 계곡도 성골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시내를 따라 풍광이 좋은 곳은 펜션이 어김없이 들어섰다. 성골은 큰 성골과 작은 성골 나뉘는데, 큰 계곡인 큰 성골로 계속 들어가니 깊은 산골이다. 이곳에서 산으로 올라가면 태기산성이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횡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섬강의 발원지 태기산에 있으며, 그 발원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눈앞에 보이는 계곡물이라고 설명해주신다.     
   조금 더 올라가니 바위라기보다 조그만 바위산이라고 할 수 있는 바위덩어리가 우뚝 솟아있다. 바위틈엔 소나무뿐만 아니라 다른 나무들도 무성하다. 바위 옆 계곡으로 올라가면 태기산성이 있다고 한다. 일반적인 등산로는 아까 지나왔던 송덕사 입구가 출발점이지만, 바위 옆 계곡길은 주민들이 이용하는 지름길이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산양바위라 부른다. 이유를 물으니 예전에 산양이 바위 주변에서 자주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도에도 산양바위라고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안석경은 이 바위를 ‘태을단’이라고 불렀다. 왜 태을단이라고 불렀을까? 안석경도 바위 이름이 ‘태을단’이라고만 한 채 입을 다물고 있다. 주민들께 물어봐도 시원스레 말해주는 분이 없다. 혹시 태기산성과 관련이 있진 않을까? 바위에 뿌리박고 있는 소나무 위로 구름만 보일 뿐이다. 

 


 
《참고문헌》


안석경, 「삽교집」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
「여도서」

 


권혁진 강원한문고전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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